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사는 얼굴을 굳히며 변호사의 질문을 단호하게 중단시켰다.“사건과 무관한 사람에 대해서는 더 이상 발언하지 마십시오.”변호사는 잠시 머뭇거리다 고개를 끄덕이며 다음 질문으로 넘어가려 했다.그 순간, 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저는 고인인 왕명주의 친아들입니다. 발언하게 해주십시오.”한창명은 고개를 돌려 그 목소리의 주인공을 바라보았다.그 사람은 손이현이었다.이현은 깔끔한 하얀 셔츠에 검은 바지를 입고 있었다. 외모는 특별히 두드러지지 않았지만, 그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은 단단하고 강직했다. 그것은 그가 오랜 시간 경찰로 일하며 몸에 익힌 기품이었다.순간, 한창명은 이현에게서 느꼈던 익숙함이 어디서 왔는지 깨달았다. 왕아영은 이현이 도착하자 긴장이 풀린 듯 훨씬 편안한 표정을 지었다.이현은 자신의 신분과 관련된 서류를 제출했다. 판사는 서류를 확인하고 깜짝 놀라며 입을 열었다.“당신이 한명준 씨 본인입니까? 나중에 손이현으로 개명했습니까?”이현은 당당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인정했다.이수애는 자리에 주저앉으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이현을 쳐다보았다. “그럴 리 없어! 난 한명준을 본 적이 있어! 너처럼 생기지 않았다고!” “마지막 임무 중에 차량 폭발 사고로 강에 추락해 얼굴 전체가 망가졌습니다. 이 대답이면 만족하시겠습니까?” 이현은 차가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의 섬뜩한 미소에 이수애는 온몸이 떨렸다. “한서준도 이 사실을 알았을 텐데, 왜 말하지 않았을까요?” 이수애는 겁에 질린 채 소리쳤다. “네가 내 목숨을 빼앗으러 온 거야... 너는 저승사자야...” 그녀는 비명을 질렀고, 교도관들이 그녀를 제지했다. “이 사건이 사실인지 조사하려면 상부에 문서를 제출하고 검토를 받아야 하니, 절차가 복잡할 겁니다. 저도 이해합니다. 그래서 모든 자료를 여기 준비해 두었습니다. 지금의 손이현이 바로 그때의 한명준이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습니다.”이현은 이미 모든 것을 철저히 정리해 두고 있었다.“한명준 씨
한창명은 이미 철저히 준비된 계획을 세우고 시간까지 정확히 맞춘 듯 보였다. 이현은 날카로운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자신이 함정에 빠진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한 검사장님이 이런 비도덕적인 짓을 할 줄은 몰랐군요. 소문과는 아주 다르네요.” “한 팀장님이 그 친구를 만난다면, 어쩌면 저에게 감사하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한창명은 장난기 어린 미소를 띠었고, 더는 머물지 않고 등을 돌려 떠났다. 그의 행동은 의미심장했고, 의도가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이현은 잠시 그 자리에 멈춰 서 있다가 결국 앞으로 걸어갔다. 그가 다가간 한창명의 차는 아주 오래된 것이었다. 한창명은 검소한 성격으로, 이 차를 오랫동안 몰았기에 차량에는 사용감이 여실히 남아 있었다. 이현은 창문을 두드렸지만, 차 안에서는 아무런 반응이 돌아오지 않았다. 약간 짜증이 난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다시 한번 창문을 두드렸다. 이번에는 창문이 서서히 내려갔다. “안녕하세요.” 이현은 차 안을 들여다보았다. 순간, 그의 몸이 굳어졌다. 차 안에 앉아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하연이었다. 하연은 특별히 꾸미지 않은 채, 단정하고 소박한 옷차림에 긴 머리를 앞으로 늘어뜨리고 있었다. 표정은 무표정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긴장된 침묵 속에서 대치했다. 이현의 가슴은 마치 거대한 파도에 휩쓸린 듯 흔들렸고, 그 자리에 서 있는 것조차 힘들었다. “하연 씨가 여기... B시에 있을 리가 없는데... 분명...” “지금쯤이면 제가 F국에 있어야 하고, 깨져버린 부상혁과의 관계에 대한 감정적 상처를 치유하며 쉬고 있어야 하는데... 그렇죠?” 하연은 담담하게 대답하며 차 문을 열었고, 이현에게 안으로 들어오라고 손짓했다. 둘의 숨결이 가까워지자, 이현은 그 가까운 거리만큼 더 긴장되었다. “가십 기사에 그렇게 쓰여 있었으니, 손 사장님이 그렇게 생각한 게 이상한 건 아니죠. 만약 한 팀장님이 제가 오늘 B시에 있는 걸 알았더라면, 아마
