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썰미 좋은 시청자들이 이 모습을 놓칠 리가 없었고 바로 반시연에 대한 악플이 쏟아졌다.“헐, 뭐야? 반시연 저거 꾀병이네. 아까는 왼쪽 다리를 절뚝거리다가 지금은 오른쪽 다리를 절뚝거리고 있잖아.”“다들 생존 다큐 촬영 중인데 혼자 비련의 여주인공 코스프레? 뭔 짓임?”“이게 무슨 민폐야. 그래서 은정 언니가 바로 팀원을 교체했던 거구나.”“난 소은정이 일부러 도도하게 구는 줄 알았는데. 은정 언니 오해해서 미안해요.”......모든 일과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시커먼 밤이었다. 매니저의 전화를 받고 내려온 소은해는 먼지투성이인 채로 잠이 든 소은정을 보고 고개를 젓다가 결국 그녀를 안아 집안으로 들어갔다.그날 이후로 며칠 동안 소은정은 기운을 차리지 못했고 집사는 그런 그녀를 위해 끼니마다 온갖 보양식들을 식탁에 올렸다.이렇게 하루 종일 먹고 자고, 먹고 자고 하는 삶도 나쁘지 않은데?그날 방송이 끝난 뒤 반시연은 “반구라”라는 별명을 얻고 네티즌들에게 온갖 조롱을 당하기 시작했고 외출도 힘들어졌다.며칠 후 박우혁이 기획한 예능 첫 방송 날이 다가왔다. 괜한 구설수에 오르는 걸 막기 위해 라이브 방송판과는 달리 TV판은 논란이 될 만한 장면을 전부 잘라낸 채 방송되었다.반시연과 소은정의 싸한 대화도 편집되었고 반시연의 꾀병은 팀원들을 더 똘똘 뭉치게 만드는 촉진제 역할을 한 것으로 기막히게 편집이 되어 있었다. 프로그램에 직접 출연했던 소은정마저 깊은 감명을 받을 정도였으니 말이다.편집 실력에 감탄하던 그때, 에필로그로 출연진의 인터뷰가 방송되었다.국내 첫 모험 서바이벌 예능을 제작한 이유가 뭐냐고 묻는 제작진의 질문에 박우혁은 눈망울을 반짝이며 대답했다.“제 꿈을 위해서입니다. 모험은 단순히 자극을 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한계를 돌파하는 순간,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큰 안정감을 느끼게 되죠. 앞으로도 이런 프로그램이 더 많이 제작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반면 또 다른 제작자인 원한빈의 대답은 심플했다.“이
소은정의 말에 박우혁이 푸흡 웃음을 터트렸다.“누나, 그거 다 뻥이야. 걔 여친 멀쩡하게 살아있어. 한빈이를 차버리고 바로 재벌 2세랑 결혼했다나 봐. 그리고 돈도 5억 정도 떼먹었다나? 그래서 일부러 그렇게 말하는 거야. TV로라도 보고 좀 찔리라고.”박우혁의 해명에 소은정은 어이가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멀쩡히 살아있는 사람을 죽었다고 말하다니.한편, 태한그룹 회의실.각 부서 부장들은 조심스레 월간 보고를 진행하고 있었다. 보고를 하면서도 박수혁의 눈치를 살피느라 숨도 크게 쉴 수 없는 부장들은 1초라도 빨리 이 회의가 끝나길 바랄 뿐이었다.다음 순서는 투자담당 양국종 부장, 부장으로 승진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양 부장은 어떻게든 자신의 성과를 부각시켜 박수혁 대표에게 제대로 눈도장을 찍으리라 다짐했다.“저희 부서에서는 예능 프로그램에 시선을 돌렸습니다. 비록 요즘 OTT 플랫폼까지 추가되며 예능을 비롯한 볼거리가 쏟아지고 있지만 이럴 때일수록 색다른 콘텐츠를 기획한다면 분명 기존보다 더 큰 수익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기획안에 자신이 넘치는지 양 부장의 눈빛이 반짝 빛났다.“새로운 콘텐츠라. 구체적으로 어떤 걸 말하는 겁니까?”