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지유는 순간 숨이 가빠졌다. 그녀는 사실을 숨기기로 했다. "임신한 건 아니에요. 그냥 담백한 음식을 많이 먹어서 입맛을 바꾸고 싶었을 뿐이에요."어머니가 지난번에 물어봤을 때 이미 그녀에게 여이현과의 이혼 이야기를 했었다. 지금 이 시점에서 임신했다는 것을 어머니가 알게 되면 또 무슨 말을 할지 뻔했다.정미리는 안심하며 말했다. "임신하지 않았다니 다행이야. 네가 결정을 내린 이상, 지금 임신하면 너에게 부담이 될 테니까."정미리가 무언가 더 말하려 했지만, 온경준은 그녀에게 눈짓을 보냈다.온경준은 온지유에게 말했다. "지유야, 많이 먹어라. 아이 문제는 너희 젊은 사람들이 알아서 하면 된다.""네."온지유는 고개를 끄덕였다.요즘 들어 임신해서인지 그녀는 입맛이 변했고, 쉽게 피곤해졌다. 식사를 마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졸음이 밀려왔다.그녀는 방으로 돌아가 잠시 누우려 했는데, 그때 배진호가 전화를 걸어왔다."온 비서님, 대표님이 취하셨어요.""…지금 어디 있나요?"온지유는 무시할 수 없었다.배진호는 말했다. "저와 이채현이 수려원으로 모시고 가는 중이에요."이채현의 이름을 듣고 온지유는 잠시 멍해졌다. 여이현이 강씨 가문의 책임자를 만나러 갈 때 분명 배진호만 데려갔었는데."알겠어요. 바로 갈게요." 온지유는 생각을 멈추고 조용히 대답했다.그 순간, 그녀의 졸음은 사라졌다.그녀가 방에서 나오자, 정미리는 그녀를 위해 계란과 수제 소시지를 준비해 주었다. 또한, 직접 만든 마늘 고추장도 있었다."안 잤어?"정미리는 온지유가 나오는 것을 보고 놀라며 물었다.온지유는 고개를 끄덕였다. "들어가서 물건 좀 챙겼어요. 급한 일이 생겨서 나가봐야 해요."정미리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애도 참, 이렇게까지 바쁘게 지내다니! 이 음식들 챙겨가!"수려원으로 가야 했기 때문에, 온지유는 그 말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가득 담은 가방 두 개를 들고, 문 앞에서 택시를 잡았다. 택시를 타자마자 운전사에게 빨리 가달라고 부탁했다.
이채현이 가자마자 여이현의 시선이 온지유에게 옮겨졌다.“대체 어디서 이렇게나 많은 것을 들고 온 거지?”투명한 비닐봉지였던지라 포장된 음식이 한눈에 보였다.온지유가 말했다.“부모님 댁에 갔다 왔어요.”“나민우랑 만나지 않았어?”여이현이 나지막이 물었다.지금 이 순간 그는 술 깬 사람처럼 보였다.보아하니 이채현의 학습 능력과 실행 능력이 아주 강한 듯했다.온지유는 평온한 얼굴이었다.“나민우는 바쁜 사람이에요. 우리처럼 한가하지 않아요.”말을 마친 뒤 온지유는 음식을 싼 봉투를 들고 주방으로 걸어갔다.앞으로 한동안 수려원에서 살게 되었으니 그녀도 말을 아낄 생각이었다.음식을 내려놓고 나오자 여이현이 턱짓을 했다.“이리와.”온지유는 그와 다투고 싶지 않아 고분고분 그의 앞으로 다가갔다.여이현은 손을 뻗더니 이내 그녀를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겼다. 짙은 술 냄새가 순식간에 확 풍겨왔다. 온지유는 술 냄새를 맡자마자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리게 되었다.“술 냄새가 코를 찌르네요. 일단 욕조에 물부터 받아 놓을까요?”온지유는 여이현과 거리를 두려고 시도했다.여이현은 손을 들어 그녀의 턱을 잡았다. 살짝 힘을 주면서 말이다. 그리곤 나직하게 비웃었다.“목욕하고 나면?”온지유는 입술을 틀어 물었다.“하루 동안 바빴으니 푹 쉬셔야죠.”“그걸로 끝?”여이현은 눈썹을 움찔거렸다.온지유는 고개를 끄덕였다.사실 그녀도 하고 싶었지만 여이현은 그녀에게 기회를 주지 않았다.온지유는 그와 싸우고 싶지 않았다.“아니요. 절 부르셨잖아요. 그래서 제가 여기 온 게 아니겠어요? 본가에서 음식을 가져왔으니 드시고 싶으면 말해요.”여이현은 예전에도 그녀의 어머니가 만든 음식을 먹긴 했었다. 온지유가 갑자기 음식 얘기를 했다는 것은 그와 깊이 대화를 나누고 싶지 않다는 뜻이었다.“이채현이 만든 매실차도 네가 가르쳐준 거야?”여이현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아뇨. 그건 이채현 씨가 독학하신 거예요.”그녀는 그저 이채현에게 레시피가 적힌
