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도 좀 있어야죠.”미소를 짓는 상혁은 이 말을 마음에 두지 않았다. 아크로리버파크로 돌아가기 전, 하연은 조진숙이 좋아하는 요리를 포장하기 위해 식당에 갔다. 음식을 기다리는 동안 상혁이 말했다.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어. 드시고 싶은 게 있다면 스스로 주문할 줄도 아시는 분이니까.”“그거랑 이게 어떻게 똑같아요. 제 마음이 담겨야 음식을 먹는 진숙 이모도 기쁠 거예요.”커다란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감싼 상혁이 가볍게 몇 번 두드렸다.“딸로서의 효심이야, 아니면 미래의 며느리로서의 효심이야?” 하연은 이미 그의 농담에 면역이 되었다.“당연히 딸이죠.” “미래의 며느리라는 정체성에는 자신 없다는 거야?” “그건 오빠가 하기에 달린 거죠.”옆으로 몸을 돌린 하연은 그의 턱을 움켜쥐고 약간 유혹했다.“부 대표님이 얼마만큼의 성의를 가졌는지, 얼마나 많은 혼수를 가지고 장가를 올 건지 봐야 하니까요.”여자는 본래 강한 매력을 지닌 존재라서 의도적으로 유혹하는 표정을 지으면, 사람의 마음을 간질거리게 하는 법이었다. 상혁이 움츠러들던 하연의 손가락을 붙잡았다.“원하는 대로 줄게.”상혁의 눈빛에는 많은 의미가 담겨 있었고, 하연의 마음은 순간적으로 뜨거워졌다.“농담이에요.” “나는 농담하는 거 아니야.”상혁이 그녀의 귓가에 얕고 뜨거운 숨결을 내쉬었다.“줄게, 뭐든.” 입술을 오므린 하연의 마음은 꿀처럼 달콤해졌다.‘상혁 오빠가 곁에 있으면 모든 게 다 좋아 보여.’ 두 사람이 아크로리버파크에 다다르자, 이제 막 돌아온 조진숙이 기세등등하게 차에서 내리며 피곤하다고 소리쳤다. “이수애 여사라고 했던가? 돈을 아주 흥청망청 쓰더구나. 하마터면 도시의 모든 가게를 돌아다닐 뻔했어. 내일은 없는 것처럼 돈을 쓰더라니까?”하연이 포장한 음식을 꺼내며 미소를 지었다.“고생하셨어요, 진숙 이모, 직접 나서신 거예요?” 조진숙이 손을 내저었다.“그 여자가 나를 본 적 있어서 직접 나설 수는 없겠더구나. 그래서 친구한테 부탁을
그 사람들은 앞에는 노트북이 놓여 있었는데, 모두 헤드셋을 끼고 키보드를 두드리며 매우 집중하고 있었다. 이현이 고개를 끄덕이며 성훈을 불렀다. “어서 이리 와. 손님들을 푸대접하지 말고.” “필요 없다고 했잖아요. 귀라도 먹은 겁니까? 당장 나가세요!”덥수룩한 수염을 기른 사람은 성격이 매우 거친 사람이었다. 그가 노호하며 말했다. 이현이 당황하지 않고 말했다.“이게 저희의 예의입니다. 여러분이 필요 없다 한들, 저희는 여쭤봐야 하는 법이죠.” “남의 말을 못 알아먹는 거야, 뭐야? 신경 쓰지 말라고 했잖아, 당장 꺼지라고!” 수염이 덥수룩한 남자는 곧 인내심이 바닥날 것 같았기에, 이현과 성훈을 밀치고 밖으로 나갔다. 문이 닫히려는 순간, 이현이 갑자기 백핸드로 그를 밀었고, 빠르고 간결한 힘으로 그를 소파에 눌러 제압했다.“성훈아! 당장 노트북 전원을 뽑아!” 수염이 덥수룩한 남자가 울부짖었다.“아, X발!” 하지만 그들도 만만치 않았는데, 재빨리 일어나 노트북을 끄고, 성훈의 행동을 저지한 것이었다.“이런 쪼끄마한 곳에 숨은 고수가 있을 줄이야!” 이 말을 마친 사람들이 잇달아 찻잔을 깨뜨리며 성훈과 싸움을 벌였다.“역시 무술자였군!” 수염이 덥수룩한 남자는 곧바로 일어나 이현을 땅에 내던졌고, 주먹을 내리꽂았다. 하지만 이현이 몸을 굴려 피하며 말했다. “나는 당신들과 어떤 원한도 없어요. 그런데 왜 날 괴롭히려는 겁니까?”이현이 약간 숨을 헐떡였다.“잘못은 당신들이 했잖아요. 감히 손님들의 사생활을 엿보다니... 이 문제가 터진다면 나는 망하고 말 거라고요!” 날카로운 이현의 눈빛은 모든 것을 간파하는 듯했다. 수염이 덥수룩한 남자가 침을 뱉었다.“너 같은 자식한테 발각될 줄이야. 이제 몸을 사릴 필요도 없겠군!” 순식간에 크지도 작지도 않은 룸이 주먹질로 난장판이 되었다. 이현은 수염이 덥수룩한 남자를 제압할 수 있었지만, 많은 상대의 잔인한 공격을 버텨내기에는 무리였다. 성훈이 저항하며 외쳤다.“사장
