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도 좀 있어야죠.”미소를 짓는 상혁은 이 말을 마음에 두지 않았다. 아크로리버파크로 돌아가기 전, 하연은 조진숙이 좋아하는 요리를 포장하기 위해 식당에 갔다. 음식을 기다리는 동안 상혁이 말했다.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어. 드시고 싶은 게 있다면 스스로 주문할 줄도 아시는 분이니까.”“그거랑 이게 어떻게 똑같아요. 제 마음이 담겨야 음식을 먹는 진숙 이모도 기쁠 거예요.”커다란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감싼 상혁이 가볍게 몇 번 두드렸다.“딸로서의 효심이야, 아니면 미래의 며느리로서의 효심이야?” 하연은 이미 그의 농담에 면역이 되었다.“당연히 딸이죠.” “미래의 며느리라는 정체성에는 자신 없다는 거야?” “그건 오빠가 하기에 달린 거죠.”옆으로 몸을 돌린 하연은 그의 턱을 움켜쥐고 약간 유혹했다.“부 대표님이 얼마만큼의 성의를 가졌는지, 얼마나 많은 혼수를 가지고 장가를 올 건지 봐야 하니까요.”여자는 본래 강한 매력을 지닌 존재라서 의도적으로 유혹하는 표정을 지으면, 사람의 마음을 간질거리게 하는 법이었다. 상혁이 움츠러들던 하연의 손가락을 붙잡았다.“원하는 대로 줄게.”상혁의 눈빛에는 많은 의미가 담겨 있었고, 하연의 마음은 순간적으로 뜨거워졌다.“농담이에요.” “나는 농담하는 거 아니야.”상혁이 그녀의 귓가에 얕고 뜨거운 숨결을 내쉬었다.“줄게, 뭐든.” 입술을 오므린 하연의 마음은 꿀처럼 달콤해졌다.‘상혁 오빠가 곁에 있으면 모든 게 다 좋아 보여.’ 두 사람이 아크로리버파크에 다다르자, 이제 막 돌아온 조진숙이 기세등등하게 차에서 내리며 피곤하다고 소리쳤다. “이수애 여사라고 했던가? 돈을 아주 흥청망청 쓰더구나. 하마터면 도시의 모든 가게를 돌아다닐 뻔했어. 내일은 없는 것처럼 돈을 쓰더라니까?”하연이 포장한 음식을 꺼내며 미소를 지었다.“고생하셨어요, 진숙 이모, 직접 나서신 거예요?” 조진숙이 손을 내저었다.“그 여자가 나를 본 적 있어서 직접 나설 수는 없겠더구나. 그래서 친구한테 부탁을
그 사람들은 앞에는 노트북이 놓여 있었는데, 모두 헤드셋을 끼고 키보드를 두드리며 매우 집중하고 있었다. 이현이 고개를 끄덕이며 성훈을 불렀다. “어서 이리 와. 손님들을 푸대접하지 말고.” “필요 없다고 했잖아요. 귀라도 먹은 겁니까? 당장 나가세요!”덥수룩한 수염을 기른 사람은 성격이 매우 거친 사람이었다. 그가 노호하며 말했다. 이현이 당황하지 않고 말했다.“이게 저희의 예의입니다. 여러분이 필요 없다 한들, 저희는 여쭤봐야 하는 법이죠.” “남의 말을 못 알아먹는 거야, 뭐야? 신경 쓰지 말라고 했잖아, 당장 꺼지라고!” 수염이 덥수룩한 남자는 곧 인내심이 바닥날 것 같았기에, 이현과 성훈을 밀치고 밖으로 나갔다. 문이 닫히려는 순간, 이현이 갑자기 백핸드로 그를 밀었고, 빠르고 간결한 힘으로 그를 소파에 눌러 제압했다.“성훈아! 당장 노트북 전원을 뽑아!” 수염이 덥수룩한 남자가 울부짖었다.“아, X발!” 하지만 그들도 만만치 않았는데, 재빨리 일어나 노트북을 끄고, 성훈의 행동을 저지한 것이었다.“이런 쪼끄마한 곳에 숨은 고수가 있을 줄이야!” 이 말을 마친 사람들이 잇달아 찻잔을 깨뜨리며 성훈과 싸움을 벌였다.“역시 무술자였군!” 수염이 덥수룩한 남자는 곧바로 일어나 이현을 땅에 내던졌고, 주먹을 내리꽂았다. 하지만 이현이 몸을 굴려 피하며 말했다. “나는 당신들과 어떤 원한도 없어요. 그런데 왜 날 괴롭히려는 겁니까?”이현이 약간 숨을 헐떡였다.“잘못은 당신들이 했잖아요. 감히 손님들의 사생활을 엿보다니... 이 문제가 터진다면 나는 망하고 말 거라고요!” 날카로운 이현의 눈빛은 모든 것을 간파하는 듯했다. 수염이 덥수룩한 남자가 침을 뱉었다.“너 같은 자식한테 발각될 줄이야. 이제 몸을 사릴 필요도 없겠군!” 순식간에 크지도 작지도 않은 룸이 주먹질로 난장판이 되었다. 이현은 수염이 덥수룩한 남자를 제압할 수 있었지만, 많은 상대의 잔인한 공격을 버텨내기에는 무리였다. 성훈이 저항하며 외쳤다.“사장
이 사람들이 한 짓은 목숨을 바친 것이지만, 부상을 당할지언정 감옥에 갇혀 자유를 잃고 싶지는 않았다. “형사님, 말다툼을 좀 했는데, 오해하신 모양이네요!”수염이 덥수룩한 남자가 이현을 풀어주며 두 손을 들었다. “말다툼이요? 피가 다 터졌는데 말다툼이라고요? 패싸움이겠죠!”하연은 이현의 손에 묻은 피를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녀는 저 사람들이 자기 손에 있는 것이 가짜 총이라는 것을 알아차릴까 봐 가까이 갈 수도 없었다.손이 땀투성이가 된 그녀가 입술을 오므리며 말했다.“당장 나와서 일렬종대로 서세요!” 그 사람들을 주저했지만, 총에 두려움을 느끼고 룸에서 나왔고, 삐뚤삐뚤하게 서 있었다. 룸에 있던 성훈이 급히 이현을 일으켜 세웠다.“괜찮으세요, 사장님?” 하연이 재빨리 걸어가서 총으로 그들을 가리켰다.“대체 어떻게 된 일이에요?” 