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많다고요?” 하연은 살짝 눈길을 돌려 리스트를 훑어보았다. “그게 다가 아닙니다. 몇몇 사모님들께서도 하연 아가씨가 앞으로 며칠이나 시간이 있냐고 물어보셨어요. 오후에 차나 한잔하자고 하셨습니다.” 그 목적이 무엇인지는 모두가 알고 있었다. 최동신은 기분 좋게 웃으며 말했다. “다 미뤄. 우리 하연이에게 남자 친구가 없는 것도 아닌데, 뭘. 내가 보기엔 상혁이가 아주 괜찮더구나.” 그 말을 듣고, 하민은 즉시 하연을 바라보았다. 하연은 갑자기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후에 차 정도는 마실 수 있어요. 그분들을 우리 집으로 모시도록 하세요.”당황한 최동신은 잠시 굳은 얼굴로 하연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하연아, 설마 상혁이랑 헤어진 거야?” 하연은 자리에서 웃음기를 거둔 채 말했다. “할아버지, 부상혁 씨가 저와 헤어지자고 했어요.” ...예아름의 방문은 무척 유쾌한 시간이 되었다.점심 식사 후, 하연의 시간이 찾아왔다. 여러 명문가 자제들이 방문했고, 하연은 그들이 익숙한 얼굴이든 낯선 얼굴이든 상관없이 환영하며 친절하게 대했다.긴 생머리에 절제된 미소를 띤 하연은 한 남성에게 말했다.“나이로 보면 제가 오빠라고 불러야 하겠네요.”그들 중 일부는 한때 하연의 이혼 경력을 걸림돌로 여겼다. 그러나 지금 직접 그녀를 만나보니, 그 매력은 한없이 컸다. 게다가 최씨 가문과 혼인하게 된다면, 몇 세대가 지나도 걱정할 것이 없을 테니까.하연은 그들이 무엇을 바라고 이곳에 왔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상혁이 이 상황을 알게 되었을 때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지 은근히 기대하고 있었다.한 시간 반이 지나자, 정원에서는 속닥속닥 말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정말 아름다워. 매력이 단번에 드러나잖아. 부상혁이 최하연에게 푹 빠질 만도 하지.” “헤어졌다더라. 무슨 문제가 있었던 거 아냐?” “질린 거 아닐까? 그래도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잖아. 일반적인 ‘중고’라면 탐내지 않을 테지
여은은 약간의 이성을 유지하며 침묵하는 하연을 살펴보았다. “무슨 일이 생긴 거야?” “무슨 일이 생겼어도, 이렇게 많은 사람 앞에서 헤어질 필요는 없잖아! 진짜 화가 나 죽겠어! DL그룹이 뭐라고, 부상혁이 뭐라고! 난 반드시 부상혁이 대가를 치르게 할 거야!” 예나는 분노에 차서 핸드폰을 거칠게 집어 들었다. 마치 하연이 한서준과 이혼할 때처럼 말이다. 그럼에도 하연이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자, 예나는 잠시 멍하니 서 있다가 몸을 숙여 물었다. “설마 부상혁이 바람피웠어?” “사실 내가 먼저 말했어.” 하연은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때 자신이 한 말이 진짜가 될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내가 말했어. 우리... 그만 헤어지자고.” “왜?” “한명준이 살아 있어. 지금은 B시에 있대.” 예나는 깜짝 놀라며 바로 외쳤다. “네가 바람 피운 거야?” 그녀는 이마를 짚고 일어섰다.‘정말 하연이가 먼저 그랬다면, 부상혁의 행동이 극단적이라고 할 수는 없어.’“음... 설령 그렇다고 해도, 네가 한명준과 다시 연락한 것도 아니잖아. 그럼 대체 뭐가 문제야?” ‘그러니까... 뭐가 문제일까?’ 하연은 문득 뭔가를 떠올렸지만, 생각이 복잡해져 더 깊이 파고들 용기가 나지 않았다. “헤어진 직접적인 이유는 한명준 때문이 아니야.” ...하연과 상혁의 결별 소식에 진심으로 놀라지 않은 사람은 오직 신가흔뿐이었다. 오히려 가흔은 담담한 반응을 보였다. [어쩌면 서로에 대한 믿음이 없는 사랑이라서 이렇게 끝나는 거겠지.] 여은은 그룹 채팅방에 물음표를 보냈다. [?][그래서 나도 하성 오빠랑 헤어졌어.] 예나는 즉시 느낌표를 보냈다. [!][하성 오빠가 여배우랑 스캔들 난 사진이 돌았는데, 내가 돈을 주고 사들여서 퍼지지 않았거든.] 하연은 잠시 말없이 있다가 곧바로 핸드폰을 집어 들어 하성에게 전화를 걸려고 했다. 그때 여은이 덧붙였다. [물론, 우리가 헤어진 이유가
