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인명진은 식당이 아니라 그녀를 데리고 자기 집으로 갔다. 오늘은 주말이라 도우미가 없었다. 냉장고에 마침 남은 식자재가 있으니 직접 만들어 먹어도 되었다.은서우는 개봉하지 않은 크림 한 병을 꺼내 물었다.“크림 버섯 수프 드실래요?”거실에서 곧 응답이 왔다.남자의 대답을 듣고 나서야 은서우는 안심하고 재료를 준비해 음식을 만들기 시작했다. 요리하는 게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라 금방 한 상 차려졌다. 그러다 보니 은서우는 너무 바빠 인명진에게 하고 싶던 얘기를 까맣게 잊고 있었다. 다행히 인명진이 젓가락을 들고 있는 걸 보고 문득 생각이 났다.“몽유병은 대체 어떻게 된 일이에요? 아주머니 말로는 자주 그런다고 하던데.”은서우는 인명진과 알고 지낸 시간이 짧지 않아 꽤 친하다고 말할 수 있었지만 지금까지 그에게 몽유병이 있다는 것을 들은 적이 없었다.즉, 인명진이 이 일을 계속 숨겼다는 뜻이다. 보아하니, 짧은 시간 숨긴 것이 아니라 이런 상황이 오래 지속된 것 같았다.은서우는 걱정이 태산 같았다. “몽유병은 절대 작은 병이 아니에요. 얼른 의사에게...”“오늘 서우 씨를 부른 것도 그날 밤 일 때문이에요. 이따가 밥 먹고 다시 얘기하죠.”인명진이 덤덤하게 말했다.그러나 은서우는 절대 받아들일 수 없었다.하고 싶은 말이 굴뚝 같은데 이 상황에서 밥을 먹으면 소화가 안 될 것 같았다.다만 인명진의 말투는 덤덤했지만 타협의 여지가 없어 은서우는 잠시 망설이다가 숟가락을 들었다.이번 식사는 그녀의 예상대로 유난히 조용히 먹었다. 억압적인 불안함이 만들어낸 고요함이었고 이러한 고요함이 사람에게 주는 것은 평온함이 아니라 불안함이었다. 그래서 먹기가 힘들었다.은서우는 대충 식사했고 더 이상 먹을 수 없어 눈을 들어보니 인명진은 이미 입을 닦고 있었다. 그도 역시 많이 먹지 않은 것을 보니 아마 그도 입맛이 없는 모양이었다.은서우는 숟가락을 놓자마자 말했다.“이제 말해도 되죠?”남자의 표정을 보니 뚜렷한 거부감이 없자 그녀는 심호
이토록 침착하고 자신만만하며 의술이 뛰어난 인명진을 도저히 노예라는 단어와 연결할 수 없었다.그녀는 입술이 약간 떨렸고 무언가를 말하려고 하는 듯했지만 잠시 말이 막혔다.인명진은 은서우의 놀란 모습에 쓴웃음을 지으며 말을 계속했다.“그 어두운 곳에서 나는 매일 다양한 약물 실험을 받아야 했고 정신과 육체적 고통을 겪었어요. 그 사람들은 나를 도구로 여겼고 나의 생사는 전적으로 그 사람들의 손에 달려 있었어요.”은서우의 마음속에 극심한 통증이 몰려왔다. 그녀는 인명진이 어떤 고난을 겪었는지 상상하기 어려웠다.“그럼 어떻게 빠져나왔어요?”그녀는 마침내 한마디를 짜냈다.인명진의 눈빛은 추억에 잠긴 듯 그윽해졌다.“우연한 기회였어요. 그들이 나를 옮기는 과정에서 실수가 있었고 난 온 힘을 다해 겨우 탈출할 수 있었어요. 그 이후로 나는 이름을 숨기고 열심히 의술을 공부했어요. 내 인생을 다시 장악하기 위해, 그리고 나처럼 운명에 농락당한 더 많은 사람을 돕기 위해서요.”은서우의 눈물이 핑 돌았다. 그녀는 인명진의 처지에 마음이 아프면서도 그의 강인함에 감탄했다.“그럼 그 몽유병도... 그때 일과 관련이 있는 거예요?”인명진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그 약물 실험들은 내 몸에 몇 가지 후유증을 남겼고 몽유병도 그중 하나예요. 다른 사람에게 들킬까 봐, 다시 괴물로 취급받을까 봐 오랫동안 이 사실을 숨겼어요.”은서우는 손을 내밀어 인명진의 손을 살짝 잡았다.“당신은 괴물이 아니에요. 내가 아는 사람 중에서 가장 대단한 사람이에요.”은서우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렸고 눈에는 안쓰러움이 가득했다.그녀는 다른 한 손을 천천히 들어 인명진의 얼굴을 어루만졌다.“그동안 많이 힘들었죠?”인명진은 은서우의 안쓰러움을 느끼고 마음이 복잡해졌다.자신이 겹겹이 쌓아놓은 위장을 누군가 이토록 쉽게 간파하고 그의 마음속 깊은 곳의 연약함을 보아낼 줄은 상상도 못 했다.그는 입을 벌렸지만 목에 뭔가 걸린 듯하더니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다 지나간 일이에요.
