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 한씨 가문 사건이 개정돼. 네 어머니와 관련된 일이니, 출석할지 말지는 네가 결정해.”왕아영은 한 손으로 홍연옥이 가져온 과일을 한 입 베어 물며 무심하게 말했다.이현은 주인의 자리에 앉아 끓는 물을 찻주전자에 부었다. 이 찻주전자는 하연이 한때 그에게 선물했던 것이지만, 그는 공개석상에서 절대 사용하지 않았다.“이모는 가실 거예요?”“난 왕씨 가문의 가주니까, 당연히 가야지.”“외할아버지는요?” “네 외할아버지는 연세가 많으셔서 더 이상의 충격을 견디기 힘드셔. 최하연이 이메일을 보냈을 때도 충격받아 뇌경색으로 입원하셨잖아. B시에 가서 재판에 참석하시라고 하지 말고, 그냥 두자.” 왕아영은 깊은 한숨을 쉬며 살짝 짜증 섞인 기색을 내비쳤다. 이현은 아무 말 없이 책상 위에 놓인 잡지를 흘낏 보았다. 잡지에는 F국에서 일어난 일들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었고, 하연이 얼마나 상심했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실려 있었다. 그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왕아영은 그 모습을 보고 힐끗 웃으며 말했다. “최하연이 왜 요즘은 우리에게 맞서지 않는지 궁금했는데, 알고 보니 남자에게 차였더군. 그렇게 거만하더니 결국 별수 없더라?” “그만하세요.” 이현은 낮은 목소리로 잔을 탁 내려놓았다. 왕아영은 깜짝 놀라며 곧바로 일어나 소리쳤다. “너, 나한테 무슨 태도야? 우리 집안이 그렇게 오랫동안 널 먹이고 입혀 줬는데, 우리가 너한테 부족하게 군 게 뭐 있니? 그리고 소울 칵테일인지 뭔지 하는 가게, 당장 문 닫아! 우리 왕씨 가문의 후계자가 사람들 앞에서 손님을 맞는다는 게 말이나 되니?” 이현은 꼼짝하지 않았다. “제가 경찰로 일할 때는 이모도 지금의 이런 모습이 아니었어요.” 왕아영은 공직자였던 ‘한명준’을 통해 공사와의 협력을 위한 뒷거래를 시도하려 했지만, 이현은 그때마다 단호히 거절했다. 이 이야기가 나오자, 왕아영은 더욱 화를 내며 말했다. “너, 그 경찰 얘기를 아직도 할 셈이야? 그때의 나는 그저
8월 21일, 월요일.B시 전체를 떠들썩하게 만든 한씨 가문 사건이 재판에 회부되었다. 왕진과 이수애는 각각 법정 양쪽에 앉아 재판받았다. 한서준은 과거의 원한에 연루되지 않아 이번 재판에 출석하지 않았다. 왕아영은 주요 관련자로서 법정 앞줄에 앉아 모든 과정을 지켜보고 있었다. 원래 그녀는 B시의 모든 언론사를 불러 이 사건을 증언하게 할 계획이었으나, 이현이 이를 거부했다. “언론사들이 없으면, 누가 네가 왕씨 가문의 사람인 걸 알겠어?” “이미 말했잖아요. 전 그런 더러운 방식은 원하지 않아요.” 이현의 얼굴은 어두웠다. “공개 여부는 제가 결정할 일입니다.” 재판은 이미 중반에 접어들었고, 상황을 봤을 때 이수애는 무기징역이 확실해 보였다. 하지만 왕씨 가문의 압력으로 인해 그녀에게 다른 형까지 선고하라는 요구도 있었다. 왕아영은 시계를 한 번 확인하고 비서에게 물었다. “이현이는 왜 아직이지?” “아마 길이 막혀서 그런 것 같습니다.” 재판이 진행될수록 증거와 증언들이 속속들이 나왔다. 그 가운데, 이수애는 재판장에서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소리쳤다. “판사님! 저 사람들은 거짓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건 저 사람들이 계획한 것입니다. 저는 사람을 죽이지 않았습니다... 왕명주를 죽인 건 제가 아닙니다!” 이수애의 정신 상태는 이미 매우 불안정해 보였다. 왕진은 옆에서 차분히 덧붙였다. “분명히 네가 한 짓이야. 네가 나를 매수해 왕명주 사모님에게 약을 먹였고, 사모님에게 남편의 외도를 알려 충격받아 조산하게 했잖아. 게다가 약물까지 사용하는 바람에 사모님은 아이를 낳자마자 이 세상을 떠났어! 너야말로 진짜 죄인이야!”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하고 있군! 그냥 조산한 거야! 나와는 상관없어. 네가 날 모함하고 있어!” “내가 죄인이면, 너도 공범이야. 이렇게 해서 네가 얻는 게 뭔데? 너도 유죄를 피할 수 없을 거야!” “내 딸은 이미 죽었어. 내가 살아서 뭘 더 바라겠어. 이제
