율이는 손을 저으며 말했다.“저는 안 돼요, 오빠. 저는 아무것도 모른다고요.”법로의 지위를 물려받는 것은 좋은 일이긴 했지만, 법로가 이유 없이 물러날 리는 없었다. 이 일은 신무열을 시험하기 위한 것일 수도, 혹은 자신을 시험하기 위한 것일 수도 있었다. 어쨌든 지금은 이 문제에 휘말려서는 안 되었다.신무열은 웃으며 말했다.“모르면 배우면 되지. 너는 항상 빨리 배웠잖아?”법로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나며 말했다.“너희를 이 자리에 부른 건 서로 책임을 돌리라고 한 것이 아니다. 형제자매로서 서로를 더 많이 지지해야 지. 율아, 이전 기억은 생각나지 않아도 괜찮다. 앞으로가 더 중요해. 연회 때는 Y국의 좋은 인재들을 너희에게 소개해 주마.”선택의 여지가 없는 결정이었다.율이는 식사 내내 억눌린 분노를 참으며 가까스로 식사를 마쳤다. 그리고 서둘러 자신의 거처로 돌아왔다.김무명에게 노석명을 불러달라고 전하려 했지만 노석명이 먼저 찾아왔다.노석명은 침울한 눈빛으로 말했다.“신무열 앞에서는 조심해!”“장로, 그게 무슨 뜻이죠?”율이는 이해할 수 없었다.법로가 자신을 부족원들에게 공개하려는 것은 알지만 이제 자신의 정체는 영지 내 모든 이들이 알고 있었다. 그녀는 법로의 딸이자 명실상부한 아가씨였다. 신무열과 특별히 관계가 가까운 것도 아니었고 그가 자신을 싫어하는 것도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왜 그 앞에서 조심해야 하는 걸까?노석명은 차가운 표정으로 말했다.“신무열은 온지유와 자신의 유전자 검사를 진행하고 있어.”그는 실험실을 떠나려던 참이었다. 하지만 혈액이 요한에 의해 전달되고 또한 그가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았다. 요한은 신무열의 충성스러운 부하로 오직 신무열만을 위해 일했다.율이는 크게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노석명이 이 사실을 알게 된 이상 이 일은 그대로 진행되어서는 안 된다.율이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녀의 눈빛에 싸늘한 기색이 스쳤다.“나는 온지유가 이곳을 살아서 나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을 거예요
온지유는 입술을 깨물고는 신무열 곁으로 다가갔다.“무열 씨는 법로의 아들이니까 여이현의 독에 대해 잘 알고 있잖아요. 그러니까...”“아니요. 저는 해독제를 가져다줄 수 없어요.”온지유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신무열이 말을 끊었다. 온지유는 신무열이 차가운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을 보고는 직접 법로를 찾아가라는 뜻임을 눈치챘다.법로는 극악무도한 사람이라 잘못 엮이게 되면 여이현은 온지유과 등질 수도 있었다. 온지유는 심호흡하고는 입을 열었다.“저랑 여이현은 잘못한 게 없는데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건가요?”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흘려보내고 앞을 내다보아야 했다. 신무열은 온지유를 지그시 쳐다보았다. 온지유는 진심으로 말했고 절박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검증하기 전에는 반항하더니 이제 와서 갑자기 저런 말을 한다고? 온지유도 참 이상한 사람이라니까.’신무열이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독은 탄 건 제가 아니니 아무리 말해도 소용없어요.”“율 아가씨 오셨어요.”온지유가 뭐라고 말하려는데 문밖을 지키던 수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온지유는 저도 모르게 신무열을 힐끗 쳐다보았지만 신무열은 아무런 표정 변화도 없었다. 온지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곧바로 여이현 곁으로 다가갔다. 이때 신무열이 온지유의 팔목을 잡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저랑 같이 만나러 가요. 서로 오해한 것이 있다면 풀고요.”온지유가 대답하기도 전에 신무열한테 끌려갔고 율이 준비한 물건을 들고 걸어왔다.“오빠, 이건 김명무가 사준 건데 화국에서 유명한 떡이래. 오빠랑 같이 먹으려고 가져왔어.”신무열은 차분하게 말했다.“두 사람 사이에 오해가 있다면 지금 이 자리에서 풀어요.”“저는 할 말 없어요.”온지유는 차갑게 대답했다.‘날 여러 번 죽이려고 시도한 사람이랑 무슨 오해...’그러나 율은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난 말하지 않으면 몰라. 혹시 오해한 것이 있다면 지금 말하는 게 나아. 난 적보다 친구가 더 많아졌으면 좋겠거든.”율의 검은색 눈동자에 광기가 스
