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에너지 사업이 이제 막 시작된 터라 하연은 B시를 떠날 수 없었다. 일은 산더미처럼 쌓였고, 겨우 네다섯 시간 정도밖에 자지 못했다. 하지만 그 짧은 시간을 쪼개어 하연은 나운석을 만나러 갔다.“그 1000억이라는 자금은 개인 계좌에서 나온 거예요. 자금 출처는 금천파이낸스인데, 국제적으로 유명한 고리대금업체예요. 그 자금을 처리하는 사람은 유승환이라고 해요.”늦은 밤, 운석은 하연과 마주 앉아 한 자료를 내밀었다. 하연은 자료를 보지 않았다.“그 돈을 어디에 쓰려고 했던 거죠?”“부 대표님의 개인 자금 흐름이지, 빌린 돈은 아니에요. 부 대표님도 단순히 금천파이낸스의 도움을 받아 그 돈을 국내에서 합법적으로 전환하려고 했어요. 그런데 이를 두고 누군가가 문제를 만든 거예요.”1000억은 한 번에 이동시키기에 큰 금액이었다. 그래서 금천파이낸스가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었다.“그렇게 급하게 자금을 이동시킨 이유가 뭘까요? 그 돈을 어디에 쓰려고 했던 걸까요?”FL그룹과 관련된 것이라면 공적인 자금을 사용할 수 있었을 텐데, 이런 복잡한 절차를 거치고 리스크를 감수할 필요는 없었다. 그렇다면, 개인적인 용도로 사용하려고 했다는 건데, 그럼 1000억이라는 거액을 대체 어디에 쓴 걸까?운석도 며칠 동안 이 사건을 주시하고 있었지만, 이 정도만 알아낼 수 있었다. “더 구체적인 건, 이 사람에게 직접 물어봐야 할 것 같아요.”그는 유승환의 이름을 가리키며 말했다. 유승환은 다루기 힘든 인물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고리대금업체를 이렇게 크게 운영할 수 없었을 것이다. 업계에서는 그를 ‘맹수’라 부를 정도로 위험한 인물이었다.“알겠어요.”하연은 자리에서 일어나 떠나려 했다. 그때 운석이 그녀를 불러 세웠다.“며칠 후에 한씨 가문 사건 재판이 열릴 것인데, 출석할 생각이 있어요?”그는 한서준과 오랜 시간 친구 사이였기 때문에 친구를 향한 연민이 느껴졌다.“요즘 너무 바빠서요. 나중에 생각해 볼게요.”하연은 잠시 멈췄다가 빠르게 그의 사무실
순간 하연은 모든 것을 이해했다. 상혁이 그 1000억의 용도를 공개하지 않은 이유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을.상혁은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하연을 지키려 했던 것이다.“그 사람이 굳이 그렇게 할 필요는 없었어요. 2,000억은 저도 충분히 낼 수 있었다고요.”유승환은 그날 밤의 상황을 잘 알고 있었다.“그런 상황에서 정말 최 사장님이 개인 명의의 계좌를 사용할 수 있었을까요?” “그럼 왜 가명을 썼어요?”“부 대표님은 막 금융위원회 간담회를 끝낸 상태였고, 수많은 눈이 부 대표님을 지켜보고 있었잖아요. 부 대표님도 자신의 감정을 앞세울 수 없었던 거죠.”공적인 자리에서는 상혁이 이렇게 할 수 없었지만, 개인적인 일이라면 그도 자신의 감정을 앞세울 수 있는 일이었다.하지만 상혁의 국내 계좌에는 천억밖에 없었기 때문에, 하연을 돕기 위해 해외 자금을 긴급히 국내로 옮겨야 했고, 이를 위한 가장 빠른 방법이 금천파이낸스를 통한 것이었다.하연은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그래, 이게 바로 부상혁의 방식이었지... 항상 행동이 말을 앞섰고, 말은 하지 않았어.’하연이 말없이 있자, 유승환은 미소를 지으며 아침 식사를 건넸다.“좀 드시겠어요?”하연은 그를 쳐다보며 말했다.“제가 아까 말한 거, 그대로 할 거예요. 감사팀이 오후에 도착할 테니, 꼭 협조해 주세요.”유승환의 미소가 사라졌다.하연은 곧 금천파이낸스의 모든 계좌를 철저히 조사했고, 그 결과 금천파이낸스는 대대적인 정비와 함께 국제 IPO를 준비하게 되었다.사람들은 그제야 깨달았다. 금천파이낸스는 무슨 고리대금업체가 아니고, 그저 현대 사회의 인터넷 금융일 뿐이었다.상혁이 빌린 게 아니라, 금융사를 조사하고 있었던 것이라는 오해가 풀렸다.유승환은 마지막까지 저항했다.“우리 금천파이낸스 같은 작은 회사가 어떻게 상장할 수 있겠어요? 어떻게 감사까지 받겠어요...”하연은 속으로 웃으며 말했다.“정상적인 사업을 하세요. 그래야 유 사장님의 형제들이 안정된 삶을 살 수