두 사람의 피부가 맞닿았다.이현의 몸은 뜨거웠고, 하연의 몸은 차가웠다.“한 팀장님이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어서 저에게 말하지 않았다면, 그건 이해할 수 있어요. 하지만 그 이후에도, 제가 가게에서 한 팀장님을 만났을 때도, 한 번도 진실을 말해주지 않았잖아요. 그렇게 오랜 시간 동안 만나면서, 단 한 번도 그 기회를 잡을 수 없었나요?”하연은 이현의 손을 거칠게 뿌리치고, 구석으로 몸을 웅크리며 적대적인 자세를 취했다.그녀는 매 순간 진실에 다가갈 뻔했지만, 이현은 늘 입을 다물고 있었다.“제가 한 팀장님과 만나려 했을 때마다 당신은 오지 않았어요. 그리고 그 이후로도 당신은 제가 고통 속에서 헤매는 걸 지켜보기만 했죠. 당신 눈에는 제가 정말 바보처럼 보였을 거예요, 그렇죠?” 하연은 그동안 수없이 마음을 다잡으며 감정을 억눌러 왔지만, 핸드폰 너머로 이현이 스스로 한명준이라고 인정한 순간, 억눌렀던 분노가 터져 나왔다.“저는 하연 씨를 단 한 번도 바보라고 생각한 적이 없어요.” 이현은 한 단어, 한 단어 또렷하게 말했다.“하연 씨를 바보라고 생각했으면, 이렇게 오랫동안 하연 씨 곁에 있지 않았을 거예요. 저는 단지 하연 씨를 마주할 용기가 없었어요. 하연 씨는 귀한 명문가의 아가씨이지만, 저는 뭐였죠? 고아에, 경찰에서 퇴출당한 사람, 얼굴이 망가진 불쌍한 사람이었어요. 하연 씨가 말해봐요, 제가 어떻게 최씨 가문의 귀한 아가씨와 어울릴 자격이 있었겠어요.”하연의 가슴이 아프게 찔렸다.눈앞의 이현은 과거의 한명준과 완전히 달랐다. 한명준은 밝고 자신감 넘쳤지만, 지금의 이현은 자신감 없이 침울했다.차 안은 서로 억눌린 숨소리만이 가득했다.오랜 침묵 끝에, 하연은 조심스럽게 몸을 움직여 반쯤 무릎을 꿇고 그의 손을 잡았다.“저는 그때 아무도 상관하지 않았어요. 제가 조금이라도 그 사람들을 신경 썼다면, 한서준과 결혼하지도 않았겠죠.”이현의 눈이 눈물로 가득 찼다. 그는 괴로운 듯 물었다. “그럼 지금은요?” 하연은 대답
“공항으로 데려다주세요.” 하연은 눈을 감고 차창에 기대어 감정을 가라앉혔다. 한창명은 다소 놀란 듯 물었다. “최하연 씨, 비행기에서 내린 지 두 시간도 안 됐는데, B시에서 F국까지는 비행시간만 6시간이에요. 몸이 괜찮겠어요?” 그의 말 속에서 걱정이 묻어나는 것을 느낀 하연은 애써 차분하게 대답했다. “우리 업계는 출장에 자주 나가잖아요. 10시간 넘게 비행하는 일도 흔한 일이에요. 한 검사장님,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하지만 지금은 최하연 씨의 얼굴이 너무 창백해요. 일단 쉬고 가는 게 어떻겠어요?” 한창명은 그녀의 의견을 묻지 않고 곧바로 기사에게 경로를 변경하라고 지시했다. 하연은 반박할 기운이 없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손이현의 정체가 드러난 이상, 각지에 속속들이 소식이 전해질 것이 분명했다. 그때쯤이면 언론들이 기사를 쏟아내기 시작할 터였다. 한창명은 하연을 자기 집으로 데려갔다. 그곳은 공직에서 받은 집으로, 2층짜리 복층 구조에 독립된 정원이 딸린 집이었다. 출입구에는 경비가 상주하고 있었다. 그는 직접 하연을 부축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가사 도우미에게 하연을 부축하게 했다. “여긴 손님방이에요. 여기서 잠시 쉬도록 해요. 필요한 게 있으면 제 비서에게 말하면 돼요.” 이 집은 사각형 구조에 붉은 나무 가구들로 가득했으며, 생활의 흔적은 거의 없었다. 하연은 문가에 기대어 있다가 그 모습을 보고 웃음을 터뜨렸다. 한창명은 그녀의 웃음을 오해한 듯 잠시 미간을 찌푸렸다.“최하연 씨의 집에 비하면 여긴 확실히 초라하죠. 호텔로 옮겨 드릴까요?”하연의 마음이 한결 나아졌다.“그렇다면 최고층 스위트룸에서 묵고 싶어요. 가장 좋은 걸로, 하룻밤에 몇천만 원짜리로요.”“그건 제 몇 달 치 월급이에요.”한창명은 솔직하게 답했다.“최하연 씨, 저는 감당할 수 없어요.”하연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농담이었어요. 그리고 한 검사장님, 이젠 저한테 말을 편하게 하셔도 돼요. 그냥 ‘하연’
