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경준은 오늘에야 여진숙의 입을 통해 진실을 알게 되었다. 그는 온지유를 바라보며 물었다.“지유야, 너 정말 돈 때문에 결혼한 거니?”온지유는 안색이 어두워지더니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그게...”“사돈어른이 좋은 사람인 건 인정해. 하지만 실패한 결혼을 억지로 유지할 필요는 없어. 빚진 돈은 우리가 어떻게든 갚을게.”정미리도 할 말이 없었다. 좋은 사윗감을 찾아서 딸을 시집보낸 줄 알았는데, 결국에는 이런 꼴이 났으니 말이다.이제 이혼하지 않더라도 두 사람의 결혼은 파국에 다다랐다. 더 이상 고집부릴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온지유도 억지로 버틸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알았어요.”여이현은 온지유를 바라봤다. 그녀가 무슨 말을 할지 궁금한 표정이었다.온지유는 솔직하게 말했다.“더 이상 숨길 것도 없겠네요. 저희는 3년의 기한을 두고 계약 결혼을 했어요. 20억 원에 3년을 저당 잡힌 셈이죠.”이 말을 하는 동안 온지유의 눈가에는 왠지 모르게 눈물이 맺혔다. 그녀는 애써 참으며 계속 말했다.“3년이 지나면 저희는 완전히 남남이 되는 거예요.”사람들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정미리도 지금껏 몰랐던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뭐? 둘이 3년만 결혼한다고?”“네, 딱 3년뿐이에요. 그러니까 더 이상 싸울 필요 없어요. 결국엔 이혼할 거니까요. 어떤 문제가 있던 다 시간이 해결해 줄 거예요.”여진숙은 계약에 대해 알게 된 후 더 할 말이 없어졌다.여이현의 안색은 아주 차가웠다. 주먹을 꽉 움켜쥔 그는 온지유의 말에 단단히 열 받은 것 같았다.“콜록콜록...”그는 기침을 참지 못했다. 여진숙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이현아, 괜찮니? 빨리 들어가서 누워. 수술이 끝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여이현은 입술을 꽉 다물며 여진숙의 부축을 거부했다.어찌 됐든 여이현의 도움에 고마웠던 온경준은 불쑥 끼어들어서 말했다.“이현아, 오늘은 우리 지유를 구해줘서 고맙다.”아버지로서 그녀는 당연히 딸을 보호
양쪽 집안 사람들은 동시에 놀란 표정을 지었다.여진숙은 주소영을 바라보며 충격에 빠진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렇게 한참 기다리다가 다시 물었다.“방금 뭐라고 했어? 내 아들의 아이를 가졌다고?”주소영은 마음이 불안했다. 이런 말을 꺼낸 결과를 몰랐기 때문이다.하지만 더 이상 물러설 곳은 없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네, 저... 대표님의 아이를 가졌어요.”이번에는 모두가 똑똑히 들었다. 처음 만난 여자가 여이현의 아이를 가졌다는 사실을 말이다.온경준과 정미리는 잠시 넋이 나갔다가 얼굴이 일그러졌다. 무엇보다도 여이현이 다른 여자를 만났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온지유가 그동안 여씨 가문에서 어떤 삶을 살았는지 안 봐도 짐작할 수 있었다. 반대로 여진숙은 매우 기뻤다. 그녀의 입장에서 상대가 누구인지는 크게 상관없었다. 그저 여씨 가문의 후손을 낳아주기만 하면 되었다. “그게 정말이니?”여진숙은 급 환한 미소를 지으면서 물었다.“임신한 지는 몇 달 되었니?”여진숙이 관심을 보이는 것을 보고 주소영은 약간 놀란 표정을 지었다.‘일이 생각보다 훨씬 쉽겠는데...?’“그게... 한 달 좀 넘었어요.”여진숙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아직 티가 안 나겠구나. 초기에는 무조건 조심해야 해. 이현이도 참... 이런 일은 나한테 말해줬어야지.”여진숙은 주소영의 손을 잡으며 친절하게 대했다. 곁에서 지켜보고 있던 여이현의 얼굴은 점점 굳어갔다.“아직 확정되지 않은 일을 말해서 뭐 해요.”여진숙은 주소영이 온지유를 난처하게 만든 것만으로도 만족스러웠다. 게다가 아이까지 있다니, 더할 나위 없이 기뻤다.“이현아, 자신의 명예를 걸고 이런 거짓말을 할 여자는 없단다. 이 아가씨가 누군지 소개해 봐.”여이현은 입을 꾹 다물었다.모든 증거가 주소영이 그의 방에 들어갔다고 나타냈다. 하지만 그의 직감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었다.그는 여러 번 조사를 지시했지만, 완전히 사라진 CCTV 기록 탓에 아무것도 알아낼 수 없었다. 더군다