이훈은 열정적이고 명랑한 젊은이로 기계를 능숙하게 다루며 끊임없이 사과했다.“죄송합니다.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이 기계가 오늘 심술을 좀 부리네요. 불편을 끼쳐 죄송합니다.”은서우는 웃으면서 괜찮다고 대답했다.이훈은 고개를 들어 은서우와 인명진을 쳐다보고 칭찬하지 않을 수 없었다.“두 사람 아주 잘 어울리시네요. 데이트 나오신 거예요?”은서우의 얼굴이 살짝 붉어지며 막 설명을 하려는데 인명진이 먼저 나섰다.“고마워요. 오늘 모처럼 시간이 나서 함께 영화 보러 왔어요.”은서우는 약간 의아한 듯 인명진을 쳐다보았지만 속으로 흐뭇해했다.이훈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말을 이었다.“이 영화가 요즘 너무 핫해서 많은 커플이 보러 오세요. 때마침 잘 오셨어요. 좀 더 늦었으면 표를 사기 어려웠어요.”인명진이 예의 바르게 답했다.“그런가요? 다행이네요.”티켓 발권 후 은서우는 팝콘을 파는 코너로 향했다.직원이 활짝 웃으며 그녀를 반겼다.“안녕하세요, 오늘 팝콘 특별 이벤트가 있어요. 팝콘 라지 사이즈를 구매하시면 초콜릿 팝콘이나 스페셜 카라멜 팝콘 작은 사이즈 무료로 드립니다. 이 초콜릿 팝콘은 수입 초콜릿을 사용하여 깊고 진한 맛을 내고요. 카라멜 팝콘의 카라멜도 저희가 정성껏 만들어 달콤하고 맛있어요.”은서우는 약간 설레서 고개를 돌려 인명진에게 물었다.“어때요? 라지 사이즈도 다 먹을 수 있을 것 같은데.”인명진은 초롱초롱한 그녀의 눈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좋아요. 서우 씨 말대로 해요.”은서우는 클래식 크림 팝콘 라지를 선택하고 무료로 초콜릿 팝콘을 받았다.그녀는 팝콘 통을 껴안고 아이처럼 흐뭇하게 웃었다.그리고 크림 팝콘을 집어 인명진의 입에 건넸다.“먹어봐요. 방금 나온 거라 아주 맛있어요.”인명진은 고개를 약간 숙이고 팝콘을 살짝 물고 시선은 내내 은서우의 얼굴에 머물렀다.“네. 맛있네요.”두 사람은 자리를 찾아 앉았고 은서우는 서로 가져가기 편하도록 팝콘을 두 사람 사이에 놓았다.영화가 시작되자 은서우는
인명진은 정신을 차리고 은서우의 기대에 찬 눈빛을 바라보며 주저 없이 대답했다.“그래요. 서우 씨 좋은 대로 해요.”두 사람은 방 탈출 가게에 도착했고 프런트 데스크 직원이 그들을 열정적으로 맞이했다.은서우가 궁금해서 물었다.“안녕하세요, 방 탈출을 하고 싶은데 어떤 테마가 있나요?”직원이 웃으며 소개했다.“안녕하세요. 공포 테마의 ‘미드나이트', 모험 테마의 ‘잃어버린 무덤' 그리고 추리 테마의‘미스티 리조트'가 있는데 난이도와 스타일이 다릅니다.”인명진이 은서우를 바라보자 그녀는 생각하다가 말했다.“우리 잃어버린 무덤 시도해볼까요? 뭔가 신비로운 것 같아요.”직원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인기 있는 테마이지만 난이도가 좀 높은데 괜찮으시겠어요?”그러자 인명진이 말했다.“네. 이걸로 하죠.”“네. 이 테마의 가격은 인당 3만 원이고요. 정해진 시간 내에 통과하신다면 저희 가게에서 작은 선물을 드립니다.”은서우는 눈을 반짝였다.“와, 선물도 있대요. 우리 힘내요!”말을 마친 후 그녀가 돈을 내려고 하자 인명진이 먼저 결제했다. 은서우는 쑥스러워하며 말했다.“왜 계속 명진 씨가 돈을 내요?”“서우 씨와 나왔으니 당연히 내가 내야죠.”인명진이 웃으며 말했다.돈을 지불한 후 직원이 그들에게 팔찌를 하나씩 주며 말했다. “이건 입장 팔찌예요. 간단한 알림 기능이 있고 두 분이 게임 시간을 기록하는 데 사용할 수 있어요. 이쪽으로 따라오시면 제가 게임규칙과 주의사항부터 간단히 안내해 드릴게요.”직원의 자세한 설명을 들은 후, 두 사람은 ‘잃어버린 무덤' 밀실 입구에 도착했다.밀실에 들어간 후에야 그들은 그 안의 수수께끼가 생각보다 훨씬 복잡하다는 것을 발견했다.처음에 은서우는 단서를 찾기 위해 열정적으로 돌아다녔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복잡한 기관에 갇혔다.그녀가 다급하게 얼굴을 찌푸리자 인명진은 그녀의 어깨를 토닥이며 위로했다.“당황하지 말고 우리 같이 곰곰이 생각해 봐요.”인명진은 침착하게 방 안을 서성거리다가 갑자기
