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은서우는 여전히 미안했다.그러자 남자는 멈춰 서서 운전석에 앉아 그녀를 쳐다보았다.그 눈동자는 햇빛 아래서 평소의 칠흑 같은 어둠을 벗고 짙은 갈색에 더 가까웠다.남자의 시선에 은서우는 어색했고 가슴이 두근거렸다. 자신의 얼굴이 분명 빨개졌을 거로 생각했다.“왜 그렇게 쳐다보세요?”인명진은 거의 보아내기 힘든 옅은 미소를 짓고 말했다.“만약 정말 내게 감사한 마음을 전하고 싶다면 어서 그럴듯한 논문을 써오세요.”쿵!설레던 그녀의 마음이 쿵 내려앉았다.대체 이 사람은 왜 만날 다른 사람의 논문 타령을 하는 걸까? 정말이지 이해할 수 없었다.방금 그 설레던 마음은 잊고 은서우는 남자를 쳐다보지도 않았다.변호사를 선임한 후 법원에 소송을 제기해야 했다.이건 은서우가 관여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으니 이쯤에서 변호사에게 전권을 맡겼다.아이의 어머니는 특별히 병원에 와서 감사를 표했다.은서우는 그녀를 위로했다.“저한테 감사해할 필요 없어요. 지금은 변호사님께 잘 협조하세요. 힘내세요. 하루빨리 딸과 함께 그 고생에서 벗어나길 바랄게요.”“꼭 그렇게 하겠습니다!”여자는 눈물을 훔치며 떠났다.이 사건은 병원에서도 소문이 퍼졌다.이혜성은 은서우의 친절에 감탄하며 말했다.“너 선행 했다며? 어디 좋은 일을 하면 상을 받을 수 있는 곳 없나? 있으면 난 널 첫 번째로 추천할 거야.”은서우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아마 없을 거야. 번거로운 일을 자초하는 사람은 나밖에 없을 테니까.”그러나 그녀는 후회하지 않았다.그녀의 태도를 보고 이혜성도 그녀를 설득하는 것을 멈추었다.그러나 은서우의 말을 씨가 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정말 번거로움이 찾아왔다.“은서우! 누가 은서우야! 당장 나와!”한 남자가 병원에 찾아와 소리를 지르며 병원의 프런트 간호사를 붙잡고 놓지 않았다.간호사가 그의 새빨개진 눈을 보니 진짜 사람을 때릴 것 같아 부들부들 떨며 은서우의 사무실을 가리켰다.남자는 즉시 고개를 돌려 사무실로 돌진했다.나머지
남자의 주의를 돌린 은서우는 즉시 결단을 내리고 다리를 들어 그의 가랑이를 향해 강하게 걷어찼다.그는 즉시 손을 놓았다.은서우는 숨 쉴 틈도 없이 서둘러 문밖으로 뛰쳐나가면서 탁자 위의 진료 기록과 물컵을 집어 들고 냅다 남자에게 던졌다.그렇게 남자의 고함과 욕설 속에서 밖으로 뛰쳐나갔다.막 뛰쳐나가자 누군가와 정면으로 부딪쳤다.곧이어 그녀의 어깨가 큰 손에 눌렸다.은서우는 고개를 들지 않아 누가 왔는지도 몰랐다. 당황한 나머지 방금 그 남자의 패거리인 줄 알고 너무 무서웠다.“이거 놔! 꺼져!”그리고 다시 똑같은 전술을 쓰려 했지만 이번에는 제지당했다.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는데 다행히 머리 위에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왜 이래요? 누가 서우 씨를 괴롭혔어요?”은서우는 그의 품에 와락 안겼고 이 순간에서야 눈물이 흘렀다.인명진은 그녀가 울면서 아무 말도 못 하는 걸 보고 눈빛이 더욱 어두워졌다. 그녀의 등을 가볍게 두드리며 달랬다. 넓은 어깨는 그녀에게 무한한 안정감을 주었다.그의 숨결에 젖어 은서우는 마침내 진정되었다.자신이 운 이유를 설명하려던 순간, 방금 그녀에게 걷어차인 남자가 안에서 뛰쳐나와 한이 가득한 소리를 질렀다.“이년! 내가 너 죽여 버린다!”그의 손에 있는 물건이 번뜩였다.달려온 사람들은 남자의 손에 흉기가 있는 것을 보고 질겁했다.품에 안겨있던 은서우의 시야가 뒤집혔다. 알고 보니 남자가 그녀를 안고 돌아서서 자신의 뒤로 보호했다.은서우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반응하기도 전에 다가오는 칼이 보였고 시퍼런 칼끝이 번쩍였다.“조심해요!”다행히 상상했던 장면은 일어나지 않았다.인명진은 남자의 하반신을 걷어차고 손쉽게 흉기를 제거했다.남자는 여전히 푸드덕거리고 있었다.인명진은 남자를 꽉 누르고 목덜미를 잡고 음산한 목소리로 말했다.“더 움직이면 폐인 만들어 놓는다.”나지막한 목소리는 그들 셋 외에는 아무도 듣지 못했다.남자는 인명진의 살기 가득한 말투에 온몸이 굳어졌다.은서우도 1초 동안
