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말에 박수혁이 미간을 찌푸렸다. 갑자기 나타난 여자가 베푸는 호의에 의심부터 앞서는 듯한 표정이었다.그 표정을 마주한 소은정의 눈동자가 흔들렸다.아, 날 못 알아보는 거구나.당신이 방금 전에 구한 사람이 나인데. 우리 벌써 세 번이나 마주쳤는데...그 눈빛에 오기가 생겨서일까?소은정은 박수혁의 두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대신 나랑 결혼해요.”......다시 지금. 소은정은 정신줄을 잡으려 애쓰며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어두운 바닷물을 바라본 순간 또다시 트라우마가 떠오르며 숨이 막혀왔다.그날 그녀를 바라보는 남자들의 시선과 그들이 내뱉던 조롱, 그녀를 구한 박수혁, 그리고 그 일을 계기로 시작된 3년간의 악몽...창백해진 얼굴의 소은정은 요트에 엎드려 한참 동안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어느새 원한빈이 물속으로 뛰어든지도 7분이 넘어가는데 여전히 바다는 파도 하나 없이 조용하기만 했다.정말 다급해진 소은정은 주위를 살피기 시작했다. 가장 가까운 보트와의 거리도 수백미터, 내 목소리가 닿을 수 있을까?소은정이 바닷가의 보트를 향해 소리쳤다.“살려주세요...”“살려주세요...”“제발요. 여기 사람이 죽어가요...”5분이 넘게 목이 다 쉴 정도로 소리쳤지만 보트 안에는 사람도 하나 없는지 누구도 나타나지 않았다. 힘없이 털썩 주저앉은 소은정의 두 눈에서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정말 죽은 걸까? 휴대폰도 없고... 아니, 휴대폰이 있다고 해도 먹통일 거야. 아니지. 요트에 긴급 구조 요청 용도로 사용되는 경보기 정도는 있지 않을까?잠깐 망설이던 소은정은 입술을 꾹 깨물고 일어서 경보기 앞으로 다가갔다. 버튼을 누르려던 순간, 푸흡 소리와 함께 물속에서 사람이 튀어나왔다.잠수복 차림의 원한빈이 커다란 상자를 끌고 요트에 한 손을 걸쳤다. 소은정은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달려가 바로 원한빈을 돕기 시작했다. 겨우 요트에 올라온 원한빈은 거친 숨을 몰아쉬더니 산소호흡기를 벗었다.“누나, 두 사람이 들어야 하는 상자를
순식간에 올라간 스피드에 중심을 잃은 소은정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자신이 이미 수십 미터 상공에 떠오른 걸 발견한 소은정은 비명을 질렀지만 곧 비릿한 망망대해가 그녀의 소리를 먹어버렸다.바람에 몸이 흔들리고 이대로 떨어지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 소은정은 심장이 밖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았지만 그런 기분도 잠시, 낙하산이 완전히 펼쳐지고 안정적으로 주행하기 시작하자 시원한 바닷바람에 기분이 상쾌해졌다.소은정은 고개를 숙여 산과 바다를 내려다보았다. 대자연에 비하면 그녀는 참으로 작고 약한 존재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강력하게 뜀박질을 하는 심장 박동을 느끼며 그래도 이렇게 힘차게 살아가고 있다는 어느 때보다 더 절실하게 느껴졌다.아, 이래서 사람들은 도전을 하고 모험을 하는 거구나. 한계를 돌파한다는 건 이런 기분이구나...이미 중심을 잡은 원한빈은 바로 소은정의 어깨를 잡고 방향을 조정해 주었다. 소은정은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지만 두 눈만은 별처럼 반짝였다.“너무 신나!”