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지유는 직접적으로 대답하기를 포기하고 말을 돌렸다.“여기엔 이현 씨 물건을 놓을 자리가 없어요.”여이현은 주변을 빙 둘러보더니 찬장을 열어봤다. 그 속에는 자그마한 공간이 남아 있었다.“여기 두면 되겠네. 난 아무래도 괜찮아. 배 비서!”“네!”배진호는 눈치 빠르게 여이현의 옷을 걸기 시작했다. 0.1초라도 고민하면 일자리를 잃는 것처럼 말이다.온지유는 자신들의 관계가 변한 것 같으면서도 안 변한 것 같았다. 그들은 이혼하지도, 선을 긋지도 않았다. 반대로 여이현은 자꾸만 더 가까이 다가오려고 했다.정리를 끝낸 배진호는 뒤로 물러났다. 온지유가 말없이 가만히 있는 것을 보고 여이현이 먼저 말했다.“아까 아무것도 안 먹어서 배고프지? 우리 뭐라도 좀 먹을까?”울분이 치밀어 올랐던 온지유는 밥 먹고 싶은 기분이 전혀 없었다.“배 안 고파요.”“그래도 먹어야지. 애는 배가 고프대.”여이현은 그녀가 심술부리며 하는 말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배를 쓰다듬으며 말했다.“저는 주로 직접 해 먹어요. 이현 씨의 입맛에는 맞지 않을 거예요.”“내가 해줄게.”여이현이 말했다. 그리고 온지유의 깜짝 놀란 표정을 무시한 채 옷소매를 위로 올리며 주방으로 걸어갔다.장은 배진호가 이미 봐왔다. 배진호가 남겨둔 봉투 안에는 야채와 통닭이 있었다. 아직은 무슨 요리를 하려는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이현 씨가... 요리를? 손질까지 필요한 거라면 못할 것 같은데.’그녀는 딱히 말리지 않았다. 여이현이 스스로 포기하기를 기다리는 편이 나을 것 같았던 것이다.그녀가 꿀물이라도 타 마시려고 꿀을 들어 올리자 배진호가 쏜살같이 다가왔다.“제가 할게요, 사모님.”“사모님이라고 부르지 않기로 했잖아요.”“그건 회사에 있을 때의 얘기죠. 사석에서는 당연히 사모님이라고 부르는 것이 맞습니다.”배진호는 진지하게 말하며 꿀물을 타기 시작했다. 태도는 여이현을 대할 때와 똑같이 공손했다.온지유는 배진호가 타 준 꿀물을 받아서 들고 소파에 앉았다. 시간
온지유는 여이현에게서 신경을 끄고 몸을 돌리려고 했다. 이 순간 여이현이 몸을 돌리다가 그녀를 발견하고 말했다.“거의 다 되어가고 있어. 배고파?”온지유는 발걸음을 멈추고 여이현을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제가 원하는 건 이현 씨가 빨리 나가는 것밖에 없어요.”“10분이면 돼.”여이현은 당당하게 동문서답했다. 그리고 온지유의 말에 대답하고 싶지 않은 듯 다시 몸을 돌려 요리에 집중했다.10분 후, 그는 뜨끈뜨끈한 삼계탕을 들고나왔다. 냄비를 식탁에 내려놓고 손을 닦은 그는 온지유를 바라보며 말했다.“다 됐어. 이제 와서 먹어.”온지유는 말없이 그가 두 시간 동안 준비한 삼계탕을 바라봤다.‘임산부에게 좋은 음식이라니... 누가 보면 아이의 존재를 받아들인 줄 알겠어.’온지유는 조용히 걸어가서 그의 앞에 앉았다. 그가 뚜껑을 열자 모락모락 김과 함께 고기와 약재의 향기가 퍼졌다.“꽤 훌륭해 보이지?”여이현은 자신의 작품이 아주 만족스러운 모습이었다.두 사람은 식탁에 마주 앉았다. 좁은 집안에 마주 앉아 있자니 다정한 신혼부부가 된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온지유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숟가락을 들었다.“아까 임산부한테 좋은 음식이라는 글을 봤어요.”여이현은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요리는 누구나 할 줄 알았다. 간장계란밥도 하지 못하는 사람이 어디 있단 말인가? 하지만 삼계탕처럼 제대로 된 음식은 그도 처음이었다.“내가 떠줄게.”그는 닭다리와 국물을 그릇에 덜어줬다. 얼마 전 아이를 지우라고 요구하던 때와는 전혀 다른 다정한 모습이었다.온지유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그건 아이를 받아들이기로 한 건가요?”여이현은 잠깐 멈칫하며 그녀의 배를 바라봤다. 그러고는 어두운 표정으로 그릇을 건네줬다. 그러나 온지유는 전혀 먹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저는 이걸 먹을 수 없어요. 아이를 원하지 않는 이현 씨가 무슨 짓을 할 줄 알고요.”여이현은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온지유는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
