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이현은 주변을 빙 둘러봤다. 그의 침실보다도 작은 집안에는 온지유의 물건만 놓여 있었다.깔끔한 것을 좋아하는 그녀는 늘 집 안을 깨끗하게 정리해 놓았다. 그래도 현관에 놓여 있는 복슬복슬한 토끼 슬리퍼는 약간 놀라웠다.온지유는 어색한 표정으로 슬리퍼를 거두며 물었다.“다 봤어요?”여이현은 두 사람만 앉을 수 있는 소파를 바라보며 되물었다.“여기서 지내는 거 괜찮아?”“네.”“가구도 모자란 집인데 괜찮긴. 도우미랑 같이 살다가 이런 데서 산다는 게 말이 돼? 어차피 당분간 이혼하지 못할 것 같으니까, 그냥 내 집에 돌아가자.”“아직도 이혼하겠다는 말이 장난 같아요? 저는 싸우고 가출한 게 아니에요!”온지유는 그가 이런 식으로 달랜다고 해서 달라지는 게 없다는 것을 알았으면 했다. 이혼 얘기는 가벼운 마음으로 꺼낸 것이 아니었다.“다 봤으면 나가요. 저 내일 출근해야 하니까요.”“남편이 아내 집에 있는 게 뭐가 문제야? 자꾸 그러면 동네방네 소문 내 버릴 거야.”“도대체 뭘 원하는 건데요?”온지유는 인내심이 바닥났다. 이제 와서 여이현이 고집을 부릴까 봐 걱정되기도 했다.반대로 여이현은 다리를 꼬고 앉으며 덤덤하게 눈썹을 튕겼다.“뭐 딱히 원하는 게 있는 건 아니고, 분가가 말이 안 되는 것 같아서. 내가 여기에서 지내면 분가 안 해도 되는 건가? 편안한 생활도 지겹던 참인데, 가끔 평범하게 지내보는 것도 나쁘지 않지.”“여이현 씨!”온지유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이현 씨는 이런 곳에서 지내지 못할 거예요. 그리고 침대도 일인용이에요. 당장 내 집에서 나가요!”“내가 못 지낸다고 어떻게 확신해? 그 말을 들으니 더 증명해 보이고 싶네.”말을 마친 그는 곧장 온지유의 침실로 향했다. 소녀다운 분위기로 꾸며진 침실에는 핑크색으로 가득했다. 참대에는 토끼 인형도 놓여 있었다.그와 함께 있을 때와는 전혀 다른 스타일이었다.그가 거리낌 없이 들어가는 것을 보고, 온지유는 어쩐지 나체를 보이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어떻게 해야
“...”온지유는 직접적으로 대답하기를 포기하고 말을 돌렸다.“여기엔 이현 씨 물건을 놓을 자리가 없어요.”여이현은 주변을 빙 둘러보더니 찬장을 열어봤다. 그 속에는 자그마한 공간이 남아 있었다.“여기 두면 되겠네. 난 아무래도 괜찮아. 배 비서!”“네!”배진호는 눈치 빠르게 여이현의 옷을 걸기 시작했다. 0.1초라도 고민하면 일자리를 잃는 것처럼 말이다.온지유는 자신들의 관계가 변한 것 같으면서도 안 변한 것 같았다. 그들은 이혼하지도, 선을 긋지도 않았다. 반대로 여이현은 자꾸만 더 가까이 다가오려고 했다.정리를 끝낸 배진호는 뒤로 물러났다. 온지유가 말없이 가만히 있는 것을 보고 여이현이 먼저 말했다.“아까 아무것도 안 먹어서 배고프지? 우리 뭐라도 좀 먹을까?”울분이 치밀어 올랐던 온지유는 밥 먹고 싶은 기분이 전혀 없었다.“배 안 고파요.”“그래도 먹어야지. 애는 배가 고프대.”여이현은 그녀가 심술부리며 하는 말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배를 쓰다듬으며 말했다.“저는 주로 직접 해 먹어요. 이현 씨의 입맛에는 맞지 않을 거예요.”“내가 해줄게.”여이현이 말했다. 그리고 온지유의 깜짝 놀란 표정을 무시한 채 옷소매를 위로 올리며 주방으로 걸어갔다.장은 배진호가 이미 봐왔다. 배진호가 남겨둔 봉투 안에는 야채와 통닭이 있었다. 