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연은 깊은숨을 내쉬고 핸드폰을 연결하려던 순간, 갑자기 전화가 걸려 왔다. 발신지는 F국이었다. [하연아.] 최하민의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오자, 하연은 반사적으로 자세를 바로잡았다. “오빠, 무슨 일이에요?” [DL그룹의 올해 가장 큰 사업이 완공됐는데, 부동건 회장님께서 국제 최대 회계법인을 고용해서 공사를 정산 중이야. 그런데 2400억의 감액 금액 중 1400억이 현직 이사인 고경수와 관련 있다던데, 너도 들었어?] 하연은 며칠 동안 인터넷을 끊고 일에만 몰두하고 있었기에 전혀 몰랐다. 무엇보다 DL그룹과 관련된 뉴스는 애초에 신경 쓰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잠시 침묵을 지켰다. “그다음은요?” [DL그룹이 크게 흔들렸고, 부동건 회장님도 충격을 받으셨어. 상혁은 이미 긴급히 소집되어 DL그룹 이사회로 돌아갔어. 설마, 그 사실을 몰랐던 거야?] 이 스캔들은 전 세계적으로 큰 충격을 주었고, 그것은 하민의 주목을 끌 만했다.게다가 이 모든 것은 하연과 밀접하게 연관된 일이었다. 하지만 하연은 이 모든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부남준은요?” [그 녀석은 DL그룹에서 아직 발도 굳히지 못했으면서 새로운 영역을 확장하려고 했어. 그렇게 쉬울 줄 알았나 보더라.] 하민은 비웃듯 말했다. [운성시의 그 휴양지 사업은 아마 무기한 보류될 거야.] 하연은 곧장 상황을 이해했다. 즉, 상혁은 이미 F국으로 돌아갔고, B시에 있지 않았다. 스캔들 속에서 부동건은 다른 선택지가 없었고, 결국 상혁을 소환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곧 DL그룹이 상혁 없이는 버틸 수 없음을 전 세계에 알리는 셈이었다. 하연은 이야기를 듣던 중 무심코 물었다. “오빠, 이게 다 그 사람의 계획이었나요?” ‘그 사람’이 누구인지는 명확하게 말하지 않았지만, 하민은 그 의미를 바로 알아챘다. 잠시 핸드폰 너머에서 하민의 침묵이 이어지더니, 그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너희들, 싸웠구나.] ‘그게 싸움일까?’ 하연
하연은 피곤한 기색을 감추지 않고 운석의 말을 무시하며 대답했다. “일하러 왔어요. 쓸데없는 소리는 하지 마세요.” 운석은 순순히 입을 다물었지만, 선유는 반쯤 장난스럽게 말했다. “언니, 여기까지 왔는데 아직도 접대해야 해요?” 하연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선유야, 무슨 일 있어? 기분이 안 좋은 것 같은데.” 두 사람이 나란히 걷던 때, 선유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오늘이 우리 엄마 기일이잖아요. 아빠는 일 때문에 돌아오지도 못하고 F국에 계세요.” 하연은 선유의 슬픔을 깊이 이해했다. 하지만 동시에 하민철의 어쩔 수 없는 사정도 잘 알고 있었다. “은행장님 같은 분은 늘 바쁘시잖아. 특히 하 은행장님이라면 더더욱 그렇지. 아빠도 너를 잊은 건 아닐 테니까 너무 속상해하지 마.” “제가 아빠한테 전화했는데 받지 않으셨어요.” 이것이 바로 선유가 마음 아파하는 이유였다. 하연은 그제야 물었다. “무슨 사업 때문에 그러신데?” 이번에는 운석이 설명했다. “금융위원회가 지난주에 간담회를 열었어요. B시가 세계적인 금융 도시로 도약하기 위해, 금융 기관들이 대규모 사업과 건설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를 원하고 있어요. 하 은행장님도 그 일로 바쁘신 겁니다.” 하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이해했다. “그럼 나운석 씨는 왜 같이 안 갔어요?” 나씨 가문은 B시에서도 유명한 재벌 가문이다. 나운석은 그 가문의 후계자로서 그런 중요한 일에 더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할 텐데... 운석은 무심한 듯 샤인 머스캣을 하나 따서 껍질을 벗기며 말했다. “F국의 4대 가문 대표들이 다 모였거든요. 그런데 제가 그중 하나인 이씨 가문 사람들과 사이가 좋지 않아요. 예전에 제가 이씨 가문의 아들을 다치게 한 적이 있어서 아무리 화해했다고 해도 불편한 부분이 있죠.” 가문 간의 이해관계는 쉽게 풀 수 없다는 걸 하연도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4대 가문이 다 모였으면, 우리 집에서는 하민 오
