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지만 뭐?”“이 방면의 고수인 하경 도련님에게 도움을 청한다면...”태훈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하연이 끼어들었다.“안 돼.” “하경 오빠는 일정한 선을 넘을 수 없어. 물론 나도 오빠한테 폐를 끼치고 싶지 않고.” 여기까지 말한 하연은 조금 안타까워했다.‘내가 해커를 찾지 못해서 그래. 해커를 찾았더라면, 지금쯤 도움을 받을 수 있었을 텐데...’ “다른 방법을 생각해 봐. 그리고 한씨 가문도 주시해 줘.” 태훈이 사무실을 나섰다. 하연은 곧장 여은에게 연락하여 한서영의 루머를 띄워 달라고 부탁했다. 그녀의 의도를 알아챈 것일까. 수화기 너머에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가흔이한테도 말해봤어?] “너한테 연락했으니까 당연히 얘기했지. 딱히 신경 쓰지는 않던데 약간 흥분하더라고.” 여은이 웃으며 말했다.[흥분? 자기 남자 친구가 다른 여자와 스캔들에 휘말렸는데 고작 흥분?]하연도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가흔을 이해하는 사람으로서 원인을 추측하려 했다.“아마 남자 친구가 너무 주목받아서 현실 생활에 어려움을 겪었던 것 같아. 그래서 모든 관심이 한서영에게 향하는 거라면, 기꺼이 그렇게 되도록 둔 거지.” “하성 오빠도 가흔이가 오빠를 쫓아다니는 다른 여자들에게는 전혀 관심 없다는 걸 알고 있을까?” 하성이 알고 있는지 아닌지는 하연도 확신할 수 없었다. 하지만 막연하게 좋지 않을 거라는 예감이 들 뿐이었다. ‘이런 상황이 지속되다 보면, 두 사람의 감정에 금이 갈지도 몰라.’ 어쨌든 하성은 이 부분에 대해 아주 집착하는 경향이 있어서 가흔이 확고한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면 폭발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연이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최대한 빨리 일을 마무리해야겠어.” 한서영이 처음 참여한 작품은 대형 제작인데, 그녀는 조연을 맡았다. 게다가 이방규가 그녀의 뒤를 든든하게 받치는 탓에 감독도 함부로 하지 못했다. 하지만 같은 작품에 참여한 여주인공은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상대는 유명한 여배우 출신이며, 권위 있는 상을 여러
사실 소울 칵테일은 외진 곳이 아닌 도심에 있었다. 그럼에도 이방규의 비서가 이렇게 보고한 이유는 손님이 정말 적어서, 때로는 하루 종일 다섯명도 드나들지 않기 때문이었다. 개업 당시의 활기도, 인기 있는 사람의 마케팅도 없어서 모든 것이 일상으로 돌아갔다. 심지어 도심 한가운데에서 고립된 것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소울 칵테일의 서쪽에는 멀지 않은 인공호수가 있었는데, 곧 해가 질 무렵이어서 석양이 모든 것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방금 손님을 만난 상혁이 창가에 서자, 강성훈이 들어와 찻잔을 정리하며 물었다.“부 대표님, 차를 좀 더 드릴까요?” 고개를 돌린 상혁이 그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성이 뭡니까?” “강 씨입니다. 편하게 성훈이라고 불러주세요.”성훈은 단정한 얼굴의 소유자였으나, 눈빛이 매우 예리했다. “차와 관련된 일을 하는 사람 같지는 않은데... 마음을 가라앉히고 집중하는 건 잘하시나 봅니다.” 고개를 숙인 성훈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부 대표님, 아닙니다. 저는 학벌도 좋지 않고, 큰 뜻도 없어요. 부 대표님 같은 분들이 하시는 일은 저 같은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리고 이 차나 찻잎은 단순하고 깔끔하지만, 사람은 복잡하고 예측하기 힘든 법이죠.” 상혁은 입을 다물고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부 대표님은 제 예상을 완전히 벗어나셨어요.” “뭐라고요?”“언제나 당당하신 부 대표님께서 인상만으로 사람을 판단하신 건, 조금 성급하셨던 것 같네요.성훈이 한 마디 더 덧붙였다.상혁은 한쪽의 노트북을 느릿느릿 닫고 창문 앞에 반쯤 기대었다.“저는 문제 될 게 없다고 생각합니다. 일반적인 직원이라면 제가 여기서 일하는 모습을 궁금해하고, 주시하기 마련이에요. 하지만 그쪽은 단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죠. 아주 침착한 게... 평범한 사람과는 달라요.” 성훈은 다기를 꽉 쥐었지만, 어떠한 기색을 드러내지는 않았다.“부 대표님, 칭찬이 과하십니다. 그런 과한 평가는 조금 부담스럽네요.” 이때, 문밖에서 어떤