그 모습에 원한빈도 싱긋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곧 해안가에 정박된 보트들을 가리켰다. 보트들이 이어져서 가리키고 있는 글자를 확인한 소은정은 바로 미간을 찌푸렸다.HBS. 방송국 이름이었다.방송국? 뭐야? 웬 방송국 이름? 그쪽에서 이 예능 저작권을 산 건가?반면 원한빈은 처음에는 의아한 표정이었으나 곧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미션을 마치고 보트로 돌아온 두 사람은 바로 베이스캠프로 돌아가기 시작했다.한편, 항상 차분하고 차갑게만 보이던 소은정의 눈물에 네티즌들의 반응은 가히 폭발적이었다.“헐, 소은정 운다...”“진짜 놀랐나 본데? 어떡해...”“원한빈은 아무것도 모르는 눈치네. 방송으로 확인하세요!”......베이스캠프에 도착한 두 사람이 한참 동안 휴식을 취하고 나서야 박우혁, 유준열, 반시연 세 사람이 도착했다.반시연은 유준열에게 기댄 채 절뚝거리며 걷고 있었고 박우혁은 불쾌함을 감추지 않으며 혼자 성큼성큼 걸어오고 있었다.쎄한 분위기에 담당 VJ들도 세
눈썰미 좋은 시청자들이 이 모습을 놓칠 리가 없었고 바로 반시연에 대한 악플이 쏟아졌다.“헐, 뭐야? 반시연 저거 꾀병이네. 아까는 왼쪽 다리를 절뚝거리다가 지금은 오른쪽 다리를 절뚝거리고 있잖아.”“다들 생존 다큐 촬영 중인데 혼자 비련의 여주인공 코스프레? 뭔 짓임?”“이게 무슨 민폐야. 그래서 은정 언니가 바로 팀원을 교체했던 거구나.”“난 소은정이 일부러 도도하게 구는 줄 알았는데. 은정 언니 오해해서 미안해요.”......모든 일과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시커먼 밤이었다. 매니저의 전화를 받고 내려온 소은해는 먼지투성이인 채로 잠이 든 소은정을 보고 고개를 젓다가 결국 그녀를 안아 집안으로 들어갔다.그날 이후로 며칠 동안 소은정은 기운을 차리지 못했고 집사는 그런 그녀를 위해 끼니마다 온갖 보양식들을 식탁에 올렸다.이렇게 하루 종일 먹고 자고, 먹고 자고 하는 삶도 나쁘지 않은데?그날 방송이 끝난 뒤 반시연은 “반구라”라는 별명을 얻고 네티즌들에게 온갖 조롱을 당하기 시작했고 외출도 힘들어졌다.며칠 후 박우혁이 기획한 예능 첫 방송 날이 다가왔다. 괜한 구설수에 오르는 걸 막기 위해 라이브 방송판과는 달리 TV판은 논란이 될 만한 장면을 전부 잘라낸 채 방송되었다.반시연과 소은정의 싸한 대화도 편집되었고 반시연의 꾀병은 팀원들을 더 똘똘 뭉치게 만드는 촉진제 역할을 한 것으로 기막히게 편집이 되어 있었다. 프로그램에 직접 출연했던 소은정마저 깊은 감명을 받을 정도였으니 말이다.편집 실력에 감탄하던 그때, 에필로그로 출연진의 인터뷰가 방송되었다.국내 첫 모험 서바이벌 예능을 제작한 이유가 뭐냐고 묻는 제작진의 질문에 박우혁은 눈망울을 반짝이며 대답했다.“제 꿈을 위해서입니다. 모험은 단순히 자극을 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한계를 돌파하는 순간,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큰 안정감을 느끼게 되죠. 앞으로도 이런 프로그램이 더 많이 제작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반면 또 다른 제작자인 원한빈의 대답은 심플했다.“이
