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지유가 수첩을 봤다.수첩에 흰색 티셔츠 한 장 적어놨다.틀리지 않았다.이건 예전의 여이현이다. 가장 심플한 옷차림이다.그때 여이현은 아주 의기양양했다.온지유가 어떻게 수첩에 이걸 메모할 수 있겠는가?이 수첩도 오래된 것 같은데, 아마 미처 긋지 못했나 본다.“온 비서님?”이채현은 온지유가 잠시 정신 줄이 놓인 것을 알아채고 온지유를 불렀다.온지유는 정신을 차리고 가볍게 웃었다.“잘못 적었네요. 그으세요.”“네.”이채현이 대답한다.대표님이라는 사람이 옷차림이 그렇게 심플하다고는 생각도 안 했다.이채현은 이제 졸업했지만, 학습 능력은 매우 뛰어났다.온지유는 이채현이 여이현의 일을 잘 처리할 거로 생각했다.온지유가 여이현에게 적절한 사람을 찾아주면, 온지유를 풀어줄 수 있다.온지유는 자리에 앉아 멍하니 있었다.이채현은 그런 온지유를 보고 걱정한 듯 물었다.“온 비서님. 어디 불편하세요?”온지유는 다정하게 웃으며 대답했다.“아니에요. 일 보세요.”발소리가 멀리서부터 가까이 들려왔다.“온 비서님. 반 시간 뒤에 회의가 열릴 예정입니다. 준비하세요.”배진호가 전했다.“네.”온지유는 일어나서 회의 준비를 했다.온지유가 고개를 돌리자, 여이현이 눈앞에 서 있었다.그의 눈동자에는 아직도 차가운 기운이 가득했다.“대표님. 새로 온 비서입니다. 이름은 이채현입니다.”“대표님 안녕하세요. 배 비서님 안녕하세요.”이채현이 인사를 했다.여이현은 표정이 차가웠다. 아예 이채현을 쳐다보지도 않고, 차갑게 말했다.“온 비서님이 데려온 사람이니 잘 알려주세요. 제가 뭘 싫어하는지 제일 잘 알고 계시니, 실수하지 않도록 하세요!”말을 다 하고 여이현은 떠났다.온지유도 이게 자기를 경고하는 거라고 알고 있다.온지유는 이채현을 책임지고, 새로 온 사람이라고 실수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눈치가 빠른 이채현은 여이현이 떠난 후 온지유에게 말했다.“온 비서님, 걱정 마세요. 제가 잘 배워서 곤란할 일 만들지 않을게요.”“그럼 더할
여이현이 입을 열었다.“그럼 여러분들이 말하는 것처럼, 제가 새로운 비서를 찾는 것도 여러분들한테 동의를 구해야 합니까?”“저희가 언제 그런 말을 했나요.”이채현은 여이현이 자기를 언급하자 침묵 속에서 입을 열었다.“안녕하십니까. 저는 새로 온 비서, 이채현이라고 합니다. 만나게 돼서 영광입니다.”그들의 시선은 모두 이채현을 향했다.다들 어디서 온 계집애가 말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이채현은 다들 자기를 쳐다보자, 자신감이 생겨서 계속 말을 이어갔다.“대표님이 가장 높은 위치에 계시고, 여러분은 대표님의 말씀을 들으셔야 한다고 봅니다. 대표님이 회의를 여는 것도 여러분을 존중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결정권은 대표님이 가지고 계십니다. 대표님이 이러시는 이유도 다 회사를 위한 것입니다. 그러니 대표님을 믿으시고, 대표님의 능력을 믿으십시오. 계속 반대의 말씀을 하시는 건 혹시 다른 마음을 먹고 계시는 건 아닌지요?”이채현의 말을 들은 여이현은 보이지 않는 웃음을 지었다.이채현의 말에 다들 압박감을 느꼈다.온지유는 자기도 회의에서 이렇게 말한 적이 없는데, 이채현이 대단하다고 느꼈다.이채현이 상황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여러 주주를 의심했다.그리고 그들을 긴장하게 했다.“무슨 말이야. 우리야 당연히 대표님을 존중하고 있지.”“대표님, 헛소리 듣지 마세요. 우린 그냥 걱정돼서 물어본 겁니다.”이채현의 말에 서둘러 해명했다.“앉으세요. 이채현 씨.”여이현은 이채현의 말에 그냥 담담하게 한마디만 했다.“네.”이채현은 말을 듣고 앉았다.온지유는 여이현을 바라보는데 의외였다. 여이현은 원래 버릇없고 규칙이 없는 사람을 싫어했었다.정말 주주 간에 문제가 생긴 걸까.여이현은 사람들이 맞장구치는 것을 보고, 그 화살이 자기에게 쏠릴까 봐 두려워했다.그러나 최현욱의 안색이 그다지 좋지 않았다. 여이현은 그런 최현욱을 보고 물었다.“최 대표님. 무슨 질문이 있으시면 말씀하세요!”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여이현과 맞장구치고 있는데, 혼자 반대
