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 사이로 소은정이 고개를 쏙 내밀었다.“저기 하늘이네 집 앞 사거리에 있는 포차 알지? 거기가 맛있더라. 부탁할게.”‘오빠 네가 갈 데가 어디 있겠어? 보나마나 하늘이한테 가는 거겠지. 데이트나 열심히 해, 오빠야.’순간, 소은해의 굳었던 표정이 활짝 피어올랐다.식지를 들어 소은정을 가리키며 말했다.“하, 귀신이네. 내가 오늘 네 장바구니 다 비워준다.”말을 마친 소은해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병실을 나섰다.세상 고민 하나 없는 한량의 콧노래 같은 소리에 소은정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우리 오빠... 이렇게나 똑똑한데. 그 머리를 제대로 안 굴려서 걱정이야.’...무사히 집으로 돌아온 뒤 소은정은 굳이 박수혁의 소식을 묻지 않았다. 뭐, 그녀가 혼자 소외되길 바라지 않았던 건지 소은호가 넌지시 한 마디씩 건네긴 했지만.입원해 있는 동안 소은정은 기획안에 집중하는 시간을 제외하고 항상 전동하의 곁을 지켰다.다행히 전동하는 이미 많이 회복된 상태였다. 왜인지 아직 의식을 되찾진 못했지만 말이다.마이크도 요즘 학교를 마치고 매일 병원에 눈도장을 찍고 있었다.처음엔 딱히 걱정 안 된다며 입을 삐죽 내밀던 마이크였지만 병상에 누워있는 전동하를 본 순간 결국 대성통곡하고 말았다.아무리 어른인 척해도 아직 10살도 되지 않은 어린애에게는 꽤나 충격이었을 테니까.그 뒤로 마이크는 매일 병원을 찾았고 소은정도 굳이 그런 아이를 말리지 않았다.두 사람만 서로 의지하며 살아온 시간만 약 9년, 마이크에게도 전동하에게도 서로의 존재는 전부나 마찬가지였다.그렇게 일주일이 흐르고...곧 의식을 회복할 것이란 한 원장의 말과 달리 전동하는 여전히 감감무소식이었다.회복기간이 예상보다 더 길어지자 소은정은 왠지 점점 더 불안해지기 시작했다.한 원장을 비롯한 의료진들은 수치적으로는 문제가 없다며 그녀를 안심시켰지만 전동하가 눈을 뜨긴 전까진 그 어떤 말로도 그녀를 위로할 수 없었다.그렇게 보름 뒤.소은정은 어느 정도 컨디션을 회복했고 우 비서의
마이크의 말에 소은정이 창백한 얼굴로 벌떡 일어섰다.“그게 무슨 소리야? 사라졌다니.”당황한 마이크가 말을 더듬었다.“그냥 사라졌어요. 병실에 아무도 없다고요.”소은정이 소은해를 돌아보고 오뎅을 들고 있던 그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뭐 검사받으러 간 거 아닐까?”하지만 여전히 잔뜩 굳은 표정의 소은정이 고개를 저었다.“아니야. 아까 회진 다 돌았는 걸...”말을 마친 소은정이 바로 병실을 뛰쳐나가고 마이크도 짧은 다리를 열심히 움직이며 그 뒤를 따랐다.역시나 아이의 말대로 전동하의 병실은 텅 비어있었다.‘정말... 사라졌잖아?’마침 근처를 지나던 간호사가 병실 앞에 망연자실하게 서 있는 두 사람을 발견하고 부랴부랴 달려왔다.“왜 그러세요?”소은정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대답했다.“동... 동하 씨가 사라졌어요.”그의 말에 역시 깜짝 놀란 표정을 짓던 간호사가 일단 그녀를 안심시켰다.“잠시만요. 저희가 찾으러 갈게요.”간호사가 휴대폰을 꺼낸 순간, 그토록 그리웠던 목소리가 소은정의 마음을 울렸다.“은정 씨...”