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은정은 휴대폰을 보며 안타깝다고 생각했다.그녀는 유준열을 서포트 할 생각까지 했었다. 그는 똑똑하고 말도 예쁘게 하는 타입이었다. 게다가 소년미가 넘치는 사람이어서 저도 모르게 가까이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사람이었다.하지만 연이어 이어지는 폭로에 그는 스트레스를 이기지 못해 빛을 잃고 대신 음침한 원한이 그를 사로잡았다."사모님들의 술잔치 단골손님이 모 남자 배우였다니…"그리고 아래에는 유준열과 사모님이 끌어안은 사진이 있었다.그 사진만 보고 있으면 무한한 상상의 나래를 펼칠 수 있었다."다행히 우리 은정 여신님께서 제때에 도망갔지.""나는 우리 준열이 믿어! 악플은 꺼져!""소 대표님, 우리 아이 좀 살려주세요…""우리 소 대표님께서도 포기한 거 안 보여? 정말 사생활이 난잡한가 보네. 그분은 눈에 흙이 들어가는 걸 참지 못하는 분이니.""이 바닥에서 이렇게 오랫동안 있었는데 능력 하나 없다고? 내놓을 수 있는 작품이 하나도 없어, 조연 아니면 예능에 잠깐 얼굴을 비추는 정도니.""나이대가 비슷한 손호영을 봐, 유준열처럼 뜨지 않았지만 이미 상을 몇 번이나 받았는데!"......소은정은 댓글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상황을 보아하니 유준열은 이미 끝난 듯했다.그때, 누군가가 병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뭐 때문에 그렇게 한숨을 쉬는 건데, 오빠 마중 나올 생각도 안 하고."목소리를 들은 소은정이 고개를 들고 보니 소은해였다.하얀색 옷을 입은 그의 완벽한 얼굴에 장난스러운 웃음이 걸려있었다.그의 옆에는 캐리어까지 있었다.아마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이곳으로 온 듯했다.오랫동안 못 본 얼굴을 보니 소은정은 조금 반가웠다."오빠, 돌아온 거 축하해!"소은정이 얼른 일어서서 말했다.소은해도 얼른 다가가 소은정을 안고 한 바퀴 빙 돌더니 그녀의 얼굴을 꼬집었다."살 빠졌네, 잘 됐다. 다이어트 안 해도 되고."그리곤 얄미운 얼굴로 턱을 만졌다."그런데 얼굴이 다 망가졌잖아!"흥분했던 소은정의 기분은 찬물을 끼얹은
이에 소은정이 눈썹을 치켜세웠다.‘뭐 그 정도까지야. 기껏해야 한번 얻어맞는 거지 뭐. 그래도 이런 일은 아는 사람이 적을 수록 좋긴 해.’소은정의 검색 내용을 확인한 소은해가 혀를 끌끌차더니 여동생을 흘겨보았다.“너도 참 가지가지한다. 이런 상황에서 이런 걸 검색하고 싶냐?”소은해의 시비에도 소은정은 코웃음을 쳤다.“전국 순회공연 끝난 거 맞아? 나 때문에 돌아온 건 아니지?”살짝 흠칫하던 소은해가 한발 앞으로 다가섰다.“정말 너 때문에 온 거라고 말하면... 어떻게 보답할 건데?”오빠의 말에 잠깐 멈칫하던 소은정은 바로 소은해의 기사를 검색해 보았다.‘하, 배우 소은해 순회공연 성황리에 끝마쳐? 3일 전에 올라온 기사네?’소은정이 헛웃음을 쳤다.“웃기시네. 다 끝내고 온 거 맞네.”이에 소은해가 괜히 멋진 척 머리를 뒤로 넘겼다.“공연하느라 진짜 죽는 줄 알았어. 뭐 그만큼 상도 많이 받았지만. 이 정도면 국위선양이나 마찬가지인 거 알지? 그래도 이 오빠는 겸손한 사람이니까 기자들한테도 최대한 기사 내지 말아달라고 부탁까지 했는데... 누가 썼나 몰라.”“허, 괜히 흑역사까지 드러날까 봐 몸 사리는 거 아니고? 괜히 하늘이 귀에 들어가면 곤란해지니까.”소은정의 말에 정곡을 찔린 소은해가 여동생을 흘겨보았다.“어허! 