박수혁이 담담한 목소리로 물었다.양 부장은 미소와 함께 미리 준비한 PT 자료를 화면에 띄웠다.“저희는 모험 콘텐츠 너튜버 박우혁 씨에게 눈길을 돌렸습니다.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대표님 조카분이시죠. 박우혁 씨가 이번에 기획한 프로그램이 이번에 대박을 치지 않았습니까? 리얼한 화면과 독특한 촬영 방식으로 시청자들의 호평이 이어지고 있습니다.”동시에 양 부장은 참고용으로 준비한 영상 파일을 클릭했고 마침 소은정과 원한빈이 낙하산을 타고 바다 위를 가르는 모습이 재생되었다. 소은정의 허리를 안고 있는 원한빈의 팔, 그리고 바다와 하늘을 바라보는 소은정의 얼굴이 클로즈업되었다.양 부장은 이 프로그램의 인기도를 더 확실히 설명하기 위해 베스트 댓글도 캡처하여 첨부해 두었다.“새로운 러브라인 탄생인가요!”“두
회의는 그렇게 싸늘한 분위기 속에서 끝나고 이한석은 눈을 질끈 감고 박수혁의 뒤를 따라 사무실로 들어갔다. 박수혁의 차가운 눈빛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대표님...”“알아서 처리하겠다더니. 이게 그 결과야?”식은땀을 삐질 흘리던 이한석이 변명했다.“대표님, 소은정 대표가 투자한 것도 모자라 회장님까지 잘 봐달라고 미리 언질을 해둔 탓에 저도...”의미심장한 표정으로 한참을 고민하던 박수혁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그래. 첫 방송이 대박이 났다니 우리가 저작권을 독점한다.”“네, 알겠습니다.”이한석이 다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그리고 투자자로서 다음 회차는 내가 직접 촬영 현장에 가볼 거야.”박수혁은 마치 내일은 해가 동쪽에서 뜰 거야라는 당연한 말을 한 듯 태연한 얼굴로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네?”이한석은 깜짝 놀란 얼굴로 고개를 들었지만 곧 눈치껏 말을 바꾸었다.“네, 알겠습니다. 대표님께서는 비밀 게스트로 출연하는 걸로 조치하겠습니다. 대표님께서 출연하신다면 시청률도 더 오를 겁니다.”“그래, 나가 봐.”박수혁은 그제야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하지만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사무실을 나선 이한석은 10초 만에 다시 지옥굴로 들어올 수밖에 없었다.“대표님, 회장님께서 오셨습니다.”살짝 미간을 찌푸린 박수혁은 고개를 끄덕였다.곧이어 박대한과 이민혜가 사무실로 들어왔다.“무슨 일이세요?”“무슨 일은. 네 여동생은 어디서 뭘 하는지도 모르고. 네 아버지는 아직도 해외 지사에 계시고. 넌 집에 얼굴 한 번 안 비추니 우리가 직접 올 수밖에.”이민혜가 아들을 흘겨보며 말했다.“큼큼, 저녁시간 미리 비워둬라. 소찬식 회장 일가와 저녁 약속을 잡았으니까.”박대한이 바로 말을 이어갔다.“네? SC그룹 쪽 사람들이랑요?”박수혁이 미간을 찌푸렸다. 갑작스러운 박대한의 결정에 이민혜가 바로 불만을 표했다.“저희가 왜 그 집안사람들과 밥을 먹어요? 소은정 그 계집애 주위에 남자가 얼마나 많은지... 수혁아, 너도 내가 보