온지유는 행여나 그가 이어서 다른 행동을 할까 두려워 얼른 답했다.“네. 알겠어요.”여이현은 아주 만족스러워 보였다.“최근에 속이 안 좋다고 하지 않았나? 그런데 왜 살이 찐 것 같지?”온지유는 그만 얼어붙고 말았다.여하간에 그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그녀는 얼른 몸을 틀며 말했다.“아마 푹 쉬지 못해서 부기가 올라왔나 봐요. 내분비 기능에 문제가 생기면 살이 찔 수도 있다고 했어요...”여이현은 미간을 찌푸렸다.“이채현을 채용하지 않았나? 그런데도 스트레스가 그렇게 심해?”“아마도 제가 너무 완벽을 추구해서 그런 것일 수도 있죠.”온지유는 이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의 그녀는 그의 얼굴을 마주 볼 엄두도 나지 않았다.여이현은 다소 언짢은 어투로 말했다.“난 왜 네 말이 내 곁에서 일하기 싫어서 일부러 핑계를 대는 것처럼 들리지?”“아녜요.”온지유는 다소 급해졌지만 분명하게 말할 수 없었다. 그녀는 여이현이 자꾸만 자신의 몸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 싫어 대충 둘러댄 것이지만 그가 이렇게 생각할 줄은 몰랐다.나소 머리가 지끈거렸다.“매실차를 마셨으니 제가 다른 음식이라도 만들어 드릴까요?”온지유는 몰래 주먹을 움켜쥐면서 얼른 다른 화제로 넘어가길 바랐다.여이현은 그녀를 빤히 보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몇 초간의 정적이 흐르고 온지유는 심장이 튀어나올 정도로 긴장했다.다행히 여이현이 나직하게 대답했다.“그래.”...온지유는 주방으로 들어갔다.여이현이 술을 꽤나 마셨다는 것을 고려해 국수 한 그릇을 만들어 주었다.간단하면서도 쓰린 속을 달랠 수 있는 부담 없는 국수였다.여이현은 아주 맛있게 먹었다. 심지어 칭찬도 했다.“솜씨가 좋군.”온지유는 대꾸하지 않았다. 속으로 어차피 여이현과 함께 있을 시간이 얼마 없을 터이니 함께 있는 동안이라도 음식을 해줘야겠다고 생각했다.여이현은 침묵하는 그녀를 눈치챘다.“내일 회사로 가지 않아도 돼. 나랑 함께 쇼핑하러 가자. 옷 사줄게.
커피 한 모금 마시니 유강후의 입속에 쌉싸름한 맛이 퍼지고 이내 달콤함도 느껴졌다.이런 맛은 오로지 온지유가 내린 커피에서만 났다.온지유는 머뭇거렸다. 마음이 조금 흔들린 것이다.“이 일을 대충 언제쯤 끝낼 수 있는데요?”그녀가 여이현에게 시집온 것을 두 집안 어른과 제일 친한 친구들을 제외하고 아는 사람이 없었다.혼인신고서를 제외하고 두 사람은 결혼사진도 찍지 않았거니와 신혼여행도 가지 않았다.여이현이 그녀를 데리고 F 국으로 놀러 가는 것을 그녀는 여이현과 못 간 신혼여행이라 생각하려 했다.그렇게 생각하면 더는 아쉬움이 없을 것 같았다.여이현은 몇 초간 침묵하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늦어서 일주일 뒤까지는 끝낼 수 있을 거야.”“네, 알겠어요.”일주일 정도는 기다려 줄 수 있었다.게다가 내일 회사로 출근하지 않아도 되니 병원에 들러서 제대로 검진을 받을 생각이었다.백지희가 있으니 백지희 핑계를 대면 되었다.온지유는 더는 그의 앞에서 생각에 빠질 엄두가 나지 않았다.“그럼 일하는 데 방해가 되지 않게 전 이만 방으로 갈게요.”여이현이 고개를 끄덕이자 온지유는 서재에서 나왔다. 방으로 돌아온 그녀는 백지희와 한참 문자를 주고받았다. 그리고 드라마를 보다가 최근 주식 시세를 알아보았다.자기가 샀던 주식의 변화가 별로 크지 않다는 것을 확인한 뒤 욕실로 들어갔다. 샤워를 마친 후 침대에 누운 지 얼마 되지 않아 깊은 잠에 빠졌다.그녀가 눈을 뜨게 된 이유는 허리에서부터 올라오는 투박한 손 때문이었다.귓가에선 뜨거운 숨결이 느껴졌다.“저... 요즘 몸이 별로 안 좋아서요...”온지유는 그의 손을 잡으면서 더는 올라오지 못하게 했다.임신 초기에 관계를 가지지 말라는 말을 들은 적 있었지만 그래도 제일 신경 쓰이는 건 여이현이 달라진 그녀의 몸을 눈치챌까 봐서였다.여이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손도 올리지 않았다.하지만 어둠 속에서 온지유는 여전히 그의 가라앉은 눈빛을 느낄 수 있었다.“온지유, 네가 나 밀어낸 게 이번
그러나 현관으로 들어오자마자 그들은 소파에 앉아 있는 여진숙을 발견했다.여진숙의 안색이 어두웠다.“인터넷을 그렇게 떠들썩하게 만들어 놓고는 둘은 아주 한가로워 보이는구나.”고씨 집안에서 연 파티에서 여이현은 온지유를 위해 나서준 것이 아직도 실시간 인기 검색에 올라와 있었다.여이현은 온지유에게 눈빛을 보냈다.바로 알아챈 온지유는 여진숙을 양해 인사했다.“어머님, 아침 준비해놓았는데 혹시 아직 식사 전이라면 도우미 아주머니한테 어머님 몫도 준비해 달라고 할까요?”별장에 도우미한테 말하면 바로 준비해놓을 수 있었다.게다가 눈치 빠른 도우미는 그녀가 말하기도 전에 바로 주방으로 들어갔다.그러나 여진숙은 온지유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여이현! 내가 지금 너한테 말을 하고 있잖니!”여이현이 담담하게 말했다.“저랑 지유 결혼했다는 사실은 언젠가 밝혀질 거였는데 뭘 그렇게 화를 내세요.”