이현이 눈살을 찌푸리며 휴지 몇 장을 뽑아 피를 닦았다.“불법 도청이에요.” 책상 위에는 컴퓨터와 이어폰이 놓여 있었다. 이 말을 들은 하연이 자신도 모르게 낮은 목소리로 질책했다. “경찰에 신고할 줄도 모르세요? 왜 이런 일에 직접 나서신 건데요? 목숨을 걸면 어떻게 하냐고요!” 그녀의 눈총과 초조함은 진심이 담긴 것이었기에 이현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경찰에 신고할 겨를이 없었거든요. 최 형사님이 제때 오셔서 정말 다행이네요.” 하연은 더욱 화가 났다.‘아직도 농담이 나오나?’ “당신들, 대체 뭘 도청한 겁니까?”하연이 큰 소리로 물었다. 이현이 그녀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최 형사님, 지금은 그걸 물어볼 때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렇다. 상황이 어느 정도 통제된 것을 본 하연은 그들이 극악무도한 범죄자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말했다.“지원 동료들이 곧 도착할 거니까 순순히 여기서 기다리는 게 좋을 거예요. 혹시라도 도망간다면, 무슨 일이 일어나든 감당하셔야 할 겁니다!” 이 말을 마친 하연은 쪼그리고 앉아 이현의 상처를 살펴보았다.“어디를 다친 거예요
방금 경찰에게 잡혀간 사람들은 상혁의 전속 룸에 도청기를 설치했는데, 그의 대화 내용을 도청하기 위한 것이었다. 다만, 기민한 이현이 이토록 빨리 그들의 계략을 발견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그들은 불법 도청에 대한 모든 것을 자백했다. 경찰관은 그들에게 배후가 누구냐고 물었지만, 아무도 시키지 않았다고 대답할 뿐이었다.“저희가 귀신한테 홀렸나 봐요. DL 그룹의 정보를 팔아서 돈을 벌고 싶은 마음에 그만...” 상혁이 무관심하게 입을 열었다.“모두 일상적인 이야기였고, 아무런 정보도 없었습니다.”이 사건은 나호중을 놀라게 했는데, 상혁의 저명한 신분 외에도, 그와 대화를 나눈 사람이 고위 간부로, 직위가 낮지 않은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이 악수를 나누던 찰나, 상대가 말했다.“나 서장님, 나 서장님의 관할구역은 그다지 안전한 곳이 아니군요. 친구와 나누는 대화도 도청될 우려가 있으니까요.” 나호중은 부끄러워 얼른 사과했다.“단속을 강화하겠습니다.”비록 세무서와 FL 그룹 이사 간의 비공식적인 대화는 규정에 맞지 않는 것이었지만, 경찰이 확인한 결과, 그들의 컴퓨터와 두 사람의 대화 내용에서는 아무런 문제가 발견되지 않았다. “오늘은 일에 관해 이야기하지 않겠어요. 삼촌의 따님이 얼마 전에 막 18세 생일을 맞았다고 들었는데, 제가 너무 무심했습니다. 오늘 만나자고 한 이유도 특별한 선물을 준비했기 때문이에요.” 전파를 타고 들리는 상혁의 목소리는 맑고 온화했다. “상혁아, 뭐 이런 걸 다... 너무 귀중해서 받을 수 없을 것 같구나.’ “귀중한 물건은 아닙니다. 아무래도 규정은 준수해야 하니까요.” 이 말을 끝으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경찰 직원은 도대체 어떤 선물이기에 규정에 맞다는 것인지 검사할 수 없었다. 상대는 아직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왜냐하면 몇십 분 전, 여기까지 말한 상혁이 몸을 숙여 탁자 아래에 있던 두 개의 도청기를 꺼내서 부숴버린 장면이 생생히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그는 깜짝 놀랐다.“이게 뭐야
옛날얘기를 언급하자, 이현이 손을 들어 눈을 가리고 나른한 모습을 보였다. “다 지난간 일이잖아요. 저는 개의치 않습니다. 서장님이 신경 쓰실 필요도 없는 일이에요.” 나호중이 이현을 살펴보았다.당시 활기 넘치던 남자아이는 이미 성숙하고 듬직한 남자가 되어 있었다. 모처럼 당시의 기질을 엿볼 수 있었던 나호중이 한숨을 내쉬었다.“참 아쉬웠지. 너는 그때 팀에서 가장 용감하고 전도유망한 사람이었어. 근데 지금 꼴을 좀 봐라. 옛날에 네가 데리고 있던 양한빈도 팀장이 되었는데, 넌...” 이 말은 못이 되어 귀에 박히는 듯했다. 이현이 몸을 일으켰다.“됐습니다, 나 서장님. 저를 좀 보세요. 행복해 보이지 않습니까? 잘 먹고 잘 마시잖아요. 예전보다 못하다고 할 것도 없어요.”나호중은 하려던 말을 멈추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서장실을 나서면 긴 복도가 펼쳐져 있었다. 그곳에는 막 출동에서 돌아온 듯한 경찰들이 보였다. 그들의 몸은 깨끗하지 않지만, 모두 의기양양하고 활력이 넘치는 모습이었다. 이현은 복도에 서서 한참이나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 머릿속에 나호중이 한 말이 번뜩였고, 그의 표정도 옅어져만 갔다. 시선을 거둔 그가 한 줄기의 그림자로 시선을 옮겼다. 