한때 아름다웠던 연인이 헤어졌다는 소문이 F국 전역에 퍼졌고, 그 가운데에 있던 부씨 가문과 최씨 가문을 향한 소문과 루머가 쏟아졌다. 특히 하연을 향한 비난은 심했는데, 그 이유는 단순했다. 하연은 여성인 데다, 이혼한 경력이 있기 때문이었다. 주슬기의 비서는 이러한 소문을 주시하며 슬기의 마음을 헤아리기 시작했다. “DS그룹과 HD그룹이 신재생 에너지 자원을 놓고 경쟁 중입니다. 이번 기회에 불을 붙이면, 왕씨 가문이 우리를 한 번쯤은 도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 말을 듣고, 슬기는 비웃으며 말했다. “왕씨 가문이 뭐라고? 내가 그 사람들한테 비위를 맞춰야 하나?” 비서는 서둘러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물론 왕씨 가문은 대표님 가문과는 비교할 수 없지만, 최씨 가문은...” 지금 최씨 가문은 최하민과 최하연이 주도하고 있었으며, 현재 주씨 가문보다 훨씬 더 강력한 위치에 있었다. F국의 재벌 2세 중, 재능 있는 자제에는 최하민과 최하연, 그리고 부상혁까지 포함될 수 있었다. 하지만 주슬기는 아직 그 세 사람만큼 많은 성과에 도달하지 못했기 때문에, 주씨 가문은 약간의 세대교체 위기를 겪고 있었다. 그래서 비서도 슬기가 더 많은 가문과 유대 관계를 맺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제안한 것이었다. “그런 일은 신경 쓸 필요 없어. 나는 뒷걸음질하는 방식으로는 움직이지 않아. 최하연이 이겨낸다면 본인의 능력인 거고, 이겨내지 못한다고 해도, 나랑은 상관없는 일이야. 뒤에서 돌을 던지는 짓은 나와 맞지 않아.” 슬기는 단호하게 말했다. “오늘 간담회에 부상혁도 참석하나?” 비서는 서류를 넘기며 답했다. “예, 정상적으로 참석합니다.” 상혁은 모든 일정을 평소처럼 소화하고 있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어떤 일에도 미뤄짐이 없었다. “나도 가야겠네.” 간담회가 끝나기 전에 남은 몇 차례의 세션이 있었지만, 슬기와 상혁이 마주할 기회는 많지 않았다. 금융위원회의 빌딩 앞, 슬기는 상혁과의 시간
간담회가 끝난 후, 여러 매체가 많은 사진을 찍었고, 그것을 급히 송출하려고 할 때, 원신민이 이를 막았다.그는 겉으론 친절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지만, 속은 여우처럼 교활했다. “부 대표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부 대표님과 최하연 사장님에 관한 사진은 한 장도 외부로 유출돼서는 안 됩니다. 만약 기사가 나가면, DL그룹 법무팀이 나설 수밖에 없을 겁니다.”DL그룹의 법무팀은 그동안 수많은 소송에서 승리해 왔고, 심지어 불리한 사건조차 뒤집을 수 있을 정도로 실력이 대단했다. 기자들은 어색하게 웃음을 잃고, 어쩔 수 없이 말했다. “부 대표님의 입장은 이해합니다만, 저희도 난처한 상황입니다. 여기는 공개된 장소이고...” “곧 각자의 계좌로 이만한 수고비가 입금될 겁니다.”원신민이 수고비 금맥을 제시하자, 기자들은 일제히 침묵했다. 간담회가 끝난 후, 현장은 여전히 붐볐고, 하민은 잠시 자리를 비웠다. 상혁은 자리에 그대로 앉아 뒤를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갑자기 귀국한 건 뭐 때문이지? DS그룹은 신경 안 써도 되는 건가?” 하연은 차가운 목소리로 대꾸했다. “제가 무슨 결정을 하든 부 대표님께 보고할 필요는 없을 텐데요? 날 위해 행복을 빌어준 거 아니었나요?” 그녀는 상혁의 말에 반박하며 날카로운 말투로 응수했다. “언론의 기사는 내가 최대한 조정할 거야. 너의 명예에 영향을 줄 수 있는 부분은 법무팀이 처리할 거고.” 이것이 하연의 귀에는 마치 상혁이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정말로 두 사람의 관계를 끝내고 싶다는 말로 들렸다.그녀는 속이 쓰려 눈물을 삼키며 말했다. “그럴 필요 없어요. DS그룹과 CS그룹도 변호사는 있으니까요.” 하연은 하민을 향해 걸어갔다. 사람들 사이로 발걸음을 옮기던 중, 앞쪽 계단에서 누군가 그녀를 밀쳐 발목을 접질려 넘어졌다. “아!” 순간, 상혁의 가슴이 철렁하며 몸이 굳었다. 그는 곧바로 허리를 굽혀 하연을 도우려 했다. “죄송합니다! 괜찮으세요?” 하연을
상혁은 한쪽을 보지도 않은 채, 극도로 평온한 표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차분함 속에서 묘하게 불편한 분위기가 흘렀다. 하연은 믿을 수 없었는데, 상혁이 이렇게 차갑게 나올 줄은 정말로 상상하지 못했다. 상혁은 한참이나 조용히 담배 한 개비를 다 피운 후, 옆에 걸쳐 두었던 외투를 집어 들었다. “형님에게 연락했으니, 곧 너를 데리러 올 거야. DL그룹에 할 일이 있어서 나는 먼저 가볼게.” 그 순간, 하연은 숨이 막혀오며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부상혁 씨, 내가 지금 당신에게 설명하고 있잖아요. 정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을 거예요?” 