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단계로 봉합을 마쳤다.신무열의 상처를 처리한 후 요한은 신무열에게 몇 알의 약을 먹였다.“도련님이 이렇게까지 하시는 걸 저는 이해할 수 없네요. 그 사람은 온지유 씨와 아는 사이였습니다. 총소리를 들었을 때 바로 온지유 씨를 구하려고 했어요.”요한은 입술을 꾹 다물더니 다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이 상황에서 법로는 이미 도련님과 지유 씨를 지켜보고 있을 겁니다.”요한의 뜻은 신무열도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여기까지 왔는데 온지유를 구하지 않고 눈앞에서 총에 맞아 죽는 걸 지켜봐야 한다는 것인가?신무열은 차갑게 말했다.“요한, 내 곁에 있은 지 오랜 너라면 알고 있을 텐데. 내가 하는 일엔 나름의 원칙과 이유가 있어. 지금 네가 할 일은 명령을 따르고 지시를 듣는 거야.”물을 필요가 없는 건 묻지 말고, 물어봤자 답은 없었다.말은 하지 않았지만 요한도 잘 알고 있었다.“지유 씨와 여이현에게 방범용 무기를 좀 보내줘.”신무열이 낮고 거친 목소리로 말했다.여이현, 노아.역시 그는 잠입한 사람이었다. 직감은 한 치도 틀리지 않았다.요한은 고개를 끄덕였다.“바로 가겠습니다.”...온지유 측.온지유와 여이현은 이미 별도의 작은 방으로 돌아왔다. 여이현은 그녀의 양 어깨를 잡고 좌우로 살펴보며 다치지 않은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긴 숨을 내쉬었다.“나는 이미 이것저것 신경 쓸 겨를이 없어.”여이현은 냉랭하게 말했다. 그는 군인이었기에 자신의 나라를 지키는 것이 가장 중요했지만 그 다음은 바로 자신의 가족이 가장 중요했다.지금 그의 가족이 눈앞에 있는데 그것조차도 지킬 수 없다면...“이현 씨, 조급하게 움직이지 마요. 법로는 이미 내가 신무열의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들킬 수 있는 일은 벌이지 마세요.”온지유는 낮은 목소리로 여이현의 생각을 끊었다.법로가 어떻게 생각하든 신무열이 법로에게 분명하게 태도를 밝힌 마당에 이 부자가 무슨 연극을 벌이든 상관없었다.지금은 우선 홍혜주와 나민우를 찾아야 한다.신무
요한은 이 말을 남기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났다. 그러나 돌아가는 도중 갑작스러운 불편함을 느끼며 격렬하게 기침을 했고 순간 목구멍에서 비릿한 피 맛이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요한의 눈빛이 변했다. 그는 예상하지 못했다. 여이현이 그에게 내부 손상을 입혔을 줄이야. 도련님과 함께 훈련장에서 나와 수년간 곁에 있었던 그는 거의 모든 사람들에게 상대가 되지 않았다. 방금 여이현과 대결했을 때 만약 신무열과 온지유가 1, 2분만 늦게 도착했더라면 그는 이미 여이현에게 패했을 것이다!여이현은 매우 강했다.만약 그가 화국 출신이 아니었더라면 그의 실력과 야망으로는 반드시 이곳에서 주도권을 잡았을 것이다. 또한 다행히 여이현의 목표는 온지유 하나라는 점이다.요한이 떠난 후, 여이현과 온지유는 방에 홀로 남겨졌다.여이현은 살짝 턱을 들어 온지유에게 신호를 보냈다.“내가 가르쳐줄게.”온지유는 신무열을 찾아가고 싶었지만 요한이 데려가지 않으면 특권을 가지고 있어도 근처를 빙빙 돌 수만 있을 뿐 멀리까지는 갈 수 없었다. 게다가 신무열이 어디에 사는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그녀가 움직이지 않자, 여이현이 다가왔다.“됐어.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마. 불이 오면 물로 막고, 물이 오면 흙으로 막으면 돼. 내가 있는 한 절대 누구도 너에게 해를 입히지 못할 거야.”여이현의 눈빛에는 확신이 담겨 있었다. 그는 진심이었다. 죽더라도 온지유를 지키겠다는 결심이 느껴졌다.“그럴게요.” 온지유는 생각을 멈추고 낮게 대답했다. 여아현은 그녀의 손을 잡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이렇게, 살짝 걸쳐 잡는 거야. 힘을 주지 말고. 하지만 나쁜 사람을 만나면 바로 힘을 줘. 알겠어?”“알겠어요.”온지유는 고개를 끄덕였다.둘은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방 안에서 조용히 머물렀다. 말은 없었지만 눈빛만으로 서로를 의지했다.다음 날 오후.요한이 그들을 데리러 왔다. 요한의 상태는 어제보다 더 안 좋아 보였다. 그의 얼굴은 창백했고 다소 허약해 보였다.“오늘 하루만 시간이 주