여이현은 미간을 찌푸리며 차갑게 말했다.“우리 사이의 일에 왜 자꾸 다른 사람을 언급하는 거야?”“노승아 씨가 다른 사람이었어요? 하도 진하게 엮이길래 저는 아닌 줄 알았죠. 이현 씨가 좋아하는 사람이랑 만나게 이혼도 해주겠다는데, 뭘 더 바라는 거예요?”“네 항공권을 말하는 거야?”여이현은 온지유가 남겨놓은 항공권을 꺼내 들었다. 그녀는 그와 함께 F국에 갈 것처럼 해놓고, 결국에는 그와 노승아의 이름으로 항공권을 끊었다.세상에 외도를 부추기는 아내는 온지유 밖에 없을 것이다.온지유는 힐끗 보면서 물었다.“안 갔어요?”여이현은 그녀가 보는 앞에서 항공권을 갈기갈기 찢었다. 그러고는 싸늘하게 그녀를 노려보며 말했다.“넌 애 데리고 도망갈 생각밖에 없지? 나를 위하는 것처럼 말해놓고 결국에는 네가 원하는 대로만 하겠다는 거잖아.”그는 주변을 빙 둘러봤다. 온지유가 이런 곳에서 살았다고 생각하자 웃음만 피식 나왔다.“그렇게 해서 뭘 얻는 건데? 코딱지만 한 오피스텔? 아니면 널 보러 오지도 않는 애 아빠? 그 남자 한 번도 여기 온 적 없지?”여이현은 핏줄이 튀어나올 정도로 주먹을 꽉 쥐었다. 이렇게라도 분노를 억누르려고 말이다.온지유는 말없이 머리를 돌렸다.“말 안 해도 알아. 그 남자는 온 적 없어.”여이현은 이를 악물었다.“그게 이현 씨랑 무슨 상관인데요?”온지유는 이 화제에서 벗어나고 싶기만 했다.“너는 내 아내야! 어떻게 상관이 없어! 평소에는 그렇게 똑똑하게 굴더니 왜 그런 쓰레기한테 마음을 줬어? 설마 내가 다른 새끼 자식을 키워줄 거로 생각한 건 아니지?”“저는 지금 혼자 살고 있어요. 제 결정은 이미 명백하게 보여준 것 같은데요.”“내 허락 없이는 절대 안 돼!”여이현은 단칼에 거절해 버렸다.“그렇다면 더 말할 것 없겠네요. 이현 씨가 뭘 원하는지 알겠어요. 위자료 한 푼 받지 않고 이혼해 줄게요. 그러면 가문에도 영향이 없겠죠?”“당장 가서 애 지워!”여이현이 또다시 말했다. 그의 눈빛으로 추측하건대,
말을 마친 온지유는 방으로 뛰어 들어가 문을 쾅 닫아버렸다. 거실에는 정적이 맴돌았고, 여이현은 의자에 앉은 채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그는 온지유가 왜 이 아이를 낳으려고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얼굴도 모르는 남자의 어떤 점이 좋은지 의아했다.그 남자는 그녀가 임신한 것도 모르고, 이 작은 아파트에 사는 것도 모르고, 그녀에게 관심을 가진 적도 없지 않은가.동시에 그는 일종의 패배감을 느꼈다. 그가 무엇을 하든 온지유는 만족하지 않았다. 그가 직접 만들어준 삼계탕도 독이 들었다고 생각하면서 한 입도 맛보지 않았다.그는 덴 손을 바라보며 스스로가 너무 멍청하게 느껴졌다. 마음이 떠난 여자를 기쁘게 하려고 하는 자신이 바보 같았다.여이현의 얼굴은 점점 차가워졌고, 결국 일어나 집 밖으로 나갔다.밖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그를 발견한 배진호는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동거하기로 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나왔으니 말이다.배진호는 의아한 말투로 물었다.“대표님, 식사 중이 아니었나요?”여이현은 냉랭한 얼굴로 차갑게 말했다.“됐어요. 자기가 안 먹겠다는데 내가 뭘 어떡하겠어요.”그는 성난 발걸음으로 걸어갔다. 배진호는 이게 무슨 영문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조금 전까지 잘 지내지 않았던가? 변화는 정말 눈 깜짝할 사이에 찾아왔다.그는 급히 여이현의 발걸음을 따라갔다.여이현은 차에 올라타서 힘껏 문을 닫았다. 그리고 넥타이를 잡아당기고 단추까지 두어 개 풀었다. 그런데도 답답함은 가시지 않았다.그는 담배에 불을 붙이며 짜증을 해소하려 했다. 곁에 있는 사람은 감히 말도 못 걸 무서운 모습이었다.이때 전화가 울렸다.여이현은 전화를 힐끗 보고 담배를 깊게 한 모금 빨아들인 후 수락 버튼을 눌렀다.“여보세요.”“여이현, 너 또 어디 갔어? 내가 한참 찾았잖아.”전화 건너편에서 최주하는 웃으면서 말했다.여이현은 잠시 침묵하며 담배를 더 피우다가 담담하게 대답했다.“나 지금 집에 없어.”“그건 당연히 알고 있지.”스포츠카를 몰고 있