“보아하니 이장님도 꽤 신중하신 것 같네요.” 하연은 책 몇 권을 들고 말하며, 책 속 필체를 훑어보았다. “손 선생님의 글씨체가 예전과 조금 다른 것 같아요.” 하연은 책 속에서 보이는 글씨가 과거에 우연히 보았던 이현의 필체와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예전 이현의 필체는 날카로움이 가득했지만, 지금은 부드럽고 힘이 없는 글씨였다. “그 녀석 말이야...” 왕대천은 순간 놀랐지만, 금세 냉정함을 찾으며 말했다. “아마 일을 시작한 이후로 글씨 쓰는 걸 게을리했을 거야. 요즘은 제대로 쓰지 않아서 그래.” 하연은 장난스럽게 물었다. “이장님, 솔직히 말씀해 주세요. 손 선생님은 학교 다닐 때 여자애들이 많이 따라다녔나요?” 왕대천은 웃으며 말했다. “그야 많았지. 심지어 집까지 찾아온 아이들도 있었는데, 이현은 아무도 좋아하지 않았어. 연애는 한 번도 안 했지.” “이장님이 어떻게 아세요? 몰래 연애했을 수도 있잖아요.” “그럴 리가 없어.” 왕대천은 확신에 차서 말했다. “그 녀석은 내가 키우다시피 했으니까 하나하나 다 알지. 착실하고 성실한 아이야. 학교 다닐 때 내가 연애는 못 하게 막았거든.” 왕대천은 말한 후에 뭔가 잘못된 걸 깨달은 듯 급히 덧붙였다. “하연아, 설마 너희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니? 이현이가 돌아오면 내가 잘 말해볼 테니, 너무 화내지 마라.” 왕대천은 하연을 정말로 자신의 미래 며느리로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 하연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인사하고 발걸음을 돌렸다. 문을 나서던 찰나, 마침 왕대천 부인과 마주쳤다. 왕대천 부인의 얼굴은 어딘가 어두워 보였고, 하연은 잠시 멈춰 섬으로써 그녀의 표정을 살폈다.하연은 무슨 일이 있는지 바로 눈치챘다. “무슨 안 좋은 일이 있었나요?” 왕대천 부인은 무의식적으로 품 안에 있는 보따리를 더욱 꽉 끌어안았다.“아니야, 하연이가 왔구나.” ...하연이 차를 몰고 마을을 떠날 때, 현장을 조사하러 오는 HD그룹의
차량이 멀어지자, 하연은 무릎 위에 놓인 책들을 한 장 한 장 넘겨보았다. “최 사장님, 집으로 돌아갈까요, 아니면 DS그룹으로 갈까요?” “공항으로 가주세요.” 운전기사가 의아한 듯 백미러를 보았지만, 하연은 평소와 다름없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F국으로 돌아갈 거예요.” ... 주씨 가문은 F국에서 악명 높은 까다로운 집안으로 유명했다. 주원빈은 상공업으로 가문을 일으켰고, 수많은 술자리에서 성공의 발판을 마련해 오늘날의 이 위치까지 올라왔다. 지금, 주원빈은 그 술자리 문화를 더욱 발전시켜 전성기를 누리고 있었다. 주씨 가문과 사업을 논하고 싶다? 좋다, 먼저 술부터 마셔라!... 한편, 부상혁은 이틀째 주씨 가문의 본가에서 머물고 있었다. 하연이 금천파이낸스의 명예를 회복시켜 상혁의 부담을 크게 덜어주었지만, 힘센 사업가들 사이의 협상과 입장 표명은 여전히 그의 몫이었다.지금 상혁은 미친 듯이 술을 들이켜고 있었다. 마치 술에 살고 술에 죽겠다는 결심이라도 한 듯, 누구의 술잔이든 마다하지 않고 과감하게 취해갔다.심지어 주슬기도 상혁의 이상함을 눈치챘다. 소란스러운 술자리였지만, 그녀는 상혁의 곁에 앉아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걱정 있어요?” 상혁은 셔츠의 단추를 몇 개 풀고, 목덜미가 붉게 달아오른 채로, 핏줄이 드러난 손으로 잔을 돌리고 있었다. 그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고, 많이 마셨지만 정신은 여전히 맑았다. “우리 아버지는 당신을 곤란하게 하지 않았어요. 오늘 여기에 있는 명문가 가족분들도 당신을 곤란하게 하지 않을 거예요. 당신의 능력은 모두 인정하고 있으니까, 무너질까 두려워하지 않아도 돼요.” 슬기는 상혁이 여전히 1000억에 관한 일을 마음에 두고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상혁은 여전히 말이 없었고, 슬기는 약간 당황한 듯 상혁의 옆에 있던 외투를 집어 들었다. “비서는 어디에 있어요? 왜 안 보이죠? 제가 부축할게요...” 슬기의 손이 상혁의 몸에 닿는 순간, 갑
“그럼 제가 마실게요.” 하민이 응답하지 않자, 상혁은 바로 술잔을 들어 올려 단숨에 들이켰다. 독한 술이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자, 가슴이 뜨거워졌다. “좋은 술이군요.” 하민은 술자리 문화를 추구하지 않았고, 그가 굳이 술을 마셔야 할 이유도 없었다. 그는 이런 자리에서 타협할 생각은 더더욱 없어서 직설적으로 말했다. “네가 스스로를 망치는 건 상관없어. 하지만 우리 하연이를 슬프게 한다면, 나는 절대 가만히 있지 않을 거야. 이 자리에 남을지, 나랑 갈지 빨리 선택해.” 하연의 이름이 언급되자, 멈칫하던 상혁이 더욱 빠르게 술을 따랐다.“슬프게 한다고요? 하연이가 정말 아직도 저 때문에 슬퍼할까요...” 주변 사람들은 그제야 하민이 이곳에 온 이유가 최하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주원빈의 얼굴이 단단히 굳어졌다.