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사과요? 필요 없어요. 부 대표님의 사과는 내가 감당할 수 없으니, 그냥 거둬들이세요.”하연은 상혁의 강한 손아귀에서 벗어나려고 했지만, 그의 힘이 훨씬 더 강해져 도망칠 수 없었다. 한쪽에는 그녀가 이미 챙겨놓은 짐들이 있었다. 상혁은 그 짐을 한 번 흘깃 보고 나서, 그녀의 긴 머리카락을 손으로 쓰다듬으며 물었다.“나갈 준비 다 됐네, 어디로 가려고?”그는 뻔히 알면서 물었다. 지금 하연이 어디로 가든, 분명 그를 찾으러 가는 것은 아닐 것이다.“돌아갈 집이 없어서가 아니라, 해야 할 일이 많아요. 출장을 가든지 해서 어디서든 일을 처리해야 하죠. 부 대표님은 FL그룹 하나 관리하는 것만으로도 바쁘실 텐데, 제 일까지 신경 쓰시나요?”하연은 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억누르며 계속해서 그의 품에서 벗어나려 애썼다.“놔요. 냄새 나요.”마침내 상혁의 손길이 느슨해졌고, 하연은 그에게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녀는 몸을 돌려 상혁을 보지 않고 방 안쪽으로 걸어갔다.상혁은 자신에게서 나는 향수 냄새를 알아차렸다. 그는 셔츠의 단추를 풀고, 입고 있던 재킷을 벗어 한쪽에 던졌다.“우리 어머니에게도 비밀로 하고, 이 연극을 최대한 진짜처럼 연출하려고 했어. 그래야 한서준과 이방규가 내가 DL그룹에서 버림받은 걸 믿고, 내가 막다른 골목에 몰렸다고 생각할 테니까. 너한테 말하지 않은 건, 네가 위험에 휘말릴까 봐서였어.”그는 직접 설명하기 시작했다.하연은 테이블 위의 물건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는데, 눈은 그곳에 있지만 초점이 맞지 않은 상태였다.“서태진의 사설 금융 조직에 관한 일들, 오빠도 이미 알고 있었죠?”“그래.”“HT그룹의 내 세금 문제도요?”“그래.”상혁은 솔직했다.“그런데 왜 나한테 말하지 않았어요?”“너도 봤잖아. 이 문제를 국내에서 해결하는 건 정말 복잡해. 한서준은 그걸 자신의 마지막 카드로 쓰려고 했고, 네가 그 사실을 알게 되면 너에게 손을 쓸 게 분명했지. 그래서 아무도 모르게 역공을 해야 했어.
하연은 짜증과 피곤함이 가득한 목소리로 말하며, 상혁에게 전혀 따뜻함을 보여주지 않았다.상혁의 얼굴은 그다지 좋지 않았지만 여전히 인내심을 갖고 말했다. “황 비서가 말했어, 네가 오늘 나온다고. 내가 데려다줄게.”“정말 수고하셨네요, 부 대표님. 방금 라이브 방송을 끝내고도 날 데리러 오시다니, 그런데 그만한 가치가 있을까요? 나는 당신처럼 명예롭게 무죄를 입증받은 사람이 아니잖아요. 오히려 더러워질 뻔한 사람인데요.”하연은 어깨를 떨며, 화를 억누르지 못한 채 비꼬는 말투로 그에게 말을 이어갔다.“하연아.” 상혁은 목소리를 낮췄지만, 인내심이 거의 바닥나고 있었다.바로 그때, 벨이 울렸고, 직원의 목소리가 들렸다. “최 사장님, 옷을 가져왔습니다.”상혁은 시선을 돌리고 한발 물러났다. 하연은 깊게 숨을 들이쉬고, 문을 살짝 열어 옷을 받았다.“최 사장님, 늦어도 7시까지는 가셔야 합니다. 제가 모시겠습니다.”하연이 대답하지 않고 문을 닫으려 하자, 상혁이 그녀의 등 뒤에서 손을 내밀어 문을 닫아주었다. 그의 체온과 향기가 하연을 감싸는 듯했다.옷은 새로 나온 드레스였고, 개인적인 모임에서 입을 법한 옷이었다.“어디 가는 거야?” 상혁의 숨결이 하연의 귓가에 닿았는데, 그의 목소리에는 약간의 추궁이 섞여 있었다.하연이 드레스를 꽉 쥐자, 그가 한발 앞서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그가 하연이 반항하려는 걸 미리 알았다는 듯한 반응을 보이자, 그녀가 화가 나서 상혁의 발을 세게 밟았다.상혁은 아프다는 소리조차 내지 않았다. “여전히 손발을 잘 쓰는구나. 자면서도 가만히 있지 않았고, 아침마다 네가 내 위에 걸쳐 있어도 날 탓했잖아.”그는 사적인 이야기를 태연하게 입 밖으로 내뱉었고, 하연은 얼굴이 벌게졌다. “그만해요! 그런 얘기하고 싶지 않아요!”“어디 가는 건데?”그는 포기하지 않고 물었고, 하연도 어쩔 수 없었다. “부 대표님 덕분에, 정태산 선생님의 부인이 특별히 날 보러 오신대요.”그 이름을 듣자마자
