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연은 상혁의 시선 때문에 약간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원신민이 분위기를 풀어주며 말했다. “최 사장님이 직접 만드신 건가요?” 하연이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냄새를 맡았어요. 삼계탕이군요. 대표님이 가장 좋아하시는 음식이죠.” 원신민은 말을 마치고 음식을 상혁 앞으로 가져갔다. “대표님, 한번 드셔보실래요?”하연이 제지할 틈도 없이 음식이 상혁 앞에 놓였다. 삼계탕뿐만 아니라 갈치구이, 갈비찜, 그리고 채소 요리까지 나왔다. 음식은 훌륭해 보였고, 맛도 좋았다. 상혁은 잠시 음식을 바라보았다. 하연은 그가 거부하지 않는 것을 보고 조심스럽게 상혁의 앞에 쪼그려 앉으며 말했다. “이모가 그러셨는데, 당신이 며칠 동안 제대로 식사하지 않으셨다고 하더라고요. 위를 위해서라도 한 번 맛보시라고요.” 상혁의 시선은 하연에게 있었다. “그날 밤, 내가 너에게 모든 걸 분명히 말했잖아.” 하연은 미소를 지으며 엉뚱한 대답을 했다. “그게 식사랑 무슨 상관이 있어요?” 그녀는 두 손으로 은젓가락을 건넸다. 상혁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젓가락을 들어 음식을 한 입 맛보았다. 하연의 마음은 불안했다. 상혁은 스스로 요리를 잘하고, 입맛이 까다로운 사람으로 유명했기 때문이다. “어때요?” 상혁은 음식을 삼키고 나서 담담하게 말했다. “부씨 가문의 요리사들은 실수가 없었지. 늘 훌륭하지.” 하연의 웃음은 그 말에 살짝 굳어졌다. 그녀는 어색하게 말했다. “이건 내가 만든 건데요.” 상혁은 휴지를 꺼내 입가를 닦으며 말했다. “요리 안 한 지 얼마나 됐지? 한씨 가문에서 마지막으로 요리한 게 벌써 2년 전일 텐데. 그동안 주방에 들어가 본 적이 있긴 해?” 비꼬는 말이었지만, 하연은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이게 바로 상혁이 여전히 자신을 잘 알고 있다는 증거였기 때문이다. “나도 재능이 있잖아요. 기억력이 좋거든요.” “네가 만든 음식이라면 주방 쓰레기통에 던져져 있었겠지
“제가 이미 문서에서 언급했듯이, 이 사업은 규정에 맞지 않아요.” “근데 상혁아, 남준이가 예전에 네가 지금 앉아 있는 그 자리에 있었을 때는 어떻게 했던 거야?” 이 말을 듣자, 상혁은 펜을 두드리던 손을 멈추고 말했다. “그럼 삼촌이 남준에게 직접 물어보셔야겠네요.” 부건국의 얼굴이 굳어졌지만, 곧바로 분위기를 풀며 말했다. “내가 그런 뜻으로 말한 건 아니고, 지금 고경수가 몰락하고, 우리 그룹의 권력이 나눠지는 불안정한 시기잖아. 정규인은 동남아시아 지사의 지사장인데, 네가 정규인의 사업을 철회하면 언젠가 너에게 불만을 품게 될지도 모른다.” 하연은 옆에서 이 대화를 듣고 있었다. 동남아시아의 이익이 적지 않다는 걸 알았지만, 상혁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일반 사업가는 이익에 집착하고, 조금이라도 비즈니스 마인드가 있는 사업가는 이해관계에 얽매이며, 진짜 훌륭한 사업가는 시장과 자본을 다룹니다. 삼촌, 제가 무엇을 해야 할지 충분히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제가 내리는 모든 결정이 DL그룹의 발전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잘 이해하고 있으니, 너무 염려하지 마세요.” 상혁은 차를 한 모금 마시며 미소를 지었다. “더군다나 정규인은 이미 저에게 불만을 품고 있었어요, 안 그런가요?” 