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연은 짜증과 피곤함이 가득한 목소리로 말하며, 상혁에게 전혀 따뜻함을 보여주지 않았다.상혁의 얼굴은 그다지 좋지 않았지만 여전히 인내심을 갖고 말했다. “황 비서가 말했어, 네가 오늘 나온다고. 내가 데려다줄게.”“정말 수고하셨네요, 부 대표님. 방금 라이브 방송을 끝내고도 날 데리러 오시다니, 그런데 그만한 가치가 있을까요? 나는 당신처럼 명예롭게 무죄를 입증받은 사람이 아니잖아요. 오히려 더러워질 뻔한 사람인데요.”하연은 어깨를 떨며, 화를 억누르지 못한 채 비꼬는 말투로 그에게 말을 이어갔다.“하연아.” 상혁은 목소리를 낮췄지만, 인내심이 거의 바닥나고 있었다.바로 그때, 벨이 울렸고, 직원의 목소리가 들렸다. “최 사장님, 옷을 가져왔습니다.”상혁은 시선을 돌리고 한발 물러났다. 하연은 깊게 숨을 들이쉬고, 문을 살짝 열어 옷을 받았다.“최 사장님, 늦어도 7시까지는 가셔야 합니다. 제가 모시겠습니다.”하연이 대답하지 않고 문을 닫으려 하자, 상혁이 그녀의 등 뒤에서 손을 내밀어 문을 닫아주었다. 그의 체온과 향기가 하연을 감싸는 듯했다.옷은 새로 나온 드레스였고, 개인적인 모임에서 입을 법한 옷이었다.“어디 가는 거야?” 상혁의 숨결이 하연의 귓가에 닿았는데, 그의 목소리에는 약간의 추궁이 섞여 있었다.하연이 드레스를 꽉 쥐자, 그가 한발 앞서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그가 하연이 반항하려는 걸 미리 알았다는 듯한 반응을 보이자, 그녀가 화가 나서 상혁의 발을 세게 밟았다.상혁은 아프다는 소리조차 내지 않았다. “여전히 손발을 잘 쓰는구나. 자면서도 가만히 있지 않았고, 아침마다 네가 내 위에 걸쳐 있어도 날 탓했잖아.”그는 사적인 이야기를 태연하게 입 밖으로 내뱉었고, 하연은 얼굴이 벌게졌다. “그만해요! 그런 얘기하고 싶지 않아요!”“어디 가는 건데?”그는 포기하지 않고 물었고, 하연도 어쩔 수 없었다. “부 대표님 덕분에, 정태산 선생님의 부인이 특별히 날 보러 오신대요.”그 이름을 듣자마자
상혁은 침묵하며 차가운 눈빛을 내뿜고 있었다.“부상혁 씨!! 당신의 계획도, 당신의 미래도, 그리고 당신이 컴퓨터를 공부했다는 사실조차도 나는 전혀 몰랐어요. 나는 당신한테 속아서 바보처럼 당신이 시키는 대로만 움직였다고요!!” 하연은 결국 참아왔던 울음을 터뜨렸다. 며칠간 쌓였던 억울함이 한순간에 터져 나왔고, 구슬같은 눈물이 상혁의 손바닥으로 흘러내렸다. 그 뜨거운 눈물에 상혁은 미간을 찌푸렸다.“겉으로는 나를 좋아한다고 말하지만, 나를 꼭두각시로 만들고 있잖아요. 이건 정말 불공평하고요!! 부상혁 씨!!”상혁은 그제야 마음이 약해진 듯 하연을 완전히 풀어주었고, 테이블 위에 있던 휴지를 꺼내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만 울어.”하연은 숨을 몰아쉬었다. 이 순간, 그녀의 옷이 위로 말려 올라갔고, 상혁의 눈에 그녀의 몸매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는 욕망을 억누르며 하연을 바르게 세워주고는, 조심스레 눈물을 계속 닦아주었다.“뭘 더 말하길 바라지? 네가 과거에 한서준을 좋아했다는 건 이제 상관없어. 하지만 지금 한씨 집안의 일에 그렇게 끼어들며 화를 자초하는 이유는 나한테 제대로 말한 적이 없지. 왕진의 딸을 구하러 갔을 때 내가 뭐라고 했는지 기억해?”상혁이 잠시 말을 멈췄다.하연의 눈은 붉게 물들었고, 입술도 새빨갛게 부어올랐다.“너한테 물어볼 게 있다고 했지?”“너와 한씨 집안 사이에 다른 연결고리가 있는지 묻고 싶었던 거야.”상혁은 하연과 한서준의 관계가 이미 끝났다는 걸 알기에, 그것에 대해선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았다. 그가 묻고 싶은 것은 다른 것이었다.하연은 그제야 알아차렸다. 자신이 한씨 집안의 일에 집착하는 이유가 타당하지 않다는 사실을, 그리고 똑똑한 상혁이 의심하고 있다는 것을. 상혁은 하연이 스스로 말하길 기다리고 있었다.하연의 머리는 혼란스러웠다. ‘내가 대체 뭐라고 말해야 할까? 내가 한때 첫눈에 반했던 사람이 사실 한씨 집안의 장남인 한명준이라는 사실을 털어놔야 할까?