율은 기대에 찬 눈빛을 하고 신무열을 쳐다보았다. 신무열은 차갑게 웃더니 입을 열었다.“그래서 온지유가 굽히고 들어오지 않으면 계속 이대로 지내겠다는 뜻이야?”“맞아.”율이 주먹을 꽉 쥐면서 대답했다.“그럼 네가 직접 얘기해.”신무열은 처음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던 여동생을 도와줄 생각이 없었다. 율의 성격과 행동마저 눈에 거슬렸다. 온지유가 팔목에 끼고 있던 푸른 구슬을 보고 한편으로 기대하고 있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검증 결과에 누군가가 손을 댄 게 아닌가 싶었다.하지만 검증 내내 요한이 감시하고 있었기에 검증 결과를 조작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게다가 아무도 신무열과 온지유가 검증한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신무열은 곧바로 뒤돌아서 갔고 신무열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율의 눈빛이 점점 어두워졌다. 율은 신무열 앞에만 서면 한없이 작아졌다. 법로가 두 사람의 식사 자리를 마련해주었을 때도 그렇고 지금 율이 직접 부탁했을 때도 신무열은 여전히 차가웠다.두 사람 모두 어머니의 자식인데 왜 차갑게 대하는지 율은 이해할 수 없었다. 율은 신무열에게 강요할 수 없었기에 다른 방법을 생각해 내야만 했다.한편, 온지유는 여이현 곁을 지키고 있었다. 여이현을 바라보면서 다급히 물었다.“이현 씨, 괜찮아요? 어디 불편한 곳은 없어요? 목마르면 물을 가져다줄까요? 배고프지는 않고요?”온지유가 계속해서 물었지만 여이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여이현은 그저 온지유의 얼굴을 쓰다듬어주고 싶었다. 여이현은 떨리는 손을 가까스로 들어 올리면서 말했다.“지유야, 미안해.”“왜 미안하다고 하는 거예요? 이현 씨가 중독된 것을 눈치채서 그래요?”온지유는 갈라지는 목소리로 물었다. 여이현은 뭐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목이 아파서 결국 대답하지 못했다. 부인할 수 없었던 것은 온지유의 말이 사실이었기 때문이다.여이현은 모든 것을 비밀에 부치고 조치를 취한 뒤에 멀리 떠났다. 여이현이 직접 책임져야 할 일이기도 했고 멀리 떠나서 해독제를 찾으려고 했던 것이다. 하지만 온지유는 여이현을
하지만 여이현의 마음은 여전히 아팠다. 여이현은 심호흡한 뒤, 애써 미소를 지으면서 온지유의 얼굴을 매만졌다. 마음의 준비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절망스러웠다.“지유야, 난 네가 쉬운 여자가 아니란 걸 알아. 하지만 영원한 것은 없고 변수는 항상 존재해. 넌 앞으로 살아갈 날이 많잖아. 배진호의 도움을 받으면 다 잘 해결할 수 있을 거야.”업무를 보거나 사업을 이어갈 때 곁에 배진호가 있었고 홍혜주도 온지유 곁에 남았기에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다. 하지만 온지유가 Y 국에 오지 않고 경성에서 원하던 삶을 산다고 해도 여이현과 아이가 없는 삶은 여전히 지옥이나 다름없었다.어떤 감정은 너무 복잡해서 아직도 헤어 나올 수 없었다. 게다가 온지유는 평생 나민우에 대한 죄책감을 벗어던질 수 없을 것이다. “지유야, 사랑해.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너를 알기 전으로 돌아가서 널 만나지 않았을 거야.”여이현은 떨리는 손으로 온지유의 손을 잡은 채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따뜻한 말과 차가운 말을 동시에 내뱉는 여이현은 온지유와 스쳐 지나갔다면 온지유를 위험에 빠뜨리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후회했다. 온지유는 문뜩 떠오른 낯선 기억이 분명 예전에 일어났던 일 중 하나라고 여겼다. 이 세상은 운명의 굴레 속에서 이어지기에 그 기억도 무언가를 암시하기 위해 필연적으로 떠오른 것이었다. 온지유는 여이현의 손을 붙잡고 갈라지는 목소리로 말했다.“이현 씨, 지금 말해봐도 소용없어요. 이현 씨는 나의 이상형, 롤모델이자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에요. 할아버지를 구해준 날, 할아버지는 이현 씨와 결혼하라고 하셨죠. 당신을 처음 본 순간, 난 사랑에 빠지고 말았어요.”온지유는 시련으로 가득 찬 인생을 받아들였는지, 아니면 여이현의 진심에 감동했는지 저도 모르게 속마음을 드러냈다. 그동안 온지유는 이런 말을 여이현에게 한 적이 없었다. 여이현도 진심을 드러내지 않았기에 두 사람은 서로 사랑하지 않는다고 오해했었다. 하지만 애틋한 사랑을 오늘에야 알게 되었다. 여이현은 온지유의
