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술까지 거의 두 시간이 남았다.은서우는 다른 사람에게서 임시로 큰 수술을 받은 적이 없었다. 그녀는 1분 1초도 낭비하지 않고 환자의 정보를 확인했다.인명진도 가만히 있지 않고 몸을 약간 앞으로 기울여 진료 기록을 짚으며 말했다.“이 환자는 관상 동맥 질환을 앓고 있고 여러 가지 증상으로 인한 혈관 막힘이 많아 병원에 도착했을 때 이미 기절한 상태였어요. 환자 나이가 50이 넘었기 때문에 수술 할 때 각별히 주의해야 하고...”남자의 목소리는 잔잔하여 마치 조용히 흐르는 시냇물 같았다.은서우의 불안함이 순식간에 가라앉았다.보조 의사가 인명진을 부르러 왔고 사무실 노크 소리가 들렸을 때 그녀는 이미 마음이 진정되었다. 막 일어나려는데 옆에 있던 인명진이 그녀와 함께 일어섰다.“함께 가요. 내가 현장에서 지도하면 서우 씨가 더 안심될 거예요.”인명진이 말하자 은서우는 몇 초 동안 어리둥절했다.곧 노크한 사람이 들어왔고 한 남자 의사였다.은서우를 본 그는 의아해하며 말했다.“은 선생님 원장님을 찾으러 오셨어요? 죄송하지만 지금 응급 수술이 있어서 원장님을 모시고 수술실에 들어가야 해요.”“시간이 촉박하니 바로 가시죠. 원장님. 그렇지 않으면 늦을지도 몰라요.”인명진은 대답하고 옆에 있은 은서우를 바라보았다.은서우는 또 긴장하기 시작했다.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방금 두 사람만 있을 때는 인명진 앞에서 호언장담할 수 있었다고 해서 다른 사람 앞에서도 자신만만한 건 아니었다.그녀는 그 정도로 뻔뻔하지 않았다.그러나 인명진은 전혀 걱정 없이 은서우를 가리키며 말했다.“이 수술은 은 선생이 집도할 거예요.”이 말에 남자 의사는 깜짝 놀랐다.“무슨 그런 농담을 하세요 원장님. 이번 수술은 절대 쉽지 않아요. 경력이 부족한 은 선생님이 감당할 수 있는 케이스가 아니에요.”인명진은 마음을 바꿀 생각이 없었다. “내가 선택한 사람이니 내가 가능하다고 하면 가능한 거예요.”남자 의사는 연신 고개를 가로저었다.인명진을 설득할 수 없자 그
그들은 이미 인명진을 인정했고 심지어 문제가 생겼을 때도 제일 먼저 그를 떠올렸다.인명진이 현장에 있다면 안심할 수 있었다.가는 길에 은서우는 인명진이 시종일관 자기보다 앞서가는 뒷모습을 보며 은근히 주먹을 쥐었다.그녀는 항상 자신이 진보했다고 생각하지만 매번 그를 따라잡기에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발견했다. 앞으로 더 열심히 노력해서 이 기대를 저버리면 안 되었다.곧 은서우는 수술실로 들어가 수술을 시작했다.갑자기 집도의가 바뀌었으니 수술실의 보조 담당 간호사와 다른 의사들이 모두 놀랐다.하지만 수술실은 안정을 유지해야 하고 모두가 얼굴에 소독 마스크를 쓰고 있어서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고 마음속으로만 걱정하고 있었다.인명진은 앉을 곳을 찾았다.은서우는 한 눈 팔지 않고 모든 주의력을 동원해 세심하게 수술에 집중했다. 때때로 옆 사람에게 핀셋이나 보조 도구를 건네주라고 했다.그러나 뜻밖의 일이 일어났다.간호사가 갑자기 소리쳤다. “환자의 혈압이 올라가고 있어요!”은서우는 손을 떨지 않고 기기를 보았는데 정말로 눈에 보이는 속도로 혈압이 올라가고 있었다.아무래도 경험이 부족한 그녀는 약간 당황했다.그때 인명진의 침착한 목소리가 마치 진정제처럼 들려왔다.“당황하지 말고 호흡을 가다듬어요.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대처하라고 내가 가르쳤는지 잘 생각해 봐요.”은서우는 무의식적으로 몇 번 심호흡했다. 그렇다. 그녀는 지금 진정해야 했다.인명진의 말에 그녀는 기억을 떠올렸다.순간 그녀는 눈이 반짝이더니 지금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을 찾아냈다.은서우는 침착하게 주변 간호사에게 자신을 보조하라고 분부했다.한 시간 후, 수술이 끝났다.수술실을 나오기 전 그녀는 먼저 피 묻은 장갑을 벗었다. 마치 마음속의 무거운 돌멩이를 꺼낸 듯 긴 호흡을 토해냈다.“은 선생님 방금은 정말 위험했어요. 그래도 선생님께서 해결방법을 찾았으니 다행이에요. 전에는 저희가 은 선생님을 과소평가했어요.”동료들은 말하면서 쑥스러워 자기 코를 매만졌