자고로 남자는 반항심이 있기 마련이다. 다른 사람이 대신 선택한 여자가 눈에 차기는 어려웠다.그러나 여이현은 달라졌다. 그는 점점 더 온지유를 좋아하고 있었다.“두 번째는 불가능해. 온지유는 다른 남자를 좋아하거든. 벌써 애까지 있어.”이 말을 들은 최주하는 잠깐 멈칫했다. 일단은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었다.“확실해?”“확실하지 않으면 너한테 말하겠어?”여이현의 대답을 들은 최주하는 잠시 멈췄다가 다시 물었다.“네 아이가 아니라는 것도 확신하고?”그는 온지유에게 다른 남자가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었다.“나는 온지유랑 관계를 가진 적이 없어!”여이현은 단호하게 말했다.“그래. 내가 졌다. 내가 졌어. 지유 씨 같은 여자를 곁에 두고 아무 일도 없었던 거면, 넌 타고난 스님 감이야. 아주 훌륭한 인재 납셨어.”“...꺼져.”안색이 어두워진 여이현은 전화를 바로 끊어버렸다. 괜히 더 말했다가 열만 받을 바에는 그냥 끊는 게 나았다.화는 담배 한 대 전부 타들어 간 다음에도 가라앉지 않았다. 그는 차창을 통해 위층을 바라봤다. 온지유가 있는 층의 전등은 아직 꺼지지 않았다.‘설마 지금도 울고 있나?’여이현은 갑자기 초조해졌다. 마치 수많은 개미가 가슴을 갉아 먹는 것처럼, 전혀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그는 입술을 꾹 다물며 다시 차 문을 열었다. 배진호는 그가 다시 올라가려는 줄 알고 자연스럽게 말했다.“대표님, 이제 화가 좀 가라앉으셨나요.”여이현이 차가운 눈빛을 보내자, 배진호는 흠칫 놀라며 입을 막았다. 그런데도 말은 멈추지 않았다.“사모님 많이 힘드실 텐데 대표님이 가서 위로해 주세요. 잘 달래주시면 모든 일이 다 해결될지도 몰라요.”급하게 덧붙인 듣기 좋은 말이었다.여이현의 머릿속에는 온지유의 붉은 눈시울로 가득했다. 더 이상 다른 생각을 할 여력은 없었다. 물론 배진호가 한 말도 들리지 않았다.그는 출입문을 닫지 않고 나갔었다. 온지유는 줄곧 방에서 나오지 않았는지 출입문이 그대로 열려 있었다.식탁 위에서 싸늘
온지유가 일어났을 때 방에는 아무도 없었다. 눈가는 여전히 촉촉했다.어젯밤 싸웠던 일이 떠오른 온지유는 곁으로 손을 뻗었다. 누군가 누웠던 흔적은 없었다. 아무래도 여이현은 어제 나간 대로 돌아오지 않은 모양이었다.그녀는 몸을 일으켜 옷장을 확인했다. 여이현의 옷이 그대로 있는 걸 봐서 완전히 포기한 건 아닌 모양이었다. 기분은 더욱 암울해졌다.욕실에서 샤워하고 나온 그녀는 바로 출근했다. 방송국에서 채미소는 큰 소리로 외쳐댔다.“내 앞길 막지 마요! 여기 나보다 더 중요한 일을 하는 사람이 있어요?”오늘의 그녀는 폭탄을 집어삼킨 것처럼 불을 뿜어냈다.“미소 씨, 왜 그래요? 안 좋은 일이 있다고 해서 남한테 화풀이 아는 건 아니죠.”동료가 기분 나쁜 듯 말했다.그러나 채미소는 언제나 이랬다. 특히 기분 나쁠 때는 눈에 뵈는 것이 없었다.“안 좋은 일? 하, 내 앞길을 막아놓고 무슨 말이 이렇게 길어요. 난 중요한 인터뷰를 하러 가는 길이에요. 당신 따위가 방해할 스케일이 아니라고요.”“미소 씨가 여이현 대표님 인터뷰 못 따낸 거, 우리가 모를 줄 알아요? 따냈으면 여기서 화풀이하지도 않았겠죠. 동네방네 소문내고 다니기 바빴을 테니까.”채미소는 미간을 팍 찌푸리더니 언성을 더욱 높이며 말했다.“확정 안 됐을 뿐이지 못 따낸 거 아니에요! 앞으로 기회가 있다고요! 당신은 뭐 할 수 있을 줄 알아요? 다들 못하는 일이니까 내가 하는 거예요! 실력도 없으면서 입만 살았네요!”동료도 화가 나 보였지만 아무 말도 못 했다. 채미소의 말마따나 그녀는 방송국의 기둥이었기 때문이다.이때 온지유가 들어왔다. 채미소와 싸우고 있는 동료 빼고는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다들 채미소가 무서운 눈치였다.“왜 이렇게 시끄러워요? 다들 일 안 해요?”안정희가 차가운 표정으로 말했다. 채미소는 곧바로 달려가서 고자질하기 시작했다.“편집장님, 저 하루 종일 고생해서 여이현 대표님을 만나고 돌아온 거 아시죠. 근데 인터뷰를 하루 만에 못 따냈다고 비웃는 사람이 있
채미소는 여전히 화가 나 있었다. 하지만 이번 인터뷰에서 온지유의 도움이 꼭 필요했다. 그녀는 또 여이현을 잘 설득해서 지난번 잃어버린 체면을 되찾아야 했다.안정희가 떠난 다음 그녀는 온지유에게 다가가 한결 부드러운 어조로 말을 건넸다.“지유 씨, 어제 말했던 일 다시 생각해 봤어요?”“답은 어제 이미 드렸잖아요.”온지유는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채미소는 속으로만 화를 삭였다.온지유는 만만한 동료들과 달랐다. 그러나 이번 일이 끝나고 나면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할 생각이었다.“이렇게 하는 건 어때요? 이번 일은 우리가 같이 한 걸로 해요. 언제까지 블로그에 글만 쓰고 있을 거예요. 지유 씨도 높은 자리에 가고 싶죠? 나 채미소예요. 