상혁은 침묵하며 차가운 눈빛을 내뿜고 있었다.“부상혁 씨!! 당신의 계획도, 당신의 미래도, 그리고 당신이 컴퓨터를 공부했다는 사실조차도 나는 전혀 몰랐어요. 나는 당신한테 속아서 바보처럼 당신이 시키는 대로만 움직였다고요!!” 하연은 결국 참아왔던 울음을 터뜨렸다. 며칠간 쌓였던 억울함이 한순간에 터져 나왔고, 구슬같은 눈물이 상혁의 손바닥으로 흘러내렸다. 그 뜨거운 눈물에 상혁은 미간을 찌푸렸다.“겉으로는 나를 좋아한다고 말하지만, 나를 꼭두각시로 만들고 있잖아요. 이건 정말 불공평하고요!! 부상혁 씨!!”상혁은 그제야 마음이 약해진 듯 하연을 완전히 풀어주었고, 테이블 위에 있던 휴지를 꺼내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만 울어.”하연은 숨을 몰아쉬었다. 이 순간, 그녀의 옷이 위로 말려 올라갔고, 상혁의 눈에 그녀의 몸매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는 욕망을 억누르며 하연을 바르게 세워주고는, 조심스레 눈물을 계속 닦아주었다.“뭘 더 말하길 바라지? 네가 과거에 한서준을 좋아했다는 건 이제 상관없어. 하지만 지금 한씨 집안의 일에 그렇게 끼어들며 화를 자초하는 이유는 나한테 제대로 말한 적이 없지. 왕진의 딸을 구하러 갔을 때 내가 뭐라고 했는지 기억해?”상혁이 잠시 말을 멈췄다.하연의 눈은 붉게 물들었고, 입술도 새빨갛게 부어올랐다.“너한테 물어볼 게 있다고 했지?”“너와 한씨 집안 사이에 다른 연결고리가 있는지 묻고 싶었던 거야.”상혁은 하연과 한서준의 관계가 이미 끝났다는 걸 알기에, 그것에 대해선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았다. 그가 묻고 싶은 것은 다른 것이었다.하연은 그제야 알아차렸다. 자신이 한씨 집안의 일에 집착하는 이유가 타당하지 않다는 사실을, 그리고 똑똑한 상혁이 의심하고 있다는 것을. 상혁은 하연이 스스로 말하길 기다리고 있었다.하연의 머리는 혼란스러웠다. ‘내가 대체 뭐라고 말해야 할까? 내가 한때 첫눈에 반했던 사람이 사실 한씨 집안의 장남인 한명준이라는 사실을 털어놔야 할까?
차 안에 앉아 있던 하연은 마음이 매우 불안했다.운전기사는 국세청의 직원으로, 그녀의 얼굴빛이 좋지 않은 것을 눈치채고는 일부러 위로의 말을 건넸다. “최 사장님,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주경미 사모님께서 B시에 오신 건 다른 행사 때문이고, 오늘 저녁 만찬에는 세 테이블 정도의 인원이 참석합니다. 사모님께서는 아주 온화한 분이라 최 사장님께 폐를 끼치지 않으실 겁니다.”하연이 걱정하는 건 그 문제 때문이 아니었다.그녀는 백미러를 통해 뒤를 바라보았다. 상혁의 차량이 멀지도 가깝지도 않게 뒤따라오고 있었다. 오늘 저녁 만찬에 그는 분명 참석할 것이었다.조금 전에 상혁은 매우 안 좋은 표정으로 떠나기 전에 이렇게 말했다. “잘 생각해 봐, 정말 그 말을 되돌릴 생각이 없는 건지.”하연도 방금 자신이 너무나 충동적이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복잡한 마음으로 아픈 입술을 매만질 뿐이었다.‘이 나쁜 놈!!’...예담정은 상류층의 장소로, 단지 돈이 있다고 들어올 수 있는 곳이 아니었으며, 권력도 있어야 했다.하연은 이런 겉치레에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는 보통 직접적으로 이야기하고, 커피 한 잔을 마시며 일 처리를 끝내는 것을 선호했다. 그래서 이런 곳에는 자연히 잘 오지 않았다.차에서 내렸을 때, 상혁은 이미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서빙하던 직원은 상혁을 매우 공손하게 대했다. 그가 이곳에 온 것은 처음이 아닌 듯했다. “부 대표님, 혼자 오셨나요?”“네.”그는 하연을 돌아보지도 않고, 차가운 어조로 대답하고는 바로 안으로 들어갔다.초대장이 없어도 상혁을 막을 사람은 없었다.하연은 그 뒤를 따라갔고, 함께 온 국세청 직원 김은석은 계속 말이 많았다. “저는 이런 곳에 처음 와봐요. 정말 멋지네요. 최 사장님 덕분에 여기까지 오다니.”처음 오는 곳이라 지리를 잘 모르는 것이 분명했다. 김은석이 망설일 때, 하연은 상혁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말했다. “저쪽으로 가시면 돼요.”긴 복도가 넓게 펼쳐져 있었고, 은은