판사는 얼굴을 굳히며 변호사의 질문을 단호하게 중단시켰다.“사건과 무관한 사람에 대해서는 더 이상 발언하지 마십시오.”변호사는 잠시 머뭇거리다 고개를 끄덕이며 다음 질문으로 넘어가려 했다.그 순간, 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저는 고인인 왕명주의 친아들입니다. 발언하게 해주십시오.”한창명은 고개를 돌려 그 목소리의 주인공을 바라보았다.그 사람은 손이현이었다.이현은 깔끔한 하얀 셔츠에 검은 바지를 입고 있었다. 외모는 특별히 두드러지지 않았지만, 그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은 단단하고 강직했다. 그것은 그가 오랜 시간 경찰로 일하며 몸에 익힌 기품이었다.순간, 한창명은 이현에게서 느꼈던 익숙함이 어디서 왔는지 깨달았다. 왕아영은 이현이 도착하자 긴장이 풀린 듯 훨씬 편안한 표정을 지었다.이현은 자신의 신분과 관련된 서류를 제출했다. 판사는 서류를 확인하고 깜짝 놀라며 입을 열었다.“당신이 한명준 씨 본인입니까? 나중에 손이현으로 개명했습니까?”이현은 당당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인정했다.이수애는 자리에 주저앉으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이현을 쳐다보았다. “그럴 리 없어! 난 한명준을 본 적이 있어! 너처럼 생기지 않았다고!” “마지막 임무 중에 차량 폭발 사고로 강에 추락해 얼굴 전체가 망가졌습니다. 이 대답이면 만족하시겠습니까?” 이현은 차가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의 섬뜩한 미소에 이수애는 온몸이 떨렸다. “한서준도 이 사실을 알았을 텐데, 왜 말하지 않았을까요?” 이수애는 겁에 질린 채 소리쳤다. “네가 내 목숨을 빼앗으러 온 거야... 너는 저승사자야...” 그녀는 비명을 질렀고, 교도관들이 그녀를 제지했다. “이 사건이 사실인지 조사하려면 상부에 문서를 제출하고 검토를 받아야 하니, 절차가 복잡할 겁니다. 저도 이해합니다. 그래서 모든 자료를 여기 준비해 두었습니다. 지금의 손이현이 바로 그때의 한명준이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습니다.”이현은 이미 모든 것을 철저히 정리해 두고 있었다.“한명준 씨
한창명은 이미 철저히 준비된 계획을 세우고 시간까지 정확히 맞춘 듯 보였다. 이현은 날카로운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자신이 함정에 빠진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한 검사장님이 이런 비도덕적인 짓을 할 줄은 몰랐군요. 소문과는 아주 다르네요.” “한 팀장님이 그 친구를 만난다면, 어쩌면 저에게 감사하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한창명은 장난기 어린 미소를 띠었고, 더는 머물지 않고 등을 돌려 떠났다. 그의 행동은 의미심장했고, 의도가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이현은 잠시 그 자리에 멈춰 서 있다가 결국 앞으로 걸어갔다. 그가 다가간 한창명의 차는 아주 오래된 것이었다. 한창명은 검소한 성격으로, 이 차를 오랫동안 몰았기에 차량에는 사용감이 여실히 남아 있었다. 이현은 창문을 두드렸지만, 차 안에서는 아무런 반응이 돌아오지 않았다. 약간 짜증이 난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다시 한번 창문을 두드렸다. 이번에는 창문이 서서히 내려갔다. “안녕하세요.” 이현은 차 안을 들여다보았다. 순간, 그의 몸이 굳어졌다. 차 안에 앉아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하연이었다. 하연은 특별히 꾸미지 않은 채, 단정하고 소박한 옷차림에 긴 머리를 앞으로 늘어뜨리고 있었다. 표정은 무표정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긴장된 침묵 속에서 대치했다. 이현의 가슴은 마치 거대한 파도에 휩쓸린 듯 흔들렸고, 그 자리에 서 있는 것조차 힘들었다. “하연 씨가 여기... B시에 있을 리가 없는데... 분명...” “지금쯤이면 제가 F국에 있어야 하고, 깨져버린 부상혁과의 관계에 대한 감정적 상처를 치유하며 쉬고 있어야 하는데... 그렇죠?” 하연은 담담하게 대답하며 차 문을 열었고, 이현에게 안으로 들어오라고 손짓했다. 둘의 숨결이 가까워지자, 이현은 그 가까운 거리만큼 더 긴장되었다. “가십 기사에 그렇게 쓰여 있었으니, 손 사장님이 그렇게 생각한 게 이상한 건 아니죠. 만약 한 팀장님이 제가 오늘 B시에 있는 걸 알았더라면, 아마