여이현의 그 검은 눈동자에는 한기가 서려 있었다.“어디서 그런 사람을 찾았어?”온지유는 그렇게 단시간 내에 사람을 찾았다.다음은 여이현의 곁에서 떠나는 것이다.여이현이 허락하지도 않았는데, 온지유가 모든 것을 빈틈없이 마련했다.온지유는 자기가 또 무슨 잘못을 한 줄 알았는데, 이 일 때문일 줄은 몰랐다.온지유가 여이현을 밀쳤다.“채용공고를 내서 정식적인 절차대로 뽑았습니다. 꽤 마음에 드시지 않았나요?”“그만두고 싶으면 허락할 테니까, 집에서 여이현 아내로 살면 돼.”여이현이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여이현의 손에 살짝 힘이 들어가자 온지유와 눈을 맞추게 됐다.온지유가 불쾌해서 말했다.“왜요? 왜 제가 일 안 하고 집에서 여이현 씨 아내나 하면서 지내고 싶다고 생각하세요? 결혼할 때 한 말 잊으셨어요? 자기 위치를 잘 알고, 선 넘은 일은 하지 말라고, 계약이 끝나면 이혼한다고 했잖아요. 왜 저랑 이혼하고 싶지 않은 건데요?”“닥쳐!”여이현은 어금니를 깨물며 참고 있었다.여이현은 더 이상 이혼이라는 말을 듣고 싶지 않다.온지유는 더 이상 여이현과 다투기 귀찮아했다.“그래요. 대표님, 지금은 근무시간입니다. 다른 일이 없으면 먼저 제자리로 돌아가겠습니다. 제가 요즘 몸이 안 좋아서, 무슨 행사가 있으면 이채현 씨를 부르세요.”온지유는 지금 여이현과 거리를 둘 필요가 있다.적어도 만나지 않고, 선을 그으면 훨씬 덜 싸우게 될 것이다. 여이현이 습관 되기 전까지, 절대 온지유가 떠나는 것을 문제 삼지 않을 것이다.여이현은 온지유를 놓지 않고, 입가에는 냉소가 번졌다.“그럼 내가 나를 위해서 이렇게 잘 마련해 줘서 감사라도 해야 하나?”온지유는 그와 다투고 싶지 않았다.“대표님, 저는 대표님의 비서입니다. 모두 제가 해야 할 일입니다.”“신인 데리고 스스로 망신을 찾게 하라고?”여이현은 미간을 찌푸리며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온지유는 여이현의 말을 이었다.“그럼, 제가 먼저 데리고 가서 단련시킬게요. 다만 저에게 얼마의 기한
“그것도 그렇지만 온 비서 외모와 몸매는 절색이지요.”...온지유는 자신이 장 대표의 눈에 든 줄도 모른 채 여이현의 말에 따라 이곳에서 신인을 키우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주량이 좋고 대범한 이재현은 오늘 온지유가 편찮다는 것을 알고 따라다니며 그녀가 술을 마시지 않도록 막아주었다.때문에 온지유는 술을 마시지 않았다. 확실히 이재현이 그녀를 대신해서 여이현을 위해 많은 일을 분담할 수 있었다.협력자가 던진 문제들에 대해서도 이재현은 일일이 대답했고, 협력자는 심지어 칭찬을 보내며 여이현에게 아부했다.“여 대표님, 이런 보물을 또 어디서 찾아냈어요!”“임 대표님, 옛말에 다른 산의 돌도 옥을 만들 수 있다고 했었죠?”이재현은 담담하게 이 질문에 대답했다.이재현은 자신을 돌에 비유하며 온지유와 여이현의 다듬을 통해 옥이 되었음을 비유했고, 또 임 대표도 원한다면 충분히 인재를 배양할 수 있다는 뜻을 전달했다.이 한마디로 여러 사람에게 아부한 셈이다.온지유도 이재현의 우수함을 인정하며 얼마 지나지 않아 여이현의 인정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설사 자신이 떠나더라도 그의 옆에 쓸만한 사람을 남겨놓게 된 셈이다.임표는 껄껄 웃었다.“여 대표님, 청출어람이네요.”임 대표는 온지유의 앞에서 이재현을 칭찬했지만, 온지유는 덤덤했다. 오히려 여이현이 온지유를 힐끗 쳐다보았지만 그녀는 여전히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임 대표는 합작 건에 대해 이재현과 즐겁게 대화했다.서있자니 피곤했고 또 자신이 필요 없다는 것을 깨달은 온지유는 작은 테이블에 가서 쉬려 했지만 뜻밖에도 샴페인을 든 사람이 찾아왔다. 은회색 비즈니스 정장을 입고 검은 테 안경을 낀 남자였다.“온 비서.”“장 대표님.”온지유는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했다. 온지유는 이 사람에 대해서 인상이 있었다. 건설업자이고 또 여이현의 땅이 ZF 중점 프로젝트였기에 여러 협력업체와 공개 입찰을 진행했었다.장 대표님도 이 프로젝트에 참여했었다.온지유는 예의상 미소를 지었다.“장 대표님, 오늘
누군가 온지유의 손목을 잡아당겼고 그녀는 따뜻한 품에 기대였다.여이현이였다. 온몸에 알코올과 담배 냄새가 뒤섞인 살을 에는 듯한 차가운 기운이 그의 몸을 감돌았고 온지유는 갑자기 숨이 막혀버리는 것 같았다.“장시아, 나 아직 죽지 않았어.”쌀쌀한 말이 온지유의 정수리에서 떨어졌다.맞은 편에 선 여이현을 보고 장시아는 어리둥절했다. 오늘 많은 사람이 온지유를 의론했고 심지어 여이현도 신입 이재현을 데리고 나왔다.결국!여이현은 오히려 이곳에서 온지유를 보호해 주었다.어쨌든 여이현의 태도가 중점이었다!칠흑 같은 여이현의 두 눈을 마주 보며 장시아는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여 대표님, 비록 지금은 협력이 없지만 앞으로 갈 길이 멀어요.”입술을 꾹 다문 여이현은 대꾸하지 않았다.