한 여자가 문 앞에 반쯤 엎드려 안쪽 상황을 자세히 살피려 했다. 들킬까 봐 두려워하면서도, 재빨리 몸을 뒤로 빼며 민첩하고 교활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이현의 입가에 다시금 미소가 번졌다. 마주 오던 양한빈이 그에게 인사하려 했지만, 그는 검지손가락을 세워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그는 한 걸음 한 걸음 그 여자의 뒤로 다가가서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깜짝 놀란 하연은 온몸이 거의 튀어 오를 뻔했다. “어떻게 손 선생님이...”그녀가 가슴을 쓸어내렸다. “뭘 그렇게 봐요?” “상혁 오빠를 기다리고 있어요.”그녀는 잘못을 저지르고 벌서는 학생과 같은 모습이었다. 이현이 안쪽을 힐끗 바라보았는데, 상혁은 진술서 아래에 서명하고 있었다. “제 설명이 필요
“타.”상혁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연지는 잠시 혼란스러웠다.‘나한테 하는 말이 맞는 걸까?’“부 대표님?” “최하연.”상혁이 이름을 불렀다.그는 ‘최하연’이라고 부르는 일이 거의 없었다. 정말 화가 나지 않는 이상. “누가 말한 거 아니에요? 기사님도 들으셨어요?”하연이 옆에 있는 운전기사에게 물었다. 땀을 뻘뻘 흘리던 운전기사는 웃음을 짜낼 수 없었다.“최 사장님, 부 대표님이십니다.” “그럼 못 들은 걸로 할게요. 오빠는 항상 보고도 못 본 척하는 걸 좋아하니까 오빠의 마음에 맞춰 줘야죠.” 하연이 안전벨트를 맸다.남자는 갈고리를 숨긴 것 같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하연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방금 나호중한테 정의로운 행동을 한 최하연에게 상을 수여해야 한다고 말한다는 걸 깜빡했네. 언제나 정의로운 분이시잖아?” 하연이 목을 곧추세우며 말했다.“그럼 사람이 다친 걸 보고도 가만히 있어요? 나는 누구와 같은 냉혈한이 아니에요.” “나는 그까짓 상처로 죽는 사람을 본 적이 없어.” 잠시 침묵하던 하연이 웅얼거리며 말했다.“와, 속 좁은 것 좀 봐. 이 정도 일로 화를 낸다고?” “여전히 초등학생처럼 일을 해결하려는 건가?”하연은 어렸을 때 정말 유치한 사람이었기에, 누군가 자신을 화나게 하면 그 사람과 함께 앉지 않았다. 상혁이 그것을 기억하고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한 하연이 웃음을 터뜨렸다. “뒤로 와.”상혁의 말투가 조금 누그러졌다.하연은 정말 화가 나지 않았을뿐더러, 그가 기분을 풀어주려 하자, 재빨리 안전벨트를 풀고 뒷좌석으로 자리를 옮겼다. “사과하세요.”“내가 무슨 사과를 해?”상혁이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방금 날 내버려뒀잖아요.” 마침내 차량에 시동이 걸리고, 한숨을 돌린 운전기사가 가림막을 올렸다. “내 손이 그렇게 베었어도, 그 정도로 걱정하진 않았을 거잖아.”상혁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가지고 놀며 무심한 말투로 말했다. “무슨 소리예요, 오빠는 내 남자 친구잖아요. 다른 사
하연은 차에서 내리자마자 곧바로 사무실로 향했다.아까 상혁을 기다리던 중, 그녀의 핸드폰에 문자가 왔다. 보낸 사람은 다름 아닌 부남준이었다. [네 사무실에서 기다리고 있어.]하연은 예상치 못했다. ‘부남준이 어떻게 직접 우리 회사까지 찾아왔지?! 심지어 내 사무실에 들어갔다니!!’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그녀는 서둘러 사무실로 걸음을 옮겼는데, 오래전부터 기다리던 정태훈이 말했다. “사장님.”“그 사람은 어디 있어?”“성이 ‘부’라고 말씀을 하시길래, 감히 막지 못하고 사장님의 사무실로 안내했습니다.”하연은 급히 불안해져서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기억해 둬! 부상혁 외에는 부 씨 성의 누구도 들여보내선 안 돼!” 태훈은 고개를 숙이며 급히 대답했다.하연은 사무실 문손잡이를 꽉 쥐었고, 깊게 숨을 들이쉰 후 문을 밀어 열었다.하연의 사무실에는 한 벽면에 수많은 사진과 상장이 걸려 있었다. 그것은 그녀가 DS그룹을 이끌면서 얻은 영예들이었는데, 빼곡하게 걸려 있어 아주 스펙터클 했다.바로 그 순간, 그 벽 앞에 선 부남준이 고개를 들어 흥미롭게 그것들을 감상하고 있었다. 창밖에서 비치는 햇살은 그의 병약한 듯한 아름다움을 더욱 도드라지게 했다.이 남자는 부상혁과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음울하면서도 자유분방한 매력을 동시에 지닌, 도무지 파악하기 어려운 인물이었다.“이보세요, 부남준 도련님. 내 상장들이 보고 싶은 거라면, 사람을 시켜서 댁으로 한 부 보내드릴게요.” 