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을 헐떡이며 달린 하연은 큰길에 다다라서야 멈추었다. 이현이 숨을 고르고 물었다.“귀신이라도 쫓아와요?”“귀신보다 더 무서운 거였어요.”길가의 나무에 기댄 하연은 마음속으로 하염없이 부남준을 욕했다.“참, 손 선생님은 왜 여기 계세요?” 이현이 태연한 얼굴로 서류봉투를 흔들었다.“소울 칵테일의 수속을 다 처리하지 못했거든요.” “장사는 잘돼요?” “그럼요.”하연이 불만스럽게 말했다.“왜 거짓말하세요?” “뭐라고요?”이현은 약간의 긴장을 드러내며 그녀의 질문에 매우 신경 썼다. “설에 소울 칵테일 앞을 지나쳤는데, 손님이 한 명도 없더라고요. 장사가 잘 안되는 거잖아요.” 두 사람은 한동안 만나지 못했는데, 갑자기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하자 하니, 하연은 조금 쑥스러웠다. 이 말을 들은 이현이 저항 없이 웃음을 터뜨렸다.“소울 칵테일 앞을 지나쳤는데, 왜 들어오지는 않은 거예요? 그리고 소울 칵테일은 최 사장님의 홍보 덕분에 여전히 많은 손님을 끌어들이고 있어요.” 그의 농담을 들은 하연은 마음이 조금 놓였다.“한 번 놓친 기회는 다시 오지 않는 법이에요. 손 선생님은 이 기회를 제대로 잡아야 한다고요.” ‘기회를 잡지 못했다는 거구나.’이현은 은근히 동의했다. ‘그래, 기회를 잡지 못한 부분도 분명히 있어.’ 그가 우울해하는 모습을 본 하연이 속상해서 서둘러 말했다.“저도 자주 갈게요.” 미소를 짓던 이현은 손을 뻗어 그녀 얼굴의 먼지를 닦아주었다.“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한 검사장님 비서의 사무실에서 뛰어내린 거예요?” 하연이 난감해하며 말했다.“손 선생님이 그걸 어떻게...” “자주 수속하러 오다 보니까 이곳에 대해 잘 알게 됐어요.” 하연이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손 선생님은 비즈니스에 종사하지 않으니까 경계할 필요가 없겠어.’“손 선생님은 소울 칵테일을 운영하면서 만나는 사람이 많잖아요. 그럼 사채의 장단점에 관해서도 잘 아세요?” 이현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겉으로는 합법적인 일
“안씨 가문 도련님이랑 약속이 있었는데, 안씨 가문 도련님은 오늘 아침에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댁으로 돌아갔다고 하더라고요. 두 사람이 같이 술을 마셨으니, 여기에 있지는 않을 거예요.하연이 상혁의 손을 꼭 잡고 말했다.“만약 부하들을 시킨 거라면요?” 상혁은 그녀의 손바닥을 살짝 쥐며 달래듯이 말했다.“CCTV를 확인해서 확실한 증거를 찾아야겠어.” 하지만 이것도 시간이 필요한 일이었기에 하연은 애가 탔다. 무언가 떠오른 그녀가 갑자기 양한빈에게 전화를 걸었다.“양 형사님, 왕진은 내일 석방되나요?” [절차에 따라 진행될 겁니다.] [이미 한동안 구금되어 있었지만, 형을 선고받을 정도는 아니었으니까요.] 하연이 막 입을 열려고 하자 양한빈이 말했다.[아마 오늘 밤 보석으로 풀려날 겁니다.] “뭐라고요?”[보석금을 냈으니, 몇 시간 정도의 차이는 신경 쓰지 않을 예정이죠.] 