온지유는 미간을 찌푸렸고 여이현은 경계하는 눈빛으로 신무열을 바라보았다. 몸이 허약해졌음에도 불구하고 신무열을 바라보는 눈빛에 살기로 가득 찼다.하지만 신무열은 여전히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밖에서는 한창 싸우고 있는데 두 사람은 이 안에서 서로 사랑을 속삭이네요? 그럴 시간에 저한테 인명진이 어디로 갔는지나 말해요.”인명진의 이름을 내뱉는 순간, 신무열의 표정은 삽시에 굳어졌다. 그러고는 차가운 눈빛으로 온지유를 훑어보았고 솟구쳐 오르는 화를 억누르고 있는 것 같았다. 신무열은 겉보기에는 다정한 사람이지만 이럴 때는 악마보다 더 무서운 기운을 뿜어냈다. 인명진을 찾으려 하는 건 인명진이 온지유에게 팔찌를 준 이유와 궁금했던 것에 대한 해답을 듣기 위해서였다. 신무열의 태도는 어느샌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온지유가 얼마 전에 요한한테 맞아서 쓰러졌을 때, 신무열은 무언가를 알아내기 위해 손을 썼을 것이다. 신무열이 갑자기 차갑게 대하는 건 온지유가 원하던 인물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온지유는 긴 한숨을 내쉬었고 의문이 들었다.만약 온지유가 율이 아니라면 인명진이 온지유를 율이라고 부르면서 팔찌를 주었을 리 없었다. 그리고 가끔 떠오르는 낯선 기억 때문에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온지유는 약물 때문인지 기억이 나지 않을 때도 있었고 원래 알고 있던 것과 다른 기억이 떠올랐다.“인명진이 어디에 있는지 저도 몰라요.”온지유는 입술을 깨문 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알고 있다고 해도 자신을 친구처럼 챙겨준 인명진을 배신하지 않을 것이다. 인명진은 온지유를 치료하기 위해 애써주었다.신무열은 여이현을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눈빛에 살기가 돌았고 보는 사람마저 소름이 돋았다. 이때 여이현이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내가 신무열 씨한테 협조할 사람으로 보여요?”여이현은 검은색 권총을 꺼냈다. 신무열이 요한을 통해 여이현과 온지유에게 전달한 호신용 무기였는데 여이현이 권총을 자신에게 겨눌 줄은 몰랐을 것이다. 신무열이 옅은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지금 이러
온지유는 관건적인 인물이었기에 여이현을 보내서 인명진을 불러내야 했다. 신무열은 여이현과 적이 될 생각은 없었고 그저 인명진을 만나고 싶었다. 하지만 적이 되든 친구가 되든 이용할 수 있을 때 이용해야만 했다.온지유는 한참 고민했고 주먹을 꽉 쥐었다. 그러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신무열 뜻대로 할 생각이었다.“만약 인명진에게 연락하고 싶다면 나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을 이곳에서 내보내 주세요.”여이현은 온지유 앞을 막으면서 말했다. 온지유를 혼자 이곳에 두고 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신무열이 갑자기 온지유한테 눈짓하더니 입을 열었다.“여이현 씨를 위해서 저번에 나한테 그걸 물어봤었죠? 원하는 대로 해드릴게요.”온지유만 이곳에 남는다면 여이현, 홍혜주와 나민우를 내보낼 수 있고 여이현한테 해독제를 구해주겠다는 뜻이었다. 그렇기에 이 제안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네, 제가 이곳에 남을게요.”온지유는 여이현이 입을 열기도 전에 신무열을 향해 말했다. 모든 사람이 안전하게 나갈 수만 있다면 기꺼이 맞춰줄 생각이었다.“지유야, 안돼.”여이현은 죽는 한이 있더라도 절대 온지유를 혼자 이곳에 남겨두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러자 신무열이 갑자기 피식 웃더니 입을 열었다.“여이현 씨가 이곳에 남으면 저한테 뭘 줄 수 있나요?”신무열은 여이현이 몰래 이곳에 잠입한 건 온지유를 찾고 나서 이곳의 모든 것을 파괴하기 위해서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여이현은 소대장이었기에 여이현이 잡혔다는 것을 알게 되면 화국에서 가만있을 리 없었다.“여이현 씨, 당신이 할 수 있는 선택은 단 하나예요. 지금 보내줄 때 가요. 그렇지 않으면 두 사람 다 못 나가요.”신무열이 차갑게 말했다. 신무열은 율이 온지유를 데리고 올 줄 몰랐었다. 그래서 요한을 온지유 곁에 두고 온지유가 원하는 것을 들어주었다. 그러면서 천천히 알아내려던 것을 조사하려고 했는데 갑자기 여이현마저 이곳으로 들어왔다.계획이 전부 틀어진 신무열은 잔뜩 화가 난 상태였다.“여이현 씨, 고민할 것
