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서우는 밖으로 나간 후 얼른 얼굴을 두드리며 자신을 진정시켰다.절대 다른 사람에게 들켜서는 안 되었다.“은 선생님?”은서우가 돌아보니 자신이 진료했던 환자의 가족이었다. 그녀의 품에 안긴 아이를 보고 갑자기 걱정스러운 기색으로 변했다.물어보니 지병이 재발한 것이었다.그녀는 환자를 데리고 자신의 사무실로 데려가 세심하게 검사를 시켰다. 5분 후, 그녀는 결과를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위장에는 문제가 없는데 어디가 불편한 거죠?”그녀는 환자의 가족이 잘못 알고 있는 줄 알았다.하지만 그 어머니는 우물쭈물했다.은서우는 일이 그렇게 간단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괜찮으니까 말해봐요. 병원은 병을 치료하는 곳이에요. 애가 어디가 아픈지 제게 말씀해주세요.”그러자 그 어머니는 펑펑 울기 시작했다.은서우는 멍해 있다가 다급히 위로했다.“울지 마세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천천히 말씀하세요.”중년 여자는 한참을 울다가 멈추고 자기 딸에게 일어난 일을 얘기하기 시작했는데 은서우가 하마터면 경찰에 신고할 뻔했다.그녀는 전형적인 가정주부였다.학력이 높지 않고 농촌 출신인 그녀의 고향에는 여자가 나이가 들면 중매쟁이가 찾아오고 집안의 부모님도 하루빨리 자식의 혼사를 결정했다.그녀는 마을에서 자기보다 여덟 살 많은 남자와 결혼했고 결혼 후 딸을 낳았다. 그러나 아들을 중시하는 그녀의 남편은 그녀가 아들을 낳지 못하자 계속 가혹하게 대했다.여자는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 “날 어떻게 대하든 상관없는데 얼마 전 그 짐승이 내 딸에게 손을 댄 걸 알았어요. 이제 겨우 몇 살이라고. 어떻게 아버지가 딸에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죠?”은서우는 깜짝 놀랐다.이 사실은 그녀가 받아들일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섰다. 그녀는 즉시 또 한 번의 검사를 준비했다.그 여자아이가 전에 위장염이 있어서 아까는 내과 검사를 했지만 이번에는 부인과 검사였다.검사 결과 은밀한 부위가 이미 찢어져 있었다. 은서우는 검사 결과를 보며 손이 부들부들
“선생님, 제 팔자가 왜 이럴까요? 이렇게 기구할 줄 알았으면 결혼하지도 않았을 텐데. 저 이제 어쩌면 좋아요? 만약 홀몸이라면 죽었을 텐데 딸이 이제 겨우 여덟 살이에요. 너무 어리잖아요.”은서우도 난감했다.“네. 따님을 생각하셔야죠...”그녀는 갑자기 인명진을 떠올렸다. 그녀에게 변호사 인맥이 없지만 인명진은 있을지도 모른다.다만 현재로서는 인명진에게 의견을 묻지 않고 여자에게 무언가를 약속하기도 어려워 우선 환자와 보호자의 감정을 달랬다.그 여자아이는 아주 철이 들었다.올해 여덟 살로 초등학교에 입학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아이는 남녀 간의 일에 대해 알지 못했고 아버지가 자신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아빠는 저와 놀이를 했을 뿐이에요. 내가 소리치지 않으면 상을 주겠다고 했어요.”하지만 아이는 어머니가 슬퍼하는 이유가 자신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다.“엄마, 울지 말아요. 나연이는 하나도 안 아파요.”아이는 여자를 토닥이며 위로했다.여자는 딸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고 은서우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이렇게 철든 아이가 이런 일을 당하다니.그녀는 사무실에서 서로 껴안고 있는 모녀를 보며 조용히 문을 닫고 재빨리 인명진에게로 갔다. 가슴에서 들끓는 분노로 인해 걸을 때마다 바람을 휘날렸다.똑똑, 그녀는 사무실 문을 두드렸지만 응답이 없었다.다시 노크할까 고민하던 중 인명진의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나 찾으러 왔어요?”은서우가 깜짝 놀라 고개를 돌리자 남자는 가운을 정리하며 말했다.“방금 급한 수술이 잡혀서 이제 끝났어요.”그제야 남자가 애써 억누르고 있는 피곤함을 보아냈다.수술할 때 에너지가 많이 드는 건 인명진도 예외일 수 없었다.“부탁드릴 일이 있어요.”“네. 들어가서 얘기하시죠.”인명진은 손을 내밀어 뼈마디가 분명한 손으로 문을 열었지만 자신은 움직이지 않고 그녀가 먼저 들어가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은서우가 들어가고 나서야 그도 따라갔다.은서우는 시간을 지체하지 않고 말했다.
