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지유가 수첩을 봤다.수첩에 흰색 티셔츠 한 장 적어놨다.틀리지 않았다.이건 예전의 여이현이다. 가장 심플한 옷차림이다.그때 여이현은 아주 의기양양했다.온지유가 어떻게 수첩에 이걸 메모할 수 있겠는가?이 수첩도 오래된 것 같은데, 아마 미처 긋지 못했나 본다.“온 비서님?”이채현은 온지유가 잠시 정신 줄이 놓인 것을 알아채고 온지유를 불렀다.온지유는 정신을 차리고 가볍게 웃었다.“잘못 적었네요. 그으세요.”“네.”이채현이 대답한다.대표님이라는 사람이 옷차림이 그렇게 심플하다고는 생각도 안 했다.이채현은 이제 졸업했지만, 학습 능력은 매우 뛰어났다.온지유는 이채현이 여이현의 일을 잘 처리할 거로 생각했다.온지유가 여이현에게 적절한 사람을 찾아주면, 온지유를 풀어줄 수 있다.온지유는 자리에 앉아 멍하니 있었다.이채현은 그런 온지유를 보고 걱정한 듯 물었다.“온 비서님. 어디 불편하세요?”온지유는 다정하게 웃으며 대답했다.“아니에요. 일 보세요.”발소리가 멀리서부터 가까이 들려왔다.“온 비서님. 반 시간 뒤에 회의가 열릴 예정입니다. 준비하세요.”배진호가 전했다.“네.”온지유는 일어나서 회의 준비를 했다.온지유가 고개를 돌리자, 여이현이 눈앞에 서 있었다.그의 눈동자에는 아직도 차가운 기운이 가득했다.“대표님. 새로 온 비서입니다. 이름은 이채현입니다.”“대표님 안녕하세요. 배 비서님 안녕하세요.”이채현이 인사를 했다.여이현은 표정이 차가웠다. 아예 이채현을 쳐다보지도 않고, 차갑게 말했다.“온 비서님이 데려온 사람이니 잘 알려주세요. 제가 뭘 싫어하는지 제일 잘 알고 계시니, 실수하지 않도록 하세요!”말을 다 하고 여이현은 떠났다.온지유도 이게 자기를 경고하는 거라고 알고 있다.온지유는 이채현을 책임지고, 새로 온 사람이라고 실수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눈치가 빠른 이채현은 여이현이 떠난 후 온지유에게 말했다.“온 비서님, 걱정 마세요. 제가 잘 배워서 곤란할 일 만들지 않을게요.”“그럼 더할
여이현이 입을 열었다.“그럼 여러분들이 말하는 것처럼, 제가 새로운 비서를 찾는 것도 여러분들한테 동의를 구해야 합니까?”“저희가 언제 그런 말을 했나요.”이채현은 여이현이 자기를 언급하자 침묵 속에서 입을 열었다.“안녕하십니까. 저는 새로 온 비서, 이채현이라고 합니다. 만나게 돼서 영광입니다.”그들의 시선은 모두 이채현을 향했다.다들 어디서 온 계집애가 말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이채현은 다들 자기를 쳐다보자, 자신감이 생겨서 계속 말을 이어갔다.“대표님이 가장 높은 위치에 계시고, 여러분은 대표님의 말씀을 들으셔야 한다고 봅니다. 대표님이 회의를 여는 것도 여러분을 존중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결정권은 대표님이 가지고 계십니다. 대표님이 이러시는 이유도 다 회사를 위한 것입니다. 그러니 대표님을 믿으시고, 대표님의 능력을 믿으십시오. 계속 반대의 말씀을 하시는 건 혹시 다른 마음을 먹고 계시는 건 아닌지요?”이채현의 말을 들은 여이현은 보이지 않는 웃음을 지었다.이채현의 말에 다들 압박감을 느꼈다.온지유는 자기도 회의에서 이렇게 말한 적이 없는데, 이채현이 대단하다고 느꼈다.이채현이 상황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여러 주주를 의심했다.그리고 그들을 긴장하게 했다.“무슨 말이야. 우리야 당연히 대표님을 존중하고 있지.”“대표님, 헛소리 듣지 마세요. 우린 그냥 걱정돼서 물어본 겁니다.”이채현의 말에 서둘러 해명했다.“앉으세요. 이채현 씨.”여이현은 이채현의 말에 그냥 담담하게 한마디만 했다.“네.”이채현은 말을 듣고 앉았다.온지유는 여이현을 바라보는데 의외였다. 여이현은 원래 버릇없고 규칙이 없는 사람을 싫어했었다.정말 주주 간에 문제가 생긴 걸까.여이현은 사람들이 맞장구치는 것을 보고, 그 화살이 자기에게 쏠릴까 봐 두려워했다.그러나 최현욱의 안색이 그다지 좋지 않았다. 여이현은 그런 최현욱을 보고 물었다.“최 대표님. 무슨 질문이 있으시면 말씀하세요!”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여이현과 맞장구치고 있는데, 혼자 반대
