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일이야?”[사장님, 방금 소식을 들었는데, 이현오가 사고를 당했어요.]하연의 표정이 굳어졌다. ‘어젯밤에도 봤던 사람이 갑자기 사고를 당했다고?’그녀는 바로 상혁을 떠올렸다.태훈은 하연에게 영상을 하나 보냈다.영상 속은 어두운 밤이었다. 화려한 네온사인이 켜진 번화한 거리, 바의 간판들이 고층 건물에 걸려 반짝였고, 거리에는 사람들이 바쁘게 오가고 있었다. 촬영자는 원래 야경을 찍고 있었지만, 갑자기 아래에서 차량의 굉음이 들려왔다.차에서 내린 이현오는 단정한 차림이었고, 조용히 회관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누군가의 발에 차인 그는 회관에서 튕겨 나와 도로에 세차게 떨어졌다. 이현오를 향해 다가오는 것은 얼굴을 가린 대여섯명의 검은 옷을 입은 남자들이었다. 그들은 누가 봐도 조직폭력배였다. 이현오는 공포에 질려 비명을 질렀다. “당신들, 누구야!”두 명의 남자가 이현오를 붙잡았고, 나머지 사람들은 이현오를 사정없이 때리고 발로 찼다. 이현오의 비명이 거리 전체에 메아리쳤지만, 그를 폭행하는 자들은 조금의 자비도 보이지 않았다.도로에는 피가 낭자했다.그 누구도 이현오를 도우려 하지 않았다.마지막에 이현오는 울부짖을 힘도 남지 않은 채, 도로에 쓰러져 기진맥진했다. 그는 두 손을 들어보려 했지만, 힘이 없었다. “너희들... 너희들...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할 거야!”촬영자는 공포에 질려 손을 떨고 있었다. 영상이 끝나기 직전, 하연은 거리의 끝에서 익숙한 차를 포착했다.그것은 애스턴마틴이었고, 차창 안에서 희미하지만 붉게 빛나는 담뱃불이 보였다.태훈은 하연이 영상을 다 본 것을 확인하고서야 서둘러 말했다. [원래 뉴스에 나갈 예정이었는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차단됐어요. 아마도 이현오의 신분이 민감한 사항이라 그럴 겁니다.]“그럼 이 영상은 어디서 난 거야?”[비록 공개되진 않았지만, 내부 사람들 사이에선 다 퍼졌어요. 모두가 한창명 검사장님의 비서가 맞았다는 걸 알고 있는 셈이죠.] 태훈
한 시간 후, 상혁은 협상을 마쳤고, 협력은 매우 순조롭게 진행되어 곧바로 계약을 체결했다.그가 상대를 직접 엘리베이터까지 배웅하고 돌아온 후, 황연지가 조심스럽게 커피를 들고 다가왔다. “부 대표님.”“말해.” 상혁은 서류를 넘기며 고개를 들지 않았다.“최 사장님이 다녀가셨어요.”그가 갑자기 눈을 들며, 표정이 변했다. “지금은?”“최 사장님께서 대표님을 뵙고 싶다고 하셨는데, 그때는 아직 계약이 확정되지 않아서 제가 마음대로 허락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내가 묻는 건, 지금 하연이가 어딨냐는 거야.”상혁의 차가운 눈빛이 연지를 단숨에 압도했다. 그는 하연의 말을 끊고 단호하게 물었다.연지는 즉시 고개를 숙였다. “휴게실에 계십니다.”상혁은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휴게실로 향했는데, 마지막으로 단 한마디를 던졌다. “또 네 멋대로 행동할 거면, 스스로 그만둬.” 연지는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서 있었다.하연은 떠나지 않았다. 어젯밤 잠을 설친 탓에, 그녀는 지금 FL그룹 휴게실의 널찍한 소파에 반쯤 누워 멍하니 있었다.상혁이 방에 들어섰을 때, 하연은 한없이 얇고 가냘프게 보였다. 마치 손을 뻗어 살짝만 닿아도 금세 부서질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그는 조용히 외투를 벗어 하연의 몸 위에 가볍게 덮어주었다.하연은 눈을 뜨고 상혁의 시선과 마주쳤는데, 잠시 멍해졌다. “협상은 끝났어요?”상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 옆에 앉았다. “졸려 보여.”잠이 싹 달아난 하연은 몸을 일으켰고, 바로 본론을 꺼냈다. “한창명의 비서가 맞았어요. 오빠가 한 거죠?”그녀의 말투는 단정적이었고, 상혁도 간결하게 대답했다. “그래, 내가 했어.”“영상도 오빠가 차단한 거죠?”“그래, 내가 차단했어.”“진짜 미쳤군요.” 하연은 흥분한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뭐라고 했어요? 함부로 손대지 말라고 했잖아요! 그 자리에 있는 사람을 건드리면 FL그룹이 B시에서 어떻게 버틸 수 있겠냐고요!”비록 이현오는 단지 비서일