그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문 앞에 다다르자, 하연이 큰 소리로 외쳤다. “당신도 알잖아요. 내가 돌아온 이유가 바로 당신 때문이라는 걸. 당신이 사채 문제에 휘말렸을 때 내가 금천파이낸스를 찾아갔어요. 그곳에서 당신이 바로 '잭'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죠. 당신은 나를 위해 2000억이라는 큰돈을 내놓는 위험을 감수했잖아요. 그런 당신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건 믿을 수 없어요.”상혁이 발걸음을 멈췄다.하연은 재빠르게 말을 이어갔다. “그날 밤, 내가 그만하자고 했던 건, 그저 화가 나서였어요. 하지만 당신에게 문제가 생겼다는 걸 알고는 제일 먼저 금천파이낸스 문제를 해결했죠. 그리고 거기 사람들을 상장시켰고요. 이후, 당신이 그 문제를 해결하려 얼마나 애쓰는지 알게 되었을 때, 나는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큰오빠에게 부탁했어요, 당신을 데려가 달라고... 사실 나도...” 그때 하연은 아직 비행기 안에 있었고, 하민에게 그 부탁을 했을 때, 그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남녀 간의 감정 문제는 외부 사람이 해결할 수 없어. 무엇보다 상혁은 남에게 구원받을 사람도 아니야.” “알고 있어요. 하지만 한 번은 시도해 보고 싶었어요. 제발요, 오빠.” 결국 하민은 동생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내가 너 대신 다녀올게.” 하민은 상혁을 주씨 가문 본가에서 데리고 나왔고, 그날
상혁은 손에 쥔 펜을 꽉 쥐었다. 잠시 후 그는 차분하게 대답했다. “연인 관계는 끝났지만, 바깥에서는 제가 여전히 하연이의 네 번째 오빠예요. 앞으로 어떤 일이 생기더라도 꼭 하연이를 지킬 거예요.” 조진숙은 아들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바라보았다. 상혁이 하연을 아낀 것은 수년 동안 변함이 없었는데, 어째서 이렇게 갑자기 태도가 변한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는 쓴웃음을 지으며, 스스로 물을 한 잔 따라 마시면서 상혁을 향해 쏘아붙였다. “역시 남자들은 하나같이 다 똑같군. 네 아빠도 그랬고, 너도 그러니까. 마음이 변했다니, 밖에 다른 여자라도 생긴 거 아니야?” “어머니...” “역시 유전자는 속일 수 없군.” “어머니!!” 바로 그때, 사무실 문이 갑자기 열리며 부남준이 들어왔다. 그는 느긋한 자세로 한쪽에 기대며 말했다. “이모, 왜 그렇게 화가 나셨어요? 누구의 마음이 변했다는 겁니까?” 남준의 얼굴에는 피곤함이라고는 전혀 없었고, 오히려 자신만만해 보이며 서류를 말아서 들고 있는 모습에서 기세가 넘쳤다. 조진숙은 그런 남준을 보면서 눈살을 찌푸렸지만, 최대한 침착함을 유지하며 말했다. “글쎄다. 용의 자식은 용이 되고, 범의 자식은 범이 되는 법이지. 쥐의 자식은 결국 구멍을 파고!” 남준은 무슨 뜻인지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상혁의 책상 앞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형님, 복직 관련 서류입니다.” 상혁은 담담하게 서류를 받아 한 번 훑었다. 그 안에는 남준이 원래 맡았던 직위로 복직하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직위는 그대로였지만, 연봉이 대폭 줄어들었다. 사실 남준에게 돈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그룹이 혼란스러워 인력이 부족한 상태라 아버지께서 저를 불러들이신 거죠. 형님, 너무 깊이 생각하지 마세요.” 상혁은 여전히 침착했지만, 조진숙은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부동건의 사무실로 향했다. 상혁은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나
