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혁은 한동안 대답하지 않았고, 하연은 황연지를 바라보았다. 상혁의 가장 유능한 비서인 연지는 틀림없이 알고 있을 것이었다. 상혁은 그 주택 건물로 가기 직전에 회의를 마친 상황이었고, 바쁜 하루를 보낸 탓에 낯빛이 좋지 않았으며, 피로가 여실히 드러났다. 연지가 막 대답하려고 할 때, 상혁이 끼어들었다.“사업에 관한 문제로 불공정 경쟁에 연루됐어. HT그룹의 윗선이 무너지면, 한서준은 책임을 피할 수 없을 거야.” 하연은 알게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때 앞으로 나아간 조진숙이 하연을 끌고 위층으로 올라갔다.“뜨거운 물을 받아뒀으니까 우선 목욕부터 하고 긴장 좀 풀어. 온몸이 먼지투성이잖니.” “저를 위해서 목욕물을 준비하셨다고요?”놀라서 소리친 하연은 그제야 자신의 몸이 더럽다는 것을 깨달았다. 조진숙은 그녀를 밀고 욕실에 들어가 외투를 벗겨주었다.“키워준 엄마도 엄마인 법이야. 엄마가 딸의 목욕물을 받아주는 게 뭐 어때서 그래?” 이 말에 긴장이 풀린 하연은 그제야 주머니 안에 있는 손이현의 만년필을 발견했다. 그 만년필에는 지방검찰청의 로고가 그려져 있었다. ‘2층에서 뛰어내렸을 때 닥치는 대로 주워 온 거구나.’ “이게...”조진숙은 내색하지 않고 여전히 웃으며 말했다.“대체 언제쯤이면 호칭을 바꿀 생각이야? 나는 진숙 이모나 어머니가 아닌 그냥 엄마라고 불러주는 날을 기다리고 있어.”의도를 알아차린 하연의 얼굴이 절로 붉어졌다.“놀리지 마세요.” 그 모습을 본 조진숙은 좋아서 절로 웃음이 지어졌다. “그 사람들이 네가 예의 바른 아이라고 하면서 부씨 가문에 시집가는 건 시간문제일 거라고 했대.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고 하더구나.” 과분한 평가를 받은 하연은 몸의 절반을 욕조에 담그고 한쪽으로 기대며 말했다.“정말 그렇게 말씀하셨대요?” 하연의 얼굴에는 기대감이 서려 있었고, 조진숙의 미소에는 약간의 아쉬움이 섞여 있었다. “하지만... 난 네가 너무 빨리 부씨 가문에 들어가는 건 원치 않아.
연지는 놀랐다.“한서준은 믿는 구석이 있어서 두렵지 않을 거야. 심지어 조사받는 것조차도.” 상혁은 그가 하연을 방패막이로 삼으려 할 가능성이 아주 크다고 생각했다.“HT그룹의 문제는 이것뿐만이 아니야. 하지만 한명창이 어떻게 조사했는지에 달려 있겠지.”목욕은 확실히 긴장을 푸는 데 도움이 됐고, 하연은 몽롱하여 졸리기까지 했다. 바로 이때, 그녀의 뒤로 다가온 누군가가 관자놀이를 마사지해 주었는데, 힘 조절이 아주 부드러웠다. 그녀는 조진숙이 아직 가지 않은 줄 알았다.“이모, 이러실 필요 없어요.” 머리 위에서 낮은 웃음이 들려왔다. 그것은 분명 남자의 숨결이었다. 하연은 즉시 몸을 돌려 남자의 커다란 손을 뿌리쳤다.“누구세요?!” 상혁의 눈동자에 웃음기가 스쳤다.“집에서도 이렇게 경계하다니, 안전의식이 뛰어난데?” ‘상혁 오빠잖아!’ 하연이 한숨을 내쉬며 제자리에 앉았다.“어떻게 인기척도 안 낼 수 있어요?” 그녀는 상혁을 등진 채 당황스러움을 숨겼다. 아마 부남준과 함께 있을 때 불안에 떨었기 때문에 유난히 경계하게 된 듯했다. 상혁은 계속해서 그녀의 관자놀이를 마사지하며 부드럽게 말했다.“왕진과 왕진의 딸은 같은 곳에 있을 거야. 아무래도 한씨 집안이 꾸민 일일 확률이 높지. 이것만큼은 확실하니까 너무 걱정할 필요 없어. 돌파구는 분명히 있을 거야.” 상혁은 하연을 위로하고 있었다.“하지만 양 형사님이 왕진의 보석금을 낸 사람이 한씨 가문의 사람이 아니라고 하셨어요.” 양한빈의 그 짧은 침묵을 떠올린 상혁이 입술을 오므렸다. 그의 마음속에는 대략 속셈이 있었다. “목욕하면서도 그렇게 생각이 많은 거야? 많이 걱정하면 빨리 늙는 법인데.”그가 그녀를 위협했다. 아니나 다를까, 하연이 얼굴을 치켜세웠다.“나를 싫어하는 거죠?” “아니.”“나를 싫어하는 게 분명해요. 부상혁 씨, 주름이 생긴 나는 보기 싫다는 거예요?”하연은 지체 없이 거울을 찾아 꼼꼼히 살펴보았다. 그녀의 피부는 여전히 촉촉하고 새하야며