하연은 상혁의 말을 곰곰이 생각하다가 무슨 일인지 깨달았다.“그래서 결국 이현오를 그렇게 두들겨 패라고 시킨 건가요?”“물어보는 걸 깜빡했네. 그 자식이 어느 손으로 널 건드렸지?”상혁은 진지하게 물었다.하연은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왼손이었던 것 같은데... 잘 기억이 안 나요.”“괜찮아. 양손 다 쳤으니까.”상혁은 마치 별일 아니라는 듯 가볍게 말했다. 마치 오늘 날씨가 어떤지 묻는 것처럼 태연했다. 하연은 정태훈이 보여준 영상 속의 상황을 떠올렸다. 이현오가 심각한 부상을 입은 것은 분명했고, 공격은 치명적이었다.그래도 이현오가 죗값을 치렀고, 상혁이 자신의 억울함을 풀어줬다고 생각한 하연은 속이 조금 후련했다. 이때, 하연의 몸에 덮여 있던 외투가 미끄러졌고, 오늘 입은 옷이 드러났다. 상혁은 그녀의 옷차림을 한번 훑어보고 말했다. “외출했었구나.”하연도 부정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오늘 한서영과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한서준이 지금 병원에서 치료받고 있다면서요? 한서준을 한번 만나보고 싶어요.”상황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두 사람이 만나는 것도 이상해할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혁은 소파에 기대어 아무 말 없이 턱을 꽉 물고 있었다. 그는 생각하는 듯했지만, 동시에 화가 난 것처럼 보였다.하연은 그의 감정을 가늠할 수 없었지만, 굳게 말했다. “한서준에게 묻고 싶어요. 몇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고, 몇 사람의 인생을 망친 이유가 도대체 뭐였냐고요.”잠시 후, 상혁은 마침내 하연을 바라보며 손을 들었고, 그녀의 헝클어진 옷깃을 정돈해 주었다. “한서준이 그 길을 선택한 이상, 돌아올 가능성은 없어. 너는 답을 찾겠다고 묻는 거지만, 얻을 수 있는 건 없어.”“그게 무슨 뜻이에요?”“왕정의 상태가 좋지 않아. 그러니까 너는 왕정을 한 번 보고 와.” 상혁은 차가운 손끝으로 하연의 옆얼굴을 살짝 만지며 말했다. “한서준한테는, 내가 대신 갈게.”하연은 눈살을 찌푸리며 믿기 어렵다는 표정을 지었다.
“예전 같았으면, 저는 부유한 명문가 집안에서 일하면서 경제적으로 꽤 여유가 있었어요. 하지만 우리 딸이 사고를 당한 이후, 우리 집은 완전히 무너졌어요. 제 남편은 딸을 포기하려 했지만, 저는 포기할 수 없었어요. 그래서 결국 우리는 이혼했죠.”“제가 한씨 고택에서 일할 때, 큰 사모님과 작은 사모님은 모두 저에게 정말 잘해주셨어요. 특히 작은 사모님은 우리 딸의 상황을 알고 계속해서 저에게 금전적인 지원을 해주셨죠.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했어요. 그러던 어느 날, 저는 우연히 한서준 대표님의 아버지와 이수애의 불륜 현장을 목격하게 되었어요...”왕진은 과거를 떠올리며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이수애는 저에게 입을 다물라는 조건으로 돈을 주었고, 제가 계속 돕기만 한다면, 더 많은 돈을 주겠다고 약속했어요.”여기까지 듣자, 하연은 서서히 상황을 짐작하기 시작했다. “이수애가 아주머니에게 당시에 임신 중이던 작은 사모님, 즉, 한명준 씨의 어머니를 해치우라고 한 거군요.”“네, 실은 저도 그러고 싶지 않았어요.” 왕진은 고개를 저으며 괴로워했다. “하지만 저에게도 딸이 있잖아요. 저는 딸을 잃을 수 없었어요. 그 돈이 필요했고요.”하연은 같은 어머니로서, 왕진이 한명준의 어머니에게 그런 일을 저질렀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한씨 집안은 부자잖아요. 아주머니가 그 사실을 한명준 씨의 어머니께 알렸다면, 아주머니를 도왔을 거예요. 왜 그분을 배신한 거예요?!”하연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한명준의 어머니가 당시 어떤 심정이었을지 생각하자 마음이 아팠다. “한씨 집안은 돈이 많았지만, 작은 사모님에게는 돈이 없었어요.”왕진은 말했다. 한명준 어머니의 본명은 왕명주였는데, 왕씨 가문은 대대로 학문을 중시하는 가문이었다. 왕씨 가문은 외지에서 상당한 명성을 가지고 있었으나, 왕명주가 사랑에 눈이 멀어 모든 것을 포기하고 한씨 집안에 전업주부로 시집가자, 격분한 왕씨 가문은 왕명주와의 모든 관계를 끊어버렸다. “작