차 안에 앉아 있던 하연은 마음이 매우 불안했다.운전기사는 국세청의 직원으로, 그녀의 얼굴빛이 좋지 않은 것을 눈치채고는 일부러 위로의 말을 건넸다. “최 사장님,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주경미 사모님께서 B시에 오신 건 다른 행사 때문이고, 오늘 저녁 만찬에는 세 테이블 정도의 인원이 참석합니다. 사모님께서는 아주 온화한 분이라 최 사장님께 폐를 끼치지 않으실 겁니다.”하연이 걱정하는 건 그 문제 때문이 아니었다.그녀는 백미러를 통해 뒤를 바라보았다. 상혁의 차량이 멀지도 가깝지도 않게 뒤따라오고 있었다. 오늘 저녁 만찬에 그는 분명 참석할 것이었다.조금 전에 상혁은 매우 안 좋은 표정으로 떠나기 전에 이렇게 말했다. “잘 생각해 봐, 정말 그 말을 되돌릴 생각이 없는 건지.”하연도 방금 자신이 너무나 충동적이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복잡한 마음으로 아픈 입술을 매만질 뿐이었다.‘이 나쁜 놈!!’...예담정은 상류층의 장소로, 단지 돈이 있다고 들어올 수 있는 곳이 아니었으며, 권력도 있어야 했다.하연은 이런 겉치레에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는 보통 직접적으로 이야기하고, 커피 한 잔을 마시며 일 처리를 끝내는 것을 선호했다. 그래서 이런 곳에는 자연히 잘 오지 않았다.차에서 내렸을 때, 상혁은 이미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서빙하던 직원은 상혁을 매우 공손하게 대했다. 그가 이곳에 온 것은 처음이 아닌 듯했다. “부 대표님, 혼자 오셨나요?”“네.”그는 하연을 돌아보지도 않고, 차가운 어조로 대답하고는 바로 안으로 들어갔다.초대장이 없어도 상혁을 막을 사람은 없었다.하연은 그 뒤를 따라갔고, 함께 온 국세청 직원 김은석은 계속 말이 많았다. “저는 이런 곳에 처음 와봐요. 정말 멋지네요. 최 사장님 덕분에 여기까지 오다니.”처음 오는 곳이라 지리를 잘 모르는 것이 분명했다. 김은석이 망설일 때, 하연은 상혁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말했다. “저쪽으로 가시면 돼요.”긴 복도가 넓게 펼쳐져 있었고, 은은
하연이 이번 연회에 초대된 것은 최근 B시에서 벌어진 소동 속에서 그녀가 억울하게 누명을 썼기 때문이다. 정부는 HT그룹이 무너진 후에도 B시의 주요 납세자인 DS그룹에게 문제가 생기지 않을까 걱정했다. 그래서 하연을 달래기 위한 목적으로 이번 자리를 마련한 것이었다. 연회는 세 개의 테이블로 나뉘어 있었고, 각 테이블은 병풍으로 가려져 있으면서도 약간의 틈이 있었다. 주경미가 인사말을 마치고 나서야 본격적으로 식사가 시작되었다.참석자들은 모두 유명 인사들이었고, 부상혁을 아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리하여 부상혁이 연회에 참석한 것에 놀란 몇몇 사람들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오늘 오전에 FL그룹의 준공식 라이브를 봤는데, 저녁에 부 대표님을 직접 뵙게 됐네요. 정말 인연이군요. 오늘 이곳에는 무슨 일로 오셨나요?”주경미가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왔다는 것은 알려졌지만, 부상혁이 어떻게 이곳에 오게 되었는지 궁금해하는 분위기였다.상혁은 와인잔을 들고 무심한 태도로 말했다. “우연히 사모님을 만나서 저녁 식사에 들른 겁니다.” 그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지만, 눈치 빠른 사람들은 그가 누구를 위해 여기에 왔는지 쉽게 알아챘다.하연이 연회에 모습을 드러냈다는 것을 외부에 공개되지 않았을 뿐, 그녀의 문제가 해결되었음을 의미했다. 부상혁과 최하연의 이별 소문이 무성했지만, 둘이 함께 연회에 참석했다는 것은 만남이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암시했다.주경미 역시 이 상황을 눈치챘다. 그녀는 하연의 옆자리에 앉아, 두 사람을 사이에 두고 가까운 거리에서 주의 깊게 살피기 시작했다. “최 사장님, 제가 상상했던 것보다 더 소녀 같은 느낌이네요. 아주 똑똑해 보이기도 하고요. 최씨 가문의 아가씨로서의 기품이 돋보여요.”하연은 정중하게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과찬이십니다, 사모님. 감사합니다.”주경미는 상혁 쪽을 힐끔 보며 말했다. 그는 옆 테이블에 앉아 있었고, 자주 이쪽을 힐끔거리고 있었다.“몇 년 전, 우리 남편이 B시에서 근무할 때, 우리 B시의 기