“조심해요.”그가 작은 소리로 말했다. 그 목소리에는 쉽게 알아차릴 수 없는 떨림이 담겨 있었다.은서우는 그의 품에 기대어 말했다.“고마워요.”그들은 통로를 따라 조심스럽게 걸어갔고 오래된 책과 이상한 기구들로 가득한 방에 도착했다.은서우는 호기심에 먼지가 가득한 책을 집어 들었다. 막 펼치자마자 가벼운 기관 회전 소리가 들렸고 방 중앙의 바닥에는 돌 테이블이 천천히 떠올랐다. 테이블 위에는 복잡한 퍼즐 상자가 놓여 있었다.은서우는 퍼즐 상자를 주의 깊게 연구한 결과 퍼즐 조각마다 다른 기호와 패턴이 새겨져 있음을 발견했다.그녀는 몇 조각을 맞추려고 시도했지만 전혀 갈피를 잡지 못했다.인명진은 방 주변에서 다른 단서를 찾았고 한구석에서 오래된 벽화를 발견했다.벽화에는 몇몇 인물들이 비슷한 상자를 둘러싸고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으며 마치 어떤 의식을 거행하는 것 같았다.인명진은 벽화 속 인물의 손짓과 표정을 주의 깊게 관찰하다가 갑자기 아이디어가 떠올랐고 은서우에게 ‘벽화 속 인물의 손짓 순서에 따라 퍼즐을 맞춰보세요'라고 말했다.은서우가 그의 말에 따라 해보니, 과연 퍼즐 상자가 점차 반응하기 시작했다. 마지막 퍼즐 조각이 제자리에 놓이자 상자가 자동으로 열렸고 그 안에는 은은한 빛을 발하는 열쇠가 드러났다.은서우는 열쇠를 쥐고 흥분해서 말했다.“이게 바로 마지막 관문을 통과하는 도구 같아요.”인명진은 고개를 끄덕이고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띠었다.“네. 우리 곧 성공하겠어요.”그들은 계속 밀실을 오가며 서로 점점 더 잘 맞는 호흡을 통해 몇 가지 교묘하게 설계된 기관을 순조롭게 해독했다.적외선 감지 광선이 가득한 통로에서 인명진은 은서우의 허리를 부드럽게 감싸고 매우 우아한 자세로 위험한 빛을 피했다.은서우는 그의 힘찬 팔에서 전해지는 따뜻함을 느끼며 그에 대한 신뢰와 의지로 가득 찼다.마침내 그들은 밀실 출입문 앞에 도착했다.문에 특수한 자물쇠 구멍이 하나 있었다.은서우는 은은한 빛을 발하는 열쇠를 그 안에 꽂고 살짝 돌리
여자의 곱지 않은 시선을 눈치챈 은서우는 무의식적으로 인명진에게 기대어 섰고 인명진은 자연스럽게 은서우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그러자 여자는 질투가 치솟았고 간신히 웃어 보이며 은서우를 보며 물었다.“이분은 누구시죠?”인명진이 답했다.“이쪽은 은서우라고 내... 친구예요.”말을 마친 그는 은서우를 곁눈질로 바라보았고 눈빛에는 남들이 알아채기 힘든 부드러움이 가득했다.여자는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친구라고요? 평소에 그렇게 바쁘신 선생님께서 간만에 나와 휴식하면서도 절 안 부르시다니. 난 우리가 가까운 사이인 줄 알았어요. 제가 전에 진료를 받을 때 많이 챙겨 주셨잖아요.”은서우는 그녀의 비꼬는 말을 들으며 마음이 좀 불편했지만 예의 바르게 웃으며 말했다.“안녕하세요. 원장님 환자분이니 이젠 완치하셨겠죠? 계속 건강하길 바랄게요.”여자는 은서우를 흘겨보고는 그녀의 축복을 전혀 무시한 채 인명진에게 다시 말했다.“선생님 저 요즘 몸이 자꾸 안 좋은 것 같아요. 자세히 검사해주시면 안 돼요?”말하면서 그녀는 허약한 척 기침을 두 번 했다.인명진은 허탈한 한숨을 내쉬었다.“정말 몸이 안 좋으면 병원에 가서 접수하고 종합검진을 받는 게 좋겠어요. 저는 지금 퇴근해서 진단하기 어려워요.”여자는 인명진의 태도가 단호해서 더 이상 매달리기 힘들지만 이렇게 헤어지는 것이 아까웠다.그녀의 시선이 갑자기 두 사람이 차고 있는 커플 팔찌에 꽂히자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세상에, 이 팔찌 정말 예쁘네요. 커플 팔찌죠? 선생님은 언제부터 이런 작은 액세서리를 착용하는 걸 좋아하게 됐어요?”인명진은 약간 멍해 있다가 무의식적으로 은서우의 손을 꼭 잡고 담담하게 말했다.“방금 방 탈출한 기념으로 받은 상품이에요. 기념으로 착용했어요.”여자의 입가에 조롱하는 듯한 미소가 번졌다.“기념이요? 선생님, 여자에게 너무 쉽게 현혹되지 마세요. 선생님께 접근하는 다른 목적이 있을지 누가 알겠어요?”이 말을 들은 은서우는 결국 참지 못하고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
그녀의 눈시울은 점점 붉어졌고 눈물은 그 안에서 고집스럽게 맴돌았다.은서우는 그녀가 고통스럽게 몸부림치는 모습을 보고 마음이 약해져 인명진을 말리려 했지만 인명진이 그녀를 살짝 끌어당겨 뒤로 보호했다.그의 눈빛은 여전히 차가웠고 말투는 전보다 조금 더 불쾌해졌다. “오늘은 여기까지야. 앞으로 다시는 우리를 방해하지 마.”여자는 마치 이 직설적이고 냉혹한 말에 급소를 맞은 듯 몸을 세게 흔들며 마침내 눈물이 왈칵 쏟아졌고 땅에 굵직하게 떨어졌다.그녀는 입을 벌리고 목구멍에서 으스러지고 울먹이는 소리를 냈다.“난... 난 단지...”그러나 뒷말은 결국 거센 감정에 휩쓸려 공기 속으로 사라졌다.인명진은 얼굴을 약간 찡그리며 더 이상 그녀를 상대하지 않고 은서우의 손을 잡고 떠나려 했다.그때 여자가 갑자기 소리쳤다.“인명진, 내가 당신을 오랫동안 좋아했어요! 처음 나에게 다정하게 말하고 인내심을 갖고 병세를 물었을 때부터 나는 당신에게 빠졌어요. 당신 옆에 설 수 있는 날을 기대하며 열심히 재활 치료에 임했어요. 근데 왜 저 여자가 오자마자 모든 것이 변했냐고요!”