그의 두 눈은 서리가 꽉 찬 것처럼 차가웠다.온지유는 이것이 여이현이 화를 낼 징조라는 것을 보아냈다.목이 메어 난 온지유가 무언가 말하려 할 때 여이현은 옆에 있던 술병을 잡아 중문수의 머리를 향해 세게 내리쳤다.“아!”돼지 잡는 듯한 비명이 1층 로비에서 울려 퍼졌고 주변의 시선을 사로잡았다.“대표님, 장 대표님은 오해했을 뿐 나한테 아무 짓도 하지 않았으니 진정해 주세요...”여이현의 반응에 놀란 온지유는 재빨리 그의 앞에 막아섰다.남자는 여자를 사랑하지 않아도 되지만, 사내의 자존심을 세워야 했다.이렇게 많은 사람이 구경하고 있는데 그중 누가 함부로 헛소문을 퍼뜨리거나 여진숙에게로 가서 소란을 피운다면 온지유는 또 손가락질당하고 욕을 먹게 될 것이다.그리고 온지유는 실검에 오르고 싶지 않았다.여이현은 온지유를 밀어내고 성큼성큼 장시아에게 다가갔다.장시아는 여이현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몇 번 만에 벌써 머리가 깨지고 피가 흘렀으나 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누구도 감히 말리지 못했다. 심지어 온지유는 누군가 휴대전화를 꺼내 여이현을 겨누고 있음을 눈치챘다.“찍지 마! 배진호, 이재현!”온지유는 먼저 휴대전화를 든 사람을 향해 호통을 친 뒤 배진호와 이
“아까 왜 말렸어?”여이현은 어금니를 꽉 물었다.여이현은 활활 타오르는 노여움을 억누르지 못한 채 온지유를 품 안으로 잡아당겼고, 온지유가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팔을 벌려 그녀를 가두었다.온지유가 쉰 목소리로 말했다.“장 대표는 어쨌든 한 회사의 대표님이고 또 그가 말한 것처럼 앞으로 협력할 가능성도 커요. 아까는 사람이 많았기에 만약 이현 씨에게 부정적인 뉴스가 뜬다면...”“다른 남자가 내 와이프에게 덤비는 걸 보고도 못 본 척하라고?”온지유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여이현은 쌀쌀하게 웃으며 그녀의 말을 끊었다. 그의 좁고 긴 두 눈에는 냉혹함이 서려 있었다.“어차피 우리는 비밀 결혼이에요.”그 둘은 3년 계약을 한 비밀 결혼이었다. 기간이 만료된 후 온지유가 말하지 않거나 또 여이현이 특별히 언론에 보도하지 않으면 온지유가 여이현의 전처인 줄 누가 알겠는가?여이현은 코웃음을 쳤다.“난 생각지도 못했는데 지유는 편하게 생각했네.”마음이 아파 난 온지유는 고개를 돌리며 여이현을 보지 않았다.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눈매와 얄팍한 입술을 보면은 숨을 쉴 수 없을 것처럼 아플 것만 같았다.7년 동안 사랑했고 또 여이현의 마음을 따뜻하게 해줄 줄 알았는데 그들은 여전히 헤어지게 되었다.심지어 배 속에 있는 아이는 평생 아빠를 못 볼 수도 있었다.나중에 겪게 될 일을 생각하니 온지유는 가슴이 쓰라렸다.갑자기 그녀의 턱에 심한 통증과 압박감이 퍼졌다.여이현은 손에 힘을 주어 그녀의 턱을 위로 올리며 자신과 마주 보게 했다. 온지유는 온몸에 술 냄새가 풍기는, 입가에 차갑고 아이러니한 웃음이 번진 여이현을 보았다.“무슨 생각을 하고 있어?”온지유는 깊게 숨을 내쉬었다.“내가 무슨 생각을 할 수 있겠어요? 이미 손을 썼으니 실검에 오를 게 분명해요. 이재현의 일 처리 능력이 좋으니 내일부터 나는...”오지 않을래요.여이현은 손에 힘주어 그녀의 턱을 조이며 마지막 말을 못 하게 했다.여이현은 퉁명스럽게 말했다.“온지유, 여진 그룹이 너의
여이현은 온지유를 밀치면서 수신 버튼을 눌렀다.온지유는 바로 옆에 있어 똑똑하게 들을 수 있었다.“오빠, 나 무서워요... 지금 올 수 있어요? 주소영을 또 본 것 같아요, 아!”노승아의 공포에 질린 비명과 함께 뚜뚜 하는 전화가 끊긴 소리가 들려왔다.여이현은 휴대전화를 거두면서 기사에게 말했다.“먼저 나를 병원에 데려다준 다음 지유 씨를 수려원으로 데려다줘.”그의 말투는 확고했다.“네.”김 기사는 그의 말대로 노선을 바꾸었다.40분도 안 되어 김 기사는 차를 병원까지 몰고 갔다.여이현은 옆에 앉아 있는 온지유를 보고 담담하게 말했다.“좀 늦게 돌아올 거야. 돌아와 당신을 볼 수 있기를 바래!”애걸하는 것이 아니라 명령처럼 이 말을 남긴 여이현은 몸을 돌려 떠났다.그 길고 차가운 뒷모습은 칼처럼 온지유의 두 눈을 아프게 했고 심장을 찔러 선혈에 뒤덮인 것처럼 만신창이가 되게 했다.다른 남자와 함께 있는 온지유를 보면 그는 독점하고 싶어 질투하며 화를 낸다.그럼 그는? 마음속에 노승아를 두고 있어도 결혼 후에는 거리를 두어야 하지 않겠는가?그는 온지유를 관심하지 않았으나 얌전해야 한다고 요구했다.이렇게 온순한 사람이 있을 수 없었지만 여이현을 사랑한 온지유는 말없이 그의 요구를 따라주었다.