환자 가족의 환한 미소를 볼 수 있다면 그건 가치 있는 일이었다.곧장 원장실에 갔지만 그는 자리에 없었다.텅 빈 사무실을 보니 인명진의 기운이 남아 있는 것 같았다. 그녀는 약간 막막했다.그는 어디로 갔을까?그때 누군가 다가와 물었다.“원장님 찾으세요? 방금 옷 갈아입고 나가는 걸 봤어요. 이미 퇴근 시간이니 갈 때도 되셨죠.”은서우는 이미 어두워진 밖을 보고 문득 깨달았지만 이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인명진은 퇴근할 때 늘 그녀에게 말하고 나갔고 매일 차로 그녀를 집으로 데려다줬다. 만약 혼자 퇴근했다면 왜 미리 그녀에게 말하지 않았을까?순간 그녀는 자신의 뺨을 때렸다. 힘이 좀 세서 짝 소리가 울렸다.“은서우, 지금 무슨 생각하는 거야! 원장님이 퇴근하는데 왜 나한테 보고해야 하냐고?”그렇게 말하고 나니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은서우는 생각하지 말라고 스스로를 설득했다.그런데 어질러진 진료실을 치우고 창턱으로 나왔을 때 참지 못하고 중얼거렸다.“그냥 오늘은 집에 가지 말까? 원장님 집 근처에 꽃집이 하나 있는 것 같던데...”지난번 이준서가 그 패랭이꽃을 망가뜨린 후 그녀는 다시 사지 않았다.지금 마침 시간이 있으니 가보는 것도 좋았다.물론 이것은 은서우가 자신을 위한 핑계일 뿐 진정으로 보고 싶은 것은 꽃이 아니라 사람이었다.인명진이 말도 없이 떠난 데다 오늘 좀 이상한 반응을 보이니 은서우는 왠지 신경이 쓰였다.그녀는 마음을 정한 후 더 이상 고민하지 않고 바로 택시를 타고 인명진이 사는 동네로 갔다.초인종을 눌렀을 때 도우미가 문을 열었다.문 앞에서 조금 오래 기다린 은서우는 찬바람에 으스스 추워 지나가는 말로 물었다.“아주머니 왜 이렇게 늦게 나오셨어요?”도우미는 방안을 들여다보고 목소리를 낮추었다.“서우 씨, 왜 지금 오셨어요? 오늘은 그냥 돌아가세요.”“왜요? 원장님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요?”“아니요. 원장님께서 지금은 사람을 별로 만나고 싶지 않을 것 같아서요.”도우미가 다급해진 은서우를 위
도우미는 위층을 쳐다보더니 말했다.“선생님께서 돌아오셔서 잠이 드셨는데 또 악몽을 꾸신 것 같아요. 그러니 지금은...”은서우는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안으로 뛰쳐들어갔다.도우미가 막으려야 막을 수 없었다.그녀는 미친 듯이 2층으로 달려가 침실 문을 여는 순간 가슴이 조였다.평소에 차갑고 냉담하던 사람이 지금 고통스럽게 침대에 누워 눈을 꼭 감고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무슨 꿈을 꾸고 있는지 입술을 꼭 깨물고 있었다.은서우는 침대 앞에 쪼그리고 앉아 남자의 한쪽 손을 잡았다. 놀라울 정도로 차가운 손이었다.“인명진 씨, 내 말 들려요? 나 왔어요. 나 은서우예요. 일어나봐요.”인명진은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그녀는 인내심 있게 잠시 머뭇거리더니 그의 손바닥을 자신의 볼에 대보았다. “당신은 지금 악몽을 꾸고 있을 뿐이에요. 깨어나면 다 괜찮아질 테니 두려워하지 마세요.”은서우는 남자가 무서워하는 걸 눈치챘다.정말 신기했다. 인명진의 경쟁자가 이를 알게 되면 절대 믿지 않을 것이다. 특히 이준서는 절대 거짓이라고 생각할 것이다.사실 은서우가 처음 왔을 때도 도우미가 말한 인명진의 모습을 믿지 않았다.하지만 들어와서 본 이 모든 것들이 인명진에 대한 오랜 인상을 깨뜨렸다.놀라움도 잠시 그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이 자리를 잡았다.“그만 자고 어서 일어나봐요. 아주머니가 당신 아직 밥도 안 먹었다고 하던데 어서 일어나서 우리 같이 밥 먹고 다시 자요. 네?”남자가 깨어나지 않자 그녀는 손을 남자의 얼굴에 얹고 땀을 닦아 주었다.그런데 순간 남자가 눈을 번쩍 떴다.강력한 팔의 힘이 다가오더니 통증과 함께 하늘과 땅이 빙빙 돌았다.그녀가 정신을 차렸을 때, 이미 침대에 눌려 있었고 목에 남자의 손이 더해져 목을 조이고 있었다.“선생님... 내가 누군지 잘 봐요.”호흡을 빼앗긴 은서우는 억지로 버티며 겨우 말을 내뱉었다.그러나 남자는 흔들리지 않았고 그녀는 곧 현기증을 느꼈다.은서우는 이것이 저산소증로 인한 첫 번째 반응이라는