여이현의 그 검은 눈동자에는 한기가 서려 있었다.“어디서 그런 사람을 찾았어?”온지유는 그렇게 단시간 내에 사람을 찾았다.다음은 여이현의 곁에서 떠나는 것이다.여이현이 허락하지도 않았는데, 온지유가 모든 것을 빈틈없이 마련했다.온지유는 자기가 또 무슨 잘못을 한 줄 알았는데, 이 일 때문일 줄은 몰랐다.온지유가 여이현을 밀쳤다.“채용공고를 내서 정식적인 절차대로 뽑았습니다. 꽤 마음에 드시지 않았나요?”“그만두고 싶으면 허락할 테니까, 집에서 여이현 아내로 살면 돼.”여이현이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여이현의 손에 살짝 힘이 들어가자 온지유와 눈을 맞추게 됐다.온지유가 불쾌해서 말했다.“왜요? 왜 제가 일 안 하고 집에서 여이현 씨 아내나 하면서 지내고 싶다고 생각하세요? 결혼할 때 한 말 잊으셨어요? 자기 위치를 잘 알고, 선 넘은 일은 하지 말라고, 계약이 끝나면 이혼한다고 했잖아요. 왜 저랑 이혼하고 싶지 않은 건데요?”“닥쳐!”여이현은 어금니를 깨물며 참고 있었다.여이현은 더 이상 이혼이라는 말을 듣고 싶지 않다.온지유는 더 이상 여이현과 다투기 귀찮아했다.“그래요. 대표님, 지금은 근무시간입니다. 다른 일이 없으면 먼저 제자리로 돌아가겠습니다. 제가 요즘 몸이 안 좋아서, 무슨 행사가 있으면 이채현 씨를 부르세요.”온지유는 지금 여이현과 거리를 둘 필요가 있다.적어도 만나지 않고, 선을 그으면 훨씬 덜 싸우게 될 것이다. 여이현이 습관 되기 전까지, 절대 온지유가 떠나는 것을 문제 삼지 않을 것이다.여이현은 온지유를 놓지 않고, 입가에는 냉소가 번졌다.“그럼 내가 나를 위해서 이렇게 잘 마련해 줘서 감사라도 해야 하나?”온지유는 그와 다투고 싶지 않았다.“대표님, 저는 대표님의 비서입니다. 모두 제가 해야 할 일입니다.”“신인 데리고 스스로 망신을 찾게 하라고?”여이현은 미간을 찌푸리며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온지유는 여이현의 말을 이었다.“그럼, 제가 먼저 데리고 가서 단련시킬게요. 다만 저에게 얼마의 기한
“그것도 그렇지만 온 비서 외모와 몸매는 절색이지요.”...온지유는 자신이 장 대표의 눈에 든 줄도 모른 채 여이현의 말에 따라 이곳에서 신인을 키우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주량이 좋고 대범한 이재현은 오늘 온지유가 편찮다는 것을 알고 따라다니며 그녀가 술을 마시지 않도록 막아주었다.때문에 온지유는 술을 마시지 않았다. 확실히 이재현이 그녀를 대신해서 여이현을 위해 많은 일을 분담할 수 있었다.협력자가 던진 문제들에 대해서도 이재현은 일일이 대답했고, 협력자는 심지어 칭찬을 보내며 여이현에게 아부했다.“여 대표님, 이런 보물을 또 어디서 찾아냈어요!”“임 대표님, 옛말에 다른 산의 돌도 옥을 만들 수 있다고 했었죠?”이재현은 담담하게 이 질문에 대답했다.이재현은 자신을 돌에 비유하며 온지유와 여이현의 다듬을 통해 옥이 되었음을 비유했고, 또 임 대표도 원한다면 충분히 인재를 배양할 수 있다는 뜻을 전달했다.이 한마디로 여러 사람에게 아부한 셈이다.온지유도 이재현의 우수함을 인정하며 얼마 지나지 않아 여이현의 인정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설사 자신이 떠나더라도 그의 옆에 쓸만한 사람을 남겨놓게 된 셈이다.임표는 껄껄 웃었다.“여 대표님, 청출어람이네요.”임 대표는 온지유의 앞에서 이재현을 칭찬했지만, 온지유는 덤덤했다. 오히려 여이현이 온지유를 힐끗 쳐다보았지만 그녀는 여전히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임 대표는 합작 건에 대해 이재현과 즐겁게 대화했다.서있자니 피곤했고 또 자신이 필요 없다는 것을 깨달은 온지유는 작은 테이블에 가서 쉬려 했지만 뜻밖에도 샴페인을 든 사람이 찾아왔다. 은회색 비즈니스 정장을 입고 검은 테 안경을 낀 남자였다.“온 비서.”“장 대표님.”온지유는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했다. 온지유는 이 사람에 대해서 인상이 있었다. 건설업자이고 또 여이현의 땅이 ZF 중점 프로젝트였기에 여러 협력업체와 공개 입찰을 진행했었다.장 대표님도 이 프로젝트에 참여했었다.온지유는 예의상 미소를 지었다.“장 대표님, 오늘
누군가 온지유의 손목을 잡아당겼고 그녀는 따뜻한 품에 기대였다.여이현이였다. 온몸에 알코올과 담배 냄새가 뒤섞인 살을 에는 듯한 차가운 기운이 그의 몸을 감돌았고 온지유는 갑자기 숨이 막혀버리는 것 같았다.“장시아, 나 아직 죽지 않았어.”쌀쌀한 말이 온지유의 정수리에서 떨어졌다.맞은 편에 선 여이현을 보고 장시아는 어리둥절했다. 오늘 많은 사람이 온지유를 의론했고 심지어 여이현도 신입 이재현을 데리고 나왔다.결국!여이현은 오히려 이곳에서 온지유를 보호해 주었다.어쨌든 여이현의 태도가 중점이었다!칠흑 같은 여이현의 두 눈을 마주 보며 장시아는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여 대표님, 비록 지금은 협력이 없지만 앞으로 갈 길이 멀어요.”입술을 꾹 다문 여이현은 대꾸하지 않았다.