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 근데 나도 도움이 필요해. 너... 여기 오래 있었지?”온지유는 여자아이의 어깨를 잡았다. 그녀는 진심으로 여자아이를 도와주고 싶었다. 물론 그 대가로 받을 것도 있었다.“네, 오래 있었어요. 약물에 면역이 된 덕분에요. 저 정말 무서워요. 죽어가는 사람을 너무 많이 봤어요.”“이해해. 너 여기서 지내는 동안 홍혜주라는 사람을 만난 적 있어?”온지유의 머릿속에는 홍혜주와 나민우를 찾아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두 사람이 살아있는지조차 모르는 상황이니 말이다.여자아이는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이름은 관리인만 알고 있어요. 저희한테는 말할 기회도 별로 없어요. 실험은 끝이 없고요.”온지유는 침묵에 잠겼다. 역시 요한에게 부탁한 것이 옳았다.“혹시 사람을 찾으러 일부러 들어온 거예요?”여자아이도 눈치가 빨랐다. 온지유는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응, 하지만 다른 이유도 있어. 우리가 잘 협력하면...”온지유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여자아이가 말을 잘랐다.“협력할 게 뭐 있어요? 언니 블랙카드 있잖아요. 빨리 저랑 같이 나가요. 여기서 벗어나는 게 우선이에요. 설마 여길 폭파라도 하려는 건 아니죠?”온지유는 어이없어하며 대답했다.“그런 건 불가능해.”그녀에게는 그럴 능력이 없었다. 그녀는 그저 홍혜주와 나민우를 찾아서 함께 탈출하고 싶었을 뿐이다.여자아이와 대화를 나누는 중 멀리서 기침 소리가 들려왔다.“큼큼.”여자아이는 얼굴이 창백해져서 입을 다물었다. 온지유는 요한이 문 앞에 서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의 눈빛이 여자아이에게로 향했다.“너, 당장 제자리로 돌아가!”이 방은 온지유를 위해 마련된 독립된 공간이었다. 여자아이는 단순한 노예였기에 이런 대접을 받을 자격이 없었다.하지만 온지유는 여자아이를 뒤로 끌어당기며 말했다.“제가 데려오라고 했어요.”요한은 입술을 다물고 잠시 침묵한 후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방금 유젠한테 물어봤는데 그 두 사람 여기에 없어요.”‘없다고? 그럴 리가!’모든 증거가 두 사람이 이
남자 역시 온지유를 지켜보고 있었다.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온지유는 남자의 눈빛이 마치 밝게 빛나는 달빛 같다고 생각했다. 분명 처음 보는 얼굴인데도 이상하게도 그 남자에게서는 말 못 할 익숙함이 느껴졌다.온지유는 곧 시선을 돌렸다.남자의 시선 깊은 곳에서는 거센 파도가 소용돌이쳤다.“이 자가 그 나민우라는 사람인가요?”요한은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치는 모습을 보고 고개를 갸우뚱했다.온지유가 한 말에 따르면 홍혜주와 나민우가 노예 수용소에 갇힌 지 꽤 된듯했지만 눈앞의 노아는 막 이제 잡혀 온 사람이었다.“아니에요.”온지유가 낮게 부정했다.눈앞의 남자는 나민우와는 완전히 다른 얼굴이었다.남자는 온지유의 부정과 나민우라는 세글자에 눈빛이 어두워졌다.곧 A구역의 사람들이 줄을 서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차례로 한 명씩 온지유의 앞을 지나갔지만 온지유는 나민우를 찾지 못했다.그때 요한이 귀띔을 했다.“A구역의 600명은 오늘 모두 확인했습니다. 오늘은 이미 시간이 늦었으니 찾으려면 내일 다시 오시죠.”“그래요.”지금은 어쩔 수 없었다.이곳은 온지유가 마음대로 간섭할 수 있는 곳이 아니었기 때문이다.“그럼 돌아가시죠.”요한이 말을 마친 그 순간, 온지유의 뒤에서 연이은 기침 소리가 들려왔다.온지유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이 목소리는!‘쿵!’번개를 맞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왜 남자의 눈빛이 그토록 익숙하게 느껴졌는지 이제야 알 수 있었다.그랬구나!온지유는 마음속의 흥분을 억누르며 요한과 함께 앞으로 걸어갔다.길모퉁이에 다다르자 온지유가 요한에게 물었다.“요한 씨도 매일 바쁘실 텐데 사람을 찾는 일은 제가 혼자 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온지유는 가슴을 졸였다.요한이 허락 해줄지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하지만 그래도 시도해 봐야 했다.요한은 온지유가 그 여자애를 찾으려 한다고 생각하고 눈살을 찌푸리며 경고했다.“도련님이 챙겨 준다고 너무 과분한 걸 바라지는 마시죠!”온지유의 행동을 요한은 이해할 수 없었다