“최 대표님, 최씨 가문은 우리 집안을 대체 뭐로 보는 겁니까? 우리를 최씨 가문의 놀이 도구로 생각하는 겁니까? 우리 슬기도 명문가에서 제대로 교육받으며 바르게 자란 딸입니다. 그런데 이런 식의 행동은 해도 해도 너무한 거 아닙니까?” 주슬기가 부상혁을 오래도록 좋아해 왔다는 사실은 F국의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 하민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 “우리 동생의 전화가 아니었다면, 오늘 저도 여기 오지 않았을 겁니다.” 하민이 직접 나선 것은 오로지 하연의 요청 때문이었다는 것을 분명히 드러낸 말이었다. 실은 이것 자체가 상혁에게는 일종의 타협이자 약간의 양보였다. 그러나 상혁의 귀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하연이 다른 사람을 통해 행동하고 있는 것처럼 들렸다. 상혁은 또 술 한 잔을 들이켜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형님, 먼저 돌아가세요. DL그룹과 ZT그룹 간의 일은 제가 여기 남아서 처리해야 하니까요.”그의 말은 단호했지만, 주씨 가문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는 남겨둔 것이었다. 하민의 얼굴은 서서히 어두워져 갔다. 주원빈이 다시 한번 술잔을 들며 권하려는 낌새를 보이자, 하민이 갑작스럽게 테이블을 세
“만약 과거를 내려놓았다면, 나를 ‘형님’이 아닌‘하민’이라고 불러야겠지.” ‘형님’이라는 호칭은 상혁이 하연을 따라서 부르기 시작한 것이었다.상혁은 술에 취하지 않았고, 적어도 80%는 맨정신이었다. 그는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하연이가 그러더군요, 이제 그만하자고요... 저는 강요할 수도 없어요.”그 말은 상혁의 마음을 깊숙이 파고들며 아프게 했다.“내가 아는 부상혁은 이렇게 쉽게 포기할 사람이 아니야.”“일에 관해서는 포기하지 않죠. 삶에 관해서도 그렇고요. 하지만 사랑에서는요? 오랜 시간 버텨봤지만, 특별한 감정을 받지 못하는 상황이에요. 형님이라면 계속 버틸 수 있겠어요?”상혁의 눈빛은 진지했다. 연기가 그의 눈과 이마를 가리며 흐릿하게 번져갔다.그는 스스로 절대적인 사랑과 안정감을 준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날 사찰에서 하연과 이현이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을 보고서야 깨달았다. 어떤 일들은 강요로 해결되지 않으며, 혼자만의 감정으로는 절대 진전이 생기지 않는다는 사실을.하민은 눈살을 찌푸리며 상혁을 바라보았다. 상혁은 눈을 감으며 계속 말했다. “저도 지칠 때가 있어요.” 하민은 문득 조용히 물었다.“진숙 이모는 요즘 어떻게 지내셔? 여전히 하연이의 안부를 자주 물으셔?”최하민은 상혁 옆에 앉아 있었다. 더 이상 최고 권위자의 고집스러운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다정하고 친숙한 한 사람의 모습이었다.하민의 부모님은 일찍 세상을 떠났다. 남매는 부동건과 조진숙의 따스한 보살핌 아래에서 자랐다. 조진숙은 특히 하연에게 각별한 애정을 쏟았다.“진숙 이모는 늘 말씀하셨지. ‘하연이는 여자아이니까 아무리 뛰어나도 쉽지 않다’고. 나는 진숙 이모의 말씀이 맞다고 생각해. 우리가 아무리 하연이를 아끼고 사랑해도, 부모가 주는 사랑과는 다를 테니까.” 하민은 잠시 말을 멈추고 생각에 잠겼다. “상혁아, 너도 잘 알겠지만, 하연이는 자립심이 강하고 고집이 세. 하나면 하나, 둘이면 둘이야. 사랑에서도 그렇고. 누군가가
밤이 깊었다. 실의에 빠진 하연은 차 뒤에 몸을 숨긴 채, 하민에게 고개를 저으며 말없이 입을 다물라는 신호를 보냈다....다음 날 아침 8시, DL그룹의 회의 시간이 되었다. “고경수에 대한 조사는 이미 끝났고, 이제 사법 절차에 들어갈 것입니다. 관련된 인물들도 모두 법의 심판을 받았고요.” 부상혁은 회의의 주석 자리에 앉아, DL그룹의 상황을 간략히 요약한 뒤 참석자들을 향해 물었다. “의문이 있으십니까?” 부남준은 이번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건강상의 문제’였다. 이사회의 이사들은 의견이 있건 없건 침묵을 지켰다. 부동건은 회의실의 가장 끝자리에 앉아 이 광경을 주의 깊게 지켜보고 있었다. 비서실 수석 비서인 원신민은 즉시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다음 안건으로 넘어가겠습니다.” PPT 화면이 켜지며 커다란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DL그룹 향후 5년 전략 계획] 아주 중요한 주제인 만큼, 상혁은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기본적인 내용을 두 시간에 걸쳐 설명했다. 