병실 밖에서 다시 소리가 들리더니, 곧이어 기계의 삑삑거리는 소리가 울렸다. 왕진은 놀라서 왕정에게 달려가며 외쳤다. “딸! 선생님! 빨리요!! 도와주세요!!” 깜짝 놀란 하연은 황급히 밖으로 뛰어나가 소유찬의 사무실 문을 두드리며 소리쳤다. “24호 병실, 소 선생님! 왕정이 위험해요!” 소유찬은 즉시 간호사들과 함께 서둘러 병실로 달려왔다. 하연은 사람들 틈에 밀려 벽에 기대어 서 있었는데, 얼굴에는 불안과 슬픔이 가득했다. 그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던 누군가의 눈에도 마찬가지로 그런 감정이 비쳤다. 그는 빛에 의해 그림자가 길게 드리운 채, 오직 하연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같은 시간, 다른 병동에서. 병실 문 앞에 경찰이 서 있고, 한서준은 안에 갇혀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피로가 가득했고, 덥수룩한 수염의 한서준은 이전의 깔끔한 대표의 모습을 잃은 상태였다. 그는 죄수처럼 보였다.상혁은 들어가기 전에 의사에게 물었다. “한서준 씨 상태가 지금 어떻습니까?” “심각한 불안과 우울증을 겪고 있고, 자해 성향까지 보이고 있습니다. 전기 충격 치료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상혁은 차분하게 병실로 들어가며, 손에 든 서류봉투를 한서준 앞의 책상 위에 가볍게 던졌다. “한서준 대표님.”한서준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며칠 만에 그의 눈빛은 어둡고 섬뜩해져 있었다. “부상혁.” 서준의 목소리는 쉰 듯 거칠었고, 비웃음이 섞여 있었다. “역시 네가 나타나는군. 내 예상이 맞았어. 나운석이 네게 매수됐고, 너희 둘이 손잡은 거지.”상혁은 여유롭게 서준 앞에 앉으며 의자에 느긋하게 몸을 기대고는 말했다. “네가 네 가장 친한 친구를 내 편으로 보냈잖아. 결정적인 순간에 친구를 내팽개치고, 하연이를 인질로 삼았으니, 그 친구가 너를 따르겠어? 당연히 날 찾을 수밖에.” “한서준, 난 네가 인간 심리를 잘 이해하는 줄 알았는데.” 서준은 눈가가 붉게 물들어 있었지만 여전히 차분하게 앉아 있었다. “당연히
문 앞에 있던 경찰들이 상황을 보고 급히 제지하려고 했으나, 누군가 그들을 막아서며 고개를 저었다. “걱정 마세요. 부 대표님이 사람 죽일 일은 없을 겁니다.”“게다가 네가 하연이한테 손을 댔다니, 허...” 상혁은 냉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하연이가 며칠간 감옥에 갇혀 있었다면, 너는 하연이보다 만 배는 더 고통스러운 대가를 치르게 될 거야.”“부상혁!!!” 서준은 고통을 참으며 신음을 내뱉었다. “그건 최하연이 자초한 일이었어!! 최하연은 한씨 가문을 조사하겠다고 했지. 최하연은 우리 아버지의 전처 왕명주를 조사하고, 한명준까지 조사하려고 했어!!!” 서준은 절망 속에서 억지로 말을 이었다. “그런데 너, 한명준이 누구인지 알아? 최하연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야!!!”이 말이 떨어지자, 상혁은 얼굴을 굳히며 힘을 더 주었고, 서준은 비명을 질렀다. “네가 내 자리에 있었다면, 너도 똑같이 했을 거야!!!” 서준은 힘겹게 말을 이어갔다. “너도 한명준이 사라지길 바라지 않나? 최하연이 온전히 네 것이 되기를 바라지 않느냐고?!!”상혁은 아무 말 없이 냉혹한 눈빛으로 서준을 내려다보았다.“내가 저지른 가장 큰 실수는, 너무 감정적으로 행동한 거야. 이방규가 최하연을 죽여버리겠다고 했을 때, 그냥 동의했어야 했어.”그 말이 떨어지자, 상혁은 다시 한번 힘을 가해 서준의 손가락을 밟았다. 서준의 피와 살이 뒤엉키기 시작했다.“역시 상상력 하나는 훌륭하다니까? 하지만 아쉽게도 그건 상상일 뿐이야.” 상혁은 더 이상 말할 가치도 없다는 듯, 서준을 패배한 개처럼 내려다보며 조롱했다.“참, 네 여동생은 스캔들로 연예계에서 영원히 퇴출당했고, 네 어머니가 젊은 시절에 저지른 불륜 영상도 퍼졌어. 이제 사람들은 너희 가족을 기피해. 하지만 네 어머니가 사람을 죽인 혐의는 남아 있지. 재판은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까.”이수애의 불륜 영상이 공개된 것은 B시의 명문가 사모님들 모임에서였다. 사람들은 충격에 휩싸여 수군거렸다.