하연의 말을 듣고 주경미는 의외라는 듯한 반응을 보였다. ‘최하연과 부상혁과의 관계가 이미 세간에 알려져 있는데, 지금은 두 사람 사이가 이렇게까지 멀어졌다고?’ 하지만 한편으로는 주경미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HT그룹의 몰락에 부상혁이 큰 역할을 했고, 그 과정에서 정태산과 얽히며 여러 사건을 일으켰다. 주경미는 남편이 더 이상 위험에 빠지지 않길 바라며, 최하연과 부상혁이 잘 안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그럼 내가 힘써서 도와줄게요.” 주경미는 미소를 띠며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마침 내가 아는 훌륭한 젊은이들이 있는데, 한번 볼래요?”“좋아요.” 하연은 가볍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주경미가 아는 청년들은 모두 최고급 재벌 2세들이었다. 그 청년들의 조건이 좋지 않다고 하더라도, 조상 대대로 화려한 영광을 누린 가문의 출신들이었다. 그중에는 최씨 가문과 견줄만한 이들도 있었다. 주경미는 사진을 넘기다 한 장의 사진에서 멈췄다. “어, 이분은... 한 검사장님?” 사진 속 남자는 바로 한창명이었다. 그는 검은 눈썹과 날카로운 눈매를 가진 정직한 인상으로 유명했다. “최 사장님, 혹시 이 청년을 알아요? 한창명이라고 해요. 이번에 파견을 받아서 B시에 왔고요. B시에서 다시 수도로 돌아가면 연이어 승진할 거예요. 이 청년은 앞날이 창창하죠. 나이가 좀 있긴 한데, 고려해 볼 만한 인물이에요.” 주경미는 부상혁보다 한창명을 더 선호했다. 한창명은 정태산의 직속 라인에 있었기 때문에 더 안심할 수 있었다.“최 사장님도 명창이가 맘에 들어요?” 주경미가 하연의 반응을 살피며 물었다. “좋다고만 하면, 내가 당장 명창이를 부를게요.”하연은 자연스럽게 상혁 쪽을 힐끔 바라봤는데, 그는 옆 사람과 비즈니스 대화를 나누며 태연한 표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쪽 상황을 아는지에 대한 여부는 알 수 없었다. 하연은 생각할 겨를도 없이 입을 열었다. “좋아요.”주경미는 매우 기뻐하며 한창명에게 연락했다.상혁과 대화를
이 말이 상혁의 귀에 들어갔을 때, 그것은 마치 부씨 가문의 복잡한 관계를 은근히 비꼬는 듯한 느낌이었다. 하연은 더 이상 대응하고 싶지 않았고, 지쳐가는 마음을 느꼈다.상혁의 눈빛이 어두워졌고, 거친 손길로 하연을 자신의 품속으로 확 끌어안으며, 날카롭게 말했다.“그러면 한창명에게 물어보지 그래? 그 사람이 너를 위해 자신의 앞날을 포기할 수 있는지. 설령 그렇다 해도, 끝까지 널 지킬 수 있을 것 같아?”하연은 창피하고 화가 치밀어 올랐다. “이미 말했잖아요! 나도 스스로 해결할 수 있다고요! 당신만 아니었으면, 애초에 이런 곤경에 빠지지도 않았을 거예요!”“그래서 후회해?” 상혁이 그녀의 목덜미에 얼굴을 밀착시키며 낮게 속삭였다. “너와 나 사이, 단지 몇 년간의 얽힘이 아니라, 그 전부터 수십 년간 이어져 온 거잖아. 네가 지우고 싶다고 해서 지워질 사이가 아니라는 뜻이지.” 좁은 공간에서 두 사람의 목소리가 얽히자, 하연은 몸이 뜨거워지는 걸 느꼈다. 상혁은 마치 거대한 산처럼 하연을 압도하며 밀어붙였다.“나와 헤어지고 싶다면, 먼저 이 모든 걸 정리해.”하연은 상혁이 하는 말에 마음 한구석이 아팠다. ‘내가 헤어진다는 말을 꺼낸 건 그저 내 순간적인 감정이었을 뿐인데, 지금 이 나쁜 놈은 나를 이렇게까지 몰아붙이고 있어!!’ “먼저 나를 놓아줘요. 밖에 사람도...” 그녀는 상혁의 귀에 대고 속삭이며 얼굴을 빨갛게 붉혔다.바깥에서 오가는 발소리와 대화 소리, 이 모든 상황은 더욱 긴장감 넘치고 금지된 것처럼 느껴졌다. 상혁은 하연의 머리를 꼭 붙잡고, 일부러 귀에다 대고 속삭였다. “떨어져 있는 동안, 난 네가 너무 그리웠어. 넌 나를 그리워하지 않았어?”하연은 억지로 침착하게 말했다. “안 그리웠어요!”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상혁은 더욱 강하게 하연을 끌어안았고, 두 사람은 옷 너머로 서로의 뜨거운 심장 박동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다시 대답해. 그리웠어, 안 그리웠어?”하연은 다리 사이에 느껴지는 상혁의