비록 언론이 약속을 지켜 사진과 기사를 유출하지는 않았지만, 간담회와 관련된 내용은 하연에 대한 언급 없이 흘러갔다.하지만 상류층 사이에서는 이미 이 소식이 꽤 널리 퍼져 있었다. 사람들은 모두 부상혁과 하연이 완전히 끝난 사이라는 이야기가 떠돌고 있었다.이 소식을 접했을 때, 서여은은 막 인터뷰를 마친 참이었다. 이번 인터뷰 상대는 이혼 후 자기 삶의 주도권을 찾게 된 상장사의 여자 대표였다. 인터뷰를 마친 두 사람은 카페에서 악수하였다.“오늘 정말 즐거운 대화였습니다. 이번 기사 기대하고 있을게요. 그때가 되면, 제 회사도 적극 구독하겠습니다.”여은은 고개를 끄덕이며 정중하게 답했다.“대표님께서는 정말 좋은 생각들을 가지고 계시네요. 저도 앞으로의 협력을 기대하고 있습니다.”여은이 서류를 정리하려던 순간, 옆자리에서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 “부상혁이 드디어 독신이 되었네. 이번에 부상혁이 결심을 내린 것 같아. 슬기야, 이제는 모두의 관심이 너에게 집중될 거야.” “왜 ‘드디어’라고 말하는 거야?” “누가 봐도 알잖아. 최하연은 심지어 간담회까지 따라갔지만, 상혁은 최하연을 전혀 신경 쓰지 않았어. 그걸로 다 설명되지 않아?” 슬기 맞은편에 앉아 있던 아름다운 여자가 웃으며 말했다. “도대체 최하연이 무슨 짓을 한 건지 모르겠어...”슬기는 잠시 망설이는 태도를 보였다. 그날 상혁이 하연을 안고 나가는 모습을 봤을 때, 슬기의 기분은 당연히 좋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굳이 그를 따라가지 않았다. 이럴 때 억지로 밀어붙이는 것은 통하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상대로, 잠시 후에 나온 상혁의 곁에는 하연이 없었다. 이것만으로도 많은 것을 설명할 수 있었다. “최하연이 무슨 일을 했든 상관없어. 이제부터는 내가 행동을 취할 차례야.” 슬기는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미소를 지었는데, 눈빛에는 야망이 가득했다. “슬기야!” 여은과 함께 있던 여자 대표가 슬기의 목소리를 듣고 놀라며 다가갔다.
“내일 한씨 가문 사건이 개정돼. 네 어머니와 관련된 일이니, 출석할지 말지는 네가 결정해.”왕아영은 한 손으로 홍연옥이 가져온 과일을 한 입 베어 물며 무심하게 말했다.이현은 주인의 자리에 앉아 끓는 물을 찻주전자에 부었다. 이 찻주전자는 하연이 한때 그에게 선물했던 것이지만, 그는 공개석상에서 절대 사용하지 않았다.“이모는 가실 거예요?”“난 왕씨 가문의 가주니까, 당연히 가야지.”“외할아버지는요?” “네 외할아버지는 연세가 많으셔서 더 이상의 충격을 견디기 힘드셔. 최하연이 이메일을 보냈을 때도 충격받아 뇌경색으로 입원하셨잖아. B시에 가서 재판에 참석하시라고 하지 말고, 그냥 두자.” 왕아영은 깊은 한숨을 쉬며 살짝 짜증 섞인 기색을 내비쳤다. 이현은 아무 말 없이 책상 위에 놓인 잡지를 흘낏 보았다. 잡지에는 F국에서 일어난 일들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었고, 하연이 얼마나 상심했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실려 있었다. 그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왕아영은 그 모습을 보고 힐끗 웃으며 말했다. “최하연이 왜 요즘은 우리에게 맞서지 않는지 궁금했는데, 알고 보니 남자에게 차였더군. 그렇게 거만하더니 결국 별수 없더라?” “그만하세요.” 이현은 낮은 목소리로 잔을 탁 내려놓았다. 왕아영은 깜짝 놀라며 곧바로 일어나 소리쳤다. “너, 나한테 무슨 태도야? 우리 집안이 그렇게 오랫동안 널 먹이고 입혀 줬는데, 우리가 너한테 부족하게 군 게 뭐 있니? 그리고 소울 칵테일인지 뭔지 하는 가게, 당장 문 닫아! 우리 왕씨 가문의 후계자가 사람들 앞에서 손님을 맞는다는 게 말이나 되니?” 이현은 꼼짝하지 않았다. “제가 경찰로 일할 때는 이모도 지금의 이런 모습이 아니었어요.” 왕아영은 공직자였던 ‘한명준’을 통해 공사와의 협력을 위한 뒷거래를 시도하려 했지만, 이현은 그때마다 단호히 거절했다. 이 이야기가 나오자, 왕아영은 더욱 화를 내며 말했다. “너, 그 경찰 얘기를 아직도 할 셈이야? 그때의 나는 그저
하미주는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다영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뭔가 수상했는데, 표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하지만 자기도 모르게 얼굴의 표정에서 서서히 미소가 사라졌다. 어떤 상황이든, 그녀가 원하는 건 단 하나였다. 딸이 후회하지 않는 길을 가는 것. “다영아, 너는 마음이 너무 순진해. 제발, 누군가에게 이용당하는 일만은 없었으면 좋겠구나.” 그러나 다영은 마치 그 말이 기분 나쁘다는 듯, 휙 손을 뿌리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엄마, 그런 말씀 이제 그만하세요.” 다영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내 선택을 믿어요. 그리고 엄마도 나를 응원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만약 아직도 의심이 된다면, 내일 남준 씨가 오면 직접 물어보세요.” 하미주가 무슨 말을 더 하기 전에, 다영은 그대로 돌아서서 방을 나가버렸다. 