두 사람의 피부가 맞닿았다.이현의 몸은 뜨거웠고, 하연의 몸은 차가웠다.“한 팀장님이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어서 저에게 말하지 않았다면, 그건 이해할 수 있어요. 하지만 그 이후에도, 제가 가게에서 한 팀장님을 만났을 때도, 한 번도 진실을 말해주지 않았잖아요. 그렇게 오랜 시간 동안 만나면서, 단 한 번도 그 기회를 잡을 수 없었나요?”하연은 이현의 손을 거칠게 뿌리치고, 구석으로 몸을 웅크리며 적대적인 자세를 취했다.그녀는 매 순간 진실에 다가갈 뻔했지만, 이현은 늘 입을 다물고 있었다.“제가 한 팀장님과 만나려 했을 때마다 당신은 오지 않았어요. 그리고 그 이후로도 당신은 제가 고통 속에서 헤매는 걸 지켜보기만 했죠. 당신 눈에는 제가 정말 바보처럼 보였을 거예요, 그렇죠?” 하연은 그동안 수없이 마음을 다잡으며 감정을 억눌러 왔지만, 핸드폰 너머로 이현이 스스로 한명준이라고 인정한 순간, 억눌렀던 분노가 터져 나왔다.“저는 하연 씨를 단 한 번도 바보라고 생각한 적이 없어요.” 이현은 한 단어, 한 단어 또렷하게 말했다.“하연 씨를 바보라고 생각했으면, 이렇게 오랫동안 하연 씨 곁에 있지 않았을 거예요. 저는 단지 하연 씨를 마주할 용기가 없었어요. 하연 씨는 귀한 명문가의 아가씨이지만, 저는 뭐였죠? 고아에, 경찰에서 퇴출당한 사람, 얼굴이 망가진 불쌍한 사람이었어요. 하연 씨가 말해봐요, 제가 어떻게 최씨 가문의 귀한 아가씨와 어울릴 자격이 있었겠어요.”하연의 가슴이 아프게 찔렸다.눈앞의 이현은 과거의 한명준과 완전히 달랐다. 한명준은 밝고 자신감 넘쳤지만, 지금의 이현은 자신감 없이 침울했다.차 안은 서로 억눌린 숨소리만이 가득했다.오랜 침묵 끝에, 하연은 조심스럽게 몸을 움직여 반쯤 무릎을 꿇고 그의 손을 잡았다.“저는 그때 아무도 상관하지 않았어요. 제가 조금이라도 그 사람들을 신경 썼다면, 한서준과 결혼하지도 않았겠죠.”이현의 눈이 눈물로 가득 찼다. 그는 괴로운 듯 물었다. “그럼 지금은요?” 하연은 대답
“공항으로 데려다주세요.” 하연은 눈을 감고 차창에 기대어 감정을 가라앉혔다. 한창명은 다소 놀란 듯 물었다. “최하연 씨, 비행기에서 내린 지 두 시간도 안 됐는데, B시에서 F국까지는 비행시간만 6시간이에요. 몸이 괜찮겠어요?” 그의 말 속에서 걱정이 묻어나는 것을 느낀 하연은 애써 차분하게 대답했다. “우리 업계는 출장에 자주 나가잖아요. 10시간 넘게 비행하는 일도 흔한 일이에요. 한 검사장님,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하지만 지금은 최하연 씨의 얼굴이 너무 창백해요. 일단 쉬고 가는 게 어떻겠어요?” 한창명은 그녀의 의견을 묻지 않고 곧바로 기사에게 경로를 변경하라고 지시했다. 하연은 반박할 기운이 없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손이현의 정체가 드러난 이상, 각지에 속속들이 소식이 전해질 것이 분명했다. 그때쯤이면 언론들이 기사를 쏟아내기 시작할 터였다. 한창명은 하연을 자기 집으로 데려갔다. 그곳은 공직에서 받은 집으로, 2층짜리 복층 구조에 독립된 정원이 딸린 집이었다. 출입구에는 경비가 상주하고 있었다. 그는 직접 하연을 부축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가사 도우미에게 하연을 부축하게 했다. “여긴 손님방이에요. 여기서 잠시 쉬도록 해요. 필요한 게 있으면 제 비서에게 말하면 돼요.” 이 집은 사각형 구조에 붉은 나무 가구들로 가득했으며, 생활의 흔적은 거의 없었다. 하연은 문가에 기대어 있다가 그 모습을 보고 웃음을 터뜨렸다. 한창명은 그녀의 웃음을 오해한 듯 잠시 미간을 찌푸렸다.“최하연 씨의 집에 비하면 여긴 확실히 초라하죠. 호텔로 옮겨 드릴까요?”하연의 마음이 한결 나아졌다.“그렇다면 최고층 스위트룸에서 묵고 싶어요. 가장 좋은 걸로, 하룻밤에 몇천만 원짜리로요.”“그건 제 몇 달 치 월급이에요.”한창명은 솔직하게 답했다.“최하연 씨, 저는 감당할 수 없어요.”하연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농담이었어요. 그리고 한 검사장님, 이젠 저한테 말을 편하게 하셔도 돼요. 그냥 ‘하연’
F국, DL그룹 임원회의. “B시는 이미 발칵 뒤집혔습니다. 한명준 씨가 아직 살아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경찰서장님이신 나호중 씨께서는 그 사실을 알고도 보고하지 않은 것 때문에 윗선에게 크게 혼이 나셨습니다.” 넓고 밝은 사무실에서, 부상혁은 원신민에게 등을 돌린 채 테이블에서 책 한 권을 꺼냈다. 상혁은 전혀 놀라지 않았다. “왕씨 집안이 한명준을 그렇게 오랫동안 몰래 키워왔으니, 이번 생엔 다시 경찰로 돌아갈 일 없을 겁니다. 아마 앞으로는 상업계로 전향할 겁니다.” 원신민이 분석했다. 상혁은 이에 대해 아무런 의견을 표하지 않고, 원신민이 이어서 보고하는 이야기에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아, 맞다... 최 사장님이 B시로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이 일에 대해 최 사장님은...” 말끝을 흐리는 것이 때로는 가장 강력한 암시가 되기도 한다.