온지유는 입술을 꾹 깨물더니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유젠 씨, 수고스럽지만 부상자 쪽으로 저를 데려가 주세요.”“당신!”유젠은 한껏 화가 났지만 별 수가 있을까?그녀는 온지유의 뜻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부상자 수용소 입구에 도착하자 피비린내가 온 사방을 뒤덮고 코를 찌르는 악취가 나고 있었다. 온지유는 참지 못하고 한참 동안 헛구역질을 했다. 유젠이 경멸할 새도 없이 온지유는 마음을 가다듬고 이를 악물며 걸음을 옮겼다.여기는 노예 수용소보다 더 끔찍했다. 잘린 손발, 잘린 귀, 도려낸 눈...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가장 잔인한 장면이었다.많은 사람의 얼굴은 피투성이로 흐릿하게 일그러져 있었고 안으로 더 들어가 보니 몇몇은 구석에 처박혀 있거나 철창에 갇혀 있었다.지네와 독사가 돌아다니고 있는 모습에 온지유는 머리카락이 쭈뼛해졌다.“홍혜주 씨?”온지유는 시험 삼아 불러봤지만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한 명씩 살펴보아도 홍혜주는 보이지 않았다.순간 온지유는 절망했다. 홍혜주는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법로의 부하들에게 붙잡혀 갔는데, 이곳에 버려지지 않았다면 이미 죽었다는 것일까?온지유는 갑작스럽게 숨이 가빠졌고 순간 호흡이 막히며 균형을 잃었다.옆으로 쓰러질 뻔 한 그때, 누군가가 그녀를 잡아 주었다.“조심해요.”낮고 쉰 듯한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온지유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려 보았다.바로 홍혜주였다!하지만 홍혜주의 눈에는 온지유에 대한 낯섦이 묻어 있었다. 홍혜주는 그녀를 알아보지 못했다. 온지유는 즉시 홍혜주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이 분을 데려갈 게요.”여기까지 사람을 찾으러 온 것이 허락된 상태였으니 사람을 데리고 가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유젠은 손을 휘저으며 말했다.“빨리 데려가.”데려가 버리면 더는 귀찮게 할 일이 없으니까.온지유가 막 사람을 데리고 나가자 율의 호위 김명무가 도착했다.김명무는 부상자 수용소를 둘러보다 홍혜주가 없는 것을 확인하고 유젠에게 소리쳤다.“내가 던져 넣은 그 노예는
요한의 실력은 신무열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이곳에서는 거의 아무도 그를 상대할 수 없었지만 결국 여이현이 요한을 쓰러뜨린것이다.“여 대장, 지금 누구의 땅 위에 서 있는지 잊지 마시길. 제가 지유 씨를 해치고 싶었다면 진작 행동에 나섰을 것입니다.”신무열의 눈에는 차가운 빛이 스쳤다. 그는 온지유 앞에 서 있었으며 이 말은 여이현에게 위협이자 경고였다.그는 언제든 온지유에게 손을 댈 수 있었다.온지유는 감춰 쥔 총을 더 꽉 쥐었다.필요하다면 그녀도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신무열은 이어서 말했다.“그저 지유 씨와 몇 마디 하고 싶을 뿐입니다. 문 앞에서 기다리세요. 잊지 마시죠. 내가 아니었으면 당신들은 두 사람을 찾을 기회조차 없었을 거라는걸.”여이현은 대답하지 않고 온지유와 눈을 마주쳤다.온지유의 시선 아래 그는 결국 문 앞으로 걸어갔다. 그러나 문 앞에 도달해서도 여이현은 경계를 늦추지 않고 사나운 눈빛으로 신무열을 주시하고 있었다. 신무열이 온지유에게 무슨 짓을 하기라도 한다면 그는 망설임 없이 신무열의 목숨을 빼앗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설령 온지유와 함께 이곳에서 죽는 한이 있더라도.신무열은 여이현을 무시하고 말했다.“지유 씨는 아마 제가 왜 이렇게 잘해주는지 궁금할 거예요.”“맞아요.”온지유는 신무열을 응시했다. 그녀는 그 답을 알고 싶었지만 동시에 알고 싶지 않았다. 사람의 마음이란 참으로 모순적이다.온지유는 목구멍에 무언가 걸린 듯 불편했고 뱃속이 뒤틀리는 것 같았다.그녀는 재빨리 신무열에게서 시선을 돌리고 더 이상 그를 바라보지 못했다.신무열은 그녀의 뒤에 서서 말했다.“처음 지유 씨를 봤을 때 딱히 흥미는 없었어요. 다만 궁금했을 뿐이에요. 왜 거기에 혼자 있었는지. 그러다 지유 씨 손목에 있는 그 녹색 구슬을 봤죠. 그것은 내 여동생 율이의 것이에요.”온지유는 자신의 생각이 틀리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모든 건 그녀의 손목에 있는 푸른 구슬 때문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그녀에게 이유 없이 잘해줄 리 없었다.그