아직은 무슨 요리를 하려는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이현 씨가... 요리를? 손질까지 필요한 거라면 못할 것 같은데.’그녀는 딱히 말리지 않았다. 여이현이 스스로 포기하기를 기다리는 편이 나을 것 같았던 것이다.그녀가 꿀물이라도 타 마시려고 꿀을 들어 올리자 배진호가 쏜살같이 다가왔다.“제가 할게요, 사모님.”“사모님이라고 부르지 않기로 했잖아요.”“그건 회사에 있을 때의 얘기죠. 사석에서는 당연히 사모님이라고 부르는 것이 맞습니다.”배진호는 진지하게 말하며 꿀물을 타기 시작했다. 태도는 여이현을 대할 때와 똑같이 공손했다.온지유는 배진호가 타 준 꿀물을 받아서 들고 소파에 앉았다. 시간
온지유는 여이현에게서 신경을 끄고 몸을 돌리려고 했다. 이 순간 여이현이 몸을 돌리다가 그녀를 발견하고 말했다.“거의 다 되어가고 있어. 배고파?”온지유는 발걸음을 멈추고 여이현을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제가 원하는 건 이현 씨가 빨리 나가는 것밖에 없어요.”“10분이면 돼.”여이현은 당당하게 동문서답했다. 그리고 온지유의 말에 대답하고 싶지 않은 듯 다시 몸을 돌려 요리에 집중했다.10분 후, 그는 뜨끈뜨끈한 삼계탕을 들고나왔다. 냄비를 식탁에 내려놓고 손을 닦은 그는 온지유를 바라보며 말했다.“다 됐어. 이제 와서 먹어.”온지유는 말없이 그가 두 시간 동안 준비한 삼계탕을 바라봤다.‘임산부에게 좋은 음식이라니... 누가 보면 아이의 존재를 받아들인 줄 알겠어.’온지유는 조용히 걸어가서 그의 앞에 앉았다. 그가 뚜껑을 열자 모락모락 김과 함께 고기와 약재의 향기가 퍼졌다.“꽤 훌륭해 보이지?”여이현은 자신의 작품이 아주 만족스러운 모습이었다.두 사람은 식탁에 마주 앉았다. 좁은 집안에 마주 앉아 있자니 다정한 신혼부부가 된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온지유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숟가락을 들었다.“아까 임산부한테 좋은 음식이라는 글을 봤어요.”여이현은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요리는 누구나 할 줄 알았다. 간장계란밥도 하지 못하는 사람이 어디 있단 말인가? 하지만 삼계탕처럼 제대로 된 음식은 그도 처음이었다.“내가 떠줄게.”그는 닭다리와 국물을 그릇에 덜어줬다. 얼마 전 아이를 지우라고 요구하던 때와는 전혀 다른 다정한 모습이었다.온지유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그건 아이를 받아들이기로 한 건가요?”여이현은 잠깐 멈칫하며 그녀의 배를 바라봤다. 그러고는 어두운 표정으로 그릇을 건네줬다. 그러나 온지유는 전혀 먹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저는 이걸 먹을 수 없어요. 아이를 원하지 않는 이현 씨가 무슨 짓을 할 줄 알고요.”여이현은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온지유는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
