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 근데 나도 도움이 필요해. 너... 여기 오래 있었지?”온지유는 여자아이의 어깨를 잡았다. 그녀는 진심으로 여자아이를 도와주고 싶었다. 물론 그 대가로 받을 것도 있었다.“네, 오래 있었어요. 약물에 면역이 된 덕분에요. 저 정말 무서워요. 죽어가는 사람을 너무 많이 봤어요.”“이해해. 너 여기서 지내는 동안 홍혜주라는 사람을 만난 적 있어?”온지유의 머릿속에는 홍혜주와 나민우를 찾아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두 사람이 살아있는지조차 모르는 상황이니 말이다.여자아이는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이름은 관리인만 알고 있어요. 저희한테는 말할 기회도 별로 없어요. 실험은 끝이 없고요.”온지유는 침묵에 잠겼다. 역시 요한에게 부탁한 것이 옳았다.“혹시 사람을 찾으러 일부러 들어온 거예요?”여자아이도 눈치가 빨랐다. 온지유는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응, 하지만 다른 이유도 있어. 우리가 잘 협력하면...”온지유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여자아이가 말을 잘랐다.“협력할 게 뭐 있어요? 언니 블랙카드 있잖아요. 빨리 저랑 같이 나가요. 여기서 벗어나는 게 우선이에요. 설마 여길 폭파라도 하려는 건 아니죠?”온지유는 어이없어하며 대답했다.“그런 건 불가능해.”그녀에게는 그럴 능력이 없었다. 그녀는 그저 홍혜주와 나민우를 찾아서 함께 탈출하고 싶었을 뿐이다.여자아이와 대화를 나누는 중 멀리서 기침 소리가 들려왔다.“큼큼.”여자아이는 얼굴이 창백해져서 입을 다물었다. 온지유는 요한이 문 앞에 서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의 눈빛이 여자아이에게로 향했다.“너, 당장 제자리로 돌아가!”이 방은 온지유를 위해 마련된 독립된 공간이었다. 여자아이는 단순한 노예였기에 이런 대접을 받을 자격이 없었다.하지만 온지유는 여자아이를 뒤로 끌어당기며 말했다.“제가 데려오라고 했어요.”요한은 입술을 다물고 잠시 침묵한 후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방금 유젠한테 물어봤는데 그 두 사람 여기에 없어요.”‘없다고? 그럴 리가!’모든 증거가 두 사람이 이
남자 역시 온지유를 지켜보고 있었다.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온지유는 남자의 눈빛이 마치 밝게 빛나는 달빛 같다고 생각했다. 분명 처음 보는 얼굴인데도 이상하게도 그 남자에게서는 말 못 할 익숙함이 느껴졌다.온지유는 곧 시선을 돌렸다.남자의 시선 깊은 곳에서는 거센 파도가 소용돌이쳤다.“이 자가 그 나민우라는 사람인가요?”요한은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치는 모습을 보고 고개를 갸우뚱했다.온지유가 한 말에 따르면 홍혜주와 나민우가 노예 수용소에 갇힌 지 꽤 된듯했지만 눈앞의 노아는 막 이제 잡혀 온 사람이었다.“아니에요.”온지유가 낮게 부정했다.눈앞의 남자는 나민우와는 완전히 다른 얼굴이었다.남자는 온지유의 부정과 나민우라는 세글자에 눈빛이 어두워졌다.곧 A구역의 사람들이 줄을 서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차례로 한 명씩 온지유의 앞을 지나갔지만 온지유는 나민우를 찾지 못했다.그때 요한이 귀띔을 했다.“A구역의 600명은 오늘 모두 확인했습니다. 오늘은 이미 시간이 늦었으니 찾으려면 내일 다시 오시죠.”“그래요.”지금은 어쩔 수 없었다.이곳은 온지유가 마음대로 간섭할 수 있는 곳이 아니었기 때문이다.“그럼 돌아가시죠.”요한이 말을 마친 그 순간, 온지유의 뒤에서 연이은 기침 소리가 들려왔다.온지유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이 목소리는!‘쿵!’번개를 맞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왜 남자의 눈빛이 그토록 익숙하게 느껴졌는지 이제야 알 수 있었다.그랬구나!온지유는 마음속의 흥분을 억누르며 요한과 함께 앞으로 걸어갔다.길모퉁이에 다다르자 온지유가 요한에게 물었다.“요한 씨도 매일 바쁘실 텐데 사람을 찾는 일은 제가 혼자 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온지유는 가슴을 졸였다.요한이 허락 해줄지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하지만 그래도 시도해 봐야 했다.요한은 온지유가 그 여자애를 찾으려 한다고 생각하고 눈살을 찌푸리며 경고했다.“도련님이 챙겨 준다고 너무 과분한 걸 바라지는 마시죠!”온지유의 행동을 요한은 이해할 수 없었다