그녀는 일어나다가 실수로 발에 걸려 넘어질 뻔했다.그러자 인명진이 그녀를 안았다.이렇게 되면 은서우는 인명진의 마음이 좀 헷갈렸다. 방금은 그녀를 차갑게 내쫓았는데 왜 이럴까?사실 은서우뿐만 아니라 인명진 자신도 놀랐다.완전히 무의식적으로 나온 행동이었다. 그녀가 곧 넘어질 것으로 보이자 아무 생각 없이 가서 그녀를 받았는데 마치 그의 마음이 입보다 그녀에게 더 가까이 다가간 것 같았다.은서우가 궁금한 것을 묻기도 전에 남자는 그녀를 놓아주고 방금 자신의 행동을 해명하듯 말했다.“어쨌든, 방금 일은 고마웠어요. 택시 잡기 편해요? 내가 데려다줄 수 있어요.”은서우는 마음이 얼음처럼 차가워졌다.“괜찮아요. 나 혼자 갈 수 있어요.”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자기 자신을 비웃었다.제멋대로 생각한 결과가 이거였다.남자는 단지 그녀가 넘어질까 봐 호의로 잡아준 것인데 그녀는 계속 이것저것 생각하고 있었으니... 정말 답이 없었다.은서우는 기대를 품고 왔다가 넋을 잃고 떠났다. 그녀는 혼자라고 생각하며 어둠 속으로 들어가 주변과 하나가 되었다.그러나 뒤에서 누군가가 오랫동안 그녀를 주시하고 있었다. 그녀가 비틀비틀 걷는 것을 보며 하마터면 달려갈 뻔했다.하지만 결국 참았다.도우미가 옆에서 지켜보다가 참지 못하고 말했다. “선생님 지금 시간이 늦었어요. 정 마음이 안 놓이시면 데려다 주세요.”인명진은 고개를 저으며 앞을 바라보았다. “이 아파트 단지는 보안이 좋고 도로도 좋은 편이에요. 교차로에 도착하면 바로 택시를 잡을 수 있을 거예요. 그리고 난 서우 씨 휴대폰 위치를 공유하고 있어요.”이 위치 공유는 다른 목적이 아니라 애초에 소씨 가문 때문에 은서우가 매일 잘 먹지 못하고 잠을 잘 수 없을까 봐 걱정돼서 위치를 공유하자고 제안했었다.이 말을 들은 도우미의 표정이 더욱 일그러졌다. 분명 은서우를 걱정하면서 왜 계속 참고 있는 걸까?이렇게 걱정할 거면 나가 보는 것도 좋을 텐데. 계속 집에서 이런 얘기만 하고 있으니 그는 대체 누구를
이혜성은 궁금한 표정으로 물었다.“너랑 누구야? 인 원장님?”“내 친구 얘기야.”은서우는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거짓말했다.이혜성은 새빨간 거짓말이라는 표정을 지었다.“서우야 제발, 핑계를 댈 거면 다음엔 좀 더 그럴싸한 거로 찾아. 이런 핑계는 이미 오래전에 쓰고 닳았어.”이혜성은 투덜거리더니 다시 디테일을 묻기 시작했다.내용이 궁금할 뿐만 아니라 진심으로 은서우를 돕고 싶었다.은서우는 자신에 대한 인명진의 태도를 모두 그녀에게 말했다.그걸 들은 이혜성은 목청을 돋웠다.“내 생각에는 네 남자친구가... 아, 네 친구의 남자친구에게 말 못 할 사정이 있는 것 같아. 네 친구에게 알리고 싶지 않은 뭔가가 있는 거지.”은서우는 미간을 찌푸렸다.“아니면 왜 네 친구를 그렇게 대하겠어? 정말 관심이 없다면 네 친구가 넘어질 때 급해 하지도 않았어.”은서우는 이혜성의 말을 귀담아들었다.머릿속으로 어제 일을 회상해 보았다. 감정이 북받쳐 오르지 않으니 어제 인명진의 눈빛이 평소와 다르게 쥐 죽은 듯이 고요한 것을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다만 어제의 그녀는 너무 억울하고 괴로워 그 부분을 놓치고 말았다.그녀는 벌떡 일어나 밥도 먹지 않으려 했다.“고마워. 나 급한 일이 생겨서 먼저 갈게.”“밥 먹는 거보다 중요한 일이 어디 있어? 은서우! 돌아와!”은서우는 인명진을 만나러 달려갔다.가슴이 세차게 뛰었다. 지금처럼 치열하고 기대감으로 가득 찬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어제의 억울함과 슬픔은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지고 가슴 가득한 뜨거운 열기만 남은 것 같았다.지금 당장 인명진을 만나고 싶었다.복도 모퉁이에서 은서우가 갑자기 멈춰 섰다. 여기가 원장실로 가는 길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만나려는 사람은 지금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인명진이 앞에 서 있었다.“원장님, 이번 프로젝트는 상대방이 원장님의 체면을 봐서 맡긴 겁니다. 만약 완성한다면 우리 병원의 의료 환경이 크게 개선될 겁니다... 원장님 듣고 계세요?”몇 번이나 불렀지만 응답