그는 정규인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 부건국은 말문이 막혔지만, 여전히 등을 꼿꼿이 세우며 말했다. “그렇다고 해도 너무 자만하면 안 돼. DL그룹 안에는 아직도 너를 지켜보는 사람들이 많아. 네가 긴장을 풀어야 할 때는 풀면서 부하들에게 적당한 이익을 주는 게 나쁠 건 없어.” “그럼 삼촌은요?” 상혁이 그를 끊으며 물었다. “뭐?” “삼촌도 저를 지켜보고 계신 건가요?” 상혁은 미소를 지으며 물었지만, 그 말에는 차가운 기운이 서려 있었다. 부건국은 그 순간 소름이 돋았다. “우리는 가족이잖니. 그럴 리가 있겠니? 내가 말하고 싶은 건 네가 아직 기틀이 약하다는 거야. 네 부모님 문제도 그렇고, 네가
부건국도 상혁이 자신에게 경고한 것이라는 걸 알아챘다. ‘뭐라고? 최씨 가문의 지원이 필요 없다는 게 정말 진심일까? 상혁 이 녀석, 정말 DL그룹 전체를 자기 손에 넣을 생각인 걸까? 나를 포함한 나머지 사람들은 상혁의 계획 속에서 아무런 의미도 없는 존재란 말인가? 상혁은 우리를 전혀 안중에 두지 않는 것처럼 보이네!!’“상혁아, 젊은 사람이 야망을 가지는 건 좋다. 하지만 너무 자만하지는 말아라. DL그룹의 이사회에 남아 있는 7명의 이사는 절대로 쉽게 그 자리에 오른 사람들이 아니다.” 부건국은 이 말을 남기고 화가 난 듯 등을 돌려 나가버렸다. 원신민은 부건국이 떠나는 것을 지켜보다가, 방 안으로 돌아서서 한 번 더 눈을 돌렸다. 밝은 조명 아래, 분위기는 여전히 팽팽했다. 하연은 상혁을 등진 채 오래도록 움직이지 않았다. 상혁은 눈을 가늘게 뜨며 무언가 말하려던 찰나, 하연이 먼저 입을 열었다. “부상혁 씨.” 그는 입술을 꾹 다물고 짧게 대답했다. “응.” 하연은 여전히 그를 등진 채 말했지만, 그녀의 목소리에는 약간의 긴장감이 느껴졌다. “DL그룹과 부씨 가문이 지금 위기에 처한 건 사실이에요. 당신은 또 나를 보호하려고, 나를 이 일에서 빼려는 거죠? 예전처럼... 그렇죠?” 그녀의 말은 상혁에게 뜻밖이었다. 예전의 하연이라면 이런 상황에서 이미 화를 내며 문을 박차고 나갔을 것이었다. 그는 이렇게 차분하게 반응하는 하연을 보며 좀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올 뻔했다. “최하연...” “나도 이제는 다 이해해요. 외부적으로는 우리가 헤어진 것처럼 보이는 게 나와 당신을 모두 지키는 방법이죠. 상업적인 전략인 거, 나도 잘 알고 있어요.” 하연이 웃으며 몸을 돌렸다. 그 얼굴에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 듯한 표정이 서려 있었다. “솔직히 인정할게요, 내 요리 실력이 예전 같지 않네요. 다음엔 더 잘 만들어서 다시 해줄게요.” 상혁은 하연의 얼굴에서 미세한 슬픔을 발견했지만, 하연은 그것을
병원 로비의 대형 스크린에는 이번 항공기 사고가 실시간으로 보도되고 있었다. 최하연은 세 명뿐인 생존자 중의 하나로 두 다리에 붕대를 감은 채 중환자실 병상 위에 누워 있었다.그때, 손에 들린 핸드폰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고객님께서 전화를 받을 수 없습니다. 다음에 다시 걸어주세요.”사고가 나던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남편 한서준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설마 그가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한 여객기 사고를 모를 일은 없었다. 사고 당시, 현장에는 승객들의 시신이 여기저기 아무렇게나 널려 있었다. 