딸이 사라진 자리에서, 하미주는 그저 깊은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설날 다음 날.아침부터 집사는 현관 앞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그는 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자, 곧장 앞으로 다가가 공손히 인사했다. “부 대표님.” 상혁은 무심하게 손목을 들어 올려, 소매 끝을 단정히 정리했다. 우아하면서도 여유로운 움직임. 그리고 아무렇지 않은 듯한 목소리. “어제 맡긴 일, 확인했나요?” 집사는 목소리를 낮추며 조용히 보고했다. “후원 CCTV를 확인한 결과, 어젯밤 그곳에 있던 사람은 남준 도련님이었습니다.” 상혁의 손이 멈추지 않았다. 그저 차분하게 마지막 단추를 여미고, 시계를 찬 후 말했다. “알았어요. 나가봐요.” 집사가 조용히 퇴장하자, 상혁은 변함없는 표정으로 몸을 돌렸다. 아래층으로 내려오자, 이미 남준이 식탁에 앉아 있었다.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형,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상혁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짧게 답했다. “새해 복 많이 받아라.” 서로 마주 앉아 있었지만, 그 사이에 감도는 공기는 묘한 정적으로 가득 차 있었
아무 일 아니라는 듯이 서둘러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고 정신을 바짝 차리며 정다영이 억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엄마, 남준 씨가 아마 많이 바쁜가 봐요. 일 끝나면 꼭 세배하러 올 거예요.” 하지만 하미주는 딸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았다. 왜냐하면 자신은 눈이 멀지 않은 이상, 최근의 분위기를 못 느낄 리가 없었다. 그리고 요즘 들어 사람들의 태도가 어떻게 변하는지 똑똑히 보고 있었다.지금 자신마저 마음을 다잡지 못하고 조금이라도 힘이 빠진다면, 언제든 등을 돌릴 준비가 되어 있는 게 세상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애초에 하미주는 딸과 남준의 결혼 자체를 반대한 사람이었다. 하미주가 보기엔, 아무리 돈이 많고, 외형적으로 그럴듯해 보여도, 남준은 결국 ‘첩’의 자식이었다. 그런 가정에서 제대로 된 교육을 받고 자랐을 리가 없었다. 그런데도 다영은 기어코 남준을 붙잡겠다고 난리였다. 그것도 마치, 그 남자가 아니면 죽기라도 할 것처럼. 결국 정지철이 남준을 높게 평가하자, 하미주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인 거였다. 그래서 약혼까지는 허락했는데 예전엔 그럭저럭 신경을 써주던 남준이, 이제는 대놓고 얼굴도 안 비췄다. 하미주는 아주 불만이 많았다.‘명절에 처가집 한 번 들를 생각도 없는 사위가 과연 제대로 가정을 꾸릴 생각이 있을까? 말 다 했지.' 이렇게 생각하자 그녀는 딸의 손을 잡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다영아, 엄마가 하는 말 기분 나빠하지 말고 잘 들어. 이제 네 아버지가 그런 상황이니, 우리 집도 예전 같지 않아. 사람들이 우리를 어떻게 보는지도 너도 잘 알고 있지?” 다영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녀는 당연히 알았다. 아니,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자신은 더욱 필사적으로 버텨야 한다고 결심했다. 이 기회에 확실히 자리 잡지 않으면, 사람들에게 무시당하는 건 시간 문제일 테니까. “엄마, 집안 사정이랑 내 결혼은 상관없는 일이에요.” 하미주는 깊은 한숨을 쉬며,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
상혁은 풍등을 들고 하연과 함께 마당으로 나왔다. 타이밍 좋게 하인이 라이터를 건네주고는 조용히 물러났다. 멀지 않은 곳에서 부남준이 조용히 고개를 내밀었다. 몰래 지켜보던 그는, 두 사람이 자연스럽게 풍등을 펼치는 모습을 바라봤다. 상혁이 직접 가운데 심지에 불을 붙였다. 뜨거운 열기가 천천히 풍등을 부풀게 만들었고, 풍등은 두 사람 앞에서 서서히 떠오르기 시작했다. “하연아, 빨리 소원 빌어!” 하연은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며 간절히 소원을 빌었다. 상혁은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조용히 또 다른 소원을 빌었다. ‘언제나 우리 둘이 해마다, 해마다, 서로를 마주할 수 있기를.' “다 됐어요.” 