그런데 인명진은 식당이 아니라 그녀를 데리고 자기 집으로 갔다. 오늘은 주말이라 도우미가 없었다. 냉장고에 마침 남은 식자재가 있으니 직접 만들어 먹어도 되었다.은서우는 개봉하지 않은 크림 한 병을 꺼내 물었다.“크림 버섯 수프 드실래요?”거실에서 곧 응답이 왔다.남자의 대답을 듣고 나서야 은서우는 안심하고 재료를 준비해 음식을 만들기 시작했다. 요리하는 게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라 금방 한 상 차려졌다. 그러다 보니 은서우는 너무 바빠 인명진에게 하고 싶던 얘기를 까맣게 잊고 있었다. 다행히 인명진이 젓가락을 들고 있는 걸 보고 문득 생각이 났다.“몽유병은 대체 어떻게 된 일이에요? 아주머니 말로는 자주 그런다고 하던데.”은서우는 인명진과 알고 지낸 시간이 짧지 않아 꽤 친하다고 말할 수 있었지만 지금까지 그에게 몽유병이 있다는 것을 들은 적이 없었다.즉, 인명진이 이 일을 계속 숨겼다는 뜻이다. 보아하니, 짧은 시간 숨긴 것이 아니라 이런 상황이 오래 지속된 것 같았다.은서우는 걱정이 태산 같았다. “몽유병은 절대 작은 병이 아니에요. 얼른 의사에게...”“오늘 서우 씨를 부른 것도 그날 밤 일 때문이에요. 이따가 밥 먹고 다시 얘기하죠.”인명진이 덤덤하게 말했다.그러나 은서우는 절대 받아들일 수 없었다.하고 싶은 말이 굴뚝 같은데 이 상황에서 밥을 먹으면 소화가 안 될 것 같았다.다만 인명진의 말투는 덤덤했지만 타협의 여지가 없어 은서우는 잠시 망설이다가 숟가락을 들었다.이번 식사는 그녀의 예상대로 유난히 조용히 먹었다. 억압적인 불안함이 만들어낸 고요함이었고 이러한 고요함이 사람에게 주는 것은 평온함이 아니라 불안함이었다. 그래서 먹기가 힘들었다.은서우는 대충 식사했고 더 이상 먹을 수 없어 눈을 들어보니 인명진은 이미 입을 닦고 있었다. 그도 역시 많이 먹지 않은 것을 보니 아마 그도 입맛이 없는 모양이었다.은서우는 숟가락을 놓자마자 말했다.“이제 말해도 되죠?”남자의 표정을 보니 뚜렷한 거부감이 없자 그녀는 심호
이토록 침착하고 자신만만하며 의술이 뛰어난 인명진을 도저히 노예라는 단어와 연결할 수 없었다.그녀는 입술이 약간 떨렸고 무언가를 말하려고 하는 듯했지만 잠시 말이 막혔다.인명진은 은서우의 놀란 모습에 쓴웃음을 지으며 말을 계속했다.“그 어두운 곳에서 나는 매일 다양한 약물 실험을 받아야 했고 정신과 육체적 고통을 겪었어요. 그 사람들은 나를 도구로 여겼고 나의 생사는 전적으로 그 사람들의 손에 달려 있었어요.”은서우의 마음속에 극심한 통증이 몰려왔다. 그녀는 인명진이 어떤 고난을 겪었는지 상상하기 어려웠다.“그럼 어떻게 빠져나왔어요?”그녀는 마침내 한마디를 짜냈다.인명진의 눈빛은 추억에 잠긴 듯 그윽해졌다.“우연한 기회였어요. 그들이 나를 옮기는 과정에서 실수가 있었고 난 온 힘을 다해 겨우 탈출할 수 있었어요. 그 이후로 나는 이름을 숨기고 열심히 의술을 공부했어요. 내 인생을 다시 장악하기 위해, 그리고 나처럼 운명에 농락당한 더 많은 사람을 돕기 위해서요.”은서우의 눈물이 핑 돌았다. 그녀는 인명진의 처지에 마음이 아프면서도 그의 강인함에 감탄했다.“그럼 그 몽유병도... 그때 일과 관련이 있는 거예요?”인명진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그 약물 실험들은 내 몸에 몇 가지 후유증을 남겼고 몽유병도 그중 하나예요. 다른 사람에게 들킬까 봐, 다시 괴물로 취급받을까 봐 오랫동안 이 사실을 숨겼어요.”은서우는 손을 내밀어 인명진의 손을 살짝 잡았다.“당신은 괴물이 아니에요. 내가 아는 사람 중에서 가장 대단한 사람이에요.”은서우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렸고 눈에는 안쓰러움이 가득했다.그녀는 다른 한 손을 천천히 들어 인명진의 얼굴을 어루만졌다.“그동안 많이 힘들었죠?”인명진은 은서우의 안쓰러움을 느끼고 마음이 복잡해졌다.자신이 겹겹이 쌓아놓은 위장을 누군가 이토록 쉽게 간파하고 그의 마음속 깊은 곳의 연약함을 보아낼 줄은 상상도 못 했다.그는 입을 벌렸지만 목에 뭔가 걸린 듯하더니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다 지나간 일이에요.