하연의 두 눈이 어두워졌다.“누가 보석금을 냈다는 거예요?” [그건 알려드릴 수 없습니다.]“한씨 성을 가진 사람인가요?” 양한빈은 2초 동안 침묵했다.[아니에요.] 하연은 곧바로 전화를 끊고 상혁을 바라보았다.“왕진한테 어떤 친척이나 친구가 있는지 알 수 있을까요?” 전화 내용을 들은 그가 그녀에게 진정하라는 신호를 보냈다.“왕진의 딸이 사라진 시점에서 왕진이 보석으로 풀려난 건 미리 계획된 일이었을 거야. 당장은 알아낼 수 없을 테니까 조금만 진정해 봐.” 하연은 깊은숨을 들이마셨는데, 너무 많은 일이 한꺼번에 몰려와서 너무 조급한 듯했다. 상혁은 황연지에게 업무를 지시한 후, 하연을 데리고 아크로리버파크로 돌아갔다. 아직 떠나지 않았던 조진숙은 하연이 혼비백산하는 모습을 보고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왜 그래? 안색이 왜 그렇게 안 좋은 거야?” 상혁은 외투를 벗어 고용인에게 건넨 후, 진정 효과가 있는 국 한 그릇을 준비하라고 지시했다. “난 괜찮아요.”하연이 소파에 반쯤 기대며 말했다.“너무 절묘한 상황이에요. 우리가 왕
상혁은 한동안 대답하지 않았고, 하연은 황연지를 바라보았다. 상혁의 가장 유능한 비서인 연지는 틀림없이 알고 있을 것이었다. 상혁은 그 주택 건물로 가기 직전에 회의를 마친 상황이었고, 바쁜 하루를 보낸 탓에 낯빛이 좋지 않았으며, 피로가 여실히 드러났다. 연지가 막 대답하려고 할 때, 상혁이 끼어들었다.“사업에 관한 문제로 불공정 경쟁에 연루됐어. HT그룹의 윗선이 무너지면, 한서준은 책임을 피할 수 없을 거야.” 하연은 알게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때 앞으로 나아간 조진숙이 하연을 끌고 위층으로 올라갔다.“뜨거운 물을 받아뒀으니까 우선 목욕부터 하고 긴장 좀 풀어. 온몸이 먼지투성이잖니.” “저를 위해서 목욕물을 준비하셨다고요?”놀라서 소리친 하연은 그제야 자신의 몸이 더럽다는 것을 깨달았다. 조진숙은 그녀를 밀고 욕실에 들어가 외투를 벗겨주었다.“키워준 엄마도 엄마인 법이야. 엄마가 딸의 목욕물을 받아주는 게 뭐 어때서 그래?” 이 말에 긴장이 풀린 하연은 그제야 주머니 안에 있는 손이현의 만년필을 발견했다. 그 만년필에는 지방검찰청의 로고가 그려져 있었다. ‘2층에서 뛰어내렸을 때 닥치는 대로 주워 온 거구나.’ “이게...”조진숙은 내색하지 않고 여전히 웃으며 말했다.“대체 언제쯤이면 호칭을 바꿀 생각이야? 나는 진숙 이모나 어머니가 아닌 그냥 엄마라고 불러주는 날을 기다리고 있어.”의도를 알아차린 하연의 얼굴이 절로 붉어졌다.“놀리지 마세요.” 그 모습을 본 조진숙은 좋아서 절로 웃음이 지어졌다. “그 사람들이 네가 예의 바른 아이라고 하면서 부씨 가문에 시집가는 건 시간문제일 거라고 했대.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고 하더구나.” 과분한 평가를 받은 하연은 몸의 절반을 욕조에 담그고 한쪽으로 기대며 말했다.“정말 그렇게 말씀하셨대요?” 하연의 얼굴에는 기대감이 서려 있었고, 조진숙의 미소에는 약간의 아쉬움이 섞여 있었다. “하지만... 난 네가 너무 빨리 부씨 가문에 들어가는 건 원치 않아.