하늘 같은 오라버니한테 못 하는 말이 없어.”순간 장난기가 발동한 소은정이 괜히 아쉬운 척 고개를 저었다.“오빠가 이렇게 겸손을 떤다면... 여동생으로서 어떻게든 도와야지. 내가 아는 기자한테 지금 당장 전화해 볼까?”그녀의 말에 발끈하며 일어선 소은해가 소파 위에 있던 쿠션을 집어던졌다.‘이 계집애가 진짜.’하지만 쿠션이 소은정의 몸에 닿기 전 누군가의 호통소리가 먼저 울려 퍼졌다.“그만!”방에서 장난 중이던 두 사람 모두 놀라 토끼눈을 하였다.많이 화난 듯 얼굴까지 빨개진 소찬식이 소은해의 엉덩이를 향해 킥을 날렸다.“어디서 여동생을 때리려고. 너 오늘 한번 나한테 죽어봐라.”아무 방비도 없이 킥
‘이 놈의 자식이 보자보자 하니까.’참다 못한 소찬식이 소은해의 귀를 잡아들었다.“이 자식이 못 하는 소리가 없어. 잘 돌아가는 회사 말고 왜 다른 사업을 해. 너야말로 이미지 관리 제대로 해라. 행여나 연예계에서 퇴출당해도 난 금전적 도움은 한 푼도 안 줄 거니까.”이를 바득바득 가는 소찬식의 모습에 소은해는 혀를 깨물고 싶은 심정이었다.‘이놈의 입... 이놈의 입이 문제야...’“에이, 아빠, 사랑하는 우리 아빠. 용서해 주세요. 제가 아까는 머리가 어떻게 됐었나 봐요.”투닥대는 두 사람의 모습을 보며 배가 아플 정도로 웃던 소은정은 웃느라 눈가에 배어나온 눈물을 닦아냈다.방금 전까지만 해도 비 때문에 쓸쓸했던 기분은 눈 녹 듯 사라지고 방 전체가 따뜻해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자칭 분위기 메이커 소은해 덕으로 소은정 때문에 전전긍긍하던 소찬식도 긴장이 많이 풀린 모습이었다.소찬식이 병실을 나선 뒤에도 소은해는 한참 동안 빨개진 귀를 어루만졌다.“두고 봐. 내가 진짜 칫솔 들고 친자검사 하러 간다. 어떻게 자기 아들한테 이럴 수 있어?”“오, 좋은 생각이야. 비용은 내가 내는 걸로.”“으아, 짜증나!”소은해가 답답해 죽겠다는 표정으로 가슴을 두드렸다.그 모습에 또 한참을 웃던 소은정이 겨우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아, 이거 내가 적어둔 리스트 거든. 오빠가 좀 사다줘.”소은정이 건넨 종이에는 병원에만 있느라 심심할 때마다 읽은 패션 잡지에서 찜한 물건들이 빼곡히 적혀있었다.리스트 내용을 하나하나 뜯어보던 소은해가 그녀를 흘겨보았다.“오빠 등쳐먹으니까 좋아?”“싫어? 그럼 하늘이한테 부탁해야지.”소은정이 짐짓 눈을 깜박거리자 소은해가 발을 동동 굴렀다.“아, 됐어, 됐어. 오빠가 사다줄게, 나 쇼핑 좋아하잖아.”소은해의 비굴한 모습에 고개를 돌려 큭큭 웃던 소은정이 도도한 표정으로 다리를 꼬았다.“그럼 부탁 좀 할게.”그런 그녀를 흘겨보던 소은해가 뭔가 생각난 듯 물었다.“까부는 거 보니까 대충 회복한 것 같은
소은정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소은해가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요즘은 인터넷이 너무 발달돼서 연예인 노릇도 힘들어. 여론... 여론이 굉장히 주요하지. 그리고 여론을 통제할 수 있는 사람은 더 무시무시한 법이고. 우리 기업 제품을 대표하는 연예인들 모두 그런 리스크를 가지고 있어. 언제 어디서 무슨 문제가 튀어나올지 몰라. 그리고 그런 일이 생긴다면 우리 기업 제품 이미지에도 큰 타격을 입겠지.”소은정은 진지한 표정으로 소은해의 말을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나도 알아. 리스크 없는 투자가 어디 있겠어. 그래서 더 조심하는 거지.”‘내 위치에서 생각할 수 있는 방법이라곤 CF 모델을 자주 바꾸는 것뿐이야. 