‘친구...?’한창명에게는 친구가 거의 없었다. 한명창의 친구가 될 수 있는 사람은 반드시 그와 함께 어려운 시기를 겪어낸 사람이어야 했다. 곽강민 역시 그중 한 명이었기에, 그는 한창명 말의 의미를 잘 알 수 있었다.곽강민은 조금 긴장을 풀었지만, 얼굴빛은 여전히 좋지 않았다. 이를 눈치챈 한창명이 입을 열었다.“그렇다면 우린 휴식을 위해 만난 거잖아요. 일 얘기는 그만하시죠. 이렇게 샤인 머스캣이 한가득 있는데, 안 따면 아깝지 않겠어요?”한창명이 분위기를 풀기 위해 한 말이라는 걸 하연은 알아차렸고, 더 이상 일 이야기는 하지 않고 바구니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맞아요. 저도 이렇게 신선한 샤인 머스캣을 너무 먹고 싶었는데, 이제야 잘 익었네요.”하연은 재빠르게 움직이며 발끝을 세워 가위로 가지를 잘랐다.“먼저 맛보실래요?”한창명은 한 알을 따서 한 입 베어 물었다.“정말 달콤하네요.”하연은 몸에 붙은 잎을 툭툭 털며 물었다.“그래요?”다음 순간, 한창명은 아무런 망설임 없이 또 다른 샤인 머스캣을 하연의 입에 넣어주었다. 달콤함이 입안 가득 퍼졌고, 하연은 순간적으로 멍해졌다.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었다.한명창은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최하연 씨, 정말 이번 거래를 성사시키고 싶다면, 차라리 마음 편하게 저를 잘 이용해 보세요.”하연은 그 말의 의미를 곧바로 이해했고, 뒤에 서 있는 곽강민을 힐끔 바라보았다.“두 분, 사이가 굉장히 좋아 보여요.”“저와 강민 선배님은 모두 자선기금의 도움으로 자란 사람들이에요. 대학 시절의 선배님은 투자한 사업이 있었고, 자금이 필요했죠. 전 그동안 모은 돈을 전부 선배님에게 투자했어요. 그 사업은 결국 대성공을 거뒀죠.”한창명은 바구니를 들고 앞으로 나아가며 말했다.“그러니까 두 분은 같은 길을 걷고 있는 거군요.”“사실 처음부터 그런 건 아니었어요. 전 단지 제 안목이 맞는지 시험해 보고 싶었거든요. 강민 선배님에게 재능이 있다고 봤고, 시도해 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어요. 결국
하연은 완벽하게 준비되어 있었다. 곽강민이 던지는 질문 하나하나에 그녀는 신속하고 적절한 답변을 내놓았고, 그의 얼굴에는 어느새 동의의 기운이 감돌았다.“DS그룹은 신생 그룹이긴 하지만, 최 사장님 같은 책임감 있는 리더가 이끄니 금방 성장할 겁니다.”그의 칭찬에 하연의 입가엔 자연스레 미소가 번졌다.“곽 선생님, 기회를 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며칠 후, 운성시의 오 대표님도 B시에 오실 예정이니, 그때 협력을 공식적으로 확정 짓는 게 좋겠군요.”운성시라는 이름이 나오자, 곽강민은 잠시 주저하더니 이내 답했다.“좋습니다. 대신 저는 이번 협력에서 자문 역할만 맡겠습니다. 지분에는 관여하지 않을 테니, 수익이 1% 증가하면 그 1%는 제 몫으로 하고, 사업에 문제가 생기면 제 책임은 없는 것으로 하죠.”그가 우려하는 바를 하연은 이미 간파하고 있었다. 이번 DS그룹의 계획은 혜성그룹과 HD그룹의 사업을 넘보는 상황이었고, 만약 돌파구를 찾지 못한다면 곽강민은 자신에게 퇴로를 마련해야 할 터였다.하연은 넓은 아량을 베풀듯 답했다.“곽 선생님께서 이 정도로 양보해 주시니, 그 조건은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협상이 마무리되자, 곽강민은 기분이 한결 가벼워진 듯 일어나며 말했다.“최 사장님, 이 근처에 괜찮은 농가 맛집 식당이 하나 있는데, 거기서 현지 음식을 맛보는 건 어떻습니까? 오늘은 제가 대접하겠습니다.”하연은 가벼운 웃음을 띠며 답했다.“그럼 접대비는 너무 많이 들지 않게 해주세요. 그렇지 않으면 한 검사장님이 곤란해지실지도 모르니까요.”그 말에 곽강민과 한창명은 서로를 바라보며 웃음을 터뜨렸다.샤인 머스캣 농원을 빠져나오며 하연은 문득 이곳이 예전에 손이현과 함께 왔던 교외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넓게 펼쳐진 농원이 낯설지 않았고, 곽강민이 말한 농가 맛집 식당은 이 마을의 이장인 왕대천의 집 근처에 자리 잡고 있었다.정말로 기이한 우연이었다.“무슨 생각 중이세요?”자리에서 한창명이 메뉴를 건네며 물었다.“여기 음식