온지유는 여진숙의 성격을 알고 있었다. 그녀가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단지 자신의 잘못된 행동을 합리화하기 위해서였다.정미리는 원래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지만, 여진숙의 발언에 화가 치밀어 올라 도무지 참을 수가 없었다.“이런 일이 있는데도 참 당당하네요. 착각하지 마요, 이 관계에서 잘못된 건 결혼 중에 다른 여자를 만나 임신까지 시킨 당신 아들이니까요!”여진숙이 반박했다.“당신 딸년이 애를 낳지 못하니까 내 아들이 겉도는 거 아니에요!”여이현이 차갑게 말했다.“그만해요!”여진숙은 점점 창백해지는 그의 얼굴을 보고 말을 멈추었다.“알았어, 그만할게. 얼른 침대에 가서 누워 있자.”이때 온경준이 말했다.“지유야, 이제 그만하고 돌아가자.”온지유도 이곳에서 백번 말해봤자 소용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알았어요, 아빠.”그녀는 묵묵히 온경준의 곁으로 걸어갔다.그녀의 단호한 뒷모습을 바라보며 여이현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그녀를 끝까지 바라보았지만, 끝내 붙잡는 말을 하지 못했다.“이현아.”여진숙이 그를 부축하면서 불렀다. 주소영도 달려와서 함께 부축했다.“들어가자. 뭐 볼 게 있다고.”여이현은 두 사람을 밀어내며 냉정하게 말했다.“배 비서!”그동안 투명 인간처럼 가만히 있던 배진호가 급히 다가와서 말했다.“제가 부축할게요!”여이현은 배진호의 부축을 받으며 침대로 돌아갔다.여진숙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머릿속이 너무 복잡했다. 여이현은 자꾸만 그녀에게 거리를 두었다. 아무래도 전에 그녀가 너무 매정하게 군 탓일 것이다.그래서 그녀는 이제 성깔을 죽이고 여이현에게 잘해주려고 했다. 그런데도 여이현은 낯선 사람보다도 못한 대우를 해줬다.딱히 할 말이 없었던 여진숙은 주소영에게 물었다.“너 이름이 뭐라고 했지?”주소영은 여진숙이 온지유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자신감을 얻었다. 그래서 어른이 좋아할 만한 태도로 얌전하게 대했다.“주소영입니다.”여진숙이 다시 물었다.“소영아
여진숙은 창백한 안색의 여이현을 다시 바라보며 생각했다.‘이 아가씨를 좋아한다는 것은 아직 승아를 잊지 못했다는 뜻이겠지. 일을 더 쉽게 해결할 수 있겠어.’주소영은 여이현을 힐끔거리면서 여진숙에게 말했다.“제가 이현 오빠 곁에서 돌보고 있을까요?”“그럴 순 없지.”여진숙은 그녀가 이곳에 있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임신 중인 애가 간병은 무슨... 이현이를 돌봐 줄 사람은 많아. 넌 나랑 집에 돌아가자꾸나. 넌 네 몸만 잘 돌보면 돼.”주소영은 그래도 여이현을 돌보고 싶었다. 온지유가 없는 지금이 그의 곁에 있을 수 있는 최적의 기회였다. 하지만 여진숙의 말에 반박할 수 없었던 그녀는 순순히 머리를 끄덕였다.“네, 아주머니.”그녀의 눈에는 아쉬움이 가득했다.하지만 괜찮았다. 여이현이 퇴원하면 집에 돌아갈 것이고, 그때는 자주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기 때문이다.여진숙은 노승아를 생각하며 마음이 복잡했다. 여이현이 다치고 입원해 있는 상황에서 온지유와 완전히 틀어졌으니, 노승아가 오면 그 틈을 탈 수 있다고 생각했다.마음속으로 줄곧 노승아를 며느리로 인정했던 그녀는 급히 핸드폰을 꺼내 들고 메시지를 보냈다.[승아야, 이현이 다쳤어. 빨리 와줘.]같은 시각, 노승아는 촬영장에서 메이크업을 받고 있었다. 30분 후 아주 중요한 씬을 촬영해야 했다.이 드라마는 유명한 감독의 작품이다. 비록 그녀가 주인공은 아니지만, 비중이 꽤 큰 조연 역할을 맡았다. 사실상 조연의 캐릭터가 주연보다 좋아서 여이현이 특별히 얻어준 것이다.이 드라마가 방송되면 무조건 큰 히트를 칠 것이다. 그렇다면 이후 어떤 작품이든 출연할 기회가 생긴다.노승아는 성공을 위해 열심히 촬영에 임하고 있었다. 당분간은 여이현에 대해서도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다. 이 시기만 잘 넘기면 곧 여이현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을다고 믿었기 때문이다.여이현이 그녀를 이렇게까지 도왔으니, 그의 마음속에 그녀가 있다는 것은 얼마든지 확인할 수 있었다. 조만간 이 이상의 관계도
노승아가 말했다.“저 병원에 가야 해요.”“승아 씨가 병원에 가면 촬영은 어떡해?”오랜 경력을 가진 감독조차도 병원을 핑계로 촬영을 중단하는 사람은 처음이었다.“실은 이현 오빠가 다쳐서 입원했어요. 아무래도 걱정돼서 빨리 가 봐야 할 것 같아요.”감독은 여이현의 이름을 듣고 조금 물러섰다. 애초에 노승아는 여이현의 추천으로 이 드라마에 출연하게 된 것이기 때문이다.“그래, 그럼 하루만 쉬지.”감독은 속으로 불만이 있으면서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다. 그러자 노승아는 웃으면서 말했다.“감사합니다, 감독님. 촬영이 끝나면 오빠랑 함께 식사 대접할게요.”노승아는 황급히 촬영장을 떠났다. 다른 배우들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투덜거렸다.“감독님, 노승아 한 사람 때문에 저희 스케줄 다 엉망진창이에요. 저는 어머니가 아픈데도 돌아가지 못했는데, 왜 노승아만 특별 대우를 받는 거예요?”감독은 차갑게 대답했다.“노승아라서 그래. 내가 낙하산을 무슨 수로 이겨.”