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연은 상혁의 그 차가운 시선에 순간적으로 가슴이 찔린 듯했다. 검은 셔츠의 윗단추 두 개를 풀어 젖힌 상혁은, 어두운 밤 속에서 강한 남성적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다. 다가가 보니, 하연은 홀로 길가의 벤치에 앉아있었다. 상혁은 미간을 찌푸렸다. “내가 파기하라고 했잖아.” “당신이 직접 파기해요.” 하연은 그의 품에 서류를 밀어 넣었다. 상혁이 그것을 펼쳐보니, 하얀 종이 몇 장이었다. 그는 눈썹을 치켜세우고 하연을 내려다보았다. “당신한테 거짓말했어요. 그날 서류를 잘못 가져오지 않았어요.” 상혁은 등을 돌리고 걸어가려고 했다. 그러나 하연이 그의 옷자락을 잡았고, 마치 작은 고양이처럼 상혁의 옷을 놓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가 상혁의 강한 체격을 붙잡는다고 해서 막을 수는 없었다. 상혁이 걸음을 떼자, 하연은 균형을 잃고 땅에 넘어졌다. 꽤 묵직한 소리와 함께 손이 바닥에 닿았고, 손목에는 금방 붉은 상처가 번졌다. 상혁은 즉시 발걸음을 멈추고 돌아보았다. 그는 단 한 손으로 하연을 일으켜 다시 벤치에 앉혔다. 몸을 앞으로 기울인 상혁은 분노로 인해 숨을 거칠게 몰아쉬고 있었고, 눈에서는 날카로운 빛이 뿜어내고 있었다. “최하연, 네가 대체 뭘 하고 싶은 건지 말해봐.” 하연은 고통을 참으며 숨을 몰아쉬었다. “당신을 보고 싶었어요. 당신과 얘기하고 싶었어요.” “뭐 하러?” 상혁은 하연의 턱을 거칠게 잡아 그녀가 자신의 검은 눈동자를 마주 보게 했다. “그 남자를 위해서 발목까지 삐며 사람들을 오해하게 만들고, 나를 이용해서 언론을 떠들썩하게 했으면서, 이제 와서 무슨 말을 더 하고 싶은 건데?” 그의 손에 이끌려 억지로 고개를 든 하연은 눈물을 참으려 했지만, 이미 눈가가 뜨거워져 있었다. 억울함과 울컥하는 감정을 애써 삼켰다. “그 사람 때문이 아니에요. 나는 그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고 싶었을 뿐이에요. 내가 뭘 잘못했어요?” 둘 다 명석한 사람들이었기에 굳이 더 말하지 않
상혁은 거의 자신을 제어하지 못할 뻔했다. 두 손은 하연의 허리를 감싸 안고 더 깊이 키스하고 싶었고, 더 많은 것을 원했다. 심지어 그녀를 방으로 데려가고 싶은 마음마저 들었다. 하지만 3초 후, 그는 끝내 하연을 밀어내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그의 목소리는 낮고도 깊었다. “최하연, 자중해.” 하연에게 ‘자중’이라는 말을 들은 것은 처음이었다. 계속되는 거절에 하연의 자존심에는 큰 상처가 생겼다. 그녀는 곧바로 상혁을 놓아주고, 어색한 침묵 속에서 다시 자리에 앉았다. “너희 집 경비에게 연락했으니, 곧 너를 데리러 올 거야. 며칠 뒤 우리 집안의 백 년 기념식에는 올 필요 없어. 너와 나의 일은 우리 집안에서도 이미 알고 있으니, 어른들도 너를 괴롭히진 않을 거야.” 상혁은 일어서서 하연에게 등을 돌렸다. 하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상혁도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다가 결국 고개를 돌렸다. 하연은 눈물을 닦아내고 있었고, 얼굴에는 이미 차가운 표정이 드리워져 있었다. “난 당신이 싫어!!” 어렸을 때, 하연은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면 떼를 쓰고 화를 내며, ‘싫어’라고 말하곤 했다. “상혁 오빠 싫어!' 