온지유의 협박은 먹히지 않았다. 신무열은 재빨리 온지유의 팔목을 가격했고 권총이 바닥에 떨어졌다. 신무열은 온지유의 목을 조르면서 말했다.“여이현 씨, 그쪽 사람들이 온 걸 내가 모를 줄 알았어요? 그러니까 지금 당장 나가요. 온지유를 구하고 싶으면 인명진을 데리고 오세요.”상황이 이렇게 된 이상, 온지유로 여러 사람의 목숨을 바꾸는 게 나았다. 온지유는 여이현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이현 씨, 얼른 가요! 빨리요!”온지유를 바라보는 여이현의 눈빛에 슬픔이 가득 묻어있었다. 여이현은 온지유를 두고 떠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연이어 울려 퍼지는 폭발음과 함께 군인들이 달려 들어왔다.용경호와 성재민은 위치 추적을 통해 여이현을 찾아냈다.“대장님, 법로와 충돌을 일으키지 말라는 명을 받았습니다.”“이현 씨, 빨리 나가요!”온지유가 소리를 지르자 여이현은 다른 군인이 끌고 나갔다. 얼마 후, 폭격 맞은 이곳은 아수라장이 되었고 소름 돋는 적막이 이어졌다. 신무열이 온지유를 놓아주면서 물었다.“무술을 더 배워볼 생각 없어요?”조금 전에 신무열이 온지유의 손목을 가격할 때, 온지유도 반격했었다. 가장 간단한 호신술을 끊임없이 연마한 온지유는 힘을 조절해서 효과적인 공격을 할 수 있었다.온지유가 차갑게 대답했다.“없는데요.”말을 마친 온지유는 뒤돌아갔다. 여이현이 무척 걱정되었고 자신을 위해 이곳까지 들어온 여이현을 생각할 때마다 마음이 아팠다. 경성으로 돌아간 여이현은 인명진을 찾기 위해 밤낮없이 뛰어다닐 것이다. 하지만 온지유는 인명진을 이 일에 휘말리게 하고 싶지 않았다.온지유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신무열은 뭐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결국 삼키고 말았다.한편, 여이현은 용경호의 손을 뿌리치려고 발버둥 쳤고 용경호를 때리려고 했었다. 용경호와 성재민은 힘을 합쳐 여이현을 제압했고 여이현이 방심한 틈을 타서 들고 뛰었다. 한참 후, 여이현은 부대가 잠시 묵고 있는 천막에서 깨어났다. 여이현은 벌떡 일어나서 온지유를 찾으러 가려고 했다. 이때 용
연결음이 한참 울리고 난 뒤에야 인명진이 전화를 받았다. 그런데 전화를 받은 인명진의 상태가 좋지 않은 것 같았다.“무슨 일로 전화했어요?”“지유가 법로한테 감금당했어요.”여이현은 갈라지는 목소리로 말했고 깜짝 놀란 인명진은 다급히 물었다.“뭐라고요?”인명진은 솟구쳐 오르는 화를 참지 못하고 큰 소리로 말했다.“여이현 씨, 온지유를 꼭 보호해 주겠다고 저랑 약속하지 않았나요?”게다가 온지유 곁에는 홍혜주도 있었다. 여이현은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목에 무언가가 걸린 것처럼 말이 나오지 않았고 표정이 점점 굳어졌다.온지유가 감금당한 건 여이현이 무능해서였다. 그렇지 않으면 온지유가 중독될 일도 없었고 사랑스러운 아이와 이별하지 않아도 되었다.“신무열이 인명진 씨를 만나고 싶대요.”“알겠어요.”인명진은 덤덤하게 대답한 뒤 전화를 끊었다. 인명진은 온지유가 다치지 않게 보호해 주러 갈 것이다. 한편, 온지유는 노예 수용소가 아닌 신무열이 있는 곳으로 거처를 옮겼다. 가장 좋은 음식을 대접받았고 신무열은 새 옷을 선물해 주었다. 온지유는 신무열이 인명진을 만나기 위해 여이현을 조종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면서 온지유의 안전을 보장했기에 굳이 마다할 필요가 없었다. 온지유는 새 옷으로 갈아입고 맛있는 밥을 먹었다. 그런데 갑자기 나타난 법로 때문에 깜짝 놀랐다. 법로는 소름 돋는 가면을 쓰고 있었고 두 손을 허리 뒤에 진 채 온지유를 지그시 쳐다보고 있었다. 법로의 조사에 의하면 온지유는 성형하지 않은 자연 미인이었기 때문이다.온지유는 평범한 가정에서 자랐고 어머니 정미리, 아버지 온경준과 함께 지냈었다. 그리고 여이현과 결혼해서 잘 살고 있었다.“네 남편 때문에 하마터면 우리 부대가 전멸할 뻔했어. 이런 예쁜 아내를 두었으니 그럴 만도 하지. 내 아들이 너를 관심하는 것도 이해되더라고...”법로가 낮은 목소리로 온지유를 향해 말했다. 온지유는 법로를 힐끗 쳐다보고는 고개를 돌렸다. 법로의 가면이 소름 돋기도 했고 법로의