하지만 감동보다는 오히려 속이 울렁거렸다. 속이 울렁거리는 느낌에 문지원은 당장 얼굴이 일그러지며 화장실로 달려갔다. 지석훈도 뒤따라 들어오며 물었다.“속이 안 좋아?”“그렇진 않은 것 같아요. 요즘 세 끼 식사도 꽤 규칙적으로 하고 날것 이거나 차갑거나 매운 음식도 먹지 않았는데...”문지원은 배를 움켜쥐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다 문득 한 가지 가능성이 떠올랐다.지석훈도 그녀와 같은 생각을 한 듯 방으로 가서 임신 테스트기를 가져왔다.문지원은 놀라며 물었다.“언제 산 거예요?”지석훈은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만일의 사태에 대비해서.”문지원은 아무 말이 없었다.5분 후, 그녀는 복잡한 얼굴로 다시 나왔다. 한 손은 여전히 배 위에 올려져 있었고 눈에는 믿을 수 없다는 기색이 역력했다.정말 임신한 것이다!그녀와 지석훈이 결혼한 지 겨우 3개월밖에 안 되었는데 이렇게 빨리 임신하다니.지석훈은 오히려 태연해 보였다. 하지만 입가에 감출 수 없는 미소를 보면 그 역시 겉모습처럼 평온하지 않고 흥분을 억누르고 있는 게 분명했다.“정말 임신한 거예요?”문지원은 아직 믿기지 않는 듯 물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이번 달 초에 생리가 끝났기 때문이다.“아마 생리가 끝난 후 며칠 사이일 거야.”지석훈의 목소리는 문지원에게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 당시의 기억을 떠올리니 그녀의 귀는 뜨겁게 달아올랐다. 결국, 그녀는 병원에 가보기로 했다. 임신 테스트기는 가끔 틀릴 수도 있으니 이런 일은 직접 검사를 받아보고 확인해야 마음을 놓을 수 있을 것이다.그리고 그녀는 손에 든 검사지를 보고 완전히 할 말을 잃었다.의사는 마침 지석훈과 알고 지내던 사람이었다.“축하합니다, 지 원장님. 부인께서 임신 2주 차입니다.”“감사합니다.”지석훈은 침착하게 그녀를 부축하며 밖으로 나갔다.병원 진료실을 막 나오자마자 지석훈은 문지원을 품에 안았다.“너무 좋아. 우리 아이가 생겼어.”문지원은 남자가 미세하게 떨리는 모습을 보며 멍하
물론 손에 있는 일을 무턱대고 모두 남에게 맡기는 것은 너무 과한 부담을 주는 일이다.문지원은 비서를 사무실로 불렀다.“올해 25살이죠?”비서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그녀의 나이는 모두가 다 아는데 문지원 회장이 갑자기 이 얘기를 꺼낸다는 것은 혹시 소개팅을 시켜주려는 건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비서는 고마웠지만 거절하며 말했다.“문 사장님, 저는 아직 젊어서 당장은 결혼할 생각이 없습니다.”“전 당신더러 결혼하라고 하는게 아니에요.”문지원은 펜으로 탁자를 두드리며 말했다.“그냥 평소에 잡다한 일들을 맡기고 싶어서요. 확인이 필요한 문서들은 평소에 굳이 내게 제출하지 않아도 돼요.”비서는 그 뜻을 이해했다.이건 곧 그녀에게 승진과 급여 인상을 주려는 것이다. 문지원이 그녀의 의견을 확인한 후 급여를 조금 올려줬고 비서에게 몇 명의 적합한 인재를 추가로 모집해서 예비 인력으로 두라고 지시했다.“평소에 내가 처리하지 못한 일들을 대신 처리해주고 만약 문제가 생기면 그때마다 보고하면 돼요.”비서는 한숨을 쉬며 안도의 표정을 지었다. 그녀 혼자서 이렇게 많은 일을 하지 않아도 되어 다행이었다.일정이 정리되자 문지원은 업무에서 상당 부분 해방되었다.예전에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바쁘게 일하다 보면 퇴근 시간이 되어도 일이 끝나지 않고 긴급 통지가 오면 또 회의를 위해 야근을 해야 했다.이제는 오후 4시 반쯤이면 일을 마치고 퇴근할 수 있게 된 것이다.비서가 몇 명을 더 찾아서 양성해 두었기에 업무가 적절히 분배되어 모두 바빠 죽을 정도가 아니라 적당히 딱 맞는 분량을 처리할 수 있었다.그 덕에 문지원은 지석훈과 함께 결혼 후의 삶을 더욱 즐길 수 있게 되었다.지석훈도 이에 매우 만족해했다.“널 주려고 선물을 챙겨왔어. 들어가서 한번 봐.”그가 집 문 앞에 다가서더니 걸음을 멈췄다.문지원은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안은 어두컴컴했다.“뭐 숨겨놨어요? 아직 불도 켜지 않았네요, 수상하게.”탁! 하며 불이 켜지자 거실의 모든