하연이 이번 연회에 초대된 것은 최근 B시에서 벌어진 소동 속에서 그녀가 억울하게 누명을 썼기 때문이다. 정부는 HT그룹이 무너진 후에도 B시의 주요 납세자인 DS그룹에게 문제가 생기지 않을까 걱정했다. 그래서 하연을 달래기 위한 목적으로 이번 자리를 마련한 것이었다. 연회는 세 개의 테이블로 나뉘어 있었고, 각 테이블은 병풍으로 가려져 있으면서도 약간의 틈이 있었다. 주경미가 인사말을 마치고 나서야 본격적으로 식사가 시작되었다.참석자들은 모두 유명 인사들이었고, 부상혁을 아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리하여 부상혁이 연회에 참석한 것에 놀란 몇몇 사람들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오늘 오전에 FL그룹의 준공식 라이브를 봤는데, 저녁에 부 대표님을 직접 뵙게 됐네요. 정말 인연이군요. 오늘 이곳에는 무슨 일로 오셨나요?”주경미가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왔다는 것은 알려졌지만, 부상혁이 어떻게 이곳에 오게 되었는지 궁금해하는 분위기였다.상혁은 와인잔을 들고 무심한 태도로 말했다. “우연히 사모님을 만나서 저녁 식사에 들른 겁니다.” 그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지만, 눈치 빠른 사람들은 그가 누구를 위해 여기에 왔는지 쉽게 알아챘다.하연이 연회에 모습을 드러냈다는 것을 외부에 공개되지 않았을 뿐, 그녀의 문제가 해결되었음을 의미했다. 부상혁과 최하연의 이별 소문이 무성했지만, 둘이 함께 연회에 참석했다는 것은 만남이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암시했다.주경미 역시 이 상황을 눈치챘다. 그녀는 하연의 옆자리에 앉아, 두 사람을 사이에 두고 가까운 거리에서 주의 깊게 살피기 시작했다. “최 사장님, 제가 상상했던 것보다 더 소녀 같은 느낌이네요. 아주 똑똑해 보이기도 하고요. 최씨 가문의 아가씨로서의 기품이 돋보여요.”하연은 정중하게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과찬이십니다, 사모님. 감사합니다.”주경미는 상혁 쪽을 힐끔 보며 말했다. 그는 옆 테이블에 앉아 있었고, 자주 이쪽을 힐끔거리고 있었다.“몇 년 전, 우리 남편이 B시에서 근무할 때, 우리 B시의 기
하연의 말을 듣고 주경미는 의외라는 듯한 반응을 보였다. ‘최하연과 부상혁과의 관계가 이미 세간에 알려져 있는데, 지금은 두 사람 사이가 이렇게까지 멀어졌다고?’ 하지만 한편으로는 주경미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HT그룹의 몰락에 부상혁이 큰 역할을 했고, 그 과정에서 정태산과 얽히며 여러 사건을 일으켰다. 주경미는 남편이 더 이상 위험에 빠지지 않길 바라며, 최하연과 부상혁이 잘 안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그럼 내가 힘써서 도와줄게요.” 주경미는 미소를 띠며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마침 내가 아는 훌륭한 젊은이들이 있는데, 한번 볼래요?”“좋아요.” 하연은 가볍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주경미가 아는 청년들은 모두 최고급 재벌 2세들이었다. 그 청년들의 조건이 좋지 않다고 하더라도, 조상 대대로 화려한 영광을 누린 가문의 출신들이었다. 그중에는 최씨 가문과 견줄만한 이들도 있었다. 주경미는 사진을 넘기다 한 장의 사진에서 멈췄다. “어, 이분은... 한 검사장님?” 사진 속 남자는 바로 한창명이었다. 그는 검은 눈썹과 날카로운 눈매를 가진 정직한 인상으로 유명했다. “최 사장님, 혹시 이 청년을 알아요? 한창명이라고 해요. 이번에 파견을 받아서 B시에 왔고요. B시에서 다시 수도로 돌아가면 연이어 승진할 거예요. 이 청년은 앞날이 창창하죠. 나이가 좀 있긴 한데, 고려해 볼 만한 인물이에요.” 주경미는 부상혁보다 한창명을 더 선호했다. 한창명은 정태산의 직속 라인에 있었기 때문에 더 안심할 수 있었다.“최 사장님도 명창이가 맘에 들어요?” 주경미가 하연의 반응을 살피며 물었다. “좋다고만 하면, 내가 당장 명창이를 부를게요.”하연은 자연스럽게 상혁 쪽을 힐끔 바라봤는데, 그는 옆 사람과 비즈니스 대화를 나누며 태연한 표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쪽 상황을 아는지에 대한 여부는 알 수 없었다. 하연은 생각할 겨를도 없이 입을 열었다. “좋아요.”주경미는 매우 기뻐하며 한창명에게 연락했다.상혁과 대화를