“사모님, 대표님께서 수려원까지 모시라고 했습니다. 지금 차에서 내리시면 제가 난처해집니다.”차 문을 열고 차에서 내리려는 온지유를 보고 기사는 다급하게 쫓아갔다.“말릴 수 없었다고 하세요.”온지유는 쌀쌀하게 말했다.온지유는 수려원에 머물 리가 없었다.오늘 밤 노승아와 함께 있다면 돌아올지도 모르는데 온지유는 적막한 방에 홀로 있을 리 없었다.“제가 따라가도 될까요?”김 기사는 울음을 터뜨릴뻔했다.온지유를 수려원으로 보내지 않았고 또 온지유가 떠난 것을 여이현이 알게 되면 무조건 추궁할 것이다.온지유는 머리가 아팠다.“나를 따라오지 마세요. 난 세 살배기 어린애가 아니에요.”이렇게 말하면 기사가 따라오지 않으리라 생각했지만 뜻
여이현은 미간을 문지르며 노승아에게로 다가갔다.“승아야, 넌 생각이 너무 많아. 주소영은 자업자득일 뿐 너와 상관이 없어. 왜 자신을 괴롭혀?”노승아는 고개를 숙인 채 주먹을 꽉 쥐었다.“살아있는 생명이었고 나는 못 본 것처럼 할 수 없었어요... 이현 오빠, 생명은 너무나약해요.”“원인이 있으면 그에 따르는 결과가 있어. 네가 계속 이러면 정신과 의사를 찾는 수밖에 없어.”여이현은 노승아의 앞에 서 있었다. 키가 188cm나 되는 여이현은 냉담하고 거리감 있는 눈빛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급해 난 노승아는 큰 소리로 말했다.“이현 오빠, 안돼요. 정신과 의사 찾지 마세요. 정신과 의사를 찾으면 지금 촬영 중인 영화는 어떡해요? 제작진에서 미친 사람을 쓰진 않을 거예요. 난 이미 예전처럼 내가 원하는 노래를 할 수 없게 되었어요. 사람들 앞에 나타날 유일한 기회마저 잃을 수 없어요, 제발...”병상에 반쯤 무릎을 꿇은 노승아는 손을 뻗어 여이현의 손목을 움켜잡았다.여이현은 울먹이는 노승아를 매몰차게 밀어내며 냉담하게 말했다.“정신과 의사를 찾아 상담할 뿐이지 미쳤다고 판정한 것은 아니야. 승아야, 문제가 있으면 치료를 받으면 되고 이 영화가 아니더라도 다른 것을 안배해 줄 수 있어...”이 말을 들은 노승아는 급하게 그의 말을 끊었다.“아니에요, 싫어요! 난 이 영화에 많은 심혈을 기울였기에 찍어야 해요. 이현 오빠, 잠시만 같이 있어 줄 수 있어요? 과분한 요구인 것은 알겠지만 매일 조금만이라도 함께 있어 주길 바래요. 오빠만 저를 구할 수 있어요. 난 죽고 싶지 않고 또 미친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아요...”말을 마치며 노승아는 흐느껴 울었다.여이현은 여전히 냉담했다.“승아야, 난 이미 결혼했어. 네가 나를 구해주어서 보러 왔고 내 앞에서 미쳐가는 걸 지켜볼 수 없어.”“싫어요! 듣지 않을래요.”노승아는 여이현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그녀는 여이현이 온지유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을 듣고 싶지 않았으며 또 말하게 못 하게 했
법로의 표정은 여전히 엄숙했다.온지유는 이런 소식을 들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지금 이 상황에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무엇을 말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지금은 침묵이 가장 좋은 답변일지도 모른다.신무열 또한 이런 결과를 예상하지 못했다. 그는 아린에게 꼭 살리겠다고 약속했었다. 하지만 결국 그는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신무열은 깊은 죄책감에 사로잡힌 채 아린이 있는 침대로 다가갔다.“미안해. 한 몸 바쳐 중요한 정보를 전해준 네 목숨을 결국 지킬 수 없었어.”아린은 침대에 누워있었다. 몸속의 독으로 인해 얼굴은 이미 다 망가졌지만, 신무열이 가까이 다가오는 순간 그녀는 애써 미소를 지어 보였다.“그렇게 대단한 정보도 아니에요. 제가 말하지 않아도 결국 무열 씨는 모든 걸 알게 됐을 거예요.”그녀는 자처해서 한 것이었고 이 일로 인해 신무열이 어떤 마음의 짐도 가지지 않길 바랐다.신무열은 보이지 않는 손에 심장이 쥐어 짜이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자신을 위해 한 몸 바쳐 싸운 아린을 위해 아무것도 해 줄 수 없다는 사실에 목이 막혔다. 따로 방법이 없다면 이대로 그녀가 죽어 가는 걸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신무열은 그녀가 어떤 후회도 남기지 않도록 해주겠다고 결심했다.신무열은 아린에게 약속했다.“내 무능함 때문에 네 독을 풀어주지 못했지만 걱정하지 마. 