하연은 차분히 걸음을 옮기며 가방을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남준은 그녀를 향해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이렇게 많은 영예를 거머쥔 최하연도 시간을 안 지키다니, 나를 한참이나 기다리게 했어.”그의 말은 다름 아닌 소울 칵테일에서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을 두고 하는 소리였다. 하연이 나타나지 않자 남준은 직접 DS그룹으로 온 것이었다.하연이 눈썹을 치켜세우며 말했다. “당신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어. 소울 칵테일에 무슨 일이 생길 거란 걸 알면서 날 유인한 거잖
하연도 자신이 실수했다는 것을 자각하고 고개를 돌렸다.남준은 미간을 찌푸리며 손에 쥐고 있던 서류를 더 꽉 쥐었다. 그도 그날 하연이 도망치기 위해 2층 창문에서 뛰어내리는 것을 분명히 목격했기 때문이다.남준은 비꼬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대체 부상혁을 신경 쓰는 거야, 아니면 손이현을 신경 쓰는 거야?”이렇게 큰 위험을 감수하면서도 이 비밀을 숨기려는 하연의 행동에 남준은 호감보다는 오히려 반감이 들었다. 결국 그녀도 자신이 만난 다른 여자들과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었다.“이 서류는 내가 가져갈게. 하지만 네가 부상혁한테 말하지 않았다는 걸 내가 어떻게 믿지?”하연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럼 나는 널 어떻게 믿어? 네가 이 자료를 가져간 다음, 그 사진을 상혁 오빠한테 보내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없잖아!”두 사람의 시선이 부딪쳤다. 서로 팽팽한 긴장감 속에 대립하고 있었다.“네가 말하지 않으면, 나도 굳이 말할 이유가 없지.”하연은 미소를 지으며 팔짱을 끼고 말했다. “남준 도련님, 나를 너무 우습게 보는 것 같은데, 이렇게 하자. 사진의 백업을 나에게 주면, 나도 내 백업을 너에게 줄게. 서로 마음 편하게 말이야.”몇 초간 망설이던 남준은 의심스러운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다가 결국 USB를 꺼내 하연의 손에 쥐여주었다. “네가 원하는 것.”하연은 손을 꽉 쥐고 책상을 돌아 노트북을 켰다. 그리고 한 파일을 클릭하며 말했다. “잘 봐.”남준이 지켜보는 가운데, 하연은 원본 파일을 모두 삭제했다.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의미심장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협조 잘됐네, 최 사장.”남준은 당당하게 사무실을 나서며 하연의 시야에서 사라졌다.하연은 눈을 감고 깊은 한숨을 내쉬며 의자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텅 빈 노트북 화면을 바라보며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이 노트북에는 하연이 미리 설정한 프로그램이 설치되어 있었다. 파일을 삭제할 때마다 그 파일이 상혁의 이메일로 자동 전송되는 시스템이었다. 이 모든 것은 하연 사전에 계획해
상혁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살짝 웃음을 지었다. ‘다행이야... 정말 다행이야.’ 검진을 마친 뒤, 하연은 선명한 초음파 사진을 손에 들고 있었다. 사진을 바라보는 그녀의 얼굴에는 저절로 미소가 번졌다. 그녀는 손끝으로 사진 속 동그란 그림을 가리켰다. “여기 봐봐요. 이게 우리 아기래요.” 목소리엔 설렘과 떨림이 그대로 묻어났다. 상혁도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하연의 손끝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눈엔 이미 감동이 차올라 있었다. 상혁은 조심스레 하연의 아랫배에 손을 얹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이 순간... 난 정말 너무 행복해.” ‘네가 내 옆에 있고, 우리 아이가 이렇게 자라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야.’ 하연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남자아기일까요, 여자아기일까요?” 그녀의 눈빛에는 이미 사랑스러운 미래가 그려지고 있었다. 상혁은 웃으며 대답했다. “아무래도 상관없어.” 하연은 고개를 살짝 돌려 상혁을 바라봤다. 그 눈동자엔 별빛이 머물러 있는 듯 반짝였다. “그래요... 건강하게만 태어나면... 그걸로 충분해요.”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손을 맞잡았고, 서로의 손바닥에서 전해지는 따뜻함을 느꼈다. 