F국, DL그룹 임원회의. “B시는 이미 발칵 뒤집혔습니다. 한명준 씨가 아직 살아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경찰서장님이신 나호중 씨께서는 그 사실을 알고도 보고하지 않은 것 때문에 윗선에게 크게 혼이 나셨습니다.” 넓고 밝은 사무실에서, 부상혁은 원신민에게 등을 돌린 채 테이블에서 책 한 권을 꺼냈다. 상혁은 전혀 놀라지 않았다. “왕씨 집안이 한명준을 그렇게 오랫동안 몰래 키워왔으니, 이번 생엔 다시 경찰로 돌아갈 일 없을 겁니다. 아마 앞으로는 상업계로 전향할 겁니다.” 원신민이 분석했다. 상혁은 이에 대해 아무런 의견을 표하지 않고, 원신민이 이어서 보고하는 이야기에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아, 맞다... 최 사장님이 B시로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이 일에 대해 최 사장님은...” 말끝을 흐리는 것이 때로는 가장 강력한 암시가 되기도 한다.상혁이 책장을 넘기던 손을 잠시 멈췄지만, 역시나 전혀 놀라지 않은 듯했다. “요 며칠 언론 앞에서 상심한 척하며, 최씨 가문 본가에 갇혀 집 밖으로 한 발짝도 나가지 않는 연극을 벌였지. 다 그날을 위해서였어.” 원신민은 잠시 멍해졌다가 응답하지 못하고 물었다. “왜요?” “그래야만 최 사장님의 한명준 씨가 방심하고 법정에 모습을 드러낼 테니까.” 상혁은 책을 덮고, 책상을 가볍게 두드리며 입가에 냉소와 자기 비웃음을 띠었다. “그 사람은 이미 다 알고 있었으면서도, 그 한 가닥 남은 감정을 이용한 거야.” 그 한 가닥 남은 감정, 과연 누구의 감정일까? 분위기가 묘하게 흐르자 원신민도 더는 묻지 않았다. “회의하자고 빨리 공지해.” 책을 쓰레기통에 던져 넣은 상혁의 눈빛에 서슬 퍼런 기운이 감돌았다. 원신민은 오늘 회의가 절대 쉽지 않을 것이라는 예감을 느꼈다. 그리고 그의 예감은 적중했다....하연은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오래 잠들었고, 눈을 떴을 때는 이미 해가 떠 있었다. 몽롱한 상태로 문을 열자, 가사도우미가 음식을 다 준
하지만 하연이 발목을 삔 횟수가 참 많았다. 그날 간담회에서 하연은 단지 상혁의 동정을 끌어내기 위해 작은 쇼를 하려고 했을 뿐인데, 진짜로 발목을 삐고 말았고, 정말 눈물까지 흘렸다. 최동신은 그 소식을 듣고 무척이나 걱정하며 소중한 손녀를 위해 유명한 의사들을 많이 알아봤다. 심지어 최동신은 지금도 하연이가 B시로 돌아왔다는 사실은 모르고, 최씨 가문 본가에서 손녀를 찾아 헤매고 있을 것이다. 그 사이 정예나는 하연의 방에서 겉치레로 행동하다가 최동신에게 간파당했고, 그 순간 최동신은 분노로 가득 찼다. “예나야, 솔직하게 말해라. 우리 하연이는 도대체 어디로 간 거냐?” 예나는 눈물을 참지 못하고 간신히 말했다. “하... 하연이는 외출해서 일을 보고 있어요.” “발목을 삐었는데, 운전기사도 경호원도 아주머니도 하나 없이 어떻게 나갔다는 거냐?” 예나는 최동신의 추궁을 이기지 못하고 온 동네에 울음소리를 퍼뜨렸다. 부씨 가문의 본가도 최씨 가문의 본가 근처에 있었고, 상혁은 마침 본가로 가는 길목에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귀를 찢는 듯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조진숙도 차 안에 타고 있었지만,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고 한마디 했다. “하연이 아니야? 대체 무슨 일이야? 성인이 다 된 아이한테 체벌이라도 하는 거야? 내려가서 한번 봐야겠다.” 차에서 내리려는 조진숙의 손을 상혁이 막았다. “어렸을 때부터 하연이를 그렇게 함부로 대하셨죠.” 조진숙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이내 상황을 이해했다. 바로 그때, 뒤에서 경적이 울렸고, 차창이 내려가며 초조해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앞에 있는 차, 도대체 갈 생각 있어요, 없어요?” 하연의 목소리였다. 예나의 연락을 받은 하연은 서둘러 F국으로 돌아왔고, 이제 몇 걸음만 더 가면 집에 도착할 상황이었다. 그런데 앞차가 막고 있어 화가 난 하연은 발목만 삐지 않았다면 차에서 내려 걸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연이네!” 조진숙은 반가워하며 말했다. 상
하연이가 한참을 달래고 나서야 최동신의 화가 조금 가라앉았다. “다음번엔 절대 이렇게 하지 마라.” 하연은 그제야 마치 사면받은 듯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예나에게 휴지를 건넸다. “하지만, 할아버지도 사람을 때리면 안 돼요...” “때리긴 누굴 때렸다고 그래? 몇 마디 한 게 그렇게 서러웠던 모양이구나.” 예나는 울먹이며 말했다. “할아버지의 강한 카리스마가 너무 무서워서 운 거예요...” 하연은 웃음이 터질 것 같았다. 바로 그때, 최동신이 갑자기 지팡이로 바닥을 두드리며 말했다. “며칠 후에 부씨 가문의 사당 백주년 기념식이 있는데, 많은 명문가가 초대받았어. 우리도 그중 하나다. 네 큰오빠는 중요한 일이 있어서 못 오고, 집에는 나랑 너밖에 없구나. 내가 갈까, 아니면 네가 갈래?” ‘부씨 가문의 사당 백주년 기념식이라... 