온지유가 여기 끌려온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신무열이 어떤 목적을 품고 있던 그가 아니었더라면 지금쯤 온지유는 온몸이 성하지 않았을 것이다.그런데 여이현은 위험을 무릅쓰고 여기까지 들어와 있었다.여이현은 온지유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지유야, 네가 잡혀갔다는데 내가 아무 일 없는 사람처럼 있을 수 있을 리가 없잖아.”그랬다. 용의 굴이든 호랑이 굴이든, 온지유가 있다고 하면 그곳이 어디든 여이현은 기꺼이 목숨을 걸고 찾으러 올 것이다.온지유는 여이현의 눈 속에서 그의 결심을 읽어냈다.순간 목이 메어왔다.부대의 일도 있을 텐데 여이현은 모든 것을 뒤로하고 온지유를 찾으러 여기까지 온 것이다.온지유는 문득 여이현이 떠나기 전에 모든 재산을 자신에게 넘겨줬던 일을 떠올렸다. 온지유를 위해 모든 일을 다 마련해 두었던 그였다.“이현 씨, 우린 지금 감시당하고 있어요. 당신도 이미 발각됐을지도 몰라요”그렇게 말하며 온지유는 여이현을 밀어내려 했다.하지만 큰 키를 가진 여이현은 꿈쩍도 하지 않고 온지유의 앞에 서 있었다.여이현은 아무것도 신경 쓰이지 않았다. 온지유의 턱을 살며시 들어 올리고 그녀의 입술을 훔쳤다. 그리고 그대로 온지유의 입을 열고 그녀의 향기와 숨결을 탐했다.이렇게 해야만 온지유가 진짜 곁에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여이현은 이성을 잃지 않았다. 온지유의 숨이 가빠지려는 순간 순순히 그녀를 놓아주었다.“지유야, 내가 있는 한 널 한치도 다치게 하지 않을 거야.”지금 와서 발각되어도 상관 없었다. 온지유를 만날 수 있었으니까.여이현은 이곳에 들어오기 전 몸속에 칩을 심어 두었었다.만약 시스템에서 그의 생체 신호가 끊기면 그의 위치를 따라 미사일이 이곳을 폭파할 것이다.그 전에 온지유의 안전을 먼저 확보해야 했다.온지유는 손을 꽉 쥐었다.“이현 씨... 아니, 그래도 안 돼요. 지금은 거리를 둬야 해요. 언제 사람들이 들이닥칠지 몰라요. 최악의 상황은 아직 생각하지 말아요.”지금은 희
결국, 여이현은 말없이 온지유를 꼭 끌어안았다.온지유가 나민우를 찾으러 왔다고 했을 때는 가슴이 답답하고 화가 났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나민우도 온지유 때문에 이곳에 온 것이었다.온지유가 그를 찾으려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지금은 온지유가 그의 품에 있는 것만으로도 모든 것이 충분했다.온지유는 그의 품에 기대 있었다. 내일에는 사라질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이 순간만큼은 함께하고 있었다....한편 신무열 측은.법로를 찾으러 가기 전 요한이 그의 앞에 자취를 나타냈다.“도련님.”“온지유 쪽 상황은?”신무열은 입을 열자마자 온지유를 찾았다. 요한은 신무열이 온지유에게 상당히 큰 관심을 두고 있으리라 예측했다.요한은 사실대로 보고했다.“도련님은 그 여자의 의사를 존중하라고 하셨죠. 지금 온지유는 노예 수용소에서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번 새로 들어온 노예는 좀... 수상합니다.”그는 노예가 아니라 위장해 침입한 사람일 것이라 요한은 추측했다.일반인에게 그 정도의 박력이 있을 리가 없었다.하지만 말을 끝내기도 전에 신무열이 그를 제지했다. “어떤 말들은 굳이 하지 않아도 널 바보라고 생각하지 않아.”온지유를 위해 이곳까지 침입해 왔다면 그 사람은 여이현일 것이 분명했다.처음 온지유를 만났을 때 몸에 차고 있던 푸른 구슬을 본 순간부터 신무열은 그녀에 대해 조사하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 여이현의 존재를 알게 됐고 인명진이 온지유와 접촉한 적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온지유와 흩어지게 된 홍혜주의 존재도.“예.”요한은 고개를 숙였다. 그는 정말 신무열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도련님은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온지유와 그 노아라는 자의 연극을 구경하기라고 하자는 건가.’도련님의 결정과 목표를 요한은 감히 물어 볼 수 없었다. 그저 마음속으로 추측할 뿐이었다.다음 순간, 신무열은 요한을 향해 손을 휘휘 저었다.“내려가 봐. 넌 그냥 내가 시키는대로 하면 돼.”“예.”