그 순간, 상혁의 주머니 속 핸드폰이 진동했다. 그는 핸드폰을 꺼내 화면을 확인하곤 순간 눈빛이 깊어졌다. 화면엔 낯익은 이름이 선명히 떠 있었다. [부동건.]‘이 타이밍에...?’ ‘설마 무슨 일 생긴 건가?’ 지난 연회 이후, 부동건과는 한 번도 마주치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의 파장이 얼마나 컸는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송혜선과 조봉규. 그 두 사람 때문에 무너진 자존심. 그리고 결국, 부동건은 송혜선을 아이와 함께 본가에서 내쫓았다는 소문까지 들려왔다. 하연이 조용히 말했다. “받아봐요. 무슨 일일 수도 있으니까.” 상혁은 하연의 손등을 가볍게 토닥이고, 그녀를 옆에 있는 의자에 앉힌 후
부동건은 갑작스레 거칠게 기침을 터뜨렸다. “컥”‘피 맛...?’ 목 안에서 치밀어 오르는 피비린내를 억지로 삼켰다. 손등에 핏줄이 선명히 드러나고, 이성의 끈은 이미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었다. 부동건의 시선이 천천히 송혜선과 조봉규를 향했다. ‘죽여버리고 싶다. 지금 당장 이 자리에서...’ “너희들... 너희들...” 부동건의 입술은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송혜선은 극도의 공포에 휩싸였다. ‘이건 아니야... 이렇게 끝나면 안 돼...’ 그녀는 급히 앞으로 다가가 부동건의 팔을 붙잡았다. “회장님... 우리, 조 선생님이랑 그냥 산후 회복 얘기하던 중이었어요. 진짜예요, 저희는...” 그 말이 끝나기도 전, 부동건의 손이 송혜선의 뺨을 후려쳤다. 짝! 순간 정적. 강하게 내리친 손바닥 소리에,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일제히 숨을 멈춘 듯 조용해졌다. 송혜선의 얼굴 한쪽이 순식간에 붉게 부어올랐다. 눈가가 덜덜 떨리며, 눈물도 같이 맺혔다. “이 천하의... 배은망덕 같은 것. 내가 너를 어떻게 믿었는데... 감히 날 기만해?” 뒤에 서 있던 하객들 사이에서도 탄식이 흘러나왔다. “저 정도였어?” “저게 진짜였네... 소문이 아니고...” “...”송혜선은 뺨의 통증을 애써 무시한 채, 다시 붙잡았다. “회장님, 제발... 오해예요. 저희 그런 사이 아니에요. 저는... 당신뿐이었어요.” 그러나 부동건은 그 손마저 거칠게 뿌리쳤다. 그리고는 힘껏 송혜선의 복부를 발로 찼다. 퍽! 무너지는 소리와 함께, 송혜선은 바닥에 힘없이 쓰러졌다. 그녀의 입에서 신음이 터졌다. 조봉규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아니야... 지금 나섰다간 나도 끝장이야.’ 한 걸음 다가가려다...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회... 회장님... 저희... 아무 일도 없었어요... 정말이에요...” 하지만 그 한마디가 기름을 붓는 꼴이 됐다. 부동건은 그대로 조
일 순간 충격의 정점이었다.부동건은 들고 있던 와인잔을 그대로 바닥에 내던졌다. 쨍그랑! 깨지는 소리와 동시에 모든 시선이 그에게 꽂혔다. “저... 저런 미친...!” 그는 화면을 가리키며, 얼굴을 붉힌 채 말을 잇지 못했다. 숨이 거칠게 턱 끝까지 차올랐다. ‘송혜선... 네가 감히!’ 주변 하객들도 이미 술렁이기 시작했다. “저게 진짜야?” “부 회장님 딸이... 아니라고?” “와... 이건 완전히 생각지도 못한 미친 패륜이야, 상상도 못 했어.” 오늘의 연회는 더없이 화기애애한 분위기였지만, 이제 와선 최악의 스캔들 파티가 되어버렸다. ‘이 연회가... 전부 거짓된 일 때문에 생긴 일이란 말이야?’ ‘우리, 사기당한 거네. 다 같이.’ 그때 스크린이 멈췄고, 연회장 전체의 조명이 다시 환히 켜졌다. 하객들은 본능적으로 두리번거리며 부동건을 찾았다. “회장님, 괜찮으십니까?” 하지만 부동건은 아무런 대답 없이 어금니를 꽉 물고, 몸을 떨며 계단 쪽으로 향했다. 하객들은 그 뒤를 따라붙었다. ‘뭔가 일어나겠군...’ ‘이번엔 진짜 끝장이다.’ ...같은 시각, 2층 방 안. 송혜선은 조봉규의 손등을 다독이며 조용히 말했다. “조금만 참아. 며칠만 지나면 내가 다시 올게.” 조봉규는 싱긋 웃으며, 그녀의 허벅지를 장난스럽게 움켜쥐었다. “응. 기다릴게, 자기.” 하지만 그 말이 끝나기도 전, 문이 거칠게 흔들렸고, 익숙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쾅!! “송혜선! 당장 안 나와?!” 송혜선의 온몸이 순간 얼어붙었다. 그녀는 반사적으로 조봉규의 팔을 꽉 잡았다. ‘망했다.’ “어떡해, 부동건이 올라왔어.” 두 사람은 당황하며 방 안을 둘러봤지만, 창문 하나 없는 좁은 방엔 도망칠 곳조차 없었다. ‘안 돼... 이렇게 들키면, 끝장이야. 정말 끝이야.’ 송혜선은 급하게 숨을 고르며 애써 이성을 붙잡으려 했다. ‘진정해. 침착해야 돼.