이현이 우물쭈물하며 말했다.“사실, 부 대표님의 일을 제게 보고할 필요는 없습니다.”상혁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물고기가 먹이를 먹는 것을 주시했다.“후에 HT그룹이 조사받기 시작하자, 이 사건이 발각될까 두려웠던 그 도시계획국장이 저에게 협력하자고 하더군요.” 이현이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설마... 그까짓 협력 따위로 십여 명이 넘는 사람의 목숨을 원래 없었던 것처럼 둔갑했다는 겁니까?” “HT그룹의 한서준 대표는 좋은 분이셨어요. 그 사람들이 여생을 보낼 수 있도록 충분한 배상금을 지불했거든요.” 이현은 꿈쩍도 하지 않고 콧방귀를 뀌었다.“그래요?” 상혁이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손 사장님은 참 정의로운 것 같네요. HT그룹과 같은 기업을 별로 좋아하지 않으니까요.” “저는 생명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기업이라면, 어떤 기업이라도 싫어합니다.”이현이 한마디 한마디 대답했다. “그럼 HT그룹이 무너지기를 바라겠네요?” 탐색적인 질문이라는 것을 알아차린 이현이 조금 긴장을 풀며 말했다.“그건 부 대표님께서 하실 일이지, 저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일입니다.” “그냥 해본 말이었어요.”이 말을 마친 상혁이 옆에 있는 외투를 챙겨 밖으로 나가려 했다. 이현의 곁을 지나려던 찰나, 멈춰선 그가 말했다.“내일 또 오겠습니다.” 어둡고 좁은 복도를 가로지르는 상혁의 그림자는 경쾌하고 가벼워서 안개처럼 떠 있는 듯했다. 황연지가 상혁의 뒤를 따랐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성훈이 빠른 걸음으로 위층으로 올라갔다.“아까 부 대표님이 뭐라고 하셨어요?” 룸으로 들어선 이현이 조금 전까지 상혁이 있던 위치로 걸어갔다.“HT그룹이 무너지길 원하냐고 물었어.” 성훈이 의외라는 듯 물었다.“설마, 진짜 신분을 알아낸 걸까요?” 이현은 상혁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단순한 탐색이 아닐 거라는 짙은 의심이 들었다.“이수애는 요즘 어때?” “예전처럼 먹고 마시고 놀면서 사모님 놀이나 하고 있어요. 한서준도 마음
“비밀도 좀 있어야죠.”미소를 짓는 상혁은 이 말을 마음에 두지 않았다. 아크로리버파크로 돌아가기 전, 하연은 조진숙이 좋아하는 요리를 포장하기 위해 식당에 갔다. 음식을 기다리는 동안 상혁이 말했다.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어. 드시고 싶은 게 있다면 스스로 주문할 줄도 아시는 분이니까.”“그거랑 이게 어떻게 똑같아요. 제 마음이 담겨야 음식을 먹는 진숙 이모도 기쁠 거예요.”커다란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감싼 상혁이 가볍게 몇 번 두드렸다.“딸로서의 효심이야, 아니면 미래의 며느리로서의 효심이야?” 하연은 이미 그의 농담에 면역이 되었다.“당연히 딸이죠.” “미래의 며느리라는 정체성에는 자신 없다는 거야?” “그건 오빠가 하기에 달린 거죠.”옆으로 몸을 돌린 하연은 그의 턱을 움켜쥐고 약간 유혹했다.“부 대표님이 얼마만큼의 성의를 가졌는지, 얼마나 많은 혼수를 가지고 장가를 올 건지 봐야 하니까요.”여자는 본래 강한 매력을 지닌 존재라서 의도적으로 유혹하는 표정을 지으면, 사람의 마음을 간질거리게 하는 법이었다. 상혁이 움츠러들던 하연의 손가락을 붙잡았다.“원하는 대로 줄게.”상혁의 눈빛에는 많은 의미가 담겨 있었고, 하연의 마음은 순간적으로 뜨거워졌다.“농담이에요.” “나는 농담하는 거 아니야.”상혁이 그녀의 귓가에 얕고 뜨거운 숨결을 내쉬었다.“줄게, 뭐든.” 입술을 오므린 하연의 마음은 꿀처럼 달콤해졌다.‘상혁 오빠가 곁에 있으면 모든 게 다 좋아 보여.’ 두 사람이 아크로리버파크에 다다르자, 이제 막 돌아온 조진숙이 기세등등하게 차에서 내리며 피곤하다고 소리쳤다. “이수애 여사라고 했던가? 돈을 아주 흥청망청 쓰더구나. 하마터면 도시의 모든 가게를 돌아다닐 뻔했어. 내일은 없는 것처럼 돈을 쓰더라니까?”하연이 포장한 음식을 꺼내며 미소를 지었다.“고생하셨어요, 진숙 이모, 직접 나서신 거예요?” 조진숙이 손을 내저었다.“그 여자가 나를 본 적 있어서 직접 나설 수는 없겠더구나. 그래서 친구한테 부탁을