등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흠칫하던 소은정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잔뜩 당황한 소은정의 표정에 전동하의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아, 꿈이 아니었구나. 여긴 대한민국이야. 은정 씨도... 나도 살아있어.’누워있는 동안 많이 수척해진 탓인지 전동하의 병원복이 왠지 더 헐렁하게 느껴졌다.조금 지쳐보이는 표정과 달리 소은정을 바라보는 눈빛만은 여전히 부드러웠고 사랑스러웠다.방금 전까지 불안하고 쿵쾅대던 소은정의 심장 역시 다른 의미로 뜀박질을 시작했다.한편, 하마터면 아빠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던 마이크가 드디어 울음을 터트렸다.“아빠...”쪼르르 들려가 전동하의 다리를 껴안은 마이크의 눈에서 눈물이 줄 끊어진 구슬처럼 주르륵 흘러내렸다.“아빠... 난 진짜 아빠가 어떻게 되는 줄 알았잖아요... 보고 싶었어요...”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던 낯간지럽던 말도 술술 하는 아들의 모습을 바라보던
근처에서 이 모습을 바라보던 간호사도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아, 다 왔었는데... 로맨스에서 시트콤으로 장르가 바뀌었잖아?’소은정의 호통에 겨우 전동하를 풀어준 소은해가 잔뜩 격앙된 목소리로 말했다.“다, 다른 사람들한테도 알릴게.”‘이제 저 사람도 깼으니까 병원 놀이도 끝이다.’한편 울음을 멈춘 마이크도 코를 풀쩍이더니 전동하를 바라보았다.‘아빠가 드디어 깨어났어. 큰일 치뤘으니까 예쁜 누나는 잠시 아빠한테 양보하는 걸로... 일단 환자를 잘 케어하는 게 중요하니까.’반면 전동하와 소은정은 한참 동안 서로를 바라보았다.다음 순간, 미소를 지으며 앞으로 한발 나서던 전동하의 얼굴이 다시 창백하게 질렸다.중심을 잃고 휘청이던 전동하가 쓰러지려던 그때, 따뜻하고 달콤한 향기가 물씬 풍겨왔다.소은정이 그의 허리를 끌어안은 것이었다.순간, 가슴이 쿵 내려앉는 느낌과 함께 전동하 역시 소은정을 꽉 끌어안았다.‘다신 이렇게 못 안을 줄 알았는데..’저승 문 앞까지 다녀오고나니 소중한 사랑이 더 귀하게 느껴졌다.비록 눈은 감고 있었지만 전동하는 그를 지켜보는 소은정의 시선을 느끼고 있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음에도 소은정이 옆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마음이 편안해졌었다.하지만 그것만으론 부족했다. 그녀의 미소를 보고 싶었고 따뜻한 피부를 만지고 싶었고 소은정의 삶 구석구석에 직접 참여하고 관여하고 싶었고 그래서 자꾸만 아득하게 멀어지려는 정신줄을 잡아 드디어 눈을 뜬 것이었다.소은정도, 전동하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두 사람의 마음은 그 어느 때보다 벅차올랐다.‘다행이다. 살아있어서. 이렇게 다시 은정 씨 얼굴을 볼 수 있어서.’전동하는 힘겹게 미소를 지으며 턱을 소은정의 어깨에 기댔다.은은하면서도 달콤한 향기가 전동하의 마음을 어지럽게 만들었지만 이 생생한 후각과 촉각은 그가 지금 이 순간 살아있음을 말해 주고 있었다.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옆에서 가만히 바라보던 의사가 한번 헛기침을 했고 그제야 둘은 서로를 놓아주었다.