문지원은 이 주제가 다소 위험하다고 느꼈다. 비록 그녀의 아버지가 그녀에게 물어본 적은 없지만 그렇다고 자신과 배석훈이 결혼한 후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에 대해 말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돼지고기를 먹어보지 않았다고 해도 돼지가 뛰어다니 것을 본 적은 있을 것이다. 문지원은 그러면서도 반쯤 빚어놓은 만두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저,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이에 지석훈의 어머니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너희들도 이제 나이가 들었으니 아이를 가져야지. 평소에 좀 더 노력해야 한단다.”문지원은 잔소리를 듣고 나서 나오니 기운이 다 빠져있었다.시어머니는 문지원에게 정말 잘해주었다. 거의 마음을 쏟아붓는 수준이었다. 비록 문지원의 집안 사정이 좋은 것을 알면서도 혼수 때 오랜 세월 모은 돈으로 집 한 채를 사서 선물해 주었다. 사실 지석훈도 자기 집이 있었지만, 시어머니는 선물하고 싶다고 하셨다. “너희 집도 너희의 것이지만, 이건 내가 어른으로서 선물하는 거란다.”게다가 그 집에는 문지원의 이름도 함께 올려져 있었다.그래서 시어머니의 출산 독촉에도 문지원은 어쩔 수 없이 버텨야만 했다. 다행히도 시어머니는 어린 이들에게 엄격하게 구는 편은 아니었다. 만두를 빚을 때 한 번 그런 말을 했고 또 떠나면서도 지석훈을 불러 몇 마디 잔소리했다. 문지원은 그 모자간의 대화를 듣지 못했다.돌아가는 길에 문지원은 약간 궁금해져 지석훈에게 물었다.“나갈 때 어머니께서 뭐라고 하셨어요?”“정말 알고 싶어?”“네.”그러자 지석훈은 문지원의 머리를 숙이게 한 후 그녀의 흩어진 머리칼을 살며시 넘겨주며 귀 옆에서 낮게 속삭였다.“우리 아이를 빨리 낳으라고 하셨어.”남자의 낮고 진한 목소리는 얼굴을 붉히고 심장을 뛰게 만드는 약보다도 중독성이 강해 문지원의 귀가 금세 붉어지고 말았다.저녁이 되자 지석훈은 몸소 행동으로 보여주기 시작했다. 한 손으로 문지원의 머리를 받치고 이마를 맞대며 낮은 숨소리를 내쉬었다. 문지원은 마치 파도 속에 잠긴 것
그 눈빛 속에서 조용히 터져 나오는 그 소유욕. 마치 옛 시대의 군벌과 그의 부인 같았다. 그리고 사진작가는 우연히 그 장면을 목격한 운 없는 사람이 되어 몰래 촬영을 하고 있었다. 사진작가는 자신의 상상에 자극받아 목소리가 떨렸다.“지석훈 씨, 고개를 들어 카메라를 봐주세요.”지석훈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사진작가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사진작가는 재빨리 셔터를 눌렀다. 그 후에도 그들은 여러 세트의 사진을 찍었고 찍은 사진들은 모두 문지원에게 하나하나 보여주었다. 문지원은 모든 사진에 다 만족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마음에 든 것은 민국 시대 주제의 사진이었다.“대략 며칠 안에 나오나요?” 그녀가 물었다.사진작가는 답했다.“빠르면 이삼 일정도 걸릴 겁니다. 그때 완성된 사진들을 택배로 보내드리겠습니다. 그런데 제가 개인적인 부탁이 하나 있는데 혹시 두 분께서 응해주실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바로 아까 찍은 사진 중 몇 장이 제가 개인적으로 아주 마음에 들어서 사진관 벽에 걸어두고 싶습니다.”문지원은 사진관에 들어올 때 봤던 사진 벽이 생각났다.“그 벽에 걸어두시겠다는 건가요?”“네.”사진작가는 그 벽은 사진관의 특별한 기념 및 홍보 방법의 하나라고 설명했다. 잘 나온 사진들은 사진 주인에게 동의를 구한 뒤 동의하면 벽에 전시한다고 한다..문지원은 옆에 있던 지석훈을 바라봤다. “저는 괜찮은데, 당신은요?” 지석훈도 아무 문제 없다고 했다.“마음대로 하도록 해.”며칠 후 문지원은 사진작가가 보내온 사진을 받아 소중히 간직했다. 하지만 그녀는 몰랐다. 그 사진관 벽에 전시된 사진들이 곧 사람들의 눈에 띄어 사진이 찍혀 인터넷에 올라간 것이다.잘생긴 남성과 아름다운 여인의 조합과 최상의 촬영 기술 덕분에 순식간에 인터넷에서 화제가 되었다.네티즌들은 저마다 아아 소리를 냈고 많은 사람이 댓글을 달았다. “마치 옛 시대의 군벌 부인 같다.”“완전 대박이다.”“3분 안에 그들의 모든 정보를 알고 싶다.” 하지만 이 모
문지원은 약간 마음이 움직였다.하지만 웨딩 촬영은 이미 여러 번 한 적이 있었다. 그때 섬에서 몇 세트 찍었고 그 후 결혼식 현장에서 또 몇 세트 찍어 셀 수 없을 정도였다.게다가 이번 촬영은 개인 예약으로 진행되었는데 이 사진관이 꽤 유명하다고 들었다.물론 사진관 이름에 걸맞게 예약은 거의 하늘의 별 따기라고 한다..이 정도면 지석훈이 얼마나 큰 노력을 들여 예약을 잡았는지 알 수 있었다. 단순히 웨딩사진만 찍는 데 사용하기에는 너무 아까웠다.하지만 문지원 역시 이런 곳에 한 번도 와본 적이 없었기에 무엇을 찍어야 할지 몰랐다.“한번 보세요. 이건 저희가 예전부터 선보였던 스타일들이에요.”사진작가는 친절하게 앨범 한 권을 꺼내 보였다.앨범에는 이전 고객들이 이곳에서 찍은 사진들이 담겨 있었는데 정말 다양한 스타일이 있었고 모두 아름다웠다.이 사진관이 만들어낸 결과물은 정말 최고였다.문지원은 그중에서도 민국 시대 주제의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이렇게 찍을 수 있을까요?”사진작가는 그녀가 가리키는 사진을 한 번 살펴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네, 됩니다. 