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은정은 선생님의 태도를 이해해 보려고 애썼다. 하지만 선생님은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교실의 문을 열며 말했다.“새봄아, 엄마가 데리러 왔어.”새봄이가 고개를 돌렸다. 작은 얼굴이 기쁨으로 가득 차 재빨리 달려와 엄마에게 안기는 새봄이었다.“엄마!”소은정은 마음이 눈 녹듯 사르르 녹는 느낌이 들었다. 지금 이 순간 그녀는 이 사랑스러운 딸에게 하늘의 별이라도 따줄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소은정이 새봄이를 품에 안자 새봄이가 엄마에게 입을 맞추고는 목을 끌어안으며 칭얼거렸다.“엄마, 너무 보고 싶었어.”소은정은 마음 한편이 찌릿해났다. 그동안 딸에게 신경을 못써준 것이 너무 미안했다. 어린아이들은 변화에 민감하기 마련이다. 아마 엄마가 자신을 대하는 태도가 차가워졌다는 걸 느끼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새봄이는 전혀 원망하거나 질책하지 않았다. 이 세상에 천사가 있다면 이런 모습이 아닐까? 그녀는 새봄이의 처지가 안쓰러웠다. 자신이 전동하를 대신해 두배로 사랑을 줄 것이라고 다짐했다.“딸, 오늘 너무 속상했지? 엄마도 할아버지도 다 옆에 없고 혼자 낯선 환경에서 얼마나 힘들었어. 앞으로는 엄마랑 잘 지내보자.”회사에 데리고 다녀도 괜찮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때 선생님이 헛기침을 하더니 새봄이를 향해 웃으며 말했다.“지혁이랑 다른 친구들이 선생님 사무실에 있는데 새봄이 먼저 오빠들이랑 놀고 있을래?”새봄이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순순히 소은정의 품에서 벗어나 옆방으로 갔다. 소은정은 몹시 아쉬웠다. 그때 선생님이 말했다.“마침 잘 오셨어요. 할 말이 있었거든요.”“말씀하세요 선생님.”“오늘 새봄이가 친구를 여섯 명이나 때려서 울렸어요... 그중 다섯 명은 지혁이가 잘 달래서 새봄이를 용서해 줬는데 한 친구가 유독 심하게 맞아서 어쩔 수 없이 학부모님께 알려드렸거든요...”소은정은 날벼락을 맞은 심정이었다. 그녀는 그 자리에 그대로 굳은 채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갈피를 못 잡고 있었다. 잘못 들은 걸까? 여섯 명을 때
소은정은 새봄이를 한번 노려보고는 문준서를 향해 이쪽으로 오라고 손짓했다. “너도 이리 와, 도련님한테 사과해.” 새봄이가 사과를 할리가 없었다. “난 사과 안 해, 잘못한 거 없어, 날 괴롭힌 사람을 도와줬으니까 내 원수야!” 문준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사과 안 해! 새봄이를 괴롭혔으니 날 괴롭힌 거나 마찬가지야.” 선생님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이미 두 아이를 한참 설득한 후였기 때문이었다. “새봄이, 너...” 준서는 새봄이의 말을 따르기 때문에 새봄이만 설득하면 됐다. 근데 그때 새봄이가 바닥에 앉더니 울며 소은정의 다리에 매달렸다. “사과 안 해, 아빠 보고 혼내 달라고 할 거야! 쟤 잘못이야, 아빠가 나 지켜준댔어!” 소은정이 움찔했다. 약점이 찔려버린 듯한 느낌이었다. 그때 박시준도 이쪽으로 다가와 새봄이의 손을 잡아주려 했지만 문준서에게 밀려나갔다. “사과하기 싫다면 됐어요, 제 잘못이에요.” 박시준이 말했다. 그는 진심으로 새봄이의 사과를 받고 싶은 게 아니었다. 그저 이 일을 계기로 새봄이와 친구가 되진 않을까 기대한 것뿐이었다. 그래서 일이 대충 수습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새봄이가 울음을 터뜨리자 어찌할 바를 몰랐다. 박시준은 긴장한 얼굴로 박수혁을 바라봤다. “아빠...” 박수혁은 그런 그를 차갑게 쳐다보기만 했다. 눈빛에 책망의 뜻이 담겨있었다. 하지만 박시준은 그 뜻을 읽지 못했다. 소은정은 새봄이를 안아 들고 박시준과 선생님을 보며 말했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금방 올게요.” 그녀는 새봄이를 안고 사무실을 떠나 옆의 교실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새봄이를 내려놓고 따뜻하게 눈물을 닦아줬다. “엄마가 새봄이 한 테 화를 내려던 게 아니야, 그렇지만 이런 상황에서 큰소리로 울고불고하면 안 돼. 아빠가 그렇게 가르쳐주지 않았어?” 멈출 줄 모르고 울기만 하던 새봄이가 순식간에 울음을 그쳤다. 소은정이 눈물을 닦아줬다. “엄마, 나 아빠가 보고 싶어.