설 이후, 혼란스러운 B시에서는 정부 관계자나 사업가의 판도가 완전히 바뀌었다. 사모님들 모임에서도 많은 얼굴이 바뀌었는데, 함께 모여 카드놀이를 하거나 오후 차를 마시는 사람들도 모두 낯선 얼굴이 되었다. 오늘은 이수애가 B시로 돌아온 후, 안주인으로서 다른 명문가 사모님을 초대한 첫 연회였다. 그녀는 한씨 고택의 정원에 연회를 마련하여 많은 사모님이 참석하게 했다. “아이고, 저는 서준이가 속 깊은 아이라는 걸 진작 알았어요. 사모님을 돌아오게 할 거라는 것도요. 이것 좀 보세요. 특별히 사모님을 위해 남겨둔 원단도 있잖아요. 이걸로 드레스를 만들면 딱이겠어요!” 말하는 사람은 B시에서 가장 큰 직물 기업의 사모님인데, 그녀가 말하는 원단은 금실로 수놓아져 있어서 가치가 매우 높았다. 이수애가 그 원단에서 손을 떼지 못할 정도로 좋아하며 말했다.“사람만 오면 되지, 무슨 선물까지 가져오셨어요?” “나갔다 오니까 얼굴이 더 좋아지셨네요. 서준이가 효도하고, 따님도 아름다워서 그런 건가요? 참, 어제 뉴스를 보니까 따님이랑 최하성 씨가 같이 찍힌 사진이 있더라고요. 두 사람, 정말이에요?” 사람들이 수군거리며 자신도 봤다고 말했다.“최하성이요? 그 사람은 국제적인 스타잖아요. 그 남자의 숨겨진 여자 친구가 한서영 씨라는 거예요?” 두 사람이 같은 프레임에 있는 사진은 한서영이 예능 프로그램을 녹화하던 날 찍힌 것으로, 악의적인 언론이 두 사람의 사진을 합성하여 큰 화제를 일으킨 것이었다. 하성의 인기는 만만치 않았다. 예전 같았으면 이런 인기에 힘입어 주목받았을 테지만, 지금은 하성과 하연이 가족이라는 것을 알게 된 후였다. 이수애가 이를 갈며 말했다.“그런 말씀들 마세요. 우리 서영이가 그런 광대를 눈여겨볼 리 없잖아요.” 사람들이 분분히 서로를 바라보았다.‘한서영도 영화계에 발을 들이지 않았던가? 두 사람 모두 광대잖아...?’ 바로 이때, 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제가 보기에 서영 씨는 타고난 미인이라 최하성 씨와 잘 어울리는 것
“그렇지만 뭐?”“이 방면의 고수인 하경 도련님에게 도움을 청한다면...”태훈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하연이 끼어들었다.“안 돼.” “하경 오빠는 일정한 선을 넘을 수 없어. 물론 나도 오빠한테 폐를 끼치고 싶지 않고.” 여기까지 말한 하연은 조금 안타까워했다.‘내가 해커를 찾지 못해서 그래. 해커를 찾았더라면, 지금쯤 도움을 받을 수 있었을 텐데...’ “다른 방법을 생각해 봐. 그리고 한씨 가문도 주시해 줘.” 태훈이 사무실을 나섰다. 하연은 곧장 여은에게 연락하여 한서영의 루머를 띄워 달라고 부탁했다. 그녀의 의도를 알아챈 것일까. 수화기 너머에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가흔이한테도 말해봤어?] “너한테 연락했으니까 당연히 얘기했지. 딱히 신경 쓰지는 않던데 약간 흥분하더라고.” 여은이 웃으며 말했다.[흥분? 자기 남자 친구가 다른 여자와 스캔들에 휘말렸는데 고작 흥분?]하연도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가흔을 이해하는 사람으로서 원인을 추측하려 했다.“아마 남자 친구가 너무 주목받아서 현실 생활에 어려움을 겪었던 것 같아. 