그 사람들은 앞에는 노트북이 놓여 있었는데, 모두 헤드셋을 끼고 키보드를 두드리며 매우 집중하고 있었다. 이현이 고개를 끄덕이며 성훈을 불렀다. “어서 이리 와. 손님들을 푸대접하지 말고.” “필요 없다고 했잖아요. 귀라도 먹은 겁니까? 당장 나가세요!”덥수룩한 수염을 기른 사람은 성격이 매우 거친 사람이었다. 그가 노호하며 말했다. 이현이 당황하지 않고 말했다.“이게 저희의 예의입니다. 여러분이 필요 없다 한들, 저희는 여쭤봐야 하는 법이죠.” “남의 말을 못 알아먹는 거야, 뭐야? 신경 쓰지 말라고 했잖아, 당장 꺼지라고!” 수염이 덥수룩한 남자는 곧 인내심이 바닥날 것 같았기에, 이현과 성훈을 밀치고 밖으로 나갔다. 문이 닫히려는 순간, 이현이 갑자기 백핸드로 그를 밀었고, 빠르고 간결한 힘으로 그를 소파에 눌러 제압했다.“성훈아! 당장 노트북 전원을 뽑아!” 수염이 덥수룩한 남자가 울부짖었다.“아, X발!” 하지만 그들도 만만치 않았는데, 재빨리 일어나 노트북을 끄고, 성훈의 행동을 저지한 것이었다.“이런 쪼끄마한 곳에 숨은 고수가 있을 줄이야!” 이 말을 마친 사람들이 잇달아 찻잔을 깨뜨리며 성훈과 싸움을 벌였다.“역시 무술자였군!” 수염이 덥수룩한 남자는 곧바로 일어나 이현을 땅에 내던졌고, 주먹을 내리꽂았다. 하지만 이현이 몸을 굴려 피하며 말했다. “나는 당신들과 어떤 원한도 없어요. 그런데 왜 날 괴롭히려는 겁니까?”이현이 약간 숨을 헐떡였다.“잘못은 당신들이 했잖아요. 감히 손님들의 사생활을 엿보다니... 이 문제가 터진다면 나는 망하고 말 거라고요!” 날카로운 이현의 눈빛은 모든 것을 간파하는 듯했다. 수염이 덥수룩한 남자가 침을 뱉었다.“너 같은 자식한테 발각될 줄이야. 이제 몸을 사릴 필요도 없겠군!” 순식간에 크지도 작지도 않은 룸이 주먹질로 난장판이 되었다. 이현은 수염이 덥수룩한 남자를 제압할 수 있었지만, 많은 상대의 잔인한 공격을 버텨내기에는 무리였다. 성훈이 저항하며 외쳤다.“사장
이 사람들이 한 짓은 목숨을 바친 것이지만, 부상을 당할지언정 감옥에 갇혀 자유를 잃고 싶지는 않았다. “형사님, 말다툼을 좀 했는데, 오해하신 모양이네요!”수염이 덥수룩한 남자가 이현을 풀어주며 두 손을 들었다. “말다툼이요? 피가 다 터졌는데 말다툼이라고요? 패싸움이겠죠!”하연은 이현의 손에 묻은 피를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녀는 저 사람들이 자기 손에 있는 것이 가짜 총이라는 것을 알아차릴까 봐 가까이 갈 수도 없었다.손이 땀투성이가 된 그녀가 입술을 오므리며 말했다.“당장 나와서 일렬종대로 서세요!” 그 사람들을 주저했지만, 총에 두려움을 느끼고 룸에서 나왔고, 삐뚤삐뚤하게 서 있었다. 룸에 있던 성훈이 급히 이현을 일으켜 세웠다.“괜찮으세요, 사장님?” 하연이 재빨리 걸어가서 총으로 그들을 가리켰다.“대체 어떻게 된 일이에요?” 이현이 눈살을 찌푸리며 휴지 몇 장을 뽑아 피를 닦았다.“불법 도청이에요.” 책상 위에는 컴퓨터와 이어폰이 놓여 있었다. 이 말을 들은 하연이 자신도 모르게 낮은 목소리로 질책했다. “경찰에 신고할 줄도 모르세요? 왜 이런 일에 직접 나서신 건데요? 목숨을 걸면 어떻게 하냐고요!” 그녀의 눈총과 초조함은 진심이 담긴 것이었기에 이현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경찰에 신고할 겨를이 없었거든요. 최 형사님이 제때 오셔서 정말 다행이네요.” 하연은 더욱 화가 났다.‘아직도 농담이 나오나?’ “당신들, 대체 뭘 도청한 겁니까?”하연이 큰 소리로 물었다. 이현이 그녀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최 형사님, 지금은 그걸 물어볼 때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렇다. 상황이 어느 정도 통제된 것을 본 하연은 그들이 극악무도한 범죄자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말했다.“지원 동료들이 곧 도착할 거니까 순순히 여기서 기다리는 게 좋을 거예요. 혹시라도 도망간다면, 무슨 일이 일어나든 감당하셔야 할 겁니다!” 이 말을 마친 하연은 쪼그리고 앉아 이현의 상처를 살펴보았다.“어디를 다친 거예요
방금 경찰에게 잡혀간 사람들은 상혁의 전속 룸에 도청기를 설치했는데, 그의 대화 내용을 도청하기 위한 것이었다. 다만, 기민한 이현이 이토록 빨리 그들의 계략을 발견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그들은 불법 도청에 대한 모든 것을 자백했다. 경찰관은 그들에게 배후가 누구냐고 물었지만, 아무도 시키지 않았다고 대답할 뿐이었다.“저희가 귀신한테 홀렸나 봐요. DL 그룹의 정보를 팔아서 돈을 벌고 싶은 마음에 그만...” 상혁이 무관심하게 입을 열었다.“모두 일상적인 이야기였고, 아무런 정보도 없었습니다.”이 사건은 나호중을 놀라게 했는데, 상혁의 저명한 신분 외에도, 그와 대화를 나눈 사람이 고위 간부로, 직위가 낮지 않은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이 악수를 나누던 찰나, 상대가 말했다.“나 서장님, 나 서장님의 관할구역은 그다지 안전한 곳이 아니군요. 친구와 나누는 대화도 도청될 우려가 있으니까요.” 