이전의 상혁은 하연에게 미움받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매번 하연이 이런 말을 할 때마다 그도 마음이 약해지곤 했다. 실은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이번엔 좀 달랐다. 상혁은 하연을 달래지 않고, 길목 쪽을 바라보았는데, 경비원이 이미 다가오고 있었다. 그는 서둘러 집 안으로 들어가며 문을 등졌고, 하연의 흔적을 지우려는 듯 손가락으로 강하게 입술을 문질렀다. ‘하연이에게는 모든 것이 너무 쉽게 주어졌어.' 하연은 원하기만 하면 언제나 손가락 하나만 까딱해서 모든 걸 가질 수 있었다. 특히 상혁에게는 더 말할 필요도 없었다. 하연이 말하지 않아도 상혁은 언제나 그 자리에 서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하지만 이번만큼은 달랐다. 하연도 알고 있었다. 두 사람의 문제는 단순히 하연이 손이
이혼한 뒤로는 원래 부씨 가문에 발을 들여놓을 수 없는 것이 당연했다. 하지만 이렇게 많은 시간이 흐르자, 부씨 가문 사람들의 조진숙을 향한 의심은 인정으로 바뀌었다. 설령 이혼했을지라도, 그녀는 부씨 가문의 내부를 깔끔하게 관리하며 덕으로 사람을 감동하게 했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부씨 가문 안팎에서 여전히 조진숙을 존중하고 있다.사실 조진숙이 아니었다면, 상혁이 부씨 가문에서 더 단단히 자리 잡을 수 없었을 것이다. 조진숙이 하는 모든 일은 오직 아들을 위해서였다. 급히 밖으로 나온 그녀는 하연이 남준 옆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하연아!” 하연이 즉시 고개를 들며 말했다. “이모!” “왔으면 나한테 알려야지, 여기 숨어 있으면 사람들이 우리가 너를 구박하는 줄 알잖아.” 조진숙은 남준을 아예 무시한 채, 하연의 손을 잡았다. 하연은 상혁이 자신에게 오지 말라고 한 말을 꺼낼 용기가 없었다. 그저 상혁이 원하지 않으니 사람들 앞에 나서지 않으려 했을 뿐이다. “그게 아니라... 저랑 상...” “너랑 상혁이가 어찌 됐든 그건 너희들 문제야. 그전에 너는 내 양딸이잖니. 나갈 땐 당당하게 대문으로 나가야지. 이 집의 딸답게 행동해. 다음부터는 뒷문으로 들어오는 일은 없어야 해. 마치 가난한 집안에서 사는 서민 같잖아.” 조진숙은 이렇게 말하며 남준을 흘깃 보았다. 이것이 누구를 겨냥한 말인지는 뻔했다. 남준은 개의치 않고 웃으며 말했다. “이모.” 조진숙은 남준의 핸드폰을 쓱 보았다. “새 여자 친구야?” 남준은 핸드폰을 닫으며 대답하지 않았다. “너도 정신 좀 차려야지. 너희 어머니가 명문가의 딸을 찾아서 너랑 혼인을 시키려고 얼마나 애쓰시는지 알아? 절대 그 기대를 저버리면 안 돼.” 송혜선은 남준을 명문가의 딸과 결혼시키려 했고, 그게 아들에게는 큰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사회에는 불문율이 있었다. 정통 가문의 자식은 정통 가문의 자식과 결혼하고, 사생아
병원 로비의 대형 스크린에는 이번 항공기 사고가 실시간으로 보도되고 있었다. 최하연은 세 명뿐인 생존자 중의 하나로 두 다리에 붕대를 감은 채 중환자실 병상 위에 누워 있었다.그때, 손에 들린 핸드폰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고객님께서 전화를 받을 수 없습니다. 다음에 다시 걸어주세요.”사고가 나던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남편 한서준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설마 그가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한 여객기 사고를 모를 일은 없었다. 