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항으로 데려다주세요.” 하연은 눈을 감고 차창에 기대어 감정을 가라앉혔다. 한창명은 다소 놀란 듯 물었다. “최하연 씨, 비행기에서 내린 지 두 시간도 안 됐는데, B시에서 F국까지는 비행시간만 6시간이에요. 몸이 괜찮겠어요?” 그의 말 속에서 걱정이 묻어나는 것을 느낀 하연은 애써 차분하게 대답했다. “우리 업계는 출장에 자주 나가잖아요. 10시간 넘게 비행하는 일도 흔한 일이에요. 한 검사장님,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하지만 지금은 최하연 씨의 얼굴이 너무 창백해요. 일단 쉬고 가는 게 어떻겠어요?” 한창명은 그녀의 의견을 묻지 않고 곧바로 기사에게 경로를 변경하라고 지시했다. 하연은 반박할 기운이 없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손이현의 정체가 드러난 이상, 각지에 속속들이 소식이 전해질 것이 분명했다. 그때쯤이면 언론들이 기사를 쏟아내기 시작할 터였다. 한창명은 하연을 자기 집으로 데려갔다. 그곳은 공직에서 받은 집으로, 2층짜리 복층 구조에 독립된 정원이 딸린 집이었다. 출입구에는 경비가 상주하고 있었다. 그는 직접 하연을 부축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가사 도우미에게 하연을 부축하게 했다. “여긴 손님방이에요. 여기서 잠시 쉬도록 해요. 필요한 게 있으면 제 비서에게 말하면 돼요.” 이 집은 사각형 구조에 붉은 나무 가구들로 가득했으며, 생활의 흔적은 거의 없었다. 하연은 문가에 기대어 있다가 그 모습을 보고 웃음을 터뜨렸다. 한창명은 그녀의 웃음을 오해한 듯 잠시 미간을 찌푸렸다.“최하연 씨의 집에 비하면 여긴 확실히 초라하죠. 호텔로 옮겨 드릴까요?”하연의 마음이 한결 나아졌다.“그렇다면 최고층 스위트룸에서 묵고 싶어요. 가장 좋은 걸로, 하룻밤에 몇천만 원짜리로요.”“그건 제 몇 달 치 월급이에요.”한창명은 솔직하게 답했다.“최하연 씨, 저는 감당할 수 없어요.”하연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농담이었어요. 그리고 한 검사장님, 이젠 저한테 말을 편하게 하셔도 돼요. 그냥 ‘하연’
F국, DL그룹 임원회의. “B시는 이미 발칵 뒤집혔습니다. 한명준 씨가 아직 살아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경찰서장님이신 나호중 씨께서는 그 사실을 알고도 보고하지 않은 것 때문에 윗선에게 크게 혼이 나셨습니다.” 넓고 밝은 사무실에서, 부상혁은 원신민에게 등을 돌린 채 테이블에서 책 한 권을 꺼냈다. 상혁은 전혀 놀라지 않았다. “왕씨 집안이 한명준을 그렇게 오랫동안 몰래 키워왔으니, 이번 생엔 다시 경찰로 돌아갈 일 없을 겁니다. 아마 앞으로는 상업계로 전향할 겁니다.” 원신민이 분석했다. 상혁은 이에 대해 아무런 의견을 표하지 않고, 원신민이 이어서 보고하는 이야기에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아, 맞다... 최 사장님이 B시로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이 일에 대해 최 사장님은...” 말끝을 흐리는 것이 때로는 가장 강력한 암시가 되기도 한다.상혁이 책장을 넘기던 손을 잠시 멈췄지만, 역시나 전혀 놀라지 않은 듯했다. “요 며칠 언론 앞에서 상심한 척하며, 최씨 가문 본가에 갇혀 집 밖으로 한 발짝도 나가지 않는 연극을 벌였지. 다 그날을 위해서였어.” 원신민은 잠시 멍해졌다가 응답하지 못하고 물었다. “왜요?” “그래야만 최 사장님의 한명준 씨가 방심하고 법정에 모습을 드러낼 테니까.” 