이 말이 상혁의 귀에 들어갔을 때, 그것은 마치 부씨 가문의 복잡한 관계를 은근히 비꼬는 듯한 느낌이었다. 하연은 더 이상 대응하고 싶지 않았고, 지쳐가는 마음을 느꼈다.상혁의 눈빛이 어두워졌고, 거친 손길로 하연을 자신의 품속으로 확 끌어안으며, 날카롭게 말했다.“그러면 한창명에게 물어보지 그래? 그 사람이 너를 위해 자신의 앞날을 포기할 수 있는지. 설령 그렇다 해도, 끝까지 널 지킬 수 있을 것 같아?”하연은 창피하고 화가 치밀어 올랐다. “이미 말했잖아요! 나도 스스로 해결할 수 있다고요! 당신만 아니었으면, 애초에 이런 곤경에 빠지지도 않았을 거예요!”“그래서 후회해?” 상혁이 그녀의 목덜미에 얼굴을 밀착시키며 낮게 속삭였다. “너와 나 사이, 단지 몇 년간의 얽힘이 아니라, 그 전부터 수십 년간 이어져 온 거잖아. 네가 지우고 싶다고 해서 지워질 사이가 아니라는 뜻이지.” 좁은 공간에서 두 사람의 목소리가 얽히자, 하연은 몸이 뜨거워지는 걸 느꼈다. 상혁은 마치 거대한 산처럼 하연을 압도하며 밀어붙였다.“나와 헤어지고 싶다면, 먼저 이 모든 걸 정리해.”하연은 상혁이 하는 말에 마음 한구석이 아팠다. ‘내가 헤어진다는 말을 꺼낸 건 그저 내 순간적인 감정이었을 뿐인데, 지금 이 나쁜 놈은 나를 이렇게까지 몰아붙이고 있어!!’ “먼저 나를 놓아줘요. 밖에 사람도...” 그녀는 상혁의 귀에 대고 속삭이며 얼굴을 빨갛게 붉혔다.바깥에서 오가는 발소리와 대화 소리, 이 모든 상황은 더욱 긴장감 넘치고 금지된 것처럼 느껴졌다. 상혁은 하연의 머리를 꼭 붙잡고, 일부러 귀에다 대고 속삭였다. “떨어져 있는 동안, 난 네가 너무 그리웠어. 넌 나를 그리워하지 않았어?”하연은 억지로 침착하게 말했다. “안 그리웠어요!”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상혁은 더욱 강하게 하연을 끌어안았고, 두 사람은 옷 너머로 서로의 뜨거운 심장 박동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다시 대답해. 그리웠어, 안 그리웠어?”하연은 다리 사이에 느껴지는 상혁의
밖에 있는 여자들은 ‘그런 소리’가 들리긴 했지만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고, 화장을 고치고 다시 자리를 향해 나섰다.하연은 상혁이 이곳에서 이렇게 대담하게 행동할 줄 몰랐기에 몸을 지탱할 힘도 없이 그의 품에 기댄 채 눈물을 흘렸다. 그녀의 목소리는 이미 쉬어 있었다.상혁은 다리를 살짝 들어 올리며 속삭였다. “왜 울어? 여긴 집이 아니야, 소리 내면 안 돼.”하연의 집이나 상혁의 집에서는 공간이 넓어 목소리가 새어나갈 걱정이 없었다. 그럴 때마다 상혁은 하연의 목소리를 좋아했다. 그녀가 목이 쉬어가며 간절하게 애원하고, 때론 투정 부리는 그 목소리를.상혁은 이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밖에 나가면 주경미 사모님에게 뭐라고 말할 거야?”하연은 이를 악물며 대꾸했다. “당신이 화장실에서 여자랑 바람피웠다고 말할 거예요.”상혁은 미소를 지우지 않으며 묻는다. “네 이름도 같이?”하연은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 “그렇게 큰소리치고 싶다면 해봐요.”상혁은 하연의 힘없는 반응에 슬쩍 입꼬리를 올리며 한층 부드러운 목소리로 달래기 시작했다. “한창명은 너에게 맞지 않아, 연아. 한서준이 널 끌어들인 건, 내가 반드시 뼈저리게 후회하게 할 거야. 그리고 왕진을 찾았어, 병원에서 자기 딸과 함께 있어. 시간 될 때 한 번 들러봐.”그는 모든 것이 철저하게 계획된 상태였음을 밝혔다.하연은 상혁의 주도면밀함에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갑작스러운 소식에 하연의 머릿속이 하얘지고, 몸도 덩달아 흔들렸다. 상혁은 미간을 찌푸리며, 그녀를 간신히 제압했다.바로 그때, 밖에서 식당 직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최 사장님, 여기 계세요? 주경미 사모님께서 찾으십니다.”하연은 화장실에서 너무 오래 머물렀다.그녀가 말을 잇지 못하자, 상혁이 재촉했다. “대답해.”하연은 온 힘을 다해 떨리는 목소리로 답했다. “금방 나가요.”하지만, 상혁의 손길은 여전히 멈추지 않았고, 하연은 간신히 신음을 참았다.식당 직원은 다시 한번 말했다. “주경미 사