그리고 그 사람을 쳐다보지도 않았다.경찰은 곧 떠났고 이 소동은 무사히 끝났다고 할 수 있었다.은서우는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친구가 옆에서 눈짓하며 재미난 이야기를 묻는 모습이었다.“너 눈에 경련 났어?”그녀가 묻자 이혜성은 퉁명스럽게 그녀를 힐끗 쳐다보았다. “아니! 너 무슨 말을 그렇게 해? 아니다. 지금은 이런 얘기를 할 때가 아니지. 빨리 설명해봐. 너와 원장님 대체 무슨 상황이야?”은서우는 어리둥절해 해며 물었다.“무슨 상황이라니?”이혜성은 눈을 크게 어이없는 표정으로 말했다.“야, 방금 서로 껴안고 있는 거 나 말고 본 사람이 몇 명인 줄 알아? 근데 지금 두 사람 아무 사이도 아니라고? 차라리 귀신을 속여라.”“지금 솔직하게 고백하면 용서하고 그렇지 않으면 엄하게 처벌할 거야. 지금 모든 걸 털어 놓는다면 우리 우정을 지킬 수 있다고.”은서우는 머리가 하얘졌다.곧 얼굴이 빠르게 달아올랐고 단 몇 초 만에 귀 끝까지 붉어졌다.너무 갑자기 일어난 일이라 전혀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는데 그녀와 인명진이 사람들 앞에서 서로 껴안았다니.친구의 가십 어린 눈빛을 보니 그녀는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었다.결국 솔직하게 털어놓을 수밖에 없었지만 별로 설명할 것도 없었다. 그녀와 인명진의 관계는 확실했다.듣고 난 이혜성은 약간 실망했지만 그저 입술을 삐죽 내미는 정도였다.“알았어. 난 또 뭐 대박 뉴스인 줄 알았지.”“참, 너 원장님한테 가봐야 하는 거 아니야? 방금 손에 피나더라고.”이 말은 이혜성의 미끼였다.그녀는 말을 마치자마자 은서우의 반응을 기다렸다.은서우는 인명진이 다쳤다는 말을 듣자마자 순간 놀라 아무것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뭐? 다쳤다고? 내가 가봐야겠어.”그녀는 이혜성을 두고 급히 자리를 떴다.일을 해결한 후 인명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가는 길에 여러 명의 의사와 간호사에게 물어보았지만 모두 보지 못했다고 말했다.그녀는 직감적으로 그가 사무실에 있을 거로 여겼고 노크하는 것도 잊고 벌컥
인명진은 은서우를 바라보며 끝내 속마음을 털어놓지 못했다.“언제까지 감을 거예요?”은서우는 그제야 자신이 붕대를 너무 많이 감았다는 것을 깨달았다.“아, 방금 말을 거셔서 잠깐 정신이 팔렸어요. 조금 풀게요.”그녀가 바깥쪽 두 바퀴 붕대를 풀고 나니 보기에 훨 나아졌다.은서우는 여전히 걱정스러운 표정이었다.“어쩌다 다쳤어요? 방금 칼을 손으로 잡은 거예요?”인명진이 불편한 곳을 교정하니 손에 붕대가 더 자연스럽게 묶였다. 그리고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아니요. 그냥 살짝 긁혔어요.”은서우의 미간이 순식간에 꼬였다.당장 경찰서로 달려가 그 남자를 한 대 때리고 싶은 충동이 생겼지만 지금 인명진의 표정을 이해할 수 없었다. 상처가 그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흔한 일처럼 보였다.심지어 얼굴에는 별다른 표정도 없었다.하지만 어떻게 자신의 몸에 이렇게 무관심한 사람이 있을 수 있을까?은서우는 참지 못하고 물었다.“그냥 간단하게 처리한 것뿐이니 돌아가서 꼭 약 바르시고 상처에 물이 닿지 않도록...”“서우 씨, 그렇게까지 나 신경 쓸 필요 없어요.”인명진이 말하자 은서우는 어리둥절했다.남자는 자기 손을 힐끗 보더니 내려놓았다.“그냥 내버려 두면 혼자 낳을 거예요. 이젠 서우 씨도 어서 일하러 돌아가요. 나 이따가 수술 있어요.”이 손으로 수술하러 간다니.이 말을 들은 은서우는 목청을 더 높였다.“안 돼요! 다친 손은 오른손이잖아요? 게다가 상처가 이렇게 큰데 어떻게 수술을 해요?”수술은 아주 정교한 작업이었다.특히 내과 수술은 더욱 조심해야 하며 의사의 손은 그들의 목숨만큼 중요했다.인명진은 오른손을 자주 사용하는데 부상도 오른손이었다. 방금 붕대를 풀 때 그녀는 상처가 너무 깊어 속으로 놀랐다. 비록 정맥과 동맥을 아슬하게 피했지만 힘줄에 닿을 정도로 깊은 상처였다.이 정도로 다쳤는데도 인명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꾹 참았다.그래서 은서우는 그가 수술하러 간다고 했을 때 크게 흥분했다.“지금 명진 씨 손으로는 큰 수술을
수술까지 거의 두 시간이 남았다.은서우는 다른 사람에게서 임시로 큰 수술을 받은 적이 없었다. 그녀는 1분 1초도 낭비하지 않고 환자의 정보를 확인했다.인명진도 가만히 있지 않고 몸을 약간 앞으로 기울여 진료 기록을 짚으며 말했다.“이 환자는 관상 동맥 질환을 앓고 있고 여러 가지 증상으로 인한 혈관 막힘이 많아 병원에 도착했을 때 이미 기절한 상태였어요. 환자 나이가 50이 넘었기 때문에 수술 할 때 각별히 주의해야 하고...”남자의 목소리는 잔잔하여 마치 조용히 흐르는 시냇물 같았다.은서우의 불안함이 순식간에 가라앉았다.보조 의사가 인명진을 부르러 왔고 사무실 노크 소리가 들렸을 때 그녀는 이미 마음이 진정되었다. 막 일어나려는데 옆에 있던 인명진이 그녀와 함께 일어섰다.“함께 가요. 내가 현장에서 지도하면 서우 씨가 더 안심될 거예요.”인명진이 말하자 은서우는 몇 초 동안 어리둥절했다.곧 노크한 사람이 들어왔고 한 남자 의사였다.은서우를 본 그는 의아해하며 말했다.