온지유가 여기 끌려온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신무열이 어떤 목적을 품고 있던 그가 아니었더라면 지금쯤 온지유는 온몸이 성하지 않았을 것이다.그런데 여이현은 위험을 무릅쓰고 여기까지 들어와 있었다.여이현은 온지유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지유야, 네가 잡혀갔다는데 내가 아무 일 없는 사람처럼 있을 수 있을 리가 없잖아.”그랬다. 용의 굴이든 호랑이 굴이든, 온지유가 있다고 하면 그곳이 어디든 여이현은 기꺼이 목숨을 걸고 찾으러 올 것이다.온지유는 여이현의 눈 속에서 그의 결심을 읽어냈다.순간 목이 메어왔다.부대의 일도 있을 텐데 여이현은 모든 것을 뒤로하고 온지유를 찾으러 여기까지 온 것이다.온지유는 문득 여이현이 떠나기 전에 모든 재산을 자신에게 넘겨줬던 일을 떠올렸다. 온지유를 위해 모든 일을 다 마련해 두었던 그였다.“이현 씨, 우린 지금 감시당하고 있어요. 당신도 이미 발각됐을지도 몰라요”그렇게 말하며 온지유는 여이현을 밀어내려 했다.하지만 큰 키를 가진 여이현은 꿈쩍도 하지 않고 온지유의 앞에 서 있었다.여이현은 아무것도 신경 쓰이지 않았다. 온지유의 턱을 살며시 들어 올리고 그녀의 입술을 훔쳤다. 그리고 그대로 온지유의 입을 열고 그녀의 향기와 숨결을 탐했다.이렇게 해야만 온지유가 진짜 곁에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여이현은 이성을 잃지 않았다. 온지유의 숨이 가빠지려는 순간 순순히 그녀를 놓아주었다.“지유야, 내가 있는 한 널 한치도 다치게 하지 않을 거야.”지금 와서 발각되어도 상관 없었다. 온지유를 만날 수 있었으니까.여이현은 이곳에 들어오기 전 몸속에 칩을 심어 두었었다.만약 시스템에서 그의 생체 신호가 끊기면 그의 위치를 따라 미사일이 이곳을 폭파할 것이다.그 전에 온지유의 안전을 먼저 확보해야 했다.온지유는 손을 꽉 쥐었다.“이현 씨... 아니, 그래도 안 돼요. 지금은 거리를 둬야 해요. 언제 사람들이 들이닥칠지 몰라요. 최악의 상황은 아직 생각하지 말아요.”지금은 희
결국, 여이현은 말없이 온지유를 꼭 끌어안았다.온지유가 나민우를 찾으러 왔다고 했을 때는 가슴이 답답하고 화가 났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나민우도 온지유 때문에 이곳에 온 것이었다.온지유가 그를 찾으려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지금은 온지유가 그의 품에 있는 것만으로도 모든 것이 충분했다.온지유는 그의 품에 기대 있었다. 내일에는 사라질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이 순간만큼은 함께하고 있었다....한편 신무열 측은.법로를 찾으러 가기 전 요한이 그의 앞에 자취를 나타냈다.“도련님.”“온지유 쪽 상황은?”신무열은 입을 열자마자 온지유를 찾았다. 요한은 신무열이 온지유에게 상당히 큰 관심을 두고 있으리라 예측했다.요한은 사실대로 보고했다.“도련님은 그 여자의 의사를 존중하라고 하셨죠. 지금 온지유는 노예 수용소에서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번 새로 들어온 노예는 좀... 수상합니다.”그는 노예가 아니라 위장해 침입한 사람일 것이라 요한은 추측했다.일반인에게 그 정도의 박력이 있을 리가 없었다.하지만 말을 끝내기도 전에 신무열이 그를 제지했다. “어떤 말들은 굳이 하지 않아도 널 바보라고 생각하지 않아.”온지유를 위해 이곳까지 침입해 왔다면 그 사람은 여이현일 것이 분명했다.처음 온지유를 만났을 때 몸에 차고 있던 푸른 구슬을 본 순간부터 신무열은 그녀에 대해 조사하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 여이현의 존재를 알게 됐고 인명진이 온지유와 접촉한 적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온지유와 흩어지게 된 홍혜주의 존재도.“예.”요한은 고개를 숙였다. 그는 정말 신무열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도련님은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온지유와 그 노아라는 자의 연극을 구경하기라고 하자는 건가.’도련님의 결정과 목표를 요한은 감히 물어 볼 수 없었다. 그저 마음속으로 추측할 뿐이었다.다음 순간, 신무열은 요한을 향해 손을 휘휘 저었다.“내려가 봐. 넌 그냥 내가 시키는대로 하면 돼.”“예.”