짧게 짧게 일하면 흑역사가 튀어나올 리스크도 줄어드는 법이니까.’“조심 정도로는 안 돼. 죽기내기로 일해서 일군 회사가 친하지도 않은 연예인 때문에 타격을 입는다고 생각해봐. 얼마나 억울하겠어.”소은해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연예인으로서 소은해는 연예계가 얼마나 더러운 곳인지 잘 알고 있었다. 대중들에게 보여주는 이미지와 아예 다른 사람들도 수두룩하다는 사실도 말이다.“그럼 오빠 생각엔 내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소은정의 진지한 표정에 소은해가 뭇 여자들의 마음을 전부 울려버릴 수 있을 정도로 매력적인 미소를 지었다.“오빠 제발 알려주세요... 라고 말해 봐.”하지만 세상 모든 여자에게 통하는 미소도 여동생에게는 먹히지 않는 게 이 세상 모든 남매들 사이의 룰 같은 것.소은정은 피식 웃더니 바로 소찬식의 전화번호를 보여주었다.당장 입을 열지 않으면 아빠에게 전화를 걸겠다는 무언의 협박이었다.“하.”맹랑한 소은정의 행동에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짓던 소은해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아, 스톱! 내가 잘못했어. 제발 아빠한테만큼은...”‘오늘 아빠한테 또 걸리면 진짜 죽을지도 몰라...’진심으로 겁 먹은 오빠의 표정에 소은정은 고개를 푹 숙인 채 한참을 소리없이 웃었다.그리고 잠시 후 소은해의 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연예
노트북 사이로 소은정이 고개를 쏙 내밀었다.“저기 하늘이네 집 앞 사거리에 있는 포차 알지? 거기가 맛있더라. 부탁할게.”‘오빠 네가 갈 데가 어디 있겠어? 보나마나 하늘이한테 가는 거겠지. 데이트나 열심히 해, 오빠야.’순간, 소은해의 굳었던 표정이 활짝 피어올랐다.식지를 들어 소은정을 가리키며 말했다.“하, 귀신이네. 내가 오늘 네 장바구니 다 비워준다.”말을 마친 소은해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병실을 나섰다.세상 고민 하나 없는 한량의 콧노래 같은 소리에 소은정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우리 오빠... 이렇게나 똑똑한데. 그 머리를 제대로 안 굴려서 걱정이야.’...무사히 집으로 돌아온 뒤 소은정은 굳이 박수혁의 소식을 묻지 않았다. 뭐, 그녀가 혼자 소외되길 바라지 않았던 건지 소은호가 넌지시 한 마디씩 건네긴 했지만.입원해 있는 동안 소은정은 기획안에 집중하는 시간을 제외하고 항상 전동하의 곁을 지켰다.다행히 전동하는 이미 많이 회복된 상태였다. 왜인지 아직 의식을 되찾진 못했지만 말이다.마이크도 요즘 학교를 마치고 매일 병원에 눈도장을 찍고 있었다.처음엔 딱히 걱정 안 된다며 입을 삐죽 내밀던 마이크였지만 병상에 누워있는 전동하를 본 순간 결국 대성통곡하고 말았다.아무리 어른인 척해도 아직 10살도 되지 않은 어린애에게는 꽤나 충격이었을 테니까.그 뒤로 마이크는 매일 병원을 찾았고 소은정도 굳이 그런 아이를 말리지 않았다.두 사람만 서로 의지하며 살아온 시간만 약 9년, 마이크에게도 전동하에게도 서로의 존재는 전부나 마찬가지였다.그렇게 일주일이 흐르고...곧 의식을 회복할 것이란 한 원장의 말과 달리 전동하는 여전히 감감무소식이었다.회복기간이 예상보다 더 길어지자 소은정은 왠지 점점 더 불안해지기 시작했다.한 원장을 비롯한 의료진들은 수치적으로는 문제가 없다며 그녀를 안심시켰지만 전동하가 눈을 뜨긴 전까진 그 어떤 말로도 그녀를 위로할 수 없었다.그렇게 보름 뒤.소은정은 어느 정도 컨디션을 회복했고 우 비서의