인명진은 발걸음을 멈추고 뒤돌아보지 않고 담담하게 말했다.“그쪽은 그저 내게 환자일 뿐 다른 감정은 전혀 없어. 게다가 난 이미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 이렇게 매달리는 건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아.”여자는 절망적으로 두 눈을 감고 눈물을 흘렸다.그녀가 다시 눈을 떴을 때, 인명진과 은서우는 이미 몇 걸음 더 멀리 걸어갔다.그녀는 힘없이 몸을 웅크리고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안고 어깨를 심하게 떨었다. 주변의 소란스러움은 그녀와 무관한 것 같았다.한참 후, 그녀는 천천히 일어나 소매로 얼굴을 쓱쓱 닦았다. 눈빛에는 고통이 남아 있었지만 조금 더 확고해졌다.그녀는 이를 악물고 뒤돌아 북적거리는 거리 깊숙이 걸어갔다.은서우는 쓸쓸하고 단호한 여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문득 가슴이 철렁 내려앉고 걱정이 치밀어 올랐다.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인명진의 손을 뿌리치고 여자를 쫓아가려고
은서우는 상황을 보고 긴장된 마음이 조금 가라앉았다. 조심스럽게 다가가 그녀의 옆에 천천히 쪼그리고 앉아 조용히 말했다. “이봐요. 괜찮아요?”여자는 소리를 듣고 몸이 갑자기 굳어지며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얼굴에는 눈물 자국이 가득하고 두 눈은 익은 복숭아처럼 붉게 부어올랐다.은서우와 인명진을 보자마자 처음에는 어리둥절해 하다가 이내 고개를 돌리고 울먹이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여긴 왜 왔어요? 나 우는 거 구경하러 왔어요?”은서우는 재빨리 한 걸음 다가가 여자를 달래려 했지만 그녀가 갑자기 인명진을 빤히 쳐다보며 소리쳤다.“선생님은 좀 멀리 꺼져줄래요? 난 지금 선생님을 보면 너무 짜증 나요. 지금은 서우 씨와 단둘이 얘기하고 싶으니 멀리 가주세요. 멀면 멀수록 좋으니 제발 내 눈앞에서 얼쩡거리지 마세요!”인명진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 마음이 불편했지만 여자의 감정이 이렇게 격앙된 것을 보고 지금은 더 이상 그녀를 자극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은서우를 보고 안심시키는 눈빛을 보냈다.그리고 아무 말 없이 돌아서서 공원 깊숙한 곳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마침내 무성한 녹색 식물 속으로 완전히 모습을 숨겼다.멀리서 보면 희미한 윤곽만 남아 완전히 여자의 시야에서 벗어났다.인명진이 멀어지고 나서야 여자는 마치 바람이 빠진 공처럼 몸이 느슨해졌다. 그녀는 손을 들어 얼굴의 눈물을 닦았지만 멈추지 않는 흐느낌은 여전히 그녀의 어깨를 가늘게 떨게 했다.은서우는 상황을 보고 여자의 옆에 살금살금 앉아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건네며 나지막이 말했다. “얼굴 좀 닦아요. 너무 울어서 몸이라도 상하면 어떡해요?”여자는 손수건을 받아 몇 번 마구 닦고 코를 들이마시고는 고개를 돌려 은서우를 바라보았다. 그 눈빛에는 복잡한 감정이 가득했다.“내가 당신에 비해 대체 뭐가 부족할까요? 난 선생님을 처음 봤을 때부터 마음속에 그 사람으로 가득 찼어요. 근데 선생님은 왜 나를 보지 않는 걸까요?”은서우는 한숨을 내쉬고 그녀를 진지하게 바라보았다. “감정이라
하지만 감동보다는 오히려 속이 울렁거렸다. 속이 울렁거리는 느낌에 문지원은 당장 얼굴이 일그러지며 화장실로 달려갔다. 지석훈도 뒤따라 들어오며 물었다.“속이 안 좋아?”“그렇진 않은 것 같아요. 요즘 세 끼 식사도 꽤 규칙적으로 하고 날것 이거나 차갑거나 매운 음식도 먹지 않았는데...”문지원은 배를 움켜쥐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다 문득 한 가지 가능성이 떠올랐다.지석훈도 그녀와 같은 생각을 한 듯 방으로 가서 임신 테스트기를 가져왔다.문지원은 놀라며 물었다.“언제 산 거예요?”지석훈은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만일의 사태에 대비해서.”문지원은 아무 말이 없었다.5분 후, 그녀는 복잡한 얼굴로 다시 나왔다. 한 손은 여전히 배 위에 올려져 있었고 눈에는 믿을 수 없다는 기색이 역력했다.정말 임신한 것이다!그녀와 지석훈이 결혼한 지 겨우 3개월밖에 안 되었는데 이렇게 빨리 임신하다니.지석훈은 오히려 태연해 보였다. 