신무열이 율이에게 케이크와 드레스를 사주던 모습과 비교하면 지금의 그는 완전히 다른 사람 같았다.온지유 앞에서조차 그는 나름 친근한 태도로 두어 마디 말을 건넸었다.하지만 지금은...“없습니다.”신무열은 거의 반사적으로 부인했다.법로는 싸늘하게 씩 웃으며 말했다.“그럼 그 여자를 내 앞으로 데려와.”“... 알겠습니다.”가장 위험한 곳이 도리어 가장 안전한 곳이 될지도 모른다. 법로의 곁에 있다면 적어도 율이가 온지유를 해칠 일은 없을거다....율이 측.노석명이 율이가 있는 곳으로 찾아왔다.그가 온 것을 본 율이가 간단히 인사말을 건넸다.“아저씨, 어쩐 일로 여기에 온 거예요?”“잠깐 보고 싶어서 왔다.”노석명은 두 손을 몸 뒤에 숨겼다.율이는 지금 그의 상상보다 훨씬 더 좋은 삶을 살고 있었다.노석명은 그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네가 온실속 화초처럼 자라기를 난 바라지 않아.”“알아요.”율이는 대충 세 글자를 뱉어낼 뿐이었다.노석명은 그곳에서 긴 시간을 보내지 않았다. 그가 떠난 뒤 율이는 문득 한 사람을 떠올렸다. 매일 밤낮 고통 속에서 보내고 있는 한 사람을.“명무 씨, 갇혀 있는 그 여자는 지금 어떻게 됐죠?”율이는 김명무를 불러냈다.이에 김명무는 공경한 태도로 율이의 앞에 나타나 말했다.“아가씨, 그 여자는 늘 있던 그대로입니다.”“흐음, 이젠 쓸모없으니까 기억을 지우고 노예 수용소에 보내버려요.”율이의 눈에는 매서운 섬광이 여렸다.“예.”김명무는 고개를 끄덕이고 그녀의 분부대로 움직였다.율이는 행동에 제한을 받지는 않았지만 온지유에게는 신무열의 보호가 있었다. 특권을 가지고 있는 온지유 앞에 율이는 쉽사리 모습을 나타낼 수 없었다.그래도 그녀에게는 온지유를 고통 줄 다른 방법이 있었다.온지유 측.여이현이 방문을 잠갔지만 조심성 있는 온지유는 안심하지 못하고 여이현의 품에서 얼른 벗어났다.온지유는 급히 일어 서 말했다.“빨리 일어나요. 조금 있으면 사람이 올 것 같은 예감이 들어요.”
온지유는 분명히 알고 있었다. 여기서 그녀는 신무열에게 특별한 존재가 아니었다.그녀도 그저 신무열을 떠보려는것에 불과했다.신무열은 웃었다.“사람을 찾는다 하셨으니 당연히 찾고 나서는 데려 가면 되죠. 하지만 지금은 전쟁 중이니 이곳에 남아 있는 게 가장 안전할지도 모르겠네요.”신무열은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중요한 것은 말하는 중 그의 시선은 시종일관 온지유에게로 꽂혀 있었다는 것이다.온지유 뒤에 서 있는 여이현은 가슴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 그저 빨리 온지유를 끌어안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가죠.”온지유가 입을 열기도 전에 신무열이 말했다.신무열은 어디로 간다고 알리지 않았다. 온지유는 이대로 끌려가면 여이현과 떨어지게 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신무열이 여이현도 데려갈 거라고는 생각되지 않았기 때문이다.온지유는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신무열씨.”온지유가 입을 열었다.신무열은 고개를 돌려 온지유를 바라봤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온지유를 바라보는 그의 시선이 알려주고 있었다. 그는 온지유가 말을 잇기를 기다리고 있었다.온지유는 머뭇거렸다.“절 어디로 데려가려는지 모르겠지만 별로 가고 싶지 않네요. 오고 가고 하면서 시간도 걸리고 전 사람을 찾는 게 최우선이거든요.”온지유는 신무열을 한번 떠봤다. 어디에 가는지도 모르고 마냥 따라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신무열은 표면으로는 큰 표정의 변화가 없었지만 그도 시선 밖으로는 곁에 있는 여이현을 살펴 보고 있었다.여이현도 겉으로는 아무 변화가 없었지만 검은 색 눈동자는 그 어느때 보다도 날카로왔다.“잠시 따라와주기만 하면 돼요. 금방 돌아올겁니다.”“... 알겠어요.”이쯤 되면 온지유도 더 이상 거절할 수 없었다. 온지유는 여이현에게 손짓을 했다. 하지만 여이현은 이대로 순순히 온지유를 보내고 싶지 않았다.이대로 보내버리면 다시는 못 볼것 같았다.“그쪽도 따라와요.”온지유가 걸음을 떼려는 순간 신무열이 뒤에 서있던 여이현에게 말을 걸었다.이곳에서부터 법로가 있는