그래서 모든 관심이 한서영에게 향하는 거라면, 기꺼이 그렇게 되도록 둔 거지.” “하성 오빠도 가흔이가 오빠를 쫓아다니는 다른 여자들에게는 전혀 관심 없다는 걸 알고 있을까?” 하성이 알고 있는지 아닌지는 하연도 확신할 수 없었다. 하지만 막연하게 좋지 않을 거라는 예감이 들 뿐이었다. ‘이런 상황이 지속되다 보면, 두 사람의 감정에 금이 갈지도 몰라.’ 어쨌든 하성은 이 부분에 대해 아주 집착하는 경향이 있어서 가흔이 확고한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면 폭발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연이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최대한 빨리 일을 마무리해야겠어.” 한서영이 처음 참여한 작품은 대형 제작인데, 그녀는 조연을 맡았다. 게다가 이방규가 그녀의 뒤를 든든하게 받치는 탓에 감독도 함부로 하지 못했다. 하지만 같은 작품에 참여한 여주인공은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상대는 유명한 여배우 출신이며, 권위 있는 상을 여러
사실 소울 칵테일은 외진 곳이 아닌 도심에 있었다. 그럼에도 이방규의 비서가 이렇게 보고한 이유는 손님이 정말 적어서, 때로는 하루 종일 다섯명도 드나들지 않기 때문이었다. 개업 당시의 활기도, 인기 있는 사람의 마케팅도 없어서 모든 것이 일상으로 돌아갔다. 심지어 도심 한가운데에서 고립된 것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소울 칵테일의 서쪽에는 멀지 않은 인공호수가 있었는데, 곧 해가 질 무렵이어서 석양이 모든 것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방금 손님을 만난 상혁이 창가에 서자, 강성훈이 들어와 찻잔을 정리하며 물었다.“부 대표님, 차를 좀 더 드릴까요?” 고개를 돌린 상혁이 그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성이 뭡니까?” “강 씨입니다. 편하게 성훈이라고 불러주세요.”성훈은 단정한 얼굴의 소유자였으나, 눈빛이 매우 예리했다. “차와 관련된 일을 하는 사람 같지는 않은데... 마음을 가라앉히고 집중하는 건 잘하시나 봅니다.” 고개를 숙인 성훈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부 대표님, 아닙니다. 저는 학벌도 좋지 않고, 큰 뜻도 없어요. 부 대표님 같은 분들이 하시는 일은 저 같은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리고 이 차나 찻잎은 단순하고 깔끔하지만, 사람은 복잡하고 예측하기 힘든 법이죠.” 상혁은 입을 다물고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부 대표님은 제 예상을 완전히 벗어나셨어요.” “뭐라고요?”“언제나 당당하신 부 대표님께서 인상만으로 사람을 판단하신 건, 조금 성급하셨던 것 같네요.성훈이 한 마디 더 덧붙였다.상혁은 한쪽의 노트북을 느릿느릿 닫고 창문 앞에 반쯤 기대었다.“저는 문제 될 게 없다고 생각합니다. 일반적인 직원이라면 제가 여기서 일하는 모습을 궁금해하고, 주시하기 마련이에요. 하지만 그쪽은 단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죠. 아주 침착한 게... 평범한 사람과는 달라요.” 성훈은 다기를 꽉 쥐었지만, 어떠한 기색을 드러내지는 않았다.“부 대표님, 칭찬이 과하십니다. 그런 과한 평가는 조금 부담스럽네요.” 이때, 문밖에서 어떤