신무열은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어떻게 이런 독에 중독된 거죠?”그는 여이현이 중독되었다는 사실을 단번에 알아챘다. 더구나 이 독은 법로가 직접 만든 것이었다.여이현과 온지유는 명백히 경성 사람들인데 이런 독에 중독되다니!“뭐라고요?”온지유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녀는 결코 여이현이 중독될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쿵!온지유는 머릿속에 천둥이 친 것 같았다.이제야 모든 것이 밝혀졌다. 여이현이 모든 것을 정리하고 이곳에 온 것은 단순히 부대를 위해서가 아니었고 미처 마무리하지 못한 일이 있어서도 아니었다. 그리고 그녀와의 이혼, 그것도 매우 중요한 이유 중 하나였다.온지유의 독과 여이현의 독은 모두 Y국과 연관이 있었다.온지유는 눈물이 가득한 채로 신무열을 바라보며 물었다.“해독제는 있나요?”홍혜주, 온지유, 인명진, 그리고 사라진 노승아와 죽은 흉터남까지, 모두가 얽히고설킨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신무열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독의 존재는 알고 있지만 제게 해독제는 없어요. 요한, 일단 그를 진정시키도록 해.”신무열은 요한에게 명령을 내렸다.요한은 이미 부상을 당해 혼자서 여이현에게 접근할 수 없었다. 여러 명이 다가와도 여이현을 제압하기는 어려웠다.결국 온지유가 두 팔을 벌려 그에게 다가갔다. 온지유는 여이현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설령 그가 자신을 밀쳐내도 그녀는 그를 꼭 껴안았다.“이현 씨, 나예요. 지유예요...”‘지유’라는 두 글자가 마치 어떤 끌림이라도 되는 듯 제어되지 않던 여이현의 머릿속에는 여러 장면이 빠르게 지나갔고, 다양한 목소리가 그의 귀속에 들어오는 것 같았다.여이현의 눈은 붉게 물들어 있었다.“물러서, 네게 상처를 입힐지도 몰라!”“난 상관없어요!”온지유는 결연한 목소리로 말했다.“이현 씨, 난 여기 있어요...”요한은 이 틈을 놓치지 않고 즉시 주사기를 들고 여이현의 목에 찔렀다.약물이 빠르게 퍼지면서 몇 초 만에 여이현은 기절해 버렸다.온지유는 여이현을 꽉 껴안고 그
이 말이 노석명의 귀에 들어가자 그는 즉시 물었다.“누구와 누구의 유전자 검사지?”노석명 앞에 있던 사람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저는 모릅니다 장로님, 이건 요한이 보낸 혈액 샘플입니다.”노석명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그리고 그는 뒤돌아섰다. 하지만 돌아서려던 노석명은 그 샘플에 어떤 문제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발걸음을 멈추고 다시 돌아서서 남자에게 다가갔다. 노석명은 총을 꺼내 남자의 머리에 겨누고 말했다.“이번 검사는 무관하다는 결과가 나와야 해!”“네, 네.”검은 총구에 남자의 머리카락이 쭈뼛 섰고 그는 대답을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다....30분 후.남자는 보고서를 요한에게 건넸다.“결과가 나왔습니다.”요한은 보고서를 확인하지 않고 그대로 가지고 갔다.이 장면을 노석명은 멀리서 지켜보고 있었다.그 장면을 보고 있는 노석명의 눈빛은 차가웠다. 이윽고 노석명은 요한을 따라가도록 사람을 보냈다.요한은 곧 신무열의 곁으로 돌아와 감정 결과를 그에게 건넸다. 신무열은 기쁜 마음으로 보고서를 펼쳤지만 혈연관계가 없다는 결과에 표정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어떻게 이런 결과가 나올 수 있단 말인가!“요한, 이 검사...”“도련님, 검사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 저는 실험실 밖에서 계속 지키고 있었습니다.”그는 의심스러운 사람은 전혀 보지 못했다. 실험실의 모든 사람은 그를 잘 알고 있었으며 그의 앞에서 조작할 가능성은 없었다.신무열이 온지유의 피를 채취해 검사를 지시한 때에서야 요한은 왜 그가 온지유에게 그토록 특별한 감정을 가지는지 이해하게 되었다.신무열의 머리는 윙윙거렸다. 온지유와 자신이 혈연 관계가 아니라면 이 구슬은 어떻게 그녀의 손에 들어갔단 말인가? 인명진은 도대체 무슨 의도를 가진 것일까?신무열은 얼굴을 어둡게 물들이며 말했다.“인명진을 찾아 와. 산 채로든 시신으로든 꼭.”“알겠습니다.”요한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즉시 대답했다.요한이가 실험실로 달려가 검사를 요청한 이 모든 상황은 법로에게