연회장 안은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가득했다. 부동건은 손에 잔을 들고, 연신 들어오는 축하 인사에 밝은 표정으로 답하고 있었다. “회장님, 따님이 너무 예뻐요. 축하드립니다!” “아이고, 이런 경사는 자주 있어야죠!” ‘그래, 이 정도면 완벽하지. 오늘은 그 누구도 나를 흔들 수 없어.’ 그렇게 술이 한 잔, 두 잔 더해지며 연회장의 분위기도 점점 무르익고 있었다. 그때, 갑작스레 모든 조명이 꺼졌다. 탁! “어, 뭐야?” “불 꺼졌어! 왜 이래?” “아야, 누가 내 발 밟았어!” “...”순식간에 어둠이 덮친 연회장. 사람들의 놀란 목소리와 웅성거림이 퍼졌다. 잔을 들고 있던 부동건은 순간 정지된 듯 멈췄고, 날카로운 눈빛으로 주변을 살폈다. “지금 뭐 하는 거야! 당장 가서 확인해봐!” “네, 회장님!” 직원들이 급히 움직였고, 부동건은 진정시키려는 듯 손을 들고 말했다. “여러분, 당황하지 마시고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전기 쪽 문제인 것 같습니다. 금방 복구됩니다.” 사람들은 잠시 멈춰 서서 어둠 속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고- 그 순간, 연회장 한쪽 벽면에 설치된 대형 스크린이 조용히 켜졌다. “위이잉...” 어둠 속에서 갑작스레 터진 화면의 빛에 모두가 눈을 찌푸리며 반사적으로 손으로 눈을 가렸다. 그 빛이 익숙해질 무렵, 누군가가 터트린 외마디 감탄에, 시선이 일제히 스크린으로 향했다. “어... 저거 뭐야? 헉, 저게... 말이 돼?” 그리고, 그 스크린 안에 있는 건... 분명 두 남녀의 은밀한 장면이었다. 화면 속, 분명히 누군가를 알아본 듯한 목소리가 터졌다. “저 여자... 그분 아니야?” “옆에 있는 남자는...?” “헐, 이건 진짜 레전드다.” “아, 눈 버렸어. 이게 뭐야, 이게...” “...”사람들의 목소리는 점점 커졌고, 순식간에 연회장은 도저히 되돌릴 수 없는 혼돈의 도가니로 빠져들고 있었다.사람들 사이에 웅성거림이
송혜선이 복도 입구에 막 다다랐을 때였다. 갑작스레 어디선가 튀어나온 그림자가 그녀를 뒤에서 껴안았다. “꺄악!” 놀란 송혜선은 반사적으로 비명을 질렀고, 누군가 재빨리 그녀의 입을 막았다. “나야! 나야, 혜선아.” 익숙한 목소리에 송혜선은 순간 멈칫했다. 그리고 조심스레 남자의 손을 떼어내며 차갑게 말했다. “지금... 뭐 하는 짓이야?” ‘이 사람, 지금 제정신인 거야?’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이어서 급히 주위를 살폈다. 다행히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다. 송혜선은 그제야 숨을 돌리며, 낮은 목소리로 흘기듯 말했다. “지금 여기가 어디라고... 미쳤어, 사람들 눈에 띄면 어쩌려고!!” 그 말엔 명백한 불만과 경계심이 섞여 있었다. 조봉규는 잠시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런 식으로 나오면 안 되는데...’ 그 순간의 긴장, 그리고 복잡한 감정이 두 사람 사이에 감돌았다.조봉규의 시선이 송혜선의 얼굴에서 천천히 내려앉았다. 송혜선은 산후라 그런가, 몸매는 훨씬 더 부드럽고 풍성해져 있었다. ‘이러니까, 잊으려고 해도... 더 생각이 나잖아.’ 그는 순간 충동적으로 송혜선의 팔을 붙잡았다. “잠깐만.” 당황한 송혜선이 눈을 부릅떴다. “뭐 하는 거야!! 지금...” 그러나 조봉규는 말없이 송혜선을 옆방으로 이끌었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작게 ‘탁’ 하고 울렸다. 좁은 공간, 차오르는 침묵. 송혜선은 남자를 노려보며 벽에 등을 댔다. “정신 차려! 지금 여기가 어디라고!” 조봉규는 그녀를 바라보며 낮게 숨을 내쉬었다. “다들 홀에 있잖아. 아무도 몰라.” 남자의 말투엔 간절함과 조급함이 섞여 있었다. 이건 단순한 욕망이 아니었다. 그리움, 억눌림, 그리고 못다 한 말들. 그는 조심스럽게 송혜선의 턱선을 손끝으로 만지며 말했다. “혜선아... 나, 정말 많이 참았어.” ‘이 사람 또 이러네...’ 송혜선의 심장이 미묘하게 흔들렸다. 분