“은 선생님 원장님을 찾으러 오셨어요? 죄송하지만 지금 응급 수술이 있어서 원장님을 모시고 수술실에 들어가야 해요.”“시간이 촉박하니 바로 가시죠. 원장님. 그렇지 않으면 늦을지도 몰라요.”인명진은 대답하고 옆에 있은 은서우를 바라보았다.은서우는 또 긴장하기 시작했다.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방금 두 사람만 있을 때는 인명진 앞에서 호언장담할 수 있었다고 해서 다른 사람 앞에서도 자신만만한 건 아니었다.그녀는 그 정도로 뻔뻔하지 않았다.그러나 인명진은 전혀 걱정 없이 은서우를 가리키며 말했다.“이 수술은 은 선생이 집도할 거예요.”이 말에 남자 의사는 깜짝 놀랐다.“무슨 그런 농담을 하세요 원장님. 이번 수술은 절대 쉽지 않아요. 경력이 부족한 은 선생님이 감당할 수 있는 케이스가 아니에요.”인명진은 마음을 바꿀 생각이 없었다. “내가 선택한 사람이니 내가 가능하다고 하면 가능한 거예요.”남자 의사는 연신 고개를 가로저었다.인명진을 설득할 수 없자 그
그들은 이미 인명진을 인정했고 심지어 문제가 생겼을 때도 제일 먼저 그를 떠올렸다.인명진이 현장에 있다면 안심할 수 있었다.가는 길에 은서우는 인명진이 시종일관 자기보다 앞서가는 뒷모습을 보며 은근히 주먹을 쥐었다.그녀는 항상 자신이 진보했다고 생각하지만 매번 그를 따라잡기에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발견했다. 앞으로 더 열심히 노력해서 이 기대를 저버리면 안 되었다.곧 은서우는 수술실로 들어가 수술을 시작했다.갑자기 집도의가 바뀌었으니 수술실의 보조 담당 간호사와 다른 의사들이 모두 놀랐다.하지만 수술실은 안정을 유지해야 하고 모두가 얼굴에 소독 마스크를 쓰고 있어서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고 마음속으로만 걱정하고 있었다.인명진은 앉을 곳을 찾았다.은서우는 한 눈 팔지 않고 모든 주의력을 동원해 세심하게 수술에 집중했다. 때때로 옆 사람에게 핀셋이나 보조 도구를 건네주라고 했다.그러나 뜻밖의 일이 일어났다.간호사가 갑자기 소리쳤다. “환자의 혈압이 올라가고 있어요!”은서우는 손을 떨지 않고 기기를 보았는데 정말로 눈에 보이는 속도로 혈압이 올라가고 있었다.아무래도 경험이 부족한 그녀는 약간 당황했다.그때 인명진의 침착한 목소리가 마치 진정제처럼 들려왔다.“당황하지 말고 호흡을 가다듬어요.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대처하라고 내가 가르쳤는지 잘 생각해 봐요.”은서우는 무의식적으로 몇 번 심호흡했다. 그렇다. 그녀는 지금 진정해야 했다.인명진의 말에 그녀는 기억을 떠올렸다.순간 그녀는 눈이 반짝이더니 지금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을 찾아냈다.은서우는 침착하게 주변 간호사에게 자신을 보조하라고 분부했다.한 시간 후, 수술이 끝났다.수술실을 나오기 전 그녀는 먼저 피 묻은 장갑을 벗었다. 마치 마음속의 무거운 돌멩이를 꺼낸 듯 긴 호흡을 토해냈다.“은 선생님 방금은 정말 위험했어요. 그래도 선생님께서 해결방법을 찾았으니 다행이에요. 전에는 저희가 은 선생님을 과소평가했어요.”동료들은 말하면서 쑥스러워 자기 코를 매만졌
환자 가족의 환한 미소를 볼 수 있다면 그건 가치 있는 일이었다.곧장 원장실에 갔지만 그는 자리에 없었다.텅 빈 사무실을 보니 인명진의 기운이 남아 있는 것 같았다. 그녀는 약간 막막했다.그는 어디로 갔을까?그때 누군가 다가와 물었다.“원장님 찾으세요? 방금 옷 갈아입고 나가는 걸 봤어요. 이미 퇴근 시간이니 갈 때도 되셨죠.”은서우는 이미 어두워진 밖을 보고 문득 깨달았지만 이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인명진은 퇴근할 때 늘 그녀에게 말하고 나갔고 매일 차로 그녀를 집으로 데려다줬다. 만약 혼자 퇴근했다면 왜 미리 그녀에게 말하지 않았을까?순간 그녀는 자신의 뺨을 때렸다. 힘이 좀 세서 짝 소리가 울렸다.“은서우, 지금 무슨 생각하는 거야! 원장님이 퇴근하는데 왜 나한테 보고해야 하냐고?”그렇게 말하고 나니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은서우는 생각하지 말라고 스스로를 설득했다.그런데 어질러진 진료실을 치우고 창턱으로 나왔을 때 참지 못하고 중얼거렸다.“그냥 오늘은 집에 가지 말까? 원장님 집 근처에 꽃집이 하나 있는 것 같던데...”지난번 이준서가 그 패랭이꽃을 망가뜨린 후 그녀는 다시 사지 않았다.지금 마침 시간이 있으니 가보는 것도 좋았다.물론 이것은 은서우가 자신을 위한 핑계일 뿐 진정으로 보고 싶은 것은 꽃이 아니라 사람이었다.인명진이 말도 없이 떠난 데다 오늘 좀 이상한 반응을 보이니 은서우는 왠지 신경이 쓰였다.그녀는 마음을 정한 후 더 이상 고민하지 않고 바로 택시를 타고 인명진이 사는 동네로 갔다.초인종을 눌렀을 때 도우미가 문을 열었다.문 앞에서 조금 오래 기다린 은서우는 찬바람에 으스스 추워 지나가는 말로 물었다.“아주머니 왜 이렇게 늦게 나오셨어요?”도우미는 방안을 들여다보고 목소리를 낮추었다.“서우 씨, 왜 지금 오셨어요? 오늘은 그냥 돌아가세요.”“왜요? 원장님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요?”“아니요. 원장님께서 지금은 사람을 별로 만나고 싶지 않을 것 같아서요.”도우미가 다급해진 은서우를 위