그녀는 사고의 충격과 죽음의 공포로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결혼한 지 3년이나 되었지만 남편은 그녀가 가장 필요로 하는 순간 연락이 되지 않았다.하연은 마음 한 켠이 시려 오는 것을 느꼈다.그때, 휴대폰 벨 소리가 들려왔다. 한참이나 멍하게 있던 그녀는 정신을 차리고 발신자를 확인했다. 할머니였다. 하연의 얼굴이 어두워졌다.“여보세요.”그녀가 잔뜩 쉰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전화 건너편에서 친절하면서도 연로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우리 하연이, 이 할미가 너 때문에 너무 놀라서 제 명에 못 죽겠구나. 어디 다친 데는 없고? 서준이가 옆에 같이 있지?]강영숙은 서준의 친할머니로 한씨 집안 사람들 중 유일하게 하연에게 관심을 갖는 분이었다. “서준 씨는...”머뭇거리는 그녀의 말에 강영숙이 무언가를 눈치 챈 듯했다. [이런 정신 나간 놈을 봤나! 비서로 또 아내로, 해외 출장간 남편 일을 다 봐주고 있는데 이렇게 큰 사고가 터졌는데도 코빼기도 안보여? 기다려봐라! 이 할미가 정신나간 그 녀석을 가만 두나!]그녀가 다시 물었다.[지금 어느 병원에 있어? 집사를 보낼 테니 기다리렴!]하연이 병원 주소를 알려주자 강영숙은 전화를 끊었다.그녀는 고개를 푹 숙인
하연은 두 달 전, 1주일 정도 출장 일정이 잡혀 있던 한서준의 일정보고서가 생각났다.핸드폰을 쥐고 있는 그녀의 손이 떨려왔다.‘그 때 생긴 아이인 거야?’그녀는 한서준의 숨겨진 아내로 오래 전부터 비밀계약을 맺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껏 남편의 스캔들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한서준 사장이 여자친구에게 참 각별한 것 같아... 저 여자는 전생에 나라를 구했나 봐. 보아하니 곧 공식발표가 날 것 같은데?”“그러게. 나도 아까 검색해 봤어. 네 생각엔 저 사람이 여자친구가 맞는 것 같아?”카트를 밀고 가던 젊은 간호사가 옆에 있는 간호사에게 핸드폰 속 사진을 보여주었다. 그러자 그녀가 깜짝 놀라며 말했다.“맞아, 맞아! 이 여자야! ST그룹 둘째 딸! 한서준이랑 너무 잘 어울리지 않아? 하늘이 맺어준 커플 같아!”두 사람은 호들갑을 떨며 반대편으로 걸어갔다.‘ST 그룹이라...’퇴원 수속을 마친 하연은 집사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가면서도 마음이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반쯤 열린 창문 아래 핸드폰 화면의 불빛이 창백한 하연의 얼굴을 비췄다. 수 없이 검색해 봤지만 한서준과 ST 그룹과의 연관성은 전혀 찾을 수 없었다.‘B시의 잘 나가는 두 명문가 집안이 이런 식으로 엮이다니 이상해.’서준의 본가에 도착하니 거실에 불이 켜져 있었다. 눈엣가시 같은 시누이 대신 서준의 할머니인 강영숙 여사가 지팡이에 몸을 의지한 채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우리 하연이 왔구나! 네가 복이 많아서 그 큰 사고 중에도 무사했구나. 너무 놀라서 하마터면 숨이 넘어갈 뻔했지 뭐냐.”“할머니, 전 괜찮아요.”하연은 올라가 쉬고 싶은 마음이 컸지만 웃으며 말했다.“할머니, 사실 저 좀 피곤해요.”“그래, 그래. 얼른 올라가서 쉬어라. 서준이한테 연락해 놨으니까 곧 올 거다.” 하연은 몸을 숙이는 순간 심한 통증이 몰려와 얼굴이 일그러졌다.