하지만 입가에 감출 수 없는 미소를 보면 그 역시 겉모습처럼 평온하지 않고 흥분을 억누르고 있는 게 분명했다.“정말 임신한 거예요?”문지원은 아직 믿기지 않는 듯 물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이번 달 초에 생리가 끝났기 때문이다.“아마 생리가 끝난 후 며칠 사이일 거야.”지석훈의 목소리는 문지원에게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 당시의 기억을 떠올리니 그녀의 귀는 뜨겁게 달아올랐다. 결국, 그녀는 병원에 가보기로 했다. 임신 테스트기는 가끔 틀릴 수도 있으니 이런 일은 직접 검사를 받아보고 확인해야 마음을 놓을 수 있을 것이다.그리고 그녀는 손에 든 검사지를 보고 완전히 할 말을 잃었다.의사는 마침 지석훈과 알고 지내던 사람이었다.“축하합니다, 지 원장님. 부인께서 임신 2주 차입니다.”“감사합니다.”지석훈은 침착하게 그녀를 부축하며 밖으로 나갔다.병원 진료실을 막 나오자마자 지석훈은 문지원을 품에 안았다.“너무 좋아. 우리 아이가 생겼어.”문지원은 남자가 미세하게 떨리는 모습을 보며 멍하
물론 손에 있는 일을 무턱대고 모두 남에게 맡기는 것은 너무 과한 부담을 주는 일이다.문지원은 비서를 사무실로 불렀다.“올해 25살이죠?”비서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그녀의 나이는 모두가 다 아는데 문지원 회장이 갑자기 이 얘기를 꺼낸다는 것은 혹시 소개팅을 시켜주려는 건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비서는 고마웠지만 거절하며 말했다.“문 사장님, 저는 아직 젊어서 당장은 결혼할 생각이 없습니다.”“전 당신더러 결혼하라고 하는게 아니에요.”문지원은 펜으로 탁자를 두드리며 말했다.“그냥 평소에 잡다한 일들을 맡기고 싶어서요. 확인이 필요한 문서들은 평소에 굳이 내게 제출하지 않아도 돼요.”비서는 그 뜻을 이해했다.이건 곧 그녀에게 승진과 급여 인상을 주려는 것이다. 문지원이 그녀의 의견을 확인한 후 급여를 조금 올려줬고 비서에게 몇 명의 적합한 인재를 추가로 모집해서 예비 인력으로 두라고 지시했다.“평소에 내가 처리하지 못한 일들을 대신 처리해주고 만약 문제가 생기면 그때마다 보고하면 돼요.”비서는 한숨을 쉬며 안도의 표정을 지었다. 그녀 혼자서 이렇게 많은 일을 하지 않아도 되어 다행이었다.일정이 정리되자 문지원은 업무에서 상당 부분 해방되었다.예전에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바쁘게 일하다 보면 퇴근 시간이 되어도 일이 끝나지 않고 긴급 통지가 오면 또 회의를 위해 야근을 해야 했다.이제는 오후 4시 반쯤이면 일을 마치고 퇴근할 수 있게 된 것이다.비서가 몇 명을 더 찾아서 양성해 두었기에 업무가 적절히 분배되어 모두 바빠 죽을 정도가 아니라 적당히 딱 맞는 분량을 처리할 수 있었다.그 덕에 문지원은 지석훈과 함께 결혼 후의 삶을 더욱 즐길 수 있게 되었다.지석훈도 이에 매우 만족해했다.“널 주려고 선물을 챙겨왔어. 들어가서 한번 봐.”그가 집 문 앞에 다가서더니 걸음을 멈췄다.문지원은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안은 어두컴컴했다.“뭐 숨겨놨어요? 아직 불도 켜지 않았네요, 수상하게.”탁! 하며 불이 켜지자 거실의 모든
문지원은 이 주제가 다소 위험하다고 느꼈다. 비록 그녀의 아버지가 그녀에게 물어본 적은 없지만 그렇다고 자신과 배석훈이 결혼한 후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에 대해 말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돼지고기를 먹어보지 않았다고 해도 돼지가 뛰어다니 것을 본 적은 있을 것이다. 문지원은 그러면서도 반쯤 빚어놓은 만두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저,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이에 지석훈의 어머니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너희들도 이제 나이가 들었으니 아이를 가져야지. 평소에 좀 더 노력해야 한단다.”문지원은 잔소리를 듣고 나서 나오니 기운이 다 빠져있었다.시어머니는 문지원에게 정말 잘해주었다. 거의 마음을 쏟아붓는 수준이었다. 비록 문지원의 집안 사정이 좋은 것을 알면서도 혼수 때 오랜 세월 모은 돈으로 집 한 채를 사서 선물해 주었다. 사실 지석훈도 자기 집이 있었지만, 시어머니는 선물하고 싶다고 하셨다. “너희 집도 너희의 것이지만, 이건 내가 어른으로서 선물하는 거란다.”게다가 그 집에는 문지원의 이름도 함께 올려져 있었다.그래서 시어머니의 출산 독촉에도 문지원은 어쩔 수 없이 버텨야만 했다. 