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경준은 오늘에야 여진숙의 입을 통해 진실을 알게 되었다. 그는 온지유를 바라보며 물었다.“지유야, 너 정말 돈 때문에 결혼한 거니?”온지유는 안색이 어두워지더니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그게...”“사돈어른이 좋은 사람인 건 인정해. 하지만 실패한 결혼을 억지로 유지할 필요는 없어. 빚진 돈은 우리가 어떻게든 갚을게.”정미리도 할 말이 없었다. 좋은 사윗감을 찾아서 딸을 시집보낸 줄 알았는데, 결국에는 이런 꼴이 났으니 말이다.이제 이혼하지 않더라도 두 사람의 결혼은 파국에 다다랐다. 더 이상 고집부릴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온지유도 억지로 버틸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알았어요.”여이현은 온지유를 바라봤다. 그녀가 무슨 말을 할지 궁금한 표정이었다.온지유는 솔직하게 말했다.“더 이상 숨길 것도 없겠네요. 저희는 3년의 기한을 두고 계약 결혼을 했어요. 20억 원에 3년을 저당 잡힌 셈이죠.”이 말을 하는 동안 온지유의 눈가에는 왠지 모르게 눈물이 맺혔다. 그녀는 애써 참으며 계속 말했다.“3년이 지나면 저희는 완전히 남남이 되는 거예요.”사람들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정미리도 지금껏 몰랐던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뭐? 둘이 3년만 결혼한다고?”“네, 딱 3년뿐이에요. 그러니까 더 이상 싸울 필요 없어요. 결국엔 이혼할 거니까요. 어떤 문제가 있던 다 시간이 해결해 줄 거예요.”여진숙은 계약에 대해 알게 된 후 더 할 말이 없어졌다.여이현의 안색은 아주 차가웠다. 주먹을 꽉 움켜쥔 그는 온지유의 말에 단단히 열 받은 것 같았다.“콜록콜록...”그는 기침을 참지 못했다. 여진숙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이현아, 괜찮니? 빨리 들어가서 누워. 수술이 끝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여이현은 입술을 꽉 다물며 여진숙의 부축을 거부했다.어찌 됐든 여이현의 도움에 고마웠던 온경준은 불쑥 끼어들어서 말했다.“이현아, 오늘은 우리 지유를 구해줘서 고맙다.”아버지로서 그녀는 당연히 딸을 보호
양쪽 집안 사람들은 동시에 놀란 표정을 지었다.여진숙은 주소영을 바라보며 충격에 빠진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렇게 한참 기다리다가 다시 물었다.“방금 뭐라고 했어? 내 아들의 아이를 가졌다고?”주소영은 마음이 불안했다. 이런 말을 꺼낸 결과를 몰랐기 때문이다.하지만 더 이상 물러설 곳은 없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네, 저... 대표님의 아이를 가졌어요.”이번에는 모두가 똑똑히 들었다. 처음 만난 여자가 여이현의 아이를 가졌다는 사실을 말이다.온경준과 정미리는 잠시 넋이 나갔다가 얼굴이 일그러졌다. 무엇보다도 여이현이 다른 여자를 만났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온지유가 그동안 여씨 가문에서 어떤 삶을 살았는지 안 봐도 짐작할 수 있었다. 반대로 여진숙은 매우 기뻤다. 그녀의 입장에서 상대가 누구인지는 크게 상관없었다. 그저 여씨 가문의 후손을 낳아주기만 하면 되었다. “그게 정말이니?”여진숙은 급 환한 미소를 지으면서 물었다.“임신한 지는 몇 달 되었니?”여진숙이 관심을 보이는 것을 보고 주소영은 약간 놀란 표정을 지었다.‘일이 생각보다 훨씬 쉽겠는데...?’“그게... 한 달 좀 넘었어요.”여진숙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아직 티가 안 나겠구나. 초기에는 무조건 조심해야 해. 이현이도 참... 이런 일은 나한테 말해줬어야지.”여진숙은 주소영의 손을 잡으며 친절하게 대했다. 곁에서 지켜보고 있던 여이현의 얼굴은 점점 굳어갔다.“아직 확정되지 않은 일을 말해서 뭐 해요.”여진숙은 주소영이 온지유를 난처하게 만든 것만으로도 만족스러웠다. 게다가 아이까지 있다니, 더할 나위 없이 기뻤다.“이현아, 자신의 명예를 걸고 이런 거짓말을 할 여자는 없단다. 이 아가씨가 누군지 소개해 봐.”여이현은 입을 꾹 다물었다.모든 증거가 주소영이 그의 방에 들어갔다고 나타냈다. 하지만 그의 직감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었다.그는 여러 번 조사를 지시했지만, 완전히 사라진 CCTV 기록 탓에 아무것도 알아낼 수 없었다. 더군다