“무슨 속셈으로 신무열에게 접근한 거지?”법로가 무겁게 깐 목소리로 물었다.그의 말에는 분노가 가득 담겨있었다.법로의 얼굴은 가면 속에 가려져 있어 온지유에게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 신비로움이 온지유를 더욱 불안하게 만들었다.온지유는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그저 우연히 만난 것뿐입니다. 아무런 의도도 없었습니다.”온지유가 사람을 찾으러 왔다는 사실은 신무열만 알고 있었다.신무열이 이 사실을 법로에게 전달 했을지는 모르지만 지금은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치고 마을주민들에게 약을 나눠주던 신무열의 마음씨를 믿을 수밖에 없었다.온지유의 믿음은 옳았다.법로는 웃으며 말했다.“화국인이 여기에는 어쩐 일로 왔지?”말을 마친 법로는 바로 허리춤에서 총을 꺼내 겨눴다.검은 총구가 온지유의 이마에 닿았다. 전쟁과 죽음을 목격해 온 온지유였지만 이 순간 만큼은...온지유는 알고 있었다. 한마디라도 잘못 하면 법로의 총알이 바로 자신의 이마를 관통할 것이라고.“사람을 찾으러 왔습니다. 저는 kA48이라는 독에 걸렸고, 이 독은 Y국인이 개발한 거로 알고 있습니다. 제 친구가 저를 구하려고 이곳까지 오게 되었어요.”“전쟁에 휘말리고 누군가의 적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전 그저 살고 싶었을 뿐이에요.”온지유의 심장은 목구멍까지 올라왔다.말하는 목소리가 떨려왔다.밖에 서 있는 여이현은 안절부절못했다.지금 바로 문을 박차고 들어가고 싶었지만 신무열이 한발 빨랐다.그와 동시에 요한이 여이현을 막아섰다.“두 분 다 법로한테 죽고 싶지 않다면 가만히 있는 게 좋을 겁니다.”요한의 말이 귓가에 을렸다.여이현의 얼굴에 음산한 기운이 스쳤다.요한의 말대로라면 모든 것은 온지유의 예측대로였다. 그는 이미 발각되었고 감시당하고 있었다.하지만 그렇다고 지금 이 상황을 그냥 두고 봐야 한다?여이현은 그럴 수 없었다.여이현은 달리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모든 수단을 동원해 법로를 잡고 온지유를 데리고 이곳을 떠나야 한다.요한은 그의 생각을 읽은 듯
동시에 여이현은 요한의 손목을 낚아채며 격렬한 싸움을 시작했다. 주먹과 발길질이 오가며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대문 입구는 삼엄하게 지켜지고 있는 법로 저택이었지만 내부는 경계하는 사람이 얼마 없었다.우선 법로의 허락 없이 이곳에 들어올 사람은 없었기 때문이다. 요한과 여이현이 요란하게 싸우고 있었지만 공간이 넓은 것도 더해 외부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았다.순간 여이현은 요한을 떨쳐내고 안으로 들어가려 했지만 바로 요한이 뒤쫓아와 두 사람은 쉽게 승부를 가리지 못하고 있었다....방 안.법로는 여전히 총을 들고 있었다.온지유는 멍해져 있었다,그녀는 연합군의 방화와 약탈을 본 적도, 유젠이 소녀들을 학대하는 모습을 본 적도, 수많은 부상자를 목격한 적도 있었다.하지만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그러나 다음 순간 온지유는 어깨가 무거워지는것을 느꼈다.그녀는 신무열의 품에 강하게 감싸안겨 있었다.“제 사람을 함부로 대하지 마세요. 지유 씨가 죽으면 아버지는 아들을 하나 잃게 되는 거라 생각하세요.”신무열의 한마디 한마디는 무겁고 단호했다.온지유는 혼란스러웠다.신무열은 법로의 아들이다. 이곳에서는 강한 권력을 갖고 있었고 법로가 물러나면 신무열이 바로 다음 ‘법로’가 될 터였다.하지만 신무열은 온지유를 위해 친아버지와 맞서 싸우고 있었다.온지유는 자신이 그토록 매력적인 인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신무열이 그녀에게 잘해주기 시작한 건 언제부터였을까?“작정하고 끝까지 이 여자를 지키겠다는 거냐?”법로가 차갑게 물었다.신무열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예. 그리고 저는 한번 뱉은 말은 꼭 지키죠.”이 말을 던지고 신무열은 온지유를 감싸안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리를 떴다.떠나는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법로의 눈빛은 더욱 어두워졌다.온지유라는 이 여자는 율이를 괴롭혔을 뿐만 아니라 그의 아들까지 앗아가려고 하고 있다. 가볍게 시험했을 뿐인데도 신무열이 온지유에게 품을 감정을 알 수 있었다.미인은 화를 부른다 라는 말이
