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심에 시간 있어요?]온지유는 아래에 레스토랑 주소까지 덧붙였다. 그리고 채미소에게도 문자를 보냈다.[점심 12시.]온지유의 문자를 보고 채미소는 싸늘한 미소를 지었다. 여이현을 상대할 방법은 진작 생각해 놓았다....같은 시각, 여이현은 기분이 꽤 좋았다. 온지유가 먼저 약속을 잡았기 때문이다.온지유는 한 번도 먼저 약속을 잡은 적이 없었다.‘갑자기 정신 차린 건가? 이혼하기 싫어서 이러는 거 맞지?’여이현은 이게 좋은 신호라고 생각했다. 부잣집 사모님으로 살던 그녀에게 역시 자그마한 오피스텔은 무리라고 생각했다.‘이따가 가서 괜히 도도한 척해볼까? 내가 당한 것만큼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걸 보여줘야지. 나 같은 남자 세상에 어디 있어? 다시는 이혼 소리 안 나오게 할 거야.’사무실에 들어왔다가 여이현이 생각에 잠긴 것을 보고 배진호는 짧게 노크했다.“대표님, 오후에 주주 회의 있습니다.”“미뤄줘요. 점심에 갈 데가 있어요.”배진호는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오늘 일정은 아주 많았다. 한 일정을 미루게 되면 모든 일정을 다 미뤄야 했다.“어디에 가시는데요?”“지유 만나...”여이현은 말을 하다 말고 갑자기 바꿨다.“지유가 날 찾아서요.”“두 분 드디어 화해하신 거예요?”여이현은 핸드폰을 내려놓고 의자에 기대며 입꼬리를 올렸다.“글쎄, 지유가 하는 걸 봐서요.”배진호는 미소를 지었다.“그럼 미리 축하드릴게요.”여이현은 그를 힐끗 노려보며 말했다.“축하하긴 일러요. 내가 아직 용서하기로 한 건 아니니까.”“...”배진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속으로는 여이현이 이미 용서하고도 남았다는 것을 잘 알았다. 표현을 안 해서 그렇지 엄청 신이 났을 것이다.‘정말 다행이다.’배진호는 남몰래 안도했다. 여이현의 기분이 좋아야 비서인 그도 쉽게 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보너스가 하늘에서 떨어지는 일이 있을지도 몰랐다.“지금 바로 차를 준비하겠습니다.”여이현은 잠깐 고민하다가 물었다.“이번에는 어떻게 해야 할
배진호까지 같은 말을 하는 것을 듣고 여이현은 약간 회의감이 들었다.‘결국 다 내 문제라는 건가?’“차 준비해요. 지금 바로 출발할 거예요.”...온지유는 차에 앉아서 레스토랑 정문에 도착했다. 채미소는 창문을 톡톡 두드리면서 물었다.“여기예요?”“네. 12시에 만나기로 했어요.”“좋아요.”채미소는 온지유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이번에 도와준 건 기억하고 있을게요. 내가 편집장이 되면 지유 씨도 보조 자리에서 벗어날 수 있어요.”“이만 들어가요.”온지유는 예약한 룸의 번호를 알려줬다. 채미소는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갔다.이때 온지유의 핸드폰이 울렸다. 문자를 확인한 그녀는 미소를 지었다. 보육원 일이 잘 해결된 것이다.그녀는 채미소가 멀어져간 방향을 바라봤다. 당분간은 그녀의 일을 방해할 여력이 없어 보였다. 그녀는 곧장 보육원을 향해 달려갔다.20분 후, 여이현의 차가 레스토랑에 도착했다. 그는 백미러로 옷매무시를 정리하고 나서 차 문을 열었다. 그리고 한적한 복도를 따라 룸으로 걸어갔다채미소는 이미 안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발걸음 소리를 들은 그녀는 자세를 바로 하고 여이현이 들어오기만 기다리고 있었다.여이현은 문을 열고 들어갔다. 주변을 빙 둘러봤지만, 온지유는 안 보이고 채미소만 보였다. 원래는 평온했던 얼굴이 빠르게 어두워졌다.“여이현 대표님.”채미소는 미소를 지으며 머리를 끄덕였다. 속으로는 온지유가 정말 성공한 것에 약간 놀라고 있었다.“지유는요?”“지유 씨는 화장실에 갔어요. 금방 돌아올게요.”여이현도 이게 함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온지유를 놓칠 1%의 가능성이 있기에 참기로 했다.안으로 들어간 그는 채미소와 가장 먼 자리에 앉아 기다리기 시작했다. 채미소는 적극적으로 술을 따라주며 말했다.“조금 기다리시면 금방 돌아올 거예요. 음식도 주문해 놨어요. 그 전에 저랑 술 한잔할까요?”여이현은 차가운 표정으로 거절했다.“저는 지유를 기다릴 거예요.”“지유 씨 만나러 오신 거 알아요. 술 마시면