먼저 메이크업하고 옷을 갈아입으세요. 직원들이 촬영 스튜디오를 설치할게요.”옷은 사진관에서 준비한 것으로 하고 지석훈의 요구에 따라 전부 새 옷이었다.사실 문지원은 소품용 옷을 입는 것에 크게 개의치 않았다. 어쨌든 한 번 입었다가 나중에 벗으면 되는 거고 몸에 달라붙지 않아서 안에 옷을 받쳐 입을 수도 있었다.하지만 지석훈은 직업병이 발동했고 그런 건 용납할 수 없었다.결국, 문지원은 어쩔 수 없이 그의 의견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급히 새 옷을 가져와야 했기 때문에 원래 걸리던 시간에서 15분이 더 추가되었고 메이크업 등 기타 과정도 진행해야 했다.문지원이 모든 준비를 마치고 나왔을 때는 이미 2시간이 지난 후였다.그러나 결과는 확실했다.곧은 치파오가 그녀의 아름다운 몸매를 감쌌고 문지원은 옷자락을 살짝 들어 올렸다. 마치 지난 옛 시대의 그림 속에서 걸어 나온 듯한
결혼 후 문지원은 휴가를 내서 신혼여행을 갈까 고민해 본 적이 있었다.하지만 요즘 지석훈이 거의 계속 병원에 머무르며 집에 돌아오지 않는 것을 떠올리며 본의 아니게 한숨이 나왔다. 비록 이미 익숙해졌긴 했지만 실망을 감추기는 어려웠다.비서도 그녀에게 물었다.“문 사장님, 신혼여행 가고 싶지 않으세요? 제 동창 중 한 명이 며칠 전에 결혼했는데 요즘 여기저기서 신혼여행 정보를 알아보며 준비 중이에요. 신혼여행이 없는 결혼은 반은 실패한 거랑 마찬가지라고 하더라고요.”그 말을 들은 문지원은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제대로 볼 생각조차 들지 않았고 비서는 무언가를 눈치챈 듯했다.“그렇지 않으면... 문 사장님, 지 의사님이 일하시는 곳에 한 번 가보시는 건 어떠세요?”그녀가 머뭇거리며 물었다. 어쨌든 문지원은 요즘 정신이 산만하여 업무에 집중할 기색도 없었다.문지원은 비서의 시선 속에서 정신을 차렸다. 요 며칠 동안 집에 돌아와도 지석훈을 보지 못해 한참 혼란스러워했던 자신을 깨달으며 약간 부끄러워졌다.“그건 나중에 얘기하고 기획서 한 부 복사해 가져다주세요.”점심 무렵, 문지원은 막 일을 끝내고 밥 먹으러 가려던 찰나, 핸드폰에 지석훈의 메시지가 떴다. 같이 밥을 먹자는 메시지에 문지원은 미소를 지었다. 멀리서 이 장면을 본 직원들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며 웃음을 터뜨렸다.문지원은 재빨리 열쇠를 챙기고 회사를 떠났다. 지석훈은 그녀를 새로 오픈한 가게로 데려갔다.식사를 마친 후 문지원은 지석훈을 바라보며 머뭇거리다가 물었다.“병원에 다시 돌아갈 거예요?”“응?”지석훈은 눈썹을 치켜들며 고의적으로 물었다. “내가 돌아가길 바라는 거야?”그 말을 들은 문지원은 순간 당황했다. 사실 그녀는 지석훈이 자신과 좀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주길 바랐는데 이제 막 결혼한 신혼부부임에도 불구하고 각자 업무에만 매달려 밤에야 겨우 함께 잠자리에 들 수 있는 상황이었다.하지만 수줍음이 많은 그녀는 그 마음을 솔직하게 털어놓지 못했다.지석훈은
예전에는 이런 일이 있을 때면 지석훈은 항상 선을 지켰지만 오늘 밤엔 조금 달랐다. 그는 그녀를 침실에서 욕실로 다시 침대로 옮겨가며 몸 곳곳에 뜨거운 입맞춤을 했다.다음 날 아침에 일어났을 때도 문지원은 여전히 몸속 깊이 스며든 감각이 남아 있는 것만 같았다.그리고 그녀는 예상대로 휴가를 냈고 이틀이 지나서야 회사에 다시 나왔다.회사 사람들은 이미 예상이라도 한 듯 문지원이 출근하자 하나같이 말했다.“문 사장님, 결혼 축하드려요.’문지원은 무려 사흘이나 결근했지만 다들 그 사흘 동안 무얼 했는지는 굳이 말 안 해도 짐작이 갔다.분명 부부 생활이 아주 좋았겠지, 아니었으면 일까지 내팽개치고 안 나왔을 리가 없다.문지원은 직원들의 부담스러운 시선에 얼굴을 들 수도 없어 그저 아무렇지 않은 척할 수밖에 없었다.그래도 지난번에 당한 적이 있었던 터라 문지원은 이제 출근 전에 거울 앞에서 꼼꼼히 점검했다.몸에 키스 자국이 드러나지 않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안심하고 회사를 향했다.그렇지 않았다면 그 흔적들을 들켰을 경우 정말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문지원이 예상치 못했던 건 며칠 지나지 않아 결혼을 축하하는 선물이 회사로 배달됐다는 것이다.문지원은 처음에 여울이 보낸 거라고 생각했지만, 물어보니 아니었다.택배 상자의 외관을 살펴봐도 발신자가 적혀 있지 않아 더욱 수상했다.“이거 가져온 사람이 누가 보낸 건지 말했어요?”문지원이 로비 직원에게 물었다.로비 직원은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냥 두고 바로 가버렸어요.”문지원은 뭔가 직감적으로 찜찜한 마음이 들어 그 택배를 챙겼고 사무실에 들어와서야 상자를 열었다.그 안에는 브로치 하나와 축하 카드 한 장이 들어 있었다.문지원은 축하 카드를 집어 들어보니 카드 위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결혼 축하해요.”글씨체는 아주 정갈하고 예뻐 여성의 필체 같았다.그녀는 곧바로 짐작이 갔다.문지원은 그 브로치를 지석훈에게 보여주자 그는 눈빛이 살짝 흔들렸지만 아무 말 없이 브로치