밖에 있는 여자들은 ‘그런 소리’가 들리긴 했지만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고, 화장을 고치고 다시 자리를 향해 나섰다.하연은 상혁이 이곳에서 이렇게 대담하게 행동할 줄 몰랐기에 몸을 지탱할 힘도 없이 그의 품에 기댄 채 눈물을 흘렸다. 그녀의 목소리는 이미 쉬어 있었다.상혁은 다리를 살짝 들어 올리며 속삭였다. “왜 울어? 여긴 집이 아니야, 소리 내면 안 돼.”하연의 집이나 상혁의 집에서는 공간이 넓어 목소리가 새어나갈 걱정이 없었다. 그럴 때마다 상혁은 하연의 목소리를 좋아했다. 그녀가 목이 쉬어가며 간절하게 애원하고, 때론 투정 부리는 그 목소리를.상혁은 이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밖에 나가면 주경미 사모님에게 뭐라고 말할 거야?”하연은 이를 악물며 대꾸했다. “당신이 화장실에서 여자랑 바람피웠다고 말할 거예요.”상혁은 미소를 지우지 않으며 묻는다. “네 이름도 같이?”하연은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 “그렇게 큰소리치고 싶다면 해봐요.”상혁은 하연의 힘없는 반응에 슬쩍 입꼬리를 올리며 한층 부드러운 목소리로 달래기 시작했다. “한창명은 너에게 맞지 않아, 연아. 한서준이 널 끌어들인 건, 내가 반드시 뼈저리게 후회하게 할 거야. 그리고 왕진을 찾았어, 병원에서 자기 딸과 함께 있어. 시간 될 때 한 번 들러봐.”그는 모든 것이 철저하게 계획된 상태였음을 밝혔다.하연은 상혁의 주도면밀함에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갑작스러운 소식에 하연의 머릿속이 하얘지고, 몸도 덩달아 흔들렸다. 상혁은 미간을 찌푸리며, 그녀를 간신히 제압했다.바로 그때, 밖에서 식당 직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최 사장님, 여기 계세요? 주경미 사모님께서 찾으십니다.”하연은 화장실에서 너무 오래 머물렀다.그녀가 말을 잇지 못하자, 상혁이 재촉했다. “대답해.”하연은 온 힘을 다해 떨리는 목소리로 답했다. “금방 나가요.”하지만, 상혁의 손길은 여전히 멈추지 않았고, 하연은 간신히 신음을 참았다.식당 직원은 다시 한번 말했다. “주경미 사
상혁도 그 분위기를 감지한 듯, 고개를 돌려 하연을 바라보았다.말은 없었지만, 하연은 상혁이 자신을 살피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먼저 손을 내밀었다. “한 검사장님, 안녕하세요.”하연이 먼저 인사를 건네자, 상혁은 더 이상 머물지 않고 출구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 뒷모습은 망설임 없이 단호했다.한창명도 손을 내밀며 맞잡았다. “하연 씨, 아니 최 사장님이라고 불러야겠네요? 요즘 명성이 대단하던데요.”그의 말투는 공적이었는데, 하연은 곁에 서 있는 이현오를 의미심장하게 바라보았다. “그렇군요, 한 검사장님께서도 저를 알고 계시다니, 영광입니다.”이현오는 하연의 시선을 피하며 어쩔 줄 몰라 했다. 이를 눈치채지 못한 주경미가 대화를 가로막으며 말했다. “아유, 창명아, 여자랑 얘기할 때도 일에 관한 말을 하다니, 어서 들어와 앉거라.”주경미는 부상혁보다 한창명을 더 좋아한다.하연은 한창명을 처음 보았지만, 그의 이름은 여러 번 들어보았다. 한창명은 정직하고 영향력 있는 인물로 유명했다. 하연이 실제로 마주한 한창명은 소문 그대로였다. 단정하고 성실한 모습, 부상혁의 온화함보다는 진지함과 엄격함이 더 두드러지는 사람이었다.한창명은 하연에게 사과하며 차를 따랐다. “아까는 실례했습니다. 최 사장님께 차를 올리겠습니다.”한창명도 하연을 처음 대면했지만, 사진으로만 보던 그녀는 현실에서 훨씬 생기 넘쳤다. 주경미는 이 둘을 잘 엮기 위해, 옆에서 휴게실을 열어놓고 가벼운 게임을 제안하며 분위기를 풀어갔다. 하연은 차를 한 모금 마시며 의미심장하게 한창명의 곁에 있는 이현오를 바라보았다. “이 늦은 시간에 비서까지 대동하셨군요. 업무가 있으셨나요?”한창명은 그녀의 시선을 따라 이현오를 힐끗 보았다. “오기 전에 일이 좀 있었는데, 지금은 다 처리됐습니다.”“이 비서, 먼저 돌아가도 돼.”이현오는 긴장한 얼굴로 하연을 보며 다시 한번 당부했다. “검사장님, 몸을 생각하셔야 합니다. 너무 무리하지
하미주는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다영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뭔가 수상했는데, 표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하지만 자기도 모르게 얼굴의 표정에서 서서히 미소가 사라졌다. 어떤 상황이든, 그녀가 원하는 건 단 하나였다. 딸이 후회하지 않는 길을 가는 것. “다영아, 너는 마음이 너무 순진해. 제발, 누군가에게 이용당하는 일만은 없었으면 좋겠구나.” 그러나 다영은 마치 그 말이 기분 나쁘다는 듯, 휙 손을 뿌리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엄마, 그런 말씀 이제 그만하세요.” 다영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내 선택을 믿어요. 그리고 엄마도 나를 응원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만약 아직도 의심이 된다면, 내일 남준 씨가 오면 직접 물어보세요.” 하미주가 무슨 말을 더 하기 전에, 다영은 그대로 돌아서서 방을 나가버렸다. 