하지만 감동보다는 오히려 속이 울렁거렸다. 속이 울렁거리는 느낌에 문지원은 당장 얼굴이 일그러지며 화장실로 달려갔다. 지석훈도 뒤따라 들어오며 물었다.“속이 안 좋아?”“그렇진 않은 것 같아요. 요즘 세 끼 식사도 꽤 규칙적으로 하고 날것 이거나 차갑거나 매운 음식도 먹지 않았는데...”문지원은 배를 움켜쥐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다 문득 한 가지 가능성이 떠올랐다.지석훈도 그녀와 같은 생각을 한 듯 방으로 가서 임신 테스트기를 가져왔다.문지원은 놀라며 물었다.“언제 산 거예요?”지석훈은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만일의 사태에 대비해서.”문지원은 아무 말이 없었다.5분 후, 그녀는 복잡한 얼굴로 다시 나왔다. 한 손은 여전히 배 위에 올려져 있었고 눈에는 믿을 수 없다는 기색이 역력했다.정말 임신한 것이다!그녀와 지석훈이 결혼한 지 겨우 3개월밖에 안 되었는데 이렇게 빨리 임신하다니.지석훈은 오히려 태연해 보였다. 하지만 입가에 감출 수 없는 미소를 보면 그 역시 겉모습처럼 평온하지 않고 흥분을 억누르고 있는 게 분명했다.“정말 임신한 거예요?”문지원은 아직 믿기지 않는 듯 물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이번 달 초에 생리가 끝났기 때문이다.“아마 생리가 끝난 후 며칠 사이일 거야.”지석훈의 목소리는 문지원에게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 당시의 기억을 떠올리니 그녀의 귀는 뜨겁게 달아올랐다. 결국, 그녀는 병원에 가보기로 했다. 임신 테스트기는 가끔 틀릴 수도 있으니 이런 일은 직접 검사를 받아보고 확인해야 마음을 놓을 수 있을 것이다.그리고 그녀는 손에 든 검사지를 보고 완전히 할 말을 잃었다.의사는 마침 지석훈과 알고 지내던 사람이었다.“축하합니다, 지 원장님. 부인께서 임신 2주 차입니다.”“감사합니다.”지석훈은 침착하게 그녀를 부축하며 밖으로 나갔다.병원 진료실을 막 나오자마자 지석훈은 문지원을 품에 안았다.“너무 좋아. 우리 아이가 생겼어.”문지원은 남자가 미세하게 떨리는 모습을 보며 멍하
물론 손에 있는 일을 무턱대고 모두 남에게 맡기는 것은 너무 과한 부담을 주는 일이다.문지원은 비서를 사무실로 불렀다.“올해 25살이죠?”비서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그녀의 나이는 모두가 다 아는데 문지원 회장이 갑자기 이 얘기를 꺼낸다는 것은 혹시 소개팅을 시켜주려는 건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비서는 고마웠지만 거절하며 말했다.“문 사장님, 저는 아직 젊어서 당장은 결혼할 생각이 없습니다.”“전 당신더러 결혼하라고 하는게 아니에요.”문지원은 펜으로 탁자를 두드리며 말했다.“그냥 평소에 잡다한 일들을 맡기고 싶어서요. 확인이 필요한 문서들은 평소에 굳이 내게 제출하지 않아도 돼요.”비서는 그 뜻을 이해했다.이건 곧 그녀에게 승진과 급여 인상을 주려는 것이다. 문지원이 그녀의 의견을 확인한 후 급여를 조금 올려줬고 비서에게 몇 명의 적합한 인재를 추가로 모집해서 예비 인력으로 두라고 지시했다.“평소에 내가 처리하지 못한 일들을 대신 처리해주고 만약 문제가 생기면 그때마다 보고하면 돼요.”비서는 한숨을 쉬며 안도의 표정을 지었다. 그녀 혼자서 이렇게 많은 일을 하지 않아도 되어 다행이었다.일정이 정리되자 문지원은 업무에서 상당 부분 해방되었다.예전에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바쁘게 일하다 보면 퇴근 시간이 되어도 일이 끝나지 않고 긴급 통지가 오면 또 회의를 위해 야근을 해야 했다.이제는 오후 4시 반쯤이면 일을 마치고 퇴근할 수 있게 된 것이다.비서가 몇 명을 더 찾아서 양성해 두었기에 업무가 적절히 분배되어 모두 바빠 죽을 정도가 아니라 적당히 딱 맞는 분량을 처리할 수 있었다.그 덕에 문지원은 지석훈과 함께 결혼 후의 삶을 더욱 즐길 수 있게 되었다.지석훈도 이에 매우 만족해했다.“널 주려고 선물을 챙겨왔어. 들어가서 한번 봐.”그가 집 문 앞에 다가서더니 걸음을 멈췄다.문지원은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안은 어두컴컴했다.“뭐 숨겨놨어요? 아직 불도 켜지 않았네요, 수상하게.”탁! 하며 불이 켜지자 거실의 모든
문지원은 이 주제가 다소 위험하다고 느꼈다. 비록 그녀의 아버지가 그녀에게 물어본 적은 없지만 그렇다고 자신과 배석훈이 결혼한 후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에 대해 말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돼지고기를 먹어보지 않았다고 해도 돼지가 뛰어다니 것을 본 적은 있을 것이다. 문지원은 그러면서도 반쯤 빚어놓은 만두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저,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이에 지석훈의 어머니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너희들도 이제 나이가 들었으니 아이를 가져야지. 평소에 좀 더 노력해야 한단다.”문지원은 잔소리를 듣고 나서 나오니 기운이 다 빠져있었다.시어머니는 문지원에게 정말 잘해주었다. 거의 마음을 쏟아붓는 수준이었다. 비록 문지원의 집안 사정이 좋은 것을 알면서도 혼수 때 오랜 세월 모은 돈으로 집 한 채를 사서 선물해 주었다. 