온지유는 여진숙의 성격을 알고 있었다. 그녀가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단지 자신의 잘못된 행동을 합리화하기 위해서였다.정미리는 원래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지만, 여진숙의 발언에 화가 치밀어 올라 도무지 참을 수가 없었다.“이런 일이 있는데도 참 당당하네요. 착각하지 마요, 이 관계에서 잘못된 건 결혼 중에 다른 여자를 만나 임신까지 시킨 당신 아들이니까요!”여진숙이 반박했다.“당신 딸년이 애를 낳지 못하니까 내 아들이 겉도는 거 아니에요!”여이현이 차갑게 말했다.“그만해요!”여진숙은 점점 창백해지는 그의 얼굴을 보고 말을 멈추었다.“알았어, 그만할게. 얼른 침대에 가서 누워 있자.”이때 온경준이 말했다.“지유야, 이제 그만하고 돌아가자.”온지유도 이곳에서 백번 말해봤자 소용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알았어요, 아빠.”그녀는 묵묵히 온경준의 곁으로 걸어갔다.그녀의 단호한 뒷모습을 바라보며 여이현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그녀를 끝까지 바라보았지만, 끝내 붙잡는 말을 하지 못했다.“이현아.”여진숙이 그를 부축하면서 불렀다. 주소영도 달려와서 함께 부축했다.“들어가자. 뭐 볼 게 있다고.”여이현은 두 사람을 밀어내며 냉정하게 말했다.“배 비서!”그동안 투명 인간처럼 가만히 있던 배진호가 급히 다가와서 말했다.“제가 부축할게요!”여이현은 배진호의 부축을 받으며 침대로 돌아갔다.여진숙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머릿속이 너무 복잡했다. 여이현은 자꾸만 그녀에게 거리를 두었다. 아무래도 전에 그녀가 너무 매정하게 군 탓일 것이다.그래서 그녀는 이제 성깔을 죽이고 여이현에게 잘해주려고 했다. 그런데도 여이현은 낯선 사람보다도 못한 대우를 해줬다.딱히 할 말이 없었던 여진숙은 주소영에게 물었다.“너 이름이 뭐라고 했지?”주소영은 여진숙이 온지유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자신감을 얻었다. 그래서 어른이 좋아할 만한 태도로 얌전하게 대했다.“주소영입니다.”여진숙이 다시 물었다.“소영아
여진숙은 창백한 안색의 여이현을 다시 바라보며 생각했다.‘이 아가씨를 좋아한다는 것은 아직 승아를 잊지 못했다는 뜻이겠지. 일을 더 쉽게 해결할 수 있겠어.’주소영은 여이현을 힐끔거리면서 여진숙에게 말했다.“제가 이현 오빠 곁에서 돌보고 있을까요?”“그럴 순 없지.”여진숙은 그녀가 이곳에 있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임신 중인 애가 간병은 무슨... 이현이를 돌봐 줄 사람은 많아. 넌 나랑 집에 돌아가자꾸나. 넌 네 몸만 잘 돌보면 돼.”주소영은 그래도 여이현을 돌보고 싶었다. 온지유가 없는 지금이 그의 곁에 있을 수 있는 최적의 기회였다. 하지만 여진숙의 말에 반박할 수 없었던 그녀는 순순히 머리를 끄덕였다.“네, 아주머니.”그녀의 눈에는 아쉬움이 가득했다.하지만 괜찮았다. 여이현이 퇴원하면 집에 돌아갈 것이고, 그때는 자주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기 때문이다.여진숙은 노승아를 생각하며 마음이 복잡했다. 여이현이 다치고 입원해 있는 상황에서 온지유와 완전히 틀어졌으니, 노승아가 오면 그 틈을 탈 수 있다고 생각했다.마음속으로 줄곧 노승아를 며느리로 인정했던 그녀는 급히 핸드폰을 꺼내 들고 메시지를 보냈다.[승아야, 이현이 다쳤어. 빨리 와줘.]같은 시각, 노승아는 촬영장에서 메이크업을 받고 있었다. 30분 후 아주 중요한 씬을 촬영해야 했다.이 드라마는 유명한 감독의 작품이다. 비록 그녀가 주인공은 아니지만, 비중이 꽤 큰 조연 역할을 맡았다. 사실상 조연의 캐릭터가 주연보다 좋아서 여이현이 특별히 얻어준 것이다.이 드라마가 방송되면 무조건 큰 히트를 칠 것이다. 그렇다면 이후 어떤 작품이든 출연할 기회가 생긴다.노승아는 성공을 위해 열심히 촬영에 임하고 있었다. 당분간은 여이현에 대해서도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다. 이 시기만 잘 넘기면 곧 여이현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을다고 믿었기 때문이다.여이현이 그녀를 이렇게까지 도왔으니, 그의 마음속에 그녀가 있다는 것은 얼마든지 확인할 수 있었다. 조만간 이 이상의 관계도