발표가 끝난 후, 물을 한 잔 마신 그는 한 손으로 테이블에 기대며 말했다. “질문 사항 있으십니까?” 오른쪽에 앉아 있던 동남아시아 지사장인 정규인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렇게 상세한 일정과 계획이라니, DL그룹을 세계 1위로 만들겠다는 건가요? 부 대표님, 몸은 괜찮으십니까?” 겉으로는 칭찬 같았으나, 그 속엔 조롱이 담겨 있었다. 상혁은 아직 공식적인 대표 자리에 오른 것이 아니었다. 임시로 관리하고 있을 뿐, 정식 직함도 없는 상태였다. 그런데도 정규인은 상혁을 ‘부 대표님’이라 불렀다. 상혁은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받아쳤다. “아버지께서 제게 이런 중요한 자리를 맡겨주셨으니, 저 또한 그 기대에 부응하며 이 자리를 지켜내야 합니다.” “금천파이낸스의 논란은 해결됐습니까?” 정규인은 일부러 질문을 던졌다. “정 사장님, 아직 모르셨나 보네요. 금천파이낸스는 이미 국제 IPO에 상장됐습니다.
부남준은 운성시 입찰에서 실패하고 성과 없이 돌아왔다. 그것만으로도 이미 큰 실책이었는데, 돌아오자마자 고경수 사건의 여파까지 맞닥뜨리게 되었다. 최소 1년 반 동안은 원래 자리로 돌아오는 것이 불가능해 보였다.비록 남준이 그 사건과 직접적인 연관은 없었지만, 부패와 뇌물 사건에 얽힌 이상, 부동건의 의심하는 성향을 고려하면 그가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는 것은 불가능했다.부상혁이 둔 이 한 수는 일거양득이었다. “네 엄마도 여전히 네가 DL그룹에 야망이 없다고 생각하시지. 하지만 네 엄마가 널 잘못 본 거야.” 부동건은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어젯밤 하민이가 주씨 가문 본가에서 소란을 피운 모양이더군. 너와 관련된 일이라던데, 무슨 상황이야?” 이미 이렇게 물어본 것만 봐도 주원빈이 부동건에게 모든 것을 보고한 듯했다. 상혁은 대답하고 싶지 않았다. “이미 다 아시지 않습니까?” 부동건은 목소리를 누그러뜨리며 말했다. “주씨 가문의 장녀가 너에게 특별한 감정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군. 하연이와의 관계를 끊는 게 나을 거야. 너희는 멀리 떨어져 있어, DL그룹에도 큰 영향을 미칠 수 있어.” 부동건은 잠시 말을 멈추고 나서 이어서 말했다. “처음에 그 사건만 아니었다면, 네가 DL그룹의 대표 자리에서 물러날 일을 없었을 텐데 말이지.” 상혁은 부동건의 말을 들었지만, 아무런 감정도 드러내지 않았고,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관계를 끊는 게 나을 거야’라는 말에 상혁의 심장은 한 번 찔린 듯한 고통을 느꼈다. “최씨 가문 쪽은 내가 직접 가서 사과하면 될 일이니까...” ...상혁이 사무실을 나서자, 문 앞에서 기다리던 원신민이 조용히 말했다.“황 비서님이 대표님을 뵙고 싶어 하십니다.”상혁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물었다.“원 비서는 뭐라고 했지?”“대표님께서는 지금 아주 바쁘시고, 앞으로도 계속 바쁘실 거라고 전했습니다.”원신민은 업계에서 유명한 비서로, 사람의 눈치를 잘 살피는 사람이었다
생각에 잠겨 있던 찰나, 정문 쪽에서 웅성거림이 들려왔다. 부동건이 고개를 돌리자, 최하연이 부상혁의 팔을 자연스럽게 끼고 등장하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 순간, 많은 이들의 시선이 두 사람에게 쏠렸다. 잘생긴 남자와 우아한 여자의 조합. 누가 봐도 완벽한 한 쌍이었다. ‘딱 봐도 좋은 그림이야. 저 둘은 그냥 서 있기만 해도 눈길을 끌어...’ “회장님, 부상혁 대표님은 정말 복도 많으십니다. 최씨 가문의 따님과 이렇게 잘 어울리는 커플이 어디 또 있겠습니까?” 누군가의 말에 부동건의 표정이 확 풀렸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미묘하던 분위기가 사라지고, 부동건의 얼굴에는 흐뭇한 미소가 피어났다. 부동건은 고개를 끄덕이며 두 사람을 향해 시선을 보냈다. “젊은 사람들이 서로 마음이 맞아 좋아하는 걸, 우리 어른들은 그저 기쁜 마음으로 축하해줘야 하는 일일 뿐이지요.” “게다가 상대가 최씨 가문의 따님이라니, 정말 금상첨화가 아닙니까.” 부동건은 더없이 만족스러웠다. ‘역시 상혁이다. 내 아들이라면 이 정도는 돼야지.’ 상혁은 오늘 이 자리에서 당당히 아버지의 체면을 세워주고 있었다. 한편, 송혜선도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방금 전까지 얼굴에 띄웠던 미소는 점점 사라져 갔고, 그녀의 시선은 어느새 하연에게 향했다. 오늘의 하연은, 나무나 예쁘고... 아니, 그냥 눈이 부실 만큼 찬란했다. 그리고 또렷한 이목구비에 윤기 흐르는 머릿결, 화사하게 피어난 얼굴빛까지. 하연의 행복함이 전신에서 흘러나오는 듯했다. 송혜선의 눈빛이 서서히 차가워졌다. ‘정다영... 그년, 나를 속였어.’ 그동안 하연 쪽에서 뭔가 반응이 있을 줄 알고 기다려 왔다. 하지만 소식은커녕, 정다영조차 자취를 감췄다. ‘다영이 걔가 하연이에게 약 먹이는 계획이 분명 실패한 거야. 그렇지 않고 선 지금 저렇게 멀쩡한 얼굴로 서 있을 수는 없어.’ 이대로 배가 불러오면, 섣불리 손도 쓸 수 없게 된다. ‘