마이크의 말에 소은정이 창백한 얼굴로 벌떡 일어섰다.“그게 무슨 소리야? 사라졌다니.”당황한 마이크가 말을 더듬었다.“그냥 사라졌어요. 병실에 아무도 없다고요.”소은정이 소은해를 돌아보고 오뎅을 들고 있던 그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뭐 검사받으러 간 거 아닐까?”하지만 여전히 잔뜩 굳은 표정의 소은정이 고개를 저었다.“아니야. 아까 회진 다 돌았는 걸...”말을 마친 소은정이 바로 병실을 뛰쳐나가고 마이크도 짧은 다리를 열심히 움직이며 그 뒤를 따랐다.역시나 아이의 말대로 전동하의 병실은 텅 비어있었다.‘정말... 사라졌잖아?’마침 근처를 지나던 간호사가 병실 앞에 망연자실하게 서 있는 두 사람을 발견하고 부랴부랴 달려왔다.“왜 그러세요?”소은정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대답했다.“동... 동하 씨가 사라졌어요.”그의 말에 역시 깜짝 놀란 표정을 짓던 간호사가 일단 그녀를 안심시켰다.“잠시만요. 저희가 찾으러 갈게요.”간호사가 휴대폰을 꺼낸 순간, 그토록 그리웠던 목소리가 소은정의 마음을 울렸다.“은정 씨...”등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흠칫하던 소은정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잔뜩 당황한 소은정의 표정에 전동하의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아, 꿈이 아니었구나. 여긴 대한민국이야. 은정 씨도... 나도 살아있어.’누워있는 동안 많이 수척해진 탓인지 전동하의 병원복이 왠지 더 헐렁하게 느껴졌다.조금 지쳐보이는 표정과 달리 소은정을 바라보는 눈빛만은 여전히 부드러웠고 사랑스러웠다.방금 전까지 불안하고 쿵쾅대던 소은정의 심장 역시 다른 의미로 뜀박질을 시작했다.한편, 하마터면 아빠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던 마이크가 드디어 울음을 터트렸다.“아빠...”쪼르르 들려가 전동하의 다리를 껴안은 마이크의 눈에서 눈물이 줄 끊어진 구슬처럼 주르륵 흘러내렸다.“아빠... 난 진짜 아빠가 어떻게 되는 줄 알았잖아요... 보고 싶었어요...”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던 낯간지럽던 말도 술술 하는 아들의 모습을 바라보던
근처에서 이 모습을 바라보던 간호사도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아, 다 왔었는데... 로맨스에서 시트콤으로 장르가 바뀌었잖아?’소은정의 호통에 겨우 전동하를 풀어준 소은해가 잔뜩 격앙된 목소리로 말했다.“다, 다른 사람들한테도 알릴게.”‘이제 저 사람도 깼으니까 병원 놀이도 끝이다.’한편 울음을 멈춘 마이크도 코를 풀쩍이더니 전동하를 바라보았다.‘아빠가 드디어 깨어났어. 큰일 치뤘으니까 예쁜 누나는 잠시 아빠한테 양보하는 걸로... 일단 환자를 잘 케어하는 게 중요하니까.’반면 전동하와 소은정은 한참 동안 서로를 바라보았다.다음 순간, 미소를 지으며 앞으로 한발 나서던 전동하의 얼굴이 다시 창백하게 질렸다.중심을 잃고 휘청이던 전동하가 쓰러지려던 그때, 따뜻하고 달콤한 향기가 물씬 풍겨왔다.소은정이 그의 허리를 끌어안은 것이었다.순간, 가슴이 쿵 내려앉는 느낌과 함께 전동하 역시 소은정을 꽉 끌어안았다.‘다신 이렇게 못 안을 줄 알았는데..’