도우미는 위층을 쳐다보더니 말했다.“선생님께서 돌아오셔서 잠이 드셨는데 또 악몽을 꾸신 것 같아요. 그러니 지금은...”은서우는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안으로 뛰쳐들어갔다.도우미가 막으려야 막을 수 없었다.그녀는 미친 듯이 2층으로 달려가 침실 문을 여는 순간 가슴이 조였다.평소에 차갑고 냉담하던 사람이 지금 고통스럽게 침대에 누워 눈을 꼭 감고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무슨 꿈을 꾸고 있는지 입술을 꼭 깨물고 있었다.은서우는 침대 앞에 쪼그리고 앉아 남자의 한쪽 손을 잡았다. 놀라울 정도로 차가운 손이었다.“인명진 씨, 내 말 들려요? 나 왔어요. 나 은서우예요. 일어나봐요.”인명진은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그녀는 인내심 있게 잠시 머뭇거리더니 그의 손바닥을 자신의 볼에 대보았다. “당신은 지금 악몽을 꾸고 있을 뿐이에요. 깨어나면 다 괜찮아질 테니 두려워하지 마세요.”은서우는 남자가 무서워하는 걸 눈치챘다.정말 신기했다. 인명진의 경쟁자가 이를 알게 되면 절대 믿지 않을 것이다. 특히 이준서는 절대 거짓이라고 생각할 것이다.사실 은서우가 처음 왔을 때도 도우미가 말한 인명진의 모습을 믿지 않았다.하지만 들어와서 본 이 모든 것들이 인명진에 대한 오랜 인상을 깨뜨렸다.놀라움도 잠시 그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이 자리를 잡았다.“그만 자고 어서 일어나봐요. 아주머니가 당신 아직 밥도 안 먹었다고 하던데 어서 일어나서 우리 같이 밥 먹고 다시 자요. 네?”남자가 깨어나지 않자 그녀는 손을 남자의 얼굴에 얹고 땀을 닦아 주었다.그런데 순간 남자가 눈을 번쩍 떴다.강력한 팔의 힘이 다가오더니 통증과 함께 하늘과 땅이 빙빙 돌았다.그녀가 정신을 차렸을 때, 이미 침대에 눌려 있었고 목에 남자의 손이 더해져 목을 조이고 있었다.“선생님... 내가 누군지 잘 봐요.”호흡을 빼앗긴 은서우는 억지로 버티며 겨우 말을 내뱉었다.그러나 남자는 흔들리지 않았고 그녀는 곧 현기증을 느꼈다.은서우는 이것이 저산소증로 인한 첫 번째 반응이라는
“그 얘기는 그만하자. 정말 조사해 보고 싶다면 개인 물품이라도 확보해야 해.”“다 검사해 봐야 해. 일상생활을 담은 동영상이 있으면 가장 좋을 거야.”“그래야 판단할 수 있거든. 그렇지 않으면 다른 것들은 다 소용없어.”지석훈은 몇 마디 하고는 바로 최주하를 돌려보내려고 했다.“날 놀리려고 온 거냐? 넌? 그쪽 상황은 어떤데?”지석훈도 사람을 비웃는 데 일가견이 있는 사람이었다.그 말에 최주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떠하긴. 당연히 다 정상이지. 나처럼 인내심이 있는 사람이 드물잖아.”최시후와의 싸움을 뜻하는 말이었다. 지석훈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그만 가. 나 이제 쉴 거야. 방해하지 말고 얼른 가. 얘기는 나중에 하자.”그는 귀찮은 듯 손을 저었다. 최주하도 별다른 얘기가 없이 어이없는 웃음만 지으며 돌아섰다.최주하가 떠난 후, 지석훈은 일어나 앉아 복잡한 표정으로 앞을 주시했다.아까 문지원이 있을 때, 그는 큰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복잡한 생각을 정리하려고 할 때, 최주하가 들이닥쳐 이런저런 쓸데없는 얘기를 하는 바람에 결국 생각을 정리하지 못하였다.이제는 사람들이 다 갔으니 드디어 조용히 생각해 볼 수가 있었다. 강윤슬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되짚어보았다.좋아하는 건지 아니면 마음이 쓰이는 건지 그것도 아니면 자존심 때문에 이러는 건지?그러나 무엇이 됐든 강윤슬이 그 앞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는 모습을 보며 그는 안타까운 마음보다는 속으로 비아냥거렸다. 이 순간이 너무 어이가 없었다. 한편, 문지원은 차를 몰고 집으로 향했고 마침 비서한테서 전화가 걸려 왔다. “대표님, 지금 아주 심각한 상황입니다. 얼른 오셔야 할 것 같아요. 저도 뭐라 자세히 설명을 해드리리가...”전화기 너머로 비서는 우물쭈물했다.난감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집안에 문제가 생긴 바람에 회사는 지금 그녀 혼자 돌볼 수밖에 없었다.사실 문지원은 원래 회사의 임원이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어쩔 수 없이 그녀가 회사를 짊어지