그의 두 눈은 서리가 꽉 찬 것처럼 차가웠다.온지유는 이것이 여이현이 화를 낼 징조라는 것을 보아냈다.목이 메어 난 온지유가 무언가 말하려 할 때 여이현은 옆에 있던 술병을 잡아 중문수의 머리를 향해 세게 내리쳤다.“아!”돼지 잡는 듯한 비명이 1층 로비에서 울려 퍼졌고 주변의 시선을 사로잡았다.“대표님, 장 대표님은 오해했을 뿐 나한테 아무 짓도 하지 않았으니 진정해 주세요...”여이현의 반응에 놀란 온지유는 재빨리 그의 앞에 막아섰다.남자는 여자를 사랑하지 않아도 되지만, 사내의 자존심을 세워야 했다.이렇게 많은 사람이 구경하고 있는데 그중 누가 함부로 헛소문을 퍼뜨리거나 여진숙에게로 가서 소란을 피운다면 온지유는 또 손가락질당하고 욕을 먹게 될 것이다.그리고 온지유는 실검에 오르고 싶지 않았다.여이현은 온지유를 밀어내고 성큼성큼 장시아에게 다가갔다.장시아는 여이현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몇 번 만에 벌써 머리가 깨지고 피가 흘렀으나 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누구도 감히 말리지 못했다. 심지어 온지유는 누군가 휴대전화를 꺼내 여이현을 겨누고 있음을 눈치챘다.“찍지 마! 배진호, 이재현!”온지유는 먼저 휴대전화를 든 사람을 향해 호통을 친 뒤 배진호와 이
“아까 왜 말렸어?”여이현은 어금니를 꽉 물었다.여이현은 활활 타오르는 노여움을 억누르지 못한 채 온지유를 품 안으로 잡아당겼고, 온지유가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팔을 벌려 그녀를 가두었다.온지유가 쉰 목소리로 말했다.“장 대표는 어쨌든 한 회사의 대표님이고 또 그가 말한 것처럼 앞으로 협력할 가능성도 커요. 아까는 사람이 많았기에 만약 이현 씨에게 부정적인 뉴스가 뜬다면...”“다른 남자가 내 와이프에게 덤비는 걸 보고도 못 본 척하라고?”온지유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여이현은 쌀쌀하게 웃으며 그녀의 말을 끊었다. 그의 좁고 긴 두 눈에는 냉혹함이 서려 있었다.“어차피 우리는 비밀 결혼이에요.”그 둘은 3년 계약을 한 비밀 결혼이었다. 기간이 만료된 후 온지유가 말하지 않거나 또 여이현이 특별히 언론에 보도하지 않으면 온지유가 여이현의 전처인 줄 누가 알겠는가?여이현은 코웃음을 쳤다.“난 생각지도 못했는데 지유는 편하게 생각했네.”마음이 아파 난 온지유는 고개를 돌리며 여이현을 보지 않았다.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눈매와 얄팍한 입술을 보면은 숨을 쉴 수 없을 것처럼 아플 것만 같았다.7년 동안 사랑했고 또 여이현의 마음을 따뜻하게 해줄 줄 알았는데 그들은 여전히 헤어지게 되었다.심지어 배 속에 있는 아이는 평생 아빠를 못 볼 수도 있었다.나중에 겪게 될 일을 생각하니 온지유는 가슴이 쓰라렸다.갑자기 그녀의 턱에 심한 통증과 압박감이 퍼졌다.여이현은 손에 힘을 주어 그녀의 턱을 위로 올리며 자신과 마주 보게 했다. 온지유는 온몸에 술 냄새가 풍기는, 입가에 차갑고 아이러니한 웃음이 번진 여이현을 보았다.“무슨 생각을 하고 있어?”온지유는 깊게 숨을 내쉬었다.“내가 무슨 생각을 할 수 있겠어요? 이미 손을 썼으니 실검에 오를 게 분명해요. 이재현의 일 처리 능력이 좋으니 내일부터 나는...”오지 않을래요.여이현은 손에 힘주어 그녀의 턱을 조이며 마지막 말을 못 하게 했다.여이현은 퉁명스럽게 말했다.“온지유, 여진 그룹이 너의
여이현은 온지유를 밀치면서 수신 버튼을 눌렀다.온지유는 바로 옆에 있어 똑똑하게 들을 수 있었다.“오빠, 나 무서워요... 지금 올 수 있어요? 주소영을 또 본 것 같아요, 아!”노승아의 공포에 질린 비명과 함께 뚜뚜 하는 전화가 끊긴 소리가 들려왔다.여이현은 휴대전화를 거두면서 기사에게 말했다.“먼저 나를 병원에 데려다준 다음 지유 씨를 수려원으로 데려다줘.”그의 말투는 확고했다.“네.”김 기사는 그의 말대로 노선을 바꾸었다.40분도 안 되어 김 기사는 차를 병원까지 몰고 갔다.여이현은 옆에 앉아 있는 온지유를 보고 담담하게 말했다.“좀 늦게 돌아올 거야. 돌아와 당신을 볼 수 있기를 바래!”애걸하는 것이 아니라 명령처럼 이 말을 남긴 여이현은 몸을 돌려 떠났다.그 길고 차가운 뒷모습은 칼처럼 온지유의 두 눈을 아프게 했고 심장을 찔러 선혈에 뒤덮인 것처럼 만신창이가 되게 했다.다른 남자와 함께 있는 온지유를 보면 그는 독점하고 싶어 질투하며 화를 낸다.그럼 그는? 마음속에 노승아를 두고 있어도 결혼 후에는 거리를 두어야 하지 않겠는가?그는 온지유를 관심하지 않았으나 얌전해야 한다고 요구했다.이렇게 온순한 사람이 있을 수 없었지만 여이현을 사랑한 온지유는 말없이 그의 요구를 따라주었다.“사모님, 대표님께서 수려원까지 모시라고 했습니다. 지금 차에서 내리시면 제가 난처해집니다.”차 문을 열고 차에서 내리려는 온지유를 보고 기사는 다급하게 쫓아갔다.“말릴 수 없었다고 하세요.”온지유는 쌀쌀하게 말했다.온지유는 수려원에 머물 리가 없었다.오늘 밤 노승아와 함께 있다면 돌아올지도 모르는데 온지유는 적막한 방에 홀로 있을 리 없었다.“제가 따라가도 될까요?”김 기사는 울음을 터뜨릴뻔했다.온지유를 수려원으로 보내지 않았고 또 온지유가 떠난 것을 여이현이 알게 되면 무조건 추궁할 것이다.온지유는 머리가 아팠다.“나를 따라오지 마세요. 난 세 살배기 어린애가 아니에요.”이렇게 말하면 기사가 따라오지 않으리라 생각했지만 뜻