검사 결과가 눈앞에 놓여 있었고 율이와는 아직 검사를 하지 않았다. 하지만 구슬은 온지유의 손에 있었다. 어쩌면 이것은 인명진의 음모일지도 모른다.진실을 명확히 밝히기 전까지는 당사자인 온지유에게 무슨 일이 생겨서는 안 되었다.신무열의 눈에 차가운 빛이 스쳤다.“내 지시에 따라 실행하면 잘못될 일은 없어.”신무열은 옷을 갈아입고 법로의 곳으로 향하기 전 문 앞에서 율이와 합류했다. 율이는 그를 보자마자 얼굴의 베일을 벗고 부드럽게 말했다.“오빠.”율이의 얼굴은 매우 섬세하고 아름다웠다. 백무열은 담담하게 응답했다.“그래.”율이는 마음이 우울해졌다.그녀가 신무열 앞에서 아무리 노력해도 그는 항상 무심한 태도를 보였다. 온지유에게는 요한까지 배치해 보호했으면서 말이다.그녀는 온지유가 어떻게 그렇게 큰 매력을 가지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들어와라.”법로는 그들이 이야기를 나누는 소리를 듣고 바로 말했다.율이는 기뻐하며 말했다.“오빠, 아버지께서 부르셔. 빨리 들어가자.”신무열은 얇은 입술을 굳게 다물고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그들이 들어가자 법로는 둥근 식탁에 앉아 식사를 권했다. 법로의 얼굴에는 또 다른 가면이 씌워져 있었다. 가면은 그의 턱 위쪽만 가렸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이목구비와 표정은 볼 수 없었다.법로의 턱과 얇은 입술로 그의 외모가 나쁘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그때, 법로의 목소리가 율이의 생각을 끊었다.“너희를 여기에 부른 것은 한 가지 중요한 일을 발표하기 위해서다. 난 이제 나이가 많다. Y국은 통합이 필요하며 분열되어선 안 된다. 앞으로 나는 연구에만 전념할 생각이다. 부족의 일은...”“언제부터 관여하셨는데요?”신무열은 직설적으로 말을 끊었다. 법로는 오로지 자신의 실험에만 몰두해 왔으며 가장 충성스러운 부하들은 악행을 일삼고 있었다.하지만 법로는 이를 저지하지 않았고 이는 곧 그의 묵인과 다름없었다.Y국의 내부 분열과 전투, 그리고 풍부한 광물 자원은 다른 연합군들이 이 지역을 노리게 된 이
율이는 손을 저으며 말했다.“저는 안 돼요, 오빠. 저는 아무것도 모른다고요.”법로의 지위를 물려받는 것은 좋은 일이긴 했지만, 법로가 이유 없이 물러날 리는 없었다. 이 일은 신무열을 시험하기 위한 것일 수도, 혹은 자신을 시험하기 위한 것일 수도 있었다. 어쨌든 지금은 이 문제에 휘말려서는 안 되었다.신무열은 웃으며 말했다.“모르면 배우면 되지. 너는 항상 빨리 배웠잖아?”법로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나며 말했다.“너희를 이 자리에 부른 건 서로 책임을 돌리라고 한 것이 아니다. 형제자매로서 서로를 더 많이 지지해야 지. 율아, 이전 기억은 생각나지 않아도 괜찮다. 앞으로가 더 중요해. 연회 때는 Y국의 좋은 인재들을 너희에게 소개해 주마.”선택의 여지가 없는 결정이었다.율이는 식사 내내 억눌린 분노를 참으며 가까스로 식사를 마쳤다. 그리고 서둘러 자신의 거처로 돌아왔다.김무명에게 노석명을 불러달라고 전하려 했지만 노석명이 먼저 찾아왔다.노석명은 침울한 눈빛으로 말했다.“신무열 앞에서는 조심해!”“장로, 그게 무슨 뜻이죠?”율이는 이해할 수 없었다.법로가 자신을 부족원들에게 공개하려는 것은 알지만 이제 자신의 정체는 영지 내 모든 이들이 알고 있었다. 그녀는 법로의 딸이자 명실상부한 아가씨였다. 신무열과 특별히 관계가 가까운 것도 아니었고 그가 자신을 싫어하는 것도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왜 그 앞에서 조심해야 하는 걸까?노석명은 차가운 표정으로 말했다.“신무열은 온지유와 자신의 유전자 검사를 진행하고 있어.”그는 실험실을 떠나려던 참이었다. 하지만 혈액이 요한에 의해 전달되고 또한 그가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았다. 요한은 신무열의 충성스러운 부하로 오직 신무열만을 위해 일했다.율이는 크게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노석명이 이 사실을 알게 된 이상 이 일은 그대로 진행되어서는 안 된다.율이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녀의 눈빛에 싸늘한 기색이 스쳤다.“나는 온지유가 이곳을 살아서 나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을 거예요