연지는 놀랐다.“한서준은 믿는 구석이 있어서 두렵지 않을 거야. 심지어 조사받는 것조차도.” 상혁은 그가 하연을 방패막이로 삼으려 할 가능성이 아주 크다고 생각했다.“HT그룹의 문제는 이것뿐만이 아니야. 하지만 한명창이 어떻게 조사했는지에 달려 있겠지.”목욕은 확실히 긴장을 푸는 데 도움이 됐고, 하연은 몽롱하여 졸리기까지 했다. 바로 이때, 그녀의 뒤로 다가온 누군가가 관자놀이를 마사지해 주었는데, 힘 조절이 아주 부드러웠다. 그녀는 조진숙이 아직 가지 않은 줄 알았다.“이모, 이러실 필요 없어요.” 머리 위에서 낮은 웃음이 들려왔다. 그것은 분명 남자의 숨결이었다. 하연은 즉시 몸을 돌려 남자의 커다란 손을 뿌리쳤다.“누구세요?!” 상혁의 눈동자에 웃음기가 스쳤다.“집에서도 이렇게 경계하다니, 안전의식이 뛰어난데?” ‘상혁 오빠잖아!’ 하연이 한숨을 내쉬며 제자리에 앉았다.“어떻게 인기척도 안 낼 수 있어요?” 그녀는 상혁을 등진 채 당황스러움을 숨겼다. 아마 부남준과 함께 있을 때 불안에 떨었기 때문에 유난히 경계하게 된 듯했다. 상혁은 계속해서 그녀의 관자놀이를 마사지하며 부드럽게 말했다.“왕진과 왕진의 딸은 같은 곳에 있을 거야. 아무래도 한씨 집안이 꾸민 일일 확률이 높지. 이것만큼은 확실하니까 너무 걱정할 필요 없어. 돌파구는 분명히 있을 거야.” 상혁은 하연을 위로하고 있었다.“하지만 양 형사님이 왕진의 보석금을 낸 사람이 한씨 가문의 사람이 아니라고 하셨어요.” 양한빈의 그 짧은 침묵을 떠올린 상혁이 입술을 오므렸다. 그의 마음속에는 대략 속셈이 있었다. “목욕하면서도 그렇게 생각이 많은 거야? 많이 걱정하면 빨리 늙는 법인데.”그가 그녀를 위협했다. 아니나 다를까, 하연이 얼굴을 치켜세웠다.“나를 싫어하는 거죠?” “아니.”“나를 싫어하는 게 분명해요. 부상혁 씨, 주름이 생긴 나는 보기 싫다는 거예요?”하연은 지체 없이 거울을 찾아 꼼꼼히 살펴보았다. 그녀의 피부는 여전히 촉촉하고 새하야며
설 이후, 혼란스러운 B시에서는 정부 관계자나 사업가의 판도가 완전히 바뀌었다. 사모님들 모임에서도 많은 얼굴이 바뀌었는데, 함께 모여 카드놀이를 하거나 오후 차를 마시는 사람들도 모두 낯선 얼굴이 되었다. 오늘은 이수애가 B시로 돌아온 후, 안주인으로서 다른 명문가 사모님을 초대한 첫 연회였다. 그녀는 한씨 고택의 정원에 연회를 마련하여 많은 사모님이 참석하게 했다. “아이고, 저는 서준이가 속 깊은 아이라는 걸 진작 알았어요. 사모님을 돌아오게 할 거라는 것도요. 이것 좀 보세요. 특별히 사모님을 위해 남겨둔 원단도 있잖아요. 이걸로 드레스를 만들면 딱이겠어요!” 말하는 사람은 B시에서 가장 큰 직물 기업의 사모님인데, 그녀가 말하는 원단은 금실로 수놓아져 있어서 가치가 매우 높았다. 이수애가 그 원단에서 손을 떼지 못할 정도로 좋아하며 말했다.“사람만 오면 되지, 무슨 선물까지 가져오셨어요?” “나갔다 오니까 얼굴이 더 좋아지셨네요. 서준이가 효도하고, 따님도 아름다워서 그런 건가요? 참, 어제 뉴스를 보니까 따님이랑 최하성 씨가 같이 찍힌 사진이 있더라고요. 두 사람, 정말이에요?” 사람들이 수군거리며 자신도 봤다고 말했다.“최하성이요? 그 사람은 국제적인 스타잖아요. 그 남자의 숨겨진 여자 친구가 한서영 씨라는 거예요?” 두 사람이 같은 프레임에 있는 사진은 한서영이 예능 프로그램을 녹화하던 날 찍힌 것으로, 악의적인 언론이 두 사람의 사진을 합성하여 큰 화제를 일으킨 것이었다. 하성의 인기는 만만치 않았다. 예전 같았으면 이런 인기에 힘입어 주목받았을 테지만, 지금은 하성과 하연이 가족이라는 것을 알게 된 후였다. 이수애가 이를 갈며 말했다.“그런 말씀들 마세요. 우리 서영이가 그런 광대를 눈여겨볼 리 없잖아요.” 사람들이 분분히 서로를 바라보았다.‘한서영도 영화계에 발을 들이지 않았던가? 두 사람 모두 광대잖아...?’ 바로 이때, 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제가 보기에 서영 씨는 타고난 미인이라 최하성 씨와 잘 어울리는 것