유리가 깨지는 소리에 채미소는 깜짝 놀랐다.“대표님?”여이현은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응시했다.“다시 한번 물을게요. 온지유, 지금 어디 있어요?”바닥에 널브러진 유리 조각과 여이현의 표정을 보고 취기는 빠르게 가셨다. 여이현이 이 정도로 매몰찬 사람일 줄은 채미소도 생각지 못했다.여이현이 싸늘한 모습으로 몸을 일으키는 것을 보고 그녀는 빠르게 대답했다.“지유 씨는 여기 없어요. 여기는 저랑 대표님만 있어요.”여이현은 표정이 더욱 차가워지며 물었다.“오늘 날 만나러 온 사람이 그쪽이란 말이에요?”“네.”그가 왜 이런 반응을 보이는지 몰랐던 채미소는 눈치 없이 말을 보탰다.“지유 씨가 여진그룹 직원이었다길래 제가 부탁했어요. 저는 대표님께 연락할 방법이 없지만 지유 씨는 있으니까요. 저 정말 간절해요. 그리고 지유 씨랑은...”“꺼져요.”들으면 들을수록 화가 치밀어 올랐던 여이현은 단호하게 외쳤다. 채미소는 안색이 다 창백해졌다.“거짓말 아니에요. 지유 씨는 제 직장 동료예요. 옛정을 봐서라도 이번 한 번...”쾅!여이현은 아예 테이블을 뒤집어 버렸다. 채미소는 완전히 말을 잃었다. 한마디라도 더 했다가 뒤집어지는 것은 그녀가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그녀는 여이현에 대해 몰라도 너무 몰랐다. 단단히 화난 여이현은 평소처럼 감정 조절을 잘 못했다. 그런데도 그녀는 밥 한 끼로 해결할 수 있을 줄 알았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여이현은 그녀가 건넨 술도 마시지 않았다.여이현은 도무지 화를 견딜 수가 없었다. 온지유가 이런 식으로 다른 여자와 자리를 마련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사과받을 줄 알고 온 그만 우스워지는 순간이었다.‘내가 한참 얕봤네.’여이현은 차가운 얼굴로 나가버렸다. 다리에 힘이 풀려버린 채미소는 여전히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안에 있었다.여이현이 이런 안색으로 나온 것을 보고 배진호는 또 온지유와 다툰 줄 알았다. 그는 눈치껏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차 문을 열어줬다.여이현은 넥타이를 잡아당기며 차갑게 말했다.“온지유
온지유의 편집장이 말했었다. 그녀의 편집 실력이 좋다고.편집장은 그녀에게 보육원의 에피소드도 예능에 편집해 넣으라고 했다.만약 더 많은 후원을 받게 되고 투자자도 생기면 고정 예능이 되어 아이들이 커가는 모습을 예능에 전부 담을 수 있다고 했다.온지유도 처음엔 보육원의 아이들이 새로운 집에서 살기를 바라며 찍은 것이었다.그녀의 능력에는 한계가 있어 세상 모든 아이들을 챙길 수는 없지만, 그녀가 할 수 있는 데까지 최선을 다해 아이들을 도와주고 싶었다..“이번엔 정말 고마웠어요.”온지유가 겸손하게 말했다.“뭘요. 급하게 연락했는데 이유도 묻지 않고 도와주셨잖아요. 저야말로 고마워서 어떻게 보답을 해야 할지 모르겠네요.”“그런 말은 하지 말아요. 지유 씨도 저를 도와주었으니 당연히 저도 지유 씨가 고맙죠.”한정민은 그녀를 데리고 안으로 들어갔다.“걱정하지 말고 이 일은 나한테 맡겨요. 보육원의 아이들도 분명 행복해질 거예요.”온지유가 들어가자 아이들은 바로 해맑은 얼굴로 그녀를 불렀다.“이모!”아이들은 그녀에게 모여들었다.“이모, 우리도 고기 먹을 수 있대요!”“이모이모, 이것 봐요. 예쁜 머리핀 생겼어요!”아이들은 앞다투어 서로가 가진 것을 자랑해댔다.아이들은 원래부터 순진해 작은 것에서 쉽게 만족하고 기뻐했다. 배불리 먹기만 한다면 아이들은 아주 행복해했다.“그래, 너희들은 앞으로도 매일 고기랑 영양 가득한 반찬도 많이 먹을 수 있을 거야.”온지유는 아이들에게 말했다.“이모, 감사합니다.”“아니야, 나한테 고마워할 필요 없어. 다 이 삼촌 덕분인걸. 이 삼촌이 너희들이 고기 먹을 수 있게 도와준 거야.”“감사합니다, 삼촌.”아이들은 예의 바르게 감사 인사를 했고 자신들에게 잘해준 사람을 똑똑히 기억하려 했다.한정민은 웃으며 아이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원장은 바빴던지라 온지유와 인사를 나눈 뒤 아이들을 보살폈다.“이모, 늑대 삼촌은? 늑대 삼촌은 왜 안 왔어요?”이때 한 아이가 커다란 눈을 초롱초롱 뜨며 물었다.