일주일 만에 권다솔은 많은 일을 해냈다.그녀의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업무 태도는 이미 팀장의 인정을 받았다.“내일 고객을 만나러 가는데 지연 씨도 같이 가죠.”“네? 제가 정말 가도 되나요?” 그녀는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이전에 그녀는 여이현의 비서로 일했던 경험이 있다 보니 혼자서도 충분히 고객을 만나러 갈 수 있었다.하지만 회사에 들어온 지 겨우 일주일 만에 아직 수습 기간도 지나지 않은 짧은 시간 안에 고객을 만날 기회를 준 걸 봐서는 팀장이 그녀를 얼마나 인정하는지 알 수 있었다.“물론이죠. 지연 씨의 업무 능력을 지켜본 결과 저보다 더 뛰어난 것 같은데요. 고객을 만나는 건 당연히 가능하죠.”팀장은 그녀를 전적으로 믿었다.고객을 만나기 전에는 많은 준비 작업이 필요했다. 팀장은 프로젝트 자료를 모두 그녀에게 메일로 보내 주었다.권다솔은 그렇게 오랜만에 메일을 열게 되었다.팀장이 보낸 파일 외에 배진호가 보낸 메일이 눈에 들어왔다. 바로 삭제하려 했지만 손이 미끄러지는 바람에 메일을 열어버렸다.이미 열린 김에 그가 무슨 말을 보냈는지 확인해 보기로 했다.그녀는 처음부터 끝까지 꼼꼼히 읽다가 마지막 부분을 보게 되었을 때 깜짝 놀라고 말았다.그날 밤 그녀와 함께 있었던 사람이 배진호란 말인가?그럼 남태건이 했던 말은 또 무슨 뜻이지?권다솔은 배진호를 차단 목록에서 해제하려는 순간 아빠가 전화를 걸어와 그녀를 사무실로 호출했다.문을 열자마자 화가 잔뜩 난 권용민의 얼굴이 보였다.“아빠, 무슨 일이길래 이렇게 화가 나셨어요?”권다솔은 그의 어깨를 주무르며 말했다.“진정하세요. 저녁에 제가 맛있는 음식을 해줄게요.”“나랑 네 엄마가 전에 정말 어리석었어. 어린애한테 속아서 완전 농락당했지 뭐니. 네가 그 녀석이랑 엮이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지. 아니었으면 불구덩이에 뛰어드는 꼴이었을 거야.”남태건 얘기만 나오면 권용민은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그의 이름조차 부르고 싶지 않았다. 권다솔이 의아해하자 그는 두툼한 서류 뭉치를
그녀는 단순히 남태건을 비웃은 게 아니라 자신마저 비웃었다.정말로 몇 번이나 사람을 너무 쉽게 믿었다.“신뢰란 누가 주는 게 아니라 스스로 쟁취하는 거예요. 이제 그만 가세요. 부모님께 무릎을 꿇는 건 괜찮지만 저한테 이렇게까지 하는 건 정말 아니에요.”“권다솔!”남태건은 다시 손을 뻗어 그녀의 옷자락을 꼭 붙잡았다.그는 손에 힘을 가했다. 혹시라도 손을 놓는 순간 그녀를 영원히 잃게 될까 봐 두려웠다.“어서 돌아가요. 앞으로 태건 씨만의 인생을 사세요. 저도 제 인생을 살 거예요. 이미 말했잖아요. 우리 둘은 친구조차 될 수 없다고.”권다솔은 아예 외투를 벗어버렸다.남태건의 손에는 외투만 남아 있었고 아무것도 붙잡지 못했다.그는 그녀가 부모님과 함께 집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그저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김영은은 몇 번이나 뒤를 돌아봤지만 하려던 말을 애써 삼켜버린 채 그의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졌다.집에 돌아온 권다솔은 부모님께 아까 얘기는 하지 않고 곧바로 회사 얘기를 꺼냈다.“아빠, 엄마. 오늘 오후부터 바로 회사로 가서 일하고 싶어요. 직책은 정해 놓으셨어요?”“굳이 이렇게 서두를 필요 없어. 이틀 정도 푹 쉬어라.”비록 권용민은 모든 준비를 마쳤지만 막상 그녀가 출근하려 하니 마음이 약해졌다.아직 회사에 들어가지 않은 상태라면 자유롭게 놀 수 있었지만 정식으로 출근하게 되면 다른 직원들처럼 매일 출근 도장을 찍어야 했고 함부로 결근할 수 없는 생활이 될 터였다.“아빠 머리에도 이제 흰머리가 있네요.”그녀는 손을 뻗어 그의 흰머리를 뽑아주었다.권용민은 여전히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몇 가닥뿐이야. 나도 거울 보면서 봤어. 내 나이에 흰머리 있는 건 정상이지.”“관리를 잘하면 아빠 나이엔 여전히 까만 머리를 유지할 수 있어요. 제가 걱정되는 건 알겠지만 언제까지 아빠 엄마의 보호 아래서 살 수는 없잖아요. 이제는 제가 아빠 엄마를 돌볼 때예요.”그녀는 부드럽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권다솔의 강력한 요청에 권용민
“병이 있는 사람이 치료를 받는 건 생명을 연장하려는 거고 병이 없는 사람이 치료를 받는 건 장수하는 사람이 목을 매달겠다는 거나 다름없지. 그냥 속이려고 한 말이야.”정미진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자식은 결국 부모를 이기지 못하는 법이지.’그는 원래 배진호가 이미 의료비를 납부했다고 말하려 했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돈을 냈건 안 냈건 그녀가 병이 없는 이상 제대로 된 환자처럼 치료를 받을 리 없었다.그리고 배진호에게 의료비를 환불하면 명백히 어떤 속임수가 있다는 걸 드러내는 꼴이었다.고민 끝에 그는 묘안을 생각해 냈다.“이렇게 할까? 매일 약을 가져다줄 테니 먹지 말고 수액도 맞지 마. 그럼 혹시라도 네 아들이 물어보면 우리 둘 다 곤란하지 않을 거야.”“그래, 네 말대로 할게. 역시 의사라 그런지 머리가 참 좋네.”