그 시절은 정말 달콤한 추억이었다. 그때 상혁은 목욕 후의 따뜻한 향기를 풍기며 하연을 뒤에서 살며시 끌어안았다. 그의 몸은 뜨거웠고, 그 열기가 하연의 온 몸에 전해졌다. “저걸 어떻게 보지?” “저 분야의 앞날이 밝을 것 같아요.” 하연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돌려 상혁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 상혁은 그녀에게 다가와 뜨겁게 키스했다. 그날 밤의 기억을 떠올리자, 하연의 입가에는 자연스럽게 쓴웃음이 번졌다. 이제는 너무나도 먼 이야기였다.하연이 무언가 말하려던 찰나, 갑자기 방 밖에서 다급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만둬! 여긴 밥 먹는 곳이야, 이러다 가게 문을 닫게 할 작정이냐고!” 익숙한 목소리에 하연은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식당 주인과 그의 아내가 다투고 있었고, 아내는 칼을 든 채로 격분해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손님들은 겁에 질려 서둘러 도망치고 있었다. “이장님?” 싸움을 말리고 있던 사람은 다름 아닌 손이현의 친척인 마을 이장, 왕대천이었다. “하연이?” 왕대천도 하연을 보고는 잠시 놀란 듯했으나, 지금은 더 급한 일이 있어 그녀에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는 큰 소리로 외쳤다. “정책에 너희 집이 해당되지 않았다고 이렇게 소란을 피우는 거야? 큰일도 아니니까, 마을 사람들이 도우면 충분히 돈을 모을 수 있을 거야. 그런데 꼭 이혼까지 해야겠냐고!” 식당 주인의 아내는 눈물을 흘리며 대꾸했다. “그게 수천만이라고요! 어떻게 모으냐고요!” “머리는 길어도 생각은 짧구나! 나랑 이혼하면 더 나은 사람 만날 줄 아나?” 식당 주인의 얼굴은 분노로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하연은 상황이 어이없어 멍하니 그 광경을 지켜보았는데, 이미 주변엔 구경꾼들이 모여 있었고, 한창명은 테이블 위에 있던 담배를 집어 들고 주인에게 건네며 말했다. “진정하십시오. 무슨 문제인지 말씀해 보세요.” “아이 학교 문제 때문이에요. 학교 근처에 집을 구해야 하는데, 우리 집은 너무 멀어요. 새집
분위기는 점점 더 묘하게 흘러갔다. 하연은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는데, 그때 왕대천이 그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하연은 무심코 그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왕대천은 손에 핸드폰을 들고 있었다. “이현아, 누가 왔는지 좀 봐라.”하연은 그 말을 듣는 순간 온몸이 굳어지는 듯했다. 왕대천의 핸드폰 화면 속에 비친 얼굴은 분명 손이현이었다. 그러나 핸드폰이 느려 목소리마저 끊기며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하연 씨가 아저씨를 보러 갔어요?]화면이 계속 끊기자, 왕대천은 답답한 듯 중요한 말만 간추려 말했다. “그래, 그래. 하연이는 정말 착한 아이야. 나는 이 아이가 참 좋아.”한편, 한창명도 손이현의 이름을 듣고 그쪽으로 힐끗 시선을 돌렸다. 화면 속 손이현의 얼굴은 그가 정태산에게서 받은 자료 속 사진과 정확히 일치했다. 한창명은 잠시 멈칫하며 하연을 다시 한번 의미심장하게 바라보았다.하연은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손 선생님, 아직도 B시로 안 돌아가셨어요?” [그때 하연 씨가 떠날 때는 급하게 갔지만, 오히려 모든 일을 철저하게 정리해 두고 떠나셨더라고요. 제가 운성시에 있지 않으면 어디 있겠어요.]이현의 말투에는 미묘한 불만이 묻어 있었고, 그날의 일에 대한 마음속 응어리가 여전히 남아 있는 듯했다. 하연은 그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라 난감했다. 그날의 상황은 너무나도 급박했고, 상혁의 압박은 그날 쏟아진 비보다도 더 강하게 그녀를 휘몰아쳤다. 당시의 하연은 다른 사람을 생각할 겨를이 전혀 없었다.그러나 시간이 지나며 상혁의 말이 틀린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현은 분명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그녀를 특별하게 대했으니 말이다. “손 선생님, 비를 맞았다면 생강차라도 마셔서 몸을 따뜻하게 하세요. 감기 걸리지 않도록 조심하시고요.”하연은 그날 자신이 갑작스럽게 떠난 것에 대해 예의를 갖추며 우회적으로 답했다. 그러나 이현은 무심한 태도로 화면을 응시하다가, 갑자기 전화를 끊어버렸다. 왕대