소은정이 실종된 날부터 전동하는 하고 싶은 말을 숨기고 또 숨겨왔었다.‘이렇게 살아서 다시 말할 수 있어서 다행이야...’고개를 끄덕인 소은정은 의료진들과 함께 검사실로 들어가는 전동하의 모습을 바라보았다.문이 매정하게 닫히고 전동하와 소은정은 왠지 다른 세계에 갇히게 된 듯한 느낌이 들었다.그렇게 소은정은 검사실 앞에서 한시간을 조각상처럼 우두커니 서 있었다.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그저 멍하니 서 있는 것뿐이었지만 마음만은 굉장히 편안했다.잠시 후, 뒤편에서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오빠가 돌아왓나 보네.’“은정아, 전 대표 깼다면서?”그녀를 향해 다가오는 소찬식의 눈이 오랜만에 반짝였다.아무리 생명의 은인이라지만 딸이 평생 식물인간만 바라보고 사는 건 싫었으니까.고개를 돌린 소은정 역시 환하게 웃었다.“네. 지금 검사받으러 들어갔어요. 곧 나올 거예요.”소찬식 역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다행이야. 정말 다행이야. 이제부터 전 대표는 우리 집안의 은인이야. 필요한 거 있으면 뭐든 말하라고 해.”“그럼요. 아빠도 이제 한시름 놓으세요.”“그래. 은해 넌 여기 있어. 난 집에 가봐야겠다. 박 집사한테 보양식 좀 만들라고 부탁해야겠어.”소찬식이 가벼운 발걸음을 옮기며 자리를 뜨고 병원 복도 좌석에 털썩 주저앉은 소은해가 지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은호 형이랑 형수님한테도 다 연락 돌렸어. 다행이라고 하더라.”잠시 후, 소은호와 한시연 역시 병원으로 달려왔다.평소와 다름없이 차분한 표정의 소은호가 굳게 닫힌 검사실 문을 힐끗 바라보았다.“의식 회복했다고?”“응. 지금 검사받는 중이야. 아마 곧 끝날 거야.”소은정이 고개를 끄덕였다.“다행이네요. 아가씨, 이제 한시름 놓을 수 있겠어요.”한시연의 말에 소은정이 미소를 짓던 그때 소은호가 어딘가 굳은 표정으로 한발 다가섰다.“박수혁이 돌아왔어.”그 한 마디에 자리에 있는 모두의 눈이 동그래졌다.‘이렇게나 빨리? 게다가 하필 지금?’소은호가 말을 이어갔다.
소은호의 경고에 소은해는 마음에 안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지만 고분고분 형의 말을 따랐다.뭐 마음속으로는 박수혁에 대한 욕을 실컷 쏟아내고 있었지만 말이다.한편, 소은호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소은정이 고개를 끄덕였다.“지금은 일단 동하 씨 건강 회복에만 집중할래. 아마... 당분간 별일은 없을 거야.”그녀의 말에 소은호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한시연은 여전히 걱정되는 얼굴이었다.“아가씨가 아직 살아있다는 걸 박수혁 대표가 알게 되면... 괜히 뭐라고 하는 거 아닐까요?”그녀의 말에 차분하던 소은호의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무슨 자격으로? 우리 은정이 살려달라고 우리가 부탁이라도 했나?”“그러니까.”소은해 역시 코웃음을 쳤다.잠시 후, 의료진들이 우르르 검사실에서 나왔다.소은호가 한결 편해진 표정의 한 원장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표정 좋으신 걸 보니까 결과가 나쁘지 않나 보네요?”“다행스럽게도. 다들 봤겠지만 회복 속도가 빨라. 꽤 오래 누워있어서 체력은 좀 떨어진 상태지만 여러 수치들도 전부 정상 범위로 돌아왔어. 역시 젊어서 그런지 회복속도가 굉장히 빠르네.”한 원장의 설명에 모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소은정이 먼저 물었다.“그럼 퇴원은 언제쯤 할 수 있을까요?”