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혁은 손에 쥔 펜을 꽉 쥐었다. 잠시 후 그는 차분하게 대답했다. “연인 관계는 끝났지만, 바깥에서는 제가 여전히 하연이의 네 번째 오빠예요. 앞으로 어떤 일이 생기더라도 꼭 하연이를 지킬 거예요.” 조진숙은 아들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바라보았다. 상혁이 하연을 아낀 것은 수년 동안 변함이 없었는데, 어째서 이렇게 갑자기 태도가 변한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는 쓴웃음을 지으며, 스스로 물을 한 잔 따라 마시면서 상혁을 향해 쏘아붙였다. “역시 남자들은 하나같이 다 똑같군. 네 아빠도 그랬고, 너도 그러니까. 마음이 변했다니, 밖에 다른 여자라도 생긴 거 아니야?” “어머니...” “역시 유전자는 속일 수 없군.” “어머니!!” 바로 그때, 사무실 문이 갑자기 열리며 부남준이 들어왔다. 그는 느긋한 자세로 한쪽에 기대며 말했다. “이모, 왜 그렇게 화가 나셨어요? 누구의 마음이 변했다는 겁니까?” 남준의 얼굴에는 피곤함이라고는 전혀 없었고, 오히려 자신만만해 보이며 서류를 말아서 들고 있는 모습에서 기세가 넘쳤다. 조진숙은 그런 남준을 보면서 눈살을 찌푸렸지만, 최대한 침착함을 유지하며 말했다. “글쎄다. 용의 자식은 용이 되고, 범의 자식은 범이 되는 법이지. 쥐의 자식은 결국 구멍을 파고!” 남준은 무슨 뜻인지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상혁의 책상 앞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형님, 복직 관련 서류입니다.” 상혁은 담담하게 서류를 받아 한 번 훑었다. 그 안에는 남준이 원래 맡았던 직위로 복직하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직위는 그대로였지만, 연봉이 대폭 줄어들었다. 사실 남준에게 돈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그룹이 혼란스러워 인력이 부족한 상태라 아버지께서 저를 불러들이신 거죠. 형님, 너무 깊이 생각하지 마세요.” 상혁은 여전히 침착했지만, 조진숙은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부동건의 사무실로 향했다. 상혁은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나
비록 언론이 약속을 지켜 사진과 기사를 유출하지는 않았지만, 간담회와 관련된 내용은 하연에 대한 언급 없이 흘러갔다.하지만 상류층 사이에서는 이미 이 소식이 꽤 널리 퍼져 있었다. 사람들은 모두 부상혁과 하연이 완전히 끝난 사이라는 이야기가 떠돌고 있었다.이 소식을 접했을 때, 서여은은 막 인터뷰를 마친 참이었다. 이번 인터뷰 상대는 이혼 후 자기 삶의 주도권을 찾게 된 상장사의 여자 대표였다. 인터뷰를 마친 두 사람은 카페에서 악수하였다.“오늘 정말 즐거운 대화였습니다. 이번 기사 기대하고 있을게요. 그때가 되면, 제 회사도 적극 구독하겠습니다.”여은은 고개를 끄덕이며 정중하게 답했다.“대표님께서는 정말 좋은 생각들을 가지고 계시네요. 저도 앞으로의 협력을 기대하고 있습니다.”여은이 서류를 정리하려던 순간, 옆자리에서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 “부상혁이 드디어 독신이 되었네. 이번에 부상혁이 결심을 내린 것 같아. 슬기야, 이제는 모두의 관심이 너에게 집중될 거야.” “왜 ‘드디어’라고 말하는 거야?” “누가 봐도 알잖아. 최하연은 심지어 간담회까지 따라갔지만, 상혁은 최하연을 전혀 신경 쓰지 않았어. 그걸로 다 설명되지 않아?” 슬기 맞은편에 앉아 있던 아름다운 여자가 웃으며 말했다. “도대체 최하연이 무슨 짓을 한 건지 모르겠어...”슬기는 잠시 망설이는 태도를 보였다. 그날 상혁이 하연을 안고 나가는 모습을 봤을 때, 슬기의 기분은 당연히 좋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굳이 그를 따라가지 않았다. 이럴 때 억지로 밀어붙이는 것은 통하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상대로, 잠시 후에 나온 상혁의 곁에는 하연이 없었다. 이것만으로도 많은 것을 설명할 수 있었다. “최하연이 무슨 일을 했든 상관없어. 이제부터는 내가 행동을 취할 차례야.” 슬기는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미소를 지었는데, 눈빛에는 야망이 가득했다. “슬기야!” 여은과 함께 있던 여자 대표가 슬기의 목소리를 듣고 놀라며 다가갔다.