수많은 사람과 수많은 입을 굳이 신경 쓸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그러나 여진숙은 아니었다. 그녀는 화를 억누르며 말했다.“듣자 하니 네 고모가 너희들한테 가면무도회에 초대했다지?”여이현은 여전히 담담한 어투로 말했다.“뭐가 문제가 있는 건가요?”“그런 쓸데없는 무도회나 파티에 적당히 참석해. 네 아빠가 곧 돌아오실 거다. 괜히 네 아빠 심기 건드리지 말고 얌전히 있어.”“더 하실 말씀 있으세요?”여이현은 여진숙의 말에도 별다른 감정 기복이 없었다. 온지유의 눈에는 꼭 아무래도 상관없는 태도로 보였다.하지만 두 사람은 원래부터 이런 방식으로 대화를 나누었다.그녀에겐 애초에 끼어들 자리가 없었기에 지금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여진숙은 여전히 분노를 다스리고 있었다.“지난번에 승아가 나한테 선물을 줬으니 이번에는 내가 줄 차례구나. 지금 병원에 입원해 있다고 했으니 네가 이 선물을 승아한테 가져다주거라. 난 감기 걸려서 못 갈 것 같구나.”온지유가 옆에 있음에도 여진숙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그녀의 시어머니는 그녀가 있는 앞에서 대놓고 다른
여이현은 그녀와 말다툼을 벌이고 싶지 않았다.“물건은 지유가 대신 가져다준다고 했으니 혹시 다른 일이 있으면 그냥 저한테 전화로 말씀하세요.”그 뜻은 쓸데없이 찾아오지 말라는 의미였다.여이현은 여진숙을 이렇듯 귀찮아하고 있었다.‘보아하니 승아를 더 팍팍 밀어줘야겠어!!'여진숙도 여이현과 말다툼을 벌이고 싶지 않았다.“난 여씨 집안의 안주인이야. 네 아빠의 아내라고.”여이현은 그녀를 무시한 채 나가버렸다....온지유는 먼저 자양제를 들고 병원에 있는 노승아를 찾아갔다.병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노승아는 당연히 여이현인 줄 알고 기대했다.그러나 온지유를 본 순간 노승아의 얼굴에선 웃음기가 사라지고 싸늘하게 굳어버렸다.“왜 그쪽이 온 거죠?”온지유가 담담하게 말했다.“제 어머님께서 몸이 안 좋으시다고 하셔서요. 저더러 대신 전해달라고 했어요.”말을 하면서 온지유는 노승아의 곁으로 다가가 자양제를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온지유는 자양제를 선물해주자마자 몸을 틀어 나가려 했다.노승아가 그녀를 불렀다.“온지유 씨, 이왕 온 김에 조금이라도 앉아 있다가 가지 그래요?”온지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전 노승아 씨랑 친한 사이가 아니라서요.”그녀는 그저 여진숙의 요구를 거절할 수가 없어서, 여진숙과 여이현이 다투는 걸 구경하고 싶지 않아서 온 것이었다.하지만 병원에 온 김에 그녀는 새로 진료 접수했다.아침이어도 병원엔 사람이 꽤나 있었다.그녀의 앞으로 세 명이나 대기하고 있었다.차례가 되자 의사는 그녀에게 증상을 물어보곤 초음파실로 가라고 했다.초음파 검사를 위해 그녀는 두 병의 생수를 마신 뒤 침대에 누워 검사했다.초음파 젤리를 배에 바르고 나니 차가운 기분이 들었다.온지유는 천장을 멍하니 보았다. 너무 긴장한 나머지 심장이 목구멍까지 튀어나올 것 같았다.그녀도 자신이 왜 이토록 긴장했는지 모른다.초음파 검사 해주던 의사는 그녀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먼저 물었다.“임신이 처음인가요?”“네...”온지유의 목소리
익숙한 목소리에 온지유는 그대로 얼어버렸다.그녀는 태연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그녀의 시야에 들어온 사람은 대학 동기였던 도세원이었다.도세원을 기억하고 있었다.3개월 전, 여진 그룹 기술팀 면접도 그녀가 직접 도세원을 평가했다. 그녀와 대학 동기인 것 제외하곤 도세원은 면접을 아주 잘 보았고 이력서의 스펙도 완벽했다.온지유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이런 우연이 다 있네.”아이를 낳기로 했던지라 그녀는 괜히 찔리는 기분이 들었다.“오늘 휴가라서 병원에 와서 검진 좀 받으려다가 널 만나게 될 줄은 몰랐네. 지유야, 다음 주 금요일에 조교 아들 백일 잔치한다던데 갈 거야?”도세원은 온지유를 보며 물었다.대학교 시절 조교는 확실히 성실한 사람이었다. 시골에서 올라온 사람이긴 했지만 착한 사람이라 동기들이 원하는 것을 대부분 들어주고 도와주었다.그때 당시 그녀도 조교의 도움을 받은 적 있었다.다만 백일상을 한다는 초대 문자는 받지 못했다.도세원은 온지유가 말이 없자 그제야 눈치채고 어색하게 말했다.“조교는 나랑 친한 사이라서 먼저 연락한 거야. 아직 동기 단톡방에 소식을 알리지 않았거든. 마침 널 만난 김에 그냥 물어본 거야.”도세원은 난감한 얼굴로 머리를 긁적였다. 