상혁은 책을 덮고, 책상을 가볍게 두드리며 입가에 냉소와 자기 비웃음을 띠었다. “그 사람은 이미 다 알고 있었으면서도, 그 한 가닥 남은 감정을 이용한 거야.” 그 한 가닥 남은 감정, 과연 누구의 감정일까? 분위기가 묘하게 흐르자 원신민도 더는 묻지 않았다. “회의하자고 빨리 공지해.” 책을 쓰레기통에 던져 넣은 상혁의 눈빛에 서슬 퍼런 기운이 감돌았다. 원신민은 오늘 회의가 절대 쉽지 않을 것이라는 예감을 느꼈다. 그리고 그의 예감은 적중했다....하연은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오래 잠들었고, 눈을 떴을 때는 이미 해가 떠 있었다. 몽롱한 상태로 문을 열자, 가사도우미가 음식을 다 준
하지만 하연이 발목을 삔 횟수가 참 많았다. 그날 간담회에서 하연은 단지 상혁의 동정을 끌어내기 위해 작은 쇼를 하려고 했을 뿐인데, 진짜로 발목을 삐고 말았고, 정말 눈물까지 흘렸다. 최동신은 그 소식을 듣고 무척이나 걱정하며 소중한 손녀를 위해 유명한 의사들을 많이 알아봤다. 심지어 최동신은 지금도 하연이가 B시로 돌아왔다는 사실은 모르고, 최씨 가문 본가에서 손녀를 찾아 헤매고 있을 것이다. 그 사이 정예나는 하연의 방에서 겉치레로 행동하다가 최동신에게 간파당했고, 그 순간 최동신은 분노로 가득 찼다. “예나야, 솔직하게 말해라. 우리 하연이는 도대체 어디로 간 거냐?” 예나는 눈물을 참지 못하고 간신히 말했다. “하... 하연이는 외출해서 일을 보고 있어요.” “발목을 삐었는데, 운전기사도 경호원도 아주머니도 하나 없이 어떻게 나갔다는 거냐?” 예나는 최동신의 추궁을 이기지 못하고 온 동네에 울음소리를 퍼뜨렸다. 부씨 가문의 본가도 최씨 가문의 본가 근처에 있었고, 상혁은 마침 본가로 가는 길목에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귀를 찢는 듯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조진숙도 차 안에 타고 있었지만,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고 한마디 했다. “하연이 아니야? 대체 무슨 일이야? 성인이 다 된 아이한테 체벌이라도 하는 거야? 내려가서 한번 봐야겠다.” 차에서 내리려는 조진숙의 손을 상혁이 막았다. “어렸을 때부터 하연이를 그렇게 함부로 대하셨죠.” 조진숙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이내 상황을 이해했다. 바로 그때, 뒤에서 경적이 울렸고, 차창이 내려가며 초조해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앞에 있는 차, 도대체 갈 생각 있어요, 없어요?” 하연의 목소리였다. 예나의 연락을 받은 하연은 서둘러 F국으로 돌아왔고, 이제 몇 걸음만 더 가면 집에 도착할 상황이었다. 그런데 앞차가 막고 있어 화가 난 하연은 발목만 삐지 않았다면 차에서 내려 걸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연이네!” 조진숙은 반가워하며 말했다. 상
병원 로비의 대형 스크린에는 이번 항공기 사고가 실시간으로 보도되고 있었다. 최하연은 세 명뿐인 생존자 중의 하나로 두 다리에 붕대를 감은 채 중환자실 병상 위에 누워 있었다.그때, 손에 들린 핸드폰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고객님께서 전화를 받을 수 없습니다. 다음에 다시 걸어주세요.”사고가 나던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남편 한서준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설마 그가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한 여객기 사고를 모를 일은 없었다. 