이 사람들이 한 짓은 목숨을 바친 것이지만, 부상을 당할지언정 감옥에 갇혀 자유를 잃고 싶지는 않았다. “형사님, 말다툼을 좀 했는데, 오해하신 모양이네요!”수염이 덥수룩한 남자가 이현을 풀어주며 두 손을 들었다. “말다툼이요? 피가 다 터졌는데 말다툼이라고요? 패싸움이겠죠!”하연은 이현의 손에 묻은 피를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녀는 저 사람들이 자기 손에 있는 것이 가짜 총이라는 것을 알아차릴까 봐 가까이 갈 수도 없었다.손이 땀투성이가 된 그녀가 입술을 오므리며 말했다.“당장 나와서 일렬종대로 서세요!” 그 사람들을 주저했지만, 총에 두려움을 느끼고 룸에서 나왔고, 삐뚤삐뚤하게 서 있었다. 룸에 있던 성훈이 급히 이현을 일으켜 세웠다.“괜찮으세요, 사장님?” 하연이 재빨리 걸어가서 총으로 그들을 가리켰다.“대체 어떻게 된 일이에요?” 이현이 눈살을 찌푸리며 휴지 몇 장을 뽑아 피를 닦았다.“불법 도청이에요.” 책상 위에는 컴퓨터와 이어폰이 놓여 있었다. 이 말을 들은 하연이 자신도 모르게 낮은 목소리로 질책했다. “경찰에 신고할 줄도 모르세요? 왜 이런 일에 직접 나서신 건데요? 목숨을 걸면 어떻게 하냐고요!” 그녀의 눈총과 초조함은 진심이 담긴 것이었기에 이현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경찰에 신고할 겨를이 없었거든요. 최 형사님이 제때 오셔서 정말 다행이네요.” 하연은 더욱 화가 났다.‘아직도 농담이 나오나?’ “당신들, 대체 뭘 도청한 겁니까?”하연이 큰 소리로 물었다. 이현이 그녀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최 형사님, 지금은 그걸 물어볼 때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렇다. 상황이 어느 정도 통제된 것을 본 하연은 그들이 극악무도한 범죄자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말했다.“지원 동료들이 곧 도착할 거니까 순순히 여기서 기다리는 게 좋을 거예요. 혹시라도 도망간다면, 무슨 일이 일어나든 감당하셔야 할 겁니다!” 이 말을 마친 하연은 쪼그리고 앉아 이현의 상처를 살펴보았다.“어디를 다친 거예요
방금 경찰에게 잡혀간 사람들은 상혁의 전속 룸에 도청기를 설치했는데, 그의 대화 내용을 도청하기 위한 것이었다. 다만, 기민한 이현이 이토록 빨리 그들의 계략을 발견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그들은 불법 도청에 대한 모든 것을 자백했다. 경찰관은 그들에게 배후가 누구냐고 물었지만, 아무도 시키지 않았다고 대답할 뿐이었다.“저희가 귀신한테 홀렸나 봐요. DL 그룹의 정보를 팔아서 돈을 벌고 싶은 마음에 그만...” 상혁이 무관심하게 입을 열었다.“모두 일상적인 이야기였고, 아무런 정보도 없었습니다.”이 사건은 나호중을 놀라게 했는데, 상혁의 저명한 신분 외에도, 그와 대화를 나눈 사람이 고위 간부로, 직위가 낮지 않은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이 악수를 나누던 찰나, 상대가 말했다.“나 서장님, 나 서장님의 관할구역은 그다지 안전한 곳이 아니군요. 친구와 나누는 대화도 도청될 우려가 있으니까요.” 