상혁이 책장을 넘기던 손을 잠시 멈췄지만, 역시나 전혀 놀라지 않은 듯했다. “요 며칠 언론 앞에서 상심한 척하며, 최씨 가문 본가에 갇혀 집 밖으로 한 발짝도 나가지 않는 연극을 벌였지. 다 그날을 위해서였어.” 원신민은 잠시 멍해졌다가 응답하지 못하고 물었다. “왜요?” “그래야만 최 사장님의 한명준 씨가 방심하고 법정에 모습을 드러낼 테니까.” 상혁은 책을 덮고, 책상을 가볍게 두드리며 입가에 냉소와 자기 비웃음을 띠었다. “그 사람은 이미 다 알고 있었으면서도, 그 한 가닥 남은 감정을 이용한 거야.” 그 한 가닥 남은 감정, 과연 누구의 감정일까? 분위기가 묘하게 흐르자 원신민도 더는 묻지 않았다. “회의하자고 빨리 공지해.” 책을 쓰레기통에 던져 넣은 상혁의 눈빛에 서슬 퍼런 기운이 감돌았다. 원신민은 오늘 회의가 절대 쉽지 않을 것이라는 예감을 느꼈다. 그리고 그의 예감은 적중했다....하연은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오래 잠들었고, 눈을 떴을 때는 이미 해가 떠 있었다. 몽롱한 상태로 문을 열자, 가사도우미가 음식을 다 준
하지만 하연이 발목을 삔 횟수가 참 많았다. 그날 간담회에서 하연은 단지 상혁의 동정을 끌어내기 위해 작은 쇼를 하려고 했을 뿐인데, 진짜로 발목을 삐고 말았고, 정말 눈물까지 흘렸다. 최동신은 그 소식을 듣고 무척이나 걱정하며 소중한 손녀를 위해 유명한 의사들을 많이 알아봤다. 심지어 최동신은 지금도 하연이가 B시로 돌아왔다는 사실은 모르고, 최씨 가문 본가에서 손녀를 찾아 헤매고 있을 것이다. 그 사이 정예나는 하연의 방에서 겉치레로 행동하다가 최동신에게 간파당했고, 그 순간 최동신은 분노로 가득 찼다. “예나야, 솔직하게 말해라. 우리 하연이는 도대체 어디로 간 거냐?” 예나는 눈물을 참지 못하고 간신히 말했다. “하... 하연이는 외출해서 일을 보고 있어요.” “발목을 삐었는데, 운전기사도 경호원도 아주머니도 하나 없이 어떻게 나갔다는 거냐?” 예나는 최동신의 추궁을 이기지 못하고 온 동네에 울음소리를 퍼뜨렸다. 부씨 가문의 본가도 최씨 가문의 본가 근처에 있었고, 상혁은 마침 본가로 가는 길목에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귀를 찢는 듯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조진숙도 차 안에 타고 있었지만,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고 한마디 했다. “하연이 아니야? 대체 무슨 일이야? 성인이 다 된 아이한테 체벌이라도 하는 거야? 내려가서 한번 봐야겠다.” 차에서 내리려는 조진숙의 손을 상혁이 막았다. “어렸을 때부터 하연이를 그렇게 함부로 대하셨죠.” 조진숙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이내 상황을 이해했다. 바로 그때, 뒤에서 경적이 울렸고, 차창이 내려가며 초조해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앞에 있는 차, 도대체 갈 생각 있어요, 없어요?” 하연의 목소리였다. 예나의 연락을 받은 하연은 서둘러 F국으로 돌아왔고, 이제 몇 걸음만 더 가면 집에 도착할 상황이었다. 그런데 앞차가 막고 있어 화가 난 하연은 발목만 삐지 않았다면 차에서 내려 걸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연이네!” 조진숙은 반가워하며 말했다. 상
생각에 잠겨 있던 찰나, 정문 쪽에서 웅성거림이 들려왔다. 부동건이 고개를 돌리자, 최하연이 부상혁의 팔을 자연스럽게 끼고 등장하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 순간, 많은 이들의 시선이 두 사람에게 쏠렸다. 잘생긴 남자와 우아한 여자의 조합. 누가 봐도 완벽한 한 쌍이었다. ‘딱 봐도 좋은 그림이야. 저 둘은 그냥 서 있기만 해도 눈길을 끌어...’ “회장님, 부상혁 대표님은 정말 복도 많으십니다. 최씨 가문의 따님과 이렇게 잘 어울리는 커플이 어디 또 있겠습니까?” 누군가의 말에 부동건의 표정이 확 풀렸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미묘하던 분위기가 사라지고, 부동건의 얼굴에는 흐뭇한 미소가 피어났다. 부동건은 고개를 끄덕이며 두 사람을 향해 시선을 보냈다. “젊은 사람들이 서로 마음이 맞아 좋아하는 걸, 우리 어른들은 그저 기쁜 마음으로 축하해줘야 하는 일일 뿐이지요.” “게다가 상대가 최씨 가문의 따님이라니, 정말 금상첨화가 아닙니까.” 부동건은 더없이 만족스러웠다. ‘역시 상혁이다. 내 아들이라면 이 정도는 돼야지.’ 상혁은 오늘 이 자리에서 당당히 아버지의 체면을 세워주고 있었다. 한편, 송혜선도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방금 전까지 얼굴에 띄웠던 미소는 점점 사라져 갔고, 그녀의 시선은 어느새 하연에게 향했다. 오늘의 하연은, 나무나 예쁘고... 아니, 그냥 눈이 부실 만큼 찬란했다. 그리고 또렷한 이목구비에 윤기 흐르는 머릿결, 화사하게 피어난 얼굴빛까지. 하연의 행복함이 전신에서 흘러나오는 듯했다. 송혜선의 눈빛이 서서히 차가워졌다. ‘정다영... 그년, 나를 속였어.’ 그동안 하연 쪽에서 뭔가 반응이 있을 줄 알고 기다려 왔다. 하지만 소식은커녕, 정다영조차 자취를 감췄다. ‘다영이 걔가 하연이에게 약 먹이는 계획이 분명 실패한 거야. 그렇지 않고 선 지금 저렇게 멀쩡한 얼굴로 서 있을 수는 없어.’ 이대로 배가 불러오면, 섣불리 손도 쓸 수 없게 된다. ‘