여이현은 미간을 문지르며 노승아에게로 다가갔다.“승아야, 넌 생각이 너무 많아. 주소영은 자업자득일 뿐 너와 상관이 없어. 왜 자신을 괴롭혀?”노승아는 고개를 숙인 채 주먹을 꽉 쥐었다.“살아있는 생명이었고 나는 못 본 것처럼 할 수 없었어요... 이현 오빠, 생명은 너무나약해요.”“원인이 있으면 그에 따르는 결과가 있어. 네가 계속 이러면 정신과 의사를 찾는 수밖에 없어.”여이현은 노승아의 앞에 서 있었다. 키가 188cm나 되는 여이현은 냉담하고 거리감 있는 눈빛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급해 난 노승아는 큰 소리로 말했다.“이현 오빠, 안돼요. 정신과 의사 찾지 마세요. 정신과 의사를 찾으면 지금 촬영 중인 영화는 어떡해요? 제작진에서 미친 사람을 쓰진 않을 거예요. 난 이미 예전처럼 내가 원하는 노래를 할 수 없게 되었어요. 사람들 앞에 나타날 유일한 기회마저 잃을 수 없어요, 제발...”병상에 반쯤 무릎을 꿇은 노승아는 손을 뻗어 여이현의 손목을 움켜잡았다.여이현은 울먹이는 노승아를 매몰차게 밀어내며 냉담하게 말했다.“정신과 의사를 찾아 상담할 뿐이지 미쳤다고 판정한 것은 아니야. 승아야, 문제가 있으면 치료를 받으면 되고 이 영화가 아니더라도 다른 것을 안배해 줄 수 있어...”이 말을 들은 노승아는 급하게 그의 말을 끊었다.“아니에요, 싫어요! 난 이 영화에 많은 심혈을 기울였기에 찍어야 해요. 이현 오빠, 잠시만 같이 있어 줄 수 있어요? 과분한 요구인 것은 알겠지만 매일 조금만이라도 함께 있어 주길 바래요. 오빠만 저를 구할 수 있어요. 난 죽고 싶지 않고 또 미친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아요...”말을 마치며 노승아는 흐느껴 울었다.여이현은 여전히 냉담했다.“승아야, 난 이미 결혼했어. 네가 나를 구해주어서 보러 왔고 내 앞에서 미쳐가는 걸 지켜볼 수 없어.”“싫어요! 듣지 않을래요.”노승아는 여이현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그녀는 여이현이 온지유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을 듣고 싶지 않았으며 또 말하게 못 하게 했
남태건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동안 그는 권다솔의 손도 제대로 잡아보지 못했기에 당연히 사이즈를 알 리가 없었다.“크기 조절 가능한 팔찌는 없어요?”“있긴 한데요. 디자인이 몇 개뿐이라서요. 인기 많은 제품들은 전부 사이즈가 정해져 있어요.”직원은 그를 힐끗보다가 속으로 중얼거렸다.‘예비 신부한테 관심이 없다고 하기엔 예물을 전부 최고급을 골랐잖아. 그렇다고 해서 또 예비 신부한테 잘해준다고 하기엔 애매해. 어떻게 여자친구 팔목 사이즈도 모를 수가 있는 거지?'‘꼭 결혼까지 앞뒀는데 동거는커녕 손도 한번 못 잡아본 것 같네. 서로에 대해 아는 게 하나도 없을 것 같네.'“괜찮아요. 그걸로 주세요.”남태건은 제일 무거운 팔찌를 골라 쟁반에 올려두었다.“그리고 이거, 봉황이 있는 금목걸이도 주세요.”남씨 가문에 남아도는 것이 돈이었다. 권다솔의 부모님 앞에서 자신의 성의를 보여주기 위해서라면 얼마가 되었든 상관없었다.그가 가게에서 나왔을 때 직원의 입은 귀에 걸려 있었다. 남태건 덕분에 한 달 업적을 하루 만에 달성했기 때문이다.곧이어 남태건은 권용민이 좋아할 만한 비싼 술과 담배를 산 후 권씨 가문 본가로 운전했다. 쇼핑백을 바리바리 들고 오는 남태건의 모습에 김영은은 어안이 벙벙했다.“태건아, 우리 집으로 오는 게 처음도 아니고 이게 다 뭐니? 그냥 내 집이다 생각하면서 오면 되는 건데 뭘 이렇게 많이 사 왔어?”“아버님, 어머님. 전 오늘 손님으로 찾아온 게 아니에요. 다솔이랑 결혼하고 싶어서 온 거예요. 이건 제가 드리는 선물이에요.”남태건은 자신이 사 온 것을 하나씩 열어 보여주었다.그는 물건만 사 온 것이 아니었다. 한 가방의 현금과 예물까지 준비해왔다.창문으로 비쳐 들어오는 햇볕에 금붙이들은 반짝반짝 빛났다.권용민과 김영은은 서로 마주 보았다. 두 사람은 순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남태건은 아주 신경 써서 선물을 준비해온 것이 그들의 눈에도 보였다. 정말로 권다솔을 좋아하고 있는 것 같았고 앞으로 두 사람이