하연이 조심스럽게 눈을 떴다. 그 눈빛에는 반짝이는 빛이 서려 있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서서히 손을 놓았다. 풍등은 하늘을 향해 천천히 날아올랐고, 점점 멀어지더니 마침내 한 점이 되어 사라졌다. “어떤 소원 빌었어?” 상혁이 손끝으로 하연의 귓불을 살짝 어루만지며 물었다. 하연은 장난기 어린 눈빛으로 깜빡이며 말했다. “소원은 말하면 이루어지지 않는대요.” “그래? 그럼, 네 소원이 꼭 이루어지길 바랄게.” 두 사람은 다시 눈을 마주쳤다. 상혁의 숨소리가 깊어졌다. 그는 하연의 턱을 살며시 잡고, 몸을 숙여 그녀의 입술을 맞췄다. 조심스러웠던 키스는 점점 더 깊어져 갔다. 하연은 숨이 가빠졌다. 상혁을 밀어보려 했지만, 오히려 더 깊이 끌어안겼다. 여자의 허리는 유연하게 휘어졌고, 상혁의 등은 팽팽한 활처럼 긴장됐다. 결국, 하연도 상혁의 목을 감싸 안고, 키스에 응답했다. 그러나 그 순간, 불청객 같은 전화벨 소리가 분위기를 깨뜨렸다. 하연은 화들짝 놀라며, 급하게 상혁을 밀어냈다. 그녀의 얼굴은 빨갛게 익은 사과처럼 새빨개졌다. “전화 울리는데요?” 하연의 목소리는 한층 낮아져 있었다. 묘하게 사람을 간지럽게 만드는 목소리였다. 상혁은
다른 곳에서 있던 조봉규가 소란이 일자마자 급히 뛰어 들어왔다. 그리고 빠른 걸음으로 송혜선에게 다가가며 다급히 말했다. “설날인데, 뭐하러 이렇게 화를 내...” 조봉규가 입을 여는 순간, 남준의 온몸이 싸늘하게 굳어졌다. 남준의 시선이 날카롭게 쏘아붙었고, 조봉규는 본능적으로 움찔하며 고개를 돌렸지만, 이내 애써 태연한 척하며 한 발 다가섰다. 송혜선의 팔을 조심스레 부축하며 낮은 목소리로 달랬다. “지금은 무엇보다도 건강이 우선입니다.” ‘건강?’남준은 손에 쥔 염주를 힘껏 움켜쥐었다. 힘이 들어간 손등에는 핏대가 서고, 눈빛은 살얼음처럼 차가웠다. 그리고 시선은 서로 닿아 있는 두 사람의 손목에 단단히 고정되었다. 입가에 엷은 조소가 떠올랐다. “조 선생님, 참으로 열정적인 분이시군요. 설날에도 근무 태세를 유지하시다니.” 조봉규는 눈치가 빠른 인물이었다. 당연히 그의 말 속에 담긴 조롱을 알아챘다. 그러나 겉으로는 한껏 공손한 태도를 유지하며 머리를 숙였다. “별말씀을요. 환자의 곁을 지키는 게 제 본분입니다.” 남준은 가만히 조봉규를 노려보다가, 짧고 날 선 경고를 던졌다. “그렇다면 본분에만 충실하시죠. 여긴 부씨 가문의 본가이니까.” 순간, 분위기가 얼어붙었다. “남준아!” 송혜선이 다급히 나섰다. 남준을 나무라는 말투였지만, 그 속에는 조봉규를 감싸려는 의도가 분명히 깔려 있었다. 남준의 눈빛은 더욱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그러나 송혜선은 오히려 기세를 올려 쏟아내듯 말했다. “네가 좀 더 나서서 잘했더라면, 부상혁한테 밀릴 일도 없었어! 내가 왜 조진숙한테 설날마다 굽신거려야 하냐고?” “지금, 어머니는 나를 원망하시는 겁니까?” 목소리가 한층 낮아졌다. 남준의 손에서 염주의 한 알이 ‘탁' 하고 부서졌다. “남준아! 지금 네가 무슨 짓을 한 거야?” 송혜선은 깜짝 놀라 소리쳤다. “염주는 영적인 기운이 깃든 물건이야. 함부로 부수면 불길한 일이 생길
부동건의 말은 송혜선을 전적인 신뢰를 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나중에 진실이 밝혀지면, 과연 부동건은 스스로를 어떻게 납득할까?’ ‘결국 속아서 살아온 날이 우스운 바보일 뿐...’ 조진숙은 아무 말 없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애틋한 사랑인데, 굳이 이럴 필요가 있을까?” 잠시 뜸을 들이던 그녀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이 서류들, 가져가.” “나 다른 뜻은 없어.” 부동건은 조진숙의 단호한 태도에 살짝 주춤했지만, 곧장 다시 설득을 시도했다. “네가 아직 날 원망하고 있다는 거 알아. 그동안... 혹시 네가...” “착각하지 마.” 조진숙은 부동건의 말을 끊었다. 더 이상 불필요한 감정 소모를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부동건은 한 발 더 다가섰다. “하지만 네가 이걸 받지 않는다면, 결국 날 아직도 원망하고 있다는 뜻 아니야?” 조진숙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 가슴 깊숙이 가라앉은 감정이 불쑥 떠오르는 듯했다. 그녀는 천천히 숨을 들이마시며 감정을 정리한 뒤, 담담한 목소리로 물었다. “당신... 정말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어?” 부동건은 말없이 서류를 정리하더니, 숙련된 손놀림으로 만년필을 열어 조진숙 앞에 내밀었다. 이것이 바로 자신의 대답이었다. “후회할 거였으면, 애초에 여기 오지도 않았어.” 이번엔 조진숙도 망설이지 않았다. 그녀는 펜을 들어, 서류 맨 아래에 단호한 필체로 자신의 이름을 남겼다. “부디 이 선택을 후회하는 날이 오지 않길 바라.” 부동건은 서류를 덮으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제야, 마음속에 짓눌려 있던 무언가가 비로소 내려앉는 듯했다. 그는 문득 나직이 말했다. “이제야... 후회한들, 이제 돌아갈 길도 없어.” 조진숙은 그 말에 가슴이 미세하게 흔들렸지만, 끝내 시선을 돌렸다. 담담한 표정 속에 모든 감정을 삼키며, 단 한마디만 남겼다. “이건... 다 정해진 운명이야.” ‘운명의 장난...’ ‘어쩔 수