온지유는 메스꺼움을 꾹꾹 참아보려고 했다. 참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그러나 예민해진 후각 탓에 바로 구역질을 해댔다.그녀와 대화를 나누던 한정민은 갑작스러운 그녀의 모습에 걱정스럽게 물었다.“지유 씨, 괜찮아요...?”온지유는 더는 참지 못하고 코와 입을 막은 채 얼른 화장실로 달려갔다.그녀의 반응을 보던 한정민은 의아했다.‘보통 임신한 사람들이 저런 증상을 보이던데...'순간 그는 뭔가 깨달은 듯 이내 그녀가 들어간 화장실 문 앞에 서 있었다.온지유는 한참 게워냈다.입덧이 점점 더 심해지고 있었다.메스꺼움이 사라지고 온지유는 찬물로 세수하고 나왔다.한정민은 그녀에게 휴지를 건넸다.“고마워요.”“왜 구역질을 하게 된 거예요? 혹시... 임신이에요?”“네, 바로 알아채셨네요.”온지유는 숨기지 않았다.한정민은 놀란 듯했다. 오랜만에 만난 그녀는 임신한 상태였다.“축하해요. 오랜만에 만났는데 아이가 생겼을 줄은 몰랐네요.”그는 축하할 일이라고 생각했다.그러나 온지유는 담담하게 웃으며 말했다.“저희 다른 거 얘기해요.”한정민도 눈치챘다. 온지유가 아이의 아빠에 대해 말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것을.그녀가 화제를 바꾸려 하니 한정민도 더는 말을 꺼낼 수 없었다.다만 마른 몸을 이끌고 임신한 채로 열심히 일하는 그녀의 모습을 빤히 보았다.‘혹시 임신 때문에 여진에서 그만둔 건가?'비서보다 못한 직급임에도 그녀가 방송국에 취직한 것을 보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한정민은 다소 이해할 수가 없었다.‘여자랑 남자는 체력부터가 다르잖아. 만약 배가 불러오기라도 하면 그때도 무거운 몸을 이끌고 아침 일찍 일어나 출근하러 다닐 건가?'그녀가 측은하게 느껴졌다.한정민은 바로 비서에게 말했다.“가서 먹을 것 좀 사 와요.”“네, 대표님.”비서는 바로 자리를 떠났다.온지유는 카메라 감독과 자기 일을 하러 갔다.피비린내를 맡았을 때 그녀는 손을 올려 코와 입을 막았다. 미간을 찌푸린 채 올라오는 메스꺼움을 꾹꾹 참고
“정민 씨를 놔줘요!”온지유는 한정민 입가에서 새어 나오는 피를 보며 소리를 질렀다.한정민을 감싸드는 그녀의 모습에 여이현은 더욱 화가 났다.“하, 왜. 마음이 아파? 내가 오늘 이 자식 절대 가만두지 않을 거야!”그는 발을 들더니 한정민을 걷어찼다.한정민은 입을 열 새도 없이 그의 발길질에 다시 철퍼덕 쓰러졌다.놀란 온지유는 얼른 한정민을 부축하면서 일으켰다.여이현이 그런 그녀를 말리며 소리를 높였다.“지금 감히 내 앞에서 이 자식을 걱정해?!”온지유는 여이현을 보며 그의 손을 뿌리쳤다.“왜 이렇게 막무가내인 거예요! 한정민 씨는 저랑 같이 새로 일하게 된 사람이라고요!”“그걸 내가 믿을 것 같아?”여이현이 화가 난 목소리로 말했다.“이 자식이 방금 널 부축하려고 했어. 네 배 속에 있는 아이가 걱정되어서 그런 게 아니라면, 왜 임산부가 쓸 물건까지 준비해 두었겠냐고! 이 자식이 그 자식이 아니라면 왜 널 걱정하겠어? 하, 넌 지금 또 날 속이고 있잖아!”“제가 언제 이현 씨를 속였다고 그래요!”“날 속인 적 없다고?”여이현은 더욱 화가 치밀었다.“나랑 먼저 약속을 잡은 사람은 너야. 그런데 자리에는 없고 엉뚱한 채미소가 있더라?”그의 말에 온지유는 더는 당당하게 말할 수가 없었다.“그래요, 이 일로 당신을 이용하려고 했던 걸 인정할게요. 우리 일은 나중에 다시 얘기해요. 지금은 한정민 씨 상태가 먼저예요.”“아직도 이 자식을 걱정하고 있어?”온지유의 한 마디 한 마디 전부 그의 심기를 건드렸다.한정민은 코피를 흘리고 있었다. 그는 코를 꽉 잡으며 말했다.“전 괜찮아요. 두 분이 먼저 대화를 나눠서 오해를 푸세요.”온지유도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 그녀는 여이현이 왜 이렇듯 충동적으로 행동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고 그와 대화가 통할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정민 씨, 미안해요. 저 때문에 정민 씨가 다치셨네요. 제가 일단 상처부터 치료해 드리고 나서 사과하고 배상해 드릴게요.”“전 괜찮아요. 혼자 치료하러 갈 수 있