배가 항구에 서서히 가까워질 때, 허징인은 저 멀리 보이는 부두를 응시하면서 머릿속에서 끔찍했던 기억들이 마치 영화처럼 재생되기 시작했다. 그날의 비명, 피 냄새, 그리고 민찬의 얼굴... ‘다시는 이곳에 돌아오고 싶지 않았는데...’ 그녀는 참았던 감정이 북받쳐 오른 듯 숨을 깊게 들이쉬며 한 걸음 앞으로 다가갔다. 난간을 꽉 잡은 여자의 손에 힘이 들어가면서 하얀 손등에 핏줄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허징인의 떨리는 손끝은 마음속 분노와 슬픔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그때, 상혁이 조용히 허징인 곁에 다가왔다. 남자의 낮고 차분한 목소리가 바닷바람에 섞여 들려왔다. “배에서 내리면, 제 부하들이 안전한 곳으로 허징인 씨를 모실 겁니다. 모든 게 끝날 때까지 절대 모습을 드러내지 마세요.” 허징인은 거센 바람에 머리카락이 날리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여자의 차가운 눈빛과 함께 낮고 냉정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부 대표님, 하나 부탁드릴 일이 있습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마치 한겨울의 서리처럼 차가웠다. “제 남편이 부남준 밑에서 오랜 시간 일을 했어요. 물론, 제 남편도 깨끗한 사람은 아니었어요. 그렇지만 저와 민찬이를 지키기 위해 부남준의 죄를 대신 뒤집어쓴 적도 많았어요.” 잠시 말을 멈춘 허징인은 숨을 고르며 상혁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지금 제 남편은 민찬이의 죽음을 모릅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알게 된다면, 그동안 자신과 부남준 사이에 있었던 모든 부정한 거래를 실토할 겁니다.” 그녀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러니, 부 대표님께서 제 남편에게 이 소식을 전할 방법을 찾아주시길 바랍니다.” 허징인의 목적은 단순했다. ‘정규인을 이용해 부남준을 무너뜨릴 단서를 만들어야 해. 민찬이의 억울한 죽음을, 그리고 수많은 희생자들의 한을 풀기 위해!’ 상혁은 잠시 고개를 숙여 생각에 잠긴 듯 보였다. 이윽고, 그의 입가에 살짝 미소를 머금고 고개를
상혁의 원래 무심하던 표정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아주 작은 변화였지만, 그가 감정적으로 흔들렸다는 건 분명했다. 상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조용히 담배 한 갑을 꺼내 들었다. 남자의 길고 날렵한 손가락이 담배 한 개비를 집어 들고는 정확히 입술 끝에 물었다. 그다음엔 상혁은 침착하게 라이터를 켜고 담배를 태우기 시작했다. 그는 담배를 깊이 들이마신 뒤, 한순간 숨을 멈췄다가 연기를 천천히 내뱉었다. 연기 사이로 보이는 남자의 눈빛은 이전보다 한층 더 날카로워졌다. ‘이 판이 점점 흥미로워지고 있어.’ 그러나 허징인은 자신의 분노에 사로잡혀, 상혁의 변화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그녀는 차가운 웃음을 터뜨렸다. “부남준은 제가 가진 증거를 빼앗으면 모든 게 끝날 줄 알았겠죠. 그래서 절 죽이고 모든 걸 덮으려 했던 거고요. 정말 어리석은 꿈을 꾼 거죠.” 허징인의 목소리는 점점 격앙되었다. 감정이 폭발하면서 그녀는 마치 스스로를 증명하려는 듯 말을 쏟아냈다. “부남준도 설마 이런 상황까지는 생각 못 했겠죠. 제가 이런 처지에 놓일 거라고는 꿈에도 예상 못 했을 거예요. 하지만 증거를 손에 넣는 순간부터 전 모든 걸 철저히 준비해 뒀어요. 단 한 치의 빈틈도 없도록 말이에요.” 상혁은 담배를 쥔 손을 잠시 멈추고, 허징인을 바라봤다. 남자의 눈빛엔 전에 없던 흥미와 약간의 감탄이 섞여 있었다. “허징인 씨, 오늘 정말 날 실망시키지 않는군요.” 허징인은 상혁의 반응에 반응하지 않았고, 대신 스스로를 비웃듯 쓴웃음을 지으며 조용히 말했다. “처음엔 그저 제 아들과 평범하게 살고 싶었어요. 그 사람이 우리를 그냥 내버려 둔다면, 제가 가진 증거는 영원히 세상에서 사라졌을 겁니다.” 그녀는 한순간 말을 멈췄다. 그리고 다음 순간, 허징인의 눈이 새빨갛게 충혈되며, 억누를 수 없는 분노가 폭발했다. “그런데 이제는 아니에요. 그놈이 제 아들을... 민찬이를 죽였어요! 제 손으로 지켜야 했던