이 말에 배우들은 전부 입을 다물었다.“노승아는 도대체 뭐가 저렇게 당당할까요?”매니저의 말에 장다희는 쓴웃음을 지으면서 대답했다.“감독님이 저렇게 말씀하셨는데 어떡하겠어. 노승아는 우리랑 다르잖아.”“하긴, 아주 많이 다르죠. 노승아는 연기의 연자도 모르잖아요. 인공 눈물을 써야 눈물 흘릴 수 있는 주제에 무슨 촬영을 한다고...”장다희는 무표정한 얼굴로 현실을 받아들였다.“사람마다 타고난 운명이 다른 법이야. 어떤 사람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주연인가 보지.”장다희는 밑바닥에서부터 올라왔다. 그녀는 노승아와 같은 사람들을 하도 많이 봐서 이제는 놀랍지도 않았다.노승아는 첫 작품부터 중요한 배역을 맡았다. 이미 다른 배우들보다 몇 단계 위에 있다는 말이다.감독은 투자자의 낙하산인 그녀에게 언제나 특별 대우를 해왔다. 여이현의 눈치를 보면서 그녀에게만 최고의 스태프를 제공했다. 이건 주연도 없는 대우였다.노승아의 주위에는 또 여이현이 배치한 일고여덟 명의 조수가 있었다. 그중 아무도 그
아무리 화가 나도 자신의 몸을 함부로 대하면 안 된다. 하지만 여이현은 배진호의 말이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그의 머릿속에는 온지유의 냉정한 뒷모습으로 가득했다.‘감히 나보다 먼저 등을 돌려?’여이현은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온지유한테 전화해요.”배진호는 잠시 멍해졌다. 여이현이 무엇을 하려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두 사람의 결혼이 이 지경에 이른 것도 그에게는 큰 충격이었다.그동안 두 사람은 결혼 사실을 숨기고 있었다. 배진호는 온지유가 조용한 성격이라서 그런 줄 알았고, 여이현이 그녀의 생각을 존중해 그런 줄 알았다.하지만 결국 그것은 사랑 없는 결혼이었던 것이다.‘좀 안타깝네...’전에는 여이현이 온지유를 좋아한다고 생각했지만, 이제 보니 그렇게 좋아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배진호는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네, 대표님.”그는 온지유에게 전화를 걸었다.같은 시각, 온지유는 부모와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일찍이 퇴원하고 싶어 했던 온경준은 골절이 심각하지 않다는 의사의 진단을 받고 얼마 전 퇴원했다.병원에서 일어난 소란으로 인해 그들은 말을 잃었다. 표정도 잔뜩 처져 있었다.이때 경찰서에서 연락이 왔다. 장수희와 온채린은 명예훼손과 공공질서 위반 혐의로 경찰서에 있었고, 증거가 명확한 관계로 법적 책임을 져야 했다.경찰은 온지유에게 고소할 것이냐고 물었다. 온지유는 지금의 상황부터 정리한 후 경찰서에 가려고 했다.잠시 후 전화가 다시 울렸을 때 그녀는 당연히 경찰서에서 온 전화인 줄 알았다. 그래서 자리를 피하며 정미리에게 말했다.“엄마, 저 전화 좀 받을게요.”“그래.”정미리는 곧 이혼할 마당에 온지유가 시댁에 있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생각했다.“지유야, 네 방은 금방 정리해 놓을게. 당분간 여기서 지내자.”온지유는 고개를 끄덕이며 밖으로 나가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사모님...”배진호는 일단 입을 열었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온지유는 배진호의 목소리를 알아채고 물었다.“무슨 일인가요?”그녀는
배진호는 다시 여이현을 바라보며 말했다.“스웨터는 왼쪽 드레스룸에 있으니, 도우미한테 말하면 된다고 하십니다.”여이현이 미간을 찌푸렸다.“외투는요? 베이지색 외투.”“그 외투는 옷장에 걸려있어요.”온지유가 전화 건너편에서 듣고 대답했다.“스웨터는 됐고 양복을 챙겨줘. 파란색 넥타이도 같이.”“하... 파란색 넥타이는 여러 개 있어요. 어떤 걸 말씀하시는 거죠?”“세로 줄무늬 있는 거.”“그건 넥타이 상자 28번째 칸에 있어요.”온지유는 이제 여이현의 질문을 예상한 듯 한꺼번에 말을 퍼부었다.“양복과 셔츠는 드라이클리닝 맡긴 걸 제외하고 모두 옷장에 있어요. 겨울옷은 제가 분류해서 드레스룸에 정리해 놨어요. 도우미 아주머니한테 말하면 금방 찾을 수 있을 거예요. 넥타이는 모두 같은 곳에 있고, 칸마다 색깔별로 분류해 뒀어요. 배 비서님이 가도 틀릴 일 없을 거예요...”여이현이 무엇을 묻든 온지유는 바로 답할 수 있었다. 그녀는 외투, 스웨터, 심지어 넥타이의 무늬와 손목시계의 브랜드까지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굳이 찾아가지 않아도 그녀는 술술 대답할 수 있었다. 여이현의 비서로 일한 3년 동안 그의 취향과 스타일을 완벽하게 파악한 덕분이었다.그녀는 이를 비서로서의 본분, 그리고 아내로서의 책임이라고 생각했다.온지유가 말을 마친 다음 전화 건너편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오랫동안 대답이 없자,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배 비서님, 더 필요한 게 있을까요?”