“다솔아... 너 정말로 나한테 아무런 감정이 없는 거야?”남태건은 여전히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조금이라도, 단 한 번이라도 나한테 설렌 적 없어?”그는 그동안 아주 많은 노력을 했었다. 할 수 있는 건 전부 했다. 그러나 여전히 권다솔의 마음을 얻지 못했다.“게다가 우린 함께 밤까지 보냈잖아. 난 정말로 진심으로 널 책임지고 싶어. 그냥 잠만 자고 버리는 나쁜 놈이 되고 싶지 않다고. 다솔아, 다시 한번 생각해줘. 우린 이미 밤까지 보냈다고!”“지금이 어떤 시대인데요. 전 태건 씨를 이해할 수 없네요.”권다솔은 머리가 지끈거렸다.그가 질척이면 질척일수록 그녀의 생각은 점점 더 확고해졌다. 앞으로 친구로도 지낼 수 없겠다고 말이다.그녀는 인내심 있게 마지막으로 말했다.“그날 밤 일은 이미 지나간 일이니까 더는 제 앞에서 언급하지 말아요. 만약 태건 씨의 말대로 함께 한번 잤다고 해서 무조건 함께 살아야 한다는 거라면, 이미 아이까지 한 번 있었던 저와 진호 씨는 영원히 떨어지지 말고 함께 살아야 하는 거겠네요?”남태건은 주먹을 꽉 쥐었다. 저도 모르게 이도 빠득 달았다.“권다솔, 그딴 말로 날 자극하지 마.”두 사람이 다시 잘 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니 남태건은 기분이 불쾌해졌다.권다솔은 말을 이었다.“전 태건 씨를 자극할 생각은 없었어요. 그냥 예시를 들어 알려준 거죠. 그러니까 나가요. 앞으로 더는 찾아와 문도 두드리지 말고요. 방금 같은 일 또 일어나기를 바라지 않으니까.”“다솔아! 네가 나한테 어떻게 매정할 수가 있어! 차 한잔도 내어주지 않고 지금 날 쫓아내는 거야? 적어도 물 한 잔 마시게는 해줘야 하는 거 아니야? 내가 밖에서 얼마나 오랫동안 서 있었는데. 나 힘들어 죽겠다고.”남태건은 꼬리를 내렸다.물 한잔쯤 대접하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었지만, 권다솔은 그에게 희망 고문하고 싶지 않았다.그녀가 예의상 했던 행동이 남태건에겐 다른 의미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게다가 이번 한 번 타협한다면 두 번째도 있을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이웃은 더 큰 목소리로 욕을 해댔다.“안에 사람이 있는데도 문을 열어주지 않는다는 건 네가 꼴도 보기 싫다는 소리잖아! 핸드폰은 장식이냐? 문자 보낼 줄 몰라? 굳이 그렇게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려야겠어? 여기 너만 사냐? 이웃 배려할 줄 몰라?!”밖에서 싸우는 목소리가 점점 커지자 권다솔은 결국 문을 열어주는 수밖에 없었다.그녀는 남태건이 문 앞에 서 있든 말든 신경 쓰지 않았다. 하지만 이웃 주민들에게 계속 민폐를 끼칠 수 없었다.빠르게 현관으로 가서 문을 연 그녀는 결국 이웃에게 사과했다.“죄송해요. 제가 방금 너무 푹 잔 탓에 못 들었네요. 폐를 끼쳐져 정말 죄송해요.”“됐어. 커플인 것 같은데 싸울 거면 문 닫고 싸워. 괜히 우리까지 사정 알게 하지 말고!”이웃의 어투는 조금 누그러지긴 했지만, 표정은 여전히 사나웠다. 권다솔의 진심 어린 사과에 더는 심한 말을 하지 않았다.이웃이 문을 닫은 후 권다솔도 문을 닫으려고 했다. 그러나 남태건이 빠르게 잡아버렸다.그는 권다솔에게 애원했다.“나 좀 들어가게 해줘. 안에서 얘기하자, 응? 내가 계속 이렇게 밖에 서 있으면 이웃 주민들이 날 신고할지도 몰라.”“방금 그 행동은 확실히 신고할 만한 행동이죠. 그러니 폐를 끼치지 말고 그만 가세요.”권다솔은 있는 힘껏 문을 당겼다.남태건도 순순히 물러서지 않았다. 문을 꽉 잡은 채 놓아주지 않았다.시간이 1분 1초 흘러갔다. 권다솔은 갑자기 손을 놓더니 몸을 돌려 집 안으로 들어갔다. 문을 사이에 두고 버티는 게 무의미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다솔아, 그럼 나 들어가도 되는 거지?”남태건은 얼른 그녀를 따라갔다.집 안으로 들어온 뒤 그는 문을 닫았다. 그리고 권다솔의 옆에 서서 또 지난번과 비슷한 말을 해댔다. 여하간에 이미 밤을 보냈으니 결혼하자는 뉘앙스였다.“남태건 씨, 그날 집으로 오고 나서 지금까지 생각해 봤어요. 앞으로 어떻게 지낼지를 말이에요. 그리고 이미 생각을 끝냈어요.”권다솔은 그를 보았다.