“내일 한씨 가문 사건이 개정돼. 네 어머니와 관련된 일이니, 출석할지 말지는 네가 결정해.”왕아영은 한 손으로 홍연옥이 가져온 과일을 한 입 베어 물며 무심하게 말했다.이현은 주인의 자리에 앉아 끓는 물을 찻주전자에 부었다. 이 찻주전자는 하연이 한때 그에게 선물했던 것이지만, 그는 공개석상에서 절대 사용하지 않았다.“이모는 가실 거예요?”“난 왕씨 가문의 가주니까, 당연히 가야지.”“외할아버지는요?” “네 외할아버지는 연세가 많으셔서 더 이상의 충격을 견디기 힘드셔. 최하연이 이메일을 보냈을 때도 충격받아 뇌경색으로 입원하셨잖아. B시에 가서 재판에 참석하시라고 하지 말고, 그냥 두자.” 왕아영은 깊은 한숨을 쉬며 살짝 짜증 섞인 기색을 내비쳤다. 이현은 아무 말 없이 책상 위에 놓인 잡지를 흘낏 보았다. 잡지에는 F국에서 일어난 일들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었고, 하연이 얼마나 상심했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실려 있었다. 그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왕아영은 그 모습을 보고 힐끗 웃으며 말했다. “최하연이 왜 요즘은 우리에게 맞서지 않는지 궁금했는데, 알고 보니 남자에게 차였더군. 그렇게 거만하더니 결국 별수 없더라?” “그만하세요.” 이현은 낮은 목소리로 잔을 탁 내려놓았다. 왕아영은 깜짝 놀라며 곧바로 일어나 소리쳤다. “너, 나한테 무슨 태도야? 우리 집안이 그렇게 오랫동안 널 먹이고 입혀 줬는데, 우리가 너한테 부족하게 군 게 뭐 있니? 그리고 소울 칵테일인지 뭔지 하는 가게, 당장 문 닫아! 우리 왕씨 가문의 후계자가 사람들 앞에서 손님을 맞는다는 게 말이나 되니?” 이현은 꼼짝하지 않았다. “제가 경찰로 일할 때는 이모도 지금의 이런 모습이 아니었어요.” 왕아영은 공직자였던 ‘한명준’을 통해 공사와의 협력을 위한 뒷거래를 시도하려 했지만, 이현은 그때마다 단호히 거절했다. 이 이야기가 나오자, 왕아영은 더욱 화를 내며 말했다. “너, 그 경찰 얘기를 아직도 할 셈이야? 그때의 나는 그저
8월 21일, 월요일.B시 전체를 떠들썩하게 만든 한씨 가문 사건이 재판에 회부되었다. 왕진과 이수애는 각각 법정 양쪽에 앉아 재판받았다. 한서준은 과거의 원한에 연루되지 않아 이번 재판에 출석하지 않았다. 왕아영은 주요 관련자로서 법정 앞줄에 앉아 모든 과정을 지켜보고 있었다. 원래 그녀는 B시의 모든 언론사를 불러 이 사건을 증언하게 할 계획이었으나, 이현이 이를 거부했다. “언론사들이 없으면, 누가 네가 왕씨 가문의 사람인 걸 알겠어?” “이미 말했잖아요. 전 그런 더러운 방식은 원하지 않아요.” 이현의 얼굴은 어두웠다. “공개 여부는 제가 결정할 일입니다.” 재판은 이미 중반에 접어들었고, 상황을 봤을 때 이수애는 무기징역이 확실해 보였다. 하지만 왕씨 가문의 압력으로 인해 그녀에게 다른 형까지 선고하라는 요구도 있었다. 왕아영은 시계를 한 번 확인하고 비서에게 물었다. “이현이는 왜 아직이지?” “아마 길이 막혀서 그런 것 같습니다.” 재판이 진행될수록 증거와 증언들이 속속들이 나왔다. 그 가운데, 이수애는 재판장에서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소리쳤다. “판사님! 저 사람들은 거짓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건 저 사람들이 계획한 것입니다. 저는 사람을 죽이지 않았습니다... 왕명주를 죽인 건 제가 아닙니다!” 이수애의 정신 상태는 이미 매우 불안정해 보였다. 왕진은 옆에서 차분히 덧붙였다. “분명히 네가 한 짓이야. 네가 나를 매수해 왕명주 사모님에게 약을 먹였고, 사모님에게 남편의 외도를 알려 충격받아 조산하게 했잖아. 게다가 약물까지 사용하는 바람에 사모님은 아이를 낳자마자 이 세상을 떠났어! 너야말로 진짜 죄인이야!”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하고 있군! 그냥 조산한 거야! 나와는 상관없어. 네가 날 모함하고 있어!” “내가 죄인이면, 너도 공범이야. 이렇게 해서 네가 얻는 게 뭔데? 너도 유죄를 피할 수 없을 거야!” “내 딸은 이미 죽었어. 내가 살아서 뭘 더 바라겠어. 이제