금발 남자의 얼굴엔 잔인한 기색이 스쳤다. 허징인과 민찬에게 단 한 줌의 자비도 보이지 않았다. “저년의 입과 코를 꽁꽁 막아. 빈틈 하나도 남기지 말고.” 허징인은 절망에 빠진 눈으로 민찬을 바라보았다. ‘내 아들... 우리 민찬이...!’ 울부짖는 어린 민찬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리는 가운데, 그녀는 거대한 배의 20미터 높이의 갑판에서 차갑고 무자비하게 바다로 내던져졌다. 얼음처럼 차가운 바닷물이 온몸을 감싸고, 숨을 쉴 수 없는 답답함이 허징인을 집어삼켰다. 순식간에 의식은 멀어지고, 그녀의 몸은 깊고 어두운 바다 밑으로 가라앉았다. ‘여기서 이렇게 끝나는 건가...?’ 그러나 의식이 다시 돌아왔을 때, 허징인은 머리가 지끈거리고 무겁게 아파왔다. ‘아... 여긴 어디지?’ 본능적으로 손을 들어 머리를 눌러본 뒤에야, 그녀는 자신이 살아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주변을 둘러보니 낯선 공간이 눈에 들어왔다. ‘분명 나는 바다에 던져졌는데... 대체 여긴 어디지?’ 그리고 그녀의 뇌리에 가장 먼저 떠오른 이름, 민찬. ‘민찬? 설마... 설마 내 아들...!’ 그 순간, 절망감이 몰려오며 눈물이 주체할 수 없이 흘러나왔다. 갑자기, 문이 거칠게 열렸다. 허징인은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리며 뒷걸음질쳤다. ‘누구야? 또다시 무슨 짓을 하려는 거야?’ 그러나 다음 순간, 그녀의 눈에 들어온 사람은 너무도 익숙한 얼굴이었다. 그녀의 입술이 떨렸다. “부상혁 대표님...?” 상혁은 미소를 지으며 먼저 입을 열었다. “허징인 씨, 오랜만이네요.” 상혁 곁에 있던 원신민은 눈치를 보며 조용히 방을 나가고, 문을 닫았다. 허징인은 불신과 놀라움으로 가득 찬 표정으로 상혁을 바라보았다. “부 대표님, 어떻게... 어떻게 여기에...?” 여자의 목소리는 떨리고, 대답을 기다리며 불안감이 가득했다. 잠시 침묵이 흘렀지만, 허징인은 곧 머리를 굴렸다. ‘설마... 나를 구한 사
“조사가 끝났습니다.” 원신민은 망설임 없이 지도를 꺼내 상혁의 앞에 펼쳐 놓았다. “이 배는 F국 항구에서 출발해 서해안을 따라 항해한 후, 이 항로를 통해 태평양을 건너 L국의 T시 항구에 도착...” 원신민의 손가락이 지도 위를 천천히 움직이며 항로를 또렷하게 그려냈다. “대표님, 우리가 이 사람을 빼돌릴 수 있는 최적의 시간은 오늘 밤입니다. 배가 F국 영해를 벗어나면 일이 훨씬 까다로워질 겁니다.” 상혁은 눈을 가늘게 뜨고, 긴 손가락 끝으로 지도 위 특정 지점을 톡 건드렸다. ‘역시 냉철해.’ 원신민은 눈치를 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대표님!” 굵직한 뱃고동 소리가 항구를 울렸다. 거대한 배는 서서히 항구를 떠나 물결을 헤치며 바다 위를 미끄러지듯 나아갔다. 이 배는 15층짜리 대형 크루즈로, 가장 아래층은 화물칸으로 쓰이고, 그 위로는 승객의 숙소, 식당, 그리고 각종 오락 시설이 층층이 자리 잡고 있었다. 허징인과 아들 민찬은 가장 아래층의 음침하고 습한 방에 배치되었다. 방에는 좁은 창문 하나만 달려 있어 바깥의 희미한 빛이 들어오는 것이 전부였다. “엄마, 무서워요!” 민찬은 허징인의 품에 파고들며 온몸을 덜덜 떨었다. 허징인은 아들을 꼭 끌어안으며 본능적으로 달랬다. “괜찮아, 민찬아. 엄마가 있잖아.” ‘여기서 어떻게 해야 하지...’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방문이 거칠게 열렸다. 낯선 남자들이 순식간에 방으로 들이닥치며 좁은 공간을 가득 메웠다. 허징인은 경악하며 외쳤다. “당신들 누구야? 뭐 하려는 거야?” 이 사람들 중 가장 눈에 띄는 사람은 금발에 파란 눈을 가진 외국인이었다. 그는 거대한 체구와 빽빽이 자란 턱수염을 가졌고, 강렬한 눈빛으로 허징인을 꿰뚫듯 쳐다보았다. 이어서 다소 서툴지만 알아듣기 쉬운 F국말로 입을 열었다. “당신이 바로 남준이 말한 여자인가?” 그는 허징인의 얼굴을 훑어보더니 비웃음 섞인 미소를 지었다.