여이현은 미간을 찌푸리며 차갑게 말했다.“우리 사이의 일에 왜 자꾸 다른 사람을 언급하는 거야?”“노승아 씨가 다른 사람이었어요? 하도 진하게 엮이길래 저는 아닌 줄 알았죠. 이현 씨가 좋아하는 사람이랑 만나게 이혼도 해주겠다는데, 뭘 더 바라는 거예요?”“네 항공권을 말하는 거야?”여이현은 온지유가 남겨놓은 항공권을 꺼내 들었다. 그녀는 그와 함께 F국에 갈 것처럼 해놓고, 결국에는 그와 노승아의 이름으로 항공권을 끊었다.세상에 외도를 부추기는 아내는 온지유 밖에 없을 것이다.온지유는 힐끗 보면서 물었다.“안 갔어요?”여이현은 그녀가 보는 앞에서 항공권을 갈기갈기 찢었다. 그러고는 싸늘하게 그녀를 노려보며 말했다.“넌 애 데리고 도망갈 생각밖에 없지? 나를 위하는 것처럼 말해놓고 결국에는 네가 원하는 대로만 하겠다는 거잖아.”그는 주변을 빙 둘러봤다. 온지유가 이런 곳에서 살았다고 생각하자 웃음만 피식 나왔다.“그렇게 해서 뭘 얻는 건데? 코딱지만 한 오피스텔? 아니면 널 보러 오지도 않는 애 아빠? 그 남자 한 번도 여기 온 적 없지?”여이현은 핏줄이 튀어나올 정도로 주먹을 꽉 쥐었다. 이렇게라도 분노를 억누르려고 말이다.온지유는 말없이 머리를 돌렸다.“말 안 해도 알아. 그 남자는 온 적 없어.”여이현은 이를 악물었다.“그게 이현 씨랑 무슨 상관인데요?”온지유는 이 화제에서 벗어나고 싶기만 했다.“너는 내 아내야! 어떻게 상관이 없어! 평소에는 그렇게 똑똑하게 굴더니 왜 그런 쓰레기한테 마음을 줬어? 설마 내가 다른 새끼 자식을 키워줄 거로 생각한 건 아니지?”“저는 지금 혼자 살고 있어요. 제 결정은 이미 명백하게 보여준 것 같은데요.”“내 허락 없이는 절대 안 돼!”여이현은 단칼에 거절해 버렸다.“그렇다면 더 말할 것 없겠네요. 이현 씨가 뭘 원하는지 알겠어요. 위자료 한 푼 받지 않고 이혼해 줄게요. 그러면 가문에도 영향이 없겠죠?”“당장 가서 애 지워!”여이현이 또다시 말했다. 그의 눈빛으로 추측하건대,
말을 마친 온지유는 방으로 뛰어 들어가 문을 쾅 닫아버렸다. 거실에는 정적이 맴돌았고, 여이현은 의자에 앉은 채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그는 온지유가 왜 이 아이를 낳으려고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얼굴도 모르는 남자의 어떤 점이 좋은지 의아했다.그 남자는 그녀가 임신한 것도 모르고, 이 작은 아파트에 사는 것도 모르고, 그녀에게 관심을 가진 적도 없지 않은가.동시에 그는 일종의 패배감을 느꼈다. 그가 무엇을 하든 온지유는 만족하지 않았다. 그가 직접 만들어준 삼계탕도 독이 들었다고 생각하면서 한 입도 맛보지 않았다.그는 덴 손을 바라보며 스스로가 너무 멍청하게 느껴졌다. 마음이 떠난 여자를 기쁘게 하려고 하는 자신이 바보 같았다.여이현의 얼굴은 점점 차가워졌고, 결국 일어나 집 밖으로 나갔다.밖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그를 발견한 배진호는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동거하기로 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나왔으니 말이다.배진호는 의아한 말투로 물었다.“대표님, 식사 중이 아니었나요?”여이현은 냉랭한 얼굴로 차갑게 말했다.“됐어요. 자기가 안 먹겠다는데 내가 뭘 어떡하겠어요.”그는 성난 발걸음으로 걸어갔다. 배진호는 이게 무슨 영문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조금 전까지 잘 지내지 않았던가? 변화는 정말 눈 깜짝할 사이에 찾아왔다.그는 급히 여이현의 발걸음을 따라갔다.여이현은 차에 올라타서 힘껏 문을 닫았다. 그리고 넥타이를 잡아당기고 단추까지 두어 개 풀었다. 그런데도 답답함은 가시지 않았다.그는 담배에 불을 붙이며 짜증을 해소하려 했다. 곁에 있는 사람은 감히 말도 못 걸 무서운 모습이었다.이때 전화가 울렸다.여이현은 전화를 힐끗 보고 담배를 깊게 한 모금 빨아들인 후 수락 버튼을 눌렀다.“여보세요.”“여이현, 너 또 어디 갔어? 내가 한참 찾았잖아.”전화 건너편에서 최주하는 웃으면서 말했다.여이현은 잠시 침묵하며 담배를 더 피우다가 담담하게 대답했다.“나 지금 집에 없어.”“그건 당연히 알고 있지.”스포츠카를 몰고 있