그녀는 약간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최주하를 향해 미소를 짓더니 이내 욕실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었다. 문지원의 모습을 보고 최주하는 참지 못하고 지석훈을 놀리기 시작했다.“너 이 자식, 상상도 못 했어. 이렇게 여자랑 같이 있을 줄은...”“쓸데없는 얘기 그만해. 왜 찾아온 거야? 전화에서 말했던 그 사람은 또 누구고?”지석훈은 최주하와 실없는 장난을 하고 싶지 않았다. 남녀 관계의 일에 대해서는 그도 확실히 뭐라 할 수가 없었다. 강윤슬에 대한 그의 마음은 복잡했다. 눈시울이 붉어진 그녀를 보고 마음이 흔들렸던 건 사실이다. 가슴이 아팠고 그녀를 품에 꼭 껴안고 달래주고 싶었다.그러나 오랜 시간 상처를 받고 나니 이젠 강윤슬에 대해 무슨 말을 해야 할지조차 몰랐고 그래서 빨리 화제를 돌리고 싶었다. 달라진 그의 표정을 보고 최주하는 장난스럽게 입을 열었다.“그래. 그만 놀릴게. 솔직하게 말하면 내가 찾아온 이유는 최지후 때문이야. 전에 최지후의 곁에 사람을 붙였었잖아? 지금 구체적으로 어떤 상황인지에 대해서 사실 나도 잘 모르겠어.”최주하는 여울 쪽의 상황에 대해 그한테 대충 말해주었다. 그 당시 여울은 최지후의 변화에 대해 그한테 자세히 얘기했었다. 최지후의 상태가 좋았다가 나빴다가, 어떤 때는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을 할 때도 있다고 했다. 예전 같았으면 다른 생각이 들었거나 잠시 고민해 봤을 것이다.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그래서 네 뜻은 최지후가 조현병을 앓고 있단 말이야?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판단할 수 없고 검사를 받아야 해.”“다만 검사를 받으려면 많은 절차가 필요하고 본인이 직접 가야 해.”지석훈은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어갔다.그 얘기에 최주하는 머리가 지끈거렸다.최지후의 약점을 잡게 된다면 최지후를 처리하기가 훨씬 쉬워질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최지후가 직접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게 할 수 있겠는가? 아무리 그의 사람이 가까이 다가간다고 하더라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여울을 최지후에게 보내 그의 일
최주하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그냥 그런 사람이 있어. 뭘 그렇게 꼬치꼬치 캐물어?”그의 말에 지석훈은 자신의 짐작이 맞다는 확신이 들었다.“내 직업이 뭔지 잊었어? 나 의사야. 이런 질문에 대해 명확하게 물어야 나도 상황에 맞는 약을 처방할 거 아니야?”“그런 그렇지만 자세하게 확인이 안 돼.”여울이 제공한 정보에 따르면 최주하는 최지후에 대해서 추측만 할 뿐이었다. 그러나 지석훈은 이 방면에서 전문가였다. 그래서 일부러 전화를 걸어 물어본 것이었지만 구체적인 세부 사항은 아직 명확하게 설명할 수가 없었다.“전화로 얘기할 문제가 아니야. 지금 어디야? 내가 그쪽으로 갈게.” 그 얘기에 지석훈은 고개를 돌리고 옆에 있는 문지원을 쳐다보고는 결국 별장의 위치를 알려주었다.“웬일이냐? 별장에서 휴식을 다 하고?”지석훈은 최주하를 무시한 채 핸드폰을 한쪽에 던져버리고 담담한 얼굴로 문지원을 쳐다보았다.“이런 얘기 말고 나한테 할 얘기 더 없어?”그가 강윤슬의 마음을 얻지 못하고 강윤슬한테 끌려다닌 건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다른 여자한테 매력이 없는 남자는 아니었고 그동안 그한테 다가오는 여자들도 많았었다. 다만 강윤슬을 위해 여자들을 함부로 만나지 않았고 다른 여자는 눈에조차 넣지 않았다.그런데 문지원의 모습에 그는 조금 놀랐다. “내가 한 말은 다 진심이에요. 이 관계에서 내가 손해를 본 건 아니라는 뜻이에요. 우리 둘 다 성인이잖아요.”“그러니까 너무 부담 갖지 말아요. 나 먼저 씻을게요.”문지원은 침대에서 뛰어내려 지석훈의 욕실로 들어갔다. 한편, 지석훈은 가만히 침대에 누워있었다. 사실 담배를 한 대 피울 생각이었는데 방금 강윤슬이 들이닥친 바람에 그는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마음에 없다면 그건 거짓말이었다. 오랫동안 마음에 두었던 여자인데... 그러나 그동안의 굴욕과 상처로 인해 그는 이제 자신의 마음을 잘 모르겠다. 가끔은 사실 지금 이대로도 좋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쓸데없이 걱정할 필요도 없고 혼자만의