다행히도 시어머니는 어린 이들에게 엄격하게 구는 편은 아니었다. 만두를 빚을 때 한 번 그런 말을 했고 또 떠나면서도 지석훈을 불러 몇 마디 잔소리했다. 문지원은 그 모자간의 대화를 듣지 못했다.돌아가는 길에 문지원은 약간 궁금해져 지석훈에게 물었다.“나갈 때 어머니께서 뭐라고 하셨어요?”“정말 알고 싶어?”“네.”그러자 지석훈은 문지원의 머리를 숙이게 한 후 그녀의 흩어진 머리칼을 살며시 넘겨주며 귀 옆에서 낮게 속삭였다.“우리 아이를 빨리 낳으라고 하셨어.”남자의 낮고 진한 목소리는 얼굴을 붉히고 심장을 뛰게 만드는 약보다도 중독성이 강해 문지원의 귀가 금세 붉어지고 말았다.저녁이 되자 지석훈은 몸소 행동으로 보여주기 시작했다. 한 손으로 문지원의 머리를 받치고 이마를 맞대며 낮은 숨소리를 내쉬었다. 문지원은 마치 파도 속에 잠긴 것
그 눈빛 속에서 조용히 터져 나오는 그 소유욕. 마치 옛 시대의 군벌과 그의 부인 같았다. 그리고 사진작가는 우연히 그 장면을 목격한 운 없는 사람이 되어 몰래 촬영을 하고 있었다. 사진작가는 자신의 상상에 자극받아 목소리가 떨렸다.“지석훈 씨, 고개를 들어 카메라를 봐주세요.”지석훈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사진작가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사진작가는 재빨리 셔터를 눌렀다. 그 후에도 그들은 여러 세트의 사진을 찍었고 찍은 사진들은 모두 문지원에게 하나하나 보여주었다. 문지원은 모든 사진에 다 만족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마음에 든 것은 민국 시대 주제의 사진이었다.“대략 며칠 안에 나오나요?” 그녀가 물었다.사진작가는 답했다.“빠르면 이삼 일정도 걸릴 겁니다. 그때 완성된 사진들을 택배로 보내드리겠습니다. 그런데 제가 개인적인 부탁이 하나 있는데 혹시 두 분께서 응해주실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바로 아까 찍은 사진 중 몇 장이 제가 개인적으로 아주 마음에 들어서 사진관 벽에 걸어두고 싶습니다.”문지원은 사진관에 들어올 때 봤던 사진 벽이 생각났다.“그 벽에 걸어두시겠다는 건가요?”“네.”사진작가는 그 벽은 사진관의 특별한 기념 및 홍보 방법의 하나라고 설명했다. 잘 나온 사진들은 사진 주인에게 동의를 구한 뒤 동의하면 벽에 전시한다고 한다..문지원은 옆에 있던 지석훈을 바라봤다. “저는 괜찮은데, 당신은요?” 지석훈도 아무 문제 없다고 했다.“마음대로 하도록 해.”며칠 후 문지원은 사진작가가 보내온 사진을 받아 소중히 간직했다. 하지만 그녀는 몰랐다. 그 사진관 벽에 전시된 사진들이 곧 사람들의 눈에 띄어 사진이 찍혀 인터넷에 올라간 것이다.잘생긴 남성과 아름다운 여인의 조합과 최상의 촬영 기술 덕분에 순식간에 인터넷에서 화제가 되었다.네티즌들은 저마다 아아 소리를 냈고 많은 사람이 댓글을 달았다. “마치 옛 시대의 군벌 부인 같다.”“완전 대박이다.”“3분 안에 그들의 모든 정보를 알고 싶다.” 하지만 이 모
문지원은 약간 마음이 움직였다.하지만 웨딩 촬영은 이미 여러 번 한 적이 있었다. 그때 섬에서 몇 세트 찍었고 그 후 결혼식 현장에서 또 몇 세트 찍어 셀 수 없을 정도였다.게다가 이번 촬영은 개인 예약으로 진행되었는데 이 사진관이 꽤 유명하다고 들었다.물론 사진관 이름에 걸맞게 예약은 거의 하늘의 별 따기라고 한다..이 정도면 지석훈이 얼마나 큰 노력을 들여 예약을 잡았는지 알 수 있었다. 단순히 웨딩사진만 찍는 데 사용하기에는 너무 아까웠다.하지만 문지원 역시 이런 곳에 한 번도 와본 적이 없었기에 무엇을 찍어야 할지 몰랐다.“한번 보세요. 이건 저희가 예전부터 선보였던 스타일들이에요.”사진작가는 친절하게 앨범 한 권을 꺼내 보였다.앨범에는 이전 고객들이 이곳에서 찍은 사진들이 담겨 있었는데 정말 다양한 스타일이 있었고 모두 아름다웠다.이 사진관이 만들어낸 결과물은 정말 최고였다.문지원은 그중에서도 민국 시대 주제의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이렇게 찍을 수 있을까요?”사진작가는 그녀가 가리키는 사진을 한 번 살펴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네, 됩니다. 먼저 메이크업하고 옷을 갈아입으세요. 직원들이 촬영 스튜디오를 설치할게요.”옷은 사진관에서 준비한 것으로 하고 지석훈의 요구에 따라 전부 새 옷이었다.사실 문지원은 소품용 옷을 입는 것에 크게 개의치 않았다. 어쨌든 한 번 입었다가 나중에 벗으면 되는 거고 몸에 달라붙지 않아서 안에 옷을 받쳐 입을 수도 있었다.하지만 지석훈은 직업병이 발동했고 그런 건 용납할 수 없었다.결국, 문지원은 어쩔 수 없이 그의 의견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급히 새 옷을 가져와야 했기 때문에 원래 걸리던 시간에서 15분이 더 추가되었고 메이크업 등 기타 과정도 진행해야 했다.문지원이 모든 준비를 마치고 나왔을 때는 이미 2시간이 지난 후였다.그러나 결과는 확실했다.곧은 치파오가 그녀의 아름다운 몸매를 감쌌고 문지원은 옷자락을 살짝 들어 올렸다. 마치 지난 옛 시대의 그림 속에서 걸어 나온 듯한