판사는 얼굴을 굳히며 변호사의 질문을 단호하게 중단시켰다.“사건과 무관한 사람에 대해서는 더 이상 발언하지 마십시오.”변호사는 잠시 머뭇거리다 고개를 끄덕이며 다음 질문으로 넘어가려 했다.그 순간, 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저는 고인인 왕명주의 친아들입니다. 발언하게 해주십시오.”한창명은 고개를 돌려 그 목소리의 주인공을 바라보았다.그 사람은 손이현이었다.이현은 깔끔한 하얀 셔츠에 검은 바지를 입고 있었다. 외모는 특별히 두드러지지 않았지만, 그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은 단단하고 강직했다. 그것은 그가 오랜 시간 경찰로 일하며 몸에 익힌 기품이었다.순간, 한창명은 이현에게서 느꼈던 익숙함이 어디서 왔는지 깨달았다. 왕아영은 이현이 도착하자 긴장이 풀린 듯 훨씬 편안한 표정을 지었다.이현은 자신의 신분과 관련된 서류를 제출했다. 판사는 서류를 확인하고 깜짝 놀라며 입을 열었다.“당신이 한명준 씨 본인입니까? 나중에 손이현으로 개명했습니까?”이현은 당당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인정했다.이수애는 자리에 주저앉으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이현을 쳐다보았다. “그럴 리 없어! 난 한명준을 본 적이 있어! 너처럼 생기지 않았다고!” “마지막 임무 중에 차량 폭발 사고로 강에 추락해 얼굴 전체가 망가졌습니다. 이 대답이면 만족하시겠습니까?” 이현은 차가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의 섬뜩한 미소에 이수애는 온몸이 떨렸다. “한서준도 이 사실을 알았을 텐데, 왜 말하지 않았을까요?” 이수애는 겁에 질린 채 소리쳤다. “네가 내 목숨을 빼앗으러 온 거야... 너는 저승사자야...” 그녀는 비명을 질렀고, 교도관들이 그녀를 제지했다. “이 사건이 사실인지 조사하려면 상부에 문서를 제출하고 검토를 받아야 하니, 절차가 복잡할 겁니다. 저도 이해합니다. 그래서 모든 자료를 여기 준비해 두었습니다. 지금의 손이현이 바로 그때의 한명준이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습니다.”이현은 이미 모든 것을 철저히 정리해 두고 있었다.“한명준 씨
한창명은 이미 철저히 준비된 계획을 세우고 시간까지 정확히 맞춘 듯 보였다. 이현은 날카로운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자신이 함정에 빠진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한 검사장님이 이런 비도덕적인 짓을 할 줄은 몰랐군요. 소문과는 아주 다르네요.” “한 팀장님이 그 친구를 만난다면, 어쩌면 저에게 감사하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한창명은 장난기 어린 미소를 띠었고, 더는 머물지 않고 등을 돌려 떠났다. 그의 행동은 의미심장했고, 의도가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이현은 잠시 그 자리에 멈춰 서 있다가 결국 앞으로 걸어갔다. 그가 다가간 한창명의 차는 아주 오래된 것이었다. 한창명은 검소한 성격으로, 이 차를 오랫동안 몰았기에 차량에는 사용감이 여실히 남아 있었다. 이현은 창문을 두드렸지만, 차 안에서는 아무런 반응이 돌아오지 않았다. 약간 짜증이 난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다시 한번 창문을 두드렸다. 이번에는 창문이 서서히 내려갔다. “안녕하세요.” 이현은 차 안을 들여다보았다. 순간, 그의 몸이 굳어졌다. 차 안에 앉아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하연이었다. 하연은 특별히 꾸미지 않은 채, 단정하고 소박한 옷차림에 긴 머리를 앞으로 늘어뜨리고 있었다. 표정은 무표정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긴장된 침묵 속에서 대치했다. 이현의 가슴은 마치 거대한 파도에 휩쓸린 듯 흔들렸고, 그 자리에 서 있는 것조차 힘들었다. “하연 씨가 여기... B시에 있을 리가 없는데... 분명...” “지금쯤이면 제가 F국에 있어야 하고, 깨져버린 부상혁과의 관계에 대한 감정적 상처를 치유하며 쉬고 있어야 하는데... 그렇죠?” 하연은 담담하게 대답하며 차 문을 열었고, 이현에게 안으로 들어오라고 손짓했다. 둘의 숨결이 가까워지자, 이현은 그 가까운 거리만큼 더 긴장되었다. “가십 기사에 그렇게 쓰여 있었으니, 손 사장님이 그렇게 생각한 게 이상한 건 아니죠. 만약 한 팀장님이 제가 오늘 B시에 있는 걸 알았더라면, 아마