딸이 사라진 자리에서, 하미주는 그저 깊은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설날 다음 날.아침부터 집사는 현관 앞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그는 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자, 곧장 앞으로 다가가 공손히 인사했다. “부 대표님.” 상혁은 무심하게 손목을 들어 올려, 소매 끝을 단정히 정리했다. 우아하면서도 여유로운 움직임. 그리고 아무렇지 않은 듯한 목소리. “어제 맡긴 일, 확인했나요?” 집사는 목소리를 낮추며 조용히 보고했다. “후원 CCTV를 확인한 결과, 어젯밤 그곳에 있던 사람은 남준 도련님이었습니다.” 상혁의 손이 멈추지 않았다. 그저 차분하게 마지막 단추를 여미고, 시계를 찬 후 말했다. “알았어요. 나가봐요.” 집사가 조용히 퇴장하자, 상혁은 변함없는 표정으로 몸을 돌렸다. 아래층으로 내려오자, 이미 남준이 식탁에 앉아 있었다.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형,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상혁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짧게 답했다. “새해 복 많이 받아라.” 서로 마주 앉아 있었지만, 그 사이에 감도는 공기는 묘한 정적으로 가득 차 있었
아무 일 아니라는 듯이 서둘러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고 정신을 바짝 차리며 정다영이 억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엄마, 남준 씨가 아마 많이 바쁜가 봐요. 일 끝나면 꼭 세배하러 올 거예요.” 하지만 하미주는 딸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았다. 왜냐하면 자신은 눈이 멀지 않은 이상, 최근의 분위기를 못 느낄 리가 없었다. 그리고 요즘 들어 사람들의 태도가 어떻게 변하는지 똑똑히 보고 있었다.지금 자신마저 마음을 다잡지 못하고 조금이라도 힘이 빠진다면, 언제든 등을 돌릴 준비가 되어 있는 게 세상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애초에 하미주는 딸과 남준의 결혼 자체를 반대한 사람이었다. 하미주가 보기엔, 아무리 돈이 많고, 외형적으로 그럴듯해 보여도, 남준은 결국 ‘첩’의 자식이었다. 그런 가정에서 제대로 된 교육을 받고 자랐을 리가 없었다. 그런데도 다영은 기어코 남준을 붙잡겠다고 난리였다. 그것도 마치, 그 남자가 아니면 죽기라도 할 것처럼. 결국 정지철이 남준을 높게 평가하자, 하미주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인 거였다. 그래서 약혼까지는 허락했는데 예전엔 그럭저럭 신경을 써주던 남준이, 이제는 대놓고 얼굴도 안 비췄다. 하미주는 아주 불만이 많았다.‘명절에 처가집 한 번 들를 생각도 없는 사위가 과연 제대로 가정을 꾸릴 생각이 있을까? 말 다 했지.' 이렇게 생각하자 그녀는 딸의 손을 잡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다영아, 엄마가 하는 말 기분 나빠하지 말고 잘 들어. 이제 네 아버지가 그런 상황이니, 우리 집도 예전 같지 않아. 사람들이 우리를 어떻게 보는지도 너도 잘 알고 있지?” 다영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녀는 당연히 알았다. 아니,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자신은 더욱 필사적으로 버텨야 한다고 결심했다. 이 기회에 확실히 자리 잡지 않으면, 사람들에게 무시당하는 건 시간 문제일 테니까. “엄마, 집안 사정이랑 내 결혼은 상관없는 일이에요.” 하미주는 깊은 한숨을 쉬며,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
상혁은 풍등을 들고 하연과 함께 마당으로 나왔다. 타이밍 좋게 하인이 라이터를 건네주고는 조용히 물러났다. 멀지 않은 곳에서 부남준이 조용히 고개를 내밀었다. 몰래 지켜보던 그는, 두 사람이 자연스럽게 풍등을 펼치는 모습을 바라봤다. 상혁이 직접 가운데 심지에 불을 붙였다. 뜨거운 열기가 천천히 풍등을 부풀게 만들었고, 풍등은 두 사람 앞에서 서서히 떠오르기 시작했다. “하연아, 빨리 소원 빌어!” 하연은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며 간절히 소원을 빌었다. 상혁은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조용히 또 다른 소원을 빌었다. ‘언제나 우리 둘이 해마다, 해마다, 서로를 마주할 수 있기를.' “다 됐어요.” 