배진호는 당황한 표정으로 여이현을 바라보았다. 여이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얼굴에 불쾌한 기색이 역력했다. 온지유가 빈틈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온지유도 알았다. 여이현이 일부러 트집을 잡으려고 한다는 것을 말이다. 그녀는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았다.“다른 일 없으면 이만 끊을게요.”온지유는 배진호가 대답할 틈도 없이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리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예전 같으면 그녀는 여이현이 필요로 하는 것을 곧바로 배달해 줬을 것이다. 지금 와
“네, 그럼 부탁드릴게요.”배진호는 정중하게 말하며 여이현의 눈치를 살폈다. 다행히 여이현의 안색은 약간 풀렸고 그도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온지유는 원래 집에서 밥 먹으려고 했지만, 이제는 그럴 수 없게 되었다. 그녀는 침실을 정리하는 정미리에게 말했다.“엄마, 저 잠깐 나가 봐야 해서 먼저 식사하세요.”정미리가 고개를 들었다.“무슨 일이니?”“회사 일 때문에요.”정미리는 온지유에게 다가가 말했다.“지유야, 이만 퇴사하고 다른 일을 찾는 건 어떻겠니? 세상에 좋은 직장은 많단다.”이혼한 후에도 여이현의 곁에 남아서 일하는 건 아주 어색한 일이다. 그래서 정미리는 내심 그녀가 퇴사하기를 바랐다.“알겠어요.”온지유도 당연히 같은 생각이다. 그녀는 당장이라도 여이현에게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러니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은 단호한 정리였다.밖으로 나간 온지유는 다시 여이현의 집으로 돌아갔다. 도우미들은 여전히 그녀를 사모님이라고 부르면서 인사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느껴지는 순간이었다.온지유는 신발을 벗으며 도우미에게 물었다.“스웨터를 못 찾았다고요?”자초지종을 몰랐던 도우미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되물었다.“무슨 스웨터요?”온지유는 고개를 들었다.“대표님이 찾아달라고 연락하지 않았나요?”“아뇨, 대표님은 전화가 없으셨는데...”온지유는 침묵에 잠겼다. 여이현이 애초에 전화하지 않았다는 것을 이제야 깨달았기 때문이다.“지유 씨?”한 여자의 목소리에 온지유는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주소영은 식탁에 앉아서 보양식을 먹고 있었다.온지유는 그녀의 차림새를 묵묵히 바라봤다. 구석에 가만히 앉아 있던 볼품없는 소녀가 이제는 명품을 걸치고 있었고 혈색도 부쩍 좋아졌다. 마치 이 집의 안주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이다.그녀는 이 집에서 살기로 했다. 이건 여진숙이 말을 꺼내고, 여이현이 묵인한 일이다.주소영은 손에 들고 있던 숟가락을 내려놓고 몸을 일으켰다.“지유 씨라고 부르는 건 너무 서먹한 것 같아서 그냥 언니라고 부를게
그러나 곧 인명진의 시선이 은서우에게로 향했다.“뭐 생각나는 거 있나요?”은서우는 고개를 저었다가 망설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생각은 있지만 실제로 그 사람을 만나기 전까지는 모든 생각이 단지 생각일 뿐이죠. 원장님, 그건 원장님이 가르쳐준 거예요.”고개를 든 그녀의 두 눈은 초롱초롱 밝게 빛나고 있었다. 인명진은 그런 은서우를 바라보며 눈부신 그녀의 모습에서 눈길을 뗄 수 없었다.인명진은 두 손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그럼 지금 바로 짐을 챙겨서 저를 따라오세요.”그 말을 들은 은서우가 멍하니 서 있는 모습을 보며 그는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은서우 씨가 말했잖아요. 실제로 만나기 전에는 함부로 결론을 내릴 수 없다고 말이에요. 그럼 지금 바로 가서 봐야죠.”이건 정말 놀라운 일이었다!아니, 놀라움보다는 충격에 가까웠다. 너무 갑작스러워서 은서우는 무엇을 준비해야 할지 몰랐다.‘멸균 장갑과 도구, 그리고 노트도 가져가야 하나?’“거기 다 있으니 이것들은 필요 없어요.”인명진은 이 말과 함께 은서우의 노트만 챙기고 떠났다.“아.”은서우는 자신의 머리를 탁 치며 왜 그렇게 간단한 걸 생각하지 못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정말 기쁨에 겨워서 정신이 없었던 모양이다.환자는 병원이 아닌 병원에서 수십 킬로미터 떨어진 한 요양원에 있었다.겉보기에는 요양원이었지만 실은 연구소였다. 단지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도록 요양원으로 위장한 것뿐이었다. 실제로 요양을 받는 노인은 이곳에 단 한 명도 없었다. 