소은정의 말에 박우혁이 푸흡 웃음을 터트렸다.“누나, 그거 다 뻥이야. 걔 여친 멀쩡하게 살아있어. 한빈이를 차버리고 바로 재벌 2세랑 결혼했다나 봐. 그리고 돈도 5억 정도 떼먹었다나? 그래서 일부러 그렇게 말하는 거야. TV로라도 보고 좀 찔리라고.”박우혁의 해명에 소은정은 어이가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멀쩡히 살아있는 사람을 죽었다고 말하다니.한편, 태한그룹 회의실.각 부서 부장들은 조심스레 월간 보고를 진행하고 있었다. 보고를 하면서도 박수혁의 눈치를 살피느라 숨도 크게 쉴 수 없는 부장들은 1초라도 빨리 이 회의가 끝나길 바랄 뿐이었다.다음 순서는 투자담당 양국종 부장, 부장으로 승진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양 부장은 어떻게든 자신의 성과를 부각시켜 박수혁 대표에게 제대로 눈도장을 찍으리라 다짐했다.“저희 부서에서는 예능 프로그램에 시선을 돌렸습니다. 비록 요즘 OTT 플랫폼까지 추가되며 예능을 비롯한 볼거리가 쏟아지고 있지만 이럴 때일수록 색다른 콘텐츠를 기획한다면 분명 기존보다 더 큰 수익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기획안에 자신이 넘치는지 양 부장의 눈빛이 반짝 빛났다.“새로운 콘텐츠라. 구체적으로 어떤 걸 말하는 겁니까?”박수혁이 담담한 목소리로 물었다.양 부장은 미소와 함께 미리 준비한 PT 자료를 화면에 띄웠다.“저희는 모험 콘텐츠 너튜버 박우혁 씨에게 눈길을 돌렸습니다.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대표님 조카분이시죠. 박우혁 씨가 이번에 기획한 프로그램이 이번에 대박을 치지 않았습니까? 리얼한 화면과 독특한 촬영 방식으로 시청자들의 호평이 이어지고 있습니다.”동시에 양 부장은 참고용으로 준비한 영상 파일을 클릭했고 마침 소은정과 원한빈이 낙하산을 타고 바다 위를 가르는 모습이 재생되었다. 소은정의 허리를 안고 있는 원한빈의 팔, 그리고 바다와 하늘을 바라보는 소은정의 얼굴이 클로즈업되었다.양 부장은 이 프로그램의 인기도를 더 확실히 설명하기 위해 베스트 댓글도 캡처하여 첨부해 두었다.“새로운 러브라인 탄생인가요!”“두
회의는 그렇게 싸늘한 분위기 속에서 끝나고 이한석은 눈을 질끈 감고 박수혁의 뒤를 따라 사무실로 들어갔다. 박수혁의 차가운 눈빛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대표님...”“알아서 처리하겠다더니. 이게 그 결과야?”식은땀을 삐질 흘리던 이한석이 변명했다.“대표님, 소은정 대표가 투자한 것도 모자라 회장님까지 잘 봐달라고 미리 언질을 해둔 탓에 저도...”의미심장한 표정으로 한참을 고민하던 박수혁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그래. 첫 방송이 대박이 났다니 우리가 저작권을 독점한다.”“네, 알겠습니다.”이한석이 다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그리고 투자자로서 다음 회차는 내가 직접 촬영 현장에 가볼 거야.”박수혁은 마치 내일은 해가 동쪽에서 뜰 거야라는 당연한 말을 한 듯 태연한 얼굴로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네?”이한석은 깜짝 놀란 얼굴로 고개를 들었지만 곧 눈치껏 말을 바꾸었다.“네, 알겠습니다. 대표님께서는 비밀 게스트로 출연하는 걸로 조치하겠습니다. 대표님께서 출연하신다면 시청률도 더 오를 겁니다.”“그래, 나가 봐.”박수혁은 그제야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하지만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사무실을 나선 이한석은 10초 만에 다시 지옥굴로 들어올 수밖에 없었다.“대표님, 회장님께서 오셨습니다.”살짝 미간을 찌푸린 박수혁은 고개를 끄덕였다.곧이어 박대한과 이민혜가 사무실로 들어왔다.“무슨 일이세요?”“무슨 일은. 네 여동생은 어디서 뭘 하는지도 모르고. 네 아버지는 아직도 해외 지사에 계시고. 넌 집에 얼굴 한 번 안 비추니 우리가 직접 올 수밖에.”이민혜가 아들을 흘겨보며 말했다.“큼큼, 저녁시간 미리 비워둬라. 소찬식 회장 일가와 저녁 약속을 잡았으니까.”박대한이 바로 말을 이어갔다.“네? SC그룹 쪽 사람들이랑요?”박수혁이 미간을 찌푸렸다. 갑작스러운 박대한의 결정에 이민혜가 바로 불만을 표했다.“저희가 왜 그 집안사람들과 밥을 먹어요? 소은정 그 계집애 주위에 남자가 얼마나 많은지... 수혁아, 너도 내가 보