사실 지석훈도 자기 집이 있었지만, 시어머니는 선물하고 싶다고 하셨다. “너희 집도 너희의 것이지만, 이건 내가 어른으로서 선물하는 거란다.”게다가 그 집에는 문지원의 이름도 함께 올려져 있었다.그래서 시어머니의 출산 독촉에도 문지원은 어쩔 수 없이 버텨야만 했다. 다행히도 시어머니는 어린 이들에게 엄격하게 구는 편은 아니었다. 만두를 빚을 때 한 번 그런 말을 했고 또 떠나면서도 지석훈을 불러 몇 마디 잔소리했다. 문지원은 그 모자간의 대화를 듣지 못했다.돌아가는 길에 문지원은 약간 궁금해져 지석훈에게 물었다.“나갈 때 어머니께서 뭐라고 하셨어요?”“정말 알고 싶어?”“네.”그러자 지석훈은 문지원의 머리를 숙이게 한 후 그녀의 흩어진 머리칼을 살며시 넘겨주며 귀 옆에서 낮게 속삭였다.“우리 아이를 빨리 낳으라고 하셨어.”남자의 낮고 진한 목소리는 얼굴을 붉히고 심장을 뛰게 만드는 약보다도 중독성이 강해 문지원의 귀가 금세 붉어지고 말았다.저녁이 되자 지석훈은 몸소 행동으로 보여주기 시작했다. 한 손으로 문지원의 머리를 받치고 이마를 맞대며 낮은 숨소리를 내쉬었다. 문지원은 마치 파도 속에 잠긴 것
그 눈빛 속에서 조용히 터져 나오는 그 소유욕. 마치 옛 시대의 군벌과 그의 부인 같았다. 그리고 사진작가는 우연히 그 장면을 목격한 운 없는 사람이 되어 몰래 촬영을 하고 있었다. 사진작가는 자신의 상상에 자극받아 목소리가 떨렸다.“지석훈 씨, 고개를 들어 카메라를 봐주세요.”지석훈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사진작가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사진작가는 재빨리 셔터를 눌렀다. 그 후에도 그들은 여러 세트의 사진을 찍었고 찍은 사진들은 모두 문지원에게 하나하나 보여주었다. 문지원은 모든 사진에 다 만족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마음에 든 것은 민국 시대 주제의 사진이었다.“대략 며칠 안에 나오나요?” 그녀가 물었다.사진작가는 답했다.“빠르면 이삼 일정도 걸릴 겁니다. 그때 완성된 사진들을 택배로 보내드리겠습니다. 그런데 제가 개인적인 부탁이 하나 있는데 혹시 두 분께서 응해주실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바로 아까 찍은 사진 중 몇 장이 제가 개인적으로 아주 마음에 들어서 사진관 벽에 걸어두고 싶습니다.”문지원은 사진관에 들어올 때 봤던 사진 벽이 생각났다.“그 벽에 걸어두시겠다는 건가요?”“네.”사진작가는 그 벽은 사진관의 특별한 기념 및 홍보 방법의 하나라고 설명했다. 잘 나온 사진들은 사진 주인에게 동의를 구한 뒤 동의하면 벽에 전시한다고 한다..문지원은 옆에 있던 지석훈을 바라봤다. “저는 괜찮은데, 당신은요?” 지석훈도 아무 문제 없다고 했다.“마음대로 하도록 해.”며칠 후 문지원은 사진작가가 보내온 사진을 받아 소중히 간직했다. 하지만 그녀는 몰랐다. 그 사진관 벽에 전시된 사진들이 곧 사람들의 눈에 띄어 사진이 찍혀 인터넷에 올라간 것이다.잘생긴 남성과 아름다운 여인의 조합과 최상의 촬영 기술 덕분에 순식간에 인터넷에서 화제가 되었다.네티즌들은 저마다 아아 소리를 냈고 많은 사람이 댓글을 달았다. “마치 옛 시대의 군벌 부인 같다.”“완전 대박이다.”“3분 안에 그들의 모든 정보를 알고 싶다.” 하지만 이 모
문지원은 약간 마음이 움직였다.하지만 웨딩 촬영은 이미 여러 번 한 적이 있었다. 그때 섬에서 몇 세트 찍었고 그 후 결혼식 현장에서 또 몇 세트 찍어 셀 수 없을 정도였다.게다가 이번 촬영은 개인 예약으로 진행되었는데 이 사진관이 꽤 유명하다고 들었다.물론 사진관 이름에 걸맞게 예약은 거의 하늘의 별 따기라고 한다..이 정도면 지석훈이 얼마나 큰 노력을 들여 예약을 잡았는지 알 수 있었다. 단순히 웨딩사진만 찍는 데 사용하기에는 너무 아까웠다.하지만 문지원 역시 이런 곳에 한 번도 와본 적이 없었기에 무엇을 찍어야 할지 몰랐다.“한번 보세요. 이건 저희가 예전부터 선보였던 스타일들이에요.”사진작가는 친절하게 앨범 한 권을 꺼내 보였다.앨범에는 이전 고객들이 이곳에서 찍은 사진들이 담겨 있었는데 정말 다양한 스타일이 있었고 모두 아름다웠다.이 사진관이 만들어낸 결과물은 정말 최고였다.문지원은 그중에서도 민국 시대 주제의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이렇게 찍을 수 있을까요?”사진작가는 그녀가 가리키는 사진을 한 번 살펴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네, 됩니다. 먼저 메이크업하고 옷을 갈아입으세요. 직원들이 촬영 스튜디오를 설치할게요.”옷은 사진관에서 준비한 것으로 하고 지석훈의 요구에 따라 전부 새 옷이었다.사실 문지원은 소품용 옷을 입는 것에 크게 개의치 않았다. 어쨌든 한 번 입었다가 나중에 벗으면 되는 거고 몸에 달라붙지 않아서 안에 옷을 받쳐 입을 수도 있었다.하지만 지석훈은 직업병이 발동했고 그런 건 용납할 수 없었다.결국, 문지원은 어쩔 수 없이 그의 의견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급히 새 옷을 가져와야 했기 때문에 원래 걸리던 시간에서 15분이 더 추가되었고 메이크업 등 기타 과정도 진행해야 했다.문지원이 모든 준비를 마치고 나왔을 때는 이미 2시간이 지난 후였다.그러나 결과는 확실했다.곧은 치파오가 그녀의 아름다운 몸매를 감쌌고 문지원은 옷자락을 살짝 들어 올렸다. 마치 지난 옛 시대의 그림 속에서 걸어 나온 듯한