자고로 남자는 반항심이 있기 마련이다. 다른 사람이 대신 선택한 여자가 눈에 차기는 어려웠다.그러나 여이현은 달라졌다. 그는 점점 더 온지유를 좋아하고 있었다.“두 번째는 불가능해. 온지유는 다른 남자를 좋아하거든. 벌써 애까지 있어.”이 말을 들은 최주하는 잠깐 멈칫했다. 일단은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었다.“확실해?”“확실하지 않으면 너한테 말하겠어?”여이현의 대답을 들은 최주하는 잠시 멈췄다가 다시 물었다.“네 아이가 아니라는 것도 확신하고?”그는 온지유에게 다른 남자가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었다.“나는 온지유랑 관계를 가진 적이 없어!”여이현은 단호하게 말했다.“그래. 내가 졌다. 내가 졌어. 지유 씨 같은 여자를 곁에 두고 아무 일도 없었던 거면, 넌 타고난 스님 감이야. 아주 훌륭한 인재 납셨어.”“...꺼져.”안색이 어두워진 여이현은 전화를 바로 끊어버렸다. 괜히 더 말했다가 열만 받을 바에는 그냥 끊는 게 나았다.화는 담배 한 대 전부 타들어 간 다음에도 가라앉지 않았다. 그는 차창을 통해 위층을 바라봤다. 온지유가 있는 층의 전등은 아직 꺼지지 않았다.‘설마 지금도 울고 있나?’여이현은 갑자기 초조해졌다. 마치 수많은 개미가 가슴을 갉아 먹는 것처럼, 전혀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그는 입술을 꾹 다물며 다시 차 문을 열었다. 배진호는 그가 다시 올라가려는 줄 알고 자연스럽게 말했다.“대표님, 이제 화가 좀 가라앉으셨나요.”여이현이 차가운 눈빛을 보내자, 배진호는 흠칫 놀라며 입을 막았다. 그런데도 말은 멈추지 않았다.“사모님 많이 힘드실 텐데 대표님이 가서 위로해 주세요. 잘 달래주시면 모든 일이 다 해결될지도 몰라요.”급하게 덧붙인 듣기 좋은 말이었다.여이현의 머릿속에는 온지유의 붉은 눈시울로 가득했다. 더 이상 다른 생각을 할 여력은 없었다. 물론 배진호가 한 말도 들리지 않았다.그는 출입문을 닫지 않고 나갔었다. 온지유는 줄곧 방에서 나오지 않았는지 출입문이 그대로 열려 있었다.식탁 위에서 싸늘
온지유가 일어났을 때 방에는 아무도 없었다. 눈가는 여전히 촉촉했다.어젯밤 싸웠던 일이 떠오른 온지유는 곁으로 손을 뻗었다. 누군가 누웠던 흔적은 없었다. 아무래도 여이현은 어제 나간 대로 돌아오지 않은 모양이었다.그녀는 몸을 일으켜 옷장을 확인했다. 여이현의 옷이 그대로 있는 걸 봐서 완전히 포기한 건 아닌 모양이었다. 기분은 더욱 암울해졌다.욕실에서 샤워하고 나온 그녀는 바로 출근했다. 방송국에서 채미소는 큰 소리로 외쳐댔다.“내 앞길 막지 마요! 여기 나보다 더 중요한 일을 하는 사람이 있어요?”오늘의 그녀는 폭탄을 집어삼킨 것처럼 불을 뿜어냈다.“미소 씨, 왜 그래요? 안 좋은 일이 있다고 해서 남한테 화풀이 아는 건 아니죠.”동료가 기분 나쁜 듯 말했다.그러나 채미소는 언제나 이랬다. 특히 기분 나쁠 때는 눈에 뵈는 것이 없었다.“안 좋은 일? 하, 내 앞길을 막아놓고 무슨 말이 이렇게 길어요. 