나호중은 부끄러워 얼른 사과했다.“단속을 강화하겠습니다.”비록 세무서와 FL 그룹 이사 간의 비공식적인 대화는 규정에 맞지 않는 것이었지만, 경찰이 확인한 결과, 그들의 컴퓨터와 두 사람의 대화 내용에서는 아무런 문제가 발견되지 않았다. “오늘은 일에 관해 이야기하지 않겠어요. 삼촌의 따님이 얼마 전에 막 18세 생일을 맞았다고 들었는데, 제가 너무 무심했습니다. 오늘 만나자고 한 이유도 특별한 선물을 준비했기 때문이에요.” 전파를 타고 들리는 상혁의 목소리는 맑고 온화했다. “상혁아, 뭐 이런 걸 다... 너무 귀중해서 받을 수 없을 것 같구나.’ “귀중한 물건은 아닙니다. 아무래도 규정은 준수해야 하니까요.” 이 말을 끝으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경찰 직원은 도대체 어떤 선물이기에 규정에 맞다는 것인지 검사할 수 없었다. 상대는 아직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왜냐하면 몇십 분 전, 여기까지 말한 상혁이 몸을 숙여 탁자 아래에 있던 두 개의 도청기를 꺼내서 부숴버린 장면이 생생히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그는 깜짝 놀랐다.“이게 뭐야
옛날얘기를 언급하자, 이현이 손을 들어 눈을 가리고 나른한 모습을 보였다. “다 지난간 일이잖아요. 저는 개의치 않습니다. 서장님이 신경 쓰실 필요도 없는 일이에요.” 나호중이 이현을 살펴보았다.당시 활기 넘치던 남자아이는 이미 성숙하고 듬직한 남자가 되어 있었다. 모처럼 당시의 기질을 엿볼 수 있었던 나호중이 한숨을 내쉬었다.“참 아쉬웠지. 너는 그때 팀에서 가장 용감하고 전도유망한 사람이었어. 근데 지금 꼴을 좀 봐라. 옛날에 네가 데리고 있던 양한빈도 팀장이 되었는데, 넌...” 이 말은 못이 되어 귀에 박히는 듯했다. 이현이 몸을 일으켰다.“됐습니다, 나 서장님. 저를 좀 보세요. 행복해 보이지 않습니까? 잘 먹고 잘 마시잖아요. 예전보다 못하다고 할 것도 없어요.”나호중은 하려던 말을 멈추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서장실을 나서면 긴 복도가 펼쳐져 있었다. 그곳에는 막 출동에서 돌아온 듯한 경찰들이 보였다. 그들의 몸은 깨끗하지 않지만, 모두 의기양양하고 활력이 넘치는 모습이었다. 이현은 복도에 서서 한참이나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 머릿속에 나호중이 한 말이 번뜩였고, 그의 표정도 옅어져만 갔다. 시선을 거둔 그가 한 줄기의 그림자로 시선을 옮겼다. 한 여자가 문 앞에 반쯤 엎드려 안쪽 상황을 자세히 살피려 했다. 들킬까 봐 두려워하면서도, 재빨리 몸을 뒤로 빼며 민첩하고 교활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이현의 입가에 다시금 미소가 번졌다. 마주 오던 양한빈이 그에게 인사하려 했지만, 그는 검지손가락을 세워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그는 한 걸음 한 걸음 그 여자의 뒤로 다가가서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깜짝 놀란 하연은 온몸이 거의 튀어 오를 뻔했다. “어떻게 손 선생님이...”그녀가 가슴을 쓸어내렸다. “뭘 그렇게 봐요?” “상혁 오빠를 기다리고 있어요.”그녀는 잘못을 저지르고 벌서는 학생과 같은 모습이었다. 이현이 안쪽을 힐끗 바라보았는데, 상혁은 진술서 아래에 서명하고 있었다. “제 설명이 필요