“부 대표님, 이건...” 경비원은 바닥에 쓰러져 있는 한서준의 모습을 보며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여긴 병원이잖아요, 죽진 않을 거예요.” 상혁은 그렇게 말하며 멀리서 자신을 지켜보던 의사와 눈을 맞췄다. 그 의사는 겁에 질린 듯 고개를 숙이고 몸을 피했다. “부상혁!!!” 부상혁이 걸음을 떼려는 순간, 뒤에서 서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날 이길 수는 있어도, 한명준까지 이길 수 있겠어? 자신 있냐고!” 서준의 목소리에는 비애와 자조가 섞여 있었고, 바닥에 누운 채 천장을 바라보며 말했다. “내 형, 한명준은 겉으로는 아무것도 탐내지 않는 것 같지만, 진짜 뭔가를 노리기 시작하면 네 상대가 안 될 거야.” 상혁은 잠시 걸음을 멈췄다가,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그는 뒤돌아보지도, 답하지도 않았다. 황연지는 상혁을 따라가며 말했다. “한서준이 장난치는 것 같지 않은데, 혹시 뭔가 계획이 더 있는 걸까요?” “한씨 집안을 완전히 망치려는 게 아니라면, 누군가가 그 뒤를 이어받을 거야. 한명준이 나설지 아닐지는 지켜봐야겠지만.” 상혁은 엘리베이터로 들어갔고, 마침 그곳에서 한창명을 마주쳤다. 한창명은 평범한 복장에 운동복 차림으로 혼자였다. 상혁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한 검사장님, 병문안 오셨나요?” 한창명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병원에 운동하러 온 건 아니겠지요.” “한 검사장님께서 직접 오실 정도면, 심각한 일이겠군요. 무슨 일입니까?” “양쪽 아킬레스건이 끊어졌고, 양손은 심각한 골절이에요. 특히 오른손은 완전히 쓸모없게 됐죠.” 한창명은 표정 없이 정확하게 말했다. 엘리베이터 안, 두 사람의 모습이 거울에 비쳤다. 상혁은 놀란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어쩌다가 그렇게 됐나요?” “집단 폭행.” “신고는 했나요?” 한창명은 천천히 상혁을 바라보며 말했다. “맞은 사람은 제 비서였어요. 부 대표님도 전에 만난 적 있는 사람
“네. 마침 주경미 사모님께서 저와 최하연 씨를 연결해 주셨는데, 아직 감사의 인사를 전하지 못했습니다.”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한창명은 이 말을 남기고 떠났다.2시간 동안의 응급처치 끝에 왕정은 간신히 한 줄기의 생명을 붙잡았다. 하연은 지친 발걸음을 끌며 병동을 나서다가, 분노에 찬 한창명의 모습을 발견했다.공교롭게도, 한창명도 하연을 보았다.그는 발걸음을 돌려 하연을 불러 세웠다. “최하연 씨.”강직하고 정직하던 한창명이 갑작스러운 미소를 띠자, 하연은 의아해했다. “한 검사장님.”“공식적인 자리가 아니니, 그냥 제 이름을 부르셔도 됩니다.”하연은 그가 자신보다 나이가 많다는 것을 알고 있어서 함부로 이름을 부르지 못하고 물었다. “병문안 오셨나요?”오늘은 날씨가 좋았고, 하연은 따사로운 햇볕 아래 서 있었다. 그녀의 모습은 빛을 받아 투명하게 빛났고, 소녀와 성숙한 여인 사이에서 맴도는 미묘한 아름다움이 있었다. 꽃보다도 더 아름다웠다.그 순간, 한창명은 이현오가 했던 말을 떠올렸고, 얼굴이 어두워졌다.“부하 직원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습니다. 최하연 씨께 사과드려야겠군요.”하연은 곧장 한창명이 무슨 말을 한 것인지 알아차렸다.‘의왼데? 한창명이 직접 사과할 줄은 몰랐는데.’ ‘한창명은 역시 소문대로 매우 올곧은 사람이었네.’“사람마다 각자의 품행이 있죠. 사과는 본인이 직접 해야 하는 것이니, 한 검사님이 미안해하실 필요는 없습니다.”하연은 처음 만났을 때처럼 당당하고 겸손하게 대답했다.“최하연 씨는 어떻게 하고 싶으십니까?”“사과의 진정성은 상대가 어떤 보상을 하느냐에 달렸지, 제가 먼저 요구하는 게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한 검사장님의 생각은 어떠신가요?” 하연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한창명은 입가에 미소를 띠며 손을 뻗었고, 하연의 머리카락에 얹힌 합환화 꽃을 가볍게 털어주었다.하연은 순간 당황했다.“최하연 씨의 말이 맞습니다. 나중에 제가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 한창명은 그렇게 말하고 돌아