“그렇지만 뭐?”“이 방면의 고수인 하경 도련님에게 도움을 청한다면...”태훈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하연이 끼어들었다.“안 돼.” “하경 오빠는 일정한 선을 넘을 수 없어. 물론 나도 오빠한테 폐를 끼치고 싶지 않고.” 여기까지 말한 하연은 조금 안타까워했다.‘내가 해커를 찾지 못해서 그래. 해커를 찾았더라면, 지금쯤 도움을 받을 수 있었을 텐데...’ “다른 방법을 생각해 봐. 그리고 한씨 가문도 주시해 줘.” 태훈이 사무실을 나섰다. 하연은 곧장 여은에게 연락하여 한서영의 루머를 띄워 달라고 부탁했다. 그녀의 의도를 알아챈 것일까. 수화기 너머에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가흔이한테도 말해봤어?] “너한테 연락했으니까 당연히 얘기했지. 딱히 신경 쓰지는 않던데 약간 흥분하더라고.” 여은이 웃으며 말했다.[흥분? 자기 남자 친구가 다른 여자와 스캔들에 휘말렸는데 고작 흥분?]하연도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가흔을 이해하는 사람으로서 원인을 추측하려 했다.“아마 남자 친구가 너무 주목받아서 현실 생활에 어려움을 겪었던 것 같아. 그래서 모든 관심이 한서영에게 향하는 거라면, 기꺼이 그렇게 되도록 둔 거지.” “하성 오빠도 가흔이가 오빠를 쫓아다니는 다른 여자들에게는 전혀 관심 없다는 걸 알고 있을까?” 하성이 알고 있는지 아닌지는 하연도 확신할 수 없었다. 하지만 막연하게 좋지 않을 거라는 예감이 들 뿐이었다. ‘이런 상황이 지속되다 보면, 두 사람의 감정에 금이 갈지도 몰라.’ 어쨌든 하성은 이 부분에 대해 아주 집착하는 경향이 있어서 가흔이 확고한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면 폭발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연이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최대한 빨리 일을 마무리해야겠어.” 한서영이 처음 참여한 작품은 대형 제작인데, 그녀는 조연을 맡았다. 게다가 이방규가 그녀의 뒤를 든든하게 받치는 탓에 감독도 함부로 하지 못했다. 하지만 같은 작품에 참여한 여주인공은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상대는 유명한 여배우 출신이며, 권위 있는 상을 여러
사실 소울 칵테일은 외진 곳이 아닌 도심에 있었다. 그럼에도 이방규의 비서가 이렇게 보고한 이유는 손님이 정말 적어서, 때로는 하루 종일 다섯명도 드나들지 않기 때문이었다. 개업 당시의 활기도, 인기 있는 사람의 마케팅도 없어서 모든 것이 일상으로 돌아갔다. 심지어 도심 한가운데에서 고립된 것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소울 칵테일의 서쪽에는 멀지 않은 인공호수가 있었는데, 곧 해가 질 무렵이어서 석양이 모든 것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방금 손님을 만난 상혁이 창가에 서자, 강성훈이 들어와 찻잔을 정리하며 물었다.“부 대표님, 차를 좀 더 드릴까요?” 고개를 돌린 상혁이 그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성이 뭡니까?” “강 씨입니다. 편하게 성훈이라고 불러주세요.”