소은정은 바로 전화를 끊었다. 전화를 끊은 소은정은 이 친척은 없는 셈 쳐야겠다고 생각했다. 최성문은 박수혁도 따라 나오는 걸 보고 약간 놀랐다. 하지만 더 놀라운 건 박시준이 소은정의 차에 탔다는 사실이었다. 다행히 박수혁은 차에 타지 않았다. 아니었으면 그 분위기가 얼마나 어색했을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어르신도 안 계시는 마당에 박수혁에게 기회가 있다면 바로 지금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그가 소은정과 가까이하는 게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이렇게 뻔한 목적을 소은정이 눈치 못 챘을까? “햄버거 가게로 가주세요.” “네, 알겠습니다.”차 안에는 아이들의 웃음 소리가 넘쳐났다. 소은정은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박수혁은 복잡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사람이었다. 같이 따라오지 않을 줄 알았는데 햄버거 가게에 도착했을 땐 이미 먼저 가게 안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심지어 가게를 통째로 빌린 것 같았다. 이 시간대면 한창 가게에 사람이 많을 텐데 아무도 없었다. 소은정은 놀랐지만 아이들은 아무것도 모른 채 해맑기만 했다. “엄마, 나 쇼핑도 하고 싶어.” 가게 옆에 바로 대형 쇼핑몰이 있었다. “일단 밥부터 먹자.” 새봄이 고개를 끄덕였다. 소은정은 소지혁과 함께 주문을 하러 갔고 새봄이와 문준서 그리고 박시준은 같이 놀고 있었다. 박수혁은 밖에 나가 통화를 하고 들어오는 듯했다. 그는 소은정의 뒷모습을 보자 저도 몰래 미소를 지었다. 새봄이와 문준서는 피규어 가게 앞에서 피규어에 푹 빠져있었다. 박수혁이 그쪽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가지고 싶어?” 새봄이는 솔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골라, 아저씨가 사줄 게.” 새봄이는 잠시 멈칫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아빠가 사줄 거예요.” 박수혁이 침묵했다. “아저씨가 시준이 대신 사주는 거야. 오늘 새봄이 기분 나쁘게 한 건 시준이 잘못이니까. 그러니까 골라.” 새봄이는 그제야 기뻐하며 문준서를 데리고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울트라맨 피규어를
문준서의 말을 듣고 박시준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긴장한 얼굴로 불안해하며 새봄이를 쳐다봤다. 비록 나이는 어렸지만 그는 지나간 일들을 다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좋지 않은 기억이 많았고 자신은 반항할 힘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다. 누구도 자신의 감정을 신경 써주지 않았다. 그 잊지 못할 생일파티 날 새봄이는 물에 빠졌다. 박시준은 엄마가 자신에게 어떤 짓을 시켰고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기억하고 있었다. 자신을 이용해 남을 해치는 엄마보다 자신을 무시하고 미워하는 아빠가 훨씬 나은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박시준은 고통스러웠던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몹시 불안해했다. 그는 긴장해하며 손을 꼼지락댈 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문준서는 그런 모습이 못마땅했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는 건 찔리는 구석이 있다는 뜻이니까 그와 친구로 지내기 싫었다. 소은정은 통화를 마치고 차로 돌아왔다. 그리고 차문이 닫히지 않은 걸 보고 별생각 없이 문을 닫아버리고는 박시준에게 작별인사를 했다. “도련님, 이만 가볼 게요.” 박시준은 어색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소은정은 멀지 않은 곳에 서있는 박수혁을 보며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이만 가볼 게. 병원 가서 검사해 보고 이상 있으면 우리 비서님한테 연락해 줘.” 그녀는 더 이상 이 일에 휘말리고 싶지 않았다. “그래, 멀리 안 나갈 게.” 박수혁은 좀 더 같이 있고 싶었으나 좀 전에 소은정의 통화내용을 들어보니 회사로 돌아가봐야 할 일이 생긴 것 같아 계획대로 하지 않았다. 소은정은 전동하 사건으로 인해 타격 받은 것 같지 않았다. 그녀는 여전히 밝았고 아름다웠다. 하지만 그것 또한 문제였다. 이토록 강한 사람이니 어느 틈을 비집고 들어가야 할지 계산이 서지 않았다. 소은정은 최성문더러 회사 쪽에 자신을 내려주고 아이들을 집에 데려다 달라고 부탁했다. 조금 전까지 만해도 재잘재잘 떠들던 아이들은 금세 잠이 들었다. 소은정이 차에서 내릴 때까지도 아이들은 깨어나지 않았다. 회사에 들어서자