병원 로비의 대형 스크린에는 이번 항공기 사고가 실시간으로 보도되고 있었다. 최하연은 세 명뿐인 생존자 중의 하나로 두 다리에 붕대를 감은 채 중환자실 병상 위에 누워 있었다.그때, 손에 들린 핸드폰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고객님께서 전화를 받을 수 없습니다. 다음에 다시 걸어주세요.”사고가 나던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남편 한서준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설마 그가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한 여객기 사고를 모를 일은 없었다. 사고 당시, 현장에는 승객들의 시신이 여기저기 아무렇게나 널려 있었다. 그녀는 사고의 충격과 죽음의 공포로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결혼한 지 3년이나 되었지만 남편은 그녀가 가장 필요로 하는 순간 연락이 되지 않았다.하연은 마음 한 켠이 시려 오는 것을 느꼈다.그때, 휴대폰 벨 소리가 들려왔다. 한참이나 멍하게 있던 그녀는 정신을 차리고 발신자를 확인했다. 할머니였다. 하연의 얼굴이 어두워졌다.“여보세요.”그녀가 잔뜩 쉰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전화 건너편에서 친절하면서도 연로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우리 하연이, 이 할미가 너 때문에 너무 놀라서 제 명에 못 죽겠구나. 어디 다친 데는 없고? 서준이가 옆에 같이 있지?]강영숙은 서준의 친할머니로 한씨 집안 사람들 중 유일하게 하연에게 관심을 갖는 분이었다. “서준 씨는...”머뭇거리는 그녀의 말에 강영숙이 무언가를 눈치 챈 듯했다. [이런 정신 나간 놈을 봤나! 비서로 또 아내로, 해외 출장간 남편 일을 다 봐주고 있는데 이렇게 큰 사고가 터졌는데도 코빼기도 안보여? 기다려봐라! 이 할미가 정신나간 그 녀석을 가만 두나!]그녀가 다시 물었다.[지금 어느 병원에 있어? 집사를 보낼 테니 기다리렴!]하연이 병원 주소를 알려주자 강영숙은 전화를 끊었다.그녀는 고개를 푹 숙인
하연은 두 달 전, 1주일 정도 출장 일정이 잡혀 있던 한서준의 일정보고서가 생각났다.핸드폰을 쥐고 있는 그녀의 손이 떨려왔다.‘그 때 생긴 아이인 거야?’그녀는 한서준의 숨겨진 아내로 오래 전부터 비밀계약을 맺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껏 남편의 스캔들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한서준 사장이 여자친구에게 참 각별한 것 같아... 저 여자는 전생에 나라를 구했나 봐. 보아하니 곧 공식발표가 날 것 같은데?”“그러게. 나도 아까 검색해 봤어. 네 생각엔 저 사람이 여자친구가 맞는 것 같아?”카트를 밀고 가던 젊은 간호사가 옆에 있는 간호사에게 핸드폰 속 사진을 보여주었다. 그러자 그녀가 깜짝 놀라며 말했다.“맞아, 맞아! 이 여자야! ST그룹 둘째 딸! 한서준이랑 너무 잘 어울리지 않아? 하늘이 맺어준 커플 같아!”두 사람은 호들갑을 떨며 반대편으로 걸어갔다.‘ST 그룹이라...’퇴원 수속을 마친 하연은 집사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가면서도 마음이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반쯤 열린 창문 아래 핸드폰 화면의 불빛이 창백한 하연의 얼굴을 비췄다. 수 없이 검색해 봤지만 한서준과 ST 그룹과의 연관성은 전혀 찾을 수 없었다.