“그저 여자일 뿐인데, 너무 똑똑하면 손해만 볼 뿐이에요.” 남준이 허징인에게 다가가며, 몸을 숙여 그녀의 귀에 대고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여기까지 왔으니, 내가 원하는 걸 이제 줘야 하지 않겠어요?” 허징인은 차갑게 비웃으며 얼굴을 굳혔다. “뭐가 그렇게 겁나십니까, 상무님? 제가 약속을 어길까 봐요? 아니면... 그 물건들이 엉뚱한 사람 손에 들어갈까 봐요?” “그건 사모님이 그런 기회를 잡을 수 있을 때의 이야기죠.” 남준의 목소리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허징인은 이를 악물고 주먹을 꽉 쥐었고, 속으로는 분이 차올랐지만, 상황을 감안해 타협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함부로 해서는 안 되겠어. 지금은 일단 물러서는 게 최선이야.’ “걱정하지 마세요, 상무님. 이미 약속한 이상, 전 제 말을 반드시 지킬 겁니다.” 허징인은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며 남준과 눈을 맞췄다. “상무님도 본인의 약속을 지키길 바랍니다.” 남준은 가볍게 손을 펼치며 대답했다. “당연하죠.” 허징인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작전을 바꾸기로 결심했다. “제가 반은 먼저 드리고, 나머지는 우리가 안전한 곳에 도착하면 드릴게요.” “안 돼요!” 남준이 단호히 그 제안을 거절했다. “지금 사모님한테는 조건을 제시할 자격이 없는 것 같은데, 안 그래요?” 허징인은 눈을 감고 결연한 태도로 말했다. “그럼 차라리 지금 절 죽이세요. 하지만 제가 죽으면 그 물건들이 공개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은 알아두세요.” “엄마!” 곁에 있던 민찬이 울먹이며 그녀의 다리에 매달렸다. “엄마, 무서워요!” 허징인은 민찬을 꼭 안으며 남준을 노려보았다. ‘이 상황에서 물러서면 끝장이야. 적어도 내 아이는 지켜야 해.’ “상무님, 선택은 당신 몫입니다.” 남준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침묵했다. 남자의 눈빛은 한층 더 날카로워졌고, 어금니를 악물더니 잠시 후 말했다. “죽음도 불사하다니, 사모님의 배짱은 보통이 아니
집에 돌아온 하연은 좀처럼 마음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침실 안. 은은한 조명이 켜진 방에서, 하연은 소파에 몸을 웅크린 채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대표님...” 가정부가 따뜻한 우유 한 잔을 들고 조심스레 부르며 방으로 들어왔다. 상혁은 문틈 사이로 방 안의 하연을 흘깃 바라보며 손으로 가정부를 막았다. “내가 할게요.” 가정부가 물러난 뒤, 상혁은 바로 방으로 들어가지 않고 벽에 기대어 천장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그때, 상혁의 주머니에서 휴대폰이 울렸는데, 원신민에게서 온 메시지였다.그 내용은 간단했다. 하지만 상혁은 짧은 문장을 확인한 뒤, 입가에 가볍게 조소를 띄우며 휴대폰 화면을 껐다. 마치 모든 걸 손아귀에 쥐고 있는 사람의 태도였다. 그는 이내 천천히 방의 문을 열었다. “하연아.” 남자의 차분한 목소리에 하연은 깜짝 놀라며 정신을 차렸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상혁을 바라보며 조금 의아한 듯 물었다. “언제 들어왔어요?” 상혁은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손에 들고 있던 우유를 하연의 손에 쥐어주었다. “따뜻할 때 마셔.” 남자의 부드러운 말에 하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곧 우유를 들고 천천히 마시기 시작했다. 잠시 후, 컵이 바닥을 드러냈다. “잠깐 회사에 좀 다녀올게. 집에서 푹 쉬고 있어.” 상혁은 하연이가 들고 있던 유리잔을 받아들며 말했다. “이 밤중에요? 무슨 일 있는 거예요?” 하연은 살짝 의아해했다. “회사에 급한 일이 있어서. 아마 늦을 거야. 기다리지 말고 먼저 자.” 남자는 고개를 숙여 하연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지금 이 순간이 난 참 행복해.” 상혁의 눈에는 하연이가 자신의 곁에 있어 주는 것만으로 모든 것이 완벽해 보였다. ‘이 행복이 오래가길, 조금이라도 더 오래가길...’ 하연은 상혁의 목에 팔을 두르고 그의 품에 안기며 살짝 장난스럽게 말했다. “나도요. 정말 행복해
지석의 말이 끝나자마자, 상혁의 얼굴에 잠시 스치는 한 줄기 차가운 빛... 하지만 그것은 곧 부드러운 미소로 가려졌다. “지석 도련님 말씀대로, 형제간에는 서로 도와야 하는 법이죠.” “다만, 부씨 가문의 일을 굳이 외부인이 나설 필요는 없어 보입니다만.” 상혁의 말에는 분명한 경고의 의미가 담겨 있었고, 그의 기운에 압도된 지석은 잠시 얼굴이 굳었다. 자신이 실수했다는 것을 깨달은 지석이 변명을 하려는 찰나, 슬기가 먼저 나섰다. “하연 씨, 여기 메뉴 중에서 어떤 게 제일 맛이 괜찮아요? 추천 좀 해주세요.” 슬기의 말에 하연은 조용히 상혁의 손등 위에 손을 올렸다. 둘의 시선이 교차하자, 상혁의 눈가에 웃음이 스쳤다. ‘지금 나를 걱정하는 거야? 하지만 너무 날 과소평가하는 거 아닌가?’ 별일도 아닌 걸로 걱정하는 하연을 안심시키려는 듯, 상혁은 눈빛으로 괜찮다는 신호를 보냈다. 하연이 그제야 안심이 되어 바로 슬기에게 메뉴를 추천했다.“오리지널 맛도 괜찮고, 여러가지가 섞인 맛도 좋을 것 같아요. 둘 다 드셔보세요.” “그럼 두 가지 맛으로 각각 한 그릇씩 주세요!” 슬기는 메뉴를 탁 닫으며 밝게 말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지석은 더 이상 자리를 지킬 수 없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는 담배 한 대 피우고 올게요.” 그가 나가는 것을 슬기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지석이 자리를 떠나 자, 슬기는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죄송해요. 두 분의 오붓한 자리를 불편하게 해서요. 집안에서 주선한 선 자리를 억지로 나온 거라...” 여자의 말투에서 묘한 무력감이 느껴졌다. 슬기는 문득 눈을 들어 상혁을 바라보았지만, 상혁은 그녀를 신경 쓰는 기색도 없이, 온전히 하연에게만 시선을 두고 있었다. 슬기는 속으로 조용히 한숨을 내쉬며 그 눈빛을 외면했다. “그나저나, 하연 씨.” 슬기가 화제를 돌렸다. “최근 하연 씨가 뒤로 물러나고 회사를 최하성 씨에게 맡겼다고 들었어요.”