“타.”상혁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연지는 잠시 혼란스러웠다.‘나한테 하는 말이 맞는 걸까?’“부 대표님?” “최하연.”상혁이 이름을 불렀다.그는 ‘최하연’이라고 부르는 일이 거의 없었다. 정말 화가 나지 않는 이상. “누가 말한 거 아니에요? 기사님도 들으셨어요?”하연이 옆에 있는 운전기사에게 물었다. 땀을 뻘뻘 흘리던 운전기사는 웃음을 짜낼 수 없었다.“최 사장님, 부 대표님이십니다.” “그럼 못 들은 걸로 할게요. 오빠는 항상 보고도 못 본 척하는 걸 좋아하니까 오빠의 마음에 맞춰 줘야죠.” 하연이 안전벨트를 맸다.남자는 갈고리를 숨긴 것 같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하연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방금 나호중한테 정의로운 행동을 한 최하연에게 상을 수여해야 한다고 말한다는 걸 깜빡했네. 언제나 정의로운 분이시잖아?” 하연이 목을 곧추세우며 말했다.“그럼 사람이 다친 걸 보고도 가만히 있어요? 나는 누구와 같은 냉혈한이 아니에요.” “나는 그까짓 상처로 죽는 사람을 본 적이 없어.” 잠시 침묵하던 하연이 웅얼거리며 말했다.“와, 속 좁은 것 좀 봐. 이 정도 일로 화를 낸다고?” “여전히 초등학생처럼 일을 해결하려는 건가?”하연은 어렸을 때 정말 유치한 사람이었기에, 누군가 자신을 화나게 하면 그 사람과 함께 앉지 않았다. 상혁이 그것을 기억하고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한 하연이 웃음을 터뜨렸다. “뒤로 와.”상혁의 말투가 조금 누그러졌다.하연은 정말 화가 나지 않았을뿐더러, 그가 기분을 풀어주려 하자, 재빨리 안전벨트를 풀고 뒷좌석으로 자리를 옮겼다. “사과하세요.”“내가 무슨 사과를 해?”상혁이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방금 날 내버려뒀잖아요.” 마침내 차량에 시동이 걸리고, 한숨을 돌린 운전기사가 가림막을 올렸다. “내 손이 그렇게 베었어도, 그 정도로 걱정하진 않았을 거잖아.”상혁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가지고 놀며 무심한 말투로 말했다. “무슨 소리예요, 오빠는 내 남자 친구잖아요. 다른 사
하연은 차에서 내리자마자 곧바로 사무실로 향했다.아까 상혁을 기다리던 중, 그녀의 핸드폰에 문자가 왔다. 보낸 사람은 다름 아닌 부남준이었다. [네 사무실에서 기다리고 있어.]하연은 예상치 못했다. ‘부남준이 어떻게 직접 우리 회사까지 찾아왔지?! 심지어 내 사무실에 들어갔다니!!’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그녀는 서둘러 사무실로 걸음을 옮겼는데, 오래전부터 기다리던 정태훈이 말했다. “사장님.”“그 사람은 어디 있어?”“성이 ‘부’라고 말씀을 하시길래, 감히 막지 못하고 사장님의 사무실로 안내했습니다.”하연은 급히 불안해져서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기억해 둬! 부상혁 외에는 부 씨 성의 누구도 들여보내선 안 돼!” 태훈은 고개를 숙이며 급히 대답했다.하연은 사무실 문손잡이를 꽉 쥐었고, 깊게 숨을 들이쉰 후 문을 밀어 열었다.하연의 사무실에는 한 벽면에 수많은 사진과 상장이 걸려 있었다. 그것은 그녀가 DS그룹을 이끌면서 얻은 영예들이었는데, 빼곡하게 걸려 있어 아주 스펙터클 했다.바로 그 순간, 그 벽 앞에 선 부남준이 고개를 들어 흥미롭게 그것들을 감상하고 있었다. 창밖에서 비치는 햇살은 그의 병약한 듯한 아름다움을 더욱 도드라지게 했다.이 남자는 부상혁과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음울하면서도 자유분방한 매력을 동시에 지닌, 도무지 파악하기 어려운 인물이었다.