나호중은 부끄러워 얼른 사과했다.“단속을 강화하겠습니다.”비록 세무서와 FL 그룹 이사 간의 비공식적인 대화는 규정에 맞지 않는 것이었지만, 경찰이 확인한 결과, 그들의 컴퓨터와 두 사람의 대화 내용에서는 아무런 문제가 발견되지 않았다. “오늘은 일에 관해 이야기하지 않겠어요. 삼촌의 따님이 얼마 전에 막 18세 생일을 맞았다고 들었는데, 제가 너무 무심했습니다. 오늘 만나자고 한 이유도 특별한 선물을 준비했기 때문이에요.” 전파를 타고 들리는 상혁의 목소리는 맑고 온화했다. “상혁아, 뭐 이런 걸 다... 너무 귀중해서 받을 수 없을 것 같구나.’ “귀중한 물건은 아닙니다. 아무래도 규정은 준수해야 하니까요.” 이 말을 끝으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경찰 직원은 도대체 어떤 선물이기에 규정에 맞다는 것인지 검사할 수 없었다. 상대는 아직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왜냐하면 몇십 분 전, 여기까지 말한 상혁이 몸을 숙여 탁자 아래에 있던 두 개의 도청기를 꺼내서 부숴버린 장면이 생생히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그는 깜짝 놀랐다.“이게 뭐야
옛날얘기를 언급하자, 이현이 손을 들어 눈을 가리고 나른한 모습을 보였다. “다 지난간 일이잖아요. 저는 개의치 않습니다. 서장님이 신경 쓰실 필요도 없는 일이에요.” 나호중이 이현을 살펴보았다.당시 활기 넘치던 남자아이는 이미 성숙하고 듬직한 남자가 되어 있었다. 모처럼 당시의 기질을 엿볼 수 있었던 나호중이 한숨을 내쉬었다.“참 아쉬웠지. 너는 그때 팀에서 가장 용감하고 전도유망한 사람이었어. 근데 지금 꼴을 좀 봐라. 옛날에 네가 데리고 있던 양한빈도 팀장이 되었는데, 넌...” 이 말은 못이 되어 귀에 박히는 듯했다. 이현이 몸을 일으켰다.“됐습니다, 나 서장님. 저를 좀 보세요. 행복해 보이지 않습니까? 잘 먹고 잘 마시잖아요. 예전보다 못하다고 할 것도 없어요.”나호중은 하려던 말을 멈추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서장실을 나서면 긴 복도가 펼쳐져 있었다. 그곳에는 막 출동에서 돌아온 듯한 경찰들이 보였다. 그들의 몸은 깨끗하지 않지만, 모두 의기양양하고 활력이 넘치는 모습이었다. 이현은 복도에 서서 한참이나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 머릿속에 나호중이 한 말이 번뜩였고, 그의 표정도 옅어져만 갔다. 시선을 거둔 그가 한 줄기의 그림자로 시선을 옮겼다. 한 여자가 문 앞에 반쯤 엎드려 안쪽 상황을 자세히 살피려 했다. 들킬까 봐 두려워하면서도, 재빨리 몸을 뒤로 빼며 민첩하고 교활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이현의 입가에 다시금 미소가 번졌다. 마주 오던 양한빈이 그에게 인사하려 했지만, 그는 검지손가락을 세워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그는 한 걸음 한 걸음 그 여자의 뒤로 다가가서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깜짝 놀란 하연은 온몸이 거의 튀어 오를 뻔했다. “어떻게 손 선생님이...”그녀가 가슴을 쓸어내렸다. “뭘 그렇게 봐요?” “상혁 오빠를 기다리고 있어요.”그녀는 잘못을 저지르고 벌서는 학생과 같은 모습이었다. 이현이 안쪽을 힐끗 바라보았는데, 상혁은 진술서 아래에 서명하고 있었다. “제 설명이 필요
아무 일 아니라는 듯이 서둘러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고 정신을 바짝 차리며 정다영이 억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엄마, 남준 씨가 아마 많이 바쁜가 봐요. 일 끝나면 꼭 세배하러 올 거예요.” 하지만 하미주는 딸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았다. 왜냐하면 자신은 눈이 멀지 않은 이상, 최근의 분위기를 못 느낄 리가 없었다. 그리고 요즘 들어 사람들의 태도가 어떻게 변하는지 똑똑히 보고 있었다.지금 자신마저 마음을 다잡지 못하고 조금이라도 힘이 빠진다면, 언제든 등을 돌릴 준비가 되어 있는 게 세상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애초에 하미주는 딸과 남준의 결혼 자체를 반대한 사람이었다. 하미주가 보기엔, 아무리 돈이 많고, 외형적으로 그럴듯해 보여도, 남준은 결국 ‘첩’의 자식이었다. 그런 가정에서 제대로 된 교육을 받고 자랐을 리가 없었다. 그런데도 다영은 기어코 남준을 붙잡겠다고 난리였다. 그것도 마치, 그 남자가 아니면 죽기라도 할 것처럼. 결국 정지철이 남준을 높게 평가하자, 하미주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인 거였다. 