그곳에는 오직 멸균 복이나 흰 가운을 입은 연구원들만이 있었다.요양원으로 들어가려면 신원 확인이 필요했다.인명진이 목에 걸고 있는 카드를 책임자에게 보여줄 때 은서우가 사진을 힐끔 훔쳐보았다.카드에는 인명진의 증명사진이 붙어 있었다. 사진 속의 그는 단정하고 정직해 보였으며 또한 날카롭고 과묵해 보였다.인명진이 먼저 들어가며 말했다.“뭐해요? 멍하니 서 있지 말고 어서 따라오세요.”그 말에 정신을 차린 은서우는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거지? 원장님은 그녀에게 그렇게 잘해주시는데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지?평소 인간관계에 둔감했던 은서우는 드디어 자신의 이상함을 깨달았고 인명진에 대한 감사로 생긴 친근감이 순식간에 크게 줄어들었다.심지어 물러나고 싶은 충동까지 생겼다.인명진은 그녀에게 뭔가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다고 생각했다.“왜 말을 안 하죠? 마음에 걸리는 게 있다면 지금 말해도 돼요. 마침 같이 해결할 수 있으니깐요.”인명진은 그녀를 위하는 마음으로 이런 말을 한 것이다.하지만 은서우가 어떻게 감히 그에게 자신의 마음을 알리겠는가!인명진이 그녀의 마음을 알게 된 후 그 차가운 얼굴에 떠오르는 혐오스러운 표정을 상상하자 날카로운 무언가에 찔린 것처럼 가슴 한구석에 아릿한 고통이 퍼졌다.인명진의 의혹이 담긴 눈빛을 마주한 그녀는 마음을 애써 안정시키고 아무 일도 없는 듯 웃으며 말했다.“아니에요. 온지유 씨는 그날 저와 아주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었어요.”말을 마치자 남자의 미간이 펴지는 것을 본 은서우는 순간 죄책감이 들었다. 그녀는 처음으로 원장님에게 거짓말을 했고 진실 반 거짓 반으로 그를 속여넘겼다.인명진은 아무런 이상을 느끼지 못했다. 그는 여성의 마음을 이해할 줄 아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를 좋아하는 여성들이 다가와서야 비로소 이상함을 느낄수 있을 정도로 둔감한 스타일이었다.게다가 그는 은서우를 믿고 있었다.인명진은 그녀가 온지유의 행동을 개의치 않는다는 것을 알고 평소보다 훨씬 부드러운 태도로 입을 열었다.“서 있지 말고 이리 와서 앉으세요. 이것도 한번 보세요. 최근 검사 결과에요.”인명진이 건넨 것은 혈액 검사 보고서였다.드디어 본론으로 들어갔다.은서우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검사 결과지를 보고 또 보았다. 여러번 훑어본 뒤 그녀는 눈살을 찌푸리며 계속 고개를 저었다.“이상해요, 이건 너무 이상해요. 이 세포 수가 왜 또 몇 배나 늘어난 거죠?”인명진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그게 바로 제가 은서우 씨
은서우는 상황을 보고 급히 말했다. “제가 가서 남은 게 있는지 한번 찾아볼게요.”“괜찮아요, 그냥 장난이었어요.”온지유는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고 무의식적으로 매력을 발하며 그녀에게 미소를 짓고 자리를 떠났다.그녀가 떠난 후, 장선영이 놀란 얼굴로 다가왔다.“저는 이제야 왜 사람들이 그 소문을 믿는지 알 것 같아요. 이렇게 아름다우신데 정말 마음을 뺏기지 않을 수 없겠죠. 제가 원장님이라면 저도 반했을 거예요.”그 말에 은서우는 목구멍이 조여오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자신이 왜 그러는지 알지 못했다.그저 인명진의 마음에 누군가가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이유 없이 막히고 불편했다.결국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장선영은 조금 전 온지유를 직접 보고 그녀의 대화와 표정에서 사실은 그들이 생각했던 것과는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더 이상 사생아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그녀는 그 일에 깊이 휘말리고 싶지 않았기에 그들의 수다에 참여하지 않았다.얼마 지나지 않아, 여러 간호사가 해고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예외 없이, 모두 사생아에 관한 소문을 퍼뜨렸던 사람들이었다.장선영도 그 소문을 퍼뜨린 적이 있었기에 은서우에게 깊은 감사를 표했다.“서우 씨가 저에게 알려줘서 정말 다행이에요. 그렇지 않았다면 지금 저도 해고되었을 거예요.”은서우는 감사하다며 식사를 대접하겠다는 장선영을 큰일 아니니 괜찮다고 거절했다.이때 갑자기 모르는 간호사가 달려와서 말했다.“은 선생님, 원장님께서 부르십니다.”은서우는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인명진이 이때 그녀를 부르는 이유가 무엇일까?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녀는 서둘러 물건을 정리하고 원장실로 찾아갔다.은서우가 문을 두드리며 물었다.“원장님, 저예요. 들어가도 될까요?”안에서 차가운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들어오세요.”은서우가 들어갔을 때 인명진은 바쁘게 일하고 있었다.문이 열리는 소리를 듣고 그는 고개를 들고 은서우를 바라보았다. 약간 옅은 눈동자는 그에게 접근하기 어려운 분위기