성훈은 단정한 얼굴의 소유자였으나, 눈빛이 매우 예리했다. “차와 관련된 일을 하는 사람 같지는 않은데... 마음을 가라앉히고 집중하는 건 잘하시나 봅니다.” 고개를 숙인 성훈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부 대표님, 아닙니다. 저는 학벌도 좋지 않고, 큰 뜻도 없어요. 부 대표님 같은 분들이 하시는 일은 저 같은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리고 이 차나 찻잎은 단순하고 깔끔하지만, 사람은 복잡하고 예측하기 힘든 법이죠.” 상혁은 입을 다물고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부 대표님은 제 예상을 완전히 벗어나셨어요.” “뭐라고요?”“언제나 당당하신 부 대표님께서 인상만으로 사람을 판단하신 건, 조금 성급하셨던 것 같네요.성훈이 한 마디 더 덧붙였다.상혁은 한쪽의 노트북을 느릿느릿 닫고 창문 앞에 반쯤 기대었다.“저는 문제 될 게 없다고 생각합니다. 일반적인 직원이라면 제가 여기서 일하는 모습을 궁금해하고, 주시하기 마련이에요. 하지만 그쪽은 단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죠. 아주 침착한 게... 평범한 사람과는 달라요.” 성훈은 다기를 꽉 쥐었지만, 어떠한 기색을 드러내지는 않았다.“부 대표님, 칭찬이 과하십니다. 그런 과한 평가는 조금 부담스럽네요.” 이때, 문밖에서 어떤
이현이 우물쭈물하며 말했다.“사실, 부 대표님의 일을 제게 보고할 필요는 없습니다.”상혁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물고기가 먹이를 먹는 것을 주시했다.“후에 HT그룹이 조사받기 시작하자, 이 사건이 발각될까 두려웠던 그 도시계획국장이 저에게 협력하자고 하더군요.” 이현이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설마... 그까짓 협력 따위로 십여 명이 넘는 사람의 목숨을 원래 없었던 것처럼 둔갑했다는 겁니까?” “HT그룹의 한서준 대표는 좋은 분이셨어요. 그 사람들이 여생을 보낼 수 있도록 충분한 배상금을 지불했거든요.” 이현은 꿈쩍도 하지 않고 콧방귀를 뀌었다.“그래요?” 상혁이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손 사장님은 참 정의로운 것 같네요. HT그룹과 같은 기업을 별로 좋아하지 않으니까요.” “저는 생명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기업이라면, 어떤 기업이라도 싫어합니다.”이현이 한마디 한마디 대답했다. “그럼 HT그룹이 무너지기를 바라겠네요?” 탐색적인 질문이라는 것을 알아차린 이현이 조금 긴장을 풀며 말했다.“그건 부 대표님께서 하실 일이지, 저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일입니다.” “그냥 해본 말이었어요.”이 말을 마친 상혁이 옆에 있는 외투를 챙겨 밖으로 나가려 했다. 이현의 곁을 지나려던 찰나, 멈춰선 그가 말했다.“내일 또 오겠습니다.” 어둡고 좁은 복도를 가로지르는 상혁의 그림자는 경쾌하고 가벼워서 안개처럼 떠 있는 듯했다. 황연지가 상혁의 뒤를 따랐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성훈이 빠른 걸음으로 위층으로 올라갔다.“아까 부 대표님이 뭐라고 하셨어요?” 룸으로 들어선 이현이 조금 전까지 상혁이 있던 위치로 걸어갔다.“HT그룹이 무너지길 원하냐고 물었어.” 성훈이 의외라는 듯 물었다.“설마, 진짜 신분을 알아낸 걸까요?” 이현은 상혁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단순한 탐색이 아닐 거라는 짙은 의심이 들었다.“이수애는 요즘 어때?” “예전처럼 먹고 마시고 놀면서 사모님 놀이나 하고 있어요. 한서준도 마음