그래서 약혼까지는 허락했는데 예전엔 그럭저럭 신경을 써주던 남준이, 이제는 대놓고 얼굴도 안 비췄다. 하미주는 아주 불만이 많았다.‘명절에 처가집 한 번 들를 생각도 없는 사위가 과연 제대로 가정을 꾸릴 생각이 있을까? 말 다 했지.' 이렇게 생각하자 그녀는 딸의 손을 잡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다영아, 엄마가 하는 말 기분 나빠하지 말고 잘 들어. 이제 네 아버지가 그런 상황이니, 우리 집도 예전 같지 않아. 사람들이 우리를 어떻게 보는지도 너도 잘 알고 있지?” 다영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녀는 당연히 알았다. 아니,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자신은 더욱 필사적으로 버텨야 한다고 결심했다. 이 기회에 확실히 자리 잡지 않으면, 사람들에게 무시당하는 건 시간 문제일 테니까. “엄마, 집안 사정이랑 내 결혼은 상관없는 일이에요.” 하미주는 깊은 한숨을 쉬며,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
상혁은 풍등을 들고 하연과 함께 마당으로 나왔다. 타이밍 좋게 하인이 라이터를 건네주고는 조용히 물러났다. 멀지 않은 곳에서 부남준이 조용히 고개를 내밀었다. 몰래 지켜보던 그는, 두 사람이 자연스럽게 풍등을 펼치는 모습을 바라봤다. 상혁이 직접 가운데 심지에 불을 붙였다. 뜨거운 열기가 천천히 풍등을 부풀게 만들었고, 풍등은 두 사람 앞에서 서서히 떠오르기 시작했다. “하연아, 빨리 소원 빌어!” 하연은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며 간절히 소원을 빌었다. 상혁은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조용히 또 다른 소원을 빌었다. ‘언제나 우리 둘이 해마다, 해마다, 서로를 마주할 수 있기를.' “다 됐어요.” 하연이 조심스럽게 눈을 떴다. 그 눈빛에는 반짝이는 빛이 서려 있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서서히 손을 놓았다. 풍등은 하늘을 향해 천천히 날아올랐고, 점점 멀어지더니 마침내 한 점이 되어 사라졌다. “어떤 소원 빌었어?” 상혁이 손끝으로 하연의 귓불을 살짝 어루만지며 물었다. 하연은 장난기 어린 눈빛으로 깜빡이며 말했다. “소원은 말하면 이루어지지 않는대요.” “그래? 그럼, 네 소원이 꼭 이루어지길 바랄게.” 두 사람은 다시 눈을 마주쳤다. 상혁의 숨소리가 깊어졌다. 그는 하연의 턱을 살며시 잡고, 몸을 숙여 그녀의 입술을 맞췄다. 조심스러웠던 키스는 점점 더 깊어져 갔다. 하연은 숨이 가빠졌다. 상혁을 밀어보려 했지만, 오히려 더 깊이 끌어안겼다. 여자의 허리는 유연하게 휘어졌고, 상혁의 등은 팽팽한 활처럼 긴장됐다. 결국, 하연도 상혁의 목을 감싸 안고, 키스에 응답했다. 그러나 그 순간, 불청객 같은 전화벨 소리가 분위기를 깨뜨렸다. 하연은 화들짝 놀라며, 급하게 상혁을 밀어냈다. 그녀의 얼굴은 빨갛게 익은 사과처럼 새빨개졌다. “전화 울리는데요?” 하연의 목소리는 한층 낮아져 있었다. 묘하게 사람을 간지럽게 만드는 목소리였다. 상혁은
다른 곳에서 있던 조봉규가 소란이 일자마자 급히 뛰어 들어왔다. 그리고 빠른 걸음으로 송혜선에게 다가가며 다급히 말했다. “설날인데, 뭐하러 이렇게 화를 내...” 조봉규가 입을 여는 순간, 남준의 온몸이 싸늘하게 굳어졌다. 남준의 시선이 날카롭게 쏘아붙었고, 조봉규는 본능적으로 움찔하며 고개를 돌렸지만, 이내 애써 태연한 척하며 한 발 다가섰다. 송혜선의 팔을 조심스레 부축하며 낮은 목소리로 달랬다. “지금은 무엇보다도 건강이 우선입니다.” ‘건강?’남준은 손에 쥔 염주를 힘껏 움켜쥐었다. 힘이 들어간 손등에는 핏대가 서고, 눈빛은 살얼음처럼 차가웠다. 그리고 시선은 서로 닿아 있는 두 사람의 손목에 단단히 고정되었다. 입가에 엷은 조소가 떠올랐다. “조 선생님, 참으로 열정적인 분이시군요. 설날에도 근무 태세를 유지하시다니.” 조봉규는 눈치가 빠른 인물이었다. 당연히 그의 말 속에 담긴 조롱을 알아챘다. 그러나 겉으로는 한껏 공손한 태도를 유지하며 머리를 숙였다. “별말씀을요. 환자의 곁을 지키는 게 제 본분입니다.” 남준은 가만히 조봉규를 노려보다가, 짧고 날 선 경고를 던졌다. “그렇다면 본분에만 충실하시죠. 여긴 부씨 가문의 본가이니까.” 순간, 분위기가 얼어붙었다. “남준아!” 송혜선이 다급히 나섰다. 남준을 나무라는 말투였지만, 그 속에는 조봉규를 감싸려는 의도가 분명히 깔려 있었다. 남준의 눈빛은 더욱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그러나 송혜선은 오히려 기세를 올려 쏟아내듯 말했다. “네가 좀 더 나서서 잘했더라면, 부상혁한테 밀릴 일도 없었어! 내가 왜 조진숙한테 설날마다 굽신거려야 하냐고?” “지금, 어머니는 나를 원망하시는 겁니까?” 목소리가 한층 낮아졌다. 남준의 손에서 염주의 한 알이 ‘탁' 하고 부서졌다. “남준아! 지금 네가 무슨 짓을 한 거야?” 송혜선은 깜짝 놀라 소리쳤다. “염주는 영적인 기운이 깃든 물건이야. 함부로 부수면 불길한 일이 생길