이 질문에 송혜선은 눈을 반짝이며 부동건을 바라봤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이젠 나를 당당히 소개해 줄 때가 됐겠지.’ 오늘 이 자리에서, 그녀는 부동건의 정식 아내로서 인정받기를 바라고 있었다. “회장님, 말씀 좀 해보세요?” 조금은 성급한 목소리로 말을 꺼내자, 주변의 시선도 하나둘 송혜선과 부동건을 향했다. 모두 속으로는 뻔히 알고 있었다. 부동건이 과연 예전 애인을 진짜로 정실로 앉혔는지,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 했다. 부동건은 미소를 지었다. 그는 숨기거나 피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담백하게 말했다. “오 회장님, 이 사람은 제 딸의 어머니입니다.” 순간, 송혜선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딸의... 어머니?’ 손에 들고 있던 와인 잔이 살짝 흔들렸다. 금세 넘칠 듯한 와인, 애써 잡고 있는 감정. ‘지금... 이게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지?’ 그리고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억울함이 툭 하고 솟구쳤다. 심지어 손에 힘이 들어가며 하얗게 질린 손등이 떨렸다. 오병지는 단번에 눈치챘고, 싱긋 웃으며 더는 묻지 않았고, 대신 가볍게 말을 건넸다. “축하드립니다. 부 회장님, 여전히 복이 많으시네요.” 부동건은 공손하게 웃으며 송혜선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그 손길엔 무언의 위로가 담겨 있었다. “아닙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나중에 저와 이 사람의 결혼식엔 꼭 오셔서 축배 들어주세요.” 그 말에 송혜선의 눈이 번쩍 뜨였다. ‘결혼식...?’ 순간, 가슴이 쿵 하고 울렸다. 이어서 고개를 들며 수줍게 웃었다. “회장님...” 부동건은 말없이 그녀를 더 가까이 끌어안았다. 더 이상의 말은 없었지만, 그 행동으로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주변의 사람들 시선이 바뀌었다. 예전에는 송혜선을 무시하거나 조롱하던 눈빛이, 지금은 선망과 부러움으로 가득했다. 결국, ‘부동건의 아내’라는 타이틀은 그 자체로 막대한 부와 권력을 상징하는 이름이었다.송혜선은 온
부지윤의 ‘한 달 잔치’는 그야말로 성대한 수준의 파티였다. 초대받은 인사들만 봐도, 그 위세가 느껴졌다. F국 재계의 실력자들, 정재계의 핵심 인물, 이름만 대면 아는 명문가 자제들이 대거 초청됐고, 심지어 부씨 가문 어른들에게도 한 사람도 빠짐없이 직접 청첩장을 보냈다. 이 정도면, 사실상 이 아이를 공식적으로 가문에 편입시키겠다는 의지나 다름없었다. 부동건이 이 아이에게 얼마나 애정을 집착하듯 쏟고 있는지, 이날 행사 하나로 증명되고 있었다. 모든 사람이 지켜보는 가운데, 부동건은 스스로의 체면과 명예를 걸고, 딸을 세상에 내보이고 있었다. ...잔치 당일, 연회장은 유난히 붐볐다. 샹들리에의 조명이 화사하게 반짝였고, 고급스러움이 풍겨 나는 악단의 선율이 분위기를 감싸고 있었다. 송혜선은 산후조리를 마친 직후였지만, 여전히 그만의 풍채와 여유를 잃지 않았다. 예전보다 조금 살이 오른 듯했지만, 그 덕에 오히려 분위기가 더 너그러워 보였다. 그녀가 행사장에 들어서자, 평소 자주 어울리던 재벌가 부인들이 앞다투어 다가왔다. “혜선씨는 진짜 복이 많은 사람이에요. 그 고생 끝에 드디어 볕뜰날이 왔네요.” “부 회장님이 이렇게까지 챙기시는 거 보니까, 이제 정말 한 자리 하시겠어요.” “정말 이러다 조만간 ‘겹경사’ 나는 거 아니예요? 우리라도 미리 축하해줘야 하는 거야?” 송혜선은 그 소리에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얄미울 정도로 여유롭게 미소 지었다. ‘역시 사람은 자리가 높아야 대접 받는 거야.’ “지윤이는 회장님의 첫 딸이잖아요. 그러니까 귀하지 않겠어요? 그리고 회장님이 우리 모녀를 절대 가볍게 보지 않으신다는 건, 여기 있는 분들도 느끼셨을 테고요.” 그 말에 다들 박수까지 치며 웃었다. “이제 우리도 호칭 바꿔야지, 사모님!” 누군가 먼저 그렇게 불렀고, 뒤이어 몇몇이 장난처럼 따라 불렀다. 송혜선은 그 말에 딱히 제지하지 않았다. 오히려 턱을 살짝 들며, 그 호칭이 제법 익숙