아무 일 아니라는 듯이 서둘러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고 정신을 바짝 차리며 정다영이 억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엄마, 남준 씨가 아마 많이 바쁜가 봐요. 일 끝나면 꼭 세배하러 올 거예요.” 하지만 하미주는 딸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았다. 왜냐하면 자신은 눈이 멀지 않은 이상, 최근의 분위기를 못 느낄 리가 없었다. 그리고 요즘 들어 사람들의 태도가 어떻게 변하는지 똑똑히 보고 있었다.지금 자신마저 마음을 다잡지 못하고 조금이라도 힘이 빠진다면, 언제든 등을 돌릴 준비가 되어 있는 게 세상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애초에 하미주는 딸과 남준의 결혼 자체를 반대한 사람이었다. 하미주가 보기엔, 아무리 돈이 많고, 외형적으로 그럴듯해 보여도, 남준은 결국 ‘첩’의 자식이었다. 그런 가정에서 제대로 된 교육을 받고 자랐을 리가 없었다. 그런데도 다영은 기어코 남준을 붙잡겠다고 난리였다. 그것도 마치, 그 남자가 아니면 죽기라도 할 것처럼. 결국 정지철이 남준을 높게 평가하자, 하미주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인 거였다. 그래서 약혼까지는 허락했는데 예전엔 그럭저럭 신경을 써주던 남준이, 이제는 대놓고 얼굴도 안 비췄다. 하미주는 아주 불만이 많았다.‘명절에 처가집 한 번 들를 생각도 없는 사위가 과연 제대로 가정을 꾸릴 생각이 있을까? 말 다 했지.' 이렇게 생각하자 그녀는 딸의 손을 잡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다영아, 엄마가 하는 말 기분 나빠하지 말고 잘 들어. 이제 네 아버지가 그런 상황이니, 우리 집도 예전 같지 않아. 사람들이 우리를 어떻게 보는지도 너도 잘 알고 있지?” 다영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녀는 당연히 알았다. 아니,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자신은 더욱 필사적으로 버텨야 한다고 결심했다. 이 기회에 확실히 자리 잡지 않으면, 사람들에게 무시당하는 건 시간 문제일 테니까. “엄마, 집안 사정이랑 내 결혼은 상관없는 일이에요.” 하미주는 깊은 한숨을 쉬며,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
상혁은 풍등을 들고 하연과 함께 마당으로 나왔다. 타이밍 좋게 하인이 라이터를 건네주고는 조용히 물러났다. 멀지 않은 곳에서 부남준이 조용히 고개를 내밀었다. 몰래 지켜보던 그는, 두 사람이 자연스럽게 풍등을 펼치는 모습을 바라봤다. 상혁이 직접 가운데 심지에 불을 붙였다. 뜨거운 열기가 천천히 풍등을 부풀게 만들었고, 풍등은 두 사람 앞에서 서서히 떠오르기 시작했다. “하연아, 빨리 소원 빌어!” 하연은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며 간절히 소원을 빌었다. 상혁은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조용히 또 다른 소원을 빌었다. ‘언제나 우리 둘이 해마다, 해마다, 서로를 마주할 수 있기를.' “다 됐어요.” 하연이 조심스럽게 눈을 떴다. 그 눈빛에는 반짝이는 빛이 서려 있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서서히 손을 놓았다. 