박대한의 호통에 이민혜는 흠칫 놀라더니 바로 고개를 숙였다. 저번 담뱃대 사건 이후로 눈에 띄게 차가워진 시아버지의 눈빛에 때아닌 시집살이가 시작된 것도 억울하고 소은정 그 계집애 때문에 금지옥엽 키운 딸이 집안에서 쫓겨난 것도 원통스러웠다.그런데 저 속없는 아들은 그 여우 같은 계집애한테 홀려서 엄마는 나 몰라라 하는 상황이니... 소은정에 대한 이민혜의 증오는 점점 더 커져만 갔다.어색해진 분위기에 박수혁이 이한석을 불러들였다.“사모님은 저택으로 모셔. 오늘 저녁 약속에 어머니는 참석하지 않으실 거니까.”이민혜는 고개를 번쩍 들더니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아들을 바라보았다.아니, 쟤가 정말 여자에 미쳐도 유분수지. 난 없는 사람 취급하겠다는 거야, 뭐야!게다가 박대한도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그게 좋겠다. 소씨 일가와 화해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야. 네가 쓸데없는 소리라도 했다간 다시 돌이킬 수 없을 거다.”자신의 말은 씨알도 안 먹힌다는 걸 알아차린 이민혜는 바로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문을 쾅 닫고 나가버렸다.그날 저녁, 교외의 별장.소찬식은 소은호, 소은정과 함께 박대한은 박수혁과 함께 저녁식사 자리에 참석했다.공식적인 자리가 아닌지라 블루톤 원피스를 입어 평소보다 더 발랄한 분위기를 연출했다.소찬식과 박대한은 형식적인 인사와 사업에 관한 이야기로 대화를 이어나갔다. 화기애애한 듯한 식사자리였지만 왠지 모를 긴장감이 감돌았다.특히 소은정은 시시때때로 느끼하게 그녀를 쳐다보는 박수혁 때문에 짜증이 치밀었다.또다시 시선이 느껴지자 소은정은 더 이상 그 눈빛을 피하지 않고 매섭게 눈을 부라렸지만 박수혁은 흠칫 놀라는 것도 잠시 곧 그녀를 향해 싱긋 웃어 보였다.뭐야? 어른들 앞이라도 내숭이라도 떠는 거야? 웃기지도 않아서.사실 소은정은 이딴 식사 자리에 참석하고 싶지 않다면 길길이 날뛰었지만 박수혁이 목숨 걸고 해적 소굴에서 소은정을 구한 일에 대한 감사의 뜻을 전하는 자리라는 말에 어쩔 수 없이 참석한 것이었다.사업 이야기도
”3년 전, 저희 집안에서 은정이한테 못할 짓 많이 한 것 저희도 알고 많이 반성하고 있습니다. 다시 기회가 생긴다면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보상을 해주고 싶은데요.”박대한이 미소를 지었다.하지만 그런 말에 쉽게 넘어갈 소찬식이 아니었다.“아닙니다. 제 딸의 철이 없어 저지른 실수 아닙니까? 어차피 다 지난 일, 은정이도 저희도 더 이상 과거의 인연에 연연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앞으로는 두 사람도 편한 사이로 지낼 거라 믿습니다.”“철이 없어서...”박수혁은 자신만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리고 다음 순간, 검은 눈동자에 빛이 감돌았다.“네, 편한 사이로 지내야죠.”박수혁이 소은정을 바라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뜨거운 시선을 느낀 소은정이 힐끗 박수혁을 쳐다보았다. 부드러운 박수혁의 미소에 소은정은 눈을 흘겼다.왜 웃고 난리야.순간 밥맛이 떨어진 소은정은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한편, 박수혁은 화는 나지만 어른들 앞이라 막 나가지도 못하고 억지로 화를 삭이는 소은정의 모습이 왠지 더 귀엽게 느껴졌다. 그를 향해 흘기는 눈동자까지 사랑스럽게 느껴질 정도니. 콩깍지가 씌워도 단단히 쓰였다 싶었다.소찬식과 박대한은 다시 이야기꽃을 피어나가기 시작하고 소은호는 동생과 박수혁을 힐끗 바라보았다.누가 봐도 사랑에 빠진 남자의 얼굴을 하고 있는 박수혁을 보고 있자니 왠지 불안해졌다. 소은정이 다시 박수혁한테 빠질까 봐. 그래서 3년 전 전철을 다시 밟을까 봐 두려웠다.“참, 박 대표님, 이번 태풍으로 해상 무역에 큰 차질이 생겼다던데 필요한 거 있으면 저희도 돕겠습니다.”소은호가 미소를 지으며 박수혁에게 말을 건넸다. 사업적인 얘기를 건네면 소은정에게서 시선을 뗄까 싶어서였다.“네.”그런데 소은호, 소은정의 예상과 달리 박수혁은 단답으로 대화를 끝마친 뒤 다시 소은정만 쳐다보기 시작했다.담담한 척 표정을 유지하던 소은정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지기 시작했다.뭐야? 지금 혹시 인내심 테스트를 하는 거야? 내가 이 자리에