여자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다른 사람이라면 이런 일에 개입하지도 않았을 거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은서우가 착해서 기꺼이 도와주는 것이니 결과가 안 좋더라도 그녀는 아무도 탓하지 않을 것이다.은서우는 책임감을 갖고 인명진에게 변호사를 만날 시간을 물은 후, 특별히 하루 휴가를 내고 모든 일을 잠시 미루었다.시간이 되자 인명진이 차로 그녀를 데리러 갔다.카페.“안녕하세요, 은 선생님. 저는 경성 로펌에서 왔어요. 김 변호사라고 부르시면 돼요.”한 남자가 손을 내밀자 은서우는 악수하고 미소를 지었다.“안녕하세요 김 변호사님. 경성에서 오시게 만들어 죄송해요.”“괜찮습니다. 다른 일 때문에 원래 A시에 있었어요. 그리고 이건 친구가 부탁한 일이니 당연히 도와야죠.”몇 마디 인사를 나눈 후, 몇 사람은 앉아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나누었다.김 변호사는 오기 전에 대략적인 것만 듣고 자세한 것은 몰라서 은서우가 먼저 일의 전말을 처음부터 끝까지 이야기했다.김 변호사는 매우 실력 있는 변호사로 계속 고개를 끄덕이며 응대하고 가끔 질문을 던지며 메모했다.은서우는 말을 마치고 나니 목이 바짝바짝 말랐다.음료를 마시려는데 인명진이 따뜻한 물 한 잔을 그녀 쪽으로 밀었다.“이거 마셔요. 서우 씨 요즘 감기 기운이 있으니 따뜻한 물이 목에 좋아요.”은서우의 손은 자연스럽게 방향을 틀어 따뜻한 물을 잡았다.마시고 보니 자신이 무의식적으로 인명진의 말을 들은 것을 깨달았다. 게다가 그건 아직 마시지 않았을 뿐 그의 컵이었다.은서우는 할 말을 잃고 옆을 보았다.남자는 마치 전혀 이상한 점을 눈치채지 못한 듯 곁눈질도 하지 않고 소맷자락에 값비싼 커프스를 하고 메뉴를 보고 있었다. 일거수일투족에서 차갑고 고귀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그녀는 말없이 시선을 거두고 또 한 모금 마셨다. ‘아마 개의치 않는 것뿐이겠지? 됐어. 그만 생각하자.’“상황은 알겠어요.”김 변호사가 노트를 닫았다.은서우는 얼른 컵을 내려놓고 물었다.“혹시 이런 사건도 맡아주실
하지만 은서우는 여전히 미안했다.그러자 남자는 멈춰 서서 운전석에 앉아 그녀를 쳐다보았다.그 눈동자는 햇빛 아래서 평소의 칠흑 같은 어둠을 벗고 짙은 갈색에 더 가까웠다.남자의 시선에 은서우는 어색했고 가슴이 두근거렸다. 자신의 얼굴이 분명 빨개졌을 거로 생각했다.“왜 그렇게 쳐다보세요?”인명진은 거의 보아내기 힘든 옅은 미소를 짓고 말했다.“만약 정말 내게 감사한 마음을 전하고 싶다면 어서 그럴듯한 논문을 써오세요.”쿵!설레던 그녀의 마음이 쿵 내려앉았다.대체 이 사람은 왜 만날 다른 사람의 논문 타령을 하는 걸까? 정말이지 이해할 수 없었다.방금 그 설레던 마음은 잊고 은서우는 남자를 쳐다보지도 않았다.변호사를 선임한 후 법원에 소송을 제기해야 했다.이건 은서우가 관여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으니 이쯤에서 변호사에게 전권을 맡겼다.아이의 어머니는 특별히 병원에 와서 감사를 표했다.은서우는 그녀를 위로했다.“저한테 감사해할 필요 없어요. 지금은 변호사님께 잘 협조하세요. 힘내세요. 하루빨리 딸과 함께 그 고생에서 벗어나길 바랄게요.”“꼭 그렇게 하겠습니다!”여자는 눈물을 훔치며 떠났다.이 사건은 병원에서도 소문이 퍼졌다.이혜성은 은서우의 친절에 감탄하며 말했다.“너 선행 했다며? 어디 좋은 일을 하면 상을 받을 수 있는 곳 없나? 있으면 난 널 첫 번째로 추천할 거야.”은서우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아마 없을 거야. 번거로운 일을 자초하는 사람은 나밖에 없을 테니까.”그러나 그녀는 후회하지 않았다.그녀의 태도를 보고 이혜성도 그녀를 설득하는 것을 멈추었다.그러나 은서우의 말을 씨가 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정말 번거로움이 찾아왔다.“은서우! 누가 은서우야! 당장 나와!”한 남자가 병원에 찾아와 소리를 지르며 병원의 프런트 간호사를 붙잡고 놓지 않았다.간호사가 그의 새빨개진 눈을 보니 진짜 사람을 때릴 것 같아 부들부들 떨며 은서우의 사무실을 가리켰다.남자는 즉시 고개를 돌려 사무실로 돌진했다.나머지