그들에겐 돈도 있고 사랑도 있었다. 아무것도 모자란 게 없었다. 하지만 그 무엇도 낭비한 적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고마워요, 주무세요 아빠.” 소찬식이 고개를 끄덕였다. 소은정은 그를 부축했다. 전에 수술을 받은 후로 몸상태가 예전 같지 않아 걸을 때도 지팡이가 필요했다. 그녀는 자기 자신을 자책했다. 혼자 슬픔에 잠겨 주위 사람들에게 소홀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모님은 너무도 빨리 나이 드셨고 기억 속의 그 영원히 거대할 것 같은 뒷모습도 이젠 볼 수 없었다. 순간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녀는 더 강해져야 했다. 한 남자만을 위해서 살아서는 안 됐다. 전동하가 죽었건 살았건 자신의 인생을 멋지게 살아나가야 했다. 방으로 모시려는데 소찬식이 잠시 멈칫하더니 말했다. “너 들어가는 거 보고 나도 들어 갈게. 요즘 밤마다 무슨 소리가 들려서 잠이 잘 안 온다며. 난 조금 있다가 잘게. 누가 밖에서 돌아다니는 건 아닌지 확인도 좀 하고.” 소은정은 울컥해서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녀는 아빠를 끌어안으며 더는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 “아빠, 죄송해요...” 수없이 많이 자신을 포기하고 싶었다. 그리고 새봄이에게 여러 번 구원을 받았었다. 하지만 아빠가 자신을 구원해 줬다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분명 이 세상에서 자신을 가장 사랑하는 건 아빠일 텐데 말이다. 소은정이 고통스러워할 때 소찬식은 같은 고통을 느꼈다. 하지만 전동하 때문에 힘들어서 소은정은 다른 누구도 신경 쓰지 못했다. 그때 소찬식의 마음은 이루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속상했을 것이다. 주변 사람들의 기대와 사랑을 어째서 하나도 보지 못했을까? 소찬식은 가슴 아파하며 딸의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울지 마, 넌 내 소중한 딸이잖아. 엄마랑 약속했어. 널 꼭 잘 지켜주기로. 네가 힘들어할 때마다 너네 엄마한테 미안해. 엄마가 옆에 있었더라면 너랑 얘기도 많이 하고 위로도 잘해줬을 텐데. 아빠는 어떻게 말을 꺼냈으면 좋을지 모르겠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그 고통은
마침 집사님이 다른 사람들과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소은정이 내려오는 걸 보고 황급히 손을 저으며 불렀다. “빨리 식사하세요. 아침 겸 점심으로 드시면 되겠네요.” “괜찮아요, 회사에 처리해야 될 일이 생겨서요.” 그때 소찬식이 큰 바구니를 들고 들어왔다. 낚시를 하고 온듯했다. “먹고 가, 조금 늦는다고 큰일 생기지 않아. 그리고 지금 떠나도 어차피 늦어. 네 오빠가 나한테까지 전화했더라.” “제 탓은 아니죠. 폰이 배터리가 없었어요. 아침에 절 깨워주는 사람도 없었고요.” 집사님이 웃으며 말했다. “회장님이 깨우지 말라고 하셨어요. 어제 많이 피곤해하시는 것 같더라고요. 도련님은 일찍 퇴근하셔서 주무셨는데 어떻게 그걸 알겠어요.” 집사님의 말을 듣자 소은정은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맞아요.” 식탁 위에 자신이 좋아하는 음식들이 가득 차려진 걸 보자 소은정은 가방을 내려놓고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준서랑 새봄이는 등교했어요?” 소찬식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데려다 줬어. 어제 학교에서 애들한테 괴롭힘 당했다며?” 소찬식이 인상을 찌푸렸다. “걔네들 학부모 좀 만나야겠어.” 소찬식은 그 아이들에게 친구들과 어떻게 사이좋게 지내야 하는지 꼭 알려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소은정은 입안에 있는 음식물을 삼키지도 못한 채 소찬식을 바라봤다. “됐어요, 아빠.” 누구한테 들은 건지는 몰라도 전달이 잘못된 게 틀림없었다. “뭐가 됐다는 거야, 금쪽같은 내 새끼들을 괴롭혔다는데. 준서는 그렇다 쳐도 새봄이는 세 살 밖에 안 됐어. 작고 여린 애를 괴롭혔다는 게 말이 돼? 당장 가서 따져야겠어.” 소은정은 밥을 몇 술 뜨더니 말했다. “아빠, 새봄이가 괴롭힘 당한 게 아니라... 새봄이가 친구를 때렸어요.” 소찬식은 전혀 믿지 않는 눈치였다. “말도 안 돼, 고작 몇 살이라고! 준서보다 한참 작아!” 소은정이 한숨을 쉬었다. “어제 학교에도 갔다 왔어요. 여섯 명을 때렸대요. 그