나만 잘 따라오면 1년 안에 내 위치에 오를 수 있게 해줄게요.”이 말을 듣고 온지유는 가볍게 웃었다. 직장은 냉혹하다. 누군가 무책임하개 한 말까지 믿으면 안 되는 법이다.그녀는 채미소를 올려다보며 말했다.“미소 씨가 원하는 대로 양보해 줬으면 되는 거 아니에요? 제가 왜 또 따라가야 하죠?”채미소는 인내심이 바닥난 듯 당당하게 말했다.“그러는 온지유 씨는 뭐가 그렇게 잘났어요? 잊었나 본데, 이번 일은 내가 따온 거예요!”그녀는 ‘양보’라는 말을 용납할 수 없었다. 뭐든 직접 손에 넣어야만 실력을 입증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온지유는 서류를 정리하며 말했다.“채미소 씨가 뭐라고 하든 상관없어요. 아무튼 저는 이 인터뷰 하지 않을 거예요. 저는 당신 뒤만 졸졸 따라다닐 정도로 유치하지 않거든요. 적당히 얼렁뚱땅 넘어갈 생각은 말아요. 그리고 채미소 씨 뭐든 혼자 잘 해내는 능력자라고 하지 않았나요? 그러면 이번에도 스스로 실력을 입증해 봐요.”온지유는 다시 한번 채미소의 요청을 거절했다. 이쯤 되니 채미소도 그녀가 자신과 대립하려고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도와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아영 씨, 잠깐 저 좀 봐요.”온지유는 옆에서 타자하던 공아영을 향해 말했다.“네.”공아영은 하던
온지유는 회사 차를 타고 밖으로 나갔다. 공아영은 신난 기색으로 말했다.“지유 씨 너무 대단한 것 같아요. 우리 부서에 편집장님을 제외하고는 다 미소 씨 무서워하거든요.”“제가 뭘 했다고요. 저는 그냥 사실을 말한 거예요. 미소 씨만 특별한 거 아니에요.”“하지만 미소 씨가 화난 것 같았어요. 이제 지유 씨를 괴롭히려고 할 텐데요.”공아영은 채미소의 성격을 잘 알았다. 그녀는 모두가 자신을 좋아할 것을 요구하지는 않지만, 한 번 찍은 사람은 끝까지 물고 놔주지 않았다.온지유가 다시 입을 열었다.“영원히 높은 자리에 있을 수 있는 사람은 없어요. 미소 씨도 지금은 잘 나가지만, 인간관계가 엉망이면 결국 몰락하게 되어 있어요. 때가 되면 모두가 복수하려고만 할 거예요.”채미소는 이익지상주의자다. 이익만 따라다니는 그녀는 친구 한 명 없었다. 이용 가치를 잃는 순간 전부 등 돌릴 사람이었다.“지금 보육원에 가는 거예요?”“네, 편집장님이 가보라고 하셨어요. 소재 좀 찾아서 공익 광고 하는 셈으로 기사를 쓰면 된다고 했어요. 근데 이번 일 꽤 중요한 것 같아요. TV 프로그램에 실릴 수도 있을 것 같거든요.”“그건 어디서 알게 된 소식이에요?”“편집장님이랑 얘기하다가 추측한 거예요. 이틀 뒤면 알 수 있을걸요.”온지유는 안정희의 말에 따라 추측했을 뿐이다. 물론 그녀가 틀렸을 수도 있다.어찌 됐든 그녀는 이번 일이 단순하지 않을 것 같았다. 보육원을 주제로 한 사건이 TV에 나온다면 감동적인 요소를 더해서 엄청난 효과를 일으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요즘 TV 프로그램은 경쟁이 심했다. 재미를 추구하는 동시에 사회적인 울림을 주는 것도 필요했다.이건 온지유의 생각이다. 방송국의 생각은 다를 수도 있다.20분 후, 두 사람은 보육원에 도착했다. 온지유는 차에서 내리기도 전에 벌써 울음소리를 들었다.녹슨 대문은 반쯤 열려 있었다. 마치 강도라도 들었던 것처럼 말이다. 공아영은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여기 너무 허름해 보이는데요. 20년 전으로
문지원은 어른을 마주하는 것 같았다.“아무것도 아니에요.”지석훈은 그녀가 반쯤 울리는 것을 보고 한숨을 쉬었다. “나한테도 속일 생각하고 있어?”문지원은 뭐라고 대답할 생각이 없었다.지석훈은 그녀에게 강요하고 싶지 않은 듯 다른 말로 그녀를 앉혀 식사 하게 하였다.마침, 문지원은 급하게 회사에서 나와서 아직 먹지 않았다.오늘뿐만 아니라, 요 며칠 동안 주주들과 상의 하느라 바빠서 그녀는 종종 하루에 두 번, 심지어 하루에 한 번 밥을 먹었다.그렇지 않으면, 이렇게 초췌하여 지 씨 아버지께서 한눈에 알아차리지 않았을 것이다.지석훈은 병원 식당에서 준비한 도시락을 가져왔다.병원의 식당은 바깥 식당과는 비교할 수 없지만, 영양 균형이 잘 잡혀 있다. 그는 마치 진작에 그녀와 함께 식사하기로 계획한 것처럼 미리 두 개를 준비하였다.조용히 도시락을 먹으며 문지원은 긴장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하여 지석훈이 입을 열었을 때도 반응하지 못하였다.“요즘 뜻대로 안 돼?”“조금.”문지원은 무의식으로 대답하고 살짝 굳었는데 지석훈은 알아차리지 못한 것 같았다.“지 의사 선생님, 계세요?”