그래서 부상혁이 돌아왔던 거였군...’ ‘그 사람은 원래 본가에 자주 오는 사람이 아닌데...’ 하연은 할아버지의 의도를 알았다. 명문가들 사이의 중요한 행사에는 꼭 가족 중 한 명이 나서야 했고, 집사를 대신 보낼 수 없는 일이었다. “할아버지는 건강도 안 좋으셔서 몇 년째 외출도 안 하셨잖아요. 이런 일은 제가 처리할게요.” 하연은 잠시 생각한 후 대답했다. “내가 세상일에 더 이상 신경 쓰진 않지만, 너와 관련된 일이라면 나는 언제든지 움직일 용의가 있다.” 최동신의 말에는 묘한 의미가 담겨 있었다. “제가 가서 잘 처리할 수 있어요.” 하연은 미소 지으며 답했다. 최씨 가문 본가의 테라스에는 꽃과 나무가 가득 심겨져 있었다. 예나는 그곳의 그네에 앉아 있었다. “진짜 가는 거야? 옛 연인을 다시 만나면, 더 불편할 텐데...” 하연은 아까 입구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리며 한동안 말이 없었다. 자신이 과연 상혁과 다시 만날 수 있을지, 아직 확실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그 사람은... 분명 나를 안 만나고 싶을 텐데...’ 그래서 하연은 백주년 기념식
하연은 상혁의 그 차가운 시선에 순간적으로 가슴이 찔린 듯했다. 검은 셔츠의 윗단추 두 개를 풀어 젖힌 상혁은, 어두운 밤 속에서 강한 남성적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다. 다가가 보니, 하연은 홀로 길가의 벤치에 앉아있었다. 상혁은 미간을 찌푸렸다. “내가 파기하라고 했잖아.” “당신이 직접 파기해요.” 하연은 그의 품에 서류를 밀어 넣었다. 상혁이 그것을 펼쳐보니, 하얀 종이 몇 장이었다. 그는 눈썹을 치켜세우고 하연을 내려다보았다. “당신한테 거짓말했어요. 그날 서류를 잘못 가져오지 않았어요.” 상혁은 등을 돌리고 걸어가려고 했다. 그러나 하연이 그의 옷자락을 잡았고, 마치 작은 고양이처럼 상혁의 옷을 놓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가 상혁의 강한 체격을 붙잡는다고 해서 막을 수는 없었다. 상혁이 걸음을 떼자, 하연은 균형을 잃고 땅에 넘어졌다. 꽤 묵직한 소리와 함께 손이 바닥에 닿았고, 손목에는 금방 붉은 상처가 번졌다. 상혁은 즉시 발걸음을 멈추고 돌아보았다. 그는 단 한 손으로 하연을 일으켜 다시 벤치에 앉혔다. 몸을 앞으로 기울인 상혁은 분노로 인해 숨을 거칠게 몰아쉬고 있었고, 눈에서는 날카로운 빛이 뿜어내고 있었다. “최하연, 네가 대체 뭘 하고 싶은 건지 말해봐.” 하연은 고통을 참으며 숨을 몰아쉬었다. “당신을 보고 싶었어요. 당신과 얘기하고 싶었어요.” “뭐 하러?” 상혁은 하연의 턱을 거칠게 잡아 그녀가 자신의 검은 눈동자를 마주 보게 했다. “그 남자를 위해서 발목까지 삐며 사람들을 오해하게 만들고, 나를 이용해서 언론을 떠들썩하게 했으면서, 이제 와서 무슨 말을 더 하고 싶은 건데?” 그의 손에 이끌려 억지로 고개를 든 하연은 눈물을 참으려 했지만, 이미 눈가가 뜨거워져 있었다. 억울함과 울컥하는 감정을 애써 삼켰다. “그 사람 때문이 아니에요. 나는 그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고 싶었을 뿐이에요. 내가 뭘 잘못했어요?” 둘 다 명석한 사람들이었기에 굳이 더 말하지 않
하미주는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다영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뭔가 수상했는데, 표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하지만 자기도 모르게 얼굴의 표정에서 서서히 미소가 사라졌다. 어떤 상황이든, 그녀가 원하는 건 단 하나였다. 딸이 후회하지 않는 길을 가는 것. “다영아, 너는 마음이 너무 순진해. 제발, 누군가에게 이용당하는 일만은 없었으면 좋겠구나.” 그러나 다영은 마치 그 말이 기분 나쁘다는 듯, 휙 손을 뿌리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엄마, 그런 말씀 이제 그만하세요.” 다영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내 선택을 믿어요. 그리고 엄마도 나를 응원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만약 아직도 의심이 된다면, 내일 남준 씨가 오면 직접 물어보세요.” 하미주가 무슨 말을 더 하기 전에, 다영은 그대로 돌아서서 방을 나가버렸다. 딸이 사라진 자리에서, 하미주는 그저 깊은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설날 다음 날.