강영숙은 하연이 괴로워하는 모습의 이유가 서준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하연의 머릿속에 서준의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당신이랑 그 여자, 대체 언제부터 만난 거야?”하연이 겨우 몸을 추스르며 침대에 기대앉았다.서준은 그녀가 3년전 혼인신고를 할 때보다 훨씬 말랐다는 것을 알아챘다. 어찌나 야위었던지 바람이 불면 날아가버릴 것 같았다.“당신 내 뒷조사를 한 거야?”그의 안색이 변했다. “내가 그렇게 한가한 사람으로 보여요? 내가 입원했던 병원에서 내 두 눈으로 당신들 두 사람을 봤어요.”그녀의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지만 그 어느때보다 딱 부러지는 말투였다.순간, 하연은 심장이 찢기는 듯한 괴로움을 느꼈다.하지만 서준의 얼굴에는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했다.그는 하연이 사고가 난 것을 알면서도 걱정해하는 말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가 하는 말들을 들으며 혐오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부부로 살았던 3년이라는 시간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아.’ 며느리로서 일을 열심히 했지만 하는 일 마다 트집잡는 시어머니와 자신을 눈엣가시처럼 여기는 시누이에게 하연은 정성을 다했다. 집에서는 주부로 또 회사에서는 헌신적인 비서 역할을 도맡았다. 그녀는 서준의 할머니 강영숙 여사의 뜻에 따라 아들, 딸 잘 낳는 좋은 손자며느리가 되려고 노력했다.3년 동안 그만큼 했으면 강영숙 여사에게 가족으로서의 의리는 충분히 지킨 것이다. 하지만 그 결과는 어떠한가?3년간 하연은 서준의 몸에 손가락 하나도 댈 수가 없었다. 한 방을 쓰고 있었지만 침대는 따로 썼기 때문이었다. 하연은 밀려오는 통증을 참으며 차가운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그러다 무슨 용기가 났는지 소리를 내어 가볍게 웃었다.“당신 어머니는 내가 애도 못 낳으면서 결혼한 양심도 없는 여자라고 했죠. 그런데 지금 당신이 밖에서 다른 여자와 아이를 가진 걸 내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죠?”간신히 침대에 기대고 있는 그녀는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하지만 고개를 꼿꼿하게 쳐들고는 그의 옷깃을 잡았다.하지만 곧바로 굵은 그의 손에 잡히고 말았다.한서준은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혜경이는 내 세컨드
하연은 서준의 셔츠 단추를 하나씩 풀었다. 그리고 그의 복근을 따라 내려가며 입을 맞추었다. 오랫동안 감춰온 서준의 대한 갈망 탓인지 귀밑까지 붉어졌다.그녀는 손놀림을 멈추지 않은 채 쉰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어떻게 이 집의 작은 안주인이 되었는지 잊었냐고요? 어떻게 잊을 수 있겠어요. 제 임무는 당신의 아이를 낳는 거예요. 지금 나는 내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거고요.“어떻게 그런 말을?!”화를 내는 서준의 탄탄한 복근이 울룩불룩 움직였다.“방 안에 최음제를 좀 뿌렸어요. 조금만 참으면 곧 괜찮아질 거예요. 저는 제 임무를 위해 아이를 가지려는 것뿐이에요.”그녀는 더 대담하고 과감하게 행동했다. 전에는 한번도 보여준 적 없는 요염한 모습이었다.