나는 절대 널 포기하지 않을 거야. 그놈들한테 건 현상금도 아직 유효해. 정 안 된다면... 내가 반드시 복수해 줄게. 마지막으로 이루고 싶은 소원이 있다면 나에게 말해줘.”신무열의 눈빛은 확고했다.아린이 어떤 소원이든 말하든 그는 반드시 그것을 이뤄줄 생각이었다.아린은 신무열이 김혜연과 결혼할 것을 알고 있었다.그랬기에 두 사람을 곤란하게 하거나 결혼 전에 그의 마음을 흔들고 싶지 않았다.아린은 끝까지 미소를 유지하며 말했다.“신무열 선생님, 제가 당신에게 이 정보를 전할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당신이 저를 살리려 노력해 주고 제 곁에 있어 준 것만으로도 충분해요.”“혜연
온지유는 참지 못하고 농담을 던졌다.“결혼 후엔 아이도 빨리 낳아야겠네요. 나중에 아기가 태어나면 나도 좀 같이 놀아줘야죠.”“넌 이제 Y국에 있지도 않고 아버지도 같이 경성에 갔잖아. 차라리 Y국으로 와. 내가 널 고용할게.”신무열은 단숨에 말을 이어갔다.사실 거리가 그들 사이의 큰 걸림돌이었다. 온지유가 경성에 남기로 한 건 그녀의 선택이지만 신무열은 그녀가 Y국에 머물러 주길 진심으로 바라고 있었다.Y국은 그들의 뿌리와 영혼이 있는 곳이며 오빠로서 여동생에게 여러모로 보답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온지유도 신무열의 마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여이현이 경성에 있고 양부모도 그곳에 있는 온지유에게는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없었다.게다가 온지유는 Y국을 관리하는 일에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온지유는 미소 지으며 말했다.“형수가 아이를 낳게 되면 내가 와서 돌봐줄게요.”두 사람에겐 어머니가 없었고 신무열의 능력으로 아이가 태어날 때 산후조리사는 고용할 수 있다 해도 가족의 보살핌을 대체할 수는 없을 것이다.김혜연은 온지유가 ‘형수’라 부르는 말에 순간 눈시울이 붉어졌다.신무열이 자신을 인정해 주고 신무열 곁의 모든 사람이 그녀를 받아들여 주고 있다는 것이 참 다행스러웠다.신무열은 아린의 문제에 대해 법로에게 말할 필요가 있었다.“아버지, 제 친구가 노석명이 개발한 독약의 개량품에 감염되었습니다. 직접 한 번 살펴봐 주실 수 있을까요?”법로는 노석명의 이름을 듣고는 눈빛이 어두워졌다.“노석명의 독약이라니? 그놈은 이미 처형되어 사람의 형체조차 잃고 혀마저 잘려 매일 돼지처럼 살고 있다. 노석명이 어떻게 이런 일을 할 수 있단 말이냐?”혹은, 눈치도 없는 누군가가 아직도 노석명에게 충성을 바치고 있다는 것일지도 몰랐다.한편, 온지유는 ‘아린’이라는 이름을 듣자 과거 Y국 북부에서 처음 신무열을 만났을 때의 일을 떠올렸다.“내가 아는 그 아린 맞아요?”“그래.”신무열은 숨기지 않았다.당시 전쟁 중에 아린은 온지유에게 식사를 해주
“고마워.”나민우는 그 단어를 입 밖으로 내고 싶지 않았다. 온지유에게 감사하고 싶지 않았다. 온지유에게서 축복의 말을 듣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그에게 무슨 수가 있단 말인가?이것이 그들 사이의 가장 좋은 결말일 것이다.“나도 이만 가봐야 하니까, 돌아오면... 혹시 나중에 업무상 합작할 일이 있으면 또 보자.”온지유는 미소를 지으며 한마디 한마디 힘겹게 뱉었다.“그래.”나민우는 온지유가 사라지는 모습을 끝까지 지켜보고 돌아섰다. 심장이 조여왔다. 고통이 거대한 괴물처럼 덮쳐왔다.차라리 보지 않는 게 더 좋았을지도 모른다고 나민우는 생각했다....온지유는 여이현의 곁으로 돌아왔다. 여이현은 온지유에게 마실 것을 시켜줬다.그녀뿐이 아니라 별이와 법로의것까지 준비되어 있었다.별이에게는 감자튀김, 치킨을 준비했고 법로에게는 붉은색 외투를, 그리고 이번에는 배진호도 데려왔다. 배진호가 아직 한 번도 Y국에 와보지 않은 것도 있고 함께 가면 업무 진행 상황도 보고 받기 편해지기 때문이다.배진호는 일 중독자답게 비행기 대기 중에도 일을 하고 있었다.법로는 별이를 보더니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둘이 별이에게 맛있는 걸 먹이고 싶은 마음은 알지만 별이는 몸이 안 좋으니까 너무 기름진 건 많이 먹이지 마라.”“알아요 아버님. 어쩌다 가끔 사주는 거예요.”여이현도 평소에는 아이에게 패스트푸드를 사주는 건 기피하고 있었다.하지만 여이현과 온지유는 아이에게 너무 많은걸 참게 했다.게다가 할아버지도 엄하게 대하니 가끔은 보상으로 먹을 것 정도는 줘도 괜찮다 생각했다.“천천히 먹어, 체할라.”법로는 말은 그렇게 해도 사사건건 별이를 걱정해 주고 보살펴주고 있었다. 별이의 입가에 묻은 소스를 닦아주기까지 하며 말이다.한 가족의 행복이란 이런 소소한 곳에서 느껴지는 걸지도 모른다.비행기 위에서 온지유는 꿈을 꿨다.꿈속에서 그녀는 한 여자아이가 장미를 한 송이 들고 귀엽게 웃으며 바라보는 모습을 보았다.“예쁜 이모, 같이 가도 돼요?”여자아