아침부터 집사는 현관 앞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그는 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자, 곧장 앞으로 다가가 공손히 인사했다. “부 대표님.” 상혁은 무심하게 손목을 들어 올려, 소매 끝을 단정히 정리했다. 우아하면서도 여유로운 움직임. 그리고 아무렇지 않은 듯한 목소리. “어제 맡긴 일, 확인했나요?” 집사는 목소리를 낮추며 조용히 보고했다. “후원 CCTV를 확인한 결과, 어젯밤 그곳에 있던 사람은 남준 도련님이었습니다.” 상혁의 손이 멈추지 않았다. 그저 차분하게 마지막 단추를 여미고, 시계를 찬 후 말했다. “알았어요. 나가봐요.” 집사가 조용히 퇴장하자, 상혁은 변함없는 표정으로 몸을 돌렸다. 아래층으로 내려오자, 이미 남준이 식탁에 앉아 있었다.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형,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상혁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짧게 답했다. “새해 복 많이 받아라.” 서로 마주 앉아 있었지만, 그 사이에 감도는 공기는 묘한 정적으로 가득 차 있었
아무 일 아니라는 듯이 서둘러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고 정신을 바짝 차리며 정다영이 억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엄마, 남준 씨가 아마 많이 바쁜가 봐요. 일 끝나면 꼭 세배하러 올 거예요.” 하지만 하미주는 딸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았다. 왜냐하면 자신은 눈이 멀지 않은 이상, 최근의 분위기를 못 느낄 리가 없었다. 그리고 요즘 들어 사람들의 태도가 어떻게 변하는지 똑똑히 보고 있었다.지금 자신마저 마음을 다잡지 못하고 조금이라도 힘이 빠진다면, 언제든 등을 돌릴 준비가 되어 있는 게 세상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애초에 하미주는 딸과 남준의 결혼 자체를 반대한 사람이었다. 하미주가 보기엔, 아무리 돈이 많고, 외형적으로 그럴듯해 보여도, 남준은 결국 ‘첩’의 자식이었다. 그런 가정에서 제대로 된 교육을 받고 자랐을 리가 없었다. 그런데도 다영은 기어코 남준을 붙잡겠다고 난리였다. 그것도 마치, 그 남자가 아니면 죽기라도 할 것처럼. 결국 정지철이 남준을 높게 평가하자, 하미주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인 거였다. 그래서 약혼까지는 허락했는데 예전엔 그럭저럭 신경을 써주던 남준이, 이제는 대놓고 얼굴도 안 비췄다. 하미주는 아주 불만이 많았다.‘명절에 처가집 한 번 들를 생각도 없는 사위가 과연 제대로 가정을 꾸릴 생각이 있을까? 말 다 했지.' 이렇게 생각하자 그녀는 딸의 손을 잡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다영아, 엄마가 하는 말 기분 나빠하지 말고 잘 들어. 이제 네 아버지가 그런 상황이니, 우리 집도 예전 같지 않아. 사람들이 우리를 어떻게 보는지도 너도 잘 알고 있지?” 다영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녀는 당연히 알았다. 아니,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자신은 더욱 필사적으로 버텨야 한다고 결심했다. 이 기회에 확실히 자리 잡지 않으면, 사람들에게 무시당하는 건 시간 문제일 테니까. “엄마, 집안 사정이랑 내 결혼은 상관없는 일이에요.” 하미주는 깊은 한숨을 쉬며,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
상혁은 풍등을 들고 하연과 함께 마당으로 나왔다. 타이밍 좋게 하인이 라이터를 건네주고는 조용히 물러났다. 멀지 않은 곳에서 부남준이 조용히 고개를 내밀었다. 몰래 지켜보던 그는, 두 사람이 자연스럽게 풍등을 펼치는 모습을 바라봤다. 상혁이 직접 가운데 심지에 불을 붙였다. 뜨거운 열기가 천천히 풍등을 부풀게 만들었고, 풍등은 두 사람 앞에서 서서히 떠오르기 시작했다. “하연아, 빨리 소원 빌어!” 하연은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며 간절히 소원을 빌었다. 상혁은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조용히 또 다른 소원을 빌었다. ‘언제나 우리 둘이 해마다, 해마다, 서로를 마주할 수 있기를.' “다 됐어요.” 하연이 조심스럽게 눈을 떴다. 그 눈빛에는 반짝이는 빛이 서려 있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서서히 손을 놓았다. 