소은정은 파일을 열어보았다. 전동하의 이름이 한편에 쓰여있었다. 익숙한 필체였다. 그는 이러한 방식으로 다시 그녀의 앞에 나타났다. 소은정은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필을 들고 머뭇거렸다. 윤이한이 말했다. “사모님, 서명을 하셔야 전대표님의 모든 걸 연임하실 수 있습니다. 저도 수속을 밟기 편하고요. 그리고 대표님께서 새봄아가씨와 마이크를 위해서 기금을 준비해 두셨는데 마이크 쪽은 성인이 돼야 수령하실 수 있고 새봄아가씨는 아무 때나 수령 가능하십니다. 국외의 사업들은 관리인의 서명이 필요한데 사모님께서 서명을 안 하시면 다 방치해 둘 수밖에 없어요...” 윤이한 쪽도 상황이 매우 난처했다. 장례식을 하지 않은 건 전동하의 죽음을 인정하기 싫어서였다. 그들은 전동하가 어느날 갑자기 나타나기를 바랐다. 소은정이 침묵하고 있으니 윤이한도 간섭할 명분이 없었다. 하지만 이익과 관련된 부분들은 꼭 정확히 계산해야 했다. 모두 대표님이 사모님에게 남기고 간 것들이기 때문이었다. 소은정은 몇 초 망설이더니 결국 자신의 이름을 적어 넣었다. “비서님, 혹시 제가 도움을 드릴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언제든지 연락 주세요. 이미 진행하고 있는 사업들은 예정대로 진행해 주시고요 필요 없는 사업들은 굳이 이어 나가지 않는 게 좋겠어요.” 윤이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시름 놓은 듯한 표정이었다. 전동하의 사업은 국내는 물론 국외에까지 퍼져 있어 생각보다 더욱 범위가 크고 복잡했다. 관리를 진행하는 핵심 인물이 없다면 밑에서 어떤 수작을 부릴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는 5년도 안 돼서 망하는 길로 갈 것이다. 하지만 소은정은 달랐다. 사업이라곤 해본 적도 없는 부잣집 사모님들과는 다른 사람이다. 소은정은 프로페셔널한 관리인이었고 그녀의 능력은 의심할 여지도 없이 훌륭했다. 그들은 몇 년 지나지 않아 실업하는 길로 나아가고 싶지 않았다. “네, 빠른 시일 내로 처리하겠습니다. 전대표님 명의하의 재산에 대해서도 최대한 빨리 처리해서 알려드리겠습니다.” 소은정이
소은해는 지금 소은호의 마음을 돌릴 수 있는 사람은 소찬식밖에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무슨 일이 있으나 소찬식을 설득해야만 했다. 소찬식은 자신에게 딱 달라 붙어있는 소은해는 어이없는 눈길로 쳐다봤다. 한시연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 뒤로 집사님과 소은정까지 웃음 지었다. 소은호는 장난기가 가득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빠, 셋째는 30년이 되도록 버릇이 고쳐지지 않네요.” “하늘이 거둬줬으니 망정이지 장가도 못 갈 뻔했어.” 소은해는 가짜 울음이라도 터뜨릴 생각이었다. 근데 그때 소은정이 다행히도 소은해를 놓아줬다. “됐어요, 사고나 안치면 다행이지. 셋째 오빠가 절 보호하겠어요?” 모두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분위기는 또다시 편안해졌고 그저 소은해만이 원망스러운 눈길로 소은정을 바라볼 뿐이었다. 변명하고 싶었으나 혹여나 그들의 꾐에 넘어가기라도 할 가봐 소은해는 말을 아꼈다. 그때 소은호가 말했다. “그럼 연준 씨랑 갔다 와. 윤이한 씨도 같이 가면 더 좋고. 내가 알기로는 전동하 쪽이… 그쪽에서 많은 사업을 확장했다고 들었어. 혹시 인맥을 동원해야 할 일이 생길수도 있잖아.” 그는 소은정 앞에서 전동하 얘기를 꺼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모두 침묵을 지키며 소은정을 바라봤다. 소은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한씨랑 연락해 볼게요.” 모두들 소은정의 표정에 이상이 없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한숨 돌렸다. 소은호는 동생 얼굴을 자세히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사실 소은정을 보낸 데에는 다른 이유도 있었다. 그는 소은정이 바빠서 다른 곳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으면 했고 또 숨 돌릴 시간도 있었으면 했다. 그래서 이 기회를 소은정에게 넘긴 것이었다. 과거는 잊고 미래만을 바라보며 살았으면 했다. 앞으로 출국까지는 보름가량 남아있었다. 소은정은 그동안 자신이 관리하고 있는 일들을 책임자에게 인수인계하고 국외 연구항목과 관련된 자료들을 준비해야 했다. 소은호는 주동적으로 소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