하연의 적극적인 도발에 그의 몸이 본능적으로 반응하기 시작했고 호흡도 거칠어졌다.그는 이것이 최음제 때문인 것을 알고는 이성을 되찾았다. 그리고는 하연의 거침없는 손을 꽉 움켜 잡았다.“최하연, 너 정말 역겨워.”서준의 말에 그녀의 끓어오르던 욕망이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하연은 눈에 눈물이 고인채로 마지막으로 물었다. “나를 안는 게 그렇게 구역질나요?”“그래!”서준은 그녀를 똑바로 쳐다보면서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그리고 그녀를 밀쳐냈다.더는 그녀와 한마디도 하고 싶지 않았다. 서준은 하연이 벗긴 옷을 집어 들고 다시 입기 시작했다.그는 단추도 잠그지 않은 채 성큼성큼 걸어 나가버렸다. 방문이 ‘쾅’하고 닫히면서 주위가 다시 조용해졌다.하연은 그가 나가자 긴장이 풀려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녀의 눈에는 서준을 원망하는 눈빛이 가득했다. 서준은 방을 나서며 생각했다.‘이 정도로 했으면 있던 마음도 없어지겠지...’...다음날 아침, 하연은 아직 성치 않은 다친 다리를 절뚝거리며 짐을 싼 여행가방을 끌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집안 살림을 돕는 가정부가 식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강영숙 여사는 새벽기도를 드리러 가느라 집을 비운 상태였다.“어머, 새언니! 죽다 살아난 지 얼마
이수애 여사는 하연이 전과는 완전히 다른 투로 말하는 것을 보고 도저히 믿기지가 않았다. 그녀는 커다란 사파이어가 박힌 반지를 낀 손가락으로 하연을 가리켰다.“너 지금 그게 무슨 태도야!? 방금 했던 말 다시 한번 해봐!”하지만 하연은 조금도 두려워하는 기색 없이 그녀를 똑바로 쳐다봤다.“민혜경이라는 여자가 집에 들어오면 그 여자한테 집안일을 시키세요. 저는 앞으로 하지 않을 거예요.” 하연은 앵두처럼 붉은 입술로 또박또박 말했다. 말을 하고 나니 속이 시원했다. 이 여사는 그녀의 말에 벌컥 화를 냈다.“너!”“엄마, 엄마!”서영이 흥분한 엄마의 팔을 붙잡고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새언니 화난 거 맞죠? 어젯밤에 오빠가...”그녀는 불난 집에 부채질이라도 하려는 듯 어젯밤 일을 꺼내려고 했다. 그 모습을 보니 하연의 화를 돋우려는 의도가 충분히 보였다.이 여사는 딸의 의도를 금방 알아채고 다시 차분해졌다. 그녀는 특유의 거들먹거리는 투로 말했다. “남편 하나 붙잡지 못하는 주제에 별 억지를 다 부리네. 감히 시어머니 탓을 해?”하연은 느릿느릿 짐을 끌고 나오다가 저택 입구에서 발걸음을 멈추었다.심장박동이 빨라지면서 머리가 쪼개질 듯 아팠다.그녀는 고개를 돌려 욕을 퍼붓고 싶은 마음을 꾹 누르며 차갑게 말했다.“지난 3년동안 아이가 없었던 게 다 저 때문이라고 하셨죠? 절 의심하기 전에 서준 씨에게 비뇨기과 진료를 받으라고 하는 편이 빠를 거예요. 그러면 임신이 안됐던 원인이 과연 누구 쪽에 있는지 알 수 있을 거예요.”“너, 니가 감히!”하연의 말에 이 여사와 서영 둘 다 깜짝 놀랐다. 이 여사는 머리 끝까지 화가 치밀었다.“최하연! 난 너랑 우리 서준이하고 꼭 이혼시키고 말 테니 두고 봐!”그동안 하연은 서준의 할머니 강영숙 여사와의 정을 생각해서 한씨 집안 사람들과 다툼을 피했다. 왠만해선 자기 의견을 내세우지 않고 원만하게 지내왔다.지금까지는 집안 사람들과 갈등이 생길까 봐 두려워하며 지냈지만 이제는 신경 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