“무슨 말씀인지 압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제 뜻대로 하게 해주십시오.” 부동건의 태도가 단호했다. 이를 지켜보던 부해철이 더 이상의 말은 의미가 없을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이미 네가 마음을 정했다면, 내가 더 이상 뭐라 할 수도 없지. 다만, 앞으로 그 여자를 내 앞에 데려오지는 마라. 네가 어떻게 살든 상관하지 않을 테니.” “그리고...” 부동건이 무슨 말을 더 하려 했지만, 부해철은 손을 휘저으며 등을 돌렸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라지는 뒷모습만이 남았다. ‘그렇게까지 반대할 줄은 몰랐네...’ 부동건은 묘한 기분으로 그 자리에 멈춰섰다. ...설날 온 나라가 한 해의 끝을 보내고, 가족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날. 예전에는 늘 조진숙과 상혁 모자가 함께 보내던 명절이었다. 그런데 올해는 조금 달랐다. 최씨 가문과 부씨 가문의 본가가 가까운 데다, 명절이 지나면 하연과 상혁의 약혼식이 있을 예정이었다.그래서 조진숙이 제안했고, 양가 가족들이 함께 부씨 가문에서 설날 저녁을 보내기로 했다. 그 덕분에 조진숙은 하루 종일 분주하게 준비에 매진했다. 그러나 제사가 끝나자마자 뜻밖의 손님이 찾아왔다. “진숙아, 새해 복 많이 받아.” 부동건이 어색한 미소를 띠며 낮은 자세로 인사를 건넸다. 평소 같았으면 송혜선과 함께 명절을 보낼 사람이, 오늘 이곳에 나타났다는 것 자체가 조진숙에게는 뜻밖이었다.그녀는 담담한 얼굴로 물었다. “여긴 웬일이죠?” “잠깐 들렀어, 당신한테 할 말도 있고 해서.” 조진숙은 그의 시선을 따라 문득 집안 분위기를 둘러보았다. 송혜선이 이곳에 들어온 이후, 부씨 가문 본가는 한 지붕 아래에서도 철저하게 북쪽과 남쪽으로 나뉘어 있었다.그 경계는 뚜렷했고, 불필요한 마주침은 없었다. 부동건이 송혜선과의 결혼을 공식적으로 선언한 이후, 둘은 한 번도 마주친 적이 없었다.만약 이번 일이 없었다면, 조진숙 역시 이미 오래전에 이 집을 떠났을 터였다. “들어와.
송혜선은 급히 분위기를 누그러뜨리려 했다. “아무래도 남준이가 좀 늦나 봐요. 조금만 더 기다려 보시는 게 어떨까요?” 부동건은 차갑게 코웃음을 치며 얼굴을 굳혔다. “말 같지도 안은 소리를 하고 있어! 오늘 같은 날에, 시간 개념도 없이 늑장을 부려.” 송혜선은 딱히 반박할 말이 없었다. 결국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 “남준이 오면 꼭 제가 주의를 줄게요.” “교육 똑바로 시켜. 좀 상혁이 하는 것에 반만큼이라도 신중했으면, 나도 그 녀석한테 좀더 잘해 줬을 거야.” ‘또 시작이군.’ 송혜선은 속이 쓰렸지만, 이를 악물고 참았다. “오면 오는 거고, 못 오면 어쩔 수 없지.” 부동건은 한 치의 여지도 주지 않고 단호하게 내뱉곤, 그대로 자리를 떠났다. “어서 남준이를 찾아와! 오늘 제사에 참석하지 못하면, 앞으로 나를 어머니라고 부를 생각은 하지도 마.” 송혜선의 가슴이 격하게 오르내렸다. 이 모든 노력들이 사소한 실수 하나로 무너질 순 없었다. ...부씨 가문은 제사에 있어서 철저한 예법을 중시했다. 다행히도 상혁은 부동건과 수년간 제사를 지내며 익숙해져 있었고, 모든 절차를 한 치의 오차 없이 진행했다. 부씨 가문의 어른들 역시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동건아, 상혁이가 있어서 네 대가 끊길 걱정은 없겠구나.” “앞으로 부씨 가문의 대업을 상혁이가 이어간다면, 우리 늙은이들도 한시름 덜겠어.” 부동건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야 물론이죠. 상혁이는 부씨 가문의 기둥이 될 인재입니다.” 상혁은 겸손한 태도로 말했다. “과찬이십니다. 앞으로도 많이 지도해 주십시오.” “어디 우리가 너희 젊은이들에게 배우는 게 더 많지!” “...”제사가 거의 끝나갈 무렵, 부남준이 느지막이 모습을 드러냈다. 부동건은 남준을 보자마자 눈빛이 차갑게 식었지만, 일단 감정을 누르고 말했다. “멍하니 서 있지 말고, 어서 와서 절부터 올려라.” 남준은 살짝 눈썹을