노승아가 말했다.“저 병원에 가야 해요.”“승아 씨가 병원에 가면 촬영은 어떡해?”오랜 경력을 가진 감독조차도 병원을 핑계로 촬영을 중단하는 사람은 처음이었다.“실은 이현 오빠가 다쳐서 입원했어요. 아무래도 걱정돼서 빨리 가 봐야 할 것 같아요.”감독은 여이현의 이름을 듣고 조금 물러섰다. 애초에 노승아는 여이현의 추천으로 이 드라마에 출연하게 된 것이기 때문이다.“그래, 그럼 하루만 쉬지.”감독은 속으로 불만이 있으면서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다. 그러자 노승아는 웃으면서 말했다.“감사합니다, 감독님. 촬영이 끝나면 오빠랑 함께 식사 대접할게요.”노승아는 황급히 촬영장을 떠났다. 다른 배우들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투덜거렸다.“감독님, 노승아 한 사람 때문에 저희 스케줄 다 엉망진창이에요. 저는 어머니가 아픈데도 돌아가지 못했는데, 왜 노승아만 특별 대우를 받는 거예요?”감독은 차갑게 대답했다.“노승아라서 그래. 내가 낙하산을 무슨 수로 이겨.”이 말에 배우들은 전부 입을 다물었다.“노승아는 도대체 뭐가 저렇게 당당할까요?”매니저의 말에 장다희는 쓴웃음을 지으면서 대답했다.“감독님이 저렇게 말씀하셨는데 어떡하겠어. 노승아는 우리랑 다르잖아.”“하긴, 아주 많이 다르죠. 노승아는 연기의 연자도 모르잖아요. 인공 눈물을 써야 눈물 흘릴 수 있는 주제에 무슨 촬영을 한다고...”장다희는 무표정한 얼굴로 현실을 받아들였다.“사람마다 타고난 운명이 다른 법이야. 어떤 사람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주연인가 보지.”장다희는 밑바닥에서부터 올라왔다. 그녀는 노승아와 같은 사람들을 하도 많이 봐서 이제는 놀랍지도 않았다.노승아는 첫 작품부터 중요한 배역을 맡았다. 이미 다른 배우들보다 몇 단계 위에 있다는 말이다.감독은 투자자의 낙하산인 그녀에게 언제나 특별 대우를 해왔다. 여이현의 눈치를 보면서 그녀에게만 최고의 스태프를 제공했다. 이건 주연도 없는 대우였다.노승아의 주위에는 또 여이현이 배치한 일고여덟 명의 조수가 있었다. 그중 아무도 그
아무리 화가 나도 자신의 몸을 함부로 대하면 안 된다. 하지만 여이현은 배진호의 말이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그의 머릿속에는 온지유의 냉정한 뒷모습으로 가득했다.‘감히 나보다 먼저 등을 돌려?’여이현은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온지유한테 전화해요.”배진호는 잠시 멍해졌다. 여이현이 무엇을 하려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두 사람의 결혼이 이 지경에 이른 것도 그에게는 큰 충격이었다.그동안 두 사람은 결혼 사실을 숨기고 있었다. 배진호는 온지유가 조용한 성격이라서 그런 줄 알았고, 여이현이 그녀의 생각을 존중해 그런 줄 알았다.하지만 결국 그것은 사랑 없는 결혼이었던 것이다.‘좀 안타깝네...’전에는 여이현이 온지유를 좋아한다고 생각했지만, 이제 보니 그렇게 좋아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배진호는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네, 대표님.”그는 온지유에게 전화를 걸었다.같은 시각, 온지유는 부모와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일찍이 퇴원하고 싶어 했던 온경준은 골절이 심각하지 않다는 의사의 진단을 받고 얼마 전 퇴원했다.병원에서 일어난 소란으로 인해 그들은 말을 잃었다. 표정도 잔뜩 처져 있었다.이때 경찰서에서 연락이 왔다. 장수희와 온채린은 명예훼손과 공공질서 위반 혐의로 경찰서에 있었고, 증거가 명확한 관계로 법적 책임을 져야 했다.경찰은 온지유에게 고소할 것이냐고 물었다. 온지유는 지금의 상황부터 정리한 후 경찰서에 가려고 했다.잠시 후 전화가 다시 울렸을 때 그녀는 당연히 경찰서에서 온 전화인 줄 알았다. 그래서 자리를 피하며 정미리에게 말했다.“엄마, 저 전화 좀 받을게요.”“그래.”정미리는 곧 이혼할 마당에 온지유가 시댁에 있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생각했다.“지유야, 네 방은 금방 정리해 놓을게. 당분간 여기서 지내자.”온지유는 고개를 끄덕이며 밖으로 나가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사모님...”배진호는 일단 입을 열었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온지유는 배진호의 목소리를 알아채고 물었다.“무슨 일인가요?”그녀는