“하연 씨, 우리 같이 합석해도 괜찮을까요?” 슬기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하연은 환하게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물론 괜찮죠.” 슬기는 예상 밖의 대답에 약간 놀란 듯했다. 그녀는 눈웃음을 지으며 하연을 바라보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하연 씨, 이제 저 같은 ‘라이벌’에게 경계심이 풀린 건가요? 그래도 혹시 모르죠. 제가 다시 마음을 고쳐먹고 재도전할지?” 슬기가 농담 섞인 말이었지만 그 속엔 은근한 탐색이 깃들어 있었다.그러나 하연은 여유롭게 미소를 지으며 되받아쳤다. “주 대표님, 그런 생각할 여유가 있으시면 옆에 있는 분 눈치부터 보셔야 하지 않을까요?”슬기는 어깨를 으쓱하며 별거 아니라는 듯 답했다. “뭐, 집에서 주선한 맞선일 뿐이라 별로 신경 안 써요. 첫 만남이기도 하고요.”그 순간 뒤에 있던 지한이 앞으로 나서며 상혁을 향해 공손하게 인사를 건넸다. “부 대표님, 평소에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그의 입에서 나온 ‘부 대표님’이라는 말은, 그가 이미 상혁의 정체를 알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지한은 외부에서 떠도는 소문을 떠올렸다. 최씨 가문과 부씨 가문이 곧 혼사를 통해 막대한 사업적 결합을 이룰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지금 이 자리에 앉아 있는 여자가 바로 최씨 가문의 딸이라는 사실에 지한은 적잖이 긴장했다.“최하연 씨, 안녕하세요.” 지한이 하연에게도 정중하게 인사를 건네면서도 속으로는 긴장의 끊을 놓지 않았다. ‘주슬기가 최씨 가문과 부씨 가문 사람들과 이렇게 가까운 사이일 줄은 몰랐는데?’ 처음 지한은 그저 형식적인 맞선이라 생각했지만, 지금 이 상황을 보니 다시 생각해 봐야겠다고 느꼈다.그때 상혁이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SW그룹의 도련님을, 여기서 다 만나고 보기 드문 일이군요.” 단 한마디로 심지한의 배경을 정확히 짚어낸 것이다. 지한은 약간 놀란 표정을 지으며 눈썹을 살짝 들어 올렸다. “부 대표님께서 저를 알고 계셨
최근 몇 년 동안 H시는 급격한 경제 성장을 이루며 번화한 고층 빌딩들이 우후죽순으로 들어섰고, 도시 풍경은 완전히 새롭게 바뀌어 이제는 명실상부한 대도시로 자리 잡았다.상혁은 차를 몰고 하연과 함께 요즘 SNS에서 핫플레이스로 떠오른 유명 먹거리 거리로 향했다. 차를 주차장에 세운 후, 두 사람은 나란히 걸어 먹거리 거리로 들어섰다. 거리 양옆으로는 다양한 가게들이 즐비했고, 상인들은 열심히 손님들을 끌어모으며 활기찬 분위기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거리는 사람들로 북적거렸고, 곳곳에서 풍기는 음식 냄새가 두 사람의 발걸음을 이끌었다.한참을 걷던 중, ‘10년 전통 국밥집'이라는 간판이 걸린 깔끔하고 정갈한 가게가 눈에 들어왔다. 내부 인테리어는 오래된 가게답지 않게 세련되었고, 메뉴는 벽에 붙어 있어 가격이 한눈에 들어왔다.상혁이 가게를 한참 바라보는 사이, 하연은 이미 들어가 자리에 앉으며 기다릴 새도 없이 외쳤다. “사장님, 여기 대표 국밥 하나요!” 사장님은 빠르게 주문을 적으며 다정한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 못 드시는 재료 있으세요?”“짜지 않게 해주시고, 후추는 빼주세요. 나머지는 다 괜찮아요.” 하연이 주문을 마치자 사장님은 상혁을 향해 자연스럽게 시선을 돌리며 물었다. “사장님은 뭘로 드릴까요?” 상혁은 자신도 모르게 사장님의 깍듯한 존대에 살짝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저도 같은 걸로 주세요.” 가게의 음식 나오는 속도는 매우 빨랐다. 잠시 후, 두 사람 앞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국밥 두 그릇이 놓였다. 하연은 반짝이는 눈으로 국밥을 바라보며 기쁜 표정으로 숟가락을 들고 신나게 먹기 시작했다.“천천히 먹어.” 상혁은 그녀를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며 한마디 덧붙였다. 그러면서도 자신 앞에 놓인 국밥을 내려다보았다. 어릴 때부터 상혁은 까다로운 식습관을 가진 어머니인 조진숙의 영향으로 엄격하게 관리된 음식을 먹으며 자라, 이런 길거리 음식은 한 번도 접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