분위기는 너무도 어색했다.온지유는 눈치채고 있었다.도세원이 이어서 말했다.“내가 나중에 단톡방에 올릴 거야. 조교는 미처 바빠서 신경 쓰지 못했나 봐. 조교 아들이 선천성 심장병을 앓고 있거든. 그래서 돈도 많이 쓰고 다른 곳에 신경 쓸 여유가 없을 거야...”도세원도 사실 최근에 가슴이 자주 답답하여 혹시나 하는 마음에 검진받으러 온 것이었다.온지유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이제 막 백일 된 아이가 심장병을 앓고 있다니, 분명 병원비가 꽤나 나갔을 것이다.임신한 탓인지 모르겠지만 그녀의 머릿속에 순간 고통스러워하는 아이의 모습이 떠올랐다.온지유도 마음이 아팠다.“응, 갈 거야. 너도 얼른 들어가 봐.”“응.”도세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온지유는 빠르게 걸음을 옮겨
온지유는 바로 백지희에게 연락했다.백지희의 목소리엔 나른함이 느껴져 미안한 목소리로 말했다.“미안, 자고 있었어? 쉬는 거 방해해서 미안한데 나 지금 백화점 가는 길이야. 너희 집 근처 백화점에서 너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와줘.”“알았어.”백지희는 거절하지 않았다.백화점에 도착한 뒤 아무 카페로 들어가 커피 두 잔을 주문했다.백지희는 멀리서부터 카페의 하얀 의자에 앉아 한 손에 커피를 들고 있는 온지유를 발견했다.“오늘 무슨 날이기에 갑자기 나한테 데이트 신청을 다 하는 거야? 게다가 여긴 요즘 핫한 카페잖아. 말해, 무슨 일인데?”백지희는 살짝 불만이 있는 목소리로 말했지만 자연스럽게 의자를 끌어당겨 온지유의 맞은편에 앉았다.온지유는 웃으며 답했다.“딱히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니야. 그냥 나랑 같이 쇼핑하자고 부른 거야. 그리고... 이현 씨가 나한테 전시회 쪽 일을 이미 배 비서님한테 맡겨서 처리했다고 했어.”여이현을 언급하기 전까지만 해도 백지희는 기분이 아주 좋았다. 온지유에게 농담을 던질 정도로 말이다. 그러나 여이현의 이름을 듣자마자 백지희는 그날 어둠 속에서 자신을 협박하던 그의 모습이 떠올랐다.게다가 온지유는 여이현에게 한없이 마음 약해지는 사람이었다.“지유야, 내가 전부터 말했지만 독한 마음을 먹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못 해. 내가 이 말을 하는 이유도 뭐겠어. 말 그대로 너도 독해지라고 하는 말이잖아. 넌 다 좋은 데 마음이 너무 여려. 조금만 독해지면 네가 못 해낼 일은 없을 거야. 계속 이렇게 누군가에게 끌려다니면서 살 수는 없잖아, 안 그래?”백지희는 입술을 틀어 물며 솔직하게 말했다.온지유도 동의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나도 알고 있어. 나 방금 병원에 갔다 왔어. 의사가 그러는데 임신한 지 한 달 정도 됐대.”“알아, 눈치채고 있었어.”그날, 온지유가 그녀의 집에서 음식을 먹기도 전에 헛구역질하는 것을 보고 바로 눈치챘다.그녀가 눈치채고 있었기에 온지유도 그녀에게 숨기지 않고 말한 것이다.“그래서
양시은은 돈을 내고 택시에서 내렸다.“기사님, 저 여기서 내릴게요. 감사합니다.”택시에서 내린 그녀는 얼른 검은색 차로 달려갔다.나도현은 창밖에서 나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고 그곳에는 양시은이 창문을 두드리고 있었다.창문을 열자 양시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나도현, 문 열어줘.”나도현의 눈빛이 흔들리고 손을 뻗더니 문이 열렸다. 양시은은 얼른 차에 올라탔다.“왜 말 한마디도 없이 혼자 여기 온 건데? 하민이 하원 시간이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잖아.”“그냥 오고 싶었어.”“비서님한테 이미 들었어.”나도현은 입술을 달싹이더니 아주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어. 누가 사주한 것인지.”그가 변호사 되기를 반대하고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오로지 나용민 뿐이었고 기뻐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몰랐다.나용민은 나도현에게 아주 큰 기대를 하고 있었기에 나도현이 그저 평범한 변호사가 되는 것을 반대하고 있었다. 그는 자기 아들이 자신처럼 나진 그룹을 이끄는 사람이 되길 바랐다.“병문안 갈까 고려하고 있었으니 가기도 전에 이런 식으로 뒤통수를 치시네.”“미안해. 다 내 탓이야...”양시은은 그런 그가 안쓰러우면서도 죄책감이 들었다.“만약 내가 설득하려고 하지 않았다면 이런 기분을 느낄 일은 없었을 거야.”