결혼 후 문지원은 휴가를 내서 신혼여행을 갈까 고민해 본 적이 있었다.하지만 요즘 지석훈이 거의 계속 병원에 머무르며 집에 돌아오지 않는 것을 떠올리며 본의 아니게 한숨이 나왔다. 비록 이미 익숙해졌긴 했지만 실망을 감추기는 어려웠다.비서도 그녀에게 물었다.“문 사장님, 신혼여행 가고 싶지 않으세요? 제 동창 중 한 명이 며칠 전에 결혼했는데 요즘 여기저기서 신혼여행 정보를 알아보며 준비 중이에요. 신혼여행이 없는 결혼은 반은 실패한 거랑 마찬가지라고 하더라고요.”그 말을 들은 문지원은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제대로 볼 생각조차 들지 않았고 비서는 무언가를 눈치챈 듯했다.“그렇지 않으면... 문 사장님, 지 의사님이 일하시는 곳에 한 번 가보시는 건 어떠세요?”그녀가 머뭇거리며 물었다. 어쨌든 문지원은 요즘 정신이 산만하여 업무에 집중할 기색도 없었다.문지원은 비서의 시선 속에서 정신을 차렸다. 요 며칠 동안 집에 돌아와도 지석훈을 보지 못해 한참 혼란스러워했던 자신을 깨달으며 약간 부끄러워졌다.“그건 나중에 얘기하고 기획서 한 부 복사해 가져다주세요.”점심 무렵, 문지원은 막 일을 끝내고 밥 먹으러 가려던 찰나, 핸드폰에 지석훈의 메시지가 떴다. 같이 밥을 먹자는 메시지에 문지원은 미소를 지었다. 멀리서 이 장면을 본 직원들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며 웃음을 터뜨렸다.문지원은 재빨리 열쇠를 챙기고 회사를 떠났다. 지석훈은 그녀를 새로 오픈한 가게로 데려갔다.식사를 마친 후 문지원은 지석훈을 바라보며 머뭇거리다가 물었다.“병원에 다시 돌아갈 거예요?”“응?”지석훈은 눈썹을 치켜들며 고의적으로 물었다. “내가 돌아가길 바라는 거야?”그 말을 들은 문지원은 순간 당황했다. 사실 그녀는 지석훈이 자신과 좀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주길 바랐는데 이제 막 결혼한 신혼부부임에도 불구하고 각자 업무에만 매달려 밤에야 겨우 함께 잠자리에 들 수 있는 상황이었다.하지만 수줍음이 많은 그녀는 그 마음을 솔직하게 털어놓지 못했다.지석훈은
예전에는 이런 일이 있을 때면 지석훈은 항상 선을 지켰지만 오늘 밤엔 조금 달랐다. 그는 그녀를 침실에서 욕실로 다시 침대로 옮겨가며 몸 곳곳에 뜨거운 입맞춤을 했다.다음 날 아침에 일어났을 때도 문지원은 여전히 몸속 깊이 스며든 감각이 남아 있는 것만 같았다.그리고 그녀는 예상대로 휴가를 냈고 이틀이 지나서야 회사에 다시 나왔다.회사 사람들은 이미 예상이라도 한 듯 문지원이 출근하자 하나같이 말했다.“문 사장님, 결혼 축하드려요.’문지원은 무려 사흘이나 결근했지만 다들 그 사흘 동안 무얼 했는지는 굳이 말 안 해도 짐작이 갔다.분명 부부 생활이 아주 좋았겠지, 아니었으면 일까지 내팽개치고 안 나왔을 리가 없다.문지원은 직원들의 부담스러운 시선에 얼굴을 들 수도 없어 그저 아무렇지 않은 척할 수밖에 없었다.그래도 지난번에 당한 적이 있었던 터라 문지원은 이제 출근 전에 거울 앞에서 꼼꼼히 점검했다.몸에 키스 자국이 드러나지 않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안심하고 회사를 향했다.그렇지 않았다면 그 흔적들을 들켰을 경우 정말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문지원이 예상치 못했던 건 며칠 지나지 않아 결혼을 축하하는 선물이 회사로 배달됐다는 것이다.문지원은 처음에 여울이 보낸 거라고 생각했지만, 물어보니 아니었다.택배 상자의 외관을 살펴봐도 발신자가 적혀 있지 않아 더욱 수상했다.“이거 가져온 사람이 누가 보낸 건지 말했어요?”문지원이 로비 직원에게 물었다.로비 직원은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냥 두고 바로 가버렸어요.”문지원은 뭔가 직감적으로 찜찜한 마음이 들어 그 택배를 챙겼고 사무실에 들어와서야 상자를 열었다.그 안에는 브로치 하나와 축하 카드 한 장이 들어 있었다.문지원은 축하 카드를 집어 들어보니 카드 위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결혼 축하해요.”글씨체는 아주 정갈하고 예뻐 여성의 필체 같았다.그녀는 곧바로 짐작이 갔다.문지원은 그 브로치를 지석훈에게 보여주자 그는 눈빛이 살짝 흔들렸지만 아무 말 없이 브로치