이 질문에 송혜선은 눈을 반짝이며 부동건을 바라봤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이젠 나를 당당히 소개해 줄 때가 됐겠지.’ 오늘 이 자리에서, 그녀는 부동건의 정식 아내로서 인정받기를 바라고 있었다. “회장님, 말씀 좀 해보세요?” 조금은 성급한 목소리로 말을 꺼내자, 주변의 시선도 하나둘 송혜선과 부동건을 향했다. 모두 속으로는 뻔히 알고 있었다. 부동건이 과연 예전 애인을 진짜로 정실로 앉혔는지,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 했다. 부동건은 미소를 지었다. 그는 숨기거나 피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담백하게 말했다. “오 회장님, 이 사람은 제 딸의 어머니입니다.” 순간, 송혜선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딸의... 어머니?’ 손에 들고 있던 와인 잔이 살짝 흔들렸다. 금세 넘칠 듯한 와인, 애써 잡고 있는 감정. ‘지금... 이게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지?’ 그리고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억울함이 툭 하고 솟구쳤다. 심지어 손에 힘이 들어가며 하얗게 질린 손등이 떨렸다. 오병지는 단번에 눈치챘고, 싱긋 웃으며 더는 묻지 않았고, 대신 가볍게 말을 건넸다. “축하드립니다. 부 회장님, 여전히 복이 많으시네요.” 부동건은 공손하게 웃으며 송혜선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그 손길엔 무언의 위로가 담겨 있었다. “아닙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나중에 저와 이 사람의 결혼식엔 꼭 오셔서 축배 들어주세요.” 그 말에 송혜선의 눈이 번쩍 뜨였다. ‘결혼식...?’ 순간, 가슴이 쿵 하고 울렸다. 이어서 고개를 들며 수줍게 웃었다. “회장님...” 부동건은 말없이 그녀를 더 가까이 끌어안았다. 더 이상의 말은 없었지만, 그 행동으로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주변의 사람들 시선이 바뀌었다. 예전에는 송혜선을 무시하거나 조롱하던 눈빛이, 지금은 선망과 부러움으로 가득했다. 결국, ‘부동건의 아내’라는 타이틀은 그 자체로 막대한 부와 권력을 상징하는 이름이었다.송혜선은 온
부지윤의 ‘한 달 잔치’는 그야말로 성대한 수준의 파티였다. 초대받은 인사들만 봐도, 그 위세가 느껴졌다. F국 재계의 실력자들, 정재계의 핵심 인물, 이름만 대면 아는 명문가 자제들이 대거 초청됐고, 심지어 부씨 가문 어른들에게도 한 사람도 빠짐없이 직접 청첩장을 보냈다. 이 정도면, 사실상 이 아이를 공식적으로 가문에 편입시키겠다는 의지나 다름없었다. 부동건이 이 아이에게 얼마나 애정을 집착하듯 쏟고 있는지, 이날 행사 하나로 증명되고 있었다. 모든 사람이 지켜보는 가운데, 부동건은 스스로의 체면과 명예를 걸고, 딸을 세상에 내보이고 있었다. ...잔치 당일, 연회장은 유난히 붐볐다. 샹들리에의 조명이 화사하게 반짝였고, 고급스러움이 풍겨 나는 악단의 선율이 분위기를 감싸고 있었다. 송혜선은 산후조리를 마친 직후였지만, 여전히 그만의 풍채와 여유를 잃지 않았다. 예전보다 조금 살이 오른 듯했지만, 그 덕에 오히려 분위기가 더 너그러워 보였다. 그녀가 행사장에 들어서자, 평소 자주 어울리던 재벌가 부인들이 앞다투어 다가왔다. “혜선씨는 진짜 복이 많은 사람이에요. 그 고생 끝에 드디어 볕뜰날이 왔네요.” “부 회장님이 이렇게까지 챙기시는 거 보니까, 이제 정말 한 자리 하시겠어요.” “정말 이러다 조만간 ‘겹경사’ 나는 거 아니예요? 우리라도 미리 축하해줘야 하는 거야?” 송혜선은 그 소리에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얄미울 정도로 여유롭게 미소 지었다. ‘역시 사람은 자리가 높아야 대접 받는 거야.’ “지윤이는 회장님의 첫 딸이잖아요. 그러니까 귀하지 않겠어요? 그리고 회장님이 우리 모녀를 절대 가볍게 보지 않으신다는 건, 여기 있는 분들도 느끼셨을 테고요.” 그 말에 다들 박수까지 치며 웃었다. “이제 우리도 호칭 바꿔야지, 사모님!” 누군가 먼저 그렇게 불렀고, 뒤이어 몇몇이 장난처럼 따라 불렀다. 송혜선은 그 말에 딱히 제지하지 않았다. 오히려 턱을 살짝 들며, 그 호칭이 제법 익숙