휴대폰에 저장된 이름을 확인한 소은정은 어이가 없어 실소가 터져 나왔다.“생명의 은인?”뻔뻔한 자식!말도 안 되는 억지나 부리는 박수혁과 더 대화를 나눴다간 그녀도 이상해질 것만 같아 소은정은 바로 돌아서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하지만 박수혁은 말없이 소은정의 속도에 맞추어 그녀의 그림자를 밟아갔다.그렇게 한참을 걷던 박수혁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은정아, 내가 수영 가르쳐줄까?”박수혁은 비행기 추락 사고 이후 소은정이 수영을 할 줄 모른다며 절망하던 소은해의 모습과 예능에서 원한빈이 물속에서 나오지 않자 눈물까지 떨구던 소은정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건 팀원의 안위에 대한 걱정을 넘어 진심으로 두려워하는 표정이었다.운동신경이 없는 것도 아니고 왜 수영은 안 배운 건지 의아했다.한편 수영을 배워주겠다는 박수혁의 말에 소은정은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려 휘청였다.시간이 꽤 많이 흘렀음에도 물에 빠졌을 때 그 질식감은 어제 일처럼 생생했다. 창백해진 얼굴 위로 식은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안돼. 다른 사람은 몰라도... 박수혁 저 인간한테만큼은 약한 모습을 보일 수 없어.다시 돌아선 소은정은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박수혁을 바라보았다.“당신 이러는 거 진짜 짜증 나고 소름 돋는 거 알아? 제발 나한테 신경 꺼.”차갑게 쏘아붙이면서도 살짝 떨리는 소은정의 목소리에 박수혁이 미간을 찌푸렸다. “왜 그래? 어디 안 좋아?”박수혁은 본능적으로 수영이라는 단어가 그녀의 금기를 건드렸음을 직감했지만 그 이유가 뭔지 알고 싶었다. 아니, 알아야 할 것만 같았다.하, 이 남자는 참... 끝까지 날 비참하게 만드네.박수혁의 질문에 헛웃음을 터트리던 소은정이 대답했다.“4년 전, 기억 안 나? 수영장에 빠져 죽을 뻔한 날 당신이 날 구해줬지. 그리고 그 병원에서 내가 결혼을 제안했고. 그래서 싫어. 날 죽음 직전까지 내몰았던 그 사고도 끔찍하지만 그 일을 계기로 당신이란 사람과 엮이게 되었다는 것만 떠올리면 소름 끼쳐. 됐어?”소은정의 말에 박수혁의
4년 전의 박수혁에게 우연히 구해준 얼굴 모를 여자보다는 서민영이 훨씬 더 소중했을 것이다.그러니까 얼굴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도 당연하다고.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씁쓸한 마음은 감출 수가 없었다.슬픈 눈동자로 소은정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던 박수혁은 한참 뒤에야 입을 열었다.“미안해...”지금 그가 느끼는 후회, 죄책감, 미안함, 무력감을 표현할 수 있는 말이 미안해 밖에 없다는 게 한스러웠다.“그래. 당연히 미안해야지. 당신을 불법 격투장에서 구하기로 결정한 내 괜한 오지랖 때문에 그런 일을 당했으니까. 그날 당신을 죽음 직전까지 몰아갔던 그 테러리스트들이 당신을 구해준 그 여자에게 복수를 하지는 않을까 이런 생각은 한 번도 안 해봤지?”