경성에 함께 돌아온 이후로 나민우도 가족의 품으로 돌아갔다.온지유는 나민우의 마음을 알았고 나민우의 희생도 잘 알고 있었다.몇 년간 그녀는 나민우에게 휴대폰으로 메시지를 보내는 외에 직접 얼굴을 본 적은 없었다.당연했다. 그 메시지들을 나민우는 한번도 회답을 한 적 없었기 때문이다.온지유의 이 말은 비수같이 나민우의 마음에 꽂혔다.잘 지냈을 리가 있을까?집으로 돌아온 후 그의 모든 연락 수단은 뺏기고 말았다.Y국에 있는 동안 나민우는 심신이 모두 피폐해져 있었다.가족들은 그의 활동 범위를 제한해 안정을 취하도록 했다.지어는 어울리는 여자를 찾아 이어줘 둘 사이에는 아이도 생겼다.나민우는 이 몇 년간 감히 온지유에게 연락을 할 수가 없었다. 자신의 감정을 주체할 수 없어질까 봐 두려웠다.지금의 자신은 더 이상 온지유의 옆에 설 자격이 없었다.순간 나민우는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 목이 막힌 듯한 느낌이 들었다.그는 온지유의 물음에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온지유는 나민우에게서 이상함을 감지했다.하지만 미처 무어라 묻기도 전에 여이현이 다가왔다.여이현은 나민우를 발견하고 먼저 인사했다.“민우 씨, 오랜만이네요.”여이현까지 나타난 이상 나민우도 더 이상 피할 수 없었다.“예. 오랜만이에요.”온지유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은 여이현이다. 여이현이 살아 있는 지금, 그가 온지유의 곁에 서있는 지금, 온지유는 더더욱 여이현과 갈라질 일은 없었다.모든 것은 이미 다 정해진 운명이었다.나민우는 웃으며 돌아섰다.“아직 할 일이 남아서 먼저 가보겠습니다.”“네. 또 봅시다.”그저 평범한 인사치레일 뿐이었다.나민우는 돌아섰지만 온지유는 그가 무언가를 감추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여이현은 온지유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그 일에 연루되었던 사람들이 지금은 다 잘 지내고 있는 것 같아서 다행이네.”그렇지 않으면 온지유는 계속 마음에 두고 있을 것이다.온지유는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다들 괜찮아 보이지만 나는 왠지... 나민우는
신무열은 말을 마치고 김혜연에게 따뜻한 눈길을 보냈다.김혜연은 순간 그의 뜻을 눈치챘다.그리고 싱긋 웃었다.“괜찮아요. 도움이 될 수만 있다면 아무래도 좋아요. 결혼식은 그저 형식적인 것일 뿐인걸요.”신무열은 김혜연의 머리를 쓰다듬고 그녀의 이마에 가볍게 입맞춤했다.김혜연 마음은 호수에 빗방울이 떨어진 듯 은은하게 일렁였다.둘의 합의로 결혼식은 1주 후에 치루기로 결정되었다.신무열은 먼저 Y국 전체에 결혼을 발표했다.그리고 친구들에게도 소식을 전했다.법로는 신무열이 이렇게 빨리 결정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 그에게 한마디 했다.“전에 지유를 통해 네게 귀띔했을 때는 싫다고 하더니만 지금은 어떠냐?”신무열은 웃음을 흘렸다.이번 일은 확실히 신무열의 예상 밖이었다. 세상일은 어떻게 될지 모르니 말은 조심해야 하는 게 맞았다.법로가 말했다.“결혼할 생각이었으면 지유와 같이 결혼식을 치렀으면 좋았을 텐데.”법로는 온지유의 이름을 부르는 데에 익숙해져 율이라는 이름이 오히려 입에 익지 않게 되었다.법로에게 있어서는 딸이 곁에 있어만 준다면 이름이 어떻든 상관이 없었다.율이라는 이름은 한동안 노승아가 썼던 것이기도 했기에 오히려 온지유의 이름이 마음이 편했다.온지유의 기억은 경성에서 멈춰있었다.온지유만 좋다면 어떤 신분으로 있든 상관이 없다.“경성에서 돌아오기 싫은 마음은 저도 알지만 우리의 결혼식에는 참석해 줬으면 좋겠어요.”아버지와 여동생마저 참석하지 않으면 어떤 사람들은 이 결혼을 인정하지 않을지도 모른다.“알고 있다. 지유와도 내가 말해두마. 오늘 저녁에 바로 출발하겠다.”아들의 결혼식에 참석 안 할 리가 있을까?게다가 온지유에게 이미 잘 못 대해 줬었는데 아들에게까지 신뢰를 잃을 수는 없었다.온지유가 돌아오자 법로는 바로 이 소식을 전해주었다.온지유는 단숨에 승낙한 것도 모자라 두 사람의 결혼 소식에 누구보다도 기뻐했다.“정말 잘됐어요. 또 한 쌍의 연인이 맺어지게 되다니.”김혜연의 집념과 노력을 온지유는 두