진윤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가, 마침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부남준은 법을 무시하고, 사람을 죽였어요. 부씨 가문이 이 일에 개입한다면... 여론은 가만있지 않을 겁니다. 감싸려 들면 들수록, 결국은 함께 나락으로 떨어지겠죠.” ‘이건 단순한 사건이 아니라, 가문의 존망이 걸린 문제야.’ 맞은편 소파에 앉은 상혁은 다리를 꼬고, 한쪽 손으로 턱을 괸 채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남자의 눈빛엔 어떤 감정도 떠오르지 않았다. 마치 세속의 먼지 따윈 전혀 묻지 않은 사람처럼. 진윤의 말이 끝났지만, 상혁의 표정엔 미동 하나 없었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 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부씨 가문은 항상 법의 테두리 안에서 움직여왔습니다. 그건 변하지 않습니다, 여사님.” 그는 손짓으로 테이블 위를 가리켰다. 거기엔 작은 검은색 USB 하나가 놓여 있었다. “이 안에... 고나희 씨가 남긴 게 있습니다. 여사님께 드리라고 하더군요.” 순간, 진윤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숨이 턱 막히는 듯한 표정으로, USB를 바라봤다. “지금... 뭐라고 하셨죠?” 그녀의 목소리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나희가... 뭔가를 남겼다고...?’ 사고는 너무도 갑작스러웠다. 딸의 마지막을 함께할 시간조차 없이, 그녀는 세상을 떠났고, 어떤 유언도, 한마디 말도 남기지 못한 줄 알았다. “나희... 그 애가... 무슨 말을 남겼다는 거예요...” 진윤은 입을 틀어막았다. 눈물은 이미 참을 수 없다는 듯 쏟아지려 하고 있었다. 상혁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쌌다. “사람이 떠난 건 바꿀 수 없습니다. 하지만 남겨진 마음은, 누군가가 반드시 전해야죠.” 그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무거운 공기를 뒤로한 채, 조용히 방을 나섰다. 잠시 후.룸 안에서 낮고, 억눌렀던 울음이 터져 나왔다. “나희야...” 진윤은 USB를 손에 쥐고, 세상이 무너진 듯한 표정으로 울고 있
진윤은 송혜선이 내민 공백 수표를 내려다보며 손끝까지 떨렸다. 종이 한 장. 하지만 그 안에 담긴 의미는, 그녀의 심장을 조용히 갉아먹었다. ‘돈이란 게... 사람을 어디까지 비참하게 만들 수 있는 건지.’ 그녀는 허탈하게 웃었다. “돈, 참 좋은 거죠. 수많은 집이 그거 하나 때문에 무너지고, 사람 목숨도 스스럼없이 거래되고.” 그녀의 눈빛이 서서히 날카로워졌다. “고경수도 그랬어요. 결국 돈 때문에 스스로 감방에 들어갔고, 지금 당신은 그 돈으로 내 아이의 죽음을 사겠다는 거죠.” 진윤의 시선이 천천히 송혜선을 꿰뚫었다. “송 여사님의 눈엔... 돈이면 뭐든 다 해결돼요?” 송혜선은 대답하지 않았다. 진윤은 고개를 들었다. 쭉 뻗은 어깨, 흐트러지지 않은 눈빛으로 조용히 말했다. “근데, 저에게 그딴 건... 아무 의미 없어요.” 테이블 위의 수표는 그녀 눈엔 그저 휴짓조각에 불과한 쓰레기였다. ‘내 아이 이름 위에 적힌 숫자가 많을수록, 그 애는 더 억울해지는 거야.’ 그런 진윤의 단호함에, 송혜선도 이내 표정을 굳혔다. “정말 고집 세시네요, 여사님.” 그녀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조용히 진윤 쪽으로 다가섰다. 10센티미터도 채 되지 않는 거리에서, 송혜선은 하찮다는 듯이 고개를 숙여 내려다보며 진윤에게 시선을 내리꽂았다. “그 자존심, 얼마나 오래 버틸 수 있을지 볼까요?” 그 말투엔 이젠 더 이상 숨길 필요 없는 위협이 담겨 있었다. “당신에게는 지금, 아무것도 없어요. 남편은 감옥, 딸은... 하늘에 있어. 그런데도 이렇게 버티겠다고? 부씨 가문이 마음만 먹으면, 당신 같은 사람 하나쯤 사라지게 만드는 건 일도 아니에요.” 진윤은 순간 움찔했지만, 눈동자는 미동도 없이 그대로 송혜선을 바라봤다. 송혜선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마지막 일격을 날렸다. “참, 고경수 씨 말인데요. 그 사람, 아직 당신한테 마음 있더라. 감방에서 계속 당신 얘기만 했대요.”