두 사람의 싸움에 누구도 감히 입을 열 엄두를 내지 못했다.여이현의 두 눈은 충혈되어 있었고 얼음장처럼 차가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온지유의 말에 이성을 잃은 것이 분명했다.그러나 온지유는 이상하리만큼 냉정했다.그녀는 두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가슴 쪽에서 씁쓸한 감정이 밀려왔다.이혼은 그녀가 원하는 것이었지만 이런 식으로 그와 이혼하게 되니 실망에 휩싸였다.어쩌면 그녀는 여이현이 자신에게 이렇듯 화를 낼 거라곤 예상하지 못해서 그런 것일 수도 있다.또 어쩌면 오늘 너무도 많은 일이 벌어져 그녀가 아직 전부 받아들이지 못한 상태에서 그와 다투게 되어 그런 것일 수도 있다.여이현은 그녀를 빤히 보았다.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듯했다.온지유는 한참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네, 그럼 동사무소에서 봬요.”그녀의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올지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그는 기대하고 있었다는 생각에 헛웃음만 나왔다.“그래!”여이현은 몸을 틀어 떠나버렸다.떠나기 전에 바닥에 있는 임산부를 위한 비타민을 보곤 짜증이 났는지 발로 걷어찼다.그는 성큼성큼 걸어가 그녀의 시야에서 사라졌다.온지유는 떠나가는 그의 뒷모습을 빤히 보았다. 감정 기복이 너무도 심했던지라 이번엔 어지럼증에서 그치지 않았고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온지유 씨!”보육원의 원장이 쓰러지는 그녀를 보며 바로 달려와 부축했다.“괜찮아요? 안 되겠어요. 쉬어요.”온지유는 원장의 부축을 받으며 바닥에 앉아 정신을 차리려고 애를 썼다.“자, 물 좀 마셔요.”선생님이 그녀에게 물잔을 건넸다.“고마워요.”온지유는 억지 미소를 지으며 물잔을 받았다.“온지유 씨, 세상에 싸우지 않고 사는 부부는 없어요. 그래도 싸우고 나면 한 침대에서 자면서 화해해야 한다고 했어요.”그녀에게 물잔을 건넨 선생님은 그녀를 위로했다.“그러니까 너무 속상해하지 말아요.”사실 예전의 그녀는 여이현과 다툰 적이 거의 없었다.그녀는 불만이 있어도 꾹 참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여이현은 그녀를 무시하며
“괜찮아요. 제가 차를 끌고 왔거든요. 혹시 바쁘시면 먼저 가셔도 돼요. 나중에 제가 다시 정식으로 사과하러 찾아갈게요.”한정민이 말했다.“정말 그러지 않아도 돼요. 전 오늘 거저 맞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온지유 씨의 능력을 믿으니 나중에 오늘 맞은 것에 대한 보상을 톡톡히 받아낼 수 있을 거라고 믿어요!”상처를 치료한 뒤 한정민은 온지유와 대화를 나누다가 먼저 보육원을 떠났다.한정민은 차에 올라타자마자 나민우에게 문자를 보냈다.[온지유 씨 임신한 거 알고 있었어?]같은 시각 나민우는 집에 있었다.머리는 헝클어져 있었고 옷도 캐주얼하게 입고 있었다. 한정민의 문자를 읽자마자 그의 손이 멈칫했다.[몰랐어.]한정민의 의외라고 생각했다.[그럼 앞으로 온지유 씨랑 잘 되긴 글렀네. 지유 씨가 다른 사람의 아이를 배고, 오늘 보니까 좋아하는 사람도 있는 것 같던데 말이야. 네가 지유 씨랑 잘 되긴 아주 힘들겠어.]나민우의 안색이 변했다. 결국 포기한 듯한 문자를 보냈다.[지유가 행복하다면... 난 그거면 돼...]그는 이내 한 마디 더 전송했다.[지유가 직접 행복하다고 해야 나도 행복할 수 있을 거야.][지유 씨가 임신하긴 했어도 상황을 보니까 아기 아빠를 포기하려는 것 같았어. 혹시 아기 아빠라도 되어줄 생각은?]나민우가 답장했다.[그런 기회가 나한테도 차려진다면 그럴 생각이야.]한정민은 저도 모르게 감탄했다.[와, 정말 순애 녀석이네. 우리 중에서 네가 제일 순애보일 거야. 10년 넘게 변함없이 지유 씨를 짝사랑하다니... 정말 대단해.]나민우는 한숨을 내쉬며 다시 소파에 앉았다.사실 짝사랑은 그에게 힘든 것이었다.하루하루 마음 편히 잠을 자 본 적이 없었다.온지유가 다른 사람을 좋아하는 것이 불안하면서도 자신에게 과분한 사람이라 어울리지 않을까 봐 걱정되기도 했다.그가 바라는 것은 사실 아주 간단했다. 온지유가 행복한 것.그는 온지유가 자신을 좋아해 주는 것까지 바라지 않았다. 그저 의지할만한 사람과 행복하게 사는 모
일주일 만에 권다솔은 많은 일을 해냈다.그녀의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업무 태도는 이미 팀장의 인정을 받았다.“내일 고객을 만나러 가는데 지연 씨도 같이 가죠.”“네? 제가 정말 가도 되나요?” 그녀는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이전에 그녀는 여이현의 비서로 일했던 경험이 있다 보니 혼자서도 충분히 고객을 만나러 갈 수 있었다.하지만 회사에 들어온 지 겨우 일주일 만에 아직 수습 기간도 지나지 않은 짧은 시간 안에 고객을 만날 기회를 준 걸 봐서는 팀장이 그녀를 얼마나 인정하는지 알 수 있었다.“물론이죠. 지연 씨의 업무 능력을 지켜본 결과 저보다 더 뛰어난 것 같은데요. 고객을 만나는 건 당연히 가능하죠.”팀장은 그녀를 전적으로 믿었다.고객을 만나기 전에는 많은 준비 작업이 필요했다. 