아린이 같은 수단으로 신무열을 그녀의 곁에서 앗아갔기 때문이다.아린에게 더 대단한 수단이 있었다면 김혜연은 인정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하지만 지금은...김혜연은 마음속이 바늘로 쑤시듯 아파져 왔다.그녀는 신무열이 세심하게 아린을 보살피는 모습을, 직접 아린에게 약을 떠먹여 주는 그의 모습을 곁에서 뚫어져라 쳐다봤다.신무열은 한참이 지나고 아린이 잠들고 나서야 발길을 돌렸다.뒤돌아선 신무열은 그제야 뒤에 있던 김혜연을 발견했다.“네가 왜 여기에?”김혜연은 신무열의 뒤에 누워있는 아린을 보며 물었다.“아린이 찾아온 게 딱히 비밀은 아니잖아요?”Y국 전국에 이미 아린이 목숨을 걸고 신무열에게 정보를 전달했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신무열은 그녀의 은혜를 보답하기 위해 아린을 살려내고 아린을 결혼식의 주인공으로 발표할 거라는 소문은 점점 더 퍼져가고 있었다.김혜연은 이 모든 것을 알고 나서야 위기감을 느끼기 시작했다.신무열은 김혜연의 눈빛에서 이미 모든 것을 눈치챘다.“아린은 우리에게 중요한 정보를 전해주었어. 나는 아린이 죽게 내버려둘 수 없었을 뿐이야.”그것이 바로 신무열의 입장이었다. 그 외에는 아린에게 어떠한 다른 감정도 품고 있지 않았다.밖에는 이미 아린이 그를 도왔기에 책임감을 느낀 신무열이 그녀를 곁에 둘 것이라 말하고 있었지만, 그의 태도는 굳건했고 은혜를 갚기 위해서 자기 자신을 내주지도 않을 것이다.김혜연은 숨을 들이 삼켰다. 신무열이 그녀에게 친절히 설명을 해주고 있었기 때문이다.이에 김혜연은 신기한 기분이 들었다.“무열 씨...”이름을 불렀지만 그 뒤에 무슨 말을 이어야 좋을지 생각이 들지 않았다.부인할 수 없는 건 신무열과 그녀 사이의 신분과 관계성을 고려하면 신무열이 자세히 설명을 해준다는 건 당연한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왜? 나는 너와 약혼한 사이이기도 한데 이런 일이 일어난 뒤에 아무 말도 하지 않을 수는 없잖아. 그건 네게 너무 잔인하지 않아? 아니면 넌 나를 그런 사람으로 생각해 왔던 거야?”
신무열은 상황을 파악한 후 요한을 불러 말했다.“아린을 실험실로 데려가서 검사해 봐.”이들은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아린은 중요한 정보를 전하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기꺼이 내걸었다.아린은 숨을 고르며 말했다.“선생님, 저 때문에 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 지금 치료는 필요 없어요.”“그들이 노리는 건 바로 너의 안전이야. 지금은 네 안전이 가장 중요해.”신무열이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아린은 신무열의 따뜻한 배려를 느꼈다. 비록 신무열이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그녀의 건강을 걱정하는 것이라 해도 어떻게 되었든 신무열의 관심을 받는 것만으로도 그녀에겐 큰 위안이었다.그렇게 아린은 요한과 함께 실험실로 갔다.실험실에서 검사를 하던 연구원들은 모두 고개를 저었다.“아주 강력한 독입니다. 노석명이 개발한 독을 개량한 것이며, 지금으로선 해독제가 없습니다.”신무열의 얼굴은 어두워졌다.“노석명의 독은 이미 다 없어진 게 아니었나?”노석명은 처형되었고, 법로의 관심이 온지유와 별이에게 쏠리면서 Y국에는 더 이상 그런 독이 존재하지 않았다.“요한, 이 일을 추적해. Y국에 해가 되는 그 누구도 존재하지 못하게 하고, 국가와 국민의 안전을 지켜야 한다.”신무열은 차가운 눈빛을 띠며 단호하게 말했다.그리고 다른 연구원들에게도 명령을 내렸다.“어떤 방법이든 상관없다. 반드시 아린의 목숨을 구해!”“예!”연구원들은 그의 명령을 거역할 수 없었다.아린은 마음속에 따뜻함을 느꼈다.“선생님, 제 목숨을 소중히 여겨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렇게 죽게 내버려두지 않으셔서요. 하지만... 저는 죽음이 두렵지 않아요.”아린은 이미 신무열에게 중요한 정보를 전했고, 그것으로 신무열이 대비할 수 있게 했다.그녀는 이미 명예롭게 죽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세상에 죽음이 두렵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을까?신무열은 아린이 자신을 위해 헌신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그는 아린이 자신 때문에 죽게 할 수 없었다. 그렇지 않으면 평