“네 잘못은 아니야. 내 잘못이지.”나도현은 담담하게 말했다. 애초에 조금이나마 기대한 그의 잘못이었다.양시은은 나도현의 냉담한 어투로 기쁨을 느낄 리가 없었고 그가 냉담하면 할수록 더 안쓰러웠다. 그동안 그가 얼마나 힘든 시간을 보냈을지 잘 알고 있었으니까 말이다.만약 그녀가 나도현이었어도 자신의 아버지가 꿈을 방해한다면 숨이 턱턱 막힐 것이었다.“괜찮아. 내가 있잖아.”양시은은 그를 조심스럽게 안아주었다. 그날 밤처럼 자신의 따듯한 체온으로 차가워진 그의 마음을 녹여주려 했다.나도현은 그런 그녀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기사님, 병원으로 가주세요.”나도현의 입에선 뜻밖의 말이 나와 양시은은 멍한 눈빛으로 그
대체 누가 나도현의 심기를 건드린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싸늘해진 분위기부터 바꿔야 한다고 생각했고 양시은도 협조적이었다.점차 그들의 분위기도 바뀌면서 룸 안은 열기로 가득해졌다. 이때 누군가 무심코 물었다.“양 비서님, 나중에 결혼 계획 있으세요?”나도현은 차가운 눈길로 입을 연 사람을 보았고 등골이 서늘해지는 기분이었다. 비서는 더 긴장하게 되었다.다행히 양시은은 대충 둘러 말했다.“마음이 맞는 사람이 있으면 아마 할 것 같네요. 하지만 아직은 결혼 계획은 없네요.”주문한 음식이 나오고 그들은 배불리 먹고 즐긴 후 돌아갔다.많은 사람들이 술을 마셨던지라 해롱해롱한 상태였고 비서는 그들을 집으로 전부 돌려보랬다. 물론 양시은도 술을 마셨지만 두 잔만 마셨던지라 그저 얼굴만 불그스레한 상태였다.“양 비서님은 혼자 돌아갈 수 있죠? 혼자 갈 수 있으면 전 이만 먼저 가볼게요.”비서는 술에 취해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직원을 등에 업고 있었고 그 직원은 비서의 뺨을 찰싹찰싹 때렸다.그런 그의 모습을 보니 양시은은 괜스레 측은한 마음이 들어 그의 부담을 덜어주고 싶었다.“네. 전 혼자 갈 수 있어요.”“그럼 전 이만 가볼게요.”비서는 얼른 자리를 떠나버렸다. 양시은이 위험할지 안 할지는 전혀 걱정되지 않았다. 나도현이 곁에 있는 한 양시은이 절대 위험할 리가 없었으니까.직원들이 떠나고 나니 두 사람만 덩그러니 남게 되었다.나도현은 자연스럽게 양시은의 가방을 들어주며 말했다.“데려다줄게. 가자.”양시은은 자신의 가방을 돌려받고 싶었지만 그의 모습을 보니 말이 나오지 않았다. 어차피 돌려주지 않을 것이 분명했으니까.뒷좌석에 앉은 양시은은 뒤늦은 취기에 머리가 어질거렸다. 나도현은 한참 지나도 들리지 않는 인기척에 고개를 돌렸다. 양시은은 손을 들어 턱을 괸 채 눈을 감고 있었고 잠든 것 같았다.“대표님, 차가 좀 막힐 것 같습니다.”운전기사가 눈치 없이 말하자 나도현은 바로 눈치를 주었다.“목소리를 낮추세요. 길 막히면 다른
양시은은 입이 떨어지지 않았지만 어떻게든 말을 해야 했다. 그들은 서로 남의 돈으로 회식을 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으니 말이다.“할 말이라도 있는 거야?”나도현은 눈썹을 꿈틀거렸다. 양시은은 그가 이렇듯 빨리 눈치챌 줄 몰랐던지라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할 말이 있긴 해. 사실 직원들이 회식하고 싶어 해.”그녀는 빠르게 할 말을 꺼냈고 조용히 나도현의 반응을 기다렸다. 하지만 남자는 눈썹을 꿈틀거리기만 할 뿐 별다른 반응은 없었다.“그것뿐이야?”이내 그는 빠르게 회식을 허락해 주었다. 양시은이 나도현의 말을 직원들에게 전해주자 직원들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세상에. 대표님이 회식을 허락하셨다고요...”“전 회식 허락 안 해줄 줄 알았어요. 평소에도 일만 하시는 분이잖아요. 매일 회사로 출근한 뒤에 쉬는 모습을 단 한 번도 본 적 없었는데 이렇게 쉽게 허락해 주시다니.”비서들은 서로 믿기지 않는 얼굴로 바라보았다. 나도현이 이렇듯 쉽게 허락해 줄 줄 몰랐기 때문이다. 어쩌면 양시은이 말을 꺼내서 허락해 준 것일 수도 있었다.그렇게 회식은 오성급 호텔에서 하게 되었고 직원들은 아주 흥분하고 있었다. 나도현은 양시은에게 찾아와 꾸미고 가지 않겠냐며 물었다. 그러자 양시은은 의아한 듯 되물었다.“왜 꾸미고 가야 하는데?”나도현은 그녀를 위아래 훑어보았다. 사실 양시은의 옷차림은 아주 정상적이었고 흔한 직장인의 모습이었다.“이렇게 입고 가기엔 조금 대충 입은 것 같아서. 어쨌든 첫 회식이잖아.”그 말을 들은 양시은은 기분이 이상했지만 일리가 있는 것 같았다. 첫 회식이니 대충 입고 가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럼 뭘 입고 가?”양시은은 자신의 옷장을 열어보곤 훑어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입고 갈만한 예쁜 옷이 없었다.나도현은 그런 그녀를 위해 미리 준비해둔 쇼핑백을 꺼냈다. 보아하니 전부터 사둔 것인 것 같았다.“이걸 입어. 며칠 전에 맞춤제작 한 거야.”양시은은 쇼핑백에 있는 로고를 보았다. 그것은 무난한 옷을 만