부동건의 말은 송혜선을 전적인 신뢰를 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나중에 진실이 밝혀지면, 과연 부동건은 스스로를 어떻게 납득할까?’ ‘결국 속아서 살아온 날이 우스운 바보일 뿐...’ 조진숙은 아무 말 없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애틋한 사랑인데, 굳이 이럴 필요가 있을까?” 잠시 뜸을 들이던 그녀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이 서류들, 가져가.” “나 다른 뜻은 없어.” 부동건은 조진숙의 단호한 태도에 살짝 주춤했지만, 곧장 다시 설득을 시도했다. “네가 아직 날 원망하고 있다는 거 알아. 그동안... 혹시 네가...” “착각하지 마.” 조진숙은 부동건의 말을 끊었다. 더 이상 불필요한 감정 소모를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부동건은 한 발 더 다가섰다. “하지만 네가 이걸 받지 않는다면, 결국 날 아직도 원망하고 있다는 뜻 아니야?” 조진숙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 가슴 깊숙이 가라앉은 감정이 불쑥 떠오르는 듯했다. 그녀는 천천히 숨을 들이마시며 감정을 정리한 뒤, 담담한 목소리로 물었다. “당신... 정말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어?” 부동건은 말없이 서류를 정리하더니, 숙련된 손놀림으로 만년필을 열어 조진숙 앞에 내밀었다. 이것이 바로 자신의 대답이었다. “후회할 거였으면, 애초에 여기 오지도 않았어.” 이번엔 조진숙도 망설이지 않았다. 그녀는 펜을 들어, 서류 맨 아래에 단호한 필체로 자신의 이름을 남겼다. “부디 이 선택을 후회하는 날이 오지 않길 바라.” 부동건은 서류를 덮으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제야, 마음속에 짓눌려 있던 무언가가 비로소 내려앉는 듯했다. 그는 문득 나직이 말했다. “이제야... 후회한들, 이제 돌아갈 길도 없어.” 조진숙은 그 말에 가슴이 미세하게 흔들렸지만, 끝내 시선을 돌렸다. 담담한 표정 속에 모든 감정을 삼키며, 단 한마디만 남겼다. “이건... 다 정해진 운명이야.” ‘운명의 장난...’ ‘어쩔 수
“무슨 말씀인지 압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제 뜻대로 하게 해주십시오.” 부동건의 태도가 단호했다. 이를 지켜보던 부해철이 더 이상의 말은 의미가 없을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이미 네가 마음을 정했다면, 내가 더 이상 뭐라 할 수도 없지. 다만, 앞으로 그 여자를 내 앞에 데려오지는 마라. 네가 어떻게 살든 상관하지 않을 테니.” “그리고...” 부동건이 무슨 말을 더 하려 했지만, 부해철은 손을 휘저으며 등을 돌렸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라지는 뒷모습만이 남았다. ‘그렇게까지 반대할 줄은 몰랐네...’ 부동건은 묘한 기분으로 그 자리에 멈춰섰다. ...설날 온 나라가 한 해의 끝을 보내고, 가족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날. 예전에는 늘 조진숙과 상혁 모자가 함께 보내던 명절이었다. 그런데 올해는 조금 달랐다. 최씨 가문과 부씨 가문의 본가가 가까운 데다, 명절이 지나면 하연과 상혁의 약혼식이 있을 예정이었다.그래서 조진숙이 제안했고, 양가 가족들이 함께 부씨 가문에서 설날 저녁을 보내기로 했다. 그 덕분에 조진숙은 하루 종일 분주하게 준비에 매진했다. 그러나 제사가 끝나자마자 뜻밖의 손님이 찾아왔다. “진숙아, 새해 복 많이 받아.” 부동건이 어색한 미소를 띠며 낮은 자세로 인사를 건넸다. 평소 같았으면 송혜선과 함께 명절을 보낼 사람이, 오늘 이곳에 나타났다는 것 자체가 조진숙에게는 뜻밖이었다.그녀는 담담한 얼굴로 물었다. “여긴 웬일이죠?” “잠깐 들렀어, 당신한테 할 말도 있고 해서.” 조진숙은 그의 시선을 따라 문득 집안 분위기를 둘러보았다. 송혜선이 이곳에 들어온 이후, 부씨 가문 본가는 한 지붕 아래에서도 철저하게 북쪽과 남쪽으로 나뉘어 있었다.그 경계는 뚜렷했고, 불필요한 마주침은 없었다. 부동건이 송혜선과의 결혼을 공식적으로 선언한 이후, 둘은 한 번도 마주친 적이 없었다.만약 이번 일이 없었다면, 조진숙 역시 이미 오래전에 이 집을 떠났을 터였다. “들어와.