일주일 만에 권다솔은 많은 일을 해냈다.그녀의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업무 태도는 이미 팀장의 인정을 받았다.“내일 고객을 만나러 가는데 지연 씨도 같이 가죠.”“네? 제가 정말 가도 되나요?” 그녀는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이전에 그녀는 여이현의 비서로 일했던 경험이 있다 보니 혼자서도 충분히 고객을 만나러 갈 수 있었다.하지만 회사에 들어온 지 겨우 일주일 만에 아직 수습 기간도 지나지 않은 짧은 시간 안에 고객을 만날 기회를 준 걸 봐서는 팀장이 그녀를 얼마나 인정하는지 알 수 있었다.“물론이죠. 지연 씨의 업무 능력을 지켜본 결과 저보다 더 뛰어난 것 같은데요. 고객을 만나는 건 당연히 가능하죠.”팀장은 그녀를 전적으로 믿었다.고객을 만나기 전에는 많은 준비 작업이 필요했다. 팀장은 프로젝트 자료를 모두 그녀에게 메일로 보내 주었다.권다솔은 그렇게 오랜만에 메일을 열게 되었다.팀장이 보낸 파일 외에 배진호가 보낸 메일이 눈에 들어왔다. 바로 삭제하려 했지만 손이 미끄러지는 바람에 메일을 열어버렸다.이미 열린 김에 그가 무슨 말을 보냈는지 확인해 보기로 했다.그녀는 처음부터 끝까지 꼼꼼히 읽다가 마지막 부분을 보게 되었을 때 깜짝 놀라고 말았다.그날 밤 그녀와 함께 있었던 사람이 배진호란 말인가?그럼 남태건이 했던 말은 또 무슨 뜻이지?권다솔은 배진호를 차단 목록에서 해제하려는 순간 아빠가 전화를 걸어와 그녀를 사무실로 호출했다.문을 열자마자 화가 잔뜩 난 권용민의 얼굴이 보였다.“아빠, 무슨 일이길래 이렇게 화가 나셨어요?”권다솔은 그의 어깨를 주무르며 말했다.“진정하세요. 저녁에 제가 맛있는 음식을 해줄게요.”“나랑 네 엄마가 전에 정말 어리석었어. 어린애한테 속아서 완전 농락당했지 뭐니. 네가 그 녀석이랑 엮이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지. 아니었으면 불구덩이에 뛰어드는 꼴이었을 거야.”남태건 얘기만 나오면 권용민은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그의 이름조차 부르고 싶지 않았다. 권다솔이 의아해하자 그는 두툼한 서류 뭉치를
그녀는 단순히 남태건을 비웃은 게 아니라 자신마저 비웃었다.정말로 몇 번이나 사람을 너무 쉽게 믿었다.“신뢰란 누가 주는 게 아니라 스스로 쟁취하는 거예요. 이제 그만 가세요. 부모님께 무릎을 꿇는 건 괜찮지만 저한테 이렇게까지 하는 건 정말 아니에요.”“권다솔!”남태건은 다시 손을 뻗어 그녀의 옷자락을 꼭 붙잡았다.그는 손에 힘을 가했다. 혹시라도 손을 놓는 순간 그녀를 영원히 잃게 될까 봐 두려웠다.“어서 돌아가요. 앞으로 태건 씨만의 인생을 사세요. 저도 제 인생을 살 거예요. 이미 말했잖아요. 우리 둘은 친구조차 될 수 없다고.”권다솔은 아예 외투를 벗어버렸다.남태건의 손에는 외투만 남아 있었고 아무것도 붙잡지 못했다.그는 그녀가 부모님과 함께 집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그저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김영은은 몇 번이나 뒤를 돌아봤지만 하려던 말을 애써 삼켜버린 채 그의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졌다.집에 돌아온 권다솔은 부모님께 아까 얘기는 하지 않고 곧바로 회사 얘기를 꺼냈다.“아빠, 엄마. 오늘 오후부터 바로 회사로 가서 일하고 싶어요. 직책은 정해 놓으셨어요?”“굳이 이렇게 서두를 필요 없어. 이틀 정도 푹 쉬어라.”비록 권용민은 모든 준비를 마쳤지만 막상 그녀가 출근하려 하니 마음이 약해졌다.아직 회사에 들어가지 않은 상태라면 자유롭게 놀 수 있었지만 정식으로 출근하게 되면 다른 직원들처럼 매일 출근 도장을 찍어야 했고 함부로 결근할 수 없는 생활이 될 터였다.“아빠 머리에도 이제 흰머리가 있네요.”그녀는 손을 뻗어 그의 흰머리를 뽑아주었다.권용민은 여전히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몇 가닥뿐이야. 나도 거울 보면서 봤어. 내 나이에 흰머리 있는 건 정상이지.”“관리를 잘하면 아빠 나이엔 여전히 까만 머리를 유지할 수 있어요. 제가 걱정되는 건 알겠지만 언제까지 아빠 엄마의 보호 아래서 살 수는 없잖아요. 이제는 제가 아빠 엄마를 돌볼 때예요.”그녀는 부드럽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권다솔의 강력한 요청에 권용민
“병이 있는 사람이 치료를 받는 건 생명을 연장하려는 거고 병이 없는 사람이 치료를 받는 건 장수하는 사람이 목을 매달겠다는 거나 다름없지. 그냥 속이려고 한 말이야.”정미진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자식은 결국 부모를 이기지 못하는 법이지.’그는 원래 배진호가 이미 의료비를 납부했다고 말하려 했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돈을 냈건 안 냈건 그녀가 병이 없는 이상 제대로 된 환자처럼 치료를 받을 리 없었다.그리고 배진호에게 의료비를 환불하면 명백히 어떤 속임수가 있다는 걸 드러내는 꼴이었다.고민 끝에 그는 묘안을 생각해 냈다.“이렇게 할까? 매일 약을 가져다줄 테니 먹지 말고 수액도 맞지 마. 그럼 혹시라도 네 아들이 물어보면 우리 둘 다 곤란하지 않을 거야.”“그래, 네 말대로 할게. 역시 의사라 그런지 머리가 참 좋네.”