3일 후, B시에서 신에너지 회의가 열렸다. 각 업계의 거물들이 속속 공항에 도착해 국제호텔에 머물렀다. 하연도 초대장을 받은 사업가 중 하나였다. 그녀는 서둘러 로비로 들어가면서 기자들의 질문을 무시했다. 그런데 그때, 뒤에서 BN그룹의 대표 오기용이 하연을 크게 불러세웠다.“최 사장님! 제가 마침 최 사장님을 찾고 있던 참이었어요.”하연은 고개를 돌리며 미소를 지었다.“저도 막 오 대표님을 찾으려던 참이었어요.”오기용은 곧바로 물었다.“방금 들은 소식인데, 곽강민 씨도 우리와 협력한다고 하더군요. 그게 사실인가요?”하연은 살짝 고개를 흔들며 웃음을 지었다.“오 대표님도 아셨으니, 이제는 온 세상이 다 알겠네요.”“대단하십니다! 곽강민 씨는 FL그룹이 인수된 이후로 아무도 영입하지 못한 인재였는데, 어떻게 해내셨나요?”하연이 답하려는 순간, 날카로운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오 대표님, 여전히 안목이 좁으시군요. 쫓겨난 개 한 마리 데려오는 게 그렇게 자랑할 일인가요?”뒤돌아보니, 여자 정장을 입은 왕아영이 자신감 있는 걸음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녀 옆에는 HD그룹의 대표도 함께였다. 오기용의 얼굴은 굳었지만,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왕 대표님, 정말 오랜만입니다.”“오랜만이네요. 오 대표님의 사업이 B시까지 진출하다니, 다음에 꼭 가르침을 받아야겠어요.”왕아영은 웃음을 띠고 있었지만, 말 속엔 비꼬는 뉘앙스가 가득했고, 동시에 경고의 뜻도 서려 있었다.“과찬이십니다. 저는 그저 최 사장님의 덕을 보고 있을 뿐이죠.”왕아영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최 사장님에게 그런 덕이 있는 줄은 몰랐네요.”그녀 앞에 선 하연은 분명 더 젊고 아름다웠으며, 차분한 아우라를 풍기고 있었다. 하연은 흔들리지 않고 차분하게 대답했다.“제가 덕이 있는지 없는지, 오늘 밤 입찰에서 왕 대표님께서 직접 확인해 보시면 될 겁니다.”왕아영의 입가에는 살짝 비웃는 듯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때 곽강민이 이쪽으로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상혁은 수많은 기자의 환호 속에서 당당하게 입장했다. 그의 옆에는 우아한 미소를 띤 주슬기가 나란히 걸었다. 두 사람의 발걸음은 자연스럽게 맞아떨어졌지만, 마치 의도적으로 과시하지 않으려는 듯 절제된 움직임을 보였다. 상혁은 신사적인 제스처로 주슬기의 의자를 빼주며 그녀가 앉도록 배려했다.기자들의 카메라가 이 순간을 놓치지 않고 두 사람을 포착했고, 그 모습은 곧 대형 스크린에 크게 비쳤다. 하연은 무심하게 시선을 돌리고 핸드폰을 확인했다. 서여은에게서 온 메시지가 도착했다.[주슬기가 호텔 청소 직원으로 변장해 부상혁의 방에 들어갔대. 그 여자, 아무래도 4조를 차지하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 같아.]하연은 이미 로비에서 이 소문을 들었고, 참다못해 여은에게 그 진위를 물어본 것이었다. 여은은 언론계에 있으니 누구보다 그 이야기를 잘 알고 있을 거라 생각했다. 결국, 그 말은 사실이었다.여은은 혹시 자신의 말이 부적절했을까 봐 조심스럽게 한마디를 덧붙였다.[주씨 가문의 가주가 금융위원회의 일원 중 한 명이잖아. 부상혁이 주슬기의 체면을 세워주는 건 어쩔 수 없는 상황인 것 같아. 하연아, 마음에 담아두지 말고, 혹시 문제가 있다면 직접 부상혁에게 물어봐.]‘직접 물어보라고? 여은이는 모르는 모양이군. 우리 둘의 사이는 이미 많이 변해버렸어. 아마도 상혁 오빠는 더 이상 나에게 ‘직접 물어보라’는 기회를 주지 않을 거야.’이때 단상 위에 서 있던 여성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여러분, 안녕하세요. 저는 크리스티 경매사인 성지나입니다. B시에서 여러분을 뵙게 되어 정말 기쁩니다. 오늘 경매할 타이틀은 ‘태양광 홍보대사’이며, 시작가는 60억입니다. 경매를 이제 시작하겠습니다.”성지나는 몸에 꼭 맞는 드레스를 입고 우아하게 경매 망치를 들고 있었다. 그녀의 태도는 여유롭고 기품이 넘쳤다. 성지나는 크리스티 부사장이자 세계적으로 유명한 경매사로, 언론에서는 그녀를 두고 ‘영원히 우아하고, 영원히 욕망을 자극하는 여성’이라 평했다. 그
“하연 씨, 우리 같이 합석해도 괜찮을까요?” 슬기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하연은 환하게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물론 괜찮죠.” 슬기는 예상 밖의 대답에 약간 놀란 듯했다. 그녀는 눈웃음을 지으며 하연을 바라보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하연 씨, 이제 저 같은 ‘라이벌’에게 경계심이 풀린 건가요? 그래도 혹시 모르죠. 제가 다시 마음을 고쳐먹고 재도전할지?” 슬기가 농담 섞인 말이었지만 그 속엔 은근한 탐색이 깃들어 있었다.그러나 하연은 여유롭게 미소를 지으며 되받아쳤다. “주 대표님, 그런 생각할 여유가 있으시면 옆에 있는 분 눈치부터 보셔야 하지 않을까요?”슬기는 어깨를 으쓱하며 별거 아니라는 듯 답했다. “뭐, 집에서 주선한 맞선일 뿐이라 별로 신경 안 써요. 첫 만남이기도 하고요.”