“지후 씨라고 불러.”여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가 화를 내며 그녀의 말을 끊어버렸다.그녀는 얌전히 그의 뜻에 따랐다.“지후 씨, 걱정하지 말아요. 약속은 반드시 지킬게요. 그리고 나 얌전히 있을 거고 당신 화나게 하는 일 없도록 할게요.”갑자기 그가 그녀를 내동댕이쳤고 갑작스러운 힘에 여울은 바닥에 쓰러졌다.그는 익살스러운 광대라도 보듯 웃음을 터뜨렸다. “날 화나게 하지 말고 얌전히 있어. 며칠 동안은 손도 치료할 생각 말고. 당신은 좀 아파야 해.”“알았어요.”여울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최시후는 빠르게 돌아섰다. 멀어져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그녀는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최지후는 사람이 아니었고 앞으로 그녀의 처지는 더욱 곤란해질 것이다. 하지만 어찌하겠는가? 최주하한테 2억이라는 돈을 받고 최지후의 옆에 있겠다고 약속까지 했는데...앞으로 아무리 힘이 들어도 그녀는 억지로 견뎌낼 수밖에 없었다.한편, 최주하는 지석훈을 찾아갔고 지석훈은 문지원과 함께 있었다.지석훈은 여전히 기분이 안 좋아 보였고 담배를 계속 피웠다.그녀는 결국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강윤슬 씨한테 가봐요. 강윤슬 씨가 먼저 당신한테 고개를 숙였잖아요. 난 진심이라고 생각해요. 당신이 찾아간다면 강윤슬 씨도 당신을 받아줄 거예요. 서로 사랑하는 사람이 함께하는 건 좋은 일이잖아요.”“서로 오해를 풀고 한 걸음 다가선다면 강윤슬 씨는 분명 당신을 선택할 거예요. 두 사람한테는 좋은 결과예요.”문지원은 그한테 많은 얘기를 했다. 그를 설득하고 두 사람을 화해시키려고 하는 것 같았지만 사실은... 이 말을 할 때 문지원은 가슴이 답답했다. 지금 이 순간의 기분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몰랐다. 그러나 지석훈은 피식 웃었다.“우리 조금 전까지 관계를 가진 사람들이야. 당신의 생각대로라면 내가 당신한테 책임을 져야지. 그런데 강윤슬을 찾아가라고? 문지원, 당신 도대체 무슨 생각인 거야? 나랑 이렇게 헤어져도 좋아?”이 세상에서 보답을 바라지 않는 사람이
여울은 최주하에 대해 자신의 태도와 충성을 표했다.그녀의 이러한 모습을 본 최주하는 반신반의하며 조롱이 섞인 말투로 입을 열었다.“나한테 충성하는 거 맞아? 돈에 충성하는 거 아닌가?”그의 말에 그녀는 조금 난감해졌다. 처음에는 정말 방법이 없어서 그랬던 것이다. 그날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최주하를 봤고 그녀는 그한테 애원했다.어쩔 수 없이 막다른 골목에 몰리지 않았다면 최주하에게 애원하지도 않았을 거고 자존심까지 다 버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저한테 2억을 줬으니 당신은 저한테 은인이에요. 은인한테 충성을 다하는 건 제가 해야 할 일이고요.”여울은 최주하의 눈빛을 마주하지 못하였지만 자신의 입장을 확실히 표명했다.그녀를 힐끗 쳐다보던 그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됐어. 쓸데없는 얘기는 그만하지. 최지후의 옆에 가 있어. 필요하면 내가 부를 테니까.”“알았어요.”그가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는가? 여울이 막 돌아서려 할 때 그가 갑자기 그녀를 붙잡았다.“필요한 게 있거나 조금이라도 변화가 생긴다면 바로 연락해. 숨기지도 말고 참지도 마.”“알았어요.”조금 의외였지만 그녀는 여전히 흔쾌히 대답했다. 그와 헤어지고 나서 여울은 최지후의 곁으로 돌아왔다. 최지후는 그녀가 나갔다 온 걸 진작에 알아차린 것 같았다.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자 그녀는 순순히 그에게로 가까이 다가갔다. “어디 갔다 왔어?”“잠깐 바람 좀 쐬고 왔어요.”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그의 물음에 대답했다. 최지후의 앞에서 지금 그녀의 모습은 착하기만 한 강아지 같았다. 그러나 최지후는 그녀의 말을 믿지 않았고 이내 그가 그녀의 손을 부러뜨렸다.“아악!”비명을 지르던 그녀는 믿을 수 없는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당신...”내심 불안했다. 최지후가 이렇게 묻고 그녀의 손을 부러뜨린 건 최주하를 만나러 간 사실을 눈치챈 것일까?정말 최지후한테 들켰다면 오늘 그녀는 끝장나는 것이었다. 그러나 여울은 더 이상 변명하지 않았다. 최지후가 이