남자의 주의를 돌린 은서우는 즉시 결단을 내리고 다리를 들어 그의 가랑이를 향해 강하게 걷어찼다.그는 즉시 손을 놓았다.은서우는 숨 쉴 틈도 없이 서둘러 문밖으로 뛰쳐나가면서 탁자 위의 진료 기록과 물컵을 집어 들고 냅다 남자에게 던졌다.그렇게 남자의 고함과 욕설 속에서 밖으로 뛰쳐나갔다.막 뛰쳐나가자 누군가와 정면으로 부딪쳤다.곧이어 그녀의 어깨가 큰 손에 눌렸다.은서우는 고개를 들지 않아 누가 왔는지도 몰랐다. 당황한 나머지 방금 그 남자의 패거리인 줄 알고 너무 무서웠다.“이거 놔! 꺼져!”그리고 다시 똑같은 전술을 쓰려 했지만 이번에는 제지당했다.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는데 다행히 머리 위에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왜 이래요? 누가 서우 씨를 괴롭혔어요?”은서우는 그의 품에 와락 안겼고 이 순간에서야 눈물이 흘렀다.인명진은 그녀가 울면서 아무 말도 못 하는 걸 보고 눈빛이 더욱 어두워졌다. 그녀의 등을 가볍게 두드리며 달랬다. 넓은 어깨는 그녀에게 무한한 안정감을 주었다.그의 숨결에 젖어 은서우는 마침내 진정되었다.자신이 운 이유를 설명하려던 순간, 방금 그녀에게 걷어차인 남자가 안에서 뛰쳐나와 한이 가득한 소리를 질렀다.“이년! 내가 너 죽여 버린다!”그의 손에 있는 물건이 번뜩였다.달려온 사람들은 남자의 손에 흉기가 있는 것을 보고 질겁했다.품에 안겨있던 은서우의 시야가 뒤집혔다. 알고 보니 남자가 그녀를 안고 돌아서서 자신의 뒤로 보호했다.은서우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반응하기도 전에 다가오는 칼이 보였고 시퍼런 칼끝이 번쩍였다.“조심해요!”다행히 상상했던 장면은 일어나지 않았다.인명진은 남자의 하반신을 걷어차고 손쉽게 흉기를 제거했다.남자는 여전히 푸드덕거리고 있었다.인명진은 남자를 꽉 누르고 목덜미를 잡고 음산한 목소리로 말했다.“더 움직이면 폐인 만들어 놓는다.”나지막한 목소리는 그들 셋 외에는 아무도 듣지 못했다.남자는 인명진의 살기 가득한 말투에 온몸이 굳어졌다.은서우도 1초 동안
그리고 그 사람을 쳐다보지도 않았다.경찰은 곧 떠났고 이 소동은 무사히 끝났다고 할 수 있었다.은서우는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친구가 옆에서 눈짓하며 재미난 이야기를 묻는 모습이었다.“너 눈에 경련 났어?”그녀가 묻자 이혜성은 퉁명스럽게 그녀를 힐끗 쳐다보았다. “아니! 너 무슨 말을 그렇게 해? 아니다. 지금은 이런 얘기를 할 때가 아니지. 빨리 설명해봐. 너와 원장님 대체 무슨 상황이야?”은서우는 어리둥절해 해며 물었다.“무슨 상황이라니?”이혜성은 눈을 크게 어이없는 표정으로 말했다.“야, 방금 서로 껴안고 있는 거 나 말고 본 사람이 몇 명인 줄 알아? 근데 지금 두 사람 아무 사이도 아니라고? 차라리 귀신을 속여라.”“지금 솔직하게 고백하면 용서하고 그렇지 않으면 엄하게 처벌할 거야. 지금 모든 걸 털어 놓는다면 우리 우정을 지킬 수 있다고.”은서우는 머리가 하얘졌다.곧 얼굴이 빠르게 달아올랐고 단 몇 초 만에 귀 끝까지 붉어졌다.너무 갑자기 일어난 일이라 전혀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는데 그녀와 인명진이 사람들 앞에서 서로 껴안았다니.친구의 가십 어린 눈빛을 보니 그녀는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었다.결국 솔직하게 털어놓을 수밖에 없었지만 별로 설명할 것도 없었다. 그녀와 인명진의 관계는 확실했다.듣고 난 이혜성은 약간 실망했지만 그저 입술을 삐죽 내미는 정도였다.“알았어. 난 또 뭐 대박 뉴스인 줄 알았지.”“참, 너 원장님한테 가봐야 하는 거 아니야? 방금 손에 피나더라고.”이 말은 이혜성의 미끼였다.그녀는 말을 마치자마자 은서우의 반응을 기다렸다.은서우는 인명진이 다쳤다는 말을 듣자마자 순간 놀라 아무것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뭐? 다쳤다고? 내가 가봐야겠어.”그녀는 이혜성을 두고 급히 자리를 떴다.일을 해결한 후 인명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가는 길에 여러 명의 의사와 간호사에게 물어보았지만 모두 보지 못했다고 말했다.그녀는 직감적으로 그가 사무실에 있을 거로 여겼고 노크하는 것도 잊고 벌컥