부동건은 갑작스레 거칠게 기침을 터뜨렸다. “컥”‘피 맛...?’ 목 안에서 치밀어 오르는 피비린내를 억지로 삼켰다. 손등에 핏줄이 선명히 드러나고, 이성의 끈은 이미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었다. 부동건의 시선이 천천히 송혜선과 조봉규를 향했다. ‘죽여버리고 싶다. 지금 당장 이 자리에서...’ “너희들... 너희들...” 부동건의 입술은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송혜선은 극도의 공포에 휩싸였다. ‘이건 아니야... 이렇게 끝나면 안 돼...’ 그녀는 급히 앞으로 다가가 부동건의 팔을 붙잡았다. “회장님... 우리, 조 선생님이랑 그냥 산후 회복 얘기하던 중이었어요. 진짜예요, 저희는...” 그 말이 끝나기도 전, 부동건의 손이 송혜선의 뺨을 후려쳤다. 짝! 순간 정적. 강하게 내리친 손바닥 소리에,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일제히 숨을 멈춘 듯 조용해졌다. 송혜선의 얼굴 한쪽이 순식간에 붉게 부어올랐다. 눈가가 덜덜 떨리며, 눈물도 같이 맺혔다. “이 천하의... 배은망덕 같은 것. 내가 너를 어떻게 믿었는데... 감히 날 기만해?” 뒤에 서 있던 하객들 사이에서도 탄식이 흘러나왔다. “저 정도였어?” “저게 진짜였네... 소문이 아니고...” “...”송혜선은 뺨의 통증을 애써 무시한 채, 다시 붙잡았다. “회장님, 제발... 오해예요. 저희 그런 사이 아니에요. 저는... 당신뿐이었어요.” 그러나 부동건은 그 손마저 거칠게 뿌리쳤다. 그리고는 힘껏 송혜선의 복부를 발로 찼다. 퍽! 무너지는 소리와 함께, 송혜선은 바닥에 힘없이 쓰러졌다. 그녀의 입에서 신음이 터졌다. 조봉규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아니야... 지금 나섰다간 나도 끝장이야.’ 한 걸음 다가가려다...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회... 회장님... 저희... 아무 일도 없었어요... 정말이에요...” 하지만 그 한마디가 기름을 붓는 꼴이 됐다. 부동건은 그대로 조
일 순간 충격의 정점이었다.부동건은 들고 있던 와인잔을 그대로 바닥에 내던졌다. 쨍그랑! 깨지는 소리와 동시에 모든 시선이 그에게 꽂혔다. “저... 저런 미친...!” 그는 화면을 가리키며, 얼굴을 붉힌 채 말을 잇지 못했다. 숨이 거칠게 턱 끝까지 차올랐다. ‘송혜선... 네가 감히!’ 주변 하객들도 이미 술렁이기 시작했다. “저게 진짜야?” “부 회장님 딸이... 아니라고?” “와... 이건 완전히 생각지도 못한 미친 패륜이야, 상상도 못 했어.” 오늘의 연회는 더없이 화기애애한 분위기였지만, 이제 와선 최악의 스캔들 파티가 되어버렸다. ‘이 연회가... 전부 거짓된 일 때문에 생긴 일이란 말이야?’ ‘우리, 사기당한 거네. 다 같이.’ 그때 스크린이 멈췄고, 연회장 전체의 조명이 다시 환히 켜졌다. 하객들은 본능적으로 두리번거리며 부동건을 찾았다. “회장님, 괜찮으십니까?” 하지만 부동건은 아무런 대답 없이 어금니를 꽉 물고, 몸을 떨며 계단 쪽으로 향했다. 하객들은 그 뒤를 따라붙었다. ‘뭔가 일어나겠군...’ ‘이번엔 진짜 끝장이다.’ ...같은 시각, 2층 방 안. 송혜선은 조봉규의 손등을 다독이며 조용히 말했다. “조금만 참아. 며칠만 지나면 내가 다시 올게.” 조봉규는 싱긋 웃으며, 그녀의 허벅지를 장난스럽게 움켜쥐었다. “응. 기다릴게, 자기.” 하지만 그 말이 끝나기도 전, 문이 거칠게 흔들렸고, 익숙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쾅!! “송혜선! 당장 안 나와?!” 송혜선의 온몸이 순간 얼어붙었다. 그녀는 반사적으로 조봉규의 팔을 꽉 잡았다. ‘망했다.’ “어떡해, 부동건이 올라왔어.” 두 사람은 당황하며 방 안을 둘러봤지만, 창문 하나 없는 좁은 방엔 도망칠 곳조차 없었다. ‘안 돼... 이렇게 들키면, 끝장이야. 정말 끝이야.’ 송혜선은 급하게 숨을 고르며 애써 이성을 붙잡으려 했다. ‘진정해. 침착해야 돼.