그 순간 뒤에 있던 지한이 앞으로 나서며 상혁을 향해 공손하게 인사를 건넸다. “부 대표님, 평소에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그의 입에서 나온 ‘부 대표님’이라는 말은, 그가 이미 상혁의 정체를 알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지한은 외부에서 떠도는 소문을 떠올렸다. 최씨 가문과 부씨 가문이 곧 혼사를 통해 막대한 사업적 결합을 이룰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지금 이 자리에 앉아 있는 여자가 바로 최씨 가문의 딸이라는 사실에 지한은 적잖이 긴장했다.“최하연 씨, 안녕하세요.” 지한이 하연에게도 정중하게 인사를 건네면서도 속으로는 긴장의 끊을 놓지 않았다. ‘주슬기가 최씨 가문과 부씨 가문 사람들과 이렇게 가까운 사이일 줄은 몰랐는데?’ 처음 지한은 그저 형식적인 맞선이라 생각했지만, 지금 이 상황을 보니 다시 생각해 봐야겠다고 느꼈다.그때 상혁이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SW그룹의 도련님을, 여기서 다 만나고 보기 드문 일이군요.” 단 한마디로 심지한의 배경을 정확히 짚어낸 것이다. 지한은 약간 놀란 표정을 지으며 눈썹을 살짝 들어 올렸다. “부 대표님께서 저를 알고 계셨
최근 몇 년 동안 H시는 급격한 경제 성장을 이루며 번화한 고층 빌딩들이 우후죽순으로 들어섰고, 도시 풍경은 완전히 새롭게 바뀌어 이제는 명실상부한 대도시로 자리 잡았다.상혁은 차를 몰고 하연과 함께 요즘 SNS에서 핫플레이스로 떠오른 유명 먹거리 거리로 향했다. 차를 주차장에 세운 후, 두 사람은 나란히 걸어 먹거리 거리로 들어섰다. 거리 양옆으로는 다양한 가게들이 즐비했고, 상인들은 열심히 손님들을 끌어모으며 활기찬 분위기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거리는 사람들로 북적거렸고, 곳곳에서 풍기는 음식 냄새가 두 사람의 발걸음을 이끌었다.한참을 걷던 중, ‘10년 전통 국밥집'이라는 간판이 걸린 깔끔하고 정갈한 가게가 눈에 들어왔다. 내부 인테리어는 오래된 가게답지 않게 세련되었고, 메뉴는 벽에 붙어 있어 가격이 한눈에 들어왔다.상혁이 가게를 한참 바라보는 사이, 하연은 이미 들어가 자리에 앉으며 기다릴 새도 없이 외쳤다. “사장님, 여기 대표 국밥 하나요!” 사장님은 빠르게 주문을 적으며 다정한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 못 드시는 재료 있으세요?”“짜지 않게 해주시고, 후추는 빼주세요. 나머지는 다 괜찮아요.” 하연이 주문을 마치자 사장님은 상혁을 향해 자연스럽게 시선을 돌리며 물었다. “사장님은 뭘로 드릴까요?” 상혁은 자신도 모르게 사장님의 깍듯한 존대에 살짝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저도 같은 걸로 주세요.” 가게의 음식 나오는 속도는 매우 빨랐다. 잠시 후, 두 사람 앞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국밥 두 그릇이 놓였다. 하연은 반짝이는 눈으로 국밥을 바라보며 기쁜 표정으로 숟가락을 들고 신나게 먹기 시작했다.“천천히 먹어.” 상혁은 그녀를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며 한마디 덧붙였다. 그러면서도 자신 앞에 놓인 국밥을 내려다보았다. 어릴 때부터 상혁은 까다로운 식습관을 가진 어머니인 조진숙의 영향으로 엄격하게 관리된 음식을 먹으며 자라, 이런 길거리 음식은 한 번도 접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정말요?” 다영은 남준의 말을 듣고 믿기지 않는다는 듯 눈이 살짝 붉어졌다. 그녀는 자신이 남준을 믿고 기다린 게 틀리지 않았다고 확신했다. 눈앞에 있는 이 남자는 그녀가 모든 걸 걸어도 될 만큼 가치 있는 사람이었다.“남준 씨, 난 그냥...” “그냥 뭐요?” 다영은 고개를 저으며,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전에 떠돌던 소문들 때문에 잠깐 마음이 흔들렸던 것뿐이에요.”“그런 쓸데없는 소문에 신경 쓸 필요 없어요.” 남준은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 그의 눈빛에는 복잡한 감정이 잠시 스쳤다. 하지만 기쁨에 젖어 있는 다영은 남준의 말 속에 담긴 미묘한 뉘앙스를 알아채지 못했다. 그녀는 남자의 팔을 꼭 잡고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난 언제나 남준 씨의 편이에요. 당신이 필요하면 언제든 나를 부르면 돼요. 항상 곁에 있을 거니까요.”‘당신이 원하는 모든 걸 내가 도와서 얻게 해줄 거야. 그게 DL그룹이라 해도...’ 