인명진은 은서우를 바라보며 끝내 속마음을 털어놓지 못했다.“언제까지 감을 거예요?”은서우는 그제야 자신이 붕대를 너무 많이 감았다는 것을 깨달았다.“아, 방금 말을 거셔서 잠깐 정신이 팔렸어요. 조금 풀게요.”그녀가 바깥쪽 두 바퀴 붕대를 풀고 나니 보기에 훨 나아졌다.은서우는 여전히 걱정스러운 표정이었다.“어쩌다 다쳤어요? 방금 칼을 손으로 잡은 거예요?”인명진이 불편한 곳을 교정하니 손에 붕대가 더 자연스럽게 묶였다. 그리고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아니요. 그냥 살짝 긁혔어요.”은서우의 미간이 순식간에 꼬였다.당장 경찰서로 달려가 그 남자를 한 대 때리고 싶은 충동이 생겼지만 지금 인명진의 표정을 이해할 수 없었다. 상처가 그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흔한 일처럼 보였다.심지어 얼굴에는 별다른 표정도 없었다.하지만 어떻게 자신의 몸에 이렇게 무관심한 사람이 있을 수 있을까?은서우는 참지 못하고 물었다.“그냥 간단하게 처리한 것뿐이니 돌아가서 꼭 약 바르시고 상처에 물이 닿지 않도록...”“서우 씨, 그렇게까지 나 신경 쓸 필요 없어요.”인명진이 말하자 은서우는 어리둥절했다.남자는 자기 손을 힐끗 보더니 내려놓았다.“그냥 내버려 두면 혼자 낳을 거예요. 이젠 서우 씨도 어서 일하러 돌아가요. 나 이따가 수술 있어요.”이 손으로 수술하러 간다니.이 말을 들은 은서우는 목청을 더 높였다.“안 돼요! 다친 손은 오른손이잖아요? 게다가 상처가 이렇게 큰데 어떻게 수술을 해요?”수술은 아주 정교한 작업이었다.특히 내과 수술은 더욱 조심해야 하며 의사의 손은 그들의 목숨만큼 중요했다.인명진은 오른손을 자주 사용하는데 부상도 오른손이었다. 방금 붕대를 풀 때 그녀는 상처가 너무 깊어 속으로 놀랐다. 비록 정맥과 동맥을 아슬하게 피했지만 힘줄에 닿을 정도로 깊은 상처였다.이 정도로 다쳤는데도 인명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꾹 참았다.그래서 은서우는 그가 수술하러 간다고 했을 때 크게 흥분했다.“지금 명진 씨 손으로는 큰 수술을
수술까지 거의 두 시간이 남았다.은서우는 다른 사람에게서 임시로 큰 수술을 받은 적이 없었다. 그녀는 1분 1초도 낭비하지 않고 환자의 정보를 확인했다.인명진도 가만히 있지 않고 몸을 약간 앞으로 기울여 진료 기록을 짚으며 말했다.“이 환자는 관상 동맥 질환을 앓고 있고 여러 가지 증상으로 인한 혈관 막힘이 많아 병원에 도착했을 때 이미 기절한 상태였어요. 환자 나이가 50이 넘었기 때문에 수술 할 때 각별히 주의해야 하고...”남자의 목소리는 잔잔하여 마치 조용히 흐르는 시냇물 같았다.은서우의 불안함이 순식간에 가라앉았다.보조 의사가 인명진을 부르러 왔고 사무실 노크 소리가 들렸을 때 그녀는 이미 마음이 진정되었다. 막 일어나려는데 옆에 있던 인명진이 그녀와 함께 일어섰다.“함께 가요. 내가 현장에서 지도하면 서우 씨가 더 안심될 거예요.”인명진이 말하자 은서우는 몇 초 동안 어리둥절했다.곧 노크한 사람이 들어왔고 한 남자 의사였다.은서우를 본 그는 의아해하며 말했다.“은 선생님 원장님을 찾으러 오셨어요? 죄송하지만 지금 응급 수술이 있어서 원장님을 모시고 수술실에 들어가야 해요.”“시간이 촉박하니 바로 가시죠. 원장님. 그렇지 않으면 늦을지도 몰라요.”인명진은 대답하고 옆에 있은 은서우를 바라보았다.은서우는 또 긴장하기 시작했다.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방금 두 사람만 있을 때는 인명진 앞에서 호언장담할 수 있었다고 해서 다른 사람 앞에서도 자신만만한 건 아니었다.그녀는 그 정도로 뻔뻔하지 않았다.그러나 인명진은 전혀 걱정 없이 은서우를 가리키며 말했다.“이 수술은 은 선생이 집도할 거예요.”이 말에 남자 의사는 깜짝 놀랐다.“무슨 그런 농담을 하세요 원장님. 이번 수술은 절대 쉽지 않아요. 경력이 부족한 은 선생님이 감당할 수 있는 케이스가 아니에요.”인명진은 마음을 바꿀 생각이 없었다. “내가 선택한 사람이니 내가 가능하다고 하면 가능한 거예요.”남자 의사는 연신 고개를 가로저었다.인명진을 설득할 수 없자 그
하지만 감동보다는 오히려 속이 울렁거렸다. 속이 울렁거리는 느낌에 문지원은 당장 얼굴이 일그러지며 화장실로 달려갔다. 지석훈도 뒤따라 들어오며 물었다.“속이 안 좋아?”“그렇진 않은 것 같아요. 요즘 세 끼 식사도 꽤 규칙적으로 하고 날것 이거나 차갑거나 매운 음식도 먹지 않았는데...”문지원은 배를 움켜쥐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다 문득 한 가지 가능성이 떠올랐다.지석훈도 그녀와 같은 생각을 한 듯 방으로 가서 임신 테스트기를 가져왔다.문지원은 놀라며 물었다.“언제 산 거예요?”지석훈은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만일의 사태에 대비해서.”문지원은 아무 말이 없었다.5분 후, 그녀는 복잡한 얼굴로 다시 나왔다. 한 손은 여전히 배 위에 올려져 있었고 눈에는 믿을 수 없다는 기색이 역력했다.정말 임신한 것이다!그녀와 지석훈이 결혼한 지 겨우 3개월밖에 안 되었는데 이렇게 빨리 임신하다니.지석훈은 오히려 태연해 보였다. 하지만 입가에 감출 수 없는 미소를 보면 그 역시 겉모습처럼 평온하지 않고 흥분을 억누르고 있는 게 분명했다.“정말 임신한 거예요?”