여울은 아직 최주하를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최주하도 쉽게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문지원이 알기로 여울은 마음이 여린 사람이었고 결국 받아들이게 되는 건 시간문제일지도 몰랐다.그녀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친구 일에 깊이 관여하는 것도 괜히 어색하고 조심스러웠다.게다가 얼마 전 지석훈이 슬쩍 귀띔하듯 말했다.“며칠 전에 여울 씨가 병원에 재검진받으러 왔는데 주하가 데리고 왔었어.”그 말을 듣고 문지원은 혀를 끌끌 찼다.평소에 말도 없고 조용하던 여울이 은근히 비밀 많은 타입이었던 모양이었다.그렇게 시간은 순식간에 흘러 어느덧 다음 달 중순이 되었다.지석훈은 아예 와인 농장을 통째로 빌려 며칠에 걸쳐 그곳을 자신이 원하는 모습으로 꾸며놓았다.결혼식을 올릴 장소는 바로 거기였다.그 와인 농장은 웬만한 호텔 못지않게 컸고 내부에는 수년간 숙성된 고급 와인들이 그대로 보관되어 있었고 결혼식 날 손님들이 오면 바로 꺼내어 대접할 수 있을 정도였다.그들은 결혼 소식을 널리 알리진 않았다.이건 문지원이 원한 방식이었다.그녀는 온 세상에 떠들썩하게 알리는 그런 결혼식보다는 가까운 가족과 친구들만 초대해서 조용히 축하받는 걸 선호했다.행복은 굳이 남들에게 증명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니까.그런데 결혼식이 한창일 때 지석훈이 무대 위에서 다시 한번 프러포즈했다.해변에서 했던 프러포즈보다 훨씬 더 진지하고 진중한 분위기였다.“하고 싶은 말이 정말 많지만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어서... 예전엔 내가 사랑인 줄도 모르고 놓쳐버렸던 순간이 많아. 이제는 더 이상 놓치고 싶지 않아. 이렇게 내 곁에 있어 줘서 고마워. 앞으로 남은 인생... 너랑 함께할 수 있어서 정말 행복해.”그의 말이 끝나자 하객들 사이에서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문지원은 무대 위에서 입을 손으로 가리고 눈물을 흘렸다.식이 끝날 무렵, 문지원은 멀리서 검은색 카이엔 SUV가 그녀의 친구 여울을 데리러 오는 걸 보았다.차창이 천천히 내려가자 예상대로 그 안에 앉아 있는 사람은 최주하였다
문지원은 문득 자신이 계획에 철저히 걸려들었다는 생각에 의심의 눈길을 보냈다.“처음부터 계획한 거죠?”“응.”지석훈은 미소 지으며 그녀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사실, 그는 그녀를 향한 마음을 오래전부터 숨겨온 것이었다....해변에서의 프러포즈 이후 문지원에게 찾아온 가장 큰 변화는 손가락에 반짝이는 반지가 생겼다는 점이었다.이 반지는 지석훈이 특별히 맞춤 제작한 것이었다. 그녀는 우연히 그의 휴대폰을 보다가 두 달 전에 이미 주문이 들어가 있었다는 구매 기록을 발견하고는 깜짝 놀랐다. 그렇게 오래전부터 준비해 왔다니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두 사람의 결혼 소식을 접한 지석훈의 부모님은 곧바로 혼인신고부터 하라고 재촉하기 시작했다. 어느 날 문지원은 우연히 지석훈의 어머니가 그를 붙잡고 타이르는 말을 듣게 되었다.“네 아빠랑 난 애초에 너한테 기대도 안 했어. 하루가 멀다고 병원에서 살다시피 하니 너 같은 애한테 누가 시집오겠나 싶었거든. 그런데 다행히 네가 능력 있어서 지원이 같은 좋은 아이를 데려왔으니 얼른 확실히 붙잡아야지. 빨리 혼인신고부터 해. 나중에 그 아이가 너 버리고 떠나버리면 그땐 어디 가서 울어도 소용없어!”문지원은 그 대화에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몰랐다.그런데 신기한 건 지석훈이 워낙 점잖고 진지한 사람이어서 집안 분위기도 매우 조용할 줄 알았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점이었다. 아버지는 이미 퇴직해 한가로운 성격으로 매일 독서나 산책을 즐기는 조용한 스타일이었다. 어머니는 젊었을 때는 커리어 우먼이었고 호탕한 성격으로 남편에게 엄격하면서도 친화력이 강한 사람이었다.두 분 모두 차분한 듯하면서도 내면에 장난기를 숨기고 있는 아들을 낳을 것 같진 않았는데 이게 바로 유전자의 신비인가 싶었다.하지만 어머니가 그렇게 그녀를 좋아해 주는 모습에 문지원도 안심했다. 확실히 시부모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증거였다.한편 문지원의 아버지는 지석훈과 따로 대화를 나눈 이후부터 정확히 무슨 얘기를 했는지는 몰라도 그에 대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