난 중요한 인터뷰를 하러 가는 길이에요. 당신 따위가 방해할 스케일이 아니라고요.”“미소 씨가 여이현 대표님 인터뷰 못 따낸 거, 우리가 모를 줄 알아요? 따냈으면 여기서 화풀이하지도 않았겠죠. 동네방네 소문내고 다니기 바빴을 테니까.”채미소는 미간을 팍 찌푸리더니 언성을 더욱 높이며 말했다.“확정 안 됐을 뿐이지 못 따낸 거 아니에요! 앞으로 기회가 있다고요! 당신은 뭐 할 수 있을 줄 알아요? 다들 못하는 일이니까 내가 하는 거예요! 실력도 없으면서 입만 살았네요!”동료도 화가 나 보였지만 아무 말도 못 했다. 채미소의 말마따나 그녀는 방송국의 기둥이었기 때문이다.이때 온지유가 들어왔다. 채미소와 싸우고 있는 동료 빼고는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다들 채미소가 무서운 눈치였다.“왜 이렇게 시끄러워요? 다들 일 안 해요?”안정희가 차가운 표정으로 말했다. 채미소는 곧바로 달려가서 고자질하기 시작했다.“편집장님, 저 하루 종일 고생해서 여이현 대표님을 만나고 돌아온 거 아시죠. 근데 인터뷰를 하루 만에 못 따냈다고 비웃는 사람이 있
채미소는 여전히 화가 나 있었다. 하지만 이번 인터뷰에서 온지유의 도움이 꼭 필요했다. 그녀는 또 여이현을 잘 설득해서 지난번 잃어버린 체면을 되찾아야 했다.안정희가 떠난 다음 그녀는 온지유에게 다가가 한결 부드러운 어조로 말을 건넸다.“지유 씨, 어제 말했던 일 다시 생각해 봤어요?”“답은 어제 이미 드렸잖아요.”온지유는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채미소는 속으로만 화를 삭였다.온지유는 만만한 동료들과 달랐다. 그러나 이번 일이 끝나고 나면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할 생각이었다.“이렇게 하는 건 어때요? 이번 일은 우리가 같이 한 걸로 해요. 언제까지 블로그에 글만 쓰고 있을 거예요. 지유 씨도 높은 자리에 가고 싶죠? 나 채미소예요. 나만 잘 따라오면 1년 안에 내 위치에 오를 수 있게 해줄게요.”이 말을 듣고 온지유는 가볍게 웃었다. 직장은 냉혹하다. 누군가 무책임하개 한 말까지 믿으면 안 되는 법이다.그녀는 채미소를 올려다보며 말했다.“미소 씨가 원하는 대로 양보해 줬으면 되는 거 아니에요? 제가 왜 또 따라가야 하죠?”채미소는 인내심이 바닥난 듯 당당하게 말했다.“그러는 온지유 씨는 뭐가 그렇게 잘났어요? 잊었나 본데, 이번 일은 내가 따온 거예요!”그녀는 ‘양보’라는 말을 용납할 수 없었다. 뭐든 직접 손에 넣어야만 실력을 입증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온지유는 서류를 정리하며 말했다.“채미소 씨가 뭐라고 하든 상관없어요. 아무튼 저는 이 인터뷰 하지 않을 거예요. 저는 당신 뒤만 졸졸 따라다닐 정도로 유치하지 않거든요. 적당히 얼렁뚱땅 넘어갈 생각은 말아요. 그리고 채미소 씨 뭐든 혼자 잘 해내는 능력자라고 하지 않았나요? 그러면 이번에도 스스로 실력을 입증해 봐요.”온지유는 다시 한번 채미소의 요청을 거절했다. 이쯤 되니 채미소도 그녀가 자신과 대립하려고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도와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아영 씨, 잠깐 저 좀 봐요.”온지유는 옆에서 타자하던 공아영을 향해 말했다.“네.”공아영은 하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