사고 당시, 현장에는 승객들의 시신이 여기저기 아무렇게나 널려 있었다. 그녀는 사고의 충격과 죽음의 공포로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결혼한 지 3년이나 되었지만 남편은 그녀가 가장 필요로 하는 순간 연락이 되지 않았다.하연은 마음 한 켠이 시려 오는 것을 느꼈다.그때, 휴대폰 벨 소리가 들려왔다. 한참이나 멍하게 있던 그녀는 정신을 차리고 발신자를 확인했다. 할머니였다. 하연의 얼굴이 어두워졌다.“여보세요.”그녀가 잔뜩 쉰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전화 건너편에서 친절하면서도 연로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우리 하연이, 이 할미가 너 때문에 너무 놀라서 제 명에 못 죽겠구나. 어디 다친 데는 없고? 서준이가 옆에 같이 있지?]강영숙은 서준의 친할머니로 한씨 집안 사람들 중 유일하게 하연에게 관심을 갖는 분이었다. “서준 씨는...”머뭇거리는 그녀의 말에 강영숙이 무언가를 눈치 챈 듯했다. [이런 정신 나간 놈을 봤나! 비서로 또 아내로, 해외 출장간 남편 일을 다 봐주고 있는데 이렇게 큰 사고가 터졌는데도 코빼기도 안보여? 기다려봐라! 이 할미가 정신나간 그 녀석을 가만 두나!]그녀가 다시 물었다.[지금 어느 병원에 있어? 집사를 보낼 테니 기다리렴!]하연이 병원 주소를 알려주자 강영숙은 전화를 끊었다.그녀는 고개를 푹 숙인
하연은 두 달 전, 1주일 정도 출장 일정이 잡혀 있던 한서준의 일정보고서가 생각났다.핸드폰을 쥐고 있는 그녀의 손이 떨려왔다.‘그 때 생긴 아이인 거야?’그녀는 한서준의 숨겨진 아내로 오래 전부터 비밀계약을 맺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껏 남편의 스캔들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한서준 사장이 여자친구에게 참 각별한 것 같아... 저 여자는 전생에 나라를 구했나 봐. 보아하니 곧 공식발표가 날 것 같은데?”“그러게. 나도 아까 검색해 봤어. 네 생각엔 저 사람이 여자친구가 맞는 것 같아?”카트를 밀고 가던 젊은 간호사가 옆에 있는 간호사에게 핸드폰 속 사진을 보여주었다. 그러자 그녀가 깜짝 놀라며 말했다.“맞아, 맞아! 이 여자야! ST그룹 둘째 딸! 한서준이랑 너무 잘 어울리지 않아? 하늘이 맺어준 커플 같아!”두 사람은 호들갑을 떨며 반대편으로 걸어갔다.‘ST 그룹이라...’퇴원 수속을 마친 하연은 집사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가면서도 마음이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반쯤 열린 창문 아래 핸드폰 화면의 불빛이 창백한 하연의 얼굴을 비췄다. 수 없이 검색해 봤지만 한서준과 ST 그룹과의 연관성은 전혀 찾을 수 없었다.‘B시의 잘 나가는 두 명문가 집안이 이런 식으로 엮이다니 이상해.’서준의 본가에 도착하니 거실에 불이 켜져 있었다. 눈엣가시 같은 시누이 대신 서준의 할머니인 강영숙 여사가 지팡이에 몸을 의지한 채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우리 하연이 왔구나! 네가 복이 많아서 그 큰 사고 중에도 무사했구나. 너무 놀라서 하마터면 숨이 넘어갈 뻔했지 뭐냐.”“할머니, 전 괜찮아요.”하연은 올라가 쉬고 싶은 마음이 컸지만 웃으며 말했다.“할머니, 사실 저 좀 피곤해요.”“그래, 그래. 얼른 올라가서 쉬어라. 서준이한테 연락해 놨으니까 곧 올 거다.” 하연은 몸을 숙이는 순간 심한 통증이 몰려와 얼굴이 일그러졌다.