그녀는 자신에게 큰 재앙이 닥쳐오고 있다는 걸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비행기에서 내린 뒤 권다솔은 바로 집으로 향했다. 남태건은 평소처럼 손에 크고 작은 선물을 들고 그녀의 부모님께 극진히 대하고 있었다.그녀의 부모님은 예전과 달리 그에게 예의를 갖췄지만 거리감을 유지하며 말했다.“태건아, 우리한테 이런 거 줄 필요 없어.”“마음만 고맙게 받을게. 돈이 꽤 들었을 텐데 우린 답례로 줄 것도 없으니 그냥 안 받는 게 낫단다.”남태건은 말에 숨긴 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그들은 지금 그를 전혀 반기지 않았고 자주 만나는 것도 원치 않았다. 결혼 얘기는 더더욱 바라지 않는 듯했다.그가 더 애써 만회하려 하면 할수록 김영은은 더욱 단호하게 말했다.“그만 돌아가.”“제가 뭐가 부족한지 말씀만 해주세요. 다 고치겠습니다. 제발 이렇게 단번에 거절하지 말아 주세요.”남태건은 무릎을 꿇으며 애원했다.너무 갑작스러운 나머지 둘은 깜짝 놀란 채 그를 일으키려 했다.하지만 남태건은 끝까지 무릎을 꿇고 꼼짝하지 않았다.“만약 아무 말씀도 안 하시고 저를 쫓아내신다면 계속 무릎 꿇고 있을 겁니다.”“태
정미진은 순간 당황했다.그동안 배진호가 모든 걸 양보했던 이유는 그녀가 병에 걸렸기 때문이었다.만약 그가 진실을 알게 된다면 분명 크게 소란을 피울 것이고 결국 권다솔과 다시 만날 가능성도 있었다.이런 가능성을 떠올리자 정미진은 두 눈이 깜깜해졌다.“진호야, 엄마 말 좀 들어봐.”“사실이 이렇게 뻔히 드러났는데 뭘 더 설명하시겠다는 거예요? 나이도 있으신 분이 어찌 이렇게 어린애처럼 구세요?”배진호는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이런 걸로 농담하면 안 되죠.”의료 기록에는 명확히 병명이 적혀 있었고 게다가 이미 전문가와 상담한 후였다.더 이상 시간을 끌면 안 되는 병이었다.지금 수술을 받으면 완치 후 정상적인 생활이 가능하지만 조금만 더 늦추면 수술해도 병상에서 벗어나지 못할 수도 있었다.그는 정미진을 그대로 방치할 수 없었다.“내가 이러는 것도 다 너 잘되라고 그런 거야. 네가 내 속을 좀 덜 썩이면 이렇게까지 거짓말할 필요도 없잖니.”정미진은 더 이상 변명이 통하지 않자 모성애라는 명분을 내세워 배진호를 압박하려 했다.장황하게 이유를 늘어놓으며 말했지만 그는 예상과 달리 소리를 지르거나 격하게 화내지도 않았다. 그저 병상 앞에 서서 슬픈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엄마가 원하던 건 전부 이루셨잖아요. 이젠 제발 말 좀 들으세요. 의사 선생님 말씀대로 치료받으세요.”그제야 정미진은 깨달았다.그는 그녀가 수술을 받지 않았다는 사실은 알아냈지만 그녀가 병에 걸리지 않았다는 사실은 몰랐다.‘그거면 됐지!’그녀는 계속해서 이 핑계로 배진호에게 자신이 원하는 것을 강요할 수 있었다.정미진은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말했다.“그럼 권다솔과 이혼해. 네가 이혼 서류를 엄마 앞에 가져오는 날부터 엄만 치료받을게.”“이미 이혼 절차는 끝냈어요. 지금은 이혼 숙려 기간일 뿐이에요.”배진호는 차분히 설명했다.어쩔 수 없이 이렇게 말해야 했다. 혹시라도 그녀가 화를 내면 몸을 전혀 돌보지 않을 게 뻔했기 때문이다.“눈앞에 이혼 서류가
“도대체 누가 밖에서 헛소문을 퍼뜨린 거야! 진짜 사람을 이렇게 괴롭혀도 되는 거니?”김영은은 화를 참지 못하고 소리 질렀다. 그녀는 소문을 퍼뜨린 계정을 찾아내면 꼭 고소해서 법적 책임을 묻겠다고 단단히 결심했다.“불난 집에 부채질한 거겠죠. 전 누구 소행인지 알 것 같은데요.”권다솔은 이미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다.과연 그 사람 말고 누가 이런 일을 저지를 수 있을까?권용민은 다급하게 물었다.“누군데? 아빠한테 말해봐. 가만두지 않겠어.”“남태건이요.”권다솔은 덤덤하게 내뱉었다.순간 전화 너머로 정적이 흘렀다.둘은 서로 눈을 마주치더니 믿기 어렵다는 눈빛이었다.남태건은 평소 평판이 좋은 사람이었고 권다솔에게도 진심으로 대했으며 둘을 친부모처럼 공경했다. 그런 사람이 어떻게 이런 일을 뒤에서 꾸밀 수 있단 말인가?권다솔 역시 부모님이 쉽게 믿지 않을 걸 알았다. 그래서 한 마디 덧붙였다.“태건 씨는 늘 저와 결혼하고 싶어 했어요. 우리 집 문을 한참이나 두드리면서 이웃들까지 다 소란스럽게 만들었고 제가 거절하자 엄마, 아빠를 찾아갔잖아요. 지금은 엄마, 아빠까지 거절했으니 극단적인 행동을 벌이는 것도 이상하지 않죠.”“그런데, 다솔아, 우리한테 증거가 없잖아. 증거도 없이 태건이를 탓하는 건 너무 불공평한 것 같아.”그녀의 어머니는 망설이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마 남태건을 오해하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만약 정말로 남태건이 이런 일을 저질렀다면 지금까지 꾸며낸 이미지로 그들을 속여 왔다는 뜻이었다.그런 사람을 딸에게 소개하려 했다는 사실에 그녀는 큰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결국 권용민이 결정을 내렸다.“좋아. 다솔이 넌 밖에서 편히 놀다가 돌아와. 엄마랑 아빠가 조사해 볼게. 만약 정말로 태건이의 소행이라면 앞으로 우리 집 근처에도 못 오게 할 거야.”“아니에요. 저도 티켓 끊고 바로 돌아갈게요. 엄마, 아빠가 제 일 때문에 계속 신경 쓰시는 게 너무 죄송해요. 밖에서 논다고 해도 마음이 편치 않을 거예요.”그녀는
