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 전, 저희 집안에서 은정이한테 못할 짓 많이 한 것 저희도 알고 많이 반성하고 있습니다. 다시 기회가 생긴다면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보상을 해주고 싶은데요.”박대한이 미소를 지었다.하지만 그런 말에 쉽게 넘어갈 소찬식이 아니었다.“아닙니다. 제 딸의 철이 없어 저지른 실수 아닙니까? 어차피 다 지난 일, 은정이도 저희도 더 이상 과거의 인연에 연연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앞으로는 두 사람도 편한 사이로 지낼 거라 믿습니다.”“철이 없어서...”박수혁은 자신만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리고 다음 순간, 검은 눈동자에 빛이 감돌았다.“네, 편한 사이로 지내야죠.”박수혁이 소은정을 바라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뜨거운 시선을 느낀 소은정이 힐끗 박수혁을 쳐다보았다. 부드러운 박수혁의 미소에 소은정은 눈을 흘겼다.왜 웃고 난리야.순간 밥맛이 떨어진 소은정은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한편, 박수혁은 화는 나지만 어른들 앞이라 막 나가지도 못하고 억지로 화를 삭이는 소은정의 모습이 왠지 더 귀엽게 느껴졌다. 그를 향해 흘기는 눈동자까지 사랑스럽게 느껴질 정도니. 콩깍지가 씌워도 단단히 쓰였다 싶었다.소찬식과 박대한은 다시 이야기꽃을 피어나가기 시작하고 소은호는 동생과 박수혁을 힐끗 바라보았다.누가 봐도 사랑에 빠진 남자의 얼굴을 하고 있는 박수혁을 보고 있자니 왠지 불안해졌다. 소은정이 다시 박수혁한테 빠질까 봐. 그래서 3년 전 전철을 다시 밟을까 봐 두려웠다.“참, 박 대표님, 이번 태풍으로 해상 무역에 큰 차질이 생겼다던데 필요한 거 있으면 저희도 돕겠습니다.”소은호가 미소를 지으며 박수혁에게 말을 건넸다. 사업적인 얘기를 건네면 소은정에게서 시선을 뗄까 싶어서였다.“네.”그런데 소은호, 소은정의 예상과 달리 박수혁은 단답으로 대화를 끝마친 뒤 다시 소은정만 쳐다보기 시작했다.담담한 척 표정을 유지하던 소은정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지기 시작했다.뭐야? 지금 혹시 인내심 테스트를 하는 거야? 내가 이 자리에
휴대폰에 저장된 이름을 확인한 소은정은 어이가 없어 실소가 터져 나왔다.“생명의 은인?”뻔뻔한 자식!말도 안 되는 억지나 부리는 박수혁과 더 대화를 나눴다간 그녀도 이상해질 것만 같아 소은정은 바로 돌아서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하지만 박수혁은 말없이 소은정의 속도에 맞추어 그녀의 그림자를 밟아갔다.그렇게 한참을 걷던 박수혁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은정아, 내가 수영 가르쳐줄까?”박수혁은 비행기 추락 사고 이후 소은정이 수영을 할 줄 모른다며 절망하던 소은해의 모습과 예능에서 원한빈이 물속에서 나오지 않자 눈물까지 떨구던 소은정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건 팀원의 안위에 대한 걱정을 넘어 진심으로 두려워하는 표정이었다.운동신경이 없는 것도 아니고 왜 수영은 안 배운 건지 의아했다.한편 수영을 배워주겠다는 박수혁의 말에 소은정은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려 휘청였다.시간이 꽤 많이 흘렀음에도 물에 빠졌을 때 그 질식감은 어제 일처럼 생생했다. 