하연이 조심스럽게 눈을 떴다. 그 눈빛에는 반짝이는 빛이 서려 있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서서히 손을 놓았다. 풍등은 하늘을 향해 천천히 날아올랐고, 점점 멀어지더니 마침내 한 점이 되어 사라졌다. “어떤 소원 빌었어?” 상혁이 손끝으로 하연의 귓불을 살짝 어루만지며 물었다. 하연은 장난기 어린 눈빛으로 깜빡이며 말했다. “소원은 말하면 이루어지지 않는대요.” “그래? 그럼, 네 소원이 꼭 이루어지길 바랄게.” 두 사람은 다시 눈을 마주쳤다. 상혁의 숨소리가 깊어졌다. 그는 하연의 턱을 살며시 잡고, 몸을 숙여 그녀의 입술을 맞췄다. 조심스러웠던 키스는 점점 더 깊어져 갔다. 하연은 숨이 가빠졌다. 상혁을 밀어보려 했지만, 오히려 더 깊이 끌어안겼다. 여자의 허리는 유연하게 휘어졌고, 상혁의 등은 팽팽한 활처럼 긴장됐다. 결국, 하연도 상혁의 목을 감싸 안고, 키스에 응답했다. 그러나 그 순간, 불청객 같은 전화벨 소리가 분위기를 깨뜨렸다. 하연은 화들짝 놀라며, 급하게 상혁을 밀어냈다. 그녀의 얼굴은 빨갛게 익은 사과처럼 새빨개졌다. “전화 울리는데요?” 하연의 목소리는 한층 낮아져 있었다. 묘하게 사람을 간지럽게 만드는 목소리였다. 상혁은
다른 곳에서 있던 조봉규가 소란이 일자마자 급히 뛰어 들어왔다. 그리고 빠른 걸음으로 송혜선에게 다가가며 다급히 말했다. “설날인데, 뭐하러 이렇게 화를 내...” 조봉규가 입을 여는 순간, 남준의 온몸이 싸늘하게 굳어졌다. 남준의 시선이 날카롭게 쏘아붙었고, 조봉규는 본능적으로 움찔하며 고개를 돌렸지만, 이내 애써 태연한 척하며 한 발 다가섰다. 송혜선의 팔을 조심스레 부축하며 낮은 목소리로 달랬다. “지금은 무엇보다도 건강이 우선입니다.” ‘건강?’남준은 손에 쥔 염주를 힘껏 움켜쥐었다. 힘이 들어간 손등에는 핏대가 서고, 눈빛은 살얼음처럼 차가웠다. 그리고 시선은 서로 닿아 있는 두 사람의 손목에 단단히 고정되었다. 입가에 엷은 조소가 떠올랐다. “조 선생님, 참으로 열정적인 분이시군요. 설날에도 근무 태세를 유지하시다니.” 조봉규는 눈치가 빠른 인물이었다. 당연히 그의 말 속에 담긴 조롱을 알아챘다. 그러나 겉으로는 한껏 공손한 태도를 유지하며 머리를 숙였다. “별말씀을요. 환자의 곁을 지키는 게 제 본분입니다.” 남준은 가만히 조봉규를 노려보다가, 짧고 날 선 경고를 던졌다. “그렇다면 본분에만 충실하시죠. 여긴 부씨 가문의 본가이니까.” 순간, 분위기가 얼어붙었다. “남준아!” 송혜선이 다급히 나섰다. 남준을 나무라는 말투였지만, 그 속에는 조봉규를 감싸려는 의도가 분명히 깔려 있었다. 남준의 눈빛은 더욱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그러나 송혜선은 오히려 기세를 올려 쏟아내듯 말했다. “네가 좀 더 나서서 잘했더라면, 부상혁한테 밀릴 일도 없었어! 내가 왜 조진숙한테 설날마다 굽신거려야 하냐고?” “지금, 어머니는 나를 원망하시는 겁니까?” 목소리가 한층 낮아졌다. 남준의 손에서 염주의 한 알이 ‘탁' 하고 부서졌다. “남준아! 지금 네가 무슨 짓을 한 거야?” 송혜선은 깜짝 놀라 소리쳤다. “염주는 영적인 기운이 깃든 물건이야. 함부로 부수면 불길한 일이 생길
부동건의 말은 송혜선을 전적인 신뢰를 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나중에 진실이 밝혀지면, 과연 부동건은 스스로를 어떻게 납득할까?’ ‘결국 속아서 살아온 날이 우스운 바보일 뿐...’ 조진숙은 아무 말 없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애틋한 사랑인데, 굳이 이럴 필요가 있을까?” 잠시 뜸을 들이던 그녀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이 서류들, 가져가.” “나 다른 뜻은 없어.” 부동건은 조진숙의 단호한 태도에 살짝 주춤했지만, 곧장 다시 설득을 시도했다. “네가 아직 날 원망하고 있다는 거 알아. 그동안... 혹시 네가...” “착각하지 마.” 조진숙은 부동건의 말을 끊었다. 더 이상 불필요한 감정 소모를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부동건은 한 발 더 다가섰다. “하지만 네가 이걸 받지 않는다면, 결국 날 아직도 원망하고 있다는 뜻 아니야?” 조진숙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 가슴 깊숙이 가라앉은 감정이 불쑥 떠오르는 듯했다. 그녀는 천천히 숨을 들이마시며 감정을 정리한 뒤, 담담한 목소리로 물었다. “당신... 정말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어?” 부동건은 말없이 서류를 정리하더니, 숙련된 손놀림으로 만년필을 열어 조진숙 앞에 내밀었다. 이것이 바로 자신의 대답이었다. “후회할 거였으면, 애초에 여기 오지도 않았어.” 이번엔 조진숙도 망설이지 않았다. 그녀는 펜을 들어, 서류 맨 아래에 단호한 필체로 자신의 이름을 남겼다. “부디 이 선택을 후회하는 날이 오지 않길 바라.” 부동건은 서류를 덮으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제야, 마음속에 짓눌려 있던 무언가가 비로소 내려앉는 듯했다. 그는 문득 나직이 말했다. “이제야... 후회한들, 이제 돌아갈 길도 없어.” 조진숙은 그 말에 가슴이 미세하게 흔들렸지만, 끝내 시선을 돌렸다. 담담한 표정 속에 모든 감정을 삼키며, 단 한마디만 남겼다. “이건... 다 정해진 운명이야.” ‘운명의 장난...’ ‘어쩔 수