팀장은 프로젝트 자료를 모두 그녀에게 메일로 보내 주었다.권다솔은 그렇게 오랜만에 메일을 열게 되었다.팀장이 보낸 파일 외에 배진호가 보낸 메일이 눈에 들어왔다. 바로 삭제하려 했지만 손이 미끄러지는 바람에 메일을 열어버렸다.이미 열린 김에 그가 무슨 말을 보냈는지 확인해 보기로 했다.그녀는 처음부터 끝까지 꼼꼼히 읽다가 마지막 부분을 보게 되었을 때 깜짝 놀라고 말았다.그날 밤 그녀와 함께 있었던 사람이 배진호란 말인가?그럼 남태건이 했던 말은 또 무슨 뜻이지?권다솔은 배진호를 차단 목록에서 해제하려는 순간 아빠가 전화를 걸어와 그녀를 사무실로 호출했다.문을 열자마자 화가 잔뜩 난 권용민의 얼굴이 보였다.“아빠, 무슨 일이길래 이렇게 화가 나셨어요?”권다솔은 그의 어깨를 주무르며 말했다.“진정하세요. 저녁에 제가 맛있는 음식을 해줄게요.”“나랑 네 엄마가 전에 정말 어리석었어. 어린애한테 속아서 완전 농락당했지 뭐니. 네가 그 녀석이랑 엮이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지. 아니었으면 불구덩이에 뛰어드는 꼴이었을 거야.”남태건 얘기만 나오면 권용민은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그의 이름조차 부르고 싶지 않았다. 권다솔이 의아해하자 그는 두툼한 서류 뭉치를
그녀는 단순히 남태건을 비웃은 게 아니라 자신마저 비웃었다.정말로 몇 번이나 사람을 너무 쉽게 믿었다.“신뢰란 누가 주는 게 아니라 스스로 쟁취하는 거예요. 이제 그만 가세요. 부모님께 무릎을 꿇는 건 괜찮지만 저한테 이렇게까지 하는 건 정말 아니에요.”“권다솔!”남태건은 다시 손을 뻗어 그녀의 옷자락을 꼭 붙잡았다.그는 손에 힘을 가했다. 혹시라도 손을 놓는 순간 그녀를 영원히 잃게 될까 봐 두려웠다.“어서 돌아가요. 앞으로 태건 씨만의 인생을 사세요. 저도 제 인생을 살 거예요. 이미 말했잖아요. 우리 둘은 친구조차 될 수 없다고.”권다솔은 아예 외투를 벗어버렸다.남태건의 손에는 외투만 남아 있었고 아무것도 붙잡지 못했다.그는 그녀가 부모님과 함께 집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그저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김영은은 몇 번이나 뒤를 돌아봤지만 하려던 말을 애써 삼켜버린 채 그의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졌다.집에 돌아온 권다솔은 부모님께 아까 얘기는 하지 않고 곧바로 회사 얘기를 꺼냈다.“아빠, 엄마. 오늘 오후부터 바로 회사로 가서 일하고 싶어요. 직책은 정해 놓으셨어요?”“굳이 이렇게 서두를 필요 없어. 이틀 정도 푹 쉬어라.”비록 권용민은 모든 준비를 마쳤지만 막상 그녀가 출근하려 하니 마음이 약해졌다.아직 회사에 들어가지 않은 상태라면 자유롭게 놀 수 있었지만 정식으로 출근하게 되면 다른 직원들처럼 매일 출근 도장을 찍어야 했고 함부로 결근할 수 없는 생활이 될 터였다.“아빠 머리에도 이제 흰머리가 있네요.”그녀는 손을 뻗어 그의 흰머리를 뽑아주었다.권용민은 여전히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몇 가닥뿐이야. 나도 거울 보면서 봤어. 내 나이에 흰머리 있는 건 정상이지.”“관리를 잘하면 아빠 나이엔 여전히 까만 머리를 유지할 수 있어요. 제가 걱정되는 건 알겠지만 언제까지 아빠 엄마의 보호 아래서 살 수는 없잖아요. 이제는 제가 아빠 엄마를 돌볼 때예요.”그녀는 부드럽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권다솔의 강력한 요청에 권용민
“병이 있는 사람이 치료를 받는 건 생명을 연장하려는 거고 병이 없는 사람이 치료를 받는 건 장수하는 사람이 목을 매달겠다는 거나 다름없지. 그냥 속이려고 한 말이야.”정미진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자식은 결국 부모를 이기지 못하는 법이지.’그는 원래 배진호가 이미 의료비를 납부했다고 말하려 했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돈을 냈건 안 냈건 그녀가 병이 없는 이상 제대로 된 환자처럼 치료를 받을 리 없었다.그리고 배진호에게 의료비를 환불하면 명백히 어떤 속임수가 있다는 걸 드러내는 꼴이었다.고민 끝에 그는 묘안을 생각해 냈다.“이렇게 할까? 매일 약을 가져다줄 테니 먹지 말고 수액도 맞지 마. 그럼 혹시라도 네 아들이 물어보면 우리 둘 다 곤란하지 않을 거야.”“그래, 네 말대로 할게. 역시 의사라 그런지 머리가 참 좋네.”그녀는 자신에게 큰 재앙이 닥쳐오고 있다는 걸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비행기에서 내린 뒤 권다솔은 바로 집으로 향했다. 남태건은 평소처럼 손에 크고 작은 선물을 들고 그녀의 부모님께 극진히 대하고 있었다.