“음... 한동안은 병원에서 지내면서 상황을 지켜보는 게 좋을 것 같아. 내 예상대로라면... 아마 보름 뒤면 퇴원 가능할 것 같은데?”“이제 검사도 끝났겠다... 다들 들어가 봐. 아직 절대 안정이 필수니까 너무 오래 괴롭히진 말고.”한 원장의 말에 소은정이 망설임없이 병실로 들어가고 의자에 앉아있던 소은해 역시 그 뒤를 따르려던 그때 소은호가 동생의 뒷덜미를 덥썩 잡았다.이에 소은해가 눈을 동그랗게 떠보였다.“형... 왜 그래?”소은해가 애써 발버둥을 쳐보았지만 소은호의 손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네가 거길 왜 들어가?”“전 대표 보러가야지. 어쩌면 앞으로 가족이 될지도 모르는데 미리 좀 친해지는 게 좋지 않겠어? 솔직히 내가 전에는 워낙 그 앞에서
얼굴을 전동하의 큰 손에 파묻은 소은정의 어깨가 슬픔으로 살짝 떨려왔다.만약 운이 나빴다면... 전동하가 마침 그때 와주지 않았다면...다른 가능성을 아무리 생각해 봐도 끔찍한 결과뿐이었다.‘그랬다면 내가 죽든지 두 사람 다 죽든지 둘 중 하나였겠지...’하지만 소은정이 더 두려운 건 두 번째 경우였다.애초에 그녀는 전동하를 진심으로 사랑해서 연애를 시작한 게 아니었다.탐욕스럽게도 그녀는 사랑의 달콤함만 취하고 싶었고 그래서 미래에 대한 그 어떤 약속도 하지 않았다.그만큼 지난 결혼의 상처가 컸기 때문이었다.전동하가 알게 모르게 건네는 말에 담긴 뜻을 뻔히 알고 있었지만 그때마다 소은정은 그저 웃으며 넘겼었다.하지만 점점 더 무거워지는 사랑의 무게에 소은정은 왠지 부담스러웠다.‘나 때문에... 나 때문에 그렇게 죽을 각오까지 할 줄은 몰랐어.’손바닥에 느껴지는 촉촉함에 전동하가 움찔했다.그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려던 그때 구석에 선 채 왠지 모르게 억울한 눈빛을 하고 있는 마이크가 시선에 들어왔다.왠지 소외당했다는 기분에 조금 삐진 것 같은 얼굴이었지만 전동하는 매정하게 아들에게 나가라는 듯 손을 저었다.입을 삐죽거리던 마이크가 결국 병실을 나섰다.‘어떻게 아들을 이렇게 무시할 수가 있어! 아빠 나빠! 난 아빠 때문에 울기까지 했는데! 괜히 울었어!’병실을 나서고도 한참을 씩씩대던 마이크는 결국 한숨을 푹 내쉬었다.‘아니다.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예쁜 누나라면... 참아줄 수 있지.’한편 병실.전동하는 말없이 소은정의 등을 토닥여주었다.‘울지 말아요... 은정 씨가 이렇게 울면 내 마음이 너무 아프잖아요...’한참 뒤에야 전동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뭐 이것저것 따질 겨를이 없었어요. 은정 씨를 잃는 게 죽는 것보다 훨씬 더 두려웠으니까요.”빨개진 눈으로 고개를 든 소은정의 얼굴은 이미 눈물 범벅이 되어 있었다.손을 뻗어 눈물을 닦아준 전동하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당신이 다치는 것보다 내가 다치는 게 백배
곧이어 전동하가 말을 이어갔다.“그 악마들 사이에서 유일하게 날 사람취급해 준 게 마이크의 아버지였고 그 마음에 보답한다는 생각으로 지금까지 마이크를 키워오고 있어요. 그게 내 책임이라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은정 씨는 달라요. 은정 씨를 지키는 건 나한테 본능 같은 거예요. 솔직히 나도... 내 감정이 정말 순수한 건가 고민했었어요. 혹시나 한순간의 끌림을 사랑이라고 생각하는 게 아닐까 하고요. 하지만... 은정 씨랑 더 가까워질 수록 그 의심은 확신으로 바뀌었어요. 아, 이건 사랑이 맞구나. 은정 씨한테 다가가는 시간들이 나한테는 너무나 소중했고 그래서 더 가까워지고 싶고 더 이해하고 싶었어요. 은정 씨, 나한테 은정 씨는 정말 소중한 존재예요.