그녀는 자신에게 큰 재앙이 닥쳐오고 있다는 걸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비행기에서 내린 뒤 권다솔은 바로 집으로 향했다. 남태건은 평소처럼 손에 크고 작은 선물을 들고 그녀의 부모님께 극진히 대하고 있었다.그녀의 부모님은 예전과 달리 그에게 예의를 갖췄지만 거리감을 유지하며 말했다.“태건아, 우리한테 이런 거 줄 필요 없어.”“마음만 고맙게 받을게. 돈이 꽤 들었을 텐데 우린 답례로 줄 것도 없으니 그냥 안 받는 게 낫단다.”남태건은 말에 숨긴 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그들은 지금 그를 전혀 반기지 않았고 자주 만나는 것도 원치 않았다. 결혼 얘기는 더더욱 바라지 않는 듯했다.그가 더 애써 만회하려 하면 할수록 김영은은 더욱 단호하게 말했다.“그만 돌아가.”“제가 뭐가 부족한지 말씀만 해주세요. 다 고치겠습니다. 제발 이렇게 단번에 거절하지 말아 주세요.”남태건은 무릎을 꿇으며 애원했다.너무 갑작스러운 나머지 둘은 깜짝 놀란 채 그를 일으키려 했다.하지만 남태건은 끝까지 무릎을 꿇고 꼼짝하지 않았다.“만약 아무 말씀도 안 하시고 저를 쫓아내신다면 계속 무릎 꿇고 있을 겁니다.”“태
정미진은 순간 당황했다.그동안 배진호가 모든 걸 양보했던 이유는 그녀가 병에 걸렸기 때문이었다.만약 그가 진실을 알게 된다면 분명 크게 소란을 피울 것이고 결국 권다솔과 다시 만날 가능성도 있었다.이런 가능성을 떠올리자 정미진은 두 눈이 깜깜해졌다.“진호야, 엄마 말 좀 들어봐.”“사실이 이렇게 뻔히 드러났는데 뭘 더 설명하시겠다는 거예요? 나이도 있으신 분이 어찌 이렇게 어린애처럼 구세요?”배진호는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이런 걸로 농담하면 안 되죠.”의료 기록에는 명확히 병명이 적혀 있었고 게다가 이미 전문가와 상담한 후였다.더 이상 시간을 끌면 안 되는 병이었다.지금 수술을 받으면 완치 후 정상적인 생활이 가능하지만 조금만 더 늦추면 수술해도 병상에서 벗어나지 못할 수도 있었다.그는 정미진을 그대로 방치할 수 없었다.“내가 이러는 것도 다 너 잘되라고 그런 거야. 네가 내 속을 좀 덜 썩이면 이렇게까지 거짓말할 필요도 없잖니.”정미진은 더 이상 변명이 통하지 않자 모성애라는 명분을 내세워 배진호를 압박하려 했다.장황하게 이유를 늘어놓으며 말했지만 그는 예상과 달리 소리를 지르거나 격하게 화내지도 않았다. 그저 병상 앞에 서서 슬픈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엄마가 원하던 건 전부 이루셨잖아요. 이젠 제발 말 좀 들으세요. 의사 선생님 말씀대로 치료받으세요.”그제야 정미진은 깨달았다.그는 그녀가 수술을 받지 않았다는 사실은 알아냈지만 그녀가 병에 걸리지 않았다는 사실은 몰랐다.‘그거면 됐지!’그녀는 계속해서 이 핑계로 배진호에게 자신이 원하는 것을 강요할 수 있었다.정미진은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말했다.“그럼 권다솔과 이혼해. 네가 이혼 서류를 엄마 앞에 가져오는 날부터 엄만 치료받을게.”“이미 이혼 절차는 끝냈어요. 지금은 이혼 숙려 기간일 뿐이에요.”배진호는 차분히 설명했다.어쩔 수 없이 이렇게 말해야 했다. 혹시라도 그녀가 화를 내면 몸을 전혀 돌보지 않을 게 뻔했기 때문이다.“눈앞에 이혼 서류가
“도대체 누가 밖에서 헛소문을 퍼뜨린 거야! 진짜 사람을 이렇게 괴롭혀도 되는 거니?”김영은은 화를 참지 못하고 소리 질렀다. 그녀는 소문을 퍼뜨린 계정을 찾아내면 꼭 고소해서 법적 책임을 묻겠다고 단단히 결심했다.“불난 집에 부채질한 거겠죠. 전 누구 소행인지 알 것 같은데요.”권다솔은 이미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다.과연 그 사람 말고 누가 이런 일을 저지를 수 있을까?권용민은 다급하게 물었다.“누군데? 아빠한테 말해봐. 가만두지 않겠어.”“남태건이요.”권다솔은 덤덤하게 내뱉었다.순간 전화 너머로 정적이 흘렀다.둘은 서로 눈을 마주치더니 믿기 어렵다는 눈빛이었다.남태건은 평소 평판이 좋은 사람이었고 권다솔에게도 진심으로 대했으며 둘을 친부모처럼 공경했다. 그런 사람이 어떻게 이런 일을 뒤에서 꾸밀 수 있단 말인가?권다솔 역시 부모님이 쉽게 믿지 않을 걸 알았다. 그래서 한 마디 덧붙였다.“태건 씨는 늘 저와 결혼하고 싶어 했어요. 우리 집 문을 한참이나 두드리면서 이웃들까지 다 소란스럽게 만들었고 제가 거절하자 엄마, 아빠를 찾아갔잖아요. 지금은 엄마, 아빠까지 거절했으니 극단적인 행동을 벌이는 것도 이상하지 않죠.”“그런데, 다솔아, 우리한테 증거가 없잖아. 증거도 없이 태건이를 탓하는 건 너무 불공평한 것 같아.”그녀의 어머니는 망설이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마 남태건을 오해하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만약 정말로 남태건이 이런 일을 저질렀다면 지금까지 꾸며낸 이미지로 그들을 속여 왔다는 뜻이었다.그런 사람을 딸에게 소개하려 했다는 사실에 그녀는 큰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결국 권용민이 결정을 내렸다.“좋아. 다솔이 넌 밖에서 편히 놀다가 돌아와. 엄마랑 아빠가 조사해 볼게. 만약 정말로 태건이의 소행이라면 앞으로 우리 집 근처에도 못 오게 할 거야.”“아니에요. 저도 티켓 끊고 바로 돌아갈게요. 엄마, 아빠가 제 일 때문에 계속 신경 쓰시는 게 너무 죄송해요. 밖에서 논다고 해도 마음이 편치 않을 거예요.”그녀는