밖에 누군가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곧 수술이 있기에 미리 준비해야 합니다.”“네, 알겠어요.”지석훈이 대꾸하자 곧 밖에 있던 사람들이 급히 떠났다.문지원은 이제야 그녀가 바빠서 몸을 뺄 수 없다는 것은 사실 선츠도 비슷하고, 심지어 지나쳐도 모자랄 정도였다는것을 깨달았다. 의사는 워낙 바쁜 직업이라.그런데 그는 이렇게 바쁜데도 시간을 내서 문지원을 위로하려고 하다니... 문지원은 갑자기 양심이 은근히 아파 났다.지석훈은 한쪽에 걸려 있는 흰 가운 외투를 입고 문지원을 쳐다보았다.“난 먼저 일하러 갈게 넌 여기 있을래 아니면 먼저 돌아갈래? 먼저 돌아가면 저녁에 널 찾으러 갈게.”문지원은 도시락을 다 먹고 내려놓았다. “먼저 돌아가 있을게요.”지석훈은 고개를 끄덕이고 떠났다.겉으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것처럼 보였지만, 돌아간 후 지석훈이 그녀를
그 남자는 분명히 강윤슬한테 평범한 사람이 아닐 것이니 문지원은 돌아가서 주의하기로 결정했다.“화닝 빌딩의 프로젝트에 대해 귀 그룹의 요구 사항을 문정 그룹에서 보았어요. 우리 그룹에서는 두 가지 사항을 제시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첫째, 우리는 보수와 지불이 불균형하다고 생각해요. 귀사는 모든 재료를 최고 수준으로 배분할 것을 요구하지만, 이익은 10% 미만만 이에요.”“둘째, 우리는 자체 인력이 있으며, 채용 측면에서 귀 그룹에서는 간섭할 권리가 없다고 생각해요.”이것이 바로 문지원이 오늘에 온 목적이었다.문지원은 성격이 매우 좋은 사람이기에 일반적으로 갑방이 제시한 조건이 너무 지나치지 않으면 그녀는 그 조건들을 진지하게 경청하지만 이번에 강윤슬은 너무 심했다.심지어 강윤슬 자신조차도, 한 짓이 좀 지나치다고 생각했다. 갑방이 협력 파트너에게 이래라저래라 심지어 무슨 사람을 쓰는지까지 상관 한다니 한 일이 너무 심했다. 그리고 10%도 안 되는 이윤을 양보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계약서에서 말하는 ‘두 그룹이 함께 이기자'는 말장난을 하는 것은 문자께임으로 사람을 놀리는 거짓말인 것같앗다.강윤슬은 그녀가 왜 왔는지 진작 알고 있기 하나도 놀라지 않았다. “너무하다고? 난 그렇게 생각 안 하는데.”“고객이 신이라는 말은 누구나 다 알아.”“고객이 이렇다 하지만 갑방이 프로젝트를 당신들에게 맡기고 당신들도 받아들였는데 지금 할 수 없다고 하면 계약을 위반한 것이야. 계약을 위반하면 두 배의 계약금을 물어내야 하는데, 이 돈을 문정 그룹에서 감당할 수 있어?”그 전에 문지원은 강윤슬에 대해 악감정이 없었다.비록 그녀와 지석훈은 알려지지 않은 과거가 있다고 하더라도 지금 문지원은 정말 그녀를 이해할 수 없었다.그녀는 상대방의 악의를 느낄 수 있지만, 왜 사람들은 모두 근거 없는 악의를 가지고있는지 몰랐다.문지원은 심호흡을 하며 말했다.“강윤슬 씨, 저에게 불만이 있으면 저에게 말해주세요. 그러나 협력에서 무리한 요구를 하지 말았
문지원은 강윤슬이 무슨 수작을 부리는지 모르지만, 그녀는 반드시 가야 했다.한바탕 망설인 후, 그녀는 빠르게 결정 하였다. 가야 할 바엔 가자, 무슨 칼산 불바다도 아니고...강윤슬이 근무하는 회사는 규모가 상당했고, 국내에서 100위 안에 드는 대기업이다. 큰 회사답게 프런트 데스크 직원도 교육이 잘 되어 있다.“문 대표님, 강윤슬 대표님이 위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프런트 데스크에서 엘리베이터로 안내하였다. “이쪽으로 오세요.”문지원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3층에 있는 강윤슬의 사무실에 도착했다.문지원은 강윤슬이 기다릴 줄 알았는데 그녀의 비서가 말했다.“대표님이 회의하느라 바쁘니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문지원은 이 말투가 아주 익숙하였다. 그녀는 강윤슬이 자신을 놀리고 있는 것 같았다.그녀가 소심인 배 한 것이 아니라 전화는 부재중이고,직접 왔는데 바쁘다고 하니, 일부러 그녀를 피하는 것 같았다.문지원은 눈살을 찌푸리며 냉담한 표정을 지었다. “저는 협력을 위해 특별히 진심으로 여러분을 찾아왔는데 만약 여러분이 문 씨와 협력할 마음이 없다면, 직접 말하면 될 테니 저를 원숭이로 놀릴 필요는 없어요.”“그럴 리가요.”비서는 식은땀을 뻘뻘 흘리기 시작 하였다.아마도 그들은 생김새가 온화하고 사람들에게도 대부분 선의를 가진 문지원이 이렇게 기세등등한 면이 있을 줄은 몰랐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뭐라고 하든 간에 문지원은 이미 결정하였다. “5분, 5분만 더 기다릴게요.”“5분후에 오지 안으면 합작이 무산된 걸로 칠 것이에요.”협력은 물론 중요하지만, 자신의 체면을 땅에 떨어뜨리는것은 안 되였다. 적어도 문지원은 그런 천덕꾸러기가 아니었다.그녀는 강윤슬이 무엇을 하고 싶은지 몰랐지만 언젠간 알게 될 것이니 급하지 않았다.5분이 지나자, 문지원은 떠날 준비를 했다.강윤슬은 하이힐에 리듬을 타며 느릿느릿 걸어왔다.“일이 좀 있어서 늦었어. 죄송하네.”그녀는 손을 내밀고 입가에 선의의 미소를 띠고 있었지만, 눈빛으로 문지원을 응시하