“그저... 살아남기 위한 선택이었을 뿐이에요. 여사님. 같은 여자로서, 제 처지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이해해주시리라 믿어요.” 진윤은 피식, 코웃음을 쳤다. 커피잔을 천천히 들어올리더니, 마치 비웃기라도 하듯 천천히 한 모금 머금었다. “이해? 아니요. 전 그런 거 몰라요.” 단칼처럼 냉정하게 잘라버린 말이었다. 그 한 마디에 송혜선의 입술이 경직되며 굳어버렸다. ‘이런, 내 말이 통하지 않을 것 같아...’ 하지만 그녀는 물러서지 않았다. 송혜선은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진윤의 손등을 잡았다. “여사님... 따님 일에 대해서는, 정말...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진윤이 빠르게 손을 뿌리쳤다. 그리고 이내 터져나온 감정. “사과? 한 아이가 죽었는데, 고작 한 마디 사과로 끝내겠다고요?” “아니면... 송 여사님의 눈엔 제 딸 목숨이 그깟 아무렇게나 다뤄도 되는 값싼 거였어요?” 그 목소리는 카페 전체를 울릴 만큼 컸고, 송혜선은 순간 움찔하며 고개를 푹 숙였다. 진윤의 눈을 마주할 용기가 없었다. “죄송합니다... 여사님. 흥분하지 마세요... 결국... 이 모든 건 우리 부씨 집안이... 정말 죄송합니다.” 진윤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그 웃음 속에서, 참았던 눈물이 터졌다. 결국 끌어 오르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웃으면서 울었다. 그 모습은 너무 아프고, 너무 무너져 있었다. 진윤은 눈물을 닦으려 했지만, 멈추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본 송혜선은 주섬주섬 가방에서 티슈를 꺼내 조심스럽게 내밀었다. 하지만 진윤은 그것조차 거부했다. “됐어요. 그런 거, 필요 없으니까.” “송 여사님, 솔직히 말해봐요 오늘 여기서 만나자고 한 것도 당신 아들 부남준이 꼬투리 잡혀서, 지금 당장 날 만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니까 이렇게 만나자고 한 거잖아요.” “그게 아니라...” “아니긴 뭐가 아니야. 그 애 죽고, 그동안 단 한 번이라도 날
“닥쳐!!” 송혜선이 낮게 내뱉었다. “그 비밀, 평생 당신 뱃속에 묻어둬.”“아니면... 다시는 당신 딸 얼굴 못 볼 줄 알아.” 조봉규는 그제야 자신이 입을 잘못 놀렸다는 걸 깨달았다. 급히 손바닥으로 자기 입을 철썩 때리며 말했다. “화내지 마, 혜선아. 나도 그냥... 기분 좋아서, 그만...” “앞으로 이 집에서 그 얘긴 두 번 다시 꺼내지 않을게. 약속해.” 조봉규의 간절한 다짐에도, 송혜선은 날카로운 눈초리로 그를 한번 쏘아봤다. 곧이어, 목소리를 낮추며 화제를 돌렸다. “부동건, 딸한테 명분은 준다더니, 정작 혼인신고 얘긴 입도 안 뗐어. ‘이러다 또 마음 변하는 거 아니야?’” 그녀의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다. ‘안 돼. 남준이 일은 어떻게 해서라도 반드시 준비해야 해.’ 그 말엔 조봉규도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알아봤는데, 유가족 쪽에서 합의서만 받아낼 수 있으면, 그 사건도 다시 볼 여지가 있대.” 혜선의 눈이 번쩍 뜨였다. “진짜야?” “응. 듣자 하니까 고경수 와이프, 진윤... 아직 F국에 있다더라. 기회만 되면 한번 만나봐. 그쪽에서 합의서를 써주기만 하면, 다시 기회는 생길 거야.” “근데 지금 당신 산후조리 중이잖아. 몸이 먼저야. 너무 무리하지는 말고...” 하지만 혜선은 그럴 여유가 없었다. ‘남준이가 내 인생의 마지막 희망이야. 기회가 있다면... 어떤 수라도 써야 해.’ 며칠 후, 송혜선은 드디어 고경수의 아내 진윤과 연락이 닿았다. 하지만 의외로, 진윤은 단 한 마디 망설임 없이 만남을 받아들였다. 두 사람은 평일 오전, 한산한 분위기의 카페에서 만나기로 했다. 커피 향이 은은하게 퍼진 실내엔 손님이 드문드문 앉아 있었고, 송혜선은 긴 트렌치코트에 머리까지 스카프로 단단히 감싸고 있었다. 밖에서는 누구도 그녀를 쉽게 알아볼 수 없게끔. 카페 입구에 들어선 그녀는 안쪽을 빠르게 훑었다. 한눈에 알아봤다. 구석 창가에 앉은, 수척한 얼굴의