풍등은 하늘을 향해 천천히 날아올랐고, 점점 멀어지더니 마침내 한 점이 되어 사라졌다. “어떤 소원 빌었어?” 상혁이 손끝으로 하연의 귓불을 살짝 어루만지며 물었다. 하연은 장난기 어린 눈빛으로 깜빡이며 말했다. “소원은 말하면 이루어지지 않는대요.” “그래? 그럼, 네 소원이 꼭 이루어지길 바랄게.” 두 사람은 다시 눈을 마주쳤다. 상혁의 숨소리가 깊어졌다. 그는 하연의 턱을 살며시 잡고, 몸을 숙여 그녀의 입술을 맞췄다. 조심스러웠던 키스는 점점 더 깊어져 갔다. 하연은 숨이 가빠졌다. 상혁을 밀어보려 했지만, 오히려 더 깊이 끌어안겼다. 여자의 허리는 유연하게 휘어졌고, 상혁의 등은 팽팽한 활처럼 긴장됐다. 결국, 하연도 상혁의 목을 감싸 안고, 키스에 응답했다. 그러나 그 순간, 불청객 같은 전화벨 소리가 분위기를 깨뜨렸다. 하연은 화들짝 놀라며, 급하게 상혁을 밀어냈다. 그녀의 얼굴은 빨갛게 익은 사과처럼 새빨개졌다. “전화 울리는데요?” 하연의 목소리는 한층 낮아져 있었다. 묘하게 사람을 간지럽게 만드는 목소리였다. 상혁은
다른 곳에서 있던 조봉규가 소란이 일자마자 급히 뛰어 들어왔다. 그리고 빠른 걸음으로 송혜선에게 다가가며 다급히 말했다. “설날인데, 뭐하러 이렇게 화를 내...” 조봉규가 입을 여는 순간, 남준의 온몸이 싸늘하게 굳어졌다. 남준의 시선이 날카롭게 쏘아붙었고, 조봉규는 본능적으로 움찔하며 고개를 돌렸지만, 이내 애써 태연한 척하며 한 발 다가섰다. 송혜선의 팔을 조심스레 부축하며 낮은 목소리로 달랬다. “지금은 무엇보다도 건강이 우선입니다.” ‘건강?’남준은 손에 쥔 염주를 힘껏 움켜쥐었다. 힘이 들어간 손등에는 핏대가 서고, 눈빛은 살얼음처럼 차가웠다. 그리고 시선은 서로 닿아 있는 두 사람의 손목에 단단히 고정되었다. 입가에 엷은 조소가 떠올랐다. “조 선생님, 참으로 열정적인 분이시군요. 설날에도 근무 태세를 유지하시다니.” 조봉규는 눈치가 빠른 인물이었다. 당연히 그의 말 속에 담긴 조롱을 알아챘다. 그러나 겉으로는 한껏 공손한 태도를 유지하며 머리를 숙였다. “별말씀을요. 환자의 곁을 지키는 게 제 본분입니다.” 남준은 가만히 조봉규를 노려보다가, 짧고 날 선 경고를 던졌다. “그렇다면 본분에만 충실하시죠. 여긴 부씨 가문의 본가이니까.” 순간, 분위기가 얼어붙었다. “남준아!” 송혜선이 다급히 나섰다. 남준을 나무라는 말투였지만, 그 속에는 조봉규를 감싸려는 의도가 분명히 깔려 있었다. 남준의 눈빛은 더욱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그러나 송혜선은 오히려 기세를 올려 쏟아내듯 말했다. “네가 좀 더 나서서 잘했더라면, 부상혁한테 밀릴 일도 없었어! 내가 왜 조진숙한테 설날마다 굽신거려야 하냐고?” “지금, 어머니는 나를 원망하시는 겁니까?” 목소리가 한층 낮아졌다. 남준의 손에서 염주의 한 알이 ‘탁' 하고 부서졌다. “남준아! 지금 네가 무슨 짓을 한 거야?” 송혜선은 깜짝 놀라 소리쳤다. “염주는 영적인 기운이 깃든 물건이야. 함부로 부수면 불길한 일이 생길
부동건의 말은 송혜선을 전적인 신뢰를 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나중에 진실이 밝혀지면, 과연 부동건은 스스로를 어떻게 납득할까?’ ‘결국 속아서 살아온 날이 우스운 바보일 뿐...’ 조진숙은 아무 말 없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애틋한 사랑인데, 굳이 이럴 필요가 있을까?” 잠시 뜸을 들이던 그녀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이 서류들, 가져가.” “나 다른 뜻은 없어.” 부동건은 조진숙의 단호한 태도에 살짝 주춤했지만, 곧장 다시 설득을 시도했다. “네가 아직 날 원망하고 있다는 거 알아. 그동안... 혹시 네가...” “착각하지 마.” 조진숙은 부동건의 말을 끊었다. 더 이상 불필요한 감정 소모를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부동건은 한 발 더 다가섰다. “하지만 네가 이걸 받지 않는다면, 결국 날 아직도 원망하고 있다는 뜻 아니야?” 조진숙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 가슴 깊숙이 가라앉은 감정이 불쑥 떠오르는 듯했다. 그녀는 천천히 숨을 들이마시며 감정을 정리한 뒤, 담담한 목소리로 물었다. “당신... 정말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어?” 부동건은 말없이 서류를 정리하더니, 숙련된 손놀림으로 만년필을 열어 조진숙 앞에 내밀었다. 이것이 바로 자신의 대답이었다. “후회할 거였으면, 애초에 여기 오지도 않았어.” 이번엔 조진숙도 망설이지 않았다. 그녀는 펜을 들어, 서류 맨 아래에 단호한 필체로 자신의 이름을 남겼다. “부디 이 선택을 후회하는 날이 오지 않길 바라.” 부동건은 서류를 덮으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제야, 마음속에 짓눌려 있던 무언가가 비로소 내려앉는 듯했다. 그는 문득 나직이 말했다. “이제야... 후회한들, 이제 돌아갈 길도 없어.” 조진숙은 그 말에 가슴이 미세하게 흔들렸지만, 끝내 시선을 돌렸다. 담담한 표정 속에 모든 감정을 삼키며, 단 한마디만 남겼다. “이건... 다 정해진 운명이야.” ‘운명의 장난...’ ‘어쩔 수