신무열이 율이에게 케이크와 드레스를 사주던 모습과 비교하면 지금의 그는 완전히 다른 사람 같았다.온지유 앞에서조차 그는 나름 친근한 태도로 두어 마디 말을 건넸었다.하지만 지금은...“없습니다.”신무열은 거의 반사적으로 부인했다.법로는 싸늘하게 씩 웃으며 말했다.“그럼 그 여자를 내 앞으로 데려와.”“... 알겠습니다.”가장 위험한 곳이 도리어 가장 안전한 곳이 될지도 모른다. 법로의 곁에 있다면 적어도 율이가 온지유를 해칠 일은 없을거다....율이 측.노석명이 율이가 있는 곳으로 찾아왔다.그가 온 것을 본 율이가 간단히 인사말을 건넸다.“아저씨, 어쩐 일로 여기에 온 거예요?”“잠깐 보고 싶어서 왔다.”노석명은 두 손을 몸 뒤에 숨겼다.율이는 지금 그의 상상보다 훨씬 더 좋은 삶을 살고 있었다.노석명은 그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네가 온실속 화초처럼 자라기를 난 바라지 않아.”“알아요.”율이는 대충 세 글자를 뱉어낼 뿐이었다.노석명은 그곳에서 긴 시간을 보내지 않았다. 그가 떠난 뒤 율이는 문득 한 사람을 떠올렸다. 매일 밤낮 고통 속에서 보내고 있는 한 사람을.“명무 씨, 갇혀 있는 그 여자는 지금 어떻게 됐죠?”율이는 김명무를 불러냈다.이에 김명무는 공경한 태도로 율이의 앞에 나타나 말했다.“아가씨, 그 여자는 늘 있던 그대로입니다.”“흐음, 이젠 쓸모없으니까 기억을 지우고 노예 수용소에 보내버려요.”율이의 눈에는 매서운 섬광이 여렸다.“예.”김명무는 고개를 끄덕이고 그녀의 분부대로 움직였다.율이는 행동에 제한을 받지는 않았지만 온지유에게는 신무열의 보호가 있었다. 특권을 가지고 있는 온지유 앞에 율이는 쉽사리 모습을 나타낼 수 없었다.그래도 그녀에게는 온지유를 고통 줄 다른 방법이 있었다.온지유 측.여이현이 방문을 잠갔지만 조심성 있는 온지유는 안심하지 못하고 여이현의 품에서 얼른 벗어났다.온지유는 급히 일어 서 말했다.“빨리 일어나요. 조금 있으면 사람이 올 것 같은 예감이 들어요.”
온지유는 분명히 알고 있었다. 여기서 그녀는 신무열에게 특별한 존재가 아니었다.그녀도 그저 신무열을 떠보려는것에 불과했다.신무열은 웃었다.“사람을 찾는다 하셨으니 당연히 찾고 나서는 데려 가면 되죠. 하지만 지금은 전쟁 중이니 이곳에 남아 있는 게 가장 안전할지도 모르겠네요.”신무열은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중요한 것은 말하는 중 그의 시선은 시종일관 온지유에게로 꽂혀 있었다는 것이다.온지유 뒤에 서 있는 여이현은 가슴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 그저 빨리 온지유를 끌어안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가죠.”온지유가 입을 열기도 전에 신무열이 말했다.신무열은 어디로 간다고 알리지 않았다. 온지유는 이대로 끌려가면 여이현과 떨어지게 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신무열이 여이현도 데려갈 거라고는 생각되지 않았기 때문이다.온지유는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신무열씨.”온지유가 입을 열었다.신무열은 고개를 돌려 온지유를 바라봤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온지유를 바라보는 그의 시선이 알려주고 있었다. 그는 온지유가 말을 잇기를 기다리고 있었다.온지유는 머뭇거렸다.“절 어디로 데려가려는지 모르겠지만 별로 가고 싶지 않네요. 오고 가고 하면서 시간도 걸리고 전 사람을 찾는 게 최우선이거든요.”온지유는 신무열을 한번 떠봤다. 어디에 가는지도 모르고 마냥 따라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신무열은 표면으로는 큰 표정의 변화가 없었지만 그도 시선 밖으로는 곁에 있는 여이현을 살펴 보고 있었다.여이현도 겉으로는 아무 변화가 없었지만 검은 색 눈동자는 그 어느때 보다도 날카로왔다.“잠시 따라와주기만 하면 돼요. 금방 돌아올겁니다.”“... 알겠어요.”이쯤 되면 온지유도 더 이상 거절할 수 없었다. 온지유는 여이현에게 손짓을 했다. 하지만 여이현은 이대로 순순히 온지유를 보내고 싶지 않았다.이대로 보내버리면 다시는 못 볼것 같았다.“그쪽도 따라와요.”온지유가 걸음을 떼려는 순간 신무열이 뒤에 서있던 여이현에게 말을 걸었다.이곳에서부터 법로가 있는