문지원은 아직 믿기지 않는 듯 물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이번 달 초에 생리가 끝났기 때문이다.“아마 생리가 끝난 후 며칠 사이일 거야.”지석훈의 목소리는 문지원에게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 당시의 기억을 떠올리니 그녀의 귀는 뜨겁게 달아올랐다. 결국, 그녀는 병원에 가보기로 했다. 임신 테스트기는 가끔 틀릴 수도 있으니 이런 일은 직접 검사를 받아보고 확인해야 마음을 놓을 수 있을 것이다.그리고 그녀는 손에 든 검사지를 보고 완전히 할 말을 잃었다.의사는 마침 지석훈과 알고 지내던 사람이었다.“축하합니다, 지 원장님. 부인께서 임신 2주 차입니다.”“감사합니다.”지석훈은 침착하게 그녀를 부축하며 밖으로 나갔다.병원 진료실을 막 나오자마자 지석훈은 문지원을 품에 안았다.“너무 좋아. 우리 아이가 생겼어.”문지원은 남자가 미세하게 떨리는 모습을 보며 멍하
물론 손에 있는 일을 무턱대고 모두 남에게 맡기는 것은 너무 과한 부담을 주는 일이다.문지원은 비서를 사무실로 불렀다.“올해 25살이죠?”비서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그녀의 나이는 모두가 다 아는데 문지원 회장이 갑자기 이 얘기를 꺼낸다는 것은 혹시 소개팅을 시켜주려는 건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비서는 고마웠지만 거절하며 말했다.“문 사장님, 저는 아직 젊어서 당장은 결혼할 생각이 없습니다.”“전 당신더러 결혼하라고 하는게 아니에요.”문지원은 펜으로 탁자를 두드리며 말했다.“그냥 평소에 잡다한 일들을 맡기고 싶어서요. 확인이 필요한 문서들은 평소에 굳이 내게 제출하지 않아도 돼요.”비서는 그 뜻을 이해했다.이건 곧 그녀에게 승진과 급여 인상을 주려는 것이다. 문지원이 그녀의 의견을 확인한 후 급여를 조금 올려줬고 비서에게 몇 명의 적합한 인재를 추가로 모집해서 예비 인력으로 두라고 지시했다.“평소에 내가 처리하지 못한 일들을 대신 처리해주고 만약 문제가 생기면 그때마다 보고하면 돼요.”비서는 한숨을 쉬며 안도의 표정을 지었다. 그녀 혼자서 이렇게 많은 일을 하지 않아도 되어 다행이었다.일정이 정리되자 문지원은 업무에서 상당 부분 해방되었다.예전에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바쁘게 일하다 보면 퇴근 시간이 되어도 일이 끝나지 않고 긴급 통지가 오면 또 회의를 위해 야근을 해야 했다.이제는 오후 4시 반쯤이면 일을 마치고 퇴근할 수 있게 된 것이다.비서가 몇 명을 더 찾아서 양성해 두었기에 업무가 적절히 분배되어 모두 바빠 죽을 정도가 아니라 적당히 딱 맞는 분량을 처리할 수 있었다.그 덕에 문지원은 지석훈과 함께 결혼 후의 삶을 더욱 즐길 수 있게 되었다.지석훈도 이에 매우 만족해했다.“널 주려고 선물을 챙겨왔어. 들어가서 한번 봐.”그가 집 문 앞에 다가서더니 걸음을 멈췄다.문지원은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안은 어두컴컴했다.“뭐 숨겨놨어요? 아직 불도 켜지 않았네요, 수상하게.”탁! 하며 불이 켜지자 거실의 모든
문지원은 이 주제가 다소 위험하다고 느꼈다. 비록 그녀의 아버지가 그녀에게 물어본 적은 없지만 그렇다고 자신과 배석훈이 결혼한 후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에 대해 말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돼지고기를 먹어보지 않았다고 해도 돼지가 뛰어다니 것을 본 적은 있을 것이다. 문지원은 그러면서도 반쯤 빚어놓은 만두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저,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이에 지석훈의 어머니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너희들도 이제 나이가 들었으니 아이를 가져야지. 평소에 좀 더 노력해야 한단다.”문지원은 잔소리를 듣고 나서 나오니 기운이 다 빠져있었다.시어머니는 문지원에게 정말 잘해주었다. 거의 마음을 쏟아붓는 수준이었다. 비록 문지원의 집안 사정이 좋은 것을 알면서도 혼수 때 오랜 세월 모은 돈으로 집 한 채를 사서 선물해 주었다. 사실 지석훈도 자기 집이 있었지만, 시어머니는 선물하고 싶다고 하셨다. “너희 집도 너희의 것이지만, 이건 내가 어른으로서 선물하는 거란다.”게다가 그 집에는 문지원의 이름도 함께 올려져 있었다.그래서 시어머니의 출산 독촉에도 문지원은 어쩔 수 없이 버텨야만 했다. 다행히도 시어머니는 어린 이들에게 엄격하게 구는 편은 아니었다. 만두를 빚을 때 한 번 그런 말을 했고 또 떠나면서도 지석훈을 불러 몇 마디 잔소리했다. 문지원은 그 모자간의 대화를 듣지 못했다.돌아가는 길에 문지원은 약간 궁금해져 지석훈에게 물었다.“나갈 때 어머니께서 뭐라고 하셨어요?”“정말 알고 싶어?”“네.”그러자 지석훈은 문지원의 머리를 숙이게 한 후 그녀의 흩어진 머리칼을 살며시 넘겨주며 귀 옆에서 낮게 속삭였다.“우리 아이를 빨리 낳으라고 하셨어.”남자의 낮고 진한 목소리는 얼굴을 붉히고 심장을 뛰게 만드는 약보다도 중독성이 강해 문지원의 귀가 금세 붉어지고 말았다.저녁이 되자 지석훈은 몸소 행동으로 보여주기 시작했다. 한 손으로 문지원의 머리를 받치고 이마를 맞대며 낮은 숨소리를 내쉬었다. 문지원은 마치 파도 속에 잠긴 것