그녀의 부모님은 예전과 달리 그에게 예의를 갖췄지만 거리감을 유지하며 말했다.“태건아, 우리한테 이런 거 줄 필요 없어.”“마음만 고맙게 받을게. 돈이 꽤 들었을 텐데 우린 답례로 줄 것도 없으니 그냥 안 받는 게 낫단다.”남태건은 말에 숨긴 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그들은 지금 그를 전혀 반기지 않았고 자주 만나는 것도 원치 않았다. 결혼 얘기는 더더욱 바라지 않는 듯했다.그가 더 애써 만회하려 하면 할수록 김영은은 더욱 단호하게 말했다.“그만 돌아가.”“제가 뭐가 부족한지 말씀만 해주세요. 다 고치겠습니다. 제발 이렇게 단번에 거절하지 말아 주세요.”남태건은 무릎을 꿇으며 애원했다.너무 갑작스러운 나머지 둘은 깜짝 놀란 채 그를 일으키려 했다.하지만 남태건은 끝까지 무릎을 꿇고 꼼짝하지 않았다.“만약 아무 말씀도 안 하시고 저를 쫓아내신다면 계속 무릎 꿇고 있을 겁니다.”“태
정미진은 순간 당황했다.그동안 배진호가 모든 걸 양보했던 이유는 그녀가 병에 걸렸기 때문이었다.만약 그가 진실을 알게 된다면 분명 크게 소란을 피울 것이고 결국 권다솔과 다시 만날 가능성도 있었다.이런 가능성을 떠올리자 정미진은 두 눈이 깜깜해졌다.“진호야, 엄마 말 좀 들어봐.”“사실이 이렇게 뻔히 드러났는데 뭘 더 설명하시겠다는 거예요? 나이도 있으신 분이 어찌 이렇게 어린애처럼 구세요?”배진호는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이런 걸로 농담하면 안 되죠.”의료 기록에는 명확히 병명이 적혀 있었고 게다가 이미 전문가와 상담한 후였다.더 이상 시간을 끌면 안 되는 병이었다.지금 수술을 받으면 완치 후 정상적인 생활이 가능하지만 조금만 더 늦추면 수술해도 병상에서 벗어나지 못할 수도 있었다.그는 정미진을 그대로 방치할 수 없었다.“내가 이러는 것도 다 너 잘되라고 그런 거야. 네가 내 속을 좀 덜 썩이면 이렇게까지 거짓말할 필요도 없잖니.”정미진은 더 이상 변명이 통하지 않자 모성애라는 명분을 내세워 배진호를 압박하려 했다.장황하게 이유를 늘어놓으며 말했지만 그는 예상과 달리 소리를 지르거나 격하게 화내지도 않았다. 그저 병상 앞에 서서 슬픈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엄마가 원하던 건 전부 이루셨잖아요. 이젠 제발 말 좀 들으세요. 의사 선생님 말씀대로 치료받으세요.”그제야 정미진은 깨달았다.그는 그녀가 수술을 받지 않았다는 사실은 알아냈지만 그녀가 병에 걸리지 않았다는 사실은 몰랐다.‘그거면 됐지!’그녀는 계속해서 이 핑계로 배진호에게 자신이 원하는 것을 강요할 수 있었다.정미진은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말했다.“그럼 권다솔과 이혼해. 네가 이혼 서류를 엄마 앞에 가져오는 날부터 엄만 치료받을게.”“이미 이혼 절차는 끝냈어요. 지금은 이혼 숙려 기간일 뿐이에요.”배진호는 차분히 설명했다.어쩔 수 없이 이렇게 말해야 했다. 혹시라도 그녀가 화를 내면 몸을 전혀 돌보지 않을 게 뻔했기 때문이다.“눈앞에 이혼 서류가
“도대체 누가 밖에서 헛소문을 퍼뜨린 거야! 진짜 사람을 이렇게 괴롭혀도 되는 거니?”김영은은 화를 참지 못하고 소리 질렀다. 그녀는 소문을 퍼뜨린 계정을 찾아내면 꼭 고소해서 법적 책임을 묻겠다고 단단히 결심했다.“불난 집에 부채질한 거겠죠. 전 누구 소행인지 알 것 같은데요.”권다솔은 이미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다.과연 그 사람 말고 누가 이런 일을 저지를 수 있을까?권용민은 다급하게 물었다.“누군데? 아빠한테 말해봐. 가만두지 않겠어.”“남태건이요.”권다솔은 덤덤하게 내뱉었다.순간 전화 너머로 정적이 흘렀다.둘은 서로 눈을 마주치더니 믿기 어렵다는 눈빛이었다.남태건은 평소 평판이 좋은 사람이었고 권다솔에게도 진심으로 대했으며 둘을 친부모처럼 공경했다. 그런 사람이 어떻게 이런 일을 뒤에서 꾸밀 수 있단 말인가?권다솔 역시 부모님이 쉽게 믿지 않을 걸 알았다. 그래서 한 마디 덧붙였다.“태건 씨는 늘 저와 결혼하고 싶어 했어요. 우리 집 문을 한참이나 두드리면서 이웃들까지 다 소란스럽게 만들었고 제가 거절하자 엄마, 아빠를 찾아갔잖아요. 지금은 엄마, 아빠까지 거절했으니 극단적인 행동을 벌이는 것도 이상하지 않죠.”“그런데, 다솔아, 우리한테 증거가 없잖아. 증거도 없이 태건이를 탓하는 건 너무 불공평한 것 같아.”그녀의 어머니는 망설이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마 남태건을 오해하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만약 정말로 남태건이 이런 일을 저질렀다면 지금까지 꾸며낸 이미지로 그들을 속여 왔다는 뜻이었다.그런 사람을 딸에게 소개하려 했다는 사실에 그녀는 큰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결국 권용민이 결정을 내렸다.“좋아. 다솔이 넌 밖에서 편히 놀다가 돌아와. 엄마랑 아빠가 조사해 볼게. 만약 정말로 태건이의 소행이라면 앞으로 우리 집 근처에도 못 오게 할 거야.”“아니에요. 저도 티켓 끊고 바로 돌아갈게요. 엄마, 아빠가 제 일 때문에 계속 신경 쓰시는 게 너무 죄송해요. 밖에서 논다고 해도 마음이 편치 않을 거예요.”그녀는