“무슨 말씀인지 압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제 뜻대로 하게 해주십시오.” 부동건의 태도가 단호했다. 이를 지켜보던 부해철이 더 이상의 말은 의미가 없을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이미 네가 마음을 정했다면, 내가 더 이상 뭐라 할 수도 없지. 다만, 앞으로 그 여자를 내 앞에 데려오지는 마라. 네가 어떻게 살든 상관하지 않을 테니.” “그리고...” 부동건이 무슨 말을 더 하려 했지만, 부해철은 손을 휘저으며 등을 돌렸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라지는 뒷모습만이 남았다. ‘그렇게까지 반대할 줄은 몰랐네...’ 부동건은 묘한 기분으로 그 자리에 멈춰섰다. ...설날 온 나라가 한 해의 끝을 보내고, 가족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날. 예전에는 늘 조진숙과 상혁 모자가 함께 보내던 명절이었다. 그런데 올해는 조금 달랐다. 최씨 가문과 부씨 가문의 본가가 가까운 데다, 명절이 지나면 하연과 상혁의 약혼식이 있을 예정이었다.그래서 조진숙이 제안했고, 양가 가족들이 함께 부씨 가문에서 설날 저녁을 보내기로 했다. 그 덕분에 조진숙은 하루 종일 분주하게 준비에 매진했다. 그러나 제사가 끝나자마자 뜻밖의 손님이 찾아왔다. “진숙아, 새해 복 많이 받아.” 부동건이 어색한 미소를 띠며 낮은 자세로 인사를 건넸다. 평소 같았으면 송혜선과 함께 명절을 보낼 사람이, 오늘 이곳에 나타났다는 것 자체가 조진숙에게는 뜻밖이었다.그녀는 담담한 얼굴로 물었다. “여긴 웬일이죠?” “잠깐 들렀어, 당신한테 할 말도 있고 해서.” 조진숙은 그의 시선을 따라 문득 집안 분위기를 둘러보았다. 송혜선이 이곳에 들어온 이후, 부씨 가문 본가는 한 지붕 아래에서도 철저하게 북쪽과 남쪽으로 나뉘어 있었다.그 경계는 뚜렷했고, 불필요한 마주침은 없었다. 부동건이 송혜선과의 결혼을 공식적으로 선언한 이후, 둘은 한 번도 마주친 적이 없었다.만약 이번 일이 없었다면, 조진숙 역시 이미 오래전에 이 집을 떠났을 터였다. “들어와.
송혜선은 급히 분위기를 누그러뜨리려 했다. “아무래도 남준이가 좀 늦나 봐요. 조금만 더 기다려 보시는 게 어떨까요?” 부동건은 차갑게 코웃음을 치며 얼굴을 굳혔다. “말 같지도 안은 소리를 하고 있어! 오늘 같은 날에, 시간 개념도 없이 늑장을 부려.” 송혜선은 딱히 반박할 말이 없었다. 결국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 “남준이 오면 꼭 제가 주의를 줄게요.” “교육 똑바로 시켜. 좀 상혁이 하는 것에 반만큼이라도 신중했으면, 나도 그 녀석한테 좀더 잘해 줬을 거야.” ‘또 시작이군.’ 송혜선은 속이 쓰렸지만, 이를 악물고 참았다. “오면 오는 거고, 못 오면 어쩔 수 없지.” 부동건은 한 치의 여지도 주지 않고 단호하게 내뱉곤, 그대로 자리를 떠났다. “어서 남준이를 찾아와! 오늘 제사에 참석하지 못하면, 앞으로 나를 어머니라고 부를 생각은 하지도 마.” 송혜선의 가슴이 격하게 오르내렸다. 이 모든 노력들이 사소한 실수 하나로 무너질 순 없었다. ...부씨 가문은 제사에 있어서 철저한 예법을 중시했다. 다행히도 상혁은 부동건과 수년간 제사를 지내며 익숙해져 있었고, 모든 절차를 한 치의 오차 없이 진행했다. 부씨 가문의 어른들 역시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동건아, 상혁이가 있어서 네 대가 끊길 걱정은 없겠구나.” “앞으로 부씨 가문의 대업을 상혁이가 이어간다면, 우리 늙은이들도 한시름 덜겠어.” 부동건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야 물론이죠. 상혁이는 부씨 가문의 기둥이 될 인재입니다.” 상혁은 겸손한 태도로 말했다. “과찬이십니다. 앞으로도 많이 지도해 주십시오.” “어디 우리가 너희 젊은이들에게 배우는 게 더 많지!” “...”제사가 거의 끝나갈 무렵, 부남준이 느지막이 모습을 드러냈다. 부동건은 남준을 보자마자 눈빛이 차갑게 식었지만, 일단 감정을 누르고 말했다. “멍하니 서 있지 말고, 어서 와서 절부터 올려라.” 남준은 살짝 눈썹을