배진호는 이 시간에 잠들지 않았다.그는 이미 조사 자료를 손에 넣은 채 한 장 한 장 넘겨 보고 있었다.마지막까지 다 보고 난 그는 도대체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랐다.어머니의 수술은 가짜였지만 병은 진짜였다. 그의 어머니는 현재 폐암 초기 상태였고 심장 상태도 별로 좋지 않았다. 게다가 두 병이 함께 겹친 상황이라 치료하기 쉽지 않을 게 분명했다.이런 상황인데도 어머니는 수술을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그에게 계속해서 권다솔과 헤어지라고 압박하고 있었다.배진호는 내일 어머니와 진지하게 이야기해 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잠 자기 전 시간을 확인하려고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그렇게 남태건이 이 시간에 보낸 도발적인 메시지를 보게 되었다.그 순간, 배진호는 온몸의 혈액이 멈춘 듯한 느낌을 받았다.남태건과 권다솔이 결혼한다고?이미 실시간 검색어에 올랐다면 틀림없이 사실일 것이다.하지만 이게 권다솔 본인의 뜻인지 아니면 그녀의 부모님께서 결정한 건지는 알 수 없었다.아마도 전자일 가능성이 컸다. 권다솔의 부모님은 딸의 의견을 존중하는 분들이다. 만약 그녀가 원하지 않았다면 그들이 강제로 결혼 시킬 리 없었다.‘왜 이런 일은 항상 나한테만 일어나는 거지?’그는 권다솔을 포기할 수도 그렇다고 그녀의 결혼을 망칠 수도 없었다. 이제 두 사람은 정말 인연이 아닌 것 같았다. 그만 집착을 버리고 놓아주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생각했다.잠들기 전, 배진호는 권다솔에게 메일 한 통을 보냈다. 메일의 마지막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난 술집에서의 그날 밤을 잊을 수 없어. 네가 내 목에 팔을 두르고 내 이름을 부르던 그 순간을. 다솔아, 네가 정말 날 싫어한다면 이 메일을 삭제해 줘. 앞으론 더 이상 널 방해하지 않을게. 하지만 언제든 네가 날 찾고 싶다면 난 항상 그 자리에 있을 거야.”배진호는 권다솔이 메일을 확인하는 습관이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녀가 이 메일을 발견할 때쯤이면 아마 한참 시간이 흐른 뒤일 것이다.어쩌면 그녀는 이 메일을 평생 보지 않을
남태건은 그들이 참으로 안타깝게 느껴졌다. 사랑하는 사람과 끝까지 함께하지 못한 결말이란 결국 이런 것이었다.그는 절대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남태건은 자신이 권다솔을 얼마나 깊이 사랑하는지 알고 있었다. 결혼 후에는 매일 밤 집으로 돌아와 그녀와 오붓한 시간을 보낼 것이고 만약 아이를 가지게 된다면 셋이 함께 여행을 다니며 행복한 가정을 꾸릴 것이다.그는 자신의 결혼 생활이 부모님의 결혼 생활보다 훨씬 더 행복하리라 확신했다.“제 결혼 문제에 대해서는 간섭하지 마세요. 오늘 두 분을 부른 이유는 단지 이 소식을 알리기 위해서입니다. 며칠 안에 양가 부모님이 만나서 함께 식사할 테니 저의 체면을 깎지 말아 주세요.”말을 마친 남태건은 몸을 돌려 떠났다.그는 더 이상 부모와 할 이야기가 없었다.이후 그는 권용민에게 연락해 식사 날짜를 논의하려 했다. 그러나 권용민은 미안한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미안하네. 우리 다솔이가 여행을 떠나서 언제 돌아올지 모르겠네. 식사 약속은 다음에 다시 잡도록 하지.”그는 권용만의 말 속에서 거절의 의미를 느낄 수 있었다.다음에 다시 논의하자는 한마디는 구체적인 날짜를 말하지 않았기에 즉 식사 약속을 잡고 싶지 않다는 뜻이었다.“아버님, 다솔이가 돌아오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양가 부모님께서 먼저 만나도 되지 않겠습니까?”그러나 남태건은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이미 자신의 부모님께 이야기를 전했는데 이 약속이 무산된다면 그의 부모님께서 어떻게 생각하겠는가?그러나 권용만운 딸의 행복을 최우선으로 여겼다.“태건아, 양가의 만남은 중요한 일이라 서두를 필요 없어. 다솔이가 돌아오면 의견을 들어보고 결정하자. 이런 일은 신중하게 처리해야 하네.”남태건은 어떻게 전화를 끊었는지조차 기억나지 않았다.그가 유일하게 확신할 수 있는 건 권다솔이 그를 피하려고 멀리 떠났을 뿐만 아니라 그녀의 부모님마저 이전처럼 친절하게 대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그렇다면 이제 남은 방법은 하나뿐이었다.‘권다솔, 모든 건