연회장 안은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가득했다. 부동건은 손에 잔을 들고, 연신 들어오는 축하 인사에 밝은 표정으로 답하고 있었다. “회장님, 따님이 너무 예뻐요. 축하드립니다!” “아이고, 이런 경사는 자주 있어야죠!” ‘그래, 이 정도면 완벽하지. 오늘은 그 누구도 나를 흔들 수 없어.’ 그렇게 술이 한 잔, 두 잔 더해지며 연회장의 분위기도 점점 무르익고 있었다. 그때, 갑작스레 모든 조명이 꺼졌다. 탁! “어, 뭐야?” “불 꺼졌어! 왜 이래?” “아야, 누가 내 발 밟았어!” “...”순식간에 어둠이 덮친 연회장. 사람들의 놀란 목소리와 웅성거림이 퍼졌다. 잔을 들고 있던 부동건은 순간 정지된 듯 멈췄고, 날카로운 눈빛으로 주변을 살폈다. “지금 뭐 하는 거야! 당장 가서 확인해봐!” “네, 회장님!” 직원들이 급히 움직였고, 부동건은 진정시키려는 듯 손을 들고 말했다. “여러분, 당황하지 마시고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전기 쪽 문제인 것 같습니다. 금방 복구됩니다.” 사람들은 잠시 멈춰 서서 어둠 속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고- 그 순간, 연회장 한쪽 벽면에 설치된 대형 스크린이 조용히 켜졌다. “위이잉...” 어둠 속에서 갑작스레 터진 화면의 빛에 모두가 눈을 찌푸리며 반사적으로 손으로 눈을 가렸다. 그 빛이 익숙해질 무렵, 누군가가 터트린 외마디 감탄에, 시선이 일제히 스크린으로 향했다. “어... 저거 뭐야? 헉, 저게... 말이 돼?” 그리고, 그 스크린 안에 있는 건... 분명 두 남녀의 은밀한 장면이었다. 화면 속, 분명히 누군가를 알아본 듯한 목소리가 터졌다. “저 여자... 그분 아니야?” “옆에 있는 남자는...?” “헐, 이건 진짜 레전드다.” “아, 눈 버렸어. 이게 뭐야, 이게...” “...”사람들의 목소리는 점점 커졌고, 순식간에 연회장은 도저히 되돌릴 수 없는 혼돈의 도가니로 빠져들고 있었다.사람들 사이에 웅성거림이
송혜선이 복도 입구에 막 다다랐을 때였다. 갑작스레 어디선가 튀어나온 그림자가 그녀를 뒤에서 껴안았다. “꺄악!” 놀란 송혜선은 반사적으로 비명을 질렀고, 누군가 재빨리 그녀의 입을 막았다. “나야! 나야, 혜선아.” 익숙한 목소리에 송혜선은 순간 멈칫했다. 그리고 조심스레 남자의 손을 떼어내며 차갑게 말했다. “지금... 뭐 하는 짓이야?” ‘이 사람, 지금 제정신인 거야?’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이어서 급히 주위를 살폈다. 다행히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다. 송혜선은 그제야 숨을 돌리며, 낮은 목소리로 흘기듯 말했다. “지금 여기가 어디라고... 미쳤어, 사람들 눈에 띄면 어쩌려고!!” 그 말엔 명백한 불만과 경계심이 섞여 있었다. 조봉규는 잠시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런 식으로 나오면 안 되는데...’ 그 순간의 긴장, 그리고 복잡한 감정이 두 사람 사이에 감돌았다.조봉규의 시선이 송혜선의 얼굴에서 천천히 내려앉았다. 송혜선은 산후라 그런가, 몸매는 훨씬 더 부드럽고 풍성해져 있었다. ‘이러니까, 잊으려고 해도... 더 생각이 나잖아.’ 그는 순간 충동적으로 송혜선의 팔을 붙잡았다. “잠깐만.” 당황한 송혜선이 눈을 부릅떴다. “뭐 하는 거야!! 지금...” 그러나 조봉규는 말없이 송혜선을 옆방으로 이끌었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작게 ‘탁’ 하고 울렸다. 좁은 공간, 차오르는 침묵. 송혜선은 남자를 노려보며 벽에 등을 댔다. “정신 차려! 지금 여기가 어디라고!” 조봉규는 그녀를 바라보며 낮게 숨을 내쉬었다. “다들 홀에 있잖아. 아무도 몰라.” 남자의 말투엔 간절함과 조급함이 섞여 있었다. 이건 단순한 욕망이 아니었다. 그리움, 억눌림, 그리고 못다 한 말들. 그는 조심스럽게 송혜선의 턱선을 손끝으로 만지며 말했다. “혜선아... 나, 정말 많이 참았어.” ‘이 사람 또 이러네...’ 송혜선의 심장이 미묘하게 흔들렸다. 분
생각에 잠겨 있던 찰나, 정문 쪽에서 웅성거림이 들려왔다. 부동건이 고개를 돌리자, 최하연이 부상혁의 팔을 자연스럽게 끼고 등장하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 순간, 많은 이들의 시선이 두 사람에게 쏠렸다. 잘생긴 남자와 우아한 여자의 조합. 누가 봐도 완벽한 한 쌍이었다. ‘딱 봐도 좋은 그림이야. 저 둘은 그냥 서 있기만 해도 눈길을 끌어...’ “회장님, 부상혁 대표님은 정말 복도 많으십니다. 최씨 가문의 따님과 이렇게 잘 어울리는 커플이 어디 또 있겠습니까?” 누군가의 말에 부동건의 표정이 확 풀렸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미묘하던 분위기가 사라지고, 부동건의 얼굴에는 흐뭇한 미소가 피어났다. 