창백해진 얼굴 위로 식은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안돼. 다른 사람은 몰라도... 박수혁 저 인간한테만큼은 약한 모습을 보일 수 없어.다시 돌아선 소은정은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박수혁을 바라보았다.“당신 이러는 거 진짜 짜증 나고 소름 돋는 거 알아? 제발 나한테 신경 꺼.”차갑게 쏘아붙이면서도 살짝 떨리는 소은정의 목소리에 박수혁이 미간을 찌푸렸다. “왜 그래? 어디 안 좋아?”박수혁은 본능적으로 수영이라는 단어가 그녀의 금기를 건드렸음을 직감했지만 그 이유가 뭔지 알고 싶었다. 아니, 알아야 할 것만 같았다.하, 이 남자는 참... 끝까지 날 비참하게 만드네.박수혁의 질문에 헛웃음을 터트리던 소은정이 대답했다.“4년 전, 기억 안 나? 수영장에 빠져 죽을 뻔한 날 당신이 날 구해줬지. 그리고 그 병원에서 내가 결혼을 제안했고. 그래서 싫어. 날 죽음 직전까지 내몰았던 그 사고도 끔찍하지만 그 일을 계기로 당신이란 사람과 엮이게 되었다는 것만 떠올리면 소름 끼쳐. 됐어?”소은정의 말에 박수혁의
4년 전의 박수혁에게 우연히 구해준 얼굴 모를 여자보다는 서민영이 훨씬 더 소중했을 것이다.그러니까 얼굴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도 당연하다고.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씁쓸한 마음은 감출 수가 없었다.슬픈 눈동자로 소은정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던 박수혁은 한참 뒤에야 입을 열었다.“미안해...”지금 그가 느끼는 후회, 죄책감, 미안함, 무력감을 표현할 수 있는 말이 미안해 밖에 없다는 게 한스러웠다.“그래. 당연히 미안해야지. 당신을 불법 격투장에서 구하기로 결정한 내 괜한 오지랖 때문에 그런 일을 당했으니까. 그날 당신을 죽음 직전까지 몰아갔던 그 테러리스트들이 당신을 구해준 그 여자에게 복수를 하지는 않을까 이런 생각은 한 번도 안 해봤지?”쿠궁!소은정의 말에 박수혁은 거대한 망치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한 기분이었다.“뭐라고?”박수혁은 살짝 상기된 얼굴로 다가가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뭐야? 그 놀란 얼굴은. 그래, 이렇게 된 이상 전부 다 말해줄게. 내가 왜 당신을 용서할 수 없는지. 우리가 왜 다시 시작할 수 없는지. 이제 당신도 이해가 갈 거야.“그날 테러리스트들이 나한테 물고문을 했었거든. 수영장 물을 아주 원 없이 마셨지. 그래서 물이라면 이제 소름이 끼쳐. 숨이 턱턱 막히는 기분이야. 그래서 수영은 절대 안 배울 거야. 아니 못 배워. 이 정도 이유면 충분하지?”소은정은 마치 남의 얘기를 하듯 덤덤한 말투로 말을 이어나갔다. 그런 사고를 겪고 나서도, 평생 안고 가야 할 트라우마를 얻었음에도 소은정은 그날 격투장에서 박수혁을 구했던 걸 후회하지 않았다.아니, 적어도 3년 전에는 이것이 박수혁이 그녀의 운명의 상대임을 말해주는 증거라고 생각하기도 했다.박수혁에 대한 사랑도, 집착도 남아있지 않은 지금도 그 선택이 후회되진 않았다. 그를 구한 것도 불쑥 나타나 헌혈을 하겠다고 나선 것도 결혼을 제안한 것도 모두 그녀의 선택이었으니까. 한편, 소은정의 말에 박수혁의 표정은 충격에서 분노로 또다시 증오로 바뀌었다.그날 이후로 부대를 떠