사실 양시은의 직감이 말해주고 있었다. 나도현이 알아서 결정할 것이라고.다만 지금 중요한 것은 나진 그룹이 어떻게 되는 것이 아닌 나용민의 건강 상태였다.양시은은 다시 나도현의 안색을 살폈다. 비록 여전히 담담한 표정이긴 했지만 정신은 다른 곳에 팔려있는 것 같았다.“사실 아까 낮에 네 아버지가 입원하셨다고 들었어.”나도현은 멈칫했다.“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지?”“난 그냥 네가 당연히 알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서 말한 거야. 네 아버지니까.”양시은이 말을 마친 후에도 남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행여나 그가 화가 난 것은 아닐까 조심스럽게 눈치를 살폈지만 화가 난 모습은 아니었다. 아무래도 그녀의 예상이 맞았던 것 같았다...순간 긴장이 풀린 그녀는 나도현이 안쓰럽게 느껴졌다. 그는 늘 차가운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마음은 아주 여린 사람이었으니까. 그가 말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슬프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 슬픔은 모두 마음속에 꾹꾹 눌러 담아 속으로 끙끙 앓고 있을 뿐이다.“걱정되는 거라면 병문안이라도 가보는 건 어때. 물론 가기 싫으면 안 가도 돼. 난 그냥 그러면 더 좋을 것 같다고 제안을 하는 것뿐이야.”양시은은 시냇물이 졸졸 흐르는 듯한 부드러운 어투로 말했다. 그녀는 아버지를 여의었기에 그 마음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있을 때 잘해야 후회가 없는 법이니 아직 살아 있을 때 주변 사람들에게 최선을 다해 잘하는 것이 좋았다.나도현의 찌푸려진 미간이 점점 풀리고 나중에는 생각해 보겠다고 대답했다.양시은은 더는 강요하지 않았다. 이미 생각해 보겠다는 대답이 나온 것으로 만족하고 있었으니까....오성 구역에서 벌어진 장이정 일가의 사건을 돌파구로 나도현은 바로 뚝심을 지키던 단골들을 찾아가 천천히 설득한 덕에 점차 진전이 보이기 시작했다.보름 정도 지나자 유진혁이 나오게 되었고 그들은 더는 유진혁의 명령에 따르지 않았다. 그뿐만 아니라 그와 계약했던 사람들도 계약 해지를 요구했고 그와 더는 계약하지 않겠다며 돌아섰다.
박은희는 예전에 자신이 양시은에게 했던 만행 탓에 고개를 숙이는 수밖에 없었고 본인도 자신이 그간 얼마나 심하게 대했는지 알고 있었다.양시은은 손을 들어 그녀의 잔에 물을 따라주었다.“사모님, 말씀하셔도 돼요.”박은희는 그녀를 보더니 멍한 얼굴로 물잔을 받은 후 한참 머뭇거리다가 말했다.“그동안 내가 한 일들은 사과하마. 그래서는 안 됐었는데. 나도 내가 얼마나 악랄했는지 알고 있단다. 나조차도 견디기 힘들었을 거야.”“사모님, 그런 말씀 하지 마세요.”“시은 씨, 나 대신 도현이 좀 설득해줘.”박은희는 심호흡하곤 이틀간 있었던 일들을 말해주었다. 나도현이 집을 나간 뒤 두 사람 사이엔 단 한 마디의 대화도 오가지 않았고 나진 그룹에 있던 나용민의 사람들마저 전부 해고했다고 한다.“도현이 아빠가 지금 화가 많이 난 상태야. 원래부터 몸도 안 좋았는데 혈압이 올라가면서 결국 입원하게 되었어. 지금도 병원에 누워 있어.”박은희는 한숨을 내쉬었고 양시은은 멍한 표정을 지었다. 나용민이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병원에 입원했다는 사실이 너무도 놀라웠기 때문이다.“그럼 지금은 괜찮으신 거예요?”“지금은 괜찮아지긴 했지만 그래도 도현이가 한번은 만나줬으면 해서 그래.”박은희는 뜸을 들이다가 그녀를 보며 말을 이었다.사실 양시은은 그녀의 마음이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아버지와 아들이 싸웠으니 난처한 사람은 중간에 낀 박은희였다. 남편의 편을 들기도, 아들의 편을 들기도 난감했고 두 사람이 싸우는 모습을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다만...“죄송해요. 사모님. 다른 건 도와드릴 수 있어도 이건 도와드리지 못할 것 같아요. 이건 도현이의 선택에 달린 문제니까요.”양시은은 낮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입장을 바꿔서 만약 그녀가 나용민의 자식이었다면 나용민을 용서할 수 있겠는가.아무리 생각해도 양시은은 그 답을 얻지 못했기에 나도현을 도와줄 수 없었고 그가 스스로 그 답을 찾아야 했다.박은희는 조금 실망한 기색이었지만 이미 예상하고 왔던지라 현