이 사실을 최주하에게 알려야 했다. 그런데 그가 자신에게 이런 말을 할 줄은 몰랐다.여울은 고개를 숙인 채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냥 평소에 입던 대로 입은 거예요. 일부러 이렇게 차려입은 거 아니고요. 주하 씨한테 꼬리 칠 생각도 해본 적 없어요. 최지후 씨가 저한테 별 관심이 없는 것 같아요. 그 2억은...”“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머뭇거리는 그녀의 모습에 최주하는 저도 모르게 얼굴을 찡그렸다.여울은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말 그대로예요. 보통 남자들이라면 제 발로 찾아온 여자를 마다할 리가 없죠. 그러나 그날 최지후 씨는 장소를 옮기자고 하더니... 그 후에는 더 이상 저한테 손을 대지 않았어요. 평소에도 절 없는 사람 취급을 하고요.”최주하의 안색이 점점 더 어두워졌다. “뭐야? 지금 나보고 들으라는 소리인가?”제 발로 찾아온 여자를 마다할 리가 없다니... 그도 거절하지 않았던가? 여울이 자신을 겨냥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울은 점점 더 고개를 숙였다. “그런 뜻 아니에요. 전 그저... 최지후 씨에 대해 얘기를 한 것뿐이에요. 가끔은 딴 사람 같아 보일 때가 있어요.”그녀가 자신이 발견한 문제에 대해 말을 하자 최주하는 오히려 침묵했다.가끔 다른 사람 같아 보인다면 조현병에라도 걸렸다는 말인가?그러나 그가 보기에 최지후의 정신 상태는 아주 정상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여울이 말한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었다. 아주 조금은 최지후가 뭔가를 눈치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당신한테 연락할 때, 나랑 만날 때, 혹시 최지후한테 들킨 거 아니야?”최주하는 눈을 가늘게 뜨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의 검은 눈동자에는 싸늘함과 매서움이 가득 담겨 있었다.여울은 그런 최주하의 미움을 살 용기가 없었고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아니에요. 최지후 씨한테 들킨 거 없어요. 그날 갑자기 저한테 그러더라고요. 만약 뭔가를 들켰다면 아마 절 가만두지 않았을 거예요. 당신들한테 전 개미 같은 존재 아닌가요?”
강윤슬의 이런 모습은 여자인 문지원이 봐도 마음이 아팠다. 하물며 오랫동안 강윤슬을 사랑한 지석훈의 마음은 오죽할까? 아마 가슴이 찢어질 듯 아플 것이다.그러나 그는 여전히 차가운 얼굴로 문지원의 허리를 감싸고 있었고 강윤슬의 말에 마음이 약해지지도 않았다. 그것도 모자라 강윤슬을 향해 싸늘하게 한마디 했다.“여자들은 늘 그러잖아. 늦게 온 사랑은 싸구려라고. 우리 남자들도 그래. 나 이제 예전처럼 선배를 사랑하지 않아. 그러니까 선배는 임혁수한테 가.”“임혁수가 선배를 많이 사랑하고 있을 거야.”강윤슬이 임혁수의 사랑을 원했다면 아마 벌써 그와 함께 살았을 것이다. 이렇게 지석훈을 찾아올 리가 있겠는가? 사실 남자든 여자든 모두 마찬가지이다. 사랑할 때는 상대를 보물처럼 여기다가도 사랑하지 않으면 헌신짝 취급을 한다. 한번 마음먹었으면 되돌아보지 않을 것이고 아무리 사랑해도 다시는 돌아서지 않을 것이다. “아니. 이제 장난 그만 쳐. 이런 말 듣고 싶지 않아. 네가 다시 내 곁으로 돌아오길 바라. 돌아와 줘.”강윤슬은 목이 멘 목소리로 말을 하면서 눈물이 마치 끈 떨어진 진주처럼 흘러내렸다. 그녀의 이런 모습에 마음이 약해지기 싫었던 그는 아예 그녀를 쳐다보지 않았다. 그 순간, 그가 차갑게 입을 열었다. “얼른 가. 나도 할 일이 있어. 선배가 이러고 있으면 내가 어떻게 볼일을 봐?”지석훈은 그게 어떤 일인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말을 듣는 순간, 강윤슬은 깨달았다.지금 두 사람의 옷차림을 보면 두 남녀 사이에 할 일이라는 게 또 뭐가 있겠는가?울면서 애원했지만 지석훈은 요지부동이었고 그녀는 더 이상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그래. 지석훈, 잘 들어. 나중에 후회하더라도 다시는 나 찾아오지 마.”눈물을 닦으며 말하던 강윤슬은 이내 뒤도 안 돌아보고 별장을 뛰쳐나갔다.강윤슬이 떠난 후, 지석훈은 바로 문지원을 밀어냈다.그의 마음속에 강윤슬이 1 순위라는 걸 문지원은 잘 알고 있었다. “쫓아가 보는