송혜선은 급히 분위기를 누그러뜨리려 했다. “아무래도 남준이가 좀 늦나 봐요. 조금만 더 기다려 보시는 게 어떨까요?” 부동건은 차갑게 코웃음을 치며 얼굴을 굳혔다. “말 같지도 안은 소리를 하고 있어! 오늘 같은 날에, 시간 개념도 없이 늑장을 부려.” 송혜선은 딱히 반박할 말이 없었다. 결국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 “남준이 오면 꼭 제가 주의를 줄게요.” “교육 똑바로 시켜. 좀 상혁이 하는 것에 반만큼이라도 신중했으면, 나도 그 녀석한테 좀더 잘해 줬을 거야.” ‘또 시작이군.’ 송혜선은 속이 쓰렸지만, 이를 악물고 참았다. “오면 오는 거고, 못 오면 어쩔 수 없지.” 부동건은 한 치의 여지도 주지 않고 단호하게 내뱉곤, 그대로 자리를 떠났다. “어서 남준이를 찾아와! 오늘 제사에 참석하지 못하면, 앞으로 나를 어머니라고 부를 생각은 하지도 마.” 송혜선의 가슴이 격하게 오르내렸다. 이 모든 노력들이 사소한 실수 하나로 무너질 순 없었다. ...부씨 가문은 제사에 있어서 철저한 예법을 중시했다. 다행히도 상혁은 부동건과 수년간 제사를 지내며 익숙해져 있었고, 모든 절차를 한 치의 오차 없이 진행했다. 부씨 가문의 어른들 역시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동건아, 상혁이가 있어서 네 대가 끊길 걱정은 없겠구나.” “앞으로 부씨 가문의 대업을 상혁이가 이어간다면, 우리 늙은이들도 한시름 덜겠어.” 부동건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야 물론이죠. 상혁이는 부씨 가문의 기둥이 될 인재입니다.” 상혁은 겸손한 태도로 말했다. “과찬이십니다. 앞으로도 많이 지도해 주십시오.” “어디 우리가 너희 젊은이들에게 배우는 게 더 많지!” “...”제사가 거의 끝나갈 무렵, 부남준이 느지막이 모습을 드러냈다. 부동건은 남준을 보자마자 눈빛이 차갑게 식었지만, 일단 감정을 누르고 말했다. “멍하니 서 있지 말고, 어서 와서 절부터 올려라.” 남준은 살짝 눈썹을
최씨 가문의 따뜻한 분위기와 달리, 부씨 가문의 본가는 싸늘하고 조용했다.예년과 다름없이, 설날이 되면 부동건은 집안의 남자들과 함께 조상들에게 제사를 올려야 했다. 올해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른 아침부터 송혜선은 핸드폰을 손에 쥐고 부남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연결음만 울릴 뿐, 남준은 끝내 받지 않았다. ‘이 녀석은 정말이지, 사람 속을 태우는 재주가 있다니까.’ 송혜선의 얼굴에 점점 초조한 기색이 드러났다. 옆에서 지켜보던 조봉규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때? 아직도 전화를 안 받아?” 송혜선은 짙어진 눈매로 핸드폰을 내려다보며 입술을 꾹 다물었다. “이 녀석, 정말 사람을 신경 쓰게 만드네! 도대체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거야...!” 조봉규는 부드러운 말투로 그녀를 달랬다. “혹시 무슨 사정이 있어서 늦는 걸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너무 걱정 마십시오. 남준이가 철없는 아이도 아니고.” ‘철없는 아이가 아닌데 이러겠어?’ 송혜선은 속으로 한숨을 삼키며, 최대한 감정을 눌렀다. “부씨 가문의 어른들이 원래부터 남준이를 못마땅해했는데. 이런 중요한 제사까지 빠지면, 분명 뒷말이 나올 거야.” 그녀의 말투에는 이미 불안과 초조함이 서려 있었다.그러는 사이, 두 사람이 작은 응접실에서 나와 복도를 따라 걸어갔다. 그때, 정면에서 다가오던 부동건과 마주쳤다. 부동건은 갓 외투를 정리하던 참이었다. 하지만 송혜선과 조봉규가 함께 있는 모습을 보자, 손동작이 살짝 느려지며 묘한 시선을 던졌다. “조 선생, 올해도 그렇게 혜선이 옆에 딱 붙어서 열심히 잘 보살펴 주세요.” 그 말 한마디에, 분위기가 묘하게 변했다.조봉규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한 발짝 뒤로 물러서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무슨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회장님, 제가 해야 할 일을 할 뿐입니다.” 부동건은 묘한 눈빛을 유지한 채, 덤덤히 말했다. “혜선이가 아이를 무사히 낳으면, 그에 대한 보상도 충분히 해줄 테니