“조금만 더 늣더라도 아이를 볼 수 있을거야!” 강윤슬은 여기 오기전에 문지원의 상황을 알아보았기에 그녀의 금황을 알고 있었다. 강윤슬은 지금 기분이 좀 상해 있었다.그녀는 산에서 구출된 여자들을 경멸했다. 어떤 사람은 심지어 아이를 낳았다고 들었기 때문에 이렇게 많은 날을 누가 알가? 누군가 문지원을 건드린 적이 있는지.문지원의 머리는 세게 부딪힌 것만 같았다. 한바탕 격동이 지나간 후,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일어나려고 손가락을 움직였지만, 자신이 지금 자는 척하고 있다는 것을 떠올렸다.섣불리 눈을 뜨면 오해받을 수 있기에 문지원은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기다리는 과정이 특히 길고 견디기 어려웠는데 마침내 그녀는 남자의 목소리를 들었다.“나는 지원 씨를 관심하니 그런 것과는 무관해.”지석훈은 담담하게 말했다.이 몇 글자는 문지원의 마음속에서 순간 잔잔한 물결을 일으켰다.이 말을 들은 강윤슬의 얼굴은 창백해지기 시작 하였다.“지석훈, 너 진심이야?”“응, 난 이전 너한테 예전같은 마음이 없어.”말하면서 지석훈은 돌아섰다.“당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를 바래.”강윤슬은 남자의 무자비한 모습을 보며 자신이 남긴 쓴맛을 맛보았다. 이 쓴맛은 옛날 지석훈만 느낄 수 있었던 감정이었다.그녀는 모욕을 참지 못하고 성을 내며 병실을 떠났다.문지원은 계속 자는 척하고 하려 하였는데 머리 위에서 지석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계속 자는 것처럼 있을 거야?”문지원은 천천히 눈을 뜨면서 그를 향해 어색하면서도 예의 바른 미소를 지었다.“배고파? 먹을 것 좀 갖다 줄까?”문지원은 난처해하고 있기에 간절히 바랐다.지석훈은 잠시 나갔다가 돌아올 때 그녀에게 따뜻한 죽 2인분을 가져왔다.문지원이 자신을 보자 그는 천천히 포장을 풀면서 말했다.“나도 마침 배가 고파서 너랑 같이 먹을 거야”문지원은 아주 행복하다고 느꼈다.그녀는 병원에서 이삼일 휴양하고 퇴원했다. 안 그래도 큰 문제는 없는데 그냥 좀 피곤한데 갑자기 저혈당까지 돌발하였기에 쓰러진
깜짝 놀란 지석훈은 급히 문지원을 데리고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았다.그녀가 수면부족으로 쓰러진 것을 알자 지석훈은 무력하고 마음이 약해졌다.“넌 왜 자신을 이렇게 돌보고 있어?”지석훈은 병석 앞에서 한숨을 쉬었다. 그러나 문지원은 아직 혼수상태기에 아쉽게도 듣지 못했다. 병원에서 문지원에게 포도당 점액을 처방하여 지금 그 수액을 맞고 있다. 아마도 그녀는 충분히 자야 깨어날 것 같았기에 지석훈은 급하지 않았다. 어쨌든 이미 사람을 찾았고 자신이 직접 그녀를 지켜볼 수 있으니까.“지석훈!”강윤슬이 급히 병실로 뛰여 들어오자 지석훈이 밤을 새워도 잠깐 눈붙일 생각을 하지않고 가만히 병석 앞에서 지켜보는 장면을 보게 되었다.강윤슬이 들어온 것을 보자 지석훈은 무표정하게 말했다.“당신 여긴 왜 왔어?”그의 말투는 아주 평범했지만, 그의 눈빛에는 조그마한 눈물이 고였다. 그는 진작에 마음을 내려놓았기에 그녀에 대해 예전의 느낌은 없었으나 강윤슬은 아직 내려놓지 못하였다.그녀는 원래 지석훈한테 일이 생겼다는 소식을 듣고 손에 있는 일도 돌볼 겨를 없이 서둘러 왔는데 그는 다른 여자 곁을 지키고 있었다.강윤슬은 손바닥의 부드러운 살을 꼬집으며 입가에 보기 싫은 미소를 지었다.“석훈 씨가 괜찮다니 정말 다행이네, 일이 생겼다는 말을 듣고 다친 줄 알았어.”말한 후 강윤슬은 병석에 누워있는 문지원을 보며 말했다.“문지원 씨는 괜찮아?”문지원은 눈꺼풀을 움직였지만 뜨지 않았다. 사실 강윤슬이 왔을 때 그녀는 이미 깨어 있었지만 자는 척하였다.강윤슬은 눈을 반짝이며 방금 문지원이 약간 흔들린 눈꺼풀을 보고 자신이 잘못 본 것인가 의심하였다.지석훈은 병석에 있는 문지원을 바라보았지만, 전혀 이상한 점을 발견하지 못했다.“일이 좀 생겼는데 사람은 괜찮아.”강윤슬은 마음이 더욱 쓰라렸다. “사람이 괜찮은데 왜 여전히 여기에서 지키고 있어?”“병원에 그렇게 많은 환자가 있는데 당신이 이렇게까지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처음으로 보네.”지석훈은 얼굴을