더 이상 강윤슬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 않았던 그는 문지원에게 눈빛을 보냈다.곁으로 다가가자 그가 문지원의 허리를 껴안았다. “선배, 문지원이랑 있으면 나 편해. 사랑은 일방적인 게 아니야. 선배도 그걸 알았으면 좋겠어.”“아니. 이 여자가 너한테 순종하는 거 네가 많이 도와줬기 때문이야. 네가 지석훈이 아니었다면 네가 도와주지 않았더라면 문지원이라는 여자는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겠지.”강윤슬은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문지원을 쳐다보았다. 그녀가 자신을 적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걸 잘 알면서도 문지원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지석훈이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어찌 그의 말에 따르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석훈 씨한테 순종하는 거 맞아요. 나한테 잘해주니까요. 결혼도 안 한 남녀가 만나겠다는데 뭐가 문제예요?”문지원은 강윤슬을 똑바로 쳐다보며 담담하게 말을 이어갔다.“강윤슬 씨, 나랑 석훈 씨가 만나는 게 불만인 거죠? 우리 두 사람은 당신한테 아무런 방해도 되지 않았어요. 석훈 씨가 프러포즈를 했을 때, 받아들이지 않고 임혁수 씨를 찾아간 건 바로 당신이에요.” 프러포즈하던 날, 그곳에는 강윤슬과 지석훈 두 사람뿐이었다. 그런데... 지석훈이 이 일을 문지원에게 알려준 것일까?문지원의 차가운 눈빛을 보니 그녀를 무시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이건 우리 두 사람 사이의 일이에요. 당신이 끼어들 자리가 아니란 말이에요. 지석훈, 너 꼭 이 여자 앞에서 나한테 망신을 줘야겠어?”강윤슬은 흥분된 표정을 지으며 문지원을 향해 손가락질했다. 그녀가 지석훈의 프러포즈를 받아들이지 않은 건 확실히 두 사람 사이의 일이었다.다만 문지원이 이 얘기를 꺼낸 건 강윤슬이 더 이상 이렇게 집착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한 말이었다. 게다가... 지석훈은 문지원에게 아무 말도 한 적이 없었다. 어떤 일들은 그녀도 단지 두 사람의 대화에서 눈치를 챈 것뿐이었다. 먼저 포기를 한 사람은 강윤슬이었기 때문에 지석훈이 그녀를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무슨 할 말이 있겠는
지금까지 강윤슬의 이런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그러나 아무리 강윤슬이 후회한다고 하더라도 그녀는 여전히 그의 앞에서 당당했고 고개를 숙이려 하지 않았다.지석훈은 고개를 돌리고 그녀를 쳐다보지 않았다.“선배 곁에는 이미 임혁수가 있잖아.”“임혁수만으로는 만족 못 하는 거야?”그의 말에 강윤슬은 가슴이 찢어지는 것만 같았다. 그녀와 지석훈 사이의 가장 큰 문제는 임혁수였다. 비록 그녀가 생각하기에 자신은 임혁수와 아무런 사이도 아니고 그저 단지 과거의 아쉬운 감정만 남아있는 것이었지만 지석훈은 그리 생각하지 않은 것 같았다. “혁수 씨 얘기가 왜 또 나와? 설마 나더러 혁수 씨를 쫓아내라는 거야? 어떻게 쫓아내니? 이혼하고 혼자 아이를 돌보고 있는 사람인데.”“어찌 됐든 알고 지난 사이인데. 임혁수도 임혁수지만 만약 네가 그렇게 된다면 나도 널 도와줬을 거야.”그녀는 지석훈을 쳐다보며 말을 이어갔고 자신의 잘못을 전혀 인식하지 못한 듯했다.그도 더 이상 그녀를 바로잡고 싶지 않았다.“어떻게 생각하든 그건 선배 자유야. 하지만 나랑 선배 사이는 이제 완전히 끝났어.”“아니지. 시작한 적이 없으니까 끝낼 것도 없지 뭐.”오랜 시간 강윤슬의 옆에 있었지만 그녀는 단 한 번도 그의 마음을 받아준 적이 없었다. 강윤슬은 아예 그를 남자 친구의 후보로도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 그 정도의 위치만 했어도 오랫동안 함께 있다 보면 남자 친구로 변할 법도 한데, 그녀는 아니었다. 지금 그의 옆에 문지원이 나타난 걸 보고 강윤슬이 위기감을 느끼고 있는 걸까?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가. 혼자 돌아가지 말고 임혁수한테 전화해서 데리러 오라고 해.”그녀의 안전이 걱정되긴 했지만 그의 얼굴은 여전히 차가웠다. 그런 그의 모습에 강윤슬은 가슴이 너무 아팠다.한없이 다정하고 그녀에게 고분고분하던 남자가 이제 더 이상 그녀를 쳐다보지 않고 있다. “정말 내가 너한테 사정까지 해야 하는 거니? 아니면 혁수 씨를 쫓아내야 네 화가 풀릴 거니?”그래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