“무슨 속셈으로 신무열에게 접근한 거지?”법로가 무겁게 깐 목소리로 물었다.그의 말에는 분노가 가득 담겨있었다.법로의 얼굴은 가면 속에 가려져 있어 온지유에게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 신비로움이 온지유를 더욱 불안하게 만들었다.온지유는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그저 우연히 만난 것뿐입니다. 아무런 의도도 없었습니다.”온지유가 사람을 찾으러 왔다는 사실은 신무열만 알고 있었다.신무열이 이 사실을 법로에게 전달 했을지는 모르지만 지금은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치고 마을주민들에게 약을 나눠주던 신무열의 마음씨를 믿을 수밖에 없었다.온지유의 믿음은 옳았다.법로는 웃으며 말했다.“화국인이 여기에는 어쩐 일로 왔지?”말을 마친 법로는 바로 허리춤에서 총을 꺼내 겨눴다.검은 총구가 온지유의 이마에 닿았다. 전쟁과 죽음을 목격해 온 온지유였지만 이 순간 만큼은...온지유는 알고 있었다. 한마디라도 잘못 하면 법로의 총알이 바로 자신의 이마를 관통할 것이라고.“사람을 찾으러 왔습니다. 저는 kA48이라는 독에 걸렸고, 이 독은 Y국인이 개발한 거로 알고 있습니다. 제 친구가 저를 구하려고 이곳까지 오게 되었어요.”“전쟁에 휘말리고 누군가의 적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전 그저 살고 싶었을 뿐이에요.”온지유의 심장은 목구멍까지 올라왔다.말하는 목소리가 떨려왔다.밖에 서 있는 여이현은 안절부절못했다.지금 바로 문을 박차고 들어가고 싶었지만 신무열이 한발 빨랐다.그와 동시에 요한이 여이현을 막아섰다.“두 분 다 법로한테 죽고 싶지 않다면 가만히 있는 게 좋을 겁니다.”요한의 말이 귓가에 을렸다.여이현의 얼굴에 음산한 기운이 스쳤다.요한의 말대로라면 모든 것은 온지유의 예측대로였다. 그는 이미 발각되었고 감시당하고 있었다.하지만 그렇다고 지금 이 상황을 그냥 두고 봐야 한다?여이현은 그럴 수 없었다.여이현은 달리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모든 수단을 동원해 법로를 잡고 온지유를 데리고 이곳을 떠나야 한다.요한은 그의 생각을 읽은 듯
동시에 여이현은 요한의 손목을 낚아채며 격렬한 싸움을 시작했다. 주먹과 발길질이 오가며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대문 입구는 삼엄하게 지켜지고 있는 법로 저택이었지만 내부는 경계하는 사람이 얼마 없었다.우선 법로의 허락 없이 이곳에 들어올 사람은 없었기 때문이다. 요한과 여이현이 요란하게 싸우고 있었지만 공간이 넓은 것도 더해 외부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았다.순간 여이현은 요한을 떨쳐내고 안으로 들어가려 했지만 바로 요한이 뒤쫓아와 두 사람은 쉽게 승부를 가리지 못하고 있었다....방 안.법로는 여전히 총을 들고 있었다.온지유는 멍해져 있었다,그녀는 연합군의 방화와 약탈을 본 적도, 유젠이 소녀들을 학대하는 모습을 본 적도, 수많은 부상자를 목격한 적도 있었다.하지만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그러나 다음 순간 온지유는 어깨가 무거워지는것을 느꼈다.그녀는 신무열의 품에 강하게 감싸안겨 있었다.“제 사람을 함부로 대하지 마세요. 지유 씨가 죽으면 아버지는 아들을 하나 잃게 되는 거라 생각하세요.”신무열의 한마디 한마디는 무겁고 단호했다.온지유는 혼란스러웠다.신무열은 법로의 아들이다. 이곳에서는 강한 권력을 갖고 있었고 법로가 물러나면 신무열이 바로 다음 ‘법로’가 될 터였다.하지만 신무열은 온지유를 위해 친아버지와 맞서 싸우고 있었다.온지유는 자신이 그토록 매력적인 인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신무열이 그녀에게 잘해주기 시작한 건 언제부터였을까?“작정하고 끝까지 이 여자를 지키겠다는 거냐?”법로가 차갑게 물었다.신무열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예. 그리고 저는 한번 뱉은 말은 꼭 지키죠.”이 말을 던지고 신무열은 온지유를 감싸안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리를 떴다.떠나는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법로의 눈빛은 더욱 어두워졌다.온지유라는 이 여자는 율이를 괴롭혔을 뿐만 아니라 그의 아들까지 앗아가려고 하고 있다. 가볍게 시험했을 뿐인데도 신무열이 온지유에게 품을 감정을 알 수 있었다.미인은 화를 부른다 라는 말이