진윤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가, 마침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부남준은 법을 무시하고, 사람을 죽였어요. 부씨 가문이 이 일에 개입한다면... 여론은 가만있지 않을 겁니다. 감싸려 들면 들수록, 결국은 함께 나락으로 떨어지겠죠.” ‘이건 단순한 사건이 아니라, 가문의 존망이 걸린 문제야.’ 맞은편 소파에 앉은 상혁은 다리를 꼬고, 한쪽 손으로 턱을 괸 채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남자의 눈빛엔 어떤 감정도 떠오르지 않았다. 마치 세속의 먼지 따윈 전혀 묻지 않은 사람처럼. 진윤의 말이 끝났지만, 상혁의 표정엔 미동 하나 없었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 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부씨 가문은 항상 법의 테두리 안에서 움직여왔습니다. 그건 변하지 않습니다, 여사님.” 그는 손짓으로 테이블 위를 가리켰다. 거기엔 작은 검은색 USB 하나가 놓여 있었다. “이 안에... 고나희 씨가 남긴 게 있습니다. 여사님께 드리라고 하더군요.” 순간, 진윤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숨이 턱 막히는 듯한 표정으로, USB를 바라봤다. “지금... 뭐라고 하셨죠?” 그녀의 목소리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나희가... 뭔가를 남겼다고...?’ 사고는 너무도 갑작스러웠다. 딸의 마지막을 함께할 시간조차 없이, 그녀는 세상을 떠났고, 어떤 유언도, 한마디 말도 남기지 못한 줄 알았다. “나희... 그 애가... 무슨 말을 남겼다는 거예요...” 진윤은 입을 틀어막았다. 눈물은 이미 참을 수 없다는 듯 쏟아지려 하고 있었다. 상혁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쌌다. “사람이 떠난 건 바꿀 수 없습니다. 하지만 남겨진 마음은, 누군가가 반드시 전해야죠.” 그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무거운 공기를 뒤로한 채, 조용히 방을 나섰다. 잠시 후.룸 안에서 낮고, 억눌렀던 울음이 터져 나왔다. “나희야...” 진윤은 USB를 손에 쥐고, 세상이 무너진 듯한 표정으로 울고 있
진윤은 송혜선이 내민 공백 수표를 내려다보며 손끝까지 떨렸다. 종이 한 장. 하지만 그 안에 담긴 의미는, 그녀의 심장을 조용히 갉아먹었다. ‘돈이란 게... 사람을 어디까지 비참하게 만들 수 있는 건지.’ 그녀는 허탈하게 웃었다. “돈, 참 좋은 거죠. 수많은 집이 그거 하나 때문에 무너지고, 사람 목숨도 스스럼없이 거래되고.” 그녀의 눈빛이 서서히 날카로워졌다. “고경수도 그랬어요. 결국 돈 때문에 스스로 감방에 들어갔고, 지금 당신은 그 돈으로 내 아이의 죽음을 사겠다는 거죠.” 진윤의 시선이 천천히 송혜선을 꿰뚫었다. “송 여사님의 눈엔... 돈이면 뭐든 다 해결돼요?” 송혜선은 대답하지 않았다. 진윤은 고개를 들었다. 쭉 뻗은 어깨, 흐트러지지 않은 눈빛으로 조용히 말했다. “근데, 저에게 그딴 건... 아무 의미 없어요.” 테이블 위의 수표는 그녀 눈엔 그저 휴짓조각에 불과한 쓰레기였다. ‘내 아이 이름 위에 적힌 숫자가 많을수록, 그 애는 더 억울해지는 거야.’ 그런 진윤의 단호함에, 송혜선도 이내 표정을 굳혔다. “정말 고집 세시네요, 여사님.” 그녀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조용히 진윤 쪽으로 다가섰다. 10센티미터도 채 되지 않는 거리에서, 송혜선은 하찮다는 듯이 고개를 숙여 내려다보며 진윤에게 시선을 내리꽂았다. “그 자존심, 얼마나 오래 버틸 수 있을지 볼까요?” 그 말투엔 이젠 더 이상 숨길 필요 없는 위협이 담겨 있었다. “당신에게는 지금, 아무것도 없어요. 남편은 감옥, 딸은... 하늘에 있어. 그런데도 이렇게 버티겠다고? 부씨 가문이 마음만 먹으면, 당신 같은 사람 하나쯤 사라지게 만드는 건 일도 아니에요.” 진윤은 순간 움찔했지만, 눈동자는 미동도 없이 그대로 송혜선을 바라봤다. 송혜선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마지막 일격을 날렸다. “참, 고경수 씨 말인데요. 그 사람, 아직 당신한테 마음 있더라. 감방에서 계속 당신 얘기만 했대요.”