배진호는 이 시간에 잠들지 않았다.그는 이미 조사 자료를 손에 넣은 채 한 장 한 장 넘겨 보고 있었다.마지막까지 다 보고 난 그는 도대체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랐다.어머니의 수술은 가짜였지만 병은 진짜였다. 그의 어머니는 현재 폐암 초기 상태였고 심장 상태도 별로 좋지 않았다. 게다가 두 병이 함께 겹친 상황이라 치료하기 쉽지 않을 게 분명했다.이런 상황인데도 어머니는 수술을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그에게 계속해서 권다솔과 헤어지라고 압박하고 있었다.배진호는 내일 어머니와 진지하게 이야기해 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잠 자기 전 시간을 확인하려고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그렇게 남태건이 이 시간에 보낸 도발적인 메시지를 보게 되었다.그 순간, 배진호는 온몸의 혈액이 멈춘 듯한 느낌을 받았다.남태건과 권다솔이 결혼한다고?이미 실시간 검색어에 올랐다면 틀림없이 사실일 것이다.하지만 이게 권다솔 본인의 뜻인지 아니면 그녀의 부모님께서 결정한 건지는 알 수 없었다.아마도 전자일 가능성이 컸다. 권다솔의 부모님은 딸의 의견을 존중하는 분들이다. 만약 그녀가 원하지 않았다면 그들이 강제로 결혼 시킬 리 없었다.‘왜 이런 일은 항상 나한테만 일어나는 거지?’그는 권다솔을 포기할 수도 그렇다고 그녀의 결혼을 망칠 수도 없었다. 이제 두 사람은 정말 인연이 아닌 것 같았다. 그만 집착을 버리고 놓아주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생각했다.잠들기 전, 배진호는 권다솔에게 메일 한 통을 보냈다. 메일의 마지막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난 술집에서의 그날 밤을 잊을 수 없어. 네가 내 목에 팔을 두르고 내 이름을 부르던 그 순간을. 다솔아, 네가 정말 날 싫어한다면 이 메일을 삭제해 줘. 앞으론 더 이상 널 방해하지 않을게. 하지만 언제든 네가 날 찾고 싶다면 난 항상 그 자리에 있을 거야.”배진호는 권다솔이 메일을 확인하는 습관이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녀가 이 메일을 발견할 때쯤이면 아마 한참 시간이 흐른 뒤일 것이다.어쩌면 그녀는 이 메일을 평생 보지 않을
남태건은 그들이 참으로 안타깝게 느껴졌다. 사랑하는 사람과 끝까지 함께하지 못한 결말이란 결국 이런 것이었다.그는 절대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남태건은 자신이 권다솔을 얼마나 깊이 사랑하는지 알고 있었다. 결혼 후에는 매일 밤 집으로 돌아와 그녀와 오붓한 시간을 보낼 것이고 만약 아이를 가지게 된다면 셋이 함께 여행을 다니며 행복한 가정을 꾸릴 것이다.그는 자신의 결혼 생활이 부모님의 결혼 생활보다 훨씬 더 행복하리라 확신했다.“제 결혼 문제에 대해서는 간섭하지 마세요. 오늘 두 분을 부른 이유는 단지 이 소식을 알리기 위해서입니다. 며칠 안에 양가 부모님이 만나서 함께 식사할 테니 저의 체면을 깎지 말아 주세요.”말을 마친 남태건은 몸을 돌려 떠났다.그는 더 이상 부모와 할 이야기가 없었다.이후 그는 권용민에게 연락해 식사 날짜를 논의하려 했다. 그러나 권용민은 미안한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미안하네. 우리 다솔이가 여행을 떠나서 언제 돌아올지 모르겠네. 식사 약속은 다음에 다시 잡도록 하지.”그는 권용만의 말 속에서 거절의 의미를 느낄 수 있었다.다음에 다시 논의하자는 한마디는 구체적인 날짜를 말하지 않았기에 즉 식사 약속을 잡고 싶지 않다는 뜻이었다.“아버님, 다솔이가 돌아오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양가 부모님께서 먼저 만나도 되지 않겠습니까?”그러나 남태건은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이미 자신의 부모님께 이야기를 전했는데 이 약속이 무산된다면 그의 부모님께서 어떻게 생각하겠는가?그러나 권용만운 딸의 행복을 최우선으로 여겼다.“태건아, 양가의 만남은 중요한 일이라 서두를 필요 없어. 다솔이가 돌아오면 의견을 들어보고 결정하자. 이런 일은 신중하게 처리해야 하네.”남태건은 어떻게 전화를 끊었는지조차 기억나지 않았다.그가 유일하게 확신할 수 있는 건 권다솔이 그를 피하려고 멀리 떠났을 뿐만 아니라 그녀의 부모님마저 이전처럼 친절하게 대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그렇다면 이제 남은 방법은 하나뿐이었다.‘권다솔, 모든 건