문해미는 고개를 끄덕였고 도우미는 주방으로 들어갔다. 꼭 어린아이를 달래는 기분이었다.도우미가 주방으로 들어갔을 때 문해미는 다소 아쉬운 듯한 표정을 짓고 있어 양시은이 말했다.“괜찮아요. 이틀 뒤에 다시 오실 거예요.”문해미는 그녀의 말을 알아들은 것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고개를 푹 숙인 채 음식을 먹는 것에만 집중했다. 비록 정신 연령은 다섯 살 어린아이와 같다고 하지만 문해미의 행동은 여전히 어른과 같은 것을 보아 아마 몸이 기억하는 것 같았다.양시은은 자신의 어머니가 음식을 먹는 모습을 지켜보았다.이때 초인종이 울리고 문해미에게 간단히 말을 한 뒤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어주었다. 현관문이 열리는 순간 그녀는 당황하고 말았다. 하지만 하민이는 그런 그녀의 기색을 눈치채지 못한 것인지 박은희의 품에서 해맑게 그녀와 인사했다.“엄마, 하민이가 너무 보고 싶었어요.”양시은이 박은희에게 시선을 돌리자 박은희가 설명했다.“하민이가 자꾸 네가 보고 싶다고 그러더구나. 집에서도 하루 종일 즐겁게 보내지 못하는 것 같아서 데리고 온 거란다.”양시은은 어찌할 바를 몰라 멍하니 현관에 서 있었다. 박은희는 그런 그녀의 상태를 눈치챘지만 하민이는 너무 기쁜 나머지 그대로 양시은의 품으로 달려들었고 이내 집안으로 뛰어 들어갔다.그렇게 하민이는 문해미와 만나게 된 것이다.박은희는 밥그릇을 들고 있는 문해미를 보다가 다시 고개를 돌려 양시은을 보았다. 두 사람이 닮았다는 것을 보아냈지만 대놓고 물어볼 수 없었고 아직 어렸던 하민이는 본 대로 말했다.“엄마, 이 아주머니는 누구예요?”천진난만한 아이의 모습을 보니 양시은은 순간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그녀는 줄곧 하민이에게 숨기며 살았으니까. 하민이의 아빠든 할머니든 전부 숨기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외할머니의 존재도 숨기고 있어 아무것도 몰랐다.그렇게 생각한 양시은은 가슴이 아파졌고 죄책감에 숨이 턱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심호흡한 뒤 그녀는 아이에게 알려주기로 마음먹었다.“하민아, 이 아주
양시은은 처음부터 끝까지 문해미의 곁에 있어 주었고 검사 결과를 들고 온 의사는 안경을 추켜올렸다. 그의 표정은 아주 복잡해 보였다.“아마 어떤 약물 때문에 뇌에 심한 손상을 준 것 같네요. 환자가 대체 무슨 일을 겪은 거죠?”양시은은 불안한 듯 손가락을 꾹꾹 누르며 말했다.“엄마는 아주 오래전에 실종되었어요. 그래서 저도 잘 몰라요...”진실을 말하는 것 같은 모습에 의사는 그제야 의심을 거두었다.“아마 사라졌던 그동안 누군가에게 약물을 투여받은 것 같군요.”“그럼 저희 엄마는 평생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말씀인가요?”의사의 말에 양시은은 목구멍이 막히는 것 같았다. 문해미가 평생 이런 모습으로 사는 모습을 상상하기조차도 싫었다...의사는 잔뜩 긴장한 그녀의 모습에 누그러진 어투로 말했다.“걱정하실 건 없어요. 정성스럽게 보살피면 회복할 가능성이 있으니까요.”양시은은 그제야 마음이 놓였다. 의사가 해준 말은 인명진이 해준 말과 같았다. 설령 그녀가 평생 문해미를 보살피면서 산다고 해도 아마 매 순간 문해미의 모습을 볼 때마다 가슴이 미어질 것이다.여하간에 아무도 자신의 어머니가 정신을 놓고 사는 모습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문해미는 하민이의 외할머니였고 아직 어린 하민이에겐 문해미의 모습은 충격일 것이다.그렇게 생각한 양시은은 다시 기장해졌다. 어젯밤 일부러 하민이를 피하며 박은희에게 보냈다.다행히 주말이었던지라 그녀는 걱정할 것이 없었고 하민이는 주말 내내 나씨 가문에 머물고 있었다. 하지만 주말이 지나면?평생 외할머니와 만나지 못하게 할 수는 없지 않은가.병원에서 나온 양시은은 입을 꾹 다물고 있었고 혼자 속으로 이런저런 생각 하며 끙끙대고 있었다.나도현은 그런 그녀를 힐끗 보더니 그녀의 손을 잡아주었다. 양시은은 그제야 고개를 돌려 나도현을 보았다.“하민이는 착한 아이니까 네가 잘 얘기해주면 이해할 거야.”“응.”양시은은 그제야 마음이 조금 놓였다. 나도현의 말처럼 하민이는 어른스러운 아이였고 어쩌면 그녀가 쓸