배진호는 이 시간에 잠들지 않았다.그는 이미 조사 자료를 손에 넣은 채 한 장 한 장 넘겨 보고 있었다.마지막까지 다 보고 난 그는 도대체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랐다.어머니의 수술은 가짜였지만 병은 진짜였다. 그의 어머니는 현재 폐암 초기 상태였고 심장 상태도 별로 좋지 않았다. 게다가 두 병이 함께 겹친 상황이라 치료하기 쉽지 않을 게 분명했다.이런 상황인데도 어머니는 수술을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그에게 계속해서 권다솔과 헤어지라고 압박하고 있었다.배진호는 내일 어머니와 진지하게 이야기해 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잠 자기 전 시간을 확인하려고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그렇게 남태건이 이 시간에 보낸 도발적인 메시지를 보게 되었다.그 순간, 배진호는 온몸의 혈액이 멈춘 듯한 느낌을 받았다.남태건과 권다솔이 결혼한다고?이미 실시간 검색어에 올랐다면 틀림없이 사실일 것이다.하지만 이게 권다솔 본인의 뜻인지 아니면 그녀의 부모님께서 결정한 건지는 알 수 없었다.아마도 전자일 가능성이 컸다. 권다솔의 부모님은 딸의 의견을 존중하는 분들이다. 만약 그녀가 원하지 않았다면 그들이 강제로 결혼 시킬 리 없었다.‘왜 이런 일은 항상 나한테만 일어나는 거지?’그는 권다솔을 포기할 수도 그렇다고 그녀의 결혼을 망칠 수도 없었다. 이제 두 사람은 정말 인연이 아닌 것 같았다. 그만 집착을 버리고 놓아주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생각했다.잠들기 전, 배진호는 권다솔에게 메일 한 통을 보냈다. 메일의 마지막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난 술집에서의 그날 밤을 잊을 수 없어. 네가 내 목에 팔을 두르고 내 이름을 부르던 그 순간을. 다솔아, 네가 정말 날 싫어한다면 이 메일을 삭제해 줘. 앞으론 더 이상 널 방해하지 않을게. 하지만 언제든 네가 날 찾고 싶다면 난 항상 그 자리에 있을 거야.”배진호는 권다솔이 메일을 확인하는 습관이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녀가 이 메일을 발견할 때쯤이면 아마 한참 시간이 흐른 뒤일 것이다.어쩌면 그녀는 이 메일을 평생 보지 않을
남태건은 그들이 참으로 안타깝게 느껴졌다. 사랑하는 사람과 끝까지 함께하지 못한 결말이란 결국 이런 것이었다.그는 절대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남태건은 자신이 권다솔을 얼마나 깊이 사랑하는지 알고 있었다. 결혼 후에는 매일 밤 집으로 돌아와 그녀와 오붓한 시간을 보낼 것이고 만약 아이를 가지게 된다면 셋이 함께 여행을 다니며 행복한 가정을 꾸릴 것이다.그는 자신의 결혼 생활이 부모님의 결혼 생활보다 훨씬 더 행복하리라 확신했다.“제 결혼 문제에 대해서는 간섭하지 마세요. 오늘 두 분을 부른 이유는 단지 이 소식을 알리기 위해서입니다. 며칠 안에 양가 부모님이 만나서 함께 식사할 테니 저의 체면을 깎지 말아 주세요.”말을 마친 남태건은 몸을 돌려 떠났다.그는 더 이상 부모와 할 이야기가 없었다.이후 그는 권용민에게 연락해 식사 날짜를 논의하려 했다. 그러나 권용민은 미안한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미안하네. 우리 다솔이가 여행을 떠나서 언제 돌아올지 모르겠네. 식사 약속은 다음에 다시 잡도록 하지.”그는 권용만의 말 속에서 거절의 의미를 느낄 수 있었다.다음에 다시 논의하자는 한마디는 구체적인 날짜를 말하지 않았기에 즉 식사 약속을 잡고 싶지 않다는 뜻이었다.“아버님, 다솔이가 돌아오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양가 부모님께서 먼저 만나도 되지 않겠습니까?”그러나 남태건은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이미 자신의 부모님께 이야기를 전했는데 이 약속이 무산된다면 그의 부모님께서 어떻게 생각하겠는가?그러나 권용만운 딸의 행복을 최우선으로 여겼다.“태건아, 양가의 만남은 중요한 일이라 서두를 필요 없어. 다솔이가 돌아오면 의견을 들어보고 결정하자. 이런 일은 신중하게 처리해야 하네.”남태건은 어떻게 전화를 끊었는지조차 기억나지 않았다.그가 유일하게 확신할 수 있는 건 권다솔이 그를 피하려고 멀리 떠났을 뿐만 아니라 그녀의 부모님마저 이전처럼 친절하게 대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그렇다면 이제 남은 방법은 하나뿐이었다.‘권다솔, 모든 건