그리고 엄마가 아프다는 시점도 너무 절묘했다. 설마 아픈 척하는 건가?이럴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에 배진호는 아무 말 없이 자리를 떴다. 반드시 철저히 조사해야 했다.그가 떠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배진호의 어머니는 잠에서 깨어났다.아들의 의심을 불러일으킨 것도 모른 채 여전히 의사와 대책을 논의하고 있었다.“내 아들 앞에서 꼭 내 병이 심각한 것처럼 말해줘야 해. 안 그러면 걔 마음이 여전히 그 여자한테 기울어 있을 거야.”“걱정 마. 동창끼리 네 계획을 망치기라도 하겠어?”의사는 가슴을 두드리며 장담했다.“내가 다 맡을 테니 신경 쓰지 마. 그런데 사실 나도 부탁이 하나 있는데 우리 아들이 유학을 가야 하는데 돈이 조금 모자라거든. 좀 도와줄 수 있어? 올해 보너스 나오면 바로 갚을게.”정미진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흔쾌히 승낙했다.어차피 그녀는 돈에 쪼들리지 않았으니.배진호가 비서로 일할 때부터 매달 월급 일부를 그녀에게 보내왔고 이후 그가 회사를 차려 독립하면서 더 많은 돈을 보내왔다.그녀는 사고 싶은 것을 마음껏 사면서 이제는 좋은 며느리를 얻는 데만 집착하고 있었다.“돈은 천천히 갚아도 돼. 여유가 생기면 갚아. 동창 사이인데 내가 너를 믿지 않겠어?”그녀의 말에 의사는 기쁘게 고개를 끄덕였다.병실을 나선 의사는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렸다.“사람이 참 복에 겨워 사는 줄 모르네. 배진호 같은 아들에, 그토록 훌륭한 며느리까지 얻었는데 뭐가 불만이야? 게다가 그 집안의 돈은 몇 대가 써도 부족함이 없는데 굳이 문제를 만들 필요가 있나? 나라면 절대 그러지 않았을 거야. 그냥 일도 때려치우고 집에서 술이나 한잔하면서 낚시도 하고 가끔은 카드놀이도 하면서 살겠지. 생각만 해도 얼마나 여유롭겠어?”하지만 그는 정미진이 아니었고 방관자로서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다음 날 아침, 권다솔은 간단히 짐을 챙긴 후 캐리어를 끌고 여행사로 향했다.그곳에는 대형 버스가 대기하고 있었고 모든 인원이 모이자 운전기사는 공항으로
지금 그의 모습이 헌신짝이랑 다를 게 뭐가 있지?권다솔 때문에 이렇게까지 할 가치가 있을까?배진호는 전혀 그녀의 말을 듣지 않았다.그는 여전히 석규리를 등진 채 그녀를 무시했다.석규리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해도 소용없다는 것을 깨닫고 결국 다른 사람의 도움을 청하기로 했다.한 통의 메시지를 보낸 뒤 불과 30분도 채 되지 않아 배진호의 어머니가 직접 나타났다.정미진을 본 순간 배진호는 정말 미칠 것만 같았다.“엄마! 몸도 안 좋으신데, 게다가 이제 막 수술을 끝내셨잖아요. 퇴원하시면 어떡해요?”“내가 와서 다행이지! 아니면 네가 여기서 얼마나 더 멍청하게 서 있었을지 몰라. 진호야, 엄마가 곧 죽게 생겼는데 너 정말 엄마를 좀 편하게 보내줄 수 없는 거니?”정미진은 배진호의 이마를 꾹 눌러가며 안타까워했다.권다솔의 가정환경이 조금이라도 평범했다면 돈으로 해결했을 것이다.하지만 권다솔은 권씨 가문의 아가씨로서 정미진이 아무리 손을 뻗어도 권씨 가문까지 닿을 수 없었기에 결국 배진호에게만 압박을 넣을 수밖에 없었다.“엄마가 부탁할게. 죽기 전에 몇 날이라도 좀 조용히 지낼 수 있게 해줘. 더 이상 문제 일으키지 말고 권다솔과 깨끗이 끝내. 네가 꼭 여기에 남아 있겠다면 엄마도 너랑 같이 있을 거야.”정미진은 외투를 벗어 석규리의 손에 건넸다.그녀는 안에 얇은 옷만 입고 있었다.석규리가 옷을 다시 정미진의 어깨에 덮어주려고 했지만 정미진은 단호하게 거절했다.“엄마가 아들 교육을 제대로 못 시킨 탓에 내 아들이 한밤중에 여기서 바람 맞고 있잖아. 나만 병실에서 잘 먹고 편히 있을 수는 없지 않겠어?”“엄마, 정말 제가 무릎이라도 꿇어야 멈추시겠어요?”배진호의 눈에는 이미 생기가 없어진 채 허망한 표정으로 바라봤다.역시나 자신에게 가장 큰 상처를 주는 사람은 가장 가까운 사람이라는 사실을 다시금 깨달았다.“진호야, 엄마는 네가 무릎 꿇으라고 이러는 게 아니야. 엄마가 원하는 건 네가 권다솔과 완전히 끝내는 거야. 이게 엄마의 마지막 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