결혼 후 문지원은 휴가를 내서 신혼여행을 갈까 고민해 본 적이 있었다.하지만 요즘 지석훈이 거의 계속 병원에 머무르며 집에 돌아오지 않는 것을 떠올리며 본의 아니게 한숨이 나왔다. 비록 이미 익숙해졌긴 했지만 실망을 감추기는 어려웠다.비서도 그녀에게 물었다.“문 사장님, 신혼여행 가고 싶지 않으세요? 제 동창 중 한 명이 며칠 전에 결혼했는데 요즘 여기저기서 신혼여행 정보를 알아보며 준비 중이에요. 신혼여행이 없는 결혼은 반은 실패한 거랑 마찬가지라고 하더라고요.”그 말을 들은 문지원은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제대로 볼 생각조차 들지 않았고 비서는 무언가를 눈치챈 듯했다.“그렇지 않으면... 문 사장님, 지 의사님이 일하시는 곳에 한 번 가보시는 건 어떠세요?”그녀가 머뭇거리며 물었다. 어쨌든 문지원은 요즘 정신이 산만하여 업무에 집중할 기색도 없었다.문지원은 비서의 시선 속에서 정신을 차렸다. 요 며칠 동안 집에 돌아와도 지석훈을 보지 못해 한참 혼란스러워했던 자신을 깨달으며 약간 부끄러워졌다.“그건 나중에 얘기하고 기획서 한 부 복사해 가져다주세요.”점심 무렵, 문지원은 막 일을 끝내고 밥 먹으러 가려던 찰나, 핸드폰에 지석훈의 메시지가 떴다. 같이 밥을 먹자는 메시지에 문지원은 미소를 지었다. 멀리서 이 장면을 본 직원들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며 웃음을 터뜨렸다.문지원은 재빨리 열쇠를 챙기고 회사를 떠났다. 지석훈은 그녀를 새로 오픈한 가게로 데려갔다.식사를 마친 후 문지원은 지석훈을 바라보며 머뭇거리다가 물었다.“병원에 다시 돌아갈 거예요?”“응?”지석훈은 눈썹을 치켜들며 고의적으로 물었다. “내가 돌아가길 바라는 거야?”그 말을 들은 문지원은 순간 당황했다. 사실 그녀는 지석훈이 자신과 좀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주길 바랐는데 이제 막 결혼한 신혼부부임에도 불구하고 각자 업무에만 매달려 밤에야 겨우 함께 잠자리에 들 수 있는 상황이었다.하지만 수줍음이 많은 그녀는 그 마음을 솔직하게 털어놓지 못했다.지석훈은
예전에는 이런 일이 있을 때면 지석훈은 항상 선을 지켰지만 오늘 밤엔 조금 달랐다. 그는 그녀를 침실에서 욕실로 다시 침대로 옮겨가며 몸 곳곳에 뜨거운 입맞춤을 했다.다음 날 아침에 일어났을 때도 문지원은 여전히 몸속 깊이 스며든 감각이 남아 있는 것만 같았다.그리고 그녀는 예상대로 휴가를 냈고 이틀이 지나서야 회사에 다시 나왔다.회사 사람들은 이미 예상이라도 한 듯 문지원이 출근하자 하나같이 말했다.“문 사장님, 결혼 축하드려요.’문지원은 무려 사흘이나 결근했지만 다들 그 사흘 동안 무얼 했는지는 굳이 말 안 해도 짐작이 갔다.분명 부부 생활이 아주 좋았겠지, 아니었으면 일까지 내팽개치고 안 나왔을 리가 없다.문지원은 직원들의 부담스러운 시선에 얼굴을 들 수도 없어 그저 아무렇지 않은 척할 수밖에 없었다.그래도 지난번에 당한 적이 있었던 터라 문지원은 이제 출근 전에 거울 앞에서 꼼꼼히 점검했다.몸에 키스 자국이 드러나지 않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안심하고 회사를 향했다.그렇지 않았다면 그 흔적들을 들켰을 경우 정말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문지원이 예상치 못했던 건 며칠 지나지 않아 결혼을 축하하는 선물이 회사로 배달됐다는 것이다.문지원은 처음에 여울이 보낸 거라고 생각했지만, 물어보니 아니었다.택배 상자의 외관을 살펴봐도 발신자가 적혀 있지 않아 더욱 수상했다.“이거 가져온 사람이 누가 보낸 건지 말했어요?”문지원이 로비 직원에게 물었다.로비 직원은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냥 두고 바로 가버렸어요.”문지원은 뭔가 직감적으로 찜찜한 마음이 들어 그 택배를 챙겼고 사무실에 들어와서야 상자를 열었다.그 안에는 브로치 하나와 축하 카드 한 장이 들어 있었다.문지원은 축하 카드를 집어 들어보니 카드 위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결혼 축하해요.”글씨체는 아주 정갈하고 예뻐 여성의 필체 같았다.그녀는 곧바로 짐작이 갔다.문지원은 그 브로치를 지석훈에게 보여주자 그는 눈빛이 살짝 흔들렸지만 아무 말 없이 브로치