그 눈빛 속에서 조용히 터져 나오는 그 소유욕. 마치 옛 시대의 군벌과 그의 부인 같았다. 그리고 사진작가는 우연히 그 장면을 목격한 운 없는 사람이 되어 몰래 촬영을 하고 있었다. 사진작가는 자신의 상상에 자극받아 목소리가 떨렸다.“지석훈 씨, 고개를 들어 카메라를 봐주세요.”지석훈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사진작가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사진작가는 재빨리 셔터를 눌렀다. 그 후에도 그들은 여러 세트의 사진을 찍었고 찍은 사진들은 모두 문지원에게 하나하나 보여주었다. 문지원은 모든 사진에 다 만족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마음에 든 것은 민국 시대 주제의 사진이었다.“대략 며칠 안에 나오나요?” 그녀가 물었다.사진작가는 답했다.“빠르면 이삼 일정도 걸릴 겁니다. 그때 완성된 사진들을 택배로 보내드리겠습니다. 그런데 제가 개인적인 부탁이 하나 있는데 혹시 두 분께서 응해주실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바로 아까 찍은 사진 중 몇 장이 제가 개인적으로 아주 마음에 들어서 사진관 벽에 걸어두고 싶습니다.”문지원은 사진관에 들어올 때 봤던 사진 벽이 생각났다.“그 벽에 걸어두시겠다는 건가요?”“네.”사진작가는 그 벽은 사진관의 특별한 기념 및 홍보 방법의 하나라고 설명했다. 잘 나온 사진들은 사진 주인에게 동의를 구한 뒤 동의하면 벽에 전시한다고 한다..문지원은 옆에 있던 지석훈을 바라봤다. “저는 괜찮은데, 당신은요?” 지석훈도 아무 문제 없다고 했다.“마음대로 하도록 해.”며칠 후 문지원은 사진작가가 보내온 사진을 받아 소중히 간직했다. 하지만 그녀는 몰랐다. 그 사진관 벽에 전시된 사진들이 곧 사람들의 눈에 띄어 사진이 찍혀 인터넷에 올라간 것이다.잘생긴 남성과 아름다운 여인의 조합과 최상의 촬영 기술 덕분에 순식간에 인터넷에서 화제가 되었다.네티즌들은 저마다 아아 소리를 냈고 많은 사람이 댓글을 달았다. “마치 옛 시대의 군벌 부인 같다.”“완전 대박이다.”“3분 안에 그들의 모든 정보를 알고 싶다.” 하지만 이 모
문지원은 약간 마음이 움직였다.하지만 웨딩 촬영은 이미 여러 번 한 적이 있었다. 그때 섬에서 몇 세트 찍었고 그 후 결혼식 현장에서 또 몇 세트 찍어 셀 수 없을 정도였다.게다가 이번 촬영은 개인 예약으로 진행되었는데 이 사진관이 꽤 유명하다고 들었다.물론 사진관 이름에 걸맞게 예약은 거의 하늘의 별 따기라고 한다..이 정도면 지석훈이 얼마나 큰 노력을 들여 예약을 잡았는지 알 수 있었다. 단순히 웨딩사진만 찍는 데 사용하기에는 너무 아까웠다.하지만 문지원 역시 이런 곳에 한 번도 와본 적이 없었기에 무엇을 찍어야 할지 몰랐다.“한번 보세요. 이건 저희가 예전부터 선보였던 스타일들이에요.”사진작가는 친절하게 앨범 한 권을 꺼내 보였다.앨범에는 이전 고객들이 이곳에서 찍은 사진들이 담겨 있었는데 정말 다양한 스타일이 있었고 모두 아름다웠다.이 사진관이 만들어낸 결과물은 정말 최고였다.문지원은 그중에서도 민국 시대 주제의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이렇게 찍을 수 있을까요?”사진작가는 그녀가 가리키는 사진을 한 번 살펴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네, 됩니다. 먼저 메이크업하고 옷을 갈아입으세요. 직원들이 촬영 스튜디오를 설치할게요.”옷은 사진관에서 준비한 것으로 하고 지석훈의 요구에 따라 전부 새 옷이었다.사실 문지원은 소품용 옷을 입는 것에 크게 개의치 않았다. 어쨌든 한 번 입었다가 나중에 벗으면 되는 거고 몸에 달라붙지 않아서 안에 옷을 받쳐 입을 수도 있었다.하지만 지석훈은 직업병이 발동했고 그런 건 용납할 수 없었다.결국, 문지원은 어쩔 수 없이 그의 의견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급히 새 옷을 가져와야 했기 때문에 원래 걸리던 시간에서 15분이 더 추가되었고 메이크업 등 기타 과정도 진행해야 했다.문지원이 모든 준비를 마치고 나왔을 때는 이미 2시간이 지난 후였다.그러나 결과는 확실했다.곧은 치파오가 그녀의 아름다운 몸매를 감쌌고 문지원은 옷자락을 살짝 들어 올렸다. 마치 지난 옛 시대의 그림 속에서 걸어 나온 듯한