“이보세요, 부남준 도련님. 내 상장들이 보고 싶은 거라면, 사람을 시켜서 댁으로 한 부 보내드릴게요.” 하연은 차분히 걸음을 옮기며 가방을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남준은 그녀를 향해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이렇게 많은 영예를 거머쥔 최하연도 시간을 안 지키다니, 나를 한참이나 기다리게 했어.”그의 말은 다름 아닌 소울 칵테일에서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을 두고 하는 소리였다. 하연이 나타나지 않자 남준은 직접 DS그룹으로 온 것이었다.하연이 눈썹을 치켜세우며 말했다. “당신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어. 소울 칵테일에 무슨 일이 생길 거란 걸 알면서 날 유인한 거잖
하연도 자신이 실수했다는 것을 자각하고 고개를 돌렸다.남준은 미간을 찌푸리며 손에 쥐고 있던 서류를 더 꽉 쥐었다. 그도 그날 하연이 도망치기 위해 2층 창문에서 뛰어내리는 것을 분명히 목격했기 때문이다.남준은 비꼬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대체 부상혁을 신경 쓰는 거야, 아니면 손이현을 신경 쓰는 거야?”이렇게 큰 위험을 감수하면서도 이 비밀을 숨기려는 하연의 행동에 남준은 호감보다는 오히려 반감이 들었다. 결국 그녀도 자신이 만난 다른 여자들과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었다.“이 서류는 내가 가져갈게. 하지만 네가 부상혁한테 말하지 않았다는 걸 내가 어떻게 믿지?”하연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럼 나는 널 어떻게 믿어? 네가 이 자료를 가져간 다음, 그 사진을 상혁 오빠한테 보내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없잖아!”두 사람의 시선이 부딪쳤다. 서로 팽팽한 긴장감 속에 대립하고 있었다.“네가 말하지 않으면, 나도 굳이 말할 이유가 없지.”하연은 미소를 지으며 팔짱을 끼고 말했다. “남준 도련님, 나를 너무 우습게 보는 것 같은데, 이렇게 하자. 사진의 백업을 나에게 주면, 나도 내 백업을 너에게 줄게. 서로 마음 편하게 말이야.”몇 초간 망설이던 남준은 의심스러운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다가 결국 USB를 꺼내 하연의 손에 쥐여주었다. “네가 원하는 것.”하연은 손을 꽉 쥐고 책상을 돌아 노트북을 켰다. 그리고 한 파일을 클릭하며 말했다. “잘 봐.”남준이 지켜보는 가운데, 하연은 원본 파일을 모두 삭제했다.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의미심장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협조 잘됐네, 최 사장.”남준은 당당하게 사무실을 나서며 하연의 시야에서 사라졌다.하연은 눈을 감고 깊은 한숨을 내쉬며 의자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텅 빈 노트북 화면을 바라보며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이 노트북에는 하연이 미리 설정한 프로그램이 설치되어 있었다. 파일을 삭제할 때마다 그 파일이 상혁의 이메일로 자동 전송되는 시스템이었다. 이 모든 것은 하연 사전에 계획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