은서우는 한숨을 내쉬며 때마침 잘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윤별이가 일부러 자신을 도와준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어린아이에게 어른들의 생각을 적용할 수는 없으니까.하지만 실제로 윤별은 어린 나이에 철이 들었다.온지유는 귤을 손에 쥔 윤별을 부드럽게 바라보며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너 입만 살았구나. 너를 데리고 온 건 병원에서 먹을 것을 찾으라고 한 게 아니야.”은서우가 급히 손을 저으며 온지유를 말렸다.그 후 분위기가 갑자기 조용해졌다.바닥을 바라보며 조용히 앉아 있는 온지유는 말이 없을 때 아주 차분해 보였다. 말로 표현하자면 가을 낙엽처럼 고요하고 부드러운 느낌이었다.은서우는 그녀 앞에 앉아 깊은 생각에 빠졌다.이렇게 앉아만 있어도 끊임없이 매력을 풍기는 사람을 마주하니 정말 자신이 초라해지지 않기가 어려웠다.그녀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입을 열었다.“정말 죄송해요. 온지유 씨가 오실 줄 몰라서 미리 준비를 해놓지 못했어요. 일단 여기 앉아 계세요. 제가 나가서 뭐라도 좀 사 올게요.”온지유가 그녀를 불러세우며 부드럽고 편안한 어조로 말했다.“괜찮아요, 저는 그냥 친구를 보러 온 것뿐이에요.”그 말을 마친 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은서우는 고개를 숙이고 몰래 온지유를 살펴보았다. 그녀는 온지유도 지금 자신을 보고 있었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냥 두어 번 보는 것이 아니라 자세히 관찰하는 듯한 시선이었지만 눈에 띄지 않게 보았기에 은서우는 알아채지 못했다.은서우를 바라보는 온지유의 얼굴에 미소가 짙어졌다.온지유는 은지우가 예쁘기도 하고 착하다고 생각했기에 아주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지만 은서우는 점점 더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졌다.이번에 병원에서 발생한 일에 대해 온지유도 어느정도 알고 있었다.인명진이 너무 큰 소동을 일으켜서 여론이 일자 곧바로 여이현에게 부탁해 상황을 수습하고 사람을 찾아 사실을 밝히도록 해서 모르기가 어려웠다.온지유는 테이블 아래에서 은밀히 손가락으로 빠르게 휴대폰을 두드렸다. “
은서우는 장선영의 말에 문득 그 아이를 데리고 있던 여자의 얼굴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그리고 곧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바로 그때 장선영이 흥분된 표정으로 다가와 속삭였다.“저도 원래는 믿지 않았죠. 원장님이 그런 사람일 리가 없잖아요. 하지만 정말로 본 걸요!”은서우는 그녀의 갑작스러운 말에 신경이 곤두섰다.“뭘 봤는데요?”“그 소문 속의 사생아요.”“원장님께 사생아 같은 건 없어요. 장선영 씨가 잘못 본 거겠죠.”은서우는 인명진의 체면을 지키려고 애썼다.그녀가 알고 있는 바로는 인명진에게 지금까지 연애 상대도 없었는데 어떻게 그들의 말대로 몇 살짜리 아들이 있을 수 있겠는가?장선영은 은서우가 믿지 않는 것을 보고 더욱 열을 내며 그 아이를 보여주겠다고 했다.결국 은서우는 그녀의 손에 끌려갔다.“저기 봐요, 저 아이라니까요. 제가 거짓말한 게 아니라고요. 오늘 아침에 이 아이가 원장님을 찾아오는 걸 제가 직접 봤거든요. 지금은 곁에 어떤 여자분이 같이 있는데 원장님 부인인지 아닌지 모르겠네요.”장선영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방향에는 한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이 보였다.바로 그날 만났던 온지유였다. 온지유는 아직 은서우를 발견하지 못했다.이때 장선영이 더욱 흥분된 어조로 말했다.“다들 구석에서 몰래 보고 있어요. 서우 씨는 원장님이랑 친하죠? 저분 지금 원장님 사무실로 가는 것 같은 데 가서 물어볼래요?”은서우는 그 아름다운 여자에게서 시선을 돌리고 대답했다.“제가 뭘 물어봐요? 물어본다 해도...” 그녀에게 무슨 자격이 있겠는가?이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자 은서우는 깜짝 놀랐다.다행히 장선영은 그녀의 미세한 감정 변화를 눈치채지 못했고 은서우도 곧 마음을 가다듬었다. 은서우는 가슴을 쓰다듬으며 자신의 이상함을 눈치채고 깊이 생각하지 않으려고 애썼다.그녀는 구경하고 있는 장선영을 끌고 자리를 떴다.은서우가 그 여자에 관심이 없는 것을 보자 장선영은 이상하다는 듯이 말했다.“신기하네요. 어떻게 관심이 없을 수 있죠?”