“무슨 말씀인지 압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제 뜻대로 하게 해주십시오.” 부동건의 태도가 단호했다. 이를 지켜보던 부해철이 더 이상의 말은 의미가 없을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이미 네가 마음을 정했다면, 내가 더 이상 뭐라 할 수도 없지. 다만, 앞으로 그 여자를 내 앞에 데려오지는 마라. 네가 어떻게 살든 상관하지 않을 테니.” “그리고...” 부동건이 무슨 말을 더 하려 했지만, 부해철은 손을 휘저으며 등을 돌렸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라지는 뒷모습만이 남았다. ‘그렇게까지 반대할 줄은 몰랐네...’ 부동건은 묘한 기분으로 그 자리에 멈춰섰다. ...설날 온 나라가 한 해의 끝을 보내고, 가족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날. 예전에는 늘 조진숙과 상혁 모자가 함께 보내던 명절이었다. 그런데 올해는 조금 달랐다. 최씨 가문과 부씨 가문의 본가가 가까운 데다, 명절이 지나면 하연과 상혁의 약혼식이 있을 예정이었다.그래서 조진숙이 제안했고, 양가 가족들이 함께 부씨 가문에서 설날 저녁을 보내기로 했다. 그 덕분에 조진숙은 하루 종일 분주하게 준비에 매진했다. 그러나 제사가 끝나자마자 뜻밖의 손님이 찾아왔다. “진숙아, 새해 복 많이 받아.” 부동건이 어색한 미소를 띠며 낮은 자세로 인사를 건넸다. 평소 같았으면 송혜선과 함께 명절을 보낼 사람이, 오늘 이곳에 나타났다는 것 자체가 조진숙에게는 뜻밖이었다.그녀는 담담한 얼굴로 물었다. “여긴 웬일이죠?” “잠깐 들렀어, 당신한테 할 말도 있고 해서.” 조진숙은 그의 시선을 따라 문득 집안 분위기를 둘러보았다. 송혜선이 이곳에 들어온 이후, 부씨 가문 본가는 한 지붕 아래에서도 철저하게 북쪽과 남쪽으로 나뉘어 있었다.그 경계는 뚜렷했고, 불필요한 마주침은 없었다. 부동건이 송혜선과의 결혼을 공식적으로 선언한 이후, 둘은 한 번도 마주친 적이 없었다.만약 이번 일이 없었다면, 조진숙 역시 이미 오래전에 이 집을 떠났을 터였다. “들어와.
송혜선은 급히 분위기를 누그러뜨리려 했다. “아무래도 남준이가 좀 늦나 봐요. 조금만 더 기다려 보시는 게 어떨까요?” 부동건은 차갑게 코웃음을 치며 얼굴을 굳혔다. “말 같지도 안은 소리를 하고 있어! 오늘 같은 날에, 시간 개념도 없이 늑장을 부려.” 송혜선은 딱히 반박할 말이 없었다. 결국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 “남준이 오면 꼭 제가 주의를 줄게요.” “교육 똑바로 시켜. 좀 상혁이 하는 것에 반만큼이라도 신중했으면, 나도 그 녀석한테 좀더 잘해 줬을 거야.” ‘또 시작이군.’ 송혜선은 속이 쓰렸지만, 이를 악물고 참았다. “오면 오는 거고, 못 오면 어쩔 수 없지.” 부동건은 한 치의 여지도 주지 않고 단호하게 내뱉곤, 그대로 자리를 떠났다. “어서 남준이를 찾아와! 오늘 제사에 참석하지 못하면, 앞으로 나를 어머니라고 부를 생각은 하지도 마.” 송혜선의 가슴이 격하게 오르내렸다. 이 모든 노력들이 사소한 실수 하나로 무너질 순 없었다. ...부씨 가문은 제사에 있어서 철저한 예법을 중시했다. 다행히도 상혁은 부동건과 수년간 제사를 지내며 익숙해져 있었고, 모든 절차를 한 치의 오차 없이 진행했다. 부씨 가문의 어른들 역시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동건아, 상혁이가 있어서 네 대가 끊길 걱정은 없겠구나.” “앞으로 부씨 가문의 대업을 상혁이가 이어간다면, 우리 늙은이들도 한시름 덜겠어.” 부동건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야 물론이죠. 상혁이는 부씨 가문의 기둥이 될 인재입니다.” 상혁은 겸손한 태도로 말했다. “과찬이십니다. 앞으로도 많이 지도해 주십시오.” “어디 우리가 너희 젊은이들에게 배우는 게 더 많지!” “...”제사가 거의 끝나갈 무렵, 부남준이 느지막이 모습을 드러냈다. 부동건은 남준을 보자마자 눈빛이 차갑게 식었지만, 일단 감정을 누르고 말했다. “멍하니 서 있지 말고, 어서 와서 절부터 올려라.” 남준은 살짝 눈썹을