문지원은 지석훈만 홀로 남겨서 이 모든 상황을 마주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안에는 그녀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마지막으로 문지원은 그 지석훈을 한 번 더 바라보았다. 후시경을 통해 보이는 그의 날씬한 실루엣은 차가 나아갈수록 서서히 멀어졌지만 여전히 당당한 모습이 역력했다.문지원은 눈가에 맺힌 눈물을 참으며 힘껏 가속 페달을 밟았다.차는 마치 활시위에서 쏘아 올린 화살처럼 순식간에 도로를 벗어나 달려 나갔다.곧바로 마을 사람들은 손에 곡괭이를 들고 몰려와 지석훈을 완전히 포위했다....한편 마을의 경찰서에는 한 통의 신고 전화가 접수되었다.신고자는 네 명의 갇힌 여성을 데리고 경찰서에 도착해 신고했으며 그 모습을 본 경찰 내부 사람들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신원 확인 후 이들 여성의 몸에는 장기간 감금과 학대의 흔적이 분명하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마을에 아직 한 사람이 남아 있어요. 그 사람을 꼭 구출해 주세요.”문지원은 지친 목소리로 경찰을 바라보며 애원했다.그녀는 중간에 한 번도 쉬지 않고 밤새도록 차를 몰았다. 식사 대신 몇 모금의 물만 마셨다.이제는 배고픔과 피로에 시달려 눈꺼풀이 무겁지만 문지원은 결코 쓰러질 수 없었다.그 이유는 지석훈이 아직 남아있었기 때문이다.경찰은 놀란 표정으로 되물었다.“아직도 남아 있는 사람이 있다고요?”“네. 이름은 지석훈. 마을에 의료 봉사하러 간 의사예요.”문지원은 지석훈에 관한 기본 정보를 말했다.“휴대전화를 가지고 있지만 마을 사람들이 빼앗을 가능성도 있어요. 이번에 우리가 무사히 탈출할 수 있었던 건 다 그 사람 덕분이에요.”그런 사람이 그토록 황량한 산골짜기 같은 곳에 남아 있다는 사실에 경찰서 사람들은 바로 회의를 열어 구조대를 꾸려 밤새도록 그 마을을 수색하기 시작했다.문지원도 따라가겠다고 고집을 부렸지만 경찰들은 그녀의 상태를 보고 처음엔 단호히 반대했다.하지만 문지원은 고집스럽게 말했다.“안 돼요. 꼭 가야 해요. 그 사람이 무사한지 제가 직접 확인해야
지석훈은 그녀들을 방 안으로 들인 후 여성들이 마을에서 겪은 처참한 상황을 듣고는 분노를 참지 못했다.문지원이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저는 이들을 데리고 나가고 싶어요. 그들은 원해서 여기에 남아 있는 게 아니에요. 이 산 너머에는 가족들이 기다리고 있어요. 이곳에 남아 그들의 아이 낳는 도구가 되어 살아갈 이유는 없어요.”그 말에 문지원을 제외한 다른 이들은 잠시 침묵에 빠졌다.조수현 역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들 중 일부는 이미 아이를 낳은 상태였고 이곳을 떠난다는 건 곧 자신의 아이를 두고 가야 한다는 뜻이었다. 어머니로서 쉽게 결단을 내릴 수 없는 일이었지만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이곳에 남아 계속 학대받으며 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문지원은 지석훈이 망설일까 봐 서둘러 덧붙였다.“서둘러야 해요. 마을 사람들이 곧 우리가 사라진 걸 눈치챌 거예요. 그들이 우리를 찾으러 오는 건 시간문제라고요. 우린 석훈 씨한테 폐 끼칠 생각 없어요. 그저 차 한 대만 빌려주면 돼요.”마을 밖으로 나가는 길은 분명히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지석훈이 여기까지 들어올 수도 없었을 것이다.차만 있다면 충분히 탈출할 수 있었다. 문지원은 운전을 할 줄 알았기에 본인이 직접 운전해서 모두를 데리고 탈출할 생각이었다.“걱정할 필요 없어요. 차는 빌려줄 테니까.”지석훈의 말에 문지원은 예상했던 대답이었음에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다른 사람들은 더욱 기뻐하며 얼굴에 희망을 띄웠다.눈앞에 놓인 탈출의 기회에 모두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지석훈은 곧장 차를 가지러 갔다. 차 한 대에 모든 인원을 태울 수는 없었지만 최대한 몸을 붙이면 간신히 탈출할 수 있는 인원이었다.문지원은 재빠르게 조수현과 다른 여성들을 차에 태운 후 지석훈이 계속 말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근데 아까부터 왜 말이 없어요? 같이 안 갈 거예요?”지석훈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눈치 못 챘어? 이들은 남자한테 극도로 두려움을 느끼고 있어. 몇몇은 나랑 눈도 못 마