사고 당시, 현장에는 승객들의 시신이 여기저기 아무렇게나 널려 있었다. 그녀는 사고의 충격과 죽음의 공포로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결혼한 지 3년이나 되었지만 남편은 그녀가 가장 필요로 하는 순간 연락이 되지 않았다.하연은 마음 한 켠이 시려 오는 것을 느꼈다.그때, 휴대폰 벨 소리가 들려왔다. 한참이나 멍하게 있던 그녀는 정신을 차리고 발신자를 확인했다. 할머니였다. 하연의 얼굴이 어두워졌다.“여보세요.”그녀가 잔뜩 쉰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전화 건너편에서 친절하면서도 연로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우리 하연이, 이 할미가 너 때문에 너무 놀라서 제 명에 못 죽겠구나. 어디 다친 데는 없고? 서준이가 옆에 같이 있지?]강영숙은 서준의 친할머니로 한씨 집안 사람들 중 유일하게 하연에게 관심을 갖는 분이었다. “서준 씨는...”머뭇거리는 그녀의 말에 강영숙이 무언가를 눈치 챈 듯했다. [이런 정신 나간 놈을 봤나! 비서로 또 아내로, 해외 출장간 남편 일을 다 봐주고 있는데 이렇게 큰 사고가 터졌는데도 코빼기도 안보여? 기다려봐라! 이 할미가 정신나간 그 녀석을 가만 두나!]그녀가 다시 물었다.[지금 어느 병원에 있어? 집사를 보낼 테니 기다리렴!]하연이 병원 주소를 알려주자 강영숙은 전화를 끊었다.그녀는 고개를 푹 숙인
하연은 두 달 전, 1주일 정도 출장 일정이 잡혀 있던 한서준의 일정보고서가 생각났다.핸드폰을 쥐고 있는 그녀의 손이 떨려왔다.‘그 때 생긴 아이인 거야?’그녀는 한서준의 숨겨진 아내로 오래 전부터 비밀계약을 맺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껏 남편의 스캔들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한서준 사장이 여자친구에게 참 각별한 것 같아... 저 여자는 전생에 나라를 구했나 봐. 보아하니 곧 공식발표가 날 것 같은데?”“그러게. 나도 아까 검색해 봤어. 네 생각엔 저 사람이 여자친구가 맞는 것 같아?”카트를 밀고 가던 젊은 간호사가 옆에 있는 간호사에게 핸드폰 속 사진을 보여주었다. 그러자 그녀가 깜짝 놀라며 말했다.“맞아, 맞아! 이 여자야! ST그룹 둘째 딸! 한서준이랑 너무 잘 어울리지 않아? 하늘이 맺어준 커플 같아!”두 사람은 호들갑을 떨며 반대편으로 걸어갔다.‘ST 그룹이라...’퇴원 수속을 마친 하연은 집사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가면서도 마음이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반쯤 열린 창문 아래 핸드폰 화면의 불빛이 창백한 하연의 얼굴을 비췄다. 수 없이 검색해 봤지만 한서준과 ST 그룹과의 연관성은 전혀 찾을 수 없었다.‘B시의 잘 나가는 두 명문가 집안이 이런 식으로 엮이다니 이상해.’서준의 본가에 도착하니 거실에 불이 켜져 있었다. 눈엣가시 같은 시누이 대신 서준의 할머니인 강영숙 여사가 지팡이에 몸을 의지한 채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우리 하연이 왔구나! 네가 복이 많아서 그 큰 사고 중에도 무사했구나. 너무 놀라서 하마터면 숨이 넘어갈 뻔했지 뭐냐.”“할머니, 전 괜찮아요.”하연은 올라가 쉬고 싶은 마음이 컸지만 웃으며 말했다.“할머니, 사실 저 좀 피곤해요.”“그래, 그래. 얼른 올라가서 쉬어라. 서준이한테 연락해 놨으니까 곧 올 거다.” 