박대한의 호통에 이민혜는 흠칫 놀라더니 바로 고개를 숙였다. 저번 담뱃대 사건 이후로 눈에 띄게 차가워진 시아버지의 눈빛에 때아닌 시집살이가 시작된 것도 억울하고 소은정 그 계집애 때문에 금지옥엽 키운 딸이 집안에서 쫓겨난 것도 원통스러웠다.그런데 저 속없는 아들은 그 여우 같은 계집애한테 홀려서 엄마는 나 몰라라 하는 상황이니... 소은정에 대한 이민혜의 증오는 점점 더 커져만 갔다.어색해진 분위기에 박수혁이 이한석을 불러들였다.“사모님은 저택으로 모셔. 오늘 저녁 약속에 어머니는 참석하지 않으실 거니까.”이민혜는 고개를 번쩍 들더니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아들을 바라보았다.아니, 쟤가 정말 여자에 미쳐도 유분수지. 난 없는 사람 취급하겠다는 거야, 뭐야!게다가 박대한도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그게 좋겠다. 소씨 일가와 화해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야. 네가 쓸데없는 소리라도 했다간 다시 돌이킬 수 없을 거다.”자신의 말은 씨알도 안 먹힌다는 걸 알아차린 이민혜는 바로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문을 쾅 닫고 나가버렸다.그날 저녁, 교외의 별장.소찬식은 소은호, 소은정과 함께 박대한은 박수혁과 함께 저녁식사 자리에 참석했다.공식적인 자리가 아닌지라 블루톤 원피스를 입어 평소보다 더 발랄한 분위기를 연출했다.소찬식과 박대한은 형식적인 인사와 사업에 관한 이야기로 대화를 이어나갔다. 화기애애한 듯한 식사자리였지만 왠지 모를 긴장감이 감돌았다.특히 소은정은 시시때때로 느끼하게 그녀를 쳐다보는 박수혁 때문에 짜증이 치밀었다.또다시 시선이 느껴지자 소은정은 더 이상 그 눈빛을 피하지 않고 매섭게 눈을 부라렸지만 박수혁은 흠칫 놀라는 것도 잠시 곧 그녀를 향해 싱긋 웃어 보였다.뭐야? 어른들 앞이라도 내숭이라도 떠는 거야? 웃기지도 않아서.사실 소은정은 이딴 식사 자리에 참석하고 싶지 않다면 길길이 날뛰었지만 박수혁이 목숨 걸고 해적 소굴에서 소은정을 구한 일에 대한 감사의 뜻을 전하는 자리라는 말에 어쩔 수 없이 참석한 것이었다.사업 이야기도
”3년 전, 저희 집안에서 은정이한테 못할 짓 많이 한 것 저희도 알고 많이 반성하고 있습니다. 다시 기회가 생긴다면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보상을 해주고 싶은데요.”박대한이 미소를 지었다.하지만 그런 말에 쉽게 넘어갈 소찬식이 아니었다.“아닙니다. 제 딸의 철이 없어 저지른 실수 아닙니까? 어차피 다 지난 일, 은정이도 저희도 더 이상 과거의 인연에 연연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앞으로는 두 사람도 편한 사이로 지낼 거라 믿습니다.”“철이 없어서...”박수혁은 자신만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리고 다음 순간, 검은 눈동자에 빛이 감돌았다.“네, 편한 사이로 지내야죠.”박수혁이 소은정을 바라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뜨거운 시선을 느낀 소은정이 힐끗 박수혁을 쳐다보았다. 부드러운 박수혁의 미소에 소은정은 눈을 흘겼다.