문지원은 상의도 걸치지 않고 바지만 입은 채 허겁지겁 뛰쳐나오는 서 씨를 보고 역겨움을 느꼈지만 동시에 조수현의 안전이 걱정되었다.밤은 깊었고 어둠이 표정을 가려주어 다행히 아무도 그녀의 속내를 눈치채지 못했다.마을 사람들은 여자들에 대해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 이 마을에서 여자는 그저 아이를 낳는 도구에 불과했다.특히 지금처럼 큰불이 난 상황에서는 더더욱 신경 쓰는 사람이 없었다.게다가 문지원은 마을 사람들에게 순종적인 사람으로 보였기 때문에 그들이 보기엔 그녀가 도망칠 가능성이 없었다.마을 이장은 불이 난 원인을 물었지만 문지원은 적당한 핑계를 대며 얼렁뚱땅 넘어갔다.남자들이 불 끄느라 정신없는 틈을 타 문지원은 몰래 서 씨의 집으로 향했다.서 씨의 집 안에서 조수현은 밖에서 들리는 소란스러운 소리에 처음에는 잔뜩 겁을 먹었지만 문지원이 갑자기 들이닥치자 상황을 직감했다.“불... 지원 씨가 낸 거예요?” 조수현은 놀라서 물었다.“너무 대담한 거 아니에요?”문지원은 그녀를 힘껏 일으키며 말했다.“지금 그런 얘기할 때가 아니에요. 지금이 기회예요. 얼른 따라와요. 그리고 마을에 갇혀 있는 다른 여자들이 어디 있는지 알고 있죠? 그들도 함께 데리고 나가요. 오늘 밤 무조건 도망쳐야 해요.”“하지만… 우리 어떻게 도망쳐요?”조수현은 주저했다.이 마을은 외부와 단절된 깊은 산속에 자리 잡고 있었다.사방은 높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차를 타고 오가는 것도 며칠이 걸릴 정도였다.더군다나 이들은 힘없는 여자들뿐이어서 교통수단도 없이 걸어서 나가는 건 사실상 불가능했다.하지만 문지원은 이미 계획을 세운 상태였다.“마을에 온 그 의사를 찾아갈 거예요. 그들이 이곳까지 들어왔다는 건 나가는 길도 알고 있다는 뜻이에요.”“낮에 그들이 타고 온 차도 봤어요. 게다가 마을 사람들은 의사들에게는 함부로 못 하니까 그가 도와주기만 한다면 우린 반드시 나갈 수 있어요.”문지원의 결연한 눈빛을 보며 조수현도 점차 용기를 얻었다.“좋아요. 나도 따
문지원은 순진한 척하며 말했다.“알겠어요. 그냥 한번 물어본 거예요. 전 당연히 그 사람과 거리를 둘 거예요.”김숙희는 그제야 안심했다.그리고 문득 예전에 아들에게 이 여자를 데려오게 한 자신의 결정이 얼마나 선견지명이었는지 새삼 실감했다.김숙희는 문지원에게 쌀을 씻으라고 시켰고 그녀가 일을 끝마쳤을 때는 이미 해가 저물어 있었다.문지원은 조수현의 처지를 떠올리며 점점 마음이 무거워졌다.오늘 밤 그녀는 실행해야 한다.그렇지 않으면 이렇게 갇혀 있는 여자들이 언제쯤 다시 자유를 찾을 수 있을지 기약할 수 없었다.밤이 되자 문지원은 지하 저장고에서 술을 꺼냈다.김숙희는 아까운 듯 술을 바라보며 소리쳤다.“그걸 왜 꺼내는 거야. 어서 다시 넣어둬. 그건 명절이나 특별한 날에나 마시는 거란 말이야. 잔칫날도 아닌데 그걸 마시는 건 너무 낭비야.”문지원은 일부러 망설이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듣기로는 마을에 있는 그 의사가 수호 오빠의 다리를 고칠 수 있다고 하더라고요. 오빠 다리가 곧 나을지도 모르니 축하하는 의미로 한잔하면 어떨까 싶어서요.”김숙희의 눈빛이 흔들렸다.문지원 혼자 즐기려는 거였다면 단호하게 반대했을 거지만 아들을 위해 축하한다면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진수호도 유혹에 넘어가 입술을 핥으며 말했다.“엄마 어차피 조금만 마시는 건데 괜찮잖아요. 이 술 지하에서 먼지만 쌓이고 있는데... 내 다리가 낫는다는데 엄마는 기쁘지도 않으세요?”“그럴 리가. 당연히 기쁘지.”김숙희는 단번에 부정했지만 결국 아들과 문지원의 부추김에 못 이겨 이를 악물고 술을 개봉했다.그 술은 사실 그저 평범한 황주였다.조금만 마시면 별문제가 없을 터였지만 좋은 일이 겹친 데다 진수호는 쾌락을 즐기는 성향이 강한 사람이어서 한순간 자제력을 잃고 지나치게 마셔버린 것이다.김숙희도 덩달아 함께 취했다.오직 문지원만이 정신을 차리고 있었다.“한 잔 더.”진수호는 술에 취해 술버릇이 나왔다. “빨리 한 잔만 더 줘.”문지원은 시험 삼아 손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