눈가에 미소가 어린 인명진의 모습은 평소보다 친근해 보였다.“두 날 전부터 소태훈이 마약을 했다는 소식을 퍼뜨렸어요.”은서우는 순간 무슨 일이 발생했는지 깨달았다.인터넷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있어서 서로 생각이 달랐지만 신기하게도 마약에 대해서는 모두 일치하게 단호한 태도를 보였다.소태훈이 유언비어를 퍼뜨린 데다가 마약까지 했으니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그의 말을 더는 믿지 않을 것이다. 지금 댓글에서는 그녀를 나무라던 사람들이 돌아서서 소태훈을 비난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은서우가 제일 신경 쓰는 것은 사람들이 자기편을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결백을 밝히는 것이었다. 그리고 지금 누군가가 그녀의 무고함을 밝혀주었다.그녀는 마음속에 가득한 감동과 감사를 표현할 길이 없었다.“절대로 원장님을 실망하게 하지 않을게요.”그날 이후로 은서우는 밤낮으로 자료를 연구했다. 그 모습을 본 주변 사람들은 그녀가 일에 미쳐버린 것 같다고 했다.평소에 대화를 좀 나눴던 간호사 장선영은 점심시간이 다 됐는데 여전히 머리를 묻히고 열심히 일하는 은서우를 보며 말했다.“서우 씨, 그만 보세요! 지금 몇 시인지 봐봐요!”은서우는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네?”“그만 보세요! 이젠 점심시간인데 식당 안 갈 거예요?”“선영 씨 먼저 가요. 전 이거 끝내고 가야 해서요.”은서우는 다시 고개를 숙이고 손에 든 볼펜을 놀리며 자료를 연구하기 시작했다.장선영이 다가와 힐끔 보더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있잖아요. 서우 씨 저 한 가지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요.”은서우가 고개도 들지 않자 장선영은 그녀가 묵인한 것으로 생각하고는 말을 이어갔다.“요즘 모두 원장님이 서우 씨를 그 무슨 프로젝트에 참여시키려고 한다는 소문이 돌고 있거든요. 이름이 생명나무 프로젝트라고 하던데요?”그 말에 은서우는 동작을 멈추었다.생명나무 프로젝트, 바로 인명진이 그녀에게 맡긴 프로젝트의 이름이었다.이건 기밀 프로젝트였기에 그녀는 손에 든 자료를 덮고 장선
인명진은 은서우가 멍하니 있는 모습을 보며 말했다.“은서우 씨가 해낼 수 없다고 생각하나요?”은서우는 인명진이 이미 자신에게 충분히 많은 도움을 주었다고 생각했기에 그의 제안을 거절하려 했다. 하지만 거절하려던 말을 꺼내기 직전 그녀는 마음속으로부터 들려오는 희미한 목소리를 들었다.그건 야망의 목소리였다.어떤 사람들은 그냥 안정적으로 하루하루를 보내며 살아가고 싶어 한다. 물론 그렇게 살아가는 것도 나쁘지는 않지만 은서우는 아니다.그녀의 자신이 평범하게 살아가는 걸 받아들일 수 없었고 그 마음 덕분에 지난 몇 년 동안 아르바이트를 하며 어마어마한 돈을 벌어들일 수 있었다.어떤 사장님들은 그녀의 고용 기간이 끝나면 아쉬워하며 그녀를 붙잡기도 했다.은서우는 잠시 망설인 후 과감히 자신의 마음에 따라 결정했다.“아니요. 전 할 수 있어요. 다른 건 몰라도 이건 제가 잘할 수 있어요.”은서우는 그 진단 기록을 오랫동안 연구했고 과거에도 이런 증상을 전문적으로 연구한 적이 있었기에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그녀의 대답을 들은 인명진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좋아요, 은서우 씨가 그렇게 말했으니 이번 수술은 은서우 씨한테 맡깁니다. 하지만 저는 은서우 씨를 도와주지 않을 거니까 열심히 해보세요.”은서우는 이미 이를 예상하였다.이 질병은 매우 희귀했다.환자는 몸속의 세포 분열 속도가 너무 빨라서 노화가 느려졌고 이상을 느껴서 병원에 와서 검사를 받았지만 병원에서도 이런 병을 본 적이 없었다.소문은 마치 바람을 타고 퍼지는 불꽃처럼 퍼져나갔고 이 병은 의학계에서 큰 화제가 되었다.병원은 이 병을 연구 프로젝트에 추가했고 치료를 진행하는 동시에 연구를 시작했다.주목할 만한 점은 이 프로젝트가 시작될 당시 여러 방면에서 방해를 받았다는 것이다. 정확히 누가 한 짓인지는 알 수 없지만 누군가가 이 프로젝트를 막으려 했고 환자를 치료하는 대신 연구만 하려 했다.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인명진이 어떤 큰 인물을 불러들였기에 이 프로젝트가 통과