소은정은 정말 미치고 팔짝 뛸 지경이었다. 왜 거머리처럼 떨어지지 않는 걸까?정말 미쳤냐고 욕설이라도 내뱉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의 손목을 굳게 잡고 있는 박수혁의 모습에 차마 입을 열 수 없었다.“네가 믿을진 모르겠지만 나 정말 후회하고 있어. 나한테... 나한테 기회를 한번만 더 주면...”“박수혁, 나 요즘 매일 악몽 꾸는 거 알아? 잊고 지냈던 옛날 일들이 자꾸 떠올라. 당신을 만나고 나서 단 하루도 행복한 적 없어. 하지만 당신을 구한 걸 후회하진 않아. 그러니까... 제발 지난 일은 그냥 흘러가게 내버려둬. 내가 이렇게 부탁할게...”소은정이 박수혁의 말을 잘랐다. 그녀의 맑은 눈동자에는 상처가 가득 담겨있었다.이제 와서 후회한다고 뭐가 달라질까? 물속에서 죽을 뻔했던 그 순간보다 박수혁의 가족들에게, 친구들에게 그리고 박수혁 본인에게 받았던 멸시와 냉대가 더 큰 상처였다.소은정의 떨리는 목소리에 박수혁의 눈동자도 흔들렸다. 슬픈 그녀의 눈동자를 통해 소은정이 느꼈던 고통이 그대로 전해지는 듯해 그는 고개를 푹 숙였다.그 고통은 분명 그가 준 것이겠지...소은정은 박수혁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선명한 턱선, 곧게 뻗은 콧날, 완벽한 이목구비는 마치 조각상처럼 아름다웠다. 그녀가 한때 미칠 듯이 사랑했던 그 모습 그대로였다.하지만 그녀는 지금 그저 그에게서 멀리 도망치고 싶을 뿐이었다.소은정은 눈동자의 슬픔을 숨기고 먼 산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올렸다.“미안해 하지 마. 후회도 하지 마. 그냥 다 잊고 잘 살아. 나도 잘 살 테니까.”수영장에서 있었던 일 때문에 죄책감이 더해진 걸까? 박수혁은 그녀가 왜 그를 불법 격투장에서 구했는지 그 이유조차 모르고 있다. 하지만 그녀는 영원히 말하지 않을 예정이었다. 지나간 일 따위는 묻어버리는 게 맞으니까...소은정은 다시 덤덤한 표정으로 차에 올라탔다. 그녀를 향해 다가가고 싶었지만 두 다리는 바닥에 박힌 듯 꿈쩍도 하지 않았다.나한테 은정이를 잡을 자격 같은 게 있을까?박수혁
“쨍그랑!”굉음과 함께 유리 테이블과 술병들이 산산조각나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튕긴 유리조각이 친구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가며 핏방울이 맺혔다.순간, 룸은 무거운 적막에 잠겼다.갑작스러운 상황에 얼굴이 창백해진 친구는 커다래진 눈으로 입만 벙긋거릴 뿐이었다. 그제야 그는 자신이 박수혁의 역린을 건드렸음을 알아차렸다.“네까짓 게 뭔데 은정이에 대해 떠들어?”말을 마친 박수혁은 아직도 화가 더 풀렸는지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가 남자의 배를 퍽 차버렸다. 배를 움켜쥔 채 쓰러진 남자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화를 내는 박수혁이 무섭기도 했고 괜히 나섰다가 사업적으로 문제가 생기는 게 아닐까 싶어 다른 친구들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나마 친한 강서진이 다가가 박수혁을 말렸다.“형, 진정 좀 해!”그리고는 고개를 돌려 다른 사람들에게 말했다.“형이 좀 취했나 봐. 여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다들 나가봐.”강서진의 말에 다들 기다렸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섰고 이미 인사불성 상태인 친구도 부축을 받아 겨우 룸을 나섰다.엉망이 된 룸, 박수혁과 강서진만 덩그러니 남게 되었다.