병원 로비의 대형 스크린에는 이번 항공기 사고가 실시간으로 보도되고 있었다. 최하연은 세 명뿐인 생존자 중의 하나로 두 다리에 붕대를 감은 채 중환자실 병상 위에 누워 있었다.그때, 손에 들린 핸드폰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고객님께서 전화를 받을 수 없습니다. 다음에 다시 걸어주세요.”사고가 나던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남편 한서준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설마 그가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한 여객기 사고를 모를 일은 없었다. 사고 당시, 현장에는 승객들의 시신이 여기저기 아무렇게나 널려 있었다. 그녀는 사고의 충격과 죽음의 공포로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결혼한 지 3년이나 되었지만 남편은 그녀가 가장 필요로 하는 순간 연락이 되지 않았다.하연은 마음 한 켠이 시려 오는 것을 느꼈다.그때, 휴대폰 벨 소리가 들려왔다. 한참이나 멍하게 있던 그녀는 정신을 차리고 발신자를 확인했다. 할머니였다. 하연의 얼굴이 어두워졌다.“여보세요.”그녀가 잔뜩 쉰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전화 건너편에서 친절하면서도 연로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우리 하연이, 이 할미가 너 때문에 너무 놀라서 제 명에 못 죽겠구나. 어디 다친 데는 없고? 서준이가 옆에 같이 있지?]강영숙은 서준의 친할머니로 한씨 집안 사람들 중 유일하게 하연에게 관심을 갖는 분이었다. “서준 씨는...”머뭇거리는 그녀의 말에 강영숙이 무언가를 눈치 챈 듯했다. [이런 정신 나간 놈을 봤나! 비서로 또 아내로, 해외 출장간 남편 일을 다 봐주고 있는데 이렇게 큰 사고가 터졌는데도 코빼기도 안보여? 기다려봐라! 이 할미가 정신나간 그 녀석을 가만 두나!]그녀가 다시 물었다.[지금 어느 병원에 있어? 집사를 보낼 테니 기다리렴!]하연이 병원 주소를 알려주자 강영숙은 전화를 끊었다.그녀는 고개를 푹 숙인
하연은 두 달 전, 1주일 정도 출장 일정이 잡혀 있던 한서준의 일정보고서가 생각났다.핸드폰을 쥐고 있는 그녀의 손이 떨려왔다.‘그 때 생긴 아이인 거야?’그녀는 한서준의 숨겨진 아내로 오래 전부터 비밀계약을 맺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껏 남편의 스캔들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한서준 사장이 여자친구에게 참 각별한 것 같아... 저 여자는 전생에 나라를 구했나 봐. 보아하니 곧 공식발표가 날 것 같은데?”“그러게. 나도 아까 검색해 봤어. 네 생각엔 저 사람이 여자친구가 맞는 것 같아?”카트를 밀고 가던 젊은 간호사가 옆에 있는 간호사에게 핸드폰 속 사진을 보여주었다. 그러자 그녀가 깜짝 놀라며 말했다.“맞아, 맞아! 이 여자야! ST그룹 둘째 딸! 한서준이랑 너무 잘 어울리지 않아? 하늘이 맺어준 커플 같아!”두 사람은 호들갑을 떨며 반대편으로 걸어갔다.‘ST 그룹이라...’퇴원 수속을 마친 하연은 집사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가면서도 마음이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반쯤 열린 창문 아래 핸드폰 화면의 불빛이 창백한 하연의 얼굴을 비췄다. 수 없이 검색해 봤지만 한서준과 ST 그룹과의 연관성은 전혀 찾을 수 없었다.‘B시의 잘 나가는 두 명문가 집안이 이런 식으로 엮이다니 이상해.’서준의 본가에 도착하니 거실에 불이 켜져 있었다. 눈엣가시 같은 시누이 대신 서준의 할머니인 강영숙 여사가 지팡이에 몸을 의지한 채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우리 하연이 왔구나! 네가 복이 많아서 그 큰 사고 중에도 무사했구나. 너무 놀라서 하마터면 숨이 넘어갈 뻔했지 뭐냐.”“할머니, 전 괜찮아요.”하연은 올라가 쉬고 싶은 마음이 컸지만 웃으며 말했다.“할머니, 사실 저 좀 피곤해요.”“그래, 그래. 얼른 올라가서 쉬어라. 서준이한테 연락해 놨으니까 곧 올 거다.” 하연은 몸을 숙이는 순간 심한 통증이 몰려와 얼굴이 일그러졌다.강영숙은 하연이 괴로워하는 모습의 이유가 서준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하연의 머릿속에 서준의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