가뜩이나 하얀 피부라 붉은 손바닥 자국이 얼굴에 아주 선명하게 생겨났고 이 장면을 목격한 이들은 모두 간담이 서늘해졌다.이때 기세등등했던 연희진이 갑자기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죄책감 때문이 아니라 은서우의 눈빛이 두려웠기 때문이었다.“너 그게 무슨 눈길이야? 넌 잘못한 게 없다고 생각하는 거니?”“아닙니다.”은서우는 얼굴에서부터 전해져오는 아릿한 통증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아주 평온해 보였다. 그 통증이 그녀를 현실로 다시 돌아오게 했기에 고맙기만 할 따름이었다.“제가 오히려 엄마에게 고마워해야 하죠.”얼굴에서 느껴지는 고통은 그녀가 가족에 대한 환상에서 완전히 깨어나게 해주었다.연희진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그녀는 은서우가 약해 보일 때엔 마음대로 손찌검을 할 수 있었는데 은서우의 눈빛이 날카로워지자 예전처럼 괴롭힐 엄두가 나지 않았다.은서우는 연희진이 저도 모르게 움츠러드는 모습을 보며 문득 과거를 떠올렸다. 그녀 기억 속의 연희진은 항상 이런 모습이었다. 소심하고 겁이 많으며 본분만을 지키는 사람.연희진은 그저 옛 세대의 방식대로 살아왔을 뿐이었다.남편과 아들의 말은 절대적이었고 아이들이 그녀를 어떻게 대하든 무조건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저는 한때... 엄마가 불쌍하다고 생각했어요.”은서우가 웃으며 말을 이었다.“하지만 이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엄마의 고통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비롯된 것도 맞지만 그중 일부는 엄마가 자초한 거예요.”소상태는 두 사람의 대화를 더는 듣고 싶지 않았는지 헐떡이며 달려오더니 소리쳤다.“내 아들을 풀어줘!”은서우는 아무 표정 없이 무덤덤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죄송하지만, 그럴 수 없어요.”그녀의 대답에 화가 난 소상태가 손찌검을 들려 했다.그의 손이 은서우의 얼굴에 닿으려던 순간 어디서 나타났는지 모를 인명진이 그 손을 잡았다.인명진의 얼굴은 평소와는 달리 분노로 가득 차 있었고 마치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만 같았다. 그가 이 정도로 화가 나 있는 모습은 처음
소태훈의 그날 증상은 마약의 부작용으로 판명되었고 이로써 은서우에게 씌워졌던 혐의는 완전히 벗겨졌다.하지만 소태훈은 끝까지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이건 조작이야! 은서우, 우리가 너한테 얼마나 잘해줬는데... 너 어떻게 이럴 수 있어? 그러고도 사람이야?”경찰이 그를 끌어가려 했지만 소태훈은 끝까지 버티며 저항했다.그 소란에 병원 전체가 떠들썩해졌다.복도에는 사람들이 가득했고 수많은 시선이 은서우와 소태훈에게 쏠렸다.여기저기서 수군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은서우는 이제 신경 쓰지 않았다.그녀는 단단한 눈빛으로 소태훈을 바라보았다.“그래, 소씨 집안이 날 길러준 건 맞지. 그런데 그게 어쨌다고? 1200만 원은 이미 다 갚았어.”부유한 집안에 놓고 말하면 별것 아닐 수도 있지만 은서우에게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거액이었다. 평생 모아도 그런 돈을 마련할 수 없을 정도였다.‘소씨 가문 가족들이 나한테 써준 돈이 과연 1200만이나 될까? 아니, 100만이라도 될까? 학비도, 생활비도 다 내가 스스로 벌었는데... 소씨 집안 사람들이 날 조금이라도 챙겨준 적이 있었던가?’소씨 가문 사람 중에 그녀가 미련을 가졌던 건 오직 소태연뿐이었다. 하지만 이제 소태연도 세상에 없었다. 그렇다면 그녀도 더 이상 연연할 필요가 없는 곳이었다.소태훈은 소리를 질렀다.“그럼 내 동생은? 내 동생이 죽은 것도, 내 다리가 이렇게 된 것도 다 너 때문이야! 그것도 네가 갚아야 할 빚 아니야?”소태연을 떠올리는 순간, 은서우의 가슴속 깊은 상처가 다시 한번 아려왔다. 순간, 그녀의 몸이 미세하게 떨렸다.하지만 인명진을 떠올리는 순간, 그 불안한 감정은 점점 사라지는 것이었다.사실 그가 개입하지 않아도 온서우 혼자 해낼 수 있는 일이었다. 소태훈을 끌고 가 검사를 강제로 받게 하는 것쯤은 그녀 혼자서도 할 수 있었다.하지만 그럼에도 인명진은 나서서 그렇게 했다.깊이 생각해 보지는 않았지만 이제 와서 곱씹어보면 그는 온서우에게 방법을 보여주고 있는 것 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