“하지만 도우미 일이 돈을 더 많이 버는걸요.”양시은은 이런 말을 듣는 것이 처음이 아니었다. 가사도우미 중개소를 운영하는 유영숙도 그녀와 같은 나이에 도우미 일을 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고 말했었다. 만약 그녀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이었다면 그녀도 당연히 이 일을 하지 않으려 했을 것이다.하지만 그녀를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하민이에겐 병원비가 필요했다. 비록 지금은 양채은에게서 돈을 빌리긴 했지만 전부 그녀가 나중에 갚아야 하는 돈이었다.하민이 병원비만큼은 그녀는 직접 두 손으로 벌고 싶었고 힘들다고 해도 그녀의 힘으로 벌어온 돈이니 안심하고 쓸 수 있다.“집에 남동생이라도 있어요?”그녀에게 시선을 고정하며 말하는 남자의 몸에선 벌써 반응이 일어나고 있었다.양시은은 아무것도 모른 채 티브이 서랍을 닦고 있었다.“아니요. 남동생은 없고 아들이 있어요. 전 아들 병원비를 벌고 있거든요.”남자는 그녀가 농담하는 줄 알았다.“에이, 그런 농담은 하지 말아요. 몸매도 이렇게 좋은데 어떻게 아들이 있어요. 한눈에 봐도 젊은 아가씨인걸요.”그의 아내는 작년에 아이를 낳았지만 아이를 낳고 난 아내의 모습은 바람을 불어넣은 풍선처럼 살이 오르기 시작했고 결국 인생 최대 몸무게 74kg을 달성했다.아이를 낳고 나면 원래부터 여자의 배는 축 처지게 되었지만 거기에다 지방 살이 있으니 앉을 때마다 불룩 몇 겹으로 튀어나왔다. 그 모습은 정말이지 돼지 같았기에 부부 생활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양시은처럼 허리는 잘록하고 엉덩이는 탄탄하여 보는 사람마저 본능적인 욕망을 일으키게 하지 않았다.“정말이에요. 아들이 올해 세 살인걸요.”양시은은 남자의 속마음을 알 리가 없었던지라 물어보는 대로 전부 대답해주었다. 남자는 그제야 양시은이 농담을 하는 것이 아님을 눈치챘고 표정이 변해버렸다. 아이가 있다는 말은 이미 결혼했다는 의미였기에 손을 대기가 어려워지게 된다.“대충 보니 청소 다 한 것 같은데 오늘은 바깥에 바람이 세게 부니까 강아지 산책은 안
“언니가 임신했을 때를 전 아직도 기억하고 있거든요. 출산을 앞두고 있었는데 그때 언니는 이별의 상처를 받아서 상태가 정말 좋지 않았거든요. 그래서 저도 굳이 그 일에 관해 묻지 않았어요. 또 묻는다는 건 어쩌면 언니의 상처를 후벼 파는 것일지도 모르니까요. 하지만 제 추측으로는 하민이가 언니의 전 남자친구의 아이일 가능성이 아주 크다고 생각해요.”양시은의 전 남자친구는 바로 그였다. 나도현은 태연하게 계속 떠보았다.“그럼 네 언니가 왜 남자친구랑 헤어지게 되었는지는 알아? 아이까지 있었다면서, 그러면 결혼해야 하는 거잖아. 대체 왜 이렇게 된 거래?”“아마도 언니 전 남자친구 쪽에서 결혼을 바라지 않았던 게 아닐까요? 어쨌든 구체적인 건 저도 잘 몰라요. 언니가 말해주지 않았거든요.”양채은은 별생각 없이 말했지만 나도현은 다르게 듣고 있었다. 그는 입꼬리를 올리며 차갑게 비웃었다. 그에게 갑자기 헤어지자고 통보를 해놓고, 그를 고통 속에서 괴롭게 살게 해놓고 동생 앞에서는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고 있지 않았는가. 진정한 피해자는 그였는데 말이다. 그런데 그는 자기도 모르는 새에 쓰레기가 되어 있었다.“어차피 4년도 지난 일이에요. 하민이도 컸고 전 언니에게도 몇 번이나 그때 일은 잊으라고 말했거든요. 좋은 남자를 만나 연애를 하고 결혼도 하고 말이에요. 그러는 게 언니한테도 좋고 하민이한테도 좋을 테니까요.”나도현의 서늘해진 눈빛을 눈치채지 못한 양채은은 계속 말을 이었다. 그는 절대 양시은이 다른 남자를 만나게 하지 않을 것이고 결혼도 하게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었으니까.“됐어. 넌 먼저 들어가서 쉬어. 난 변호사 사무소로 가봐야 하니까. 최근에 새 사건을 맡았거든. 의뢰인과 잘 얘기를 나눠봐야 해.”나도현은 더는 그녀와 이 대화를 이어가지 않았다. 양채은은 그에게 걱정 어린 말을 몇 마디 하곤 차에서 내렸다. 집 안으로 들어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니 나도현은 양시은이 떠올랐고 가슴이 답답해졌다.시동을 걸어 사무소로 향했다. 그는 일로 복잡해
가사도우미 중개소에서 소개해주는 일자리는 대부분 시급이 만원이었다. 그런데 이번에 소개해준 곳에서 만육천 원을 주겠다고 하니 많이 주는 것이었다.몇 시간만 일해도 6만 원을 벌 좋은 기회였던지라 양시은은 당연히 거절할 이유가 없었고 그녀의 대답에 유영숙은 웃으며 말했다.“그럼 내가 자세한 집 주소를 문자로 보내줄게요. 아, 이 집은 디지털 도어락이라 앱으로도 문을 열 수 있다고 했으니까 시은 씨는 그냥 가면 돼요. 엄청나게 잘사는 집이거든요. 일 잘하고 행동이 빠릿빠릿하고 깔끔한 도우미를 원한다고 했으니까 이번에 시은 씨가 잘하면 앞으로 주기적으로 시은 씨만 부를 수도 있을 거예요.”오래 일할 수 있다니.양시은은 핸드폰을 내려놓고 고개를 돌려 하민이를 안았다.“미안해, 하민아. 엄마도 하민이랑 시간 더 보내고 싶었는데 영숙 아주머니가 엄마한테 연락해서 엄마는 지금 일하러 가봐야 할 것 같아.”그녀는 당연히 아들과 더 시간을 보내고 싶었지만 아들 옆에 있으면 돈을 벌 수 없고, 돈이 없으면 아들의 병도 치료할 수 없었다. 그렇게 되면 시간이 있어도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곁에 아들이 없는데...