두 집안이 한데 모여 북적이며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이런 귀한 순간을 마음껏 즐기며 보내다 보니, 어느덧 설날 전날이 되었다. 모두 함께 전용기를 타고 F국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설날이 밝았다. 올해는 오랜만에 최씨 가문 식구들이 한자리에 모인 데다, 기쁜 소식까지 겹친 한 해였다. 그 덕분인지 최동신은 평소보다 더욱 설 준비에 신경을 쓰고 있었다. 이른 아침부터 최씨 가문의 본가는 분주했다. 집사와 고용인들이 분주히 움직이며 저택 곳곳을 장식했다. 새빨간 복주머니와 길상 문양이 새겨진 장식들이 하나둘 자리 잡았고, 정원에는 화려한 등불이 걸리며 설 분위기가 한층 더 짙어졌다.하연이 계단을 내려오자, 기다렸다는 듯 최하성이 환한 얼굴로 다가왔다. “하연아, 새해 복 많이 받아라.” 그러면서 두툼한 세뱃돈 봉투를 그녀에게 내밀었다. 하연은 두 눈을 반짝이며 얼른 봉투를 받았다. “와! 이렇게 두꺼워요? 하성 오빠 최고!” 그때, 계단 위에서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도 있다.” 최하경이었다. 그 역시 두툼한 세뱃돈 봉투를 들고 내려왔다. “작년, 재작년 다 해외에 있어서 못 챙겨줬잖아. 그래서 올해 한꺼번에 더 두둑이 넣었다.” “와! 이건 더 두껍잖아요! 이러다 손목 나가겠어요!” 하연은 연달아 두 개의 두툼한 봉투를 받아 들고, 각각 한쪽 팔을 오빠들에게 걸었다. “오빠들 있어서 진짜 좋아요!” 최하성, 최하경 둘 다 서로를 바라보며 우애가 넘치는 미소를 지었다. 그때, 문이 열렸다. 그리고 최하민과 예아름이 나란히 들어왔다. 추운 바깥 공기를 뚫고 들어오자마자, 하민은 아름의 목에서 목도리를 부드럽게 풀어주었다. 그는 안쪽에서 떠들썩하게 웃고 있는 세 남매를 보고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우리 집이 이렇게 활기찬 게 얼마 만이에요!” 아름도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 “그러게요. 앞으로 더 행복한 일만 가득할 거예요.” 하민은 아내의 허리를 가볍
그리곤 진심을 담은 남자의 목소리가 멈추었다. 하지만 하연의 눈가에는 이미 촉촉한 눈물이 맺혀 있었다. 지금까지의 모든 글귀, 한 글자 한 글자마다 상혁이 진심을 담아 전한 마음이 느껴졌다. 이건 단순한 고백이 아니라, 상혁이 하연에게 건네는 가장 솔직하고 깊은 속마음이었다. 그때, 뒤에서 들려온 부드러운 목소리. “하연아.” 하연은 본능적으로 뒤돌아섰다. 그리고 그곳에 서 있는 사람을 보고 숨이 멎었다. 아까까지의 편안한 차림은 온데간데없이, 눈앞의 상혁은 새하얀 수트를 차려입고 있었다. 반듯하게 맨 보타이, 정갈하게 빗어 넘긴 머리, 그리고 손에 들린 한 다발의 꽃. ‘동화 속에서 막 나온 왕자님 같아.’ 하연은 멍하니 서서 남자를 바라보았다. 상혁이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올 때마다, 하연의 가슴이 터질 듯이 뛰었다. 남자의 시선, 남자의 걸음, 그가 다가오는 순간의 모든 것이 하연의 가슴속 깊이 새겨졌다. 마침내, 상혁은 하연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두 사람은 마주 섰고, 서로의 눈동자에 상대방의 모습이 담겼다. 말을 하지 않아도, 서로의 떨림이 전해지는 듯했다. 조용한 정적이 흘렀다. 그러다 상혁이 조심스레 손을 내밀어 꽃을 건넸다. 남자의 목소리는 살짝 떨리고 있었다. “하연아...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몰라.” 말이 끝나자, 그는 왼발을 살짝 앞으로 내디디더니 천천히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작은 벨벳 상자를 꺼냈다. 이어서 뚜껑을 열자, 반짝이는 다이아몬드 반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상혁의 눈빛에는 단 하나의 감정만이 가득 차 있었다. 바로 사랑이었다. “한때 나는 사랑이란 영화 속 이야기일 뿐이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널 만나고, 그게 아니란 걸 알았어.” “사랑은 영화 속 한 장면이 아니라, 매일같이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서로를 아껴주고, 이해하고, 감싸주는 거라는 걸.” “그래서 나는... 너와 함께, 그런 사랑을 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