결혼 후 문지원은 휴가를 내서 신혼여행을 갈까 고민해 본 적이 있었다.하지만 요즘 지석훈이 거의 계속 병원에 머무르며 집에 돌아오지 않는 것을 떠올리며 본의 아니게 한숨이 나왔다. 비록 이미 익숙해졌긴 했지만 실망을 감추기는 어려웠다.비서도 그녀에게 물었다.“문 사장님, 신혼여행 가고 싶지 않으세요? 제 동창 중 한 명이 며칠 전에 결혼했는데 요즘 여기저기서 신혼여행 정보를 알아보며 준비 중이에요. 신혼여행이 없는 결혼은 반은 실패한 거랑 마찬가지라고 하더라고요.”그 말을 들은 문지원은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제대로 볼 생각조차 들지 않았고 비서는 무언가를 눈치챈 듯했다.“그렇지 않으면... 문 사장님, 지 의사님이 일하시는 곳에 한 번 가보시는 건 어떠세요?”그녀가 머뭇거리며 물었다. 어쨌든 문지원은 요즘 정신이 산만하여 업무에 집중할 기색도 없었다.문지원은 비서의 시선 속에서 정신을 차렸다. 요 며칠 동안 집에 돌아와도 지석훈을 보지 못해 한참 혼란스러워했던 자신을 깨달으며 약간 부끄러워졌다.“그건 나중에 얘기하고 기획서 한 부 복사해 가져다주세요.”점심 무렵, 문지원은 막 일을 끝내고 밥 먹으러 가려던 찰나, 핸드폰에 지석훈의 메시지가 떴다. 같이 밥을 먹자는 메시지에 문지원은 미소를 지었다. 멀리서 이 장면을 본 직원들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며 웃음을 터뜨렸다.문지원은 재빨리 열쇠를 챙기고 회사를 떠났다. 지석훈은 그녀를 새로 오픈한 가게로 데려갔다.식사를 마친 후 문지원은 지석훈을 바라보며 머뭇거리다가 물었다.“병원에 다시 돌아갈 거예요?”“응?”지석훈은 눈썹을 치켜들며 고의적으로 물었다. “내가 돌아가길 바라는 거야?”그 말을 들은 문지원은 순간 당황했다. 사실 그녀는 지석훈이 자신과 좀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주길 바랐는데 이제 막 결혼한 신혼부부임에도 불구하고 각자 업무에만 매달려 밤에야 겨우 함께 잠자리에 들 수 있는 상황이었다.하지만 수줍음이 많은 그녀는 그 마음을 솔직하게 털어놓지 못했다.지석훈은
예전에는 이런 일이 있을 때면 지석훈은 항상 선을 지켰지만 오늘 밤엔 조금 달랐다. 그는 그녀를 침실에서 욕실로 다시 침대로 옮겨가며 몸 곳곳에 뜨거운 입맞춤을 했다.다음 날 아침에 일어났을 때도 문지원은 여전히 몸속 깊이 스며든 감각이 남아 있는 것만 같았다.그리고 그녀는 예상대로 휴가를 냈고 이틀이 지나서야 회사에 다시 나왔다.회사 사람들은 이미 예상이라도 한 듯 문지원이 출근하자 하나같이 말했다.“문 사장님, 결혼 축하드려요.’문지원은 무려 사흘이나 결근했지만 다들 그 사흘 동안 무얼 했는지는 굳이 말 안 해도 짐작이 갔다.분명 부부 생활이 아주 좋았겠지, 아니었으면 일까지 내팽개치고 안 나왔을 리가 없다.문지원은 직원들의 부담스러운 시선에 얼굴을 들 수도 없어 그저 아무렇지 않은 척할 수밖에 없었다.그래도 지난번에 당한 적이 있었던 터라 문지원은 이제 출근 전에 거울 앞에서 꼼꼼히 점검했다.몸에 키스 자국이 드러나지 않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안심하고 회사를 향했다.그렇지 않았다면 그 흔적들을 들켰을 경우 정말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문지원이 예상치 못했던 건 며칠 지나지 않아 결혼을 축하하는 선물이 회사로 배달됐다는 것이다.문지원은 처음에 여울이 보낸 거라고 생각했지만, 물어보니 아니었다.택배 상자의 외관을 살펴봐도 발신자가 적혀 있지 않아 더욱 수상했다.“이거 가져온 사람이 누가 보낸 건지 말했어요?”문지원이 로비 직원에게 물었다.로비 직원은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냥 두고 바로 가버렸어요.”문지원은 뭔가 직감적으로 찜찜한 마음이 들어 그 택배를 챙겼고 사무실에 들어와서야 상자를 열었다.그 안에는 브로치 하나와 축하 카드 한 장이 들어 있었다.문지원은 축하 카드를 집어 들어보니 카드 위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결혼 축하해요.”글씨체는 아주 정갈하고 예뻐 여성의 필체 같았다.그녀는 곧바로 짐작이 갔다.문지원은 그 브로치를 지석훈에게 보여주자 그는 눈빛이 살짝 흔들렸지만 아무 말 없이 브로치