여울은 아직 최주하를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최주하도 쉽게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문지원이 알기로 여울은 마음이 여린 사람이었고 결국 받아들이게 되는 건 시간문제일지도 몰랐다.그녀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친구 일에 깊이 관여하는 것도 괜히 어색하고 조심스러웠다.게다가 얼마 전 지석훈이 슬쩍 귀띔하듯 말했다.“며칠 전에 여울 씨가 병원에 재검진받으러 왔는데 주하가 데리고 왔었어.”그 말을 듣고 문지원은 혀를 끌끌 찼다.평소에 말도 없고 조용하던 여울이 은근히 비밀 많은 타입이었던 모양이었다.그렇게 시간은 순식간에 흘러 어느덧 다음 달 중순이 되었다.지석훈은 아예 와인 농장을 통째로 빌려 며칠에 걸쳐 그곳을 자신이 원하는 모습으로 꾸며놓았다.결혼식을 올릴 장소는 바로 거기였다.그 와인 농장은 웬만한 호텔 못지않게 컸고 내부에는 수년간 숙성된 고급 와인들이 그대로 보관되어 있었고 결혼식 날 손님들이 오면 바로 꺼내어 대접할 수 있을 정도였다.그들은 결혼 소식을 널리 알리진 않았다.이건 문지원이 원한 방식이었다.그녀는 온 세상에 떠들썩하게 알리는 그런 결혼식보다는 가까운 가족과 친구들만 초대해서 조용히 축하받는 걸 선호했다.행복은 굳이 남들에게 증명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니까.그런데 결혼식이 한창일 때 지석훈이 무대 위에서 다시 한번 프러포즈했다.해변에서 했던 프러포즈보다 훨씬 더 진지하고 진중한 분위기였다.“하고 싶은 말이 정말 많지만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어서... 예전엔 내가 사랑인 줄도 모르고 놓쳐버렸던 순간이 많아. 이제는 더 이상 놓치고 싶지 않아. 이렇게 내 곁에 있어 줘서 고마워. 앞으로 남은 인생... 너랑 함께할 수 있어서 정말 행복해.”그의 말이 끝나자 하객들 사이에서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문지원은 무대 위에서 입을 손으로 가리고 눈물을 흘렸다.식이 끝날 무렵, 문지원은 멀리서 검은색 카이엔 SUV가 그녀의 친구 여울을 데리러 오는 걸 보았다.차창이 천천히 내려가자 예상대로 그 안에 앉아 있는 사람은 최주하였다
문지원은 문득 자신이 계획에 철저히 걸려들었다는 생각에 의심의 눈길을 보냈다.“처음부터 계획한 거죠?”“응.”지석훈은 미소 지으며 그녀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사실, 그는 그녀를 향한 마음을 오래전부터 숨겨온 것이었다....해변에서의 프러포즈 이후 문지원에게 찾아온 가장 큰 변화는 손가락에 반짝이는 반지가 생겼다는 점이었다.이 반지는 지석훈이 특별히 맞춤 제작한 것이었다. 그녀는 우연히 그의 휴대폰을 보다가 두 달 전에 이미 주문이 들어가 있었다는 구매 기록을 발견하고는 깜짝 놀랐다. 그렇게 오래전부터 준비해 왔다니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두 사람의 결혼 소식을 접한 지석훈의 부모님은 곧바로 혼인신고부터 하라고 재촉하기 시작했다. 어느 날 문지원은 우연히 지석훈의 어머니가 그를 붙잡고 타이르는 말을 듣게 되었다.“네 아빠랑 난 애초에 너한테 기대도 안 했어. 하루가 멀다고 병원에서 살다시피 하니 너 같은 애한테 누가 시집오겠나 싶었거든. 그런데 다행히 네가 능력 있어서 지원이 같은 좋은 아이를 데려왔으니 얼른 확실히 붙잡아야지. 빨리 혼인신고부터 해. 나중에 그 아이가 너 버리고 떠나버리면 그땐 어디 가서 울어도 소용없어!”문지원은 그 대화에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몰랐다.그런데 신기한 건 지석훈이 워낙 점잖고 진지한 사람이어서 집안 분위기도 매우 조용할 줄 알았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점이었다. 아버지는 이미 퇴직해 한가로운 성격으로 매일 독서나 산책을 즐기는 조용한 스타일이었다. 어머니는 젊었을 때는 커리어 우먼이었고 호탕한 성격으로 남편에게 엄격하면서도 친화력이 강한 사람이었다.두 분 모두 차분한 듯하면서도 내면에 장난기를 숨기고 있는 아들을 낳을 것 같진 않았는데 이게 바로 유전자의 신비인가 싶었다.하지만 어머니가 그렇게 그녀를 좋아해 주는 모습에 문지원도 안심했다. 확실히 시부모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증거였다.한편 문지원의 아버지는 지석훈과 따로 대화를 나눈 이후부터 정확히 무슨 얘기를 했는지는 몰라도 그에 대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