그녀는 이 말을 입 밖에 내지는 않았지만, 속으로 굳은 결심을 다졌다....새해를 맞이하는 밤.전국 곳곳에서 크고 작은 축제가 열렸고, 도시는 환희와 축제 분위기로 가득했다. 모두가 기쁨 속에서 새해를 맞이하던 그 밤이 지나고, 다음 날 아침.하연은 따스한 햇살이 쏟아져 들어오는 방 안에서 천천히 눈을 떴다. 창밖으로부터 들어온 아침 햇살이 방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일어났어?” 상혁이 다정한 목소리로 물었다. 하연은 기지개를 켜며 나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몇 시예요?” 상혁이 곧바로 답했다. “아직 일러. 11시밖에 안 됐어.” “11시?” 하연은 예상외로 늦은 시간에 살짝 놀랐다. 그 순간 상혁이 침대 옆으로 다가와 그녀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눈을 맞췄다. 그의 눈에는 깊은 애정이 담겨 있었다. “괜찮아. 조금 더 자도 돼.”그러나 상혁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하연의 배에서 신호가 왔다
“남준 씨, 지금 당신 날 피한 거예요?” 다영은 손에 쥔 라이터를 꽉 쥐었다가 조용히 주머니에 넣으며 한 발짝 물러섰다. 최근 들어 너무 많은 일들이 한꺼번에 벌어졌고, 남준의 마음을 도무지 알 수 없게 되었다. 지금 이 상황 역시 그녀에게 상처를 남기고 있었다. 한때 누구보다 가까웠던 두 사람이, 이제는 마치 남이 된 것 같은 이 분위기가 그녀를 더욱 혼란스럽게 했다.남준은 정면만을 응시한 채 아무런 설명도 없이 미묘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타요.” 다영의 눈에 순간적으로 희미한 빛이 스쳤다. 망설임 없이 그녀는 차 뒤쪽을 돌아 조수석 문 앞에 섰고, 문을 열어 차에 탔다.차에 올라탄 그녀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조수석에 놓인 정교한 포장 상자로 향했다. 잠시 머뭇거리더니, 다영은 상자를 들고서 물었다. “남준 씨, 이거... 내 선물이에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녀의 손은 이미 멈추지 않고 상자를 열고 있었다.남준은 살짝 찌푸린 듯한 표정을 지었으나, 굳이 제지하지 않았다. 그저 그녀가 상자를 열어보는 것을 무심하게 지켜볼 뿐이었다.다영이 상자를 열자, 안에는 섬세하게 디자인된 고급스러운 목걸이가 자리하고 있었다. 중앙에 놓인 독특한 디자인의 목걸이는 푸른빛의 보석으로 장식되어 있었고, 조명에 반사되어 빛나는 모습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정말 예쁘네요...” 다영은 감탄하며 목걸이를 손바닥에 올려놓고 환한 미소로 남준을 바라보았다. “이거 나한테 걸어줄 수 있어요?”남준은 여전히 미동도 하지 않은 채, 목걸이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의 눈빛은 한없이 깊어졌고, 잠시 동안 아무런 말도 없이 목걸이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긴 듯했다.‘남아공에서 천연으로 채굴된 최고급 보석입니다. 순도와 투명도가 모두 최상급이고, 무엇보다도 희소성이 높아 전 세계에 단 하나뿐입니다. 특별한 사람에게 선물하기에 가장 적합한 아이템이죠.’ 그때 들렸던 매장의 직원 설명이 귀에 맴돌았다.
“나... 나 술 안 취했어.” 남준은 말끝이 흐려졌고, 아까의 당당한 기세가 눈에 띄게 약해졌다. 하연은 남준의 이상한 태도를 감지하고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고개를 돌려 그의 시선을 따라갔다. 거기에는 상혁이 어느새 가까운 거리에 서 있었다. 혼자 있는 남자의 긴 그림자가 조명 아래 길게 드리워졌고, 묵직한 발걸음으로 그들에게 다가오고 있었다.“오빠...” 하연은 입을 열어 무언가 설명하려 했으나, 상혁은 모든 상황을 이미 이해한 듯 아무런 질문도 하지 않고 그녀에게 편안한 눈빛을 주었다. 단 한 번의 눈맞춤으로 하연은 마음속에 있던 불안함이 씻겨 내려가는 듯했다. 두 사람 사이엔 말하지 않아도 통하는 신뢰가 있었다.상혁은 그녀에게 다가와 자신의 외투를 벗어 어깨에 걸쳐주며 다정하게 말했다. “바람이 차니까 빨리 들어가자.”하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조용히 대답했다. “응, 알았어요.” 주변 사람들의 시선 속에서 그녀는 자연스럽게 손을 내밀어 그의 손을 꼭 잡았다. 두 사람의 손가락이 서로 맞물리고, 손바닥에서 전해지는 따뜻한 온기가 고스란히 서로에게 느껴졌다.그러나 이 장면은 남준의 가슴 깊은 곳을 아프게 파고들었다. 