강영숙은 하연이 괴로워하는 모습의 이유가 서준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하연의 머릿속에 서준의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당신이랑 그 여자, 대체 언제부터 만난 거야?”하연이 겨우 몸을 추스르며 침대에 기대앉았다.서준은 그녀가 3년전 혼인신고를 할 때보다 훨씬 말랐다는 것을 알아챘다. 어찌나 야위었던지 바람이 불면 날아가버릴 것 같았다.“당신 내 뒷조사를 한 거야?”그의 안색이 변했다. “내가 그렇게 한가한 사람으로 보여요? 내가 입원했던 병원에서 내 두 눈으로 당신들 두 사람을 봤어요.”그녀의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지만 그 어느때보다 딱 부러지는 말투였다.순간, 하연은 심장이 찢기는 듯한 괴로움을 느꼈다.하지만 서준의 얼굴에는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했다.그는 하연이 사고가 난 것을 알면서도 걱정해하는 말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가 하는 말들을 들으며 혐오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부부로 살았던 3년이라는 시간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아.’ 며느리로서 일을 열심히 했지만 하는 일 마다 트집잡는 시어머니와 자신을 눈엣가시처럼 여기는 시누이에게 하연은 정성을 다했다. 집에서는 주부로 또 회사에서는 헌신적인 비서 역할을 도맡았다. 그녀는 서준의 할머니 강영숙 여사의 뜻에 따라 아들, 딸 잘 낳는 좋은 손자며느리가 되려고 노력했다.3년 동안 그만큼 했으면 강영숙 여사에게 가족으로서의 의리는 충분히 지킨 것이다. 하지만 그 결과는 어떠한가?3년간 하연은 서준의 몸에 손가락 하나도 댈 수가 없었다. 한 방을 쓰고 있었지만 침대는 따로 썼기 때문이었다. 하연은 밀려오는 통증을 참으며 차가운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그러다 무슨 용기가 났는지 소리를 내어 가볍게 웃었다.“당신 어머니는 내가 애도 못 낳으면서 결혼한 양심도 없는 여자라고 했죠. 그런데 지금 당신이 밖에서 다른 여자와 아이를 가진 걸 내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죠?”간신히 침대에 기대고 있는 그녀는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하지만 고개를 꼿꼿하게 쳐들고는 그의 옷깃을 잡았다.하지만 곧바로 굵은 그의 손에 잡히고 말았다.한서준은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혜경이는 내 세컨드
하연은 서준의 셔츠 단추를 하나씩 풀었다. 그리고 그의 복근을 따라 내려가며 입을 맞추었다. 오랫동안 감춰온 서준의 대한 갈망 탓인지 귀밑까지 붉어졌다.그녀는 손놀림을 멈추지 않은 채 쉰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어떻게 이 집의 작은 안주인이 되었는지 잊었냐고요? 어떻게 잊을 수 있겠어요. 제 임무는 당신의 아이를 낳는 거예요. 지금 나는 내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거고요.“어떻게 그런 말을?!”화를 내는 서준의 탄탄한 복근이 울룩불룩 움직였다.“방 안에 최음제를 좀 뿌렸어요. 조금만 참으면 곧 괜찮아질 거예요. 저는 제 임무를 위해 아이를 가지려는 것뿐이에요.”그녀는 더 대담하고 과감하게 행동했다. 