온지유는 들고 있던 식칼을 내려놓고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그러자 여이현이 그녀를 불러세웠다.“여보는 손도 씻어야 하니까 귀찮게 그러지 말고 내가 가서 꺼내서 줄게.”“내 핸드백 안에 있어. 지퍼 열면 바로 보일 거야.”온지유도 딱히 신경 쓰지 않았다.켕길만한 일을 한 적 없었으니 여이현이 가방을 열어보아도 딱히 걱정되지 않았다.여이현은 주방에서 나와 별이와 함께 현관 쪽으로 갔고 대화를 하며 가방을 열려고 했다.“아들, 아빠한테 오늘 노래 대회 어땠는지 말해주면 안 돼?”“당연히 돼요! 오늘 엄마는 엄청 멋졌어요! 친구들 부모님들도 엄마한테 박수를 쳐줬어요!”별이는 입에 모터가 달린 것처럼 바로 낮에 있었던 일을 말해주었다.온지유는 얼굴이 예뻤을 뿐만 아니라 온화하기까지 했다. 친구들은 집에서 엄마한테 혼난 적이 있다고 했지만 별이는 혼난 적이 없었다.여이현의 입꼬리가 저도 모르게 올랐다.온지유의 가방을 열자 바로 칭찬 스티커가 보였다.그는 그것을 꺼내 별이에게 준 뒤 가방을 원래 위치에 가져다 놓았다. 그러던 중 별이가 실수로 옆에 있던 신발을 밟게 되었고 넘어질 뻔했다.여이현은 얼른 별이를 부축해주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온지유의 가방을 바닥에 떨구게 되었는데 안에서 무언가가 쏟아져 나왔다.소리를 들은 김명자가 얼른 별이를 안고 먼저 거실로 갔고 여이현은 허리를 굽혀 바닥에 떨어진 것을 줍다가 우연히 립스틱 옆에 있는 쪽지를 발견하게 되었다.그는 온지유의 물건을 함부로 볼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쪽지는 열린 상태였고 그가 손을 뻗었을 때 마침 안에 쓰인 글씨를 보게 되었다.내용을 본 여이현의 표정이 어두워졌다.위에는 협박하는 내용이 적혀 있었고 마지막 줄엔 커다랗게 미스터리 조직 이름을 적어두었다.이건 도발이었다.그는 어떻게든 빨리 배후를 찾아내야 한다. 그래야만 아이들과 온지유를 지킬 수 있었다.“저녁 준비 다 됐어. 얼른 와서 먹어.”바로 이때 온지유가 음식을 들고나오며 말했다.별이는 즐거운 얼굴로 달려간 뒤 자리
온지유는 속 좁은 사람이 아니었다.“우리 여보가 날 이해해줄 줄 알았어. 우리 여보랑 같이 살 수 있는 건 내 생애 최고의 행운이야.”여이현은 그녀의 손을 잡았다.그러던 중 별이가 거실에 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우리 아들은? 방에서 자고 있는 건가.”“아니야. 지금 숙제하는 중이야.'여이현은 숙제하고 있다는 말에 만감이 교차했다.“우리 아들이 다 컸네. 막 태어났을 땐 아주 자그마했는데. 지금은 숙제도 할 줄 알고. 시간이 좀 더 흐르면 혼자 등하교도 할 수 있겠네.”“이건 좋은 일이야. 별이가 엄청 열심히 숙제하더라니까. 게다가 혼자 문제를 풀더라고.”온지유는 그의 어깨를 토닥였다.“됐어. 그만해. 그냥 숙제만 하는 것뿐이잖아. 아직 장가가기엔 한참 멀었어. 뭘 그렇게 감동하고 그래?”온하윤은 작은 손을 뻗어 여이현의 턱을 만졌다. 그러더니 품에 안고 있던 장난감을 건넸다.그것은 온하윤이 아주 좋아하는 장난감이었다.하지만 온하윤은 장난감보다 아빠를 더 좋아했기에 장난감을 건네며 아빠랑 같이 놀자는 의미로 건넸다.여이현은 딸의 작은 손에서 장난감을 받은 후 눌렀다. 폭신폭신한 촉감이었지만 여전히 마음은 서글펐다.“하윤이도 지금은 이렇게 내 품에 쏙 안기겠지만 빠르게 크겠지. 나중에 남자친구를 데리고 오면서 결혼하겠다고 하고 아이까지 낳을 생각 하니 뭔가 자꾸 아쉬운 마음이 드네.”온지유는 그의 말에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만약 온하윤이 지금 성인이 되어 남자친구까지 사귀었다면 그녀도 확실히 그런 감회가 들 것 같았다.“하지만 하윤이는 아직 한 살도 안 되었잖아. 시집가기엔 한참이나 멀었는걸. 아직 한 살도 되지 않았는데 벌써 그런 걱정을 하는 거야? 얼른 가서 저녁이나 차려줘. 별이도 숙제 거의 다 했을 테니까 내가 가서 보면 돼.”온지유는 걸음을 옮겼다.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보니 여이현은 출산하기 전날 고통스러워하던 그녀의 모습이 떠올랐다.부자이든 아니든, 설령 세계에서 실력이 제일 좋은 산부인과라고 해도 출산할 때