저승 문 앞까지 다녀오고나니 소중한 사랑이 더 귀하게 느껴졌다.비록 눈은 감고 있었지만 전동하는 그를 지켜보는 소은정의 시선을 느끼고 있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음에도 소은정이 옆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마음이 편안해졌었다.하지만 그것만으론 부족했다. 그녀의 미소를 보고 싶었고 따뜻한 피부를 만지고 싶었고 소은정의 삶 구석구석에 직접 참여하고 관여하고 싶었고 그래서 자꾸만 아득하게 멀어지려는 정신줄을 잡아 드디어 눈을 뜬 것이었다.소은정도, 전동하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두 사람의 마음은 그 어느 때보다 벅차올랐다.‘다행이다. 살아있어서. 이렇게 다시 은정 씨 얼굴을 볼 수 있어서.’전동하는 힘겹게 미소를 지으며 턱을 소은정의 어깨에 기댔다.은은하면서도 달콤한 향기가 전동하의 마음을 어지럽게 만들었지만 이 생생한 후각과 촉각은 그가 지금 이 순간 살아있음을 말해 주고 있었다.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옆에서 가만히 바라보던 의사가 한번 헛기침을 했고 그제야 둘은 서로를 놓아주었다.
소은정이 실종된 날부터 전동하는 하고 싶은 말을 숨기고 또 숨겨왔었다.‘이렇게 살아서 다시 말할 수 있어서 다행이야...’고개를 끄덕인 소은정은 의료진들과 함께 검사실로 들어가는 전동하의 모습을 바라보았다.문이 매정하게 닫히고 전동하와 소은정은 왠지 다른 세계에 갇히게 된 듯한 느낌이 들었다.그렇게 소은정은 검사실 앞에서 한시간을 조각상처럼 우두커니 서 있었다.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그저 멍하니 서 있는 것뿐이었지만 마음만은 굉장히 편안했다.잠시 후, 뒤편에서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오빠가 돌아왓나 보네.’“은정아, 전 대표 깼다면서?”그녀를 향해 다가오는 소찬식의 눈이 오랜만에 반짝였다.아무리 생명의 은인이라지만 딸이 평생 식물인간만 바라보고 사는 건 싫었으니까.고개를 돌린 소은정 역시 환하게 웃었다.“네. 지금 검사받으러 들어갔어요. 곧 나올 거예요.”소찬식 역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다행이야. 정말 다행이야. 이제부터 전 대표는 우리 집안의 은인이야. 필요한 거 있으면 뭐든 말하라고 해.”“그럼요. 아빠도 이제 한시름 놓으세요.”“그래. 은해 넌 여기 있어. 난 집에 가봐야겠다. 박 집사한테 보양식 좀 만들라고 부탁해야겠어.”소찬식이 가벼운 발걸음을 옮기며 자리를 뜨고 병원 복도 좌석에 털썩 주저앉은 소은해가 지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은호 형이랑 형수님한테도 다 연락 돌렸어. 다행이라고 하더라.”잠시 후, 소은호와 한시연 역시 병원으로 달려왔다.평소와 다름없이 차분한 표정의 소은호가 굳게 닫힌 검사실 문을 힐끗 바라보았다.“의식 회복했다고?”“응. 지금 검사받는 중이야. 아마 곧 끝날 거야.”소은정이 고개를 끄덕였다.“다행이네요. 아가씨, 이제 한시름 놓을 수 있겠어요.”한시연의 말에 소은정이 미소를 짓던 그때 소은호가 어딘가 굳은 표정으로 한발 다가섰다.“박수혁이 돌아왔어.”그 한 마디에 자리에 있는 모두의 눈이 동그래졌다.‘이렇게나 빨리? 게다가 하필 지금?’소은호가 말을 이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