남준은 표정만큼은 최대한 담담하게 유지하며 시선을 애써 다른 곳으로 돌리더니,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오늘 DS그룹 연말 행사가 있다고 해서 근처에 볼일이 있어 왔다가 들렸어, 마침 형도 여기 있었네.”상혁은 하연의 손을 살며시 감싼 채 고개를 들고 남준을 바라보았다. 상혁의 눈빛은 깊고 알 수 없는 감정을 담고 있었다. “왜 이젠 DS그룹 일에도 신경이 쓰여? 모르는 사람은 보면 네가 DL그룹 버리고 DS그룹으로 옮기려는 줄 알겠어.” 남준은 그 말에 잠시 말문이 막혔다. 상혁의 말에는 은근한 경계와 조롱이 담겨 있었다. 남준은 불리한 상황임을 깨닫고 억지로 웃으며 변명했다. “형, 그런 거 아니야. 그냥 분위기나 좀 보려고 들른 거야.”상혁은 남준의 속내를 이미 간파하고
“시간 없어.” 하연은 단호하게 말하며 전화를 끊었다. 그녀가 다시 안으로 들어가려는 순간, 휴대폰에서 메시지 알림 소리가 들렸다. 하연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메시지를 확인했고, 내용을 본 후 손에 힘이 들어갔다. 10분 후.하연은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밖으로 나왔다. 멀리서 남준의 눈에 띄는 빨간색 스포츠카가 비상등을 켠 채 호텔 입구에 세워져 있으며, 번화한 호텔 입구에서 유독 도드라져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끌고 있었다.잠시 후, 차 문이 열리고 남준이 내렸다. 그는 오늘 블랙 패딩을 걸친 채 특유의 자유분방한 분위기를 풍기며 여유롭게 하연을 바라보았다. “역시 올 줄 알았어.” 남자의 목소리는 자신감이 넘쳤고, 말투에는 확신이 묻어 있었다.찬바람이 부는 겨울밤, 차가운 바람이 하연의 얼굴을 스치며 머리카락을 흩날렸다. 하연은 몇 걸음 옮긴 뒤 걸음을 멈췄고, 남준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손을 들어 흩날린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말해. 문자에 적힌 상혁 씨하고 관련해서 중요한 일이 뭔데?”남준은 팔짱을 끼고 흥미로운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입가에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형이 걱정돼?”“그건 네가 신경 쓸 일 아니야.” 하연은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남준은 그녀 쪽으로 몇 걸음 다가가더니, 불과 반걸음 거리에 멈춰서 몸을 약간 숙였다. “너의 그 관심 나 한테도 좀 나눠 주면 안 돼?”그가 가까이 다가오며 내뱉은 말에 은은한 술 냄새가 풍겨왔다. 하연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술 마셨어?”남준은 입가를 비틀며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이거 혹시 나 걱정하는 거야?”“착각하지 마.” 하연은 무의식적으로 한 발짝 물러섰다. “부남준, 할 말 있으면 빨리 해. 여기서 시간 끌 여유 없어.”남준은 고개를 약간 끄덕이며 어딘가 불만 섞인 어조로 말했다. “너 갈수록 성격이 우리 형이랑 닮아가네. 역시 잘 어울리는 커플이야.” 하연
하연은 밝게 웃으며 상혁이 건넨 잔을 받아 들고 한 모금 마셨다. 갓 짠 오렌지 주스는 상큼하면서도 달콤한 맛이 입안 가득 퍼졌다. “부 대표님이 직접 짠 오렌지 주스라 그런가, 확실히 맛이 다르네요. 정말 맛있어요.” 상혁은 미소를 지으며 장난스레 손을 뻗어 그녀의 코끝을 살짝 건드렸다. “맛있으면 자주 짜줄게.” 하연은 장난스럽게 웃으며 답했다. “그럼 감사히 잘 마실게요, 부 대표님!” “아니, 한참을 찾았는데 여기서 둘이서만 꽁냥거리고 있었네?” 문 앞에 기대어 서 있던 하성이 두 팔을 교차하고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상혁, 너 요즘 이 녀석을 너무 애지중지하더라. 그러다 버릇 나빠지겠어.” “오빠!!” 하연은 볼이 부풀어올라 약간 투덜거렸지만, 옆에 있던 상혁은 태연하게 그녀를 감싸며 말했다. “애지중지하든 말든 내 마음이지. 네가 무슨 상관이야?” 하성은 두 손을 들며 장난스레 투항했다. “알았어, 알았어. 난 그냥 너희 둘이 잘 지내는 거 보니 마음이 놓여서 하는 소리야.”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 “그래, 계속 이렇게 잘 지내줘, 아주 보기 좋아!”그때 하연의 주머니에서 휴대폰이 울렸다. 화면에 ‘부남준’이라는 이름이 뜨자 그녀는 잠시 긴장한 듯 눈빛이 흔들렸다. “오빠들, 먼저 얘기하고 있어요. 난 전화 좀 받고 올게요.” 하연이 자리를 비우고 복도로 나가자, 하성은 방금 전과는 달리 진지한 표정으로 상혁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입을 열었다. “요즘 너희 집안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소문이 있더라. 동건 삼촌 쪽에서 뭔가 일이 있는 것 같던데?” 상혁은 하연이 마시다 남긴 오렌지 주스를 마시며 시선을 복도 쪽에 고정한 채 무심하게 말했다. “첩이 ‘본처’의 자리를 노리는 거야. 흔한 일이잖아.” 하성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말했다. “동건 삼촌이 그 여자를 꽤 오랫동안 봐줬던 모양이던데. 이제는 꽤 많은 걸 쌓아둔 듯하고, 한번 크게 판을 벌일