전에는 한번도 보여준 적 없는 요염한 모습이었다.하연의 적극적인 도발에 그의 몸이 본능적으로 반응하기 시작했고 호흡도 거칠어졌다.그는 이것이 최음제 때문인 것을 알고는 이성을 되찾았다. 그리고는 하연의 거침없는 손을 꽉 움켜 잡았다.“최하연, 너 정말 역겨워.”서준의 말에 그녀의 끓어오르던 욕망이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하연은 눈에 눈물이 고인채로 마지막으로 물었다. “나를 안는 게 그렇게 구역질나요?”“그래!”서준은 그녀를 똑바로 쳐다보면서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그리고 그녀를 밀쳐냈다.더는 그녀와 한마디도 하고 싶지 않았다. 서준은 하연이 벗긴 옷을 집어 들고 다시 입기 시작했다.그는 단추도 잠그지 않은 채 성큼성큼 걸어 나가버렸다. 방문이 ‘쾅’하고 닫히면서 주위가 다시 조용해졌다.하연은 그가 나가자 긴장이 풀려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녀의 눈에는 서준을 원망하는 눈빛이 가득했다. 서준은 방을 나서며 생각했다.‘이 정도로 했으면 있던 마음도 없어지겠지...’...다음날 아침, 하연은 아직 성치 않은 다친 다리를 절뚝거리며 짐을 싼 여행가방을 끌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집안 살림을 돕는 가정부가 식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강영숙 여사는 새벽기도를 드리러 가느라 집을 비운 상태였다.“어머, 새언니! 죽다 살아난 지 얼마
이수애 여사는 하연이 전과는 완전히 다른 투로 말하는 것을 보고 도저히 믿기지가 않았다. 그녀는 커다란 사파이어가 박힌 반지를 낀 손가락으로 하연을 가리켰다.“너 지금 그게 무슨 태도야!? 방금 했던 말 다시 한번 해봐!”하지만 하연은 조금도 두려워하는 기색 없이 그녀를 똑바로 쳐다봤다.“민혜경이라는 여자가 집에 들어오면 그 여자한테 집안일을 시키세요. 저는 앞으로 하지 않을 거예요.” 하연은 앵두처럼 붉은 입술로 또박또박 말했다. 말을 하고 나니 속이 시원했다. 이 여사는 그녀의 말에 벌컥 화를 냈다.“너!”“엄마, 엄마!”서영이 흥분한 엄마의 팔을 붙잡고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새언니 화난 거 맞죠? 어젯밤에 오빠가...”그녀는 불난 집에 부채질이라도 하려는 듯 어젯밤 일을 꺼내려고 했다. 그 모습을 보니 하연의 화를 돋우려는 의도가 충분히 보였다.이 여사는 딸의 의도를 금방 알아채고 다시 차분해졌다. 그녀는 특유의 거들먹거리는 투로 말했다. “남편 하나 붙잡지 못하는 주제에 별 억지를 다 부리네. 감히 시어머니 탓을 해?”하연은 느릿느릿 짐을 끌고 나오다가 저택 입구에서 발걸음을 멈추었다.심장박동이 빨라지면서 머리가 쪼개질 듯 아팠다.그녀는 고개를 돌려 욕을 퍼붓고 싶은 마음을 꾹 누르며 차갑게 말했다.“지난 3년동안 아이가 없었던 게 다 저 때문이라고 하셨죠? 절 의심하기 전에 서준 씨에게 비뇨기과 진료를 받으라고 하는 편이 빠를 거예요. 그러면 임신이 안됐던 원인이 과연 누구 쪽에 있는지 알 수 있을 거예요.”“너, 니가 감히!”하연의 말에 이 여사와 서영 둘 다 깜짝 놀랐다. 이 여사는 머리 끝까지 화가 치밀었다.“최하연! 난 너랑 우리 서준이하고 꼭 이혼시키고 말 테니 두고 봐!”그동안 하연은 서준의 할머니 강영숙 여사와의 정을 생각해서 한씨 집안 사람들과 다툼을 피했다. 왠만해선 자기 의견을 내세우지 않고 원만하게 지내왔다.지금까지는 집안 사람들과 갈등이 생길까 봐 두려워하며 지냈지만 이제는 신경 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