“엄마, 미안해하지 않으셔도 되고 저는 괜찮아요. 오히려 사과해야 할 사람은 저인걸요.”하민이는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엄마는 하민이 병원비를 위해 일하고 계시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엄마는 세상에서 제일 멋진 엄마예요.”아이의 말을 들은 양시은은 가슴이 뭉클해졌다. 적어도 하민이만큼은 그녀를 이해해 주고 있었으니까. 그녀는 병실을 떠나기 전 사과를 예쁘게 깎아 하민이에게 준 뒤 택시를 타고 늘봄아파트로 갔다....한편 나도현은 차를 몰고 양채은은 집 문 앞까지 데려다주었지만 그는 차에서 내릴 생각은 없었다.“태경 씨, 같이 안 들어가요?”양채은은 안전벨트를 풀면서 고개를 돌려 그를 보았다.“며칠 동안 너무 바쁘게 보낸 거 아니에요? 쉬엄쉬엄해요. 입에 풀칠하고 살 정도만 아니면 되니까요.”그녀는 돈을 밝히는 물질적인 여자가 아니었고 남자에게
강태경 성격이 원래 이런 걸 어쩌겠는가. 다른 방면에서는 양채은에게 아주 잘해주었기에 그녀도 굳이 자신의 스킨십을 피하는 이유를 꼬치꼬치 캐묻고 싶지 않았다.“검사는 해봤어? 아기는 어떻대?”나도현은 얼른 화제를 돌렸다. 그러자 양채은은 웃으며 말해주었다.“아기는 무사하대요. 방금 의사 선생님께 물어봤는데 출혈한 흔적도 없다고 했어요. 조금 전 배가 아팠던 건 갑작스럽게 스트레스를 받아서 그런 것이니 집에서 휴식하면 괜찮을 거라고 했어요. 그리고 운동도 되도록 피하라고 했고 이제 처방해준 약을 먹으면 된다고 했어요.”“그럼 요 며칠은 얌전히 집에만 있어. 자꾸 언니 따라 어딜 가지도 말고.”나도현은 양채은과 나란히 복도를 걸었다. 양시은을 지나치면서 그는 깊은 의미가 담긴 두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양채은은 마치 하나의 끈 같았다. 한쪽 끝은 나도현의 손에 단단히 쥐어져 있었고 다른 한 끝은 양시은에게 묶여 있었다. 양채은이 그에게 더 의지할수록 이 끈은 나도현에게 더 단단히 묶이고 있었다.“언니, 우리랑 함께 돌아갈 거야. 아니면 하민이 보러 갈 거야?”양채은은 고개를 돌려 그녀에게 물었다. 그녀가 병원으로 온 이유도 애초에 자신의 아이를 보기 위함이었기에 당연히 그녀의 선택은 후자였다. 어차피 그녀는 나도현을 피하고 싶기도 했다.“그럼 우린 먼저 집으로 갈게. 하민이 상태 확인하고 꼭 택시 타고 돌아와. 버스 타지 마. 버스는 오래 기다려야 하잖아. 그리고 사람도 많아서 앉을 자리도 없잖아.”양채은은 또 그녀에게 걱정 서린 잔소리를 해댔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양시은의 계좌로 돈을 입금했다. 많지는 않았지만 양시은이 한 달 내내 택시를 탈 정도는 되었다.양시은은 두 사람의 모습을 눈으로 배웅하였다. 엘리베이터가 닫히고 나서야 그녀는 계단으로 올라가 하민이의 병실로 갔다.“엄마, 오늘은 왜 이렇게 늦게 오신 거예요?”하민이는 그녀를 보자마자 달려와 꽈악 끌어안았다.“방금 병실 밖에서 싸우는 소리가 들렸어요. 그중에 엄마 목소리도 있었던 것
만약 나도현도 다른 부잣집 자식들처럼 망나니로 살았다면, 여자를 그저 한낱 놀이 상대라고만 생각했다면 양시은이 떠나든 말든 그는 신경조차 쓰지 않았을 것이고 그토록 슬퍼하지 않았을 것이다.양채은도 그와 같은 처지인 것 같았다. 만약 양채은이 양시은을 진심으로 언니로 대하고 걱정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오늘처럼 나서줄 수 있었겠는가.양시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도현이 일부러 자신을 자극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거기에다 예전에는 서로 사랑했던 사이였으니 나도현은 어떤 말로 그녀에게 상처를 줄 수 있는지 아주 잘 알았다. 그래서 그녀는 속으로 한번 또 한 번이고 자신에게 말했다. 나도현의 말을 신경 쓰지도 말고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보내라고 했지만 나도현이 내뱉은 말은 마치 저주를 거는 주문이 되어 그녀의 머릿속에 깊이 박혀 버렸다.“왜 말을 하지 않는 거지?”나도현은 손을 들어 그녀의 얼굴을 꽉 잡으며 억지로 자신과 눈을 맞추게 했다.“안 들리는 것처럼 연기하지 마. 남자 앞에서 재잘재잘 잘 떠들지 않았나? 왜 지금 내 앞에서는 입을 꾹 다물고 있는 거지?”끼익.이때 등 뒤에 있던 문이 열리고 양채은이 나왔다. 나오자마자 맞이하게 된 두 사람의 모습에 걸음을 멈추고 당황한 듯 말했다.“태경 씨, 언니. 두 사람 지금 뭐 해요?”양채은의 시선에서 두 사람은 코가 닿을 정도로 바싹 붙어 있었다. 거리가 너무도 가까운 것이 아니겠는가.하지만 양시은은 그녀가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언니였고 나도현은 그녀와 평생을 함께할 약혼자였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그녀를 배신해도 언니와 약혼자만은 그녀의 편을 들어줘야 하는 것이다.양시은은 본능적으로 뒷걸음질을 쳤지만 나도현은 손을 놓아주지 않았고 그 자세 그대로 유지했다.“전부 다 본 거 아닌가?”“태경 씨, 일단 우리 언니를 놔줘요. 대체...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양채은은 나도현과 양시은은 번갈아 보며 설명을 요구했다.“네 언니가 밖에서 아무 남자나 만나도 다니는 바람에