생각에 잠겨 있던 찰나, 정문 쪽에서 웅성거림이 들려왔다. 부동건이 고개를 돌리자, 최하연이 부상혁의 팔을 자연스럽게 끼고 등장하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 순간, 많은 이들의 시선이 두 사람에게 쏠렸다. 잘생긴 남자와 우아한 여자의 조합. 누가 봐도 완벽한 한 쌍이었다. ‘딱 봐도 좋은 그림이야. 저 둘은 그냥 서 있기만 해도 눈길을 끌어...’ “회장님, 부상혁 대표님은 정말 복도 많으십니다. 최씨 가문의 따님과 이렇게 잘 어울리는 커플이 어디 또 있겠습니까?” 누군가의 말에 부동건의 표정이 확 풀렸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미묘하던 분위기가 사라지고, 부동건의 얼굴에는 흐뭇한 미소가 피어났다. 부동건은 고개를 끄덕이며 두 사람을 향해 시선을 보냈다. “젊은 사람들이 서로 마음이 맞아 좋아하는 걸, 우리 어른들은 그저 기쁜 마음으로 축하해줘야 하는 일일 뿐이지요.” “게다가 상대가 최씨 가문의 따님이라니, 정말 금상첨화가 아닙니까.” 부동건은 더없이 만족스러웠다. ‘역시 상혁이다. 내 아들이라면 이 정도는 돼야지.’ 상혁은 오늘 이 자리에서 당당히 아버지의 체면을 세워주고 있었다. 한편, 송혜선도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방금 전까지 얼굴에 띄웠던 미소는 점점 사라져 갔고, 그녀의 시선은 어느새 하연에게 향했다. 오늘의 하연은, 나무나 예쁘고... 아니, 그냥 눈이 부실 만큼 찬란했다. 그리고 또렷한 이목구비에 윤기 흐르는 머릿결, 화사하게 피어난 얼굴빛까지. 하연의 행복함이 전신에서 흘러나오는 듯했다. 송혜선의 눈빛이 서서히 차가워졌다. ‘정다영... 그년, 나를 속였어.’ 그동안 하연 쪽에서 뭔가 반응이 있을 줄 알고 기다려 왔다. 하지만 소식은커녕, 정다영조차 자취를 감췄다. ‘다영이 걔가 하연이에게 약 먹이는 계획이 분명 실패한 거야. 그렇지 않고 선 지금 저렇게 멀쩡한 얼굴로 서 있을 수는 없어.’ 이대로 배가 불러오면, 섣불리 손도 쓸 수 없게 된다. ‘
이 질문에 송혜선은 눈을 반짝이며 부동건을 바라봤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이젠 나를 당당히 소개해 줄 때가 됐겠지.’ 오늘 이 자리에서, 그녀는 부동건의 정식 아내로서 인정받기를 바라고 있었다. “회장님, 말씀 좀 해보세요?” 조금은 성급한 목소리로 말을 꺼내자, 주변의 시선도 하나둘 송혜선과 부동건을 향했다. 모두 속으로는 뻔히 알고 있었다. 부동건이 과연 예전 애인을 진짜로 정실로 앉혔는지,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 했다. 부동건은 미소를 지었다. 그는 숨기거나 피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담백하게 말했다. “오 회장님, 이 사람은 제 딸의 어머니입니다.” 순간, 송혜선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딸의... 어머니?’ 손에 들고 있던 와인 잔이 살짝 흔들렸다. 금세 넘칠 듯한 와인, 애써 잡고 있는 감정. ‘지금... 이게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지?’ 그리고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억울함이 툭 하고 솟구쳤다. 심지어 손에 힘이 들어가며 하얗게 질린 손등이 떨렸다. 오병지는 단번에 눈치챘고, 싱긋 웃으며 더는 묻지 않았고, 대신 가볍게 말을 건넸다. “축하드립니다. 부 회장님, 여전히 복이 많으시네요.” 부동건은 공손하게 웃으며 송혜선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그 손길엔 무언의 위로가 담겨 있었다. “아닙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나중에 저와 이 사람의 결혼식엔 꼭 오셔서 축배 들어주세요.” 그 말에 송혜선의 눈이 번쩍 뜨였다. ‘결혼식...?’ 순간, 가슴이 쿵 하고 울렸다. 이어서 고개를 들며 수줍게 웃었다. “회장님...” 부동건은 말없이 그녀를 더 가까이 끌어안았다. 더 이상의 말은 없었지만, 그 행동으로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주변의 사람들 시선이 바뀌었다. 예전에는 송혜선을 무시하거나 조롱하던 눈빛이, 지금은 선망과 부러움으로 가득했다. 결국, ‘부동건의 아내’라는 타이틀은 그 자체로 막대한 부와 권력을 상징하는 이름이었다.송혜선은 온