“그저... 살아남기 위한 선택이었을 뿐이에요. 여사님. 같은 여자로서, 제 처지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이해해주시리라 믿어요.” 진윤은 피식, 코웃음을 쳤다. 커피잔을 천천히 들어올리더니, 마치 비웃기라도 하듯 천천히 한 모금 머금었다. “이해? 아니요. 전 그런 거 몰라요.” 단칼처럼 냉정하게 잘라버린 말이었다. 그 한 마디에 송혜선의 입술이 경직되며 굳어버렸다. ‘이런, 내 말이 통하지 않을 것 같아...’ 하지만 그녀는 물러서지 않았다. 송혜선은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진윤의 손등을 잡았다. “여사님... 따님 일에 대해서는, 정말...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진윤이 빠르게 손을 뿌리쳤다. 그리고 이내 터져나온 감정. “사과? 한 아이가 죽었는데, 고작 한 마디 사과로 끝내겠다고요?” “아니면... 송 여사님의 눈엔 제 딸 목숨이 그깟 아무렇게나 다뤄도 되는 값싼 거였어요?” 그 목소리는 카페 전체를 울릴 만큼 컸고, 송혜선은 순간 움찔하며 고개를 푹 숙였다. 진윤의 눈을 마주할 용기가 없었다. “죄송합니다... 여사님. 흥분하지 마세요... 결국... 이 모든 건 우리 부씨 집안이... 정말 죄송합니다.” 진윤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그 웃음 속에서, 참았던 눈물이 터졌다. 결국 끌어 오르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웃으면서 울었다. 그 모습은 너무 아프고, 너무 무너져 있었다. 진윤은 눈물을 닦으려 했지만, 멈추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본 송혜선은 주섬주섬 가방에서 티슈를 꺼내 조심스럽게 내밀었다. 하지만 진윤은 그것조차 거부했다. “됐어요. 그런 거, 필요 없으니까.” “송 여사님, 솔직히 말해봐요 오늘 여기서 만나자고 한 것도 당신 아들 부남준이 꼬투리 잡혀서, 지금 당장 날 만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니까 이렇게 만나자고 한 거잖아요.” “그게 아니라...” “아니긴 뭐가 아니야. 그 애 죽고, 그동안 단 한 번이라도 날
“닥쳐!!” 송혜선이 낮게 내뱉었다. “그 비밀, 평생 당신 뱃속에 묻어둬.”“아니면... 다시는 당신 딸 얼굴 못 볼 줄 알아.” 조봉규는 그제야 자신이 입을 잘못 놀렸다는 걸 깨달았다. 급히 손바닥으로 자기 입을 철썩 때리며 말했다. “화내지 마, 혜선아. 나도 그냥... 기분 좋아서, 그만...” “앞으로 이 집에서 그 얘긴 두 번 다시 꺼내지 않을게. 약속해.” 조봉규의 간절한 다짐에도, 송혜선은 날카로운 눈초리로 그를 한번 쏘아봤다. 곧이어, 목소리를 낮추며 화제를 돌렸다. “부동건, 딸한테 명분은 준다더니, 정작 혼인신고 얘긴 입도 안 뗐어. ‘이러다 또 마음 변하는 거 아니야?’” 그녀의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다. ‘안 돼. 남준이 일은 어떻게 해서라도 반드시 준비해야 해.’ 그 말엔 조봉규도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알아봤는데, 유가족 쪽에서 합의서만 받아낼 수 있으면, 그 사건도 다시 볼 여지가 있대.” 혜선의 눈이 번쩍 뜨였다. “진짜야?” “응. 듣자 하니까 고경수 와이프, 진윤... 아직 F국에 있다더라. 기회만 되면 한번 만나봐. 그쪽에서 합의서를 써주기만 하면, 다시 기회는 생길 거야.” “근데 지금 당신 산후조리 중이잖아. 몸이 먼저야. 너무 무리하지는 말고...” 하지만 혜선은 그럴 여유가 없었다. ‘남준이가 내 인생의 마지막 희망이야. 기회가 있다면... 어떤 수라도 써야 해.’ 며칠 후, 송혜선은 드디어 고경수의 아내 진윤과 연락이 닿았다. 하지만 의외로, 진윤은 단 한 마디 망설임 없이 만남을 받아들였다. 두 사람은 평일 오전, 한산한 분위기의 카페에서 만나기로 했다. 커피 향이 은은하게 퍼진 실내엔 손님이 드문드문 앉아 있었고, 송혜선은 긴 트렌치코트에 머리까지 스카프로 단단히 감싸고 있었다. 밖에서는 누구도 그녀를 쉽게 알아볼 수 없게끔. 카페 입구에 들어선 그녀는 안쪽을 빠르게 훑었다. 한눈에 알아봤다. 구석 창가에 앉은, 수척한 얼굴의