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소중한 사람이라고요.”전동하의 진심어린 목소리에 소은정의 눈동자가 살짝 떨려왔다.금방이라도 울 것만 같은 표정을 짓는 그녀의 모습에 전동하가 다시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지금 다시 생각해 보면... 정말 위험하긴 했는데... 그 순간에는 두려움 같은 걸 느낄 겨를이 없었어요. 그날 그곳에서 내가 살고 은정 씨가 죽었다면 난 남은 생 동안 평생 지옥에서 살아갔을 거예요.”콧물을 훔치며 소은정은 봄날 얼어붙은 땅을 뚫고 나오려는 새싹같은 감정을 억지로 밀어냈다.‘동하 씨도 나한테 소중한 사람이에요. 동하 씨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요.’이때 피식 웃던 소은정이 괜히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그날 진짜 빠르게 달리던데. 비결이 뭐예요?”“은정 씨가 혼자서 얼마나 무서울까라는 생각을 하니까 저도 모르게 그렇게 빨리 달리게 되던데요?”그의 대답에 고개를 푹 숙인 소은정이 환한 미소와 함께 머리를 들었다.“뭐 어쨌든 우리 둘 다 무사하니까 다행이네요. 정말 운이 좋았어요.”“은정 씨가 워낙 운이 좋은 사람이잖아요. 그 덕에 나도 이렇게 무사한 게 아닐까요?”“뭐... 받고 싶은 거 있어요?”“왜요? 보답이라도 하려고요?”전동하가 미간을 찌푸렸다.“아빠가 물어보라고
소은정이 입술을 꽉 깨물었다.치아로 짓눌린 입술이 빨갛게 변하고 그녀의 의도와 다르게 어딘지 모를 매혹스러움이 추가되었다.할말을 잃은 소은정이 홱 돌아선 순간, 전동하가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쑥스러움으로 물든 소은정의 얼굴을 바라보니 전동하의 마음이 설렘으로 살랑였다.화난 그녀의 마음을 풀어주려는 듯 전동하는 한결 누그러든 목소리로 말했다.“아, 내가 너무 성급했나요? 너무 변태 같았나? 그런데... 아무 소원이나 상관없다면서요. 원하는 소원 같은 거 있으면 미리 언질이라도 주지 그랬어요. 난 이렇게 화낼 줄 몰랐죠.”“하!”소은정이 코웃음을 지었다.‘지금 은근슬쩍 내 탓으로 돌리는 거야?’힘껏 팔을 휘둘러 전동하의 손을 떨쳐낸 소은정이 그를 흘겨보았다.“지금 그걸 말이라고 해요? 어떻게 이런 상황에서도...”소은정이 격앙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가려던 그때, 전동하의 낯빛이 창백해지더니 자신의 가슴을 움켜쥐었다.이에 소은정 역시 깜짝 놀란 얼굴로 다가갔다.“왜 그래요? 상처가 벌어진 거예요? 잠깐만요. 바로 의사선생님 불러올게요!”순식간에 소은정의 작은 손이 식은땀으로 젖었다.소은정이 호출벨을 누르려던 그때, 전동하가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은정 씨가 화 풀면 바로 나을 것 같은데...’그의 말에 두 눈을 껌벅이던 소은정이 또 당했음을 인지하고 발을 동동 굴렀다.“장난치는 게 그렇게 재밌어요!”그렇게 깨어나길 바랐는데 정신 차리자마자 하는 짓이 장난질뿐이라니.전동하를 밀어내려던 소은정은 아무리 장난이라 해도 창백한 안색만은 연기가 불가능하다는 걸 인지하곤 훨씬 풀어진 힘으로 그의 어깨를 툭 건드렸다.하지만 여전히 차가운 얼굴로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이렇게 장난치는 거 보니까 다 나았네. 약 안 먹어도 되겠어요.”이에 전동하가 생긋 웃으며 소은정의 눈치를 살폈다.“정말 화났어요? 내가 이렇게 사과할게요. 화 풀어요, 네?”하지만 그의 애교에도 소은정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내가 그 동안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