최씨 가문의 따뜻한 분위기와 달리, 부씨 가문의 본가는 싸늘하고 조용했다.예년과 다름없이, 설날이 되면 부동건은 집안의 남자들과 함께 조상들에게 제사를 올려야 했다. 올해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른 아침부터 송혜선은 핸드폰을 손에 쥐고 부남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연결음만 울릴 뿐, 남준은 끝내 받지 않았다. ‘이 녀석은 정말이지, 사람 속을 태우는 재주가 있다니까.’ 송혜선의 얼굴에 점점 초조한 기색이 드러났다. 옆에서 지켜보던 조봉규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때? 아직도 전화를 안 받아?” 송혜선은 짙어진 눈매로 핸드폰을 내려다보며 입술을 꾹 다물었다. “이 녀석, 정말 사람을 신경 쓰게 만드네! 도대체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거야...!” 조봉규는 부드러운 말투로 그녀를 달랬다. “혹시 무슨 사정이 있어서 늦는 걸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너무 걱정 마십시오. 남준이가 철없는 아이도 아니고.” ‘철없는 아이가 아닌데 이러겠어?’ 송혜선은 속으로 한숨을 삼키며, 최대한 감정을 눌렀다. “부씨 가문의 어른들이 원래부터 남준이를 못마땅해했는데. 이런 중요한 제사까지 빠지면, 분명 뒷말이 나올 거야.” 그녀의 말투에는 이미 불안과 초조함이 서려 있었다.그러는 사이, 두 사람이 작은 응접실에서 나와 복도를 따라 걸어갔다. 그때, 정면에서 다가오던 부동건과 마주쳤다. 부동건은 갓 외투를 정리하던 참이었다. 하지만 송혜선과 조봉규가 함께 있는 모습을 보자, 손동작이 살짝 느려지며 묘한 시선을 던졌다. “조 선생, 올해도 그렇게 혜선이 옆에 딱 붙어서 열심히 잘 보살펴 주세요.” 그 말 한마디에, 분위기가 묘하게 변했다.조봉규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한 발짝 뒤로 물러서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무슨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회장님, 제가 해야 할 일을 할 뿐입니다.” 부동건은 묘한 눈빛을 유지한 채, 덤덤히 말했다. “혜선이가 아이를 무사히 낳으면, 그에 대한 보상도 충분히 해줄 테니
두 집안이 한데 모여 북적이며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이런 귀한 순간을 마음껏 즐기며 보내다 보니, 어느덧 설날 전날이 되었다. 모두 함께 전용기를 타고 F국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설날이 밝았다. 올해는 오랜만에 최씨 가문 식구들이 한자리에 모인 데다, 기쁜 소식까지 겹친 한 해였다. 그 덕분인지 최동신은 평소보다 더욱 설 준비에 신경을 쓰고 있었다. 이른 아침부터 최씨 가문의 본가는 분주했다. 집사와 고용인들이 분주히 움직이며 저택 곳곳을 장식했다. 새빨간 복주머니와 길상 문양이 새겨진 장식들이 하나둘 자리 잡았고, 정원에는 화려한 등불이 걸리며 설 분위기가 한층 더 짙어졌다.하연이 계단을 내려오자, 기다렸다는 듯 최하성이 환한 얼굴로 다가왔다. “하연아, 새해 복 많이 받아라.” 그러면서 두툼한 세뱃돈 봉투를 그녀에게 내밀었다. 하연은 두 눈을 반짝이며 얼른 봉투를 받았다. “와! 이렇게 두꺼워요? 하성 오빠 최고!” 그때, 계단 위에서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도 있다.” 최하경이었다. 그 역시 두툼한 세뱃돈 봉투를 들고 내려왔다. “작년, 재작년 다 해외에 있어서 못 챙겨줬잖아. 그래서 올해 한꺼번에 더 두둑이 넣었다.” “와! 이건 더 두껍잖아요! 이러다 손목 나가겠어요!” 하연은 연달아 두 개의 두툼한 봉투를 받아 들고, 각각 한쪽 팔을 오빠들에게 걸었다. “오빠들 있어서 진짜 좋아요!” 최하성, 최하경 둘 다 서로를 바라보며 우애가 넘치는 미소를 지었다. 그때, 문이 열렸다. 그리고 최하민과 예아름이 나란히 들어왔다. 추운 바깥 공기를 뚫고 들어오자마자, 하민은 아름의 목에서 목도리를 부드럽게 풀어주었다. 그는 안쪽에서 떠들썩하게 웃고 있는 세 남매를 보고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우리 집이 이렇게 활기찬 게 얼마 만이에요!” 아름도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 “그러게요. 앞으로 더 행복한 일만 가득할 거예요.” 하민은 아내의 허리를 가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