부지윤의 ‘한 달 잔치’는 그야말로 성대한 수준의 파티였다. 초대받은 인사들만 봐도, 그 위세가 느껴졌다. F국 재계의 실력자들, 정재계의 핵심 인물, 이름만 대면 아는 명문가 자제들이 대거 초청됐고, 심지어 부씨 가문 어른들에게도 한 사람도 빠짐없이 직접 청첩장을 보냈다. 이 정도면, 사실상 이 아이를 공식적으로 가문에 편입시키겠다는 의지나 다름없었다. 부동건이 이 아이에게 얼마나 애정을 집착하듯 쏟고 있는지, 이날 행사 하나로 증명되고 있었다. 모든 사람이 지켜보는 가운데, 부동건은 스스로의 체면과 명예를 걸고, 딸을 세상에 내보이고 있었다. ...잔치 당일, 연회장은 유난히 붐볐다. 샹들리에의 조명이 화사하게 반짝였고, 고급스러움이 풍겨 나는 악단의 선율이 분위기를 감싸고 있었다. 송혜선은 산후조리를 마친 직후였지만, 여전히 그만의 풍채와 여유를 잃지 않았다. 예전보다 조금 살이 오른 듯했지만, 그 덕에 오히려 분위기가 더 너그러워 보였다. 그녀가 행사장에 들어서자, 평소 자주 어울리던 재벌가 부인들이 앞다투어 다가왔다. “혜선씨는 진짜 복이 많은 사람이에요. 그 고생 끝에 드디어 볕뜰날이 왔네요.” “부 회장님이 이렇게까지 챙기시는 거 보니까, 이제 정말 한 자리 하시겠어요.” “정말 이러다 조만간 ‘겹경사’ 나는 거 아니예요? 우리라도 미리 축하해줘야 하는 거야?” 송혜선은 그 소리에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얄미울 정도로 여유롭게 미소 지었다. ‘역시 사람은 자리가 높아야 대접 받는 거야.’ “지윤이는 회장님의 첫 딸이잖아요. 그러니까 귀하지 않겠어요? 그리고 회장님이 우리 모녀를 절대 가볍게 보지 않으신다는 건, 여기 있는 분들도 느끼셨을 테고요.” 그 말에 다들 박수까지 치며 웃었다. “이제 우리도 호칭 바꿔야지, 사모님!” 누군가 먼저 그렇게 불렀고, 뒤이어 몇몇이 장난처럼 따라 불렀다. 송혜선은 그 말에 딱히 제지하지 않았다. 오히려 턱을 살짝 들며, 그 호칭이 제법 익숙
진윤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가, 마침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부남준은 법을 무시하고, 사람을 죽였어요. 부씨 가문이 이 일에 개입한다면... 여론은 가만있지 않을 겁니다. 감싸려 들면 들수록, 결국은 함께 나락으로 떨어지겠죠.” ‘이건 단순한 사건이 아니라, 가문의 존망이 걸린 문제야.’ 맞은편 소파에 앉은 상혁은 다리를 꼬고, 한쪽 손으로 턱을 괸 채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남자의 눈빛엔 어떤 감정도 떠오르지 않았다. 마치 세속의 먼지 따윈 전혀 묻지 않은 사람처럼. 진윤의 말이 끝났지만, 상혁의 표정엔 미동 하나 없었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 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부씨 가문은 항상 법의 테두리 안에서 움직여왔습니다. 그건 변하지 않습니다, 여사님.” 그는 손짓으로 테이블 위를 가리켰다. 거기엔 작은 검은색 USB 하나가 놓여 있었다. “이 안에... 고나희 씨가 남긴 게 있습니다. 여사님께 드리라고 하더군요.” 순간, 진윤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숨이 턱 막히는 듯한 표정으로, USB를 바라봤다. “지금... 뭐라고 하셨죠?” 그녀의 목소리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나희가... 뭔가를 남겼다고...?’ 사고는 너무도 갑작스러웠다. 딸의 마지막을 함께할 시간조차 없이, 그녀는 세상을 떠났고, 어떤 유언도, 한마디 말도 남기지 못한 줄 알았다. “나희... 그 애가... 무슨 말을 남겼다는 거예요...” 진윤은 입을 틀어막았다. 눈물은 이미 참을 수 없다는 듯 쏟아지려 하고 있었다. 상혁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쌌다. “사람이 떠난 건 바꿀 수 없습니다. 하지만 남겨진 마음은, 누군가가 반드시 전해야죠.” 그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무거운 공기를 뒤로한 채, 조용히 방을 나섰다. 잠시 후.룸 안에서 낮고, 억눌렀던 울음이 터져 나왔다. “나희야...” 진윤은 USB를 손에 쥐고, 세상이 무너진 듯한 표정으로 울고 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