어린이집에서 나와 차로 돌아온 후에야 온지유는 자신의 가방이 열려있다는 것을 발견했다.그녀는 열린 지퍼를 잠그며 말했다.“별아, 이대로 집으로 갈래, 아니면 다른 데 구경하러 갈래?”“집으로 가요, 엄마. 조금 졸려요. 별이는 집에 가서 쉬고 싶어요. 내일도 어린이집 가야 하는걸요.”별이는 알아서 척척 안전벨트를 했다.온지유는 당연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녀는 별이와 대화를 나누었다. 운전기사가 앞에서 부드럽게 운전해준 덕에 편하게 집까지 도착했다.집 안으로 들어간 별이는 평소처럼 거실에 앉아 놀지 않았다. 겉옷을 벗고 실내화로 갈아신은 뒤 온지유의 앞으로 달려갔다.“엄마, 전 방에서 숙제하고 있을게요. 아마 저녁 식사 전까지 완성할 수 있을 것 같아요.”“숙제하겠다고?”온지유는 숙제라는 단어가 생소하게 느껴졌다.별이는 아직 어렸던지라 어린이집을 다니고 있었다. 초등학생도 아닌데 벌써 숙제가 있다니.물론 선생님들이 아이들을 위해 숙제를 냈을 거라고 생각하긴 하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조금 빠르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네, 선생님이 저희한테 지금부터 숙제하는 좋은 습관을 길러야 한다고 했어요. 안 그러면 초등학생이 되면 힘들다고 하셨어요. 어려운 숙제를 내주신 게 아니니 저는 빨리 완성할 수 있어요.”별이는 딱히 신경 쓰지 않았다.비록 아이가 이렇게 말하긴 했지만 온지유는 아이를 따라 방으로 들어가 어떤 숙제를 낸 것인지 확인하려고 했다.두 사람은 계단을 올라갔다. 방으로 돌아온 뒤 별이는 가방에서 어린이집에서 나눠줬다는 연습장을 꺼내 온지유에게 보여주었다.“엄마, 선생님께선 저희에게 숙제를 두 개 내주셨어요. 하나는 글씨 쓰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크기를 비교하는 것이에요.”온지유는 책을 넘기며 대충 훑어보았다. 책에는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간단한 단어가 있었다. 아이들이 쓰기에도 쉬운 단어였다. 수학책에는 1부터 20의 숫자가 있었고 어떤 숫자가 더 큰지 적어넣는 문제가 있었다. 별이처럼 어린아이들에게 그렇게 어려운 숙제는
온지유는 당연히 잘 불러야 했다. 1등을 차지해 별이에게 멋진 엄마가 되어주고 싶었으니까.어린이집으로 가는 길에 온지유는 이어폰을 꽂고 어젯밤 생각해둔 노래를 반복해서 들었다.차는 어린이집 앞에 멈춰 섰다. 그녀는 별이의 손을 잡고 천천히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별이의 반은 3층에 있었다. 다른 어린이들과 학부모들도 거의 도착해 있었다. 온지유가 안으로 들어가자 대부분 사람들이 고개를 들어 그녀를 보았다.별다른 이유는 없었다. 한 무리 학부모 중 온지유가 유난히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오늘의 그녀는 검은색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걸음걸이마다 우아함이 돋보이며 굴곡진 몸매에 기품도 느껴졌다.이때 어린이 한 명이 별이의 곁으로 쪼르르 달려가 작게 물었다.“별이 엄마 진짜 예쁘다. 우리 엄마도 별이 네 엄마처럼 이뻤으면 좋겠다.”“우리 엄마들은 다 예뻐.”별이는 친구의 말을 바로잡아주었다.물론 별이의 마음속에 온지유는 세상에서 제일 예쁜 사람이었다.선생님들은 이미 학부모들이 앉을 의자를 준비해 주었다. 아직 어린아이들이 모여있는 반이었던지라 학생이 많지 않았을뿐더러 교실도 꽤나 컸기에 의자를 몇 개 더 가져다 놓는다고 해서 비좁은 느낌은 없었다.온지유는 자리에 앉았다. 별이는 그런 온지유 옆에 곧은 자세로 서 있었다.“별이 엄마, 몸매가 아주 좋으시네요. 평소에 운동하시는 거예요? 저도 몸매 유지하는 비결 좀 알려주시면 안 될까요?”옆자리에 앉은 학부모가 먼저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전 평소에 식사량이 많지 않은데도 뱃살은 빠지지 않더라고요.”여자들의 관심사는 전부 비슷했다. 그들은 미용이거나 몸매 관리에 관심이 아주 많았다.온지유는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말해준 뒤 핸드폰을 꺼내 저장해둔 영상을 몇 개 보여주었다.“전 집에서 요가를 하거든요. 이 영상들을 따라 해봤는데 효과가 꽤 있었어요. 평소에 적게 드신다면 살은 당연히 빠지겠지만 뱃살을 없애고 싶은 거라면 제 생각엔 운동은 필수인 것 같네요.”“저희 연락처 교환해요. 이 영상들을