신무열은 Y국에서 높은 신분을 지니고 있지만 나라의 미래와 백성을 위해 자신의 격을 낮추고 직접 약초를 가르치고 재배법을 가르치며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치기도 했다.그 시간 동안, 신무열은 아이들에게 선물을 주었고, 아린에게도 작은 선물을 챙겨주었다. 신무열은 어떤 사람인가?그는 한 번 싫어하는 사람에게는 아무리 노력해도 마음을 주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녀가 지금 이런 행동을 한다면 오히려 신무열의 마음속에서 자신의 이미지를 망칠 뿐이었다.신무열은 그녀를 계속 싫어할 것이고 아린은 혼자서 그를 바라만 보는 삶을 살게될것이다.그럼에도 아린은 지금은 그들에게 협조해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아린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무열 씨를 좋아하는 여자는 많은데 왜 저를 선택한 거죠? 저는 작은 인물이고, 아무런 배경도 없는데요.”“바로 네가 작은 인물이기 때문이지. 그래야 의심받지 않아. 정말 신무열을 영원히 네 곁에 두고 싶지 않나? 신무열은 뛰어난 사람이고 너와 그의 아이라면 최고의 유전자를 가질 텐데.”아린이 대답하지 않자 남자는 계속 그녀를 부추겼다.남자의 말들은 아린의 머릿속에서 수없이 되뇌어졌던 것들이었다. 하지만 신무열과 함께하는 것보다 미움받고 싶지 않은 마음이 더 컸다.그녀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당신 말이 맞아요. 계획이 뭐죠? 말해줘요. 계획대로 따를게요.”그녀는 자신이 왜 선택되었는지도 알고 있었다. 작은 인물이기 때문에 조종하기 쉽고 조금의 이익으로도 매수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계획은 내가 알려줄 거야. 하지만 그 전에, 너의 충성심을 위해...”‘푹!’남자는 말을 끝내지 않았다.아린은 피부에서 느껴오는 찌릿한 고통에 눈살을 찌푸렸다.아린은 자신에게 독이 주입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남자는 아린에게 위협하듯 말했다.“내 말을 어기기만 해봐. 이 독은 널 죽기보다도 못한 고통을 줄 테니까!”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아린은 견딜 수 없는 고통에 몸부림쳤다. 머리에는 식은땀이 흐르고 표정은 고통으로 일그러졌지
아린이 아직 입을 떼기도 전에 신무열이 계속 말을 이어갔다.“지금 나는 이미 헤연에게 약속 했어. 남자로서 한 말은 반드시 지켜야지. 게다가 난 혜연에게 특별히 불만도 없어.”아린은 숨이 막혔다.책임감 때문에 여자를 곁에 두지 않았던 신무열. 그리고 김혜연에게는 불만이 없다는 말에 더해 김혜연이 늘 신무열 곁에 있으면서 시간이 지날수록 서로의 진심을 확인했다는 점에 속이 검게 타들어 갔다.“가까이 있는 자가 먼저 기회를 얻는다”는 말과 “오랜 시간이 지나야 진짜 모습을 알 수 있다”는 말이 참으로 딱 들어맞았다.아린의 마음은 아팠다. 그녀는 평민일 뿐이었고 김혜연과는 신분 자체가 달랐다.신무열이 원하는 건 그와 나란히 설 수 있는 우수한 여성이자 내조자였지 빈민가 출신의 이름 없는 소녀는 아니었다.아린은 여러 해 동안 큰 노력을 기울였지만 그들 사이의 신분 격차는 변할 리 없었다.“선생님, 당신이 진심으로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축복할게요. 당신이 늘 행복하길 바라요.”이것이 아린이 할 수 있는 유일한 말이었다.“고마워.”신무열도 그녀의 말에 감사를 표했다.아린은 돌아섰다.자신의 위치와 지위를 바꾸기 위해 열심히 노력해 왔지만 목표가 사라진 지금은 모든 것이 허무하게 느껴졌다.신무열의 거처를 벗어난 아린은 얼마 가지 않아 무리에게 가로막혔다.그녀보다 키도 크고 체격이 다부진 남자들이 점점 다가왔다.아린은 본능적으로 총을 꺼내려 했지만 상대가 더 빨랐다.총구가 그녀의 머리에 겨눠지며 차갑고 위협적인 목소리가 들렸다.“죽기 싫다면 조용히 우리 말을 듣고 따라와라!”전쟁 중 매일 총탄에 대한 공포 속에 살았던 그녀였다. 몸은 총구를 두려워하고 있었지만 여긴 신무열의 구역이었다. 그녀 같은 작은 존재가 신무열에게 폐를 끼칠 순 없었다.아린은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고 그들의 요구에 순응했다.얼마나 걸었는지 모른 채 끌려간 곳은 작은 방이었다. 그들은 무기를 꺼내 그녀를 겨눴다.“할 말이 있으면 똑바로 하세요. 괜히 쇼하지 말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