“뭐 하는 거야? 빨리 이 주스를 연회장으로 가져가!” 홀 매니저가 다가와 살짝 꾸짖었다. 여자는 급히 고개를 숙이며 질투로 번들거리던 눈빛을 감추고는 얌전히 대답했다. “네, 바로 가겠습니다.” 다영은 태어나서 가사일 한 번 손댄 적 없었지만, 어쩔 수 없이 트레이를 들고 발걸음을 옮겼다. “잠깐!” 매니저가 갑자기 그녀를 불렀다. “너 신입이야? 본 적이 없는 얼굴인데?” 다영의 심장이 두근거리며 가슴 속에서 송혜선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우리 고향 친척 중 하나가 DS그룹에서 일하고 있어. 오늘 밤엔 그 사람 신분을 쓰는 게 편할 거야.” 침착함을 되찾은 다영은 고개를 들어 냉정하게 대답했다. “저는 고객지원부의 진미입니다. 연회 인력이 부족해서 임시로 지원 나온 거예요.” 매니저는 그녀의 명찰을 한 번 흘깃 본 뒤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트레이를 건네받았다. “신입이라면 전면에 나가면 실수하기 쉬워. 내실에서 돕는 게 좋겠어.” “알겠습니다.” 매니저가 떠난 뒤, 다영은 깊게 숨을 내쉬었다. 다시 연회장을 바라봤을 때, 앞줄에 앉아 있던 하연과 상혁은 이미 모습을 감췄다. 2층 휴게실 안. 원신명은 한 손에 신선한 오렌지 한 봉지를, 다른 손에 포장을 뜯지 않은 녹즙기를 들고 들어왔다. “대표님, 주문하신 오렌지와 녹즙기입니다.” 원신명은 궁금한 듯 물었다. “대표님, 직접 오렌지 주스를 만드시는 건가요?” 상혁은 짧게 대답했다. “원 비서, 거기 두고 가면 돼.” 원신명은 얼른 다가가 도움을 자청했다. “대표님, 이런 건 제가 할게요.” “와이프가 오렌지 주스를 마시고 싶다는데, 남에게 맡길 수는 없지.” ‘와이프’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남자의 입에서 흘러나왔고, 마치 그 단어를 그의 마음속에서 수없이 되뇌었던 것처럼 익숙했다. 원신명은 곧 깨달았다. ‘아, 대표님이 직접 최하연 씨를 위해 주스를 준비하시고 싶은 거구나!’ “원 비서, 연말인데도
최하성은 오늘 검정색 정장을 입고 등장했다. 그의 차가운 분위기와 단정한 모습은 단번에 모든 직원들의 이목을 사로잡았다. “최 대표님!”하성을 마주친 직원들은 공손하게 인사했다. 하성은 살짝 고개를 끄덕일 뿐, 시선을 주지 않고 빠르게 행사장으로 걸어 들어갔다. 오늘 저녁 만찬은 매우 풍성했다. 동서양의 요리가 조화를 이루며 대부분 직원들의 입맛과 식습관을 세심하게 고려한 모습이었다. 준비에 꽤 공을 들인 것이 분명했고, 결과적으로 반응도 좋았다. 연말 만찬이 시작되기 전, 하성은 DS그룹의 대표이사로서 무대에 올라 인사말을 했다. 하성은 차분한 걸음으로 무대에 오르며, 그의 존재감은 단번에 분위기를 압도했다. 그가 화려한 말은 하지 않았지만, 단 몇 마디 간결한 말로도, 관중석에서는 뜨거운 박수가 터져 나왔다. 이번 연말 행사는 생중계되고 있었으며, 하성이 등장하자마자 팬들과 네티즌들이 빠르게 몰려들었다. 몇 분도 채 되지 않아 시청자 수가 십만 명을 돌파했다. [최하성 씨, 오랜만이에요! 보고 싶었어요!][연예계에 최하성이 없으니 허전한 기분이에요. 최하성 씨, 돌아와 주세요!][다들 동감! 언제쯤 복귀할 수 있는 거죠?][복귀 요청 99%!!][...] 팬들의 댓글은 끊임없이 이어졌고, 하성의 인기는 생중계 플랫폼 순위에서도 단연코 1위를 차지했다. 무대 아래에서 생중계를 담당하던 진행자는 이 뜨거운 열기를 놓치지 않고 하성에게 다가갔다. “최 대표님, 생중계 채팅창에 팬들이 사장님의 새해 계획에 대해 굉장히 궁금해하고 있어요. 오늘 이 특별한 밤에 팬분들께 한 말씀 부탁드려도 될까요?” 하성은 미소를 머금으며 카메라를 응시했다. 그 순간, 생중계 채팅창은 순식간에 폭발했다. 선물 아이콘이 화면을 뒤덮었고, 댓글은 끊임없이 새로 고침 되었다. “안녕하세요, 하성입니다.” “지난 한 해 동안 저와 DS그룹을 응원해 주신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다가오는 새해에도 DL 그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