하지만 여자는 그럼에도 분이 풀리지 않아 양시은을 표독스러운 눈빛으로 보았다. 그녀는 허민기와 연인 사이가 된 지 5년이나 되었다. 그 5년 동안 그녀는 매일 같이 허민기에게 결혼 얘기를 꺼내면서 안정적인 가정을 이루고 싶다고 했지만 허민기는 그때마다 거절했다.허민기는 그녀에게 아직은 젊으니 결혼 결정을 빨리할 필요 없다는 이유를 내놓았다. 그의 말에 그녀는 아무 의심도 하지 않고 믿고 있었지만 오늘 양시은을 보니 모든 게 이해가 갔다. 허민기는 아직 젊어서 결혼을 하기 싫은 게 아니라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와 결혼하지 못해서 결혼하기 싫은 것이었다.만약 결혼 얘기를 꺼낸 사람이 그녀가 아니라 양시은이었다면 허민기는 분명 아주 기뻐하면서 멍청이처럼 헤실헤실 웃었을 것이다.“얼른 가자. 굳이 신고까지 당해야 미친 짓을 멈추려는 건 아니지?”허민기는 다시 한번 여자의 손목을 잡고 끌어당겼다.“여긴 병원이야. 네 집이 아니라고. 지랄도 정도껏 해.”‘지랄도 정도껏 하라니! 지금 내가 이러는 이유도 전부 너 때문이잖아!'‘네가 병원으로 출근하듯 드나들지 않았다면, 양시은과 연락하고 지내지 않았다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고. 난 피해자라고!'서러운 그녀는 하고 싶은 말이 너무도 많았지만 신물이 난다는 눈빛으로 자신을 보고 있는 허민기에 전부 꾹 삼켜버리고 말았다. 말을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애초에 그는 자신이 뭘 잘못했는지 모르고 있었고 그저 그녀가 억지를 부리고 난동을 피운다고 생각하는데 말이다. 소란을 피워봤자 그녀에게 남는 건 미친 여자라는 꼬리표였고 아무런 소용도 없었다.“태경 씨, 저 여자가 분명 저랑 언니한테 손찌검하려고 했어요. 어떡해요. 배가 조금 아픈 것 같아요. 태경 씨, 너무 무서워요.”양채은은 나도현의 팔을 꽉 잡았다.“아기는 괜찮아?”그녀와 양시은의 집안 사정은 좋지 않았다. 비록 부모가 있긴 했지만 차라리 없는 것이 더 낫다고 할 수 있을 정도였다. 한 명은 도박에 빠져 살았고 다른 한 명은 자주 집안의 물건을 때
하얀 종이엔 까만 글씨로 분명하게 적혀 있었다. 하민이와 나도현은 혈연관계가 성립되지 않는다고 말이다.그는 몇 번이나 종이를 펄럭이며 꼼꼼히 읽어보았지만 결과는 바뀌지 않았고 바뀌어버린 건 싸늘해진 그의 눈빛이었다.예상하고 있던 결과였고 하민이가 그의 아들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 더는 양시은을 봐줄 필요가 없었다.오전에 모든 업무를 마친 그는 시간이 남아돌았던지라 병원에 가서 양시은을 괴롭힐 생각을 하면서 차 키를 들고 사무소를 나섰다....한편 병원에서는 양시은이 무슨 말을 하든 여자는 양시은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확신했다. 특히 양시은을 바라보는 허민기의 눈빛을 봤을 때 그녀는 폭탄이 터지듯 폭발하고 말았다.“지금 시대가 개방적인 시대여서 다행인 줄 아세요. 만약 예전이었으면 그쪽 같은 여우는 이미 간통죄로 징역을 받았을 테니까요!”“미쳤어요? 머리에 문제라도 있는 거예요? 우리 언니가 그냥 단순한 친구 사이라고 몇 번을 말했는데 아직도 못 알아듣는 거예요? 평소에도 자주 대화를 나눈 적 없다고 하잖아요. 못 믿겠으면 그쪽 남편 핸드폰 기록이라도 뒤져봐요! 설마 그것도 확인하지 않고 찾아온 거예요? 그리고 그쪽 남편이 우리 언니 학생 시절 사진을 저장하고 있든 말든 우리 언니와 무슨 상관있다고 그래요! 그건 저 사람이 멋대로 저장한 거잖아요!”양채은은 더는 듣고만 있을 수 없었다. 조금 전까지 허민기가 마음에 들었던 그녀였지만 지금은 증오하게 되었다. 애인이 있었으면서 양시은을 찾아와 잘 보이려고 하고 이런 소란을 만들었기 때문이다.“그쪽은 끼어들지 말아요. 입 닥치고 가만히 있어요. 그쪽도 뒤에서 바람이나 피우고 있을지 누가 알겠어요? 보나 마나 그 언니에 그 동생이겠죠.”여자는 양채은을 위아래 훑어보았다.“행색을 딱 보니 답이 나오네요. 그쪽도 누군가의 내연녀인 거죠?!”그 말에 양채은은 버튼이 눌려버렸다. 그녀와 강태경은 분명 떳떳한 커플이었고 약혼식도 했는데 어떻게 내연녀라는 말인가.“뚫린 입이라고 함부로 말하지 마.