배진호는 다시 여이현을 바라보며 말했다.“스웨터는 왼쪽 드레스룸에 있으니, 도우미한테 말하면 된다고 하십니다.”여이현이 미간을 찌푸렸다.“외투는요? 베이지색 외투.”“그 외투는 옷장에 걸려있어요.”온지유가 전화 건너편에서 듣고 대답했다.“스웨터는 됐고 양복을 챙겨줘. 파란색 넥타이도 같이.”“하... 파란색 넥타이는 여러 개 있어요. 어떤 걸 말씀하시는 거죠?”“세로 줄무늬 있는 거.”“그건 넥타이 상자 28번째 칸에 있어요.”온지유는 이제 여이현의 질문을 예상한 듯 한꺼번에 말을 퍼부었다.“양복과 셔츠는 드라이클리닝 맡긴 걸 제외하고 모두 옷장에 있어요. 겨울옷은 제가 분류해서 드레스룸에 정리해 놨어요. 도우미 아주머니한테 말하면 금방 찾을 수 있을 거예요. 넥타이는 모두 같은 곳에 있고, 칸마다 색깔별로 분류해 뒀어요. 배 비서님이 가도 틀릴 일 없을 거예요...”여이현이 무엇을 묻든 온지유는 바로 답할 수 있었다. 그녀는 외투, 스웨터, 심지어 넥타이의 무늬와 손목시계의 브랜드까지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굳이 찾아가지 않아도 그녀는 술술 대답할 수 있었다. 여이현의 비서로 일한 3년 동안 그의 취향과 스타일을 완벽하게 파악한 덕분이었다.그녀는 이를 비서로서의 본분, 그리고 아내로서의 책임이라고 생각했다.온지유가 말을 마친 다음 전화 건너편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오랫동안 대답이 없자,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배 비서님, 더 필요한 게 있을까요?”배진호는 당황한 표정으로 여이현을 바라보았다. 여이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얼굴에 불쾌한 기색이 역력했다. 온지유가 빈틈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온지유도 알았다. 여이현이 일부러 트집을 잡으려고 한다는 것을 말이다. 그녀는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았다.“다른 일 없으면 이만 끊을게요.”온지유는 배진호가 대답할 틈도 없이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리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예전 같으면 그녀는 여이현이 필요로 하는 것을 곧바로 배달해 줬을 것이다. 지금 와
“네, 그럼 부탁드릴게요.”배진호는 정중하게 말하며 여이현의 눈치를 살폈다. 다행히 여이현의 안색은 약간 풀렸고 그도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온지유는 원래 집에서 밥 먹으려고 했지만, 이제는 그럴 수 없게 되었다. 그녀는 침실을 정리하는 정미리에게 말했다.“엄마, 저 잠깐 나가 봐야 해서 먼저 식사하세요.”정미리가 고개를 들었다.“무슨 일이니?”“회사 일 때문에요.”정미리는 온지유에게 다가가 말했다.“지유야, 이만 퇴사하고 다른 일을 찾는 건 어떻겠니? 세상에 좋은 직장은 많단다.”이혼한 후에도 여이현의 곁에 남아서 일하는 건 아주 어색한 일이다. 그래서 정미리는 내심 그녀가 퇴사하기를 바랐다.“알겠어요.”온지유도 당연히 같은 생각이다. 그녀는 당장이라도 여이현에게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러니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은 단호한 정리였다.밖으로 나간 온지유는 다시 여이현의 집으로 돌아갔다. 도우미들은 여전히 그녀를 사모님이라고 부르면서 인사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느껴지는 순간이었다.온지유는 신발을 벗으며 도우미에게 물었다.“스웨터를 못 찾았다고요?”자초지종을 몰랐던 도우미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되물었다.“무슨 스웨터요?”온지유는 고개를 들었다.“대표님이 찾아달라고 연락하지 않았나요?”“아뇨, 대표님은 전화가 없으셨는데...”온지유는 침묵에 잠겼다. 여이현이 애초에 전화하지 않았다는 것을 이제야 깨달았기 때문이다.“지유 씨?”한 여자의 목소리에 온지유는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주소영은 식탁에 앉아서 보양식을 먹고 있었다.온지유는 그녀의 차림새를 묵묵히 바라봤다. 구석에 가만히 앉아 있던 볼품없는 소녀가 이제는 명품을 걸치고 있었고 혈색도 부쩍 좋아졌다. 마치 이 집의 안주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이다.그녀는 이 집에서 살기로 했다. 이건 여진숙이 말을 꺼내고, 여이현이 묵인한 일이다.주소영은 손에 들고 있던 숟가락을 내려놓고 몸을 일으켰다.“지유 씨라고 부르는 건 너무 서먹한 것 같아서 그냥 언니라고 부를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