여울은 아직 최주하를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최주하도 쉽게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문지원이 알기로 여울은 마음이 여린 사람이었고 결국 받아들이게 되는 건 시간문제일지도 몰랐다.그녀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친구 일에 깊이 관여하는 것도 괜히 어색하고 조심스러웠다.게다가 얼마 전 지석훈이 슬쩍 귀띔하듯 말했다.“며칠 전에 여울 씨가 병원에 재검진받으러 왔는데 주하가 데리고 왔었어.”그 말을 듣고 문지원은 혀를 끌끌 찼다.평소에 말도 없고 조용하던 여울이 은근히 비밀 많은 타입이었던 모양이었다.그렇게 시간은 순식간에 흘러 어느덧 다음 달 중순이 되었다.지석훈은 아예 와인 농장을 통째로 빌려 며칠에 걸쳐 그곳을 자신이 원하는 모습으로 꾸며놓았다.결혼식을 올릴 장소는 바로 거기였다.그 와인 농장은 웬만한 호텔 못지않게 컸고 내부에는 수년간 숙성된 고급 와인들이 그대로 보관되어 있었고 결혼식 날 손님들이 오면 바로 꺼내어 대접할 수 있을 정도였다.그들은 결혼 소식을 널리 알리진 않았다.이건 문지원이 원한 방식이었다.그녀는 온 세상에 떠들썩하게 알리는 그런 결혼식보다는 가까운 가족과 친구들만 초대해서 조용히 축하받는 걸 선호했다.행복은 굳이 남들에게 증명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니까.그런데 결혼식이 한창일 때 지석훈이 무대 위에서 다시 한번 프러포즈했다.해변에서 했던 프러포즈보다 훨씬 더 진지하고 진중한 분위기였다.“하고 싶은 말이 정말 많지만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어서... 예전엔 내가 사랑인 줄도 모르고 놓쳐버렸던 순간이 많아. 이제는 더 이상 놓치고 싶지 않아. 이렇게 내 곁에 있어 줘서 고마워. 앞으로 남은 인생... 너랑 함께할 수 있어서 정말 행복해.”그의 말이 끝나자 하객들 사이에서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문지원은 무대 위에서 입을 손으로 가리고 눈물을 흘렸다.식이 끝날 무렵, 문지원은 멀리서 검은색 카이엔 SUV가 그녀의 친구 여울을 데리러 오는 걸 보았다.차창이 천천히 내려가자 예상대로 그 안에 앉아 있는 사람은 최주하였다
문지원은 문득 자신이 계획에 철저히 걸려들었다는 생각에 의심의 눈길을 보냈다.“처음부터 계획한 거죠?”“응.”지석훈은 미소 지으며 그녀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사실, 그는 그녀를 향한 마음을 오래전부터 숨겨온 것이었다....해변에서의 프러포즈 이후 문지원에게 찾아온 가장 큰 변화는 손가락에 반짝이는 반지가 생겼다는 점이었다.이 반지는 지석훈이 특별히 맞춤 제작한 것이었다. 그녀는 우연히 그의 휴대폰을 보다가 두 달 전에 이미 주문이 들어가 있었다는 구매 기록을 발견하고는 깜짝 놀랐다. 그렇게 오래전부터 준비해 왔다니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두 사람의 결혼 소식을 접한 지석훈의 부모님은 곧바로 혼인신고부터 하라고 재촉하기 시작했다. 어느 날 문지원은 우연히 지석훈의 어머니가 그를 붙잡고 타이르는 말을 듣게 되었다.“네 아빠랑 난 애초에 너한테 기대도 안 했어. 하루가 멀다고 병원에서 살다시피 하니 너 같은 애한테 누가 시집오겠나 싶었거든. 그런데 다행히 네가 능력 있어서 지원이 같은 좋은 아이를 데려왔으니 얼른 확실히 붙잡아야지. 빨리 혼인신고부터 해. 나중에 그 아이가 너 버리고 떠나버리면 그땐 어디 가서 울어도 소용없어!”문지원은 그 대화에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몰랐다.그런데 신기한 건 지석훈이 워낙 점잖고 진지한 사람이어서 집안 분위기도 매우 조용할 줄 알았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점이었다. 아버지는 이미 퇴직해 한가로운 성격으로 매일 독서나 산책을 즐기는 조용한 스타일이었다. 어머니는 젊었을 때는 커리어 우먼이었고 호탕한 성격으로 남편에게 엄격하면서도 친화력이 강한 사람이었다.두 분 모두 차분한 듯하면서도 내면에 장난기를 숨기고 있는 아들을 낳을 것 같진 않았는데 이게 바로 유전자의 신비인가 싶었다.하지만 어머니가 그렇게 그녀를 좋아해 주는 모습에 문지원도 안심했다. 확실히 시부모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증거였다.한편 문지원의 아버지는 지석훈과 따로 대화를 나눈 이후부터 정확히 무슨 얘기를 했는지는 몰라도 그에 대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