조봉규의 말은 하나하나 송혜선의 마음을 쳤다. “정 안 되면, 우리도 그냥 확 뒤엎어. 어차피 잃을 게 없는 사람들이잖아. 신발 신은 놈들이야 겁낼 게 많겠지만, 우린 맨발이야.”‘맞아... 지금이라도 안 붙잡으면, 우린 끝장이야.’송혜선의 눈빛이 점점 확고해졌다. 그렇게 마음을 굳힌 채로, 그녀는 곧장 부동건을 찾아갔다.하지만 부동건은 송혜선의 말에 귀를 기울일 틈조차 없었다. 부남준의 사건이 악화로 치닫고 있었다. 갓 들어온 정보에 따르면, 결정적 증거들이 줄줄이 쏟아지고 있었고, 경찰 쪽 수사도 속도를 내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건... 덮을 수 있는 일이 아니야. 법 앞에선 아무리 부동건이라도 무력하군.’무거운 책임감과 죄책감이 부동건의 어깨를 짓눌렀다. ‘자식 교육을 제대로 못한 죄, 그건 부모의 몫이야...’그저 무기력하게, 결과를 기다릴 수밖에 없는 상황. 송혜선의 말은 부동건의 귀에 닿지도 않았다.그는 오히려 조용히 갓 인큐베이터에서 나온 막내딸을 품에 안았다. 부드러운 솜털이 보일 정도로 작고 여린 얼굴. 손가락 하나만 잡혀도 녹아버릴 듯한 느낌이었다.‘이 아이는... 내 마지막 기적일지도 몰라.’부동건은 딸을 안고 있을 때만큼은 세상의 복잡한 모든 것이 잠시 잊히는 듯했다. 그리고 눈가가 부드러워졌다.“딸아, 네 엄마랑 진짜 많이 닮았네. 크면 예쁘겠다... 아주.”그는 미소를 머금으며 속삭였다.“지윤이라고 이름 지었어. 복 많은 아이라고 하더라. 부씨 가문 첫 딸, 제대로 키울 거야. 우리 지윤이는, 아빠의 제일 소중한 딸이 될 거야.”‘그래... 남준이는 못 지켜도, 이 아이만큼은...’부동건의 얼굴은 어느새 기쁨으로 가득했다.하지만 그 모습을 바라보는 송혜선의 속은 서늘했다.‘정작 내가 말하려던 건, 이게 아닌데...’그녀는 조용히 손을 뻗어 아이를 부동건의 품에서 안아올렸다.“조심해요, 아직 작아서... 그렇게 막 들면 안 돼요.”부동건은 걱정스러운 말투로 송혜선을 바라보며 말했다.“이
부동건의 얼굴빛이 어두워졌다. 밝은색으로 혈기가 도는가 싶더니 이내 새파랗게 질리더니, 순식간에 붉어졌다.‘이게 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가...’조진숙은 그런 부동건의 반응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차갑고 단호한 말투로 말을 던지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돌아섰다.“당신 입으로 한 말, 잊지 마.”철컥-곧이어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조진숙은 완전히 그의 시야에서 사라졌다.남겨진 부동건은 깊은숨을 내쉬었다.‘딱 한 발, 그 한 걸음이 이렇게까지 망가뜨릴 줄은 몰랐네...’하지만 그는 여전히 조진숙의 마지막 말이 담고 있던 진짜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냥 평소처럼, 그저 ‘조심하라는 경고’ 정도로 여긴 것이다.그 후 부동건은 지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형사 전문 변호사를 찾았고, 부남준의 사건을 맡겼다. 그것뿐, 그 이상의 움직임은 없었다.소식을 들은 송혜선은 더 이상 산후조리고 뭐고 할 틈이 없었다. 벌떡 몸을 일으키며 날카로운 눈빛으로 외쳤다.“남준이는 부동건 당신 아들이란 말이야. 그런데도 이 상황에서 이 사람이 저렇게 손 놓고 있는다고?”그녀에게 있어 부동건은 F국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재벌이었다. 사람 하나 죽었든, 법을 어겼든, 그 모든 걸 덮는 것쯤은 그에게 있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그 정도 힘도 못 쓰는 사람이었으면, 애초에 내가 그 옆에 왜 있었겠어?’그런데도 부동건은 변호사 하나 붙인 걸로 끝이라니. 송혜선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안 돼. 내가 직접 가서 말해야겠어.”그녀가 일어나려는 순간, 조봉규가 급히 다가와 그녀를 막아섰다. 그리고 조심스러운 어조로 송혜선을 다독였다.“혜선아, 지금은 당신 몸이 먼저야. 다른 건 잠시 내려놔.”하지만 송혜선은 남자의 손을 거칠게 뿌리쳤다.“남준이 내 아들이야. 내가 안 나서면 누가 나서? 그 애랑 나, 이 지경이 되도록 얼마나 참고 견뎠는지 몰라? 이제 와서 그냥 두라고?”송혜선은 황급히 신발을 신고, 나갈 채비를 했다. 그 옆에서 어쩔 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