최씨 가문의 따뜻한 분위기와 달리, 부씨 가문의 본가는 싸늘하고 조용했다.예년과 다름없이, 설날이 되면 부동건은 집안의 남자들과 함께 조상들에게 제사를 올려야 했다. 올해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른 아침부터 송혜선은 핸드폰을 손에 쥐고 부남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연결음만 울릴 뿐, 남준은 끝내 받지 않았다. ‘이 녀석은 정말이지, 사람 속을 태우는 재주가 있다니까.’ 송혜선의 얼굴에 점점 초조한 기색이 드러났다. 옆에서 지켜보던 조봉규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때? 아직도 전화를 안 받아?” 송혜선은 짙어진 눈매로 핸드폰을 내려다보며 입술을 꾹 다물었다. “이 녀석, 정말 사람을 신경 쓰게 만드네! 도대체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거야...!” 조봉규는 부드러운 말투로 그녀를 달랬다. “혹시 무슨 사정이 있어서 늦는 걸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너무 걱정 마십시오. 남준이가 철없는 아이도 아니고.” ‘철없는 아이가 아닌데 이러겠어?’ 송혜선은 속으로 한숨을 삼키며, 최대한 감정을 눌렀다. “부씨 가문의 어른들이 원래부터 남준이를 못마땅해했는데. 이런 중요한 제사까지 빠지면, 분명 뒷말이 나올 거야.” 그녀의 말투에는 이미 불안과 초조함이 서려 있었다.그러는 사이, 두 사람이 작은 응접실에서 나와 복도를 따라 걸어갔다. 그때, 정면에서 다가오던 부동건과 마주쳤다. 부동건은 갓 외투를 정리하던 참이었다. 하지만 송혜선과 조봉규가 함께 있는 모습을 보자, 손동작이 살짝 느려지며 묘한 시선을 던졌다. “조 선생, 올해도 그렇게 혜선이 옆에 딱 붙어서 열심히 잘 보살펴 주세요.” 그 말 한마디에, 분위기가 묘하게 변했다.조봉규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한 발짝 뒤로 물러서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무슨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회장님, 제가 해야 할 일을 할 뿐입니다.” 부동건은 묘한 눈빛을 유지한 채, 덤덤히 말했다. “혜선이가 아이를 무사히 낳으면, 그에 대한 보상도 충분히 해줄 테니
두 집안이 한데 모여 북적이며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이런 귀한 순간을 마음껏 즐기며 보내다 보니, 어느덧 설날 전날이 되었다. 모두 함께 전용기를 타고 F국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설날이 밝았다. 올해는 오랜만에 최씨 가문 식구들이 한자리에 모인 데다, 기쁜 소식까지 겹친 한 해였다. 그 덕분인지 최동신은 평소보다 더욱 설 준비에 신경을 쓰고 있었다. 이른 아침부터 최씨 가문의 본가는 분주했다. 집사와 고용인들이 분주히 움직이며 저택 곳곳을 장식했다. 새빨간 복주머니와 길상 문양이 새겨진 장식들이 하나둘 자리 잡았고, 정원에는 화려한 등불이 걸리며 설 분위기가 한층 더 짙어졌다.하연이 계단을 내려오자, 기다렸다는 듯 최하성이 환한 얼굴로 다가왔다. “하연아, 새해 복 많이 받아라.” 그러면서 두툼한 세뱃돈 봉투를 그녀에게 내밀었다. 하연은 두 눈을 반짝이며 얼른 봉투를 받았다. “와! 이렇게 두꺼워요? 하성 오빠 최고!” 그때, 계단 위에서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도 있다.” 최하경이었다. 그 역시 두툼한 세뱃돈 봉투를 들고 내려왔다. “작년, 재작년 다 해외에 있어서 못 챙겨줬잖아. 그래서 올해 한꺼번에 더 두둑이 넣었다.” “와! 이건 더 두껍잖아요! 이러다 손목 나가겠어요!” 하연은 연달아 두 개의 두툼한 봉투를 받아 들고, 각각 한쪽 팔을 오빠들에게 걸었다. “오빠들 있어서 진짜 좋아요!” 최하성, 최하경 둘 다 서로를 바라보며 우애가 넘치는 미소를 지었다. 그때, 문이 열렸다. 그리고 최하민과 예아름이 나란히 들어왔다. 추운 바깥 공기를 뚫고 들어오자마자, 하민은 아름의 목에서 목도리를 부드럽게 풀어주었다. 그는 안쪽에서 떠들썩하게 웃고 있는 세 남매를 보고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우리 집이 이렇게 활기찬 게 얼마 만이에요!” 아름도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 “그러게요. 앞으로 더 행복한 일만 가득할 거예요.” 하민은 아내의 허리를 가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