양시은은 허민기가 건넨 것을 받지 않았다.“괜찮아. 하민이는 지금 우유를 먹으면 안 되는 상태라고 의사 선생님이 그러셨거든.”“그럼 네가 먹어. 이렇게나 말랐는데 우유라도 먹어야 영양분이 조금이라도 보충될 거 아니야.”허민기는 고집스럽게 우유를 그녀에게 건넸다.“이건 비싼 것도 아니잖아. 우리가 알고 지낸 시간이 얼마인데 설마 이 정도도 못 받아주는 거야?”양채은은 그를 보다가 이내 자신의 언니를 보더니 저도 모르게 입꼬리를 올렸다.어제까지만 해도 그녀는 양시은에게 언젠가 좋은 남자를 만날 거라고, 과거 따윈 신경 쓰지 않는 남자를 만날 거라고 말했기 때문이다.그런데 이렇게 바로 나타나 주지 않았는가. 양시은은 받지 않으려고 했지만 그녀의 생각은 달랐기에 얼른 손을 내밀어 우유를 받았다.“고마워요. 전 언니 동생 양채은이라고 해요. 성함을 알 수 있을까요?”“아, 전 허민기예요.”허민기는 간단히 자신을 소개했다. 말하면서 그는 부단히 양시은을 힐끗힐끗 보았고 양채은은 당연히 그 눈빛을 놓칠 사람이 아니었다. 예전의 그녀도 허민기와 같은 눈빛으로 강태경을 보았으니 허민기가 자신의 언니를 얼마나 좋아하고 있는지를 예상할 수 있었다.게다가 양채은은 자신의 언니가 예전에 어떤 힘든 연애를 했는지 알고 있었기에 늘 양시은이 걱정되었다. 그 상처 속에서 아직도 벗어나지 못했을까 봐 말이다. 하지만 그녀는 양시은이 평생 혼자 살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지금은 하민이가 어려 매일 엄마를 찾고 있다고 하지만 나중에 어른이 되면 분명 자기 가정을 이룰 것이었기에 그때가 되면 그녀의 언니는 외롭게 혼자 살게 되지 않겠는가.양채은이 두 사람을 어떻게 이어줄까 생각하고 있을 때 붉은 원피스를 입은 여자가 다가왔다. 그리곤 세 사람 앞에 멈춰서더니 양채은이 들고 있던 우유 박스를 들어 바닥에 던졌다.“지금 뭐 하는 거예요?”양채은은 멍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정신을 차리곤 미간을 한껏 구겼다.“이건 제 물건이에요. 미친 거라면 우리한테 시비 걸지 말고 데스크에
얇은 잠옷은 나도현의 손에 갈기갈기 찢겨 나갔지만 양시은은 저항하지 않았다. 어차피 저항해봤자 잔뜩 화가 난 나도현의 손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그가 화를 내면 낼수록 그녀는 평범한 일상과 멀어지게 된다. 마치 마리오네트처럼 아무 반응 없는 그녀의 모습에 나도현은 더 화가 치밀었다.“산송장이야?”“그럼 뭘 어떻게 하라고. 말해줘.”양시은은 너무도 서러웠다.“지금 당장 네가 보냈던 사진에서 했던 동작 그대로 전부 보여줘. 내 앞에서 다시 해봐.”조금 전 수치스러웠던 행동을 다시 한번 더 하라고 하니 양시은은 순간 죽고 싶었다. 지금 죽는다면 나도현이 더는 그녀를 괴롭히지 않을 테니까.“그 사진들 내가 이미 전부 저장해 두었지. 너도 하민이한테 보여주고 싶지...”“할게. 하면 되잖아.”양시은은 얼른 침대에서 일어났다. 아들을 위해서 그녀는 어쩔 수 없이 해야 했고 결국 날이 밝을 때까지 그에게 시달리게 되었다.그제야 만족한 나도현은 잠을 자지 않고 욕실로 들어가 샤워를 한 뒤 변호사 사무소로 출발했고 그곳에서 잠을 보충했다.방에 남겨진 양시은은 미약해진 스탠드 조명을 보다가 천장을 바라보았다.이 고통은 대체 언제쯤 끝이 날까.그녀는 새벽이 되어서야 잠들게 되었기에 늦게 일어나게 되었다. 양채은은 평소처럼 그녀의 방 문을 두드리며 그녀를 부르지 않았다. 오히려 아침을 만들어 놓고 주방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양시은은 일어나자마자 나도현이 목에 남긴 흔적을 화장품으로 가린 후 목폴라 티를 입고 1층으로 내려갔다.“언니, 요즘 왜 이렇게 늦게 일어나? 혹시 밤마다 나 몰래 서리하러 간 거 아니야?”양채은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그릇을 챙겨주며 말했다.“농담이니까 너무 마음에 담아두지 마. 난 사실 언니가 조금 늦게 일어났으면 해.”양시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차피 양채은이 한 말은 현실이 될 가능성이 없었으니까. 그녀가 늦게 일어난 건 핸드폰을 늦게까지 봐서가 아닌 밤새 내내 괴롭힌 누군가의 탓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