최씨 가문의 따뜻한 분위기와 달리, 부씨 가문의 본가는 싸늘하고 조용했다.예년과 다름없이, 설날이 되면 부동건은 집안의 남자들과 함께 조상들에게 제사를 올려야 했다. 올해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른 아침부터 송혜선은 핸드폰을 손에 쥐고 부남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연결음만 울릴 뿐, 남준은 끝내 받지 않았다. ‘이 녀석은 정말이지, 사람 속을 태우는 재주가 있다니까.’ 송혜선의 얼굴에 점점 초조한 기색이 드러났다. 옆에서 지켜보던 조봉규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때? 아직도 전화를 안 받아?” 송혜선은 짙어진 눈매로 핸드폰을 내려다보며 입술을 꾹 다물었다. “이 녀석, 정말 사람을 신경 쓰게 만드네! 도대체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거야...!” 조봉규는 부드러운 말투로 그녀를 달랬다. “혹시 무슨 사정이 있어서 늦는 걸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너무 걱정 마십시오. 남준이가 철없는 아이도 아니고.” ‘철없는 아이가 아닌데 이러겠어?’ 송혜선은 속으로 한숨을 삼키며, 최대한 감정을 눌렀다. “부씨 가문의 어른들이 원래부터 남준이를 못마땅해했는데. 이런 중요한 제사까지 빠지면, 분명 뒷말이 나올 거야.” 그녀의 말투에는 이미 불안과 초조함이 서려 있었다.그러는 사이, 두 사람이 작은 응접실에서 나와 복도를 따라 걸어갔다. 그때, 정면에서 다가오던 부동건과 마주쳤다. 부동건은 갓 외투를 정리하던 참이었다. 하지만 송혜선과 조봉규가 함께 있는 모습을 보자, 손동작이 살짝 느려지며 묘한 시선을 던졌다. “조 선생, 올해도 그렇게 혜선이 옆에 딱 붙어서 열심히 잘 보살펴 주세요.” 그 말 한마디에, 분위기가 묘하게 변했다.조봉규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한 발짝 뒤로 물러서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무슨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회장님, 제가 해야 할 일을 할 뿐입니다.” 부동건은 묘한 눈빛을 유지한 채, 덤덤히 말했다. “혜선이가 아이를 무사히 낳으면, 그에 대한 보상도 충분히 해줄 테니
두 집안이 한데 모여 북적이며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이런 귀한 순간을 마음껏 즐기며 보내다 보니, 어느덧 설날 전날이 되었다. 모두 함께 전용기를 타고 F국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설날이 밝았다. 올해는 오랜만에 최씨 가문 식구들이 한자리에 모인 데다, 기쁜 소식까지 겹친 한 해였다. 그 덕분인지 최동신은 평소보다 더욱 설 준비에 신경을 쓰고 있었다. 이른 아침부터 최씨 가문의 본가는 분주했다. 집사와 고용인들이 분주히 움직이며 저택 곳곳을 장식했다. 새빨간 복주머니와 길상 문양이 새겨진 장식들이 하나둘 자리 잡았고, 정원에는 화려한 등불이 걸리며 설 분위기가 한층 더 짙어졌다.하연이 계단을 내려오자, 기다렸다는 듯 최하성이 환한 얼굴로 다가왔다. “하연아, 새해 복 많이 받아라.” 그러면서 두툼한 세뱃돈 봉투를 그녀에게 내밀었다. 하연은 두 눈을 반짝이며 얼른 봉투를 받았다. “와! 이렇게 두꺼워요? 하성 오빠 최고!” 그때, 계단 위에서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도 있다.” 최하경이었다. 그 역시 두툼한 세뱃돈 봉투를 들고 내려왔다. “작년, 재작년 다 해외에 있어서 못 챙겨줬잖아. 그래서 올해 한꺼번에 더 두둑이 넣었다.” “와! 이건 더 두껍잖아요! 이러다 손목 나가겠어요!” 하연은 연달아 두 개의 두툼한 봉투를 받아 들고, 각각 한쪽 팔을 오빠들에게 걸었다. “오빠들 있어서 진짜 좋아요!” 최하성, 최하경 둘 다 서로를 바라보며 우애가 넘치는 미소를 지었다. 그때, 문이 열렸다. 그리고 최하민과 예아름이 나란히 들어왔다. 추운 바깥 공기를 뚫고 들어오자마자, 하민은 아름의 목에서 목도리를 부드럽게 풀어주었다. 그는 안쪽에서 떠들썩하게 웃고 있는 세 남매를 보고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우리 집이 이렇게 활기찬 게 얼마 만이에요!” 아름도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 “그러게요. 앞으로 더 행복한 일만 가득할 거예요.” 하민은 아내의 허리를 가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