“나도 엄마가 왜 그곳에 있었는지 몰라. 내가 발견했을 때 잘 지내지 못한 것 같았어. 누더기를 입은 채 구석에서 쓰레기를 뒤적거리고 있더라고.”말을 꺼내는 양시은의 목소리엔 떨림이 가득했다. 나도현은 그런 그녀를 품에 꼭 끌어안았다. 익숙한 온기에 양시은은 점차 진정되기 시작했고 두 사람은 거실로 돌아와 소파에 앉아 대화를 나누었다.“그해 아주머니가 실종되었을 때부터 어딘가 이상했어. 하지만 아직 상태도 안 좋으신 것 같으니까 내일 인명진 씨를 불러 봐달라고 하자.”“나도 그렇게 생각했어.”양시은은 문해미가 있는 방을 힐끗 보았다. 나도현은 그런 그녀의 손을 잡아주며 자신만의 방식으로 그녀를 달래주려고 했다.“괜찮을 거야. 아주머니를 찾은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기쁜 일이잖아.”양시은은 그의 위로에 고개를 끄덕였다.다음 날 오후, 인명진은 집으로 방문해 진찰해달라는 나도현의 부탁이 담긴 연락을 받게 되었다.비록 그는 정신과 의사가 아니었지만 난치병에 관해서는 계속 이런저런 연구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문해미를 보게 되었을 때 그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리고 말았다.그런 그의 모습을 본 양시은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고 현실을 부정하고 싶었지만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다.“우리 엄마는 어떤 상태인 거예요?”“상태가 아주 나빠요. 거의 한계에 달했다고 할 수도 있겠네요. 뇌 신경 쪽에 일정한 정도의 손상을 입은 것 같아요. 비록 추측이긴 하지만 80, 90% 확신하고 있어요.”인명진이 솔직하게 말해주자 옆에 있던 테이블이 흔들렸다. 나도현은 얼른 양시은은 부축해주었다. 그러지 않았다면 양시은은 이미 테이블과 함께 중심을 잃고 쓰러졌을 테니까.“어떻게 그럴 수가...”그녀는 넋을 잃은 표정을 지으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눈물이 주체하지 못하고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분명 애타게 찾던 문해미를 찾았건마는, 겨우 어머니와 만나게 되었건마는 청천벽력같은 소식이 들려왔기 때문이다. 응당 기뻐하고 좋아해야 할 순간에 자신에게 왜 이런 일이 일어나게
양시은은 행여나 그 사람이 사라지게 될까 봐 얼른 달려갔다.“엄마, 여기는 왜 여기에 계시는 거예요?”그녀는 노인을 붙잡으며 눈에 눈물을 머금은 채 기쁜 목소리로 말했다.상대가 자신을 반겨줄 거라고 생각했지만 상대는 그녀를 엄청 두려워하고 있었다.“때리지 마세요. 바로 자리를 옮길 거니까 때리지 말아 주세요.”“엄마, 제가 엄마를 왜 때려요. 저 시은이잖아요. 엄마 딸 양시은.”“전 그쪽을 몰라요...”양시은은 믿을 수 없었다. 자신을 모른다니... 어떻게 그럴 리가 있겠는가. 그녀는 절대 사람을 착각했을 리가 없었고 눈앞에 있는 사람은 분명 그녀의 어머니였다.속이 뒤집힐 것 같았지만 자신을 너무도 두려워하고 있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며 최대한 다정하고 온화한 어투로 말했다.“전 엄마를 해치지 않아요. 그러니까 다시 한번 제 얼굴 봐주세요.”그 말을 들은 뒤 한참 지나서야 상대는 고개를 들어 그녀를 보았다. 사실 세월의 흔적이 많은 얼굴은 아니었다. 다만 몸에 맞지 않는 남루한 옷 탓에 행색이 더러워 보였을 뿐이었다. 양시은은 가슴이 미어질 것 같았다.그녀의 어머니는 아주 오래전에 실종되었다. 줄곧 찾아다녔지만 아무런 소식도 들려오지 않았고 죽기 전까지 어머니를 다시 만날 수 없을 것 같았지만 이곳에서 어머니를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처음에는 엄청난 기쁨을 느꼈지만 어머니의 행색과 상태를 보니 너무도 가슴이 아팠다. 대체 그간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상대는 양시은을 멍하니 보았다. 어딘가 익숙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양시은, 시은아... 시은이니?”“네, 엄마. 저 시은이에요.”양시은은 감격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택시를 잡자 기사는 옷차림이 초라한 그녀의 어머니 문해미를 대놓고 싫어하는 티를 냈다.“아가씨, 대체 어디서 이런 쓰레기를 주워온 거예요? 이런 쓰레기는 내 차에 태울 수 없어요.”“왜 태울 수 없는 건데요. 이미 제 돈을 받으셨잖아요. 그런데 이제 와서 태울 수 없다고요?”양시은은 차가운 눈빛으로 운전기사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