그리고 엄마가 아프다는 시점도 너무 절묘했다. 설마 아픈 척하는 건가?이럴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에 배진호는 아무 말 없이 자리를 떴다. 반드시 철저히 조사해야 했다.그가 떠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배진호의 어머니는 잠에서 깨어났다.아들의 의심을 불러일으킨 것도 모른 채 여전히 의사와 대책을 논의하고 있었다.“내 아들 앞에서 꼭 내 병이 심각한 것처럼 말해줘야 해. 안 그러면 걔 마음이 여전히 그 여자한테 기울어 있을 거야.”“걱정 마. 동창끼리 네 계획을 망치기라도 하겠어?”의사는 가슴을 두드리며 장담했다.“내가 다 맡을 테니 신경 쓰지 마. 그런데 사실 나도 부탁이 하나 있는데 우리 아들이 유학을 가야 하는데 돈이 조금 모자라거든. 좀 도와줄 수 있어? 올해 보너스 나오면 바로 갚을게.”정미진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흔쾌히 승낙했다.어차피 그녀는 돈에 쪼들리지 않았으니.배진호가 비서로 일할 때부터 매달 월급 일부를 그녀에게 보내왔고 이후 그가 회사를 차려 독립하면서 더 많은 돈을 보내왔다.그녀는 사고 싶은 것을 마음껏 사면서 이제는 좋은 며느리를 얻는 데만 집착하고 있었다.“돈은 천천히 갚아도 돼. 여유가 생기면 갚아. 동창 사이인데 내가 너를 믿지 않겠어?”그녀의 말에 의사는 기쁘게 고개를 끄덕였다.병실을 나선 의사는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렸다.“사람이 참 복에 겨워 사는 줄 모르네. 배진호 같은 아들에, 그토록 훌륭한 며느리까지 얻었는데 뭐가 불만이야? 게다가 그 집안의 돈은 몇 대가 써도 부족함이 없는데 굳이 문제를 만들 필요가 있나? 나라면 절대 그러지 않았을 거야. 그냥 일도 때려치우고 집에서 술이나 한잔하면서 낚시도 하고 가끔은 카드놀이도 하면서 살겠지. 생각만 해도 얼마나 여유롭겠어?”하지만 그는 정미진이 아니었고 방관자로서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다음 날 아침, 권다솔은 간단히 짐을 챙긴 후 캐리어를 끌고 여행사로 향했다.그곳에는 대형 버스가 대기하고 있었고 모든 인원이 모이자 운전기사는 공항으로
지금 그의 모습이 헌신짝이랑 다를 게 뭐가 있지?권다솔 때문에 이렇게까지 할 가치가 있을까?배진호는 전혀 그녀의 말을 듣지 않았다.그는 여전히 석규리를 등진 채 그녀를 무시했다.석규리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해도 소용없다는 것을 깨닫고 결국 다른 사람의 도움을 청하기로 했다.한 통의 메시지를 보낸 뒤 불과 30분도 채 되지 않아 배진호의 어머니가 직접 나타났다.정미진을 본 순간 배진호는 정말 미칠 것만 같았다.“엄마! 몸도 안 좋으신데, 게다가 이제 막 수술을 끝내셨잖아요. 퇴원하시면 어떡해요?”“내가 와서 다행이지! 아니면 네가 여기서 얼마나 더 멍청하게 서 있었을지 몰라. 진호야, 엄마가 곧 죽게 생겼는데 너 정말 엄마를 좀 편하게 보내줄 수 없는 거니?”정미진은 배진호의 이마를 꾹 눌러가며 안타까워했다.권다솔의 가정환경이 조금이라도 평범했다면 돈으로 해결했을 것이다.하지만 권다솔은 권씨 가문의 아가씨로서 정미진이 아무리 손을 뻗어도 권씨 가문까지 닿을 수 없었기에 결국 배진호에게만 압박을 넣을 수밖에 없었다.“엄마가 부탁할게. 죽기 전에 몇 날이라도 좀 조용히 지낼 수 있게 해줘. 더 이상 문제 일으키지 말고 권다솔과 깨끗이 끝내. 네가 꼭 여기에 남아 있겠다면 엄마도 너랑 같이 있을 거야.”정미진은 외투를 벗어 석규리의 손에 건넸다.그녀는 안에 얇은 옷만 입고 있었다.석규리가 옷을 다시 정미진의 어깨에 덮어주려고 했지만 정미진은 단호하게 거절했다.“엄마가 아들 교육을 제대로 못 시킨 탓에 내 아들이 한밤중에 여기서 바람 맞고 있잖아. 나만 병실에서 잘 먹고 편히 있을 수는 없지 않겠어?”“엄마, 정말 제가 무릎이라도 꿇어야 멈추시겠어요?”배진호의 눈에는 이미 생기가 없어진 채 허망한 표정으로 바라봤다.역시나 자신에게 가장 큰 상처를 주는 사람은 가장 가까운 사람이라는 사실을 다시금 깨달았다.“진호야, 엄마는 네가 무릎 꿇으라고 이러는 게 아니야. 엄마가 원하는 건 네가 권다솔과 완전히 끝내는 거야. 이게 엄마의 마지막 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