하연은 몸을 숙이는 순간 심한 통증이 몰려와 얼굴이 일그러졌다.강영숙은 하연이 괴로워하는 모습의 이유가 서준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하연의 머릿속에 서준의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당신이랑 그 여자, 대체 언제부터 만난 거야?”하연이 겨우 몸을 추스르며 침대에 기대앉았다.서준은 그녀가 3년전 혼인신고를 할 때보다 훨씬 말랐다는 것을 알아챘다. 어찌나 야위었던지 바람이 불면 날아가버릴 것 같았다.“당신 내 뒷조사를 한 거야?”그의 안색이 변했다. “내가 그렇게 한가한 사람으로 보여요? 내가 입원했던 병원에서 내 두 눈으로 당신들 두 사람을 봤어요.”그녀의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지만 그 어느때보다 딱 부러지는 말투였다.순간, 하연은 심장이 찢기는 듯한 괴로움을 느꼈다.하지만 서준의 얼굴에는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했다.그는 하연이 사고가 난 것을 알면서도 걱정해하는 말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가 하는 말들을 들으며 혐오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부부로 살았던 3년이라는 시간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아.’ 며느리로서 일을 열심히 했지만 하는 일 마다 트집잡는 시어머니와 자신을 눈엣가시처럼 여기는 시누이에게 하연은 정성을 다했다. 집에서는 주부로 또 회사에서는 헌신적인 비서 역할을 도맡았다. 그녀는 서준의 할머니 강영숙 여사의 뜻에 따라 아들, 딸 잘 낳는 좋은 손자며느리가 되려고 노력했다.3년 동안 그만큼 했으면 강영숙 여사에게 가족으로서의 의리는 충분히 지킨 것이다. 하지만 그 결과는 어떠한가?3년간 하연은 서준의 몸에 손가락 하나도 댈 수가 없었다. 한 방을 쓰고 있었지만 침대는 따로 썼기 때문이었다. 하연은 밀려오는 통증을 참으며 차가운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그러다 무슨 용기가 났는지 소리를 내어 가볍게 웃었다.“당신 어머니는 내가 애도 못 낳으면서 결혼한 양심도 없는 여자라고 했죠. 그런데 지금 당신이 밖에서 다른 여자와 아이를 가진 걸 내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죠?”간신히 침대에 기대고 있는 그녀는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하지만 고개를 꼿꼿하게 쳐들고는 그의 옷깃을 잡았다.하지만 곧바로 굵은 그의 손에 잡히고 말았다.한서준은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혜경이는 내 세컨드
하연은 서준의 셔츠 단추를 하나씩 풀었다. 그리고 그의 복근을 따라 내려가며 입을 맞추었다. 오랫동안 감춰온 서준의 대한 갈망 탓인지 귀밑까지 붉어졌다.그녀는 손놀림을 멈추지 않은 채 쉰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어떻게 이 집의 작은 안주인이 되었는지 잊었냐고요? 어떻게 잊을 수 있겠어요. 제 임무는 당신의 아이를 낳는 거예요. 지금 나는 내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거고요.“어떻게 그런 말을?!”화를 내는 서준의 탄탄한 복근이 울룩불룩 움직였다.“방 안에 최음제를 좀 뿌렸어요. 조금만 참으면 곧 괜찮아질 거예요. 저는 제 임무를 위해 아이를 가지려는 것뿐이에요.”그녀는 더 대담하고 과감하게 행동했다. 