박수혁은 아직도 화가 풀리지 않는 듯, 팔목과 손의 힘줄이 튀어나올 정도로 주먹을 꽉 쥐고 있었다.강서진이 다가가 박수혁의 어깨를 토닥이며 다시 자리에 앉혔다. 그리고 웨이터에게 술을 더 가지고 오라고 분부했다.“술이나 진탕 마시려고 온 거지? 마셔...”두 잔에 술을 따른 강서진이 먼저 술을 벌컥 마셨다.강서진의 말에 박수혁도 말없이 술을 들이켰다. 자극적인 보드카가 식도를 따라 흘러내려가자 잔뜩 굳은 그의 몸도 드디어 힘이 풀렸다.고개를 푹 숙인 박수혁의 어깨가 살짝 떨려왔다.“은정이가... 나 때문에 죽을 뻔했대. 그런데 난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어.”두 사람 사이에 그런 일이 있었다는 건 박수혁 본인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그것도 모르고 3년 동안 박수혁을 냉대한 것도 모자라 이혼한 뒤에도 용서해 달라는둥 다시 시작하자는둥 매달렸으니 얼마나 끔찍했을까
소은정의 본가.강서진은 한참을 망설이다 소은정에게 전화를 걸었다.“여보세요?”자다가 깼는지 졸음이 가득 묻은 소은정의 목소리에는 짜증이 깔려있었다.“그게... 강서진입니다. 형이... 술에 좀 많이 취했어요. 그런데 은정 씨를 보고 싶다고 고집을 부리는 통에... 잠깐만 나오면 안 될까요?”망설이던 강서진이 입을 열었다.수화기 저편에는 한동안 침묵이 이어졌다.그리고 잠에서 깬 듯한 소은정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강서진 씨도 박수혁도 당장 꺼져요!”“여기까지 왔는데... 그리고 형 고집 못 꺾는 건 은정 씨가 더 잘 알잖아요. 나오든 안 나오든 난 모르겠고 난 형 여기에 두고 갈 거예요. 형이 여기서 동사하면 다 은정 씨 책임이니까 알아서 해요.”말을 마친 강서진은 소은정이 대답하길 기다리지 않고 바로 전화를 끊어버렸다.후우... 언제부터 소은정과 통화하는 게 이렇게 떨린 일이 된 건지...차에서 박수혁을 끌어낸 강서진이 그를 대문 앞에 앉혔다.“형, 내가 다 형 위해서 이렇게 하는 거 알지? 복수하기 없기야?”박수혁이 먼저 오겠다고 고집을 부렸고 그는 그 요구를 따른 것뿐이라고 스스로를 설득하며 강서진은 다시 차에 올라탔다.“집으로 가.”그렇게 강서진은 정말 박수혁만 남겨두고 떠나버렸다.애매하게 끊긴 통화에 어리둥절하던 그때, 밖에서 차 엔진소리가 들려왔다.창밖을 내다보니 낯선 차량 한 대가 골목을 나서고 있었고 사람으로 보이는 무언가가 대문 앞에 덩그러니 놓여있었다.야밤에 이게 무슨 짓이야... 두 사람 다 미친 거 아니야?아빠와 오빠들이 깨지 않게 조심스럽게 밖으로 나선 소은정은 대문에 기댄 누군가의 정체가 박수혁임을 발견하고 고개를 저었다.“박수혁, 연기에 맛이라도 들린 거야?”소은정의 차가운 목소리에 박수혁이 고개를 들었다. 울기라도 한 건지 잔뜩 붉어진 눈시울에 소은정도 흠칫하며 뒤로 한발 물러섰다.“은정아, 미안해... 그래도 나한테 한번만 기회를 주면 안 될까?”울먹임이 섞인 박수혁의 목소리에 소은정
다음 날, 출근한 소은정은 SC그룹 해외 지사에 급히 처리해야 할 일이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소은호는 국내 프로젝트로 자리를 비우기 힘들고 해외라도 나가서 머리를 식히고 싶었던 소은정이 해외 출장을 자처했다.1시간 후,“1시간 전, 소은정 대표님이 해외 지사건으로 출국하셨다고 합니다.”“뭐? 윽.”해장주스를 마시던 박수혁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하지만 욱신거리는 허리의 통증에 미간을 찌푸렸다.“출국했다고?”이한석이 고개를 끄덕였다.“네. 회장님 명령으로 소씨 일가에 답례를 전달한 직원이 직접 보고한 사항입니다. 