조봉규의 말은 하나하나 송혜선의 마음을 쳤다. “정 안 되면, 우리도 그냥 확 뒤엎어. 어차피 잃을 게 없는 사람들이잖아. 신발 신은 놈들이야 겁낼 게 많겠지만, 우린 맨발이야.”‘맞아... 지금이라도 안 붙잡으면, 우린 끝장이야.’송혜선의 눈빛이 점점 확고해졌다. 그렇게 마음을 굳힌 채로, 그녀는 곧장 부동건을 찾아갔다.하지만 부동건은 송혜선의 말에 귀를 기울일 틈조차 없었다. 부남준의 사건이 악화로 치닫고 있었다. 갓 들어온 정보에 따르면, 결정적 증거들이 줄줄이 쏟아지고 있었고, 경찰 쪽 수사도 속도를 내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건... 덮을 수 있는 일이 아니야. 법 앞에선 아무리 부동건이라도 무력하군.’무거운 책임감과 죄책감이 부동건의 어깨를 짓눌렀다. ‘자식 교육을 제대로 못한 죄, 그건 부모의 몫이야...’그저 무기력하게, 결과를 기다릴 수밖에 없는 상황. 송혜선의 말은 부동건의 귀에 닿지도 않았다.그는 오히려 조용히 갓 인큐베이터에서 나온 막내딸을 품에 안았다. 부드러운 솜털이 보일 정도로 작고 여린 얼굴. 손가락 하나만 잡혀도 녹아버릴 듯한 느낌이었다.‘이 아이는... 내 마지막 기적일지도 몰라.’부동건은 딸을 안고 있을 때만큼은 세상의 복잡한 모든 것이 잠시 잊히는 듯했다. 그리고 눈가가 부드러워졌다.“딸아, 네 엄마랑 진짜 많이 닮았네. 크면 예쁘겠다... 아주.”그는 미소를 머금으며 속삭였다.“지윤이라고 이름 지었어. 복 많은 아이라고 하더라. 부씨 가문 첫 딸, 제대로 키울 거야. 우리 지윤이는, 아빠의 제일 소중한 딸이 될 거야.”‘그래... 남준이는 못 지켜도, 이 아이만큼은...’부동건의 얼굴은 어느새 기쁨으로 가득했다.하지만 그 모습을 바라보는 송혜선의 속은 서늘했다.‘정작 내가 말하려던 건, 이게 아닌데...’그녀는 조용히 손을 뻗어 아이를 부동건의 품에서 안아올렸다.“조심해요, 아직 작아서... 그렇게 막 들면 안 돼요.”부동건은 걱정스러운 말투로 송혜선을 바라보며 말했다.“이
부동건의 얼굴빛이 어두워졌다. 밝은색으로 혈기가 도는가 싶더니 이내 새파랗게 질리더니, 순식간에 붉어졌다.‘이게 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가...’조진숙은 그런 부동건의 반응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차갑고 단호한 말투로 말을 던지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돌아섰다.“당신 입으로 한 말, 잊지 마.”철컥-곧이어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조진숙은 완전히 그의 시야에서 사라졌다.남겨진 부동건은 깊은숨을 내쉬었다.‘딱 한 발, 그 한 걸음이 이렇게까지 망가뜨릴 줄은 몰랐네...’하지만 그는 여전히 조진숙의 마지막 말이 담고 있던 진짜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냥 평소처럼, 그저 ‘조심하라는 경고’ 정도로 여긴 것이다.그 후 부동건은 지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형사 전문 변호사를 찾았고, 부남준의 사건을 맡겼다. 그것뿐, 그 이상의 움직임은 없었다.소식을 들은 송혜선은 더 이상 산후조리고 뭐고 할 틈이 없었다. 벌떡 몸을 일으키며 날카로운 눈빛으로 외쳤다.“남준이는 부동건 당신 아들이란 말이야. 그런데도 이 상황에서 이 사람이 저렇게 손 놓고 있는다고?”그녀에게 있어 부동건은 F국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재벌이었다. 사람 하나 죽었든, 법을 어겼든, 그 모든 걸 덮는 것쯤은 그에게 있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그 정도 힘도 못 쓰는 사람이었으면, 애초에 내가 그 옆에 왜 있었겠어?’그런데도 부동건은 변호사 하나 붙인 걸로 끝이라니. 송혜선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안 돼. 내가 직접 가서 말해야겠어.”그녀가 일어나려는 순간, 조봉규가 급히 다가와 그녀를 막아섰다. 그리고 조심스러운 어조로 송혜선을 다독였다.“혜선아, 지금은 당신 몸이 먼저야. 다른 건 잠시 내려놔.”하지만 송혜선은 남자의 손을 거칠게 뿌리쳤다.“남준이 내 아들이야. 내가 안 나서면 누가 나서? 그 애랑 나, 이 지경이 되도록 얼마나 참고 견뎠는지 몰라? 이제 와서 그냥 두라고?”송혜선은 황급히 신발을 신고, 나갈 채비를 했다. 그 옆에서 어쩔 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