온지유는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노래를 잘 부르는 것은 아니나 음치는 아니었다.별이는 기쁜 얼굴로 손뼉을 쳤다.“너무 좋아요. 아빠, 엄마, 내일 어린이집에서 가족 이벤트를 한다고 했어요. 노래 대회라고 했는데 별이랑 같이 참가해줄 거죠?”내일은 주말이었다. 어린이집에서 주말에 이런 이벤트를 계획한 것도 평일 출근할 학부모를 고려해서였다.만약 여이현에게 다른 일정이 없다면 당연히 아내와 함께 별이의 어린이집으로 갈 것이었지만 하필이면 새 프로젝트를 맡게 되었다.배진호는 권다솔의 마음을 되돌리느라 시간이 없으니 그가 해야 했다.“여보, 여보가 별이랑 같이 가줘. 난 그날 거래처 만나봐야 하거든.”신호를 기다리는 틈을 타 여이현이 온지유에게 말했다.온지유는 당연히 고개를 끄덕였다.아이의 일에 부모 모두 책임을 져야 했지만 두 사람은 부부였던지라 서로 이해하고 배려하는 것도 필요했다.여이현이 바쁘게 일하는 것도 더 유복하고 행복한 가정을 만들기 위함이라는 것을 온지유도 잘 알고 있었다.별이는 더욱 배려심이 깊은 아이였다. 고집을 부리지도 않고 온지유의 팔을 꼬옥 잡아 기대며 말했다.“그럼 아빠는 일하러 가세요. 별이는 엄마만 있어도 괜찮아요. 선생님도 두 분 중 한 명만 있어도 된다고 했어요. 물론 두 분이 같이 가면 더 환영한댔어요.”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세 사람은 웃고 떠들다 보니 어느새 집에 도착했다.세 사람이 돌아왔다는 것을 눈치채기라도 한 것인지 자고 있던 온하윤도 눈을 떴다. 작은 입을 벌리며 하품했다.옆에 있던 김명자는 얼른 주방으로 가서 분유를 탄 뒤 온하윤의 입에 물려주었다. 향긋한 분유 냄새를 맡은 온하윤은 꿀꺽꿀꺽 젖병을 빨아 먹었다.세 사람이 집 안으로 들어왔을 때 마침 이 모습을 보게 되었다. 너무도 행복했다.“오늘 저녁은 내가 할게. 별이가 먹고 싶다는 햄버거를 만들고 있을 테니까 당신은 아이들이랑 놀아줘.”온지유는 여이현에게 뽀뽀한 뒤 앞치마를 두르곤 주방으로 들어갔다.거실에선 웃고 떠드는 소리가 울
권다솔은 이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바로 결혼할 수 없었다.게다가 남태건과 평생 묶여 살고 싶지도 않았다.설령 어젯밤 이상한 약물 탓에 그와 밤을 보내게 되었다고 해도 그녀의 마음속엔 온통 배진호뿐이었다. 오늘 아침 눈을 떴을 때 그녀의 온몸이 남태건의 터치를 거부하고 있었다. 설령 그저 손을 잡는 것일 뿐이라고 해도 말이다.남태건은 잔뜩 실망한 기색이었지만 포기하지 않았다.“그래, 일단 생각은 해봐. 다솔아, 급하게 답을 주지 않아도 돼.”그녀가 계속 거절한다면 그녀의 부모님을 찾아가 설득하면 그만이었다.권다솔의 부모님은 그를 아주 좋아했다. 어떻게든 그녀와 이어주려고 했으니 그들과 손을 잡는다면 권다솔과 결혼할 수 있을 것이다.권다솔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설령 오랫동안 생각을 해본다고 해도 남태건을 받아줄 리가 없었다....한편 온지유 쪽.권다솔이 떠난 후 두 사람은 서로 연락하지 않았다.그동안 여이현은 배진호를 찾아간 적 있었다. 기획하고 있던 프로젝트를 넘겨주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배진호는 집안일로 상태가 아주 좋지 못했다. 지금까지 혼자 회사를 운영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힘들어 보였으며 새로운 프로젝트를 맡을 기력은 없었다.배진호는 여이현의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아 솔직하게 말했다.그가 솔직하게 말하니 여이현도 강요하지 않았다.“일단 집안일부터 처리하세요.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말하고요. 집안일이 어느 정도 정리가 되면 나한테 다시 찾아와도 돼요. 그때 또 새로운 일을 줄 테니까요.”여하간에 여진 그룹은 대기업이었기에 프로젝트는 언제든지 있었다.한번 기회를 놓친다고 해서 문제가 될 건 없었다.배진호는 그런 여이현이 너무도 고마웠다. 이미 충분히 그를 도와주고 있었다.하지만 감정이라는 건 결국 사람마다 다르게 느끼는 법이었다. 물을 마셔도 뜨거운 것인지 차가운 것인지 본인만 아는 것처럼 말이다. 너무 많은 사람이 끼어들면 때로는 오히려 역효과를 일으킬 때도 있었다.그는 권다솔과 다시 함께 살고 싶었지만, 전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