부동건은 고개를 끄덕이며 두 사람을 향해 시선을 보냈다. “젊은 사람들이 서로 마음이 맞아 좋아하는 걸, 우리 어른들은 그저 기쁜 마음으로 축하해줘야 하는 일일 뿐이지요.” “게다가 상대가 최씨 가문의 따님이라니, 정말 금상첨화가 아닙니까.” 부동건은 더없이 만족스러웠다. ‘역시 상혁이다. 내 아들이라면 이 정도는 돼야지.’ 상혁은 오늘 이 자리에서 당당히 아버지의 체면을 세워주고 있었다. 한편, 송혜선도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방금 전까지 얼굴에 띄웠던 미소는 점점 사라져 갔고, 그녀의 시선은 어느새 하연에게 향했다. 오늘의 하연은, 나무나 예쁘고... 아니, 그냥 눈이 부실 만큼 찬란했다. 그리고 또렷한 이목구비에 윤기 흐르는 머릿결, 화사하게 피어난 얼굴빛까지. 하연의 행복함이 전신에서 흘러나오는 듯했다. 송혜선의 눈빛이 서서히 차가워졌다. ‘정다영... 그년, 나를 속였어.’ 그동안 하연 쪽에서 뭔가 반응이 있을 줄 알고 기다려 왔다. 하지만 소식은커녕, 정다영조차 자취를 감췄다. ‘다영이 걔가 하연이에게 약 먹이는 계획이 분명 실패한 거야. 그렇지 않고 선 지금 저렇게 멀쩡한 얼굴로 서 있을 수는 없어.’ 이대로 배가 불러오면, 섣불리 손도 쓸 수 없게 된다. ‘
이 질문에 송혜선은 눈을 반짝이며 부동건을 바라봤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이젠 나를 당당히 소개해 줄 때가 됐겠지.’ 오늘 이 자리에서, 그녀는 부동건의 정식 아내로서 인정받기를 바라고 있었다. “회장님, 말씀 좀 해보세요?” 조금은 성급한 목소리로 말을 꺼내자, 주변의 시선도 하나둘 송혜선과 부동건을 향했다. 모두 속으로는 뻔히 알고 있었다. 부동건이 과연 예전 애인을 진짜로 정실로 앉혔는지,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 했다. 부동건은 미소를 지었다. 그는 숨기거나 피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담백하게 말했다. “오 회장님, 이 사람은 제 딸의 어머니입니다.” 순간, 송혜선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딸의... 어머니?’ 손에 들고 있던 와인 잔이 살짝 흔들렸다. 금세 넘칠 듯한 와인, 애써 잡고 있는 감정. ‘지금... 이게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지?’ 그리고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억울함이 툭 하고 솟구쳤다. 심지어 손에 힘이 들어가며 하얗게 질린 손등이 떨렸다. 오병지는 단번에 눈치챘고, 싱긋 웃으며 더는 묻지 않았고, 대신 가볍게 말을 건넸다. “축하드립니다. 부 회장님, 여전히 복이 많으시네요.” 부동건은 공손하게 웃으며 송혜선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그 손길엔 무언의 위로가 담겨 있었다. “아닙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나중에 저와 이 사람의 결혼식엔 꼭 오셔서 축배 들어주세요.” 그 말에 송혜선의 눈이 번쩍 뜨였다. ‘결혼식...?’ 순간, 가슴이 쿵 하고 울렸다. 이어서 고개를 들며 수줍게 웃었다. “회장님...” 부동건은 말없이 그녀를 더 가까이 끌어안았다. 더 이상의 말은 없었지만, 그 행동으로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주변의 사람들 시선이 바뀌었다. 예전에는 송혜선을 무시하거나 조롱하던 눈빛이, 지금은 선망과 부러움으로 가득했다. 결국, ‘부동건의 아내’라는 타이틀은 그 자체로 막대한 부와 권력을 상징하는 이름이었다.송혜선은 온
부지윤의 ‘한 달 잔치’는 그야말로 성대한 수준의 파티였다. 초대받은 인사들만 봐도, 그 위세가 느껴졌다. F국 재계의 실력자들, 정재계의 핵심 인물, 이름만 대면 아는 명문가 자제들이 대거 초청됐고, 심지어 부씨 가문 어른들에게도 한 사람도 빠짐없이 직접 청첩장을 보냈다. 이 정도면, 사실상 이 아이를 공식적으로 가문에 편입시키겠다는 의지나 다름없었다. 부동건이 이 아이에게 얼마나 애정을 집착하듯 쏟고 있는지, 이날 행사 하나로 증명되고 있었다. 모든 사람이 지켜보는 가운데, 부동건은 스스로의 체면과 명예를 걸고, 딸을 세상에 내보이고 있었다. ...잔치 당일, 연회장은 유난히 붐볐다. 샹들리에의 조명이 화사하게 반짝였고, 고급스러움이 풍겨 나는 악단의 선율이 분위기를 감싸고 있었다. 송혜선은 산후조리를 마친 직후였지만, 여전히 그만의 풍채와 여유를 잃지 않았다. 예전보다 조금 살이 오른 듯했지만, 그 덕에 오히려 분위기가 더 너그러워 보였다. 그녀가 행사장에 들어서자, 평소 자주 어울리던 재벌가 부인들이 앞다투어 다가왔다. “혜선씨는 진짜 복이 많은 사람이에요. 그 고생 끝에 드디어 볕뜰날이 왔네요.” “부 회장님이 이렇게까지 챙기시는 거 보니까, 이제 정말 한 자리 하시겠어요.” “정말 이러다 조만간 ‘겹경사’ 나는 거 아니예요? 우리라도 미리 축하해줘야 하는 거야?” 송혜선은 그 소리에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얄미울 정도로 여유롭게 미소 지었다. ‘역시 사람은 자리가 높아야 대접 받는 거야.’ “지윤이는 회장님의 첫 딸이잖아요. 그러니까 귀하지 않겠어요? 그리고 회장님이 우리 모녀를 절대 가볍게 보지 않으신다는 건, 여기 있는 분들도 느끼셨을 테고요.” 그 말에 다들 박수까지 치며 웃었다. “이제 우리도 호칭 바꿔야지, 사모님!” 누군가 먼저 그렇게 불렀고, 뒤이어 몇몇이 장난처럼 따라 불렀다. 송혜선은 그 말에 딱히 제지하지 않았다. 오히려 턱을 살짝 들며, 그 호칭이 제법 익숙