여울은 아직 최주하를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최주하도 쉽게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문지원이 알기로 여울은 마음이 여린 사람이었고 결국 받아들이게 되는 건 시간문제일지도 몰랐다.그녀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친구 일에 깊이 관여하는 것도 괜히 어색하고 조심스러웠다.게다가 얼마 전 지석훈이 슬쩍 귀띔하듯 말했다.“며칠 전에 여울 씨가 병원에 재검진받으러 왔는데 주하가 데리고 왔었어.”그 말을 듣고 문지원은 혀를 끌끌 찼다.평소에 말도 없고 조용하던 여울이 은근히 비밀 많은 타입이었던 모양이었다.그렇게 시간은 순식간에 흘러 어느덧 다음 달 중순이 되었다.지석훈은 아예 와인 농장을 통째로 빌려 며칠에 걸쳐 그곳을 자신이 원하는 모습으로 꾸며놓았다.결혼식을 올릴 장소는 바로 거기였다.그 와인 농장은 웬만한 호텔 못지않게 컸고 내부에는 수년간 숙성된 고급 와인들이 그대로 보관되어 있었고 결혼식 날 손님들이 오면 바로 꺼내어 대접할 수 있을 정도였다.그들은 결혼 소식을 널리 알리진 않았다.이건 문지원이 원한 방식이었다.그녀는 온 세상에 떠들썩하게 알리는 그런 결혼식보다는 가까운 가족과 친구들만 초대해서 조용히 축하받는 걸 선호했다.행복은 굳이 남들에게 증명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니까.그런데 결혼식이 한창일 때 지석훈이 무대 위에서 다시 한번 프러포즈했다.해변에서 했던 프러포즈보다 훨씬 더 진지하고 진중한 분위기였다.“하고 싶은 말이 정말 많지만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어서... 예전엔 내가 사랑인 줄도 모르고 놓쳐버렸던 순간이 많아. 이제는 더 이상 놓치고 싶지 않아. 이렇게 내 곁에 있어 줘서 고마워. 앞으로 남은 인생... 너랑 함께할 수 있어서 정말 행복해.”그의 말이 끝나자 하객들 사이에서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문지원은 무대 위에서 입을 손으로 가리고 눈물을 흘렸다.식이 끝날 무렵, 문지원은 멀리서 검은색 카이엔 SUV가 그녀의 친구 여울을 데리러 오는 걸 보았다.차창이 천천히 내려가자 예상대로 그 안에 앉아 있는 사람은 최주하였다
문지원은 문득 자신이 계획에 철저히 걸려들었다는 생각에 의심의 눈길을 보냈다.“처음부터 계획한 거죠?”“응.”지석훈은 미소 지으며 그녀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사실, 그는 그녀를 향한 마음을 오래전부터 숨겨온 것이었다....해변에서의 프러포즈 이후 문지원에게 찾아온 가장 큰 변화는 손가락에 반짝이는 반지가 생겼다는 점이었다.이 반지는 지석훈이 특별히 맞춤 제작한 것이었다. 그녀는 우연히 그의 휴대폰을 보다가 두 달 전에 이미 주문이 들어가 있었다는 구매 기록을 발견하고는 깜짝 놀랐다. 그렇게 오래전부터 준비해 왔다니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두 사람의 결혼 소식을 접한 지석훈의 부모님은 곧바로 혼인신고부터 하라고 재촉하기 시작했다. 어느 날 문지원은 우연히 지석훈의 어머니가 그를 붙잡고 타이르는 말을 듣게 되었다.“네 아빠랑 난 애초에 너한테 기대도 안 했어. 하루가 멀다고 병원에서 살다시피 하니 너 같은 애한테 누가 시집오겠나 싶었거든. 그런데 다행히 네가 능력 있어서 지원이 같은 좋은 아이를 데려왔으니 얼른 확실히 붙잡아야지. 빨리 혼인신고부터 해. 나중에 그 아이가 너 버리고 떠나버리면 그땐 어디 가서 울어도 소용없어!”문지원은 그 대화에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몰랐다.그런데 신기한 건 지석훈이 워낙 점잖고 진지한 사람이어서 집안 분위기도 매우 조용할 줄 알았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점이었다. 아버지는 이미 퇴직해 한가로운 성격으로 매일 독서나 산책을 즐기는 조용한 스타일이었다. 어머니는 젊었을 때는 커리어 우먼이었고 호탕한 성격으로 남편에게 엄격하면서도 친화력이 강한 사람이었다.두 분 모두 차분한 듯하면서도 내면에 장난기를 숨기고 있는 아들을 낳을 것 같진 않았는데 이게 바로 유전자의 신비인가 싶었다.하지만 어머니가 그렇게 그녀를 좋아해 주는 모습에 문지원도 안심했다. 확실히 시부모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증거였다.한편 문지원의 아버지는 지석훈과 따로 대화를 나눈 이후부터 정확히 무슨 얘기를 했는지는 몰라도 그에 대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