‘B시의 잘 나가는 두 명문가 집안이 이런 식으로 엮이다니 이상해.’서준의 본가에 도착하니 거실에 불이 켜져 있었다. 눈엣가시 같은 시누이 대신 서준의 할머니인 강영숙 여사가 지팡이에 몸을 의지한 채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우리 하연이 왔구나! 네가 복이 많아서 그 큰 사고 중에도 무사했구나. 너무 놀라서 하마터면 숨이 넘어갈 뻔했지 뭐냐.”“할머니, 전 괜찮아요.”하연은 올라가 쉬고 싶은 마음이 컸지만 웃으며 말했다.“할머니, 사실 저 좀 피곤해요.”“그래, 그래. 얼른 올라가서 쉬어라. 서준이한테 연락해 놨으니까 곧 올 거다.” 하연은 몸을 숙이는 순간 심한 통증이 몰려와 얼굴이 일그러졌다.강영숙은 하연이 괴로워하는 모습의 이유가 서준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하연의 머릿속에 서준의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당신이랑 그 여자, 대체 언제부터 만난 거야?”하연이 겨우 몸을 추스르며 침대에 기대앉았다.서준은 그녀가 3년전 혼인신고를 할 때보다 훨씬 말랐다는 것을 알아챘다. 어찌나 야위었던지 바람이 불면 날아가버릴 것 같았다.“당신 내 뒷조사를 한 거야?”그의 안색이 변했다. “내가 그렇게 한가한 사람으로 보여요? 내가 입원했던 병원에서 내 두 눈으로 당신들 두 사람을 봤어요.”그녀의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지만 그 어느때보다 딱 부러지는 말투였다.순간, 하연은 심장이 찢기는 듯한 괴로움을 느꼈다.하지만 서준의 얼굴에는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했다.그는 하연이 사고가 난 것을 알면서도 걱정해하는 말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가 하는 말들을 들으며 혐오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부부로 살았던 3년이라는 시간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아.’ 며느리로서 일을 열심히 했지만 하는 일 마다 트집잡는 시어머니와 자신을 눈엣가시처럼 여기는 시누이에게 하연은 정성을 다했다. 집에서는 주부로 또 회사에서는 헌신적인 비서 역할을 도맡았다. 그녀는 서준의 할머니 강영숙 여사의 뜻에 따라 아들, 딸 잘 낳는 좋은 손자며느리가 되려고 노력했다.3년 동안 그만큼 했으면 강영숙 여사에게 가족으로서의 의리는 충분히 지킨 것이다. 하지만 그 결과는 어떠한가?3년간 하연은 서준의 몸에 손가락 하나도 댈 수가 없었다. 한 방을 쓰고 있었지만 침대는 따로 썼기 때문이었다. 하연은 밀려오는 통증을 참으며 차가운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그러다 무슨 용기가 났는지 소리를 내어 가볍게 웃었다.“당신 어머니는 내가 애도 못 낳으면서 결혼한 양심도 없는 여자라고 했죠. 그런데 지금 당신이 밖에서 다른 여자와 아이를 가진 걸 내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죠?”간신히 침대에 기대고 있는 그녀는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하지만 고개를 꼿꼿하게 쳐들고는 그의 옷깃을 잡았다.하지만 곧바로 굵은 그의 손에 잡히고 말았다.한서준은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혜경이는 내 세컨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