진윤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가, 마침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부남준은 법을 무시하고, 사람을 죽였어요. 부씨 가문이 이 일에 개입한다면... 여론은 가만있지 않을 겁니다. 감싸려 들면 들수록, 결국은 함께 나락으로 떨어지겠죠.” ‘이건 단순한 사건이 아니라, 가문의 존망이 걸린 문제야.’ 맞은편 소파에 앉은 상혁은 다리를 꼬고, 한쪽 손으로 턱을 괸 채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남자의 눈빛엔 어떤 감정도 떠오르지 않았다. 마치 세속의 먼지 따윈 전혀 묻지 않은 사람처럼. 진윤의 말이 끝났지만, 상혁의 표정엔 미동 하나 없었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 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부씨 가문은 항상 법의 테두리 안에서 움직여왔습니다. 그건 변하지 않습니다, 여사님.” 그는 손짓으로 테이블 위를 가리켰다. 거기엔 작은 검은색 USB 하나가 놓여 있었다. “이 안에... 고나희 씨가 남긴 게 있습니다. 여사님께 드리라고 하더군요.” 순간, 진윤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숨이 턱 막히는 듯한 표정으로, USB를 바라봤다. “지금... 뭐라고 하셨죠?” 그녀의 목소리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나희가... 뭔가를 남겼다고...?’ 사고는 너무도 갑작스러웠다. 딸의 마지막을 함께할 시간조차 없이, 그녀는 세상을 떠났고, 어떤 유언도, 한마디 말도 남기지 못한 줄 알았다. “나희... 그 애가... 무슨 말을 남겼다는 거예요...” 진윤은 입을 틀어막았다. 눈물은 이미 참을 수 없다는 듯 쏟아지려 하고 있었다. 상혁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쌌다. “사람이 떠난 건 바꿀 수 없습니다. 하지만 남겨진 마음은, 누군가가 반드시 전해야죠.” 그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무거운 공기를 뒤로한 채, 조용히 방을 나섰다. 잠시 후.룸 안에서 낮고, 억눌렀던 울음이 터져 나왔다. “나희야...” 진윤은 USB를 손에 쥐고, 세상이 무너진 듯한 표정으로 울고 있
진윤은 송혜선이 내민 공백 수표를 내려다보며 손끝까지 떨렸다. 종이 한 장. 하지만 그 안에 담긴 의미는, 그녀의 심장을 조용히 갉아먹었다. ‘돈이란 게... 사람을 어디까지 비참하게 만들 수 있는 건지.’ 그녀는 허탈하게 웃었다. “돈, 참 좋은 거죠. 수많은 집이 그거 하나 때문에 무너지고, 사람 목숨도 스스럼없이 거래되고.” 그녀의 눈빛이 서서히 날카로워졌다. “고경수도 그랬어요. 결국 돈 때문에 스스로 감방에 들어갔고, 지금 당신은 그 돈으로 내 아이의 죽음을 사겠다는 거죠.” 진윤의 시선이 천천히 송혜선을 꿰뚫었다. “송 여사님의 눈엔... 돈이면 뭐든 다 해결돼요?” 송혜선은 대답하지 않았다. 진윤은 고개를 들었다. 쭉 뻗은 어깨, 흐트러지지 않은 눈빛으로 조용히 말했다. “근데, 저에게 그딴 건... 아무 의미 없어요.” 테이블 위의 수표는 그녀 눈엔 그저 휴짓조각에 불과한 쓰레기였다. ‘내 아이 이름 위에 적힌 숫자가 많을수록, 그 애는 더 억울해지는 거야.’ 그런 진윤의 단호함에, 송혜선도 이내 표정을 굳혔다. “정말 고집 세시네요, 여사님.” 그녀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조용히 진윤 쪽으로 다가섰다. 10센티미터도 채 되지 않는 거리에서, 송혜선은 하찮다는 듯이 고개를 숙여 내려다보며 진윤에게 시선을 내리꽂았다. “그 자존심, 얼마나 오래 버틸 수 있을지 볼까요?” 그 말투엔 이젠 더 이상 숨길 필요 없는 위협이 담겨 있었다. “당신에게는 지금, 아무것도 없어요. 남편은 감옥, 딸은... 하늘에 있어. 그런데도 이렇게 버티겠다고? 부씨 가문이 마음만 먹으면, 당신 같은 사람 하나쯤 사라지게 만드는 건 일도 아니에요.” 진윤은 순간 움찔했지만, 눈동자는 미동도 없이 그대로 송혜선을 바라봤다. 송혜선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마지막 일격을 날렸다. “참, 고경수 씨 말인데요. 그 사람, 아직 당신한테 마음 있더라. 감방에서 계속 당신 얘기만 했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