그리고 엄마가 아프다는 시점도 너무 절묘했다. 설마 아픈 척하는 건가?이럴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에 배진호는 아무 말 없이 자리를 떴다. 반드시 철저히 조사해야 했다.그가 떠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배진호의 어머니는 잠에서 깨어났다.아들의 의심을 불러일으킨 것도 모른 채 여전히 의사와 대책을 논의하고 있었다.“내 아들 앞에서 꼭 내 병이 심각한 것처럼 말해줘야 해. 안 그러면 걔 마음이 여전히 그 여자한테 기울어 있을 거야.”“걱정 마. 동창끼리 네 계획을 망치기라도 하겠어?”의사는 가슴을 두드리며 장담했다.“내가 다 맡을 테니 신경 쓰지 마. 그런데 사실 나도 부탁이 하나 있는데 우리 아들이 유학을 가야 하는데 돈이 조금 모자라거든. 좀 도와줄 수 있어? 올해 보너스 나오면 바로 갚을게.”정미진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흔쾌히 승낙했다.어차피 그녀는 돈에 쪼들리지 않았으니.배진호가 비서로 일할 때부터 매달 월급 일부를 그녀에게 보내왔고 이후 그가 회사를 차려 독립하면서 더 많은 돈을 보내왔다.그녀는 사고 싶은 것을 마음껏 사면서 이제는 좋은 며느리를 얻는 데만 집착하고 있었다.“돈은 천천히 갚아도 돼. 여유가 생기면 갚아. 동창 사이인데 내가 너를 믿지 않겠어?”그녀의 말에 의사는 기쁘게 고개를 끄덕였다.병실을 나선 의사는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렸다.“사람이 참 복에 겨워 사는 줄 모르네. 배진호 같은 아들에, 그토록 훌륭한 며느리까지 얻었는데 뭐가 불만이야? 게다가 그 집안의 돈은 몇 대가 써도 부족함이 없는데 굳이 문제를 만들 필요가 있나? 나라면 절대 그러지 않았을 거야. 그냥 일도 때려치우고 집에서 술이나 한잔하면서 낚시도 하고 가끔은 카드놀이도 하면서 살겠지. 생각만 해도 얼마나 여유롭겠어?”하지만 그는 정미진이 아니었고 방관자로서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다음 날 아침, 권다솔은 간단히 짐을 챙긴 후 캐리어를 끌고 여행사로 향했다.그곳에는 대형 버스가 대기하고 있었고 모든 인원이 모이자 운전기사는 공항으로
지금 그의 모습이 헌신짝이랑 다를 게 뭐가 있지?권다솔 때문에 이렇게까지 할 가치가 있을까?배진호는 전혀 그녀의 말을 듣지 않았다.그는 여전히 석규리를 등진 채 그녀를 무시했다.석규리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해도 소용없다는 것을 깨닫고 결국 다른 사람의 도움을 청하기로 했다.한 통의 메시지를 보낸 뒤 불과 30분도 채 되지 않아 배진호의 어머니가 직접 나타났다.정미진을 본 순간 배진호는 정말 미칠 것만 같았다.“엄마! 몸도 안 좋으신데, 게다가 이제 막 수술을 끝내셨잖아요. 퇴원하시면 어떡해요?”“내가 와서 다행이지! 아니면 네가 여기서 얼마나 더 멍청하게 서 있었을지 몰라. 진호야, 엄마가 곧 죽게 생겼는데 너 정말 엄마를 좀 편하게 보내줄 수 없는 거니?”정미진은 배진호의 이마를 꾹 눌러가며 안타까워했다.권다솔의 가정환경이 조금이라도 평범했다면 돈으로 해결했을 것이다.하지만 권다솔은 권씨 가문의 아가씨로서 정미진이 아무리 손을 뻗어도 권씨 가문까지 닿을 수 없었기에 결국 배진호에게만 압박을 넣을 수밖에 없었다.“엄마가 부탁할게. 죽기 전에 몇 날이라도 좀 조용히 지낼 수 있게 해줘. 더 이상 문제 일으키지 말고 권다솔과 깨끗이 끝내. 네가 꼭 여기에 남아 있겠다면 엄마도 너랑 같이 있을 거야.”정미진은 외투를 벗어 석규리의 손에 건넸다.그녀는 안에 얇은 옷만 입고 있었다.석규리가 옷을 다시 정미진의 어깨에 덮어주려고 했지만 정미진은 단호하게 거절했다.“엄마가 아들 교육을 제대로 못 시킨 탓에 내 아들이 한밤중에 여기서 바람 맞고 있잖아. 나만 병실에서 잘 먹고 편히 있을 수는 없지 않겠어?”“엄마, 정말 제가 무릎이라도 꿇어야 멈추시겠어요?”배진호의 눈에는 이미 생기가 없어진 채 허망한 표정으로 바라봤다.역시나 자신에게 가장 큰 상처를 주는 사람은 가장 가까운 사람이라는 사실을 다시금 깨달았다.“진호야, 엄마는 네가 무릎 꿇으라고 이러는 게 아니야. 엄마가 원하는 건 네가 권다솔과 완전히 끝내는 거야. 이게 엄마의 마지막 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