전에는 한번도 보여준 적 없는 요염한 모습이었다.하연의 적극적인 도발에 그의 몸이 본능적으로 반응하기 시작했고 호흡도 거칠어졌다.그는 이것이 최음제 때문인 것을 알고는 이성을 되찾았다. 그리고는 하연의 거침없는 손을 꽉 움켜 잡았다.“최하연, 너 정말 역겨워.”서준의 말에 그녀의 끓어오르던 욕망이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하연은 눈에 눈물이 고인채로 마지막으로 물었다. “나를 안는 게 그렇게 구역질나요?”“그래!”서준은 그녀를 똑바로 쳐다보면서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그리고 그녀를 밀쳐냈다.더는 그녀와 한마디도 하고 싶지 않았다. 서준은 하연이 벗긴 옷을 집어 들고 다시 입기 시작했다.그는 단추도 잠그지 않은 채 성큼성큼 걸어 나가버렸다. 방문이 ‘쾅’하고 닫히면서 주위가 다시 조용해졌다.하연은 그가 나가자 긴장이 풀려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녀의 눈에는 서준을 원망하는 눈빛이 가득했다. 서준은 방을 나서며 생각했다.‘이 정도로 했으면 있던 마음도 없어지겠지...’...다음날 아침, 하연은 아직 성치 않은 다친 다리를 절뚝거리며 짐을 싼 여행가방을 끌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집안 살림을 돕는 가정부가 식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강영숙 여사는 새벽기도를 드리러 가느라 집을 비운 상태였다.“어머, 새언니! 죽다 살아난 지 얼마
이수애 여사는 하연이 전과는 완전히 다른 투로 말하는 것을 보고 도저히 믿기지가 않았다. 그녀는 커다란 사파이어가 박힌 반지를 낀 손가락으로 하연을 가리켰다.“너 지금 그게 무슨 태도야!? 방금 했던 말 다시 한번 해봐!”하지만 하연은 조금도 두려워하는 기색 없이 그녀를 똑바로 쳐다봤다.“민혜경이라는 여자가 집에 들어오면 그 여자한테 집안일을 시키세요. 저는 앞으로 하지 않을 거예요.” 하연은 앵두처럼 붉은 입술로 또박또박 말했다. 말을 하고 나니 속이 시원했다. 이 여사는 그녀의 말에 벌컥 화를 냈다.“너!”“엄마, 엄마!”서영이 흥분한 엄마의 팔을 붙잡고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새언니 화난 거 맞죠? 어젯밤에 오빠가...”그녀는 불난 집에 부채질이라도 하려는 듯 어젯밤 일을 꺼내려고 했다. 그 모습을 보니 하연의 화를 돋우려는 의도가 충분히 보였다.이 여사는 딸의 의도를 금방 알아채고 다시 차분해졌다. 그녀는 특유의 거들먹거리는 투로 말했다. “남편 하나 붙잡지 못하는 주제에 별 억지를 다 부리네. 감히 시어머니 탓을 해?”하연은 느릿느릿 짐을 끌고 나오다가 저택 입구에서 발걸음을 멈추었다.심장박동이 빨라지면서 머리가 쪼개질 듯 아팠다.그녀는 고개를 돌려 욕을 퍼붓고 싶은 마음을 꾹 누르며 차갑게 말했다.“지난 3년동안 아이가 없었던 게 다 저 때문이라고 하셨죠? 절 의심하기 전에 서준 씨에게 비뇨기과 진료를 받으라고 하는 편이 빠를 거예요. 그러면 임신이 안됐던 원인이 과연 누구 쪽에 있는지 알 수 있을 거예요.”“너, 니가 감히!”하연의 말에 이 여사와 서영 둘 다 깜짝 놀랐다. 이 여사는 머리 끝까지 화가 치밀었다.“최하연! 난 너랑 우리 서준이하고 꼭 이혼시키고 말 테니 두고 봐!”그동안 하연은 서준의 할머니 강영숙 여사와의 정을 생각해서 한씨 집안 사람들과 다툼을 피했다. 왠만해선 자기 의견을 내세우지 않고 원만하게 지내왔다.지금까지는 집안 사람들과 갈등이 생길까 봐 두려워하며 지냈지만 이제는 신경 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