왜 웃고 난리야.순간 밥맛이 떨어진 소은정은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한편, 박수혁은 화는 나지만 어른들 앞이라 막 나가지도 못하고 억지로 화를 삭이는 소은정의 모습이 왠지 더 귀엽게 느껴졌다. 그를 향해 흘기는 눈동자까지 사랑스럽게 느껴질 정도니. 콩깍지가 씌워도 단단히 쓰였다 싶었다.소찬식과 박대한은 다시 이야기꽃을 피어나가기 시작하고 소은호는 동생과 박수혁을 힐끗 바라보았다.누가 봐도 사랑에 빠진 남자의 얼굴을 하고 있는 박수혁을 보고 있자니 왠지 불안해졌다. 소은정이 다시 박수혁한테 빠질까 봐. 그래서 3년 전 전철을 다시 밟을까 봐 두려웠다.“참, 박 대표님, 이번 태풍으로 해상 무역에 큰 차질이 생겼다던데 필요한 거 있으면 저희도 돕겠습니다.”소은호가 미소를 지으며 박수혁에게 말을 건넸다. 사업적인 얘기를 건네면 소은정에게서 시선을 뗄까 싶어서였다.“네.”그런데 소은호, 소은정의 예상과 달리 박수혁은 단답으로 대화를 끝마친 뒤 다시 소은정만 쳐다보기 시작했다.담담한 척 표정을 유지하던 소은정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지기 시작했다.뭐야? 지금 혹시 인내심 테스트를 하는 거야? 내가 이 자리에
휴대폰에 저장된 이름을 확인한 소은정은 어이가 없어 실소가 터져 나왔다.“생명의 은인?”뻔뻔한 자식!말도 안 되는 억지나 부리는 박수혁과 더 대화를 나눴다간 그녀도 이상해질 것만 같아 소은정은 바로 돌아서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하지만 박수혁은 말없이 소은정의 속도에 맞추어 그녀의 그림자를 밟아갔다.그렇게 한참을 걷던 박수혁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은정아, 내가 수영 가르쳐줄까?”박수혁은 비행기 추락 사고 이후 소은정이 수영을 할 줄 모른다며 절망하던 소은해의 모습과 예능에서 원한빈이 물속에서 나오지 않자 눈물까지 떨구던 소은정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건 팀원의 안위에 대한 걱정을 넘어 진심으로 두려워하는 표정이었다.운동신경이 없는 것도 아니고 왜 수영은 안 배운 건지 의아했다.한편 수영을 배워주겠다는 박수혁의 말에 소은정은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려 휘청였다.시간이 꽤 많이 흘렀음에도 물에 빠졌을 때 그 질식감은 어제 일처럼 생생했다. 창백해진 얼굴 위로 식은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안돼. 다른 사람은 몰라도... 박수혁 저 인간한테만큼은 약한 모습을 보일 수 없어.다시 돌아선 소은정은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박수혁을 바라보았다.“당신 이러는 거 진짜 짜증 나고 소름 돋는 거 알아? 제발 나한테 신경 꺼.”차갑게 쏘아붙이면서도 살짝 떨리는 소은정의 목소리에 박수혁이 미간을 찌푸렸다. “왜 그래? 어디 안 좋아?”박수혁은 본능적으로 수영이라는 단어가 그녀의 금기를 건드렸음을 직감했지만 그 이유가 뭔지 알고 싶었다. 아니, 알아야 할 것만 같았다.하, 이 남자는 참... 끝까지 날 비참하게 만드네.박수혁의 질문에 헛웃음을 터트리던 소은정이 대답했다.“4년 전, 기억 안 나? 수영장에 빠져 죽을 뻔한 날 당신이 날 구해줬지. 그리고 그 병원에서 내가 결혼을 제안했고. 그래서 싫어. 날 죽음 직전까지 내몰았던 그 사고도 끔찍하지만 그 일을 계기로 당신이란 사람과 엮이게 되었다는 것만 떠올리면 소름 끼쳐. 됐어?”소은정의 말에 박수혁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