소은해 씨가 그렇게 말씀하셨다더군요. 해외 지사로 출국하셨고 다시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다고요...”다시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다는 말에 박수혁의 눈동자가 커다래졌다.“뭐? 어디로 갔는데? 항공편은?”괜히 그녀의 앞에서 얼쩡거리다 소은정의 미움을 받는 것도 무서웠지만 이대로 그녀를 볼 수 없게 되는 게 더 두려웠다. 날 평생 증오해도 좋으니 제발 내 눈앞에만 있어줘...박수혁의 질문에 이한석이 흠칫했다.“항공사 항공편이 아닌 개인전세기로 움직이셨다고 합니다.”이한석의 말에 박수혁의 표정이 더 굳었다.당황스러움을 감추기 위해 그는 주먹을 꽉 쥐었다.“어디로 갔는지 1시간 안에 알아내...”고개를 들어 이한석을 바라보던 박수혁이 한마디 덧붙였다.“안 그럼 잘라버릴 거니까 알아서 해.”“네.”해고 협박에 흠칫하던 이한석이 부랴부랴 사무실을 나섰다.7시간 뒤, SC그룹 프랑스 지사.박수혁이 지사 건물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완벽한 이목구비와 쭉 뻗은 몸매, 우아암이 몸에 배인 듯한 움직임에 뭇 여성들의 시선이 모두 그에게 꽂혔다.낯선 남자가 건물에 들어서자 프론트 직원이 바로 다가와 프랑스어로 물었다.“무슨 일이시죠?”직원의 질문에 박수혁이 싱긋 미소를 지었다.“대표님과 약속을 잡았습니다. 여기서 기다리죠.”로비의 소파에 앉은 박수혁은 여유로운 표정을 지었지만 살짝 떨리는 손과 다리가 그의 초조함을 그
소은정의 냉담한 태도에도 박수혁은 언짢은 기색은커녕 싱긋 웃어 보였다.“그건 아니지만 그냥 궁금해서.”어차피, 소은정의 보고 여부와 상관없이 알아낼 수 있는 방법은 충분히 있으니까.옆에 있던 손기준이 어색하게 기침을 했다.“대표님, 친구분이신가요?”“아니.”소은정이 바로 부정했다.“급한 일은 대충 처리됐으니 휴가라 생각하시고 며칠 쉬었다 가시죠?”손기준의 제안에 박수혁이 차가운 눈동자로 남자를 노려보았다.소은정도 미간을 찌푸린 채 고개를 저었다.“다음에. 국내에도 급히 처리해야 할 일이 많아서.”“아쉽네요.”손기준이 웃으며 손을 내밀었고 소은정도 미소를 지으며 그 손을 잡았다.손기준과 작별한 소은정은 바로 돌아서 건물을 나섰고 박수혁이 성큼성큼 그 뒤를 따랐다. K-드라마속 남여주인공 같은 두 사람의 모습에 자연스레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얼마 후.비행기 좌석에 앉은 소은정의 얼굴은 불만으로 가득 차 있었다. 뻔뻔하게 SC그룹의 전세기에 앉은 박수혁 때문이었다.“어제는... 내가 많이 취했나봐. 너희 집 앞까지 갔다던데. 놀란 건 아니지?”“글쎄. 딱히 나가 보지도 않아서.”“그래? 근데 왜 허리가 이렇게 아픈 거지? 멍도 들었고...어디 부딪혔나...”박수혁의 중얼거림에 소은정의 눈동자에 당황스러움이 비쳤다. 비행기가 이륙하고 박수혁은 무슨 말을 어떻게 걸면 좋을까 고민에 잠겼다.염치 불구하고 타사 전세기에까지 탄 이상 어떻게든 비행하는 동안이라도 소은정과 친해지고 싶었다.박수혁의 뜨거운 눈빛에 불편함을 느낀 소은정이 먼저 입을 열었다.“도대체 여긴 왜 온 거야?”“난 네가 날 다시 보고 싶지 않은 줄 알고... 그래서 떠난 줄 알았어...”박수혁의 어이없는 대답에 소은정은 코웃음을 치더니 고개를 돌리고 눈을 감았다.눈을 붙이고 싶으니 더 이상 말 걸지마 라는 뜻이었다.“은정아, 뭐 갖고 싶은 거 없어?”소은정이 원한다면 저 하늘의 별이라고 해도 따줄 수 있을 것만 같았다.“난 당신이 좀 내 인생에서 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