쿠궁!소은정의 말에 박수혁은 거대한 망치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한 기분이었다.“뭐라고?”박수혁은 살짝 상기된 얼굴로 다가가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뭐야? 그 놀란 얼굴은. 그래, 이렇게 된 이상 전부 다 말해줄게. 내가 왜 당신을 용서할 수 없는지. 우리가 왜 다시 시작할 수 없는지. 이제 당신도 이해가 갈 거야.“그날 테러리스트들이 나한테 물고문을 했었거든. 수영장 물을 아주 원 없이 마셨지. 그래서 물이라면 이제 소름이 끼쳐. 숨이 턱턱 막히는 기분이야. 그래서 수영은 절대 안 배울 거야. 아니 못 배워. 이 정도 이유면 충분하지?”소은정은 마치 남의 얘기를 하듯 덤덤한 말투로 말을 이어나갔다. 그런 사고를 겪고 나서도, 평생 안고 가야 할 트라우마를 얻었음에도 소은정은 그날 격투장에서 박수혁을 구했던 걸 후회하지 않았다.아니, 적어도 3년 전에는 이것이 박수혁이 그녀의 운명의 상대임을 말해주는 증거라고 생각하기도 했다.박수혁에 대한 사랑도, 집착도 남아있지 않은 지금도 그 선택이 후회되진 않았다. 그를 구한 것도 불쑥 나타나 헌혈을 하겠다고 나선 것도 결혼을 제안한 것도 모두 그녀의 선택이었으니까. 한편, 소은정의 말에 박수혁의 표정은 충격에서 분노로 또다시 증오로 바뀌었다.그날 이후로 부대를 떠
소은정은 정말 미치고 팔짝 뛸 지경이었다. 왜 거머리처럼 떨어지지 않는 걸까?정말 미쳤냐고 욕설이라도 내뱉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의 손목을 굳게 잡고 있는 박수혁의 모습에 차마 입을 열 수 없었다.“네가 믿을진 모르겠지만 나 정말 후회하고 있어. 나한테... 나한테 기회를 한번만 더 주면...”“박수혁, 나 요즘 매일 악몽 꾸는 거 알아? 잊고 지냈던 옛날 일들이 자꾸 떠올라. 당신을 만나고 나서 단 하루도 행복한 적 없어. 하지만 당신을 구한 걸 후회하진 않아. 그러니까... 제발 지난 일은 그냥 흘러가게 내버려둬. 내가 이렇게 부탁할게...”소은정이 박수혁의 말을 잘랐다. 그녀의 맑은 눈동자에는 상처가 가득 담겨있었다.이제 와서 후회한다고 뭐가 달라질까? 물속에서 죽을 뻔했던 그 순간보다 박수혁의 가족들에게, 친구들에게 그리고 박수혁 본인에게 받았던 멸시와 냉대가 더 큰 상처였다.소은정의 떨리는 목소리에 박수혁의 눈동자도 흔들렸다. 슬픈 그녀의 눈동자를 통해 소은정이 느꼈던 고통이 그대로 전해지는 듯해 그는 고개를 푹 숙였다.그 고통은 분명 그가 준 것이겠지...소은정은 박수혁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선명한 턱선, 곧게 뻗은 콧날, 완벽한 이목구비는 마치 조각상처럼 아름다웠다. 그녀가 한때 미칠 듯이 사랑했던 그 모습 그대로였다.하지만 그녀는 지금 그저 그에게서 멀리 도망치고 싶을 뿐이었다.소은정은 눈동자의 슬픔을 숨기고 먼 산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올렸다.“미안해 하지 마. 후회도 하지 마. 그냥 다 잊고 잘 살아. 나도 잘 살 테니까.”수영장에서 있었던 일 때문에 죄책감이 더해진 걸까? 박수혁은 그녀가 왜 그를 불법 격투장에서 구했는지 그 이유조차 모르고 있다. 하지만 그녀는 영원히 말하지 않을 예정이었다. 지나간 일 따위는 묻어버리는 게 맞으니까...소은정은 다시 덤덤한 표정으로 차에 올라탔다. 그녀를 향해 다가가고 싶었지만 두 다리는 바닥에 박힌 듯 꿈쩍도 하지 않았다.나한테 은정이를 잡을 자격 같은 게 있을까?박수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