풍등은 하늘을 향해 천천히 날아올랐고, 점점 멀어지더니 마침내 한 점이 되어 사라졌다. “어떤 소원 빌었어?” 상혁이 손끝으로 하연의 귓불을 살짝 어루만지며 물었다. 하연은 장난기 어린 눈빛으로 깜빡이며 말했다. “소원은 말하면 이루어지지 않는대요.” “그래? 그럼, 네 소원이 꼭 이루어지길 바랄게.” 두 사람은 다시 눈을 마주쳤다. 상혁의 숨소리가 깊어졌다. 그는 하연의 턱을 살며시 잡고, 몸을 숙여 그녀의 입술을 맞췄다. 조심스러웠던 키스는 점점 더 깊어져 갔다. 하연은 숨이 가빠졌다. 상혁을 밀어보려 했지만, 오히려 더 깊이 끌어안겼다. 여자의 허리는 유연하게 휘어졌고, 상혁의 등은 팽팽한 활처럼 긴장됐다. 결국, 하연도 상혁의 목을 감싸 안고, 키스에 응답했다. 그러나 그 순간, 불청객 같은 전화벨 소리가 분위기를 깨뜨렸다. 하연은 화들짝 놀라며, 급하게 상혁을 밀어냈다. 그녀의 얼굴은 빨갛게 익은 사과처럼 새빨개졌다. “전화 울리는데요?” 하연의 목소리는 한층 낮아져 있었다. 묘하게 사람을 간지럽게 만드는 목소리였다. 상혁은
다른 곳에서 있던 조봉규가 소란이 일자마자 급히 뛰어 들어왔다. 그리고 빠른 걸음으로 송혜선에게 다가가며 다급히 말했다. “설날인데, 뭐하러 이렇게 화를 내...” 조봉규가 입을 여는 순간, 남준의 온몸이 싸늘하게 굳어졌다. 남준의 시선이 날카롭게 쏘아붙었고, 조봉규는 본능적으로 움찔하며 고개를 돌렸지만, 이내 애써 태연한 척하며 한 발 다가섰다. 송혜선의 팔을 조심스레 부축하며 낮은 목소리로 달랬다. “지금은 무엇보다도 건강이 우선입니다.” ‘건강?’남준은 손에 쥔 염주를 힘껏 움켜쥐었다. 힘이 들어간 손등에는 핏대가 서고, 눈빛은 살얼음처럼 차가웠다. 그리고 시선은 서로 닿아 있는 두 사람의 손목에 단단히 고정되었다. 입가에 엷은 조소가 떠올랐다. “조 선생님, 참으로 열정적인 분이시군요. 설날에도 근무 태세를 유지하시다니.” 조봉규는 눈치가 빠른 인물이었다. 당연히 그의 말 속에 담긴 조롱을 알아챘다. 그러나 겉으로는 한껏 공손한 태도를 유지하며 머리를 숙였다. “별말씀을요. 환자의 곁을 지키는 게 제 본분입니다.” 남준은 가만히 조봉규를 노려보다가, 짧고 날 선 경고를 던졌다. “그렇다면 본분에만 충실하시죠. 여긴 부씨 가문의 본가이니까.” 순간, 분위기가 얼어붙었다. “남준아!” 송혜선이 다급히 나섰다. 남준을 나무라는 말투였지만, 그 속에는 조봉규를 감싸려는 의도가 분명히 깔려 있었다. 남준의 눈빛은 더욱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그러나 송혜선은 오히려 기세를 올려 쏟아내듯 말했다. “네가 좀 더 나서서 잘했더라면, 부상혁한테 밀릴 일도 없었어! 내가 왜 조진숙한테 설날마다 굽신거려야 하냐고?” “지금, 어머니는 나를 원망하시는 겁니까?” 목소리가 한층 낮아졌다. 남준의 손에서 염주의 한 알이 ‘탁' 하고 부서졌다. “남준아! 지금 네가 무슨 짓을 한 거야?” 송혜선은 깜짝 놀라 소리쳤다. “염주는 영적인 기운이 깃든 물건이야. 함부로 부수면 불길한 일이 생길
부동건의 말은 송혜선을 전적인 신뢰를 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나중에 진실이 밝혀지면, 과연 부동건은 스스로를 어떻게 납득할까?’ ‘결국 속아서 살아온 날이 우스운 바보일 뿐...’ 조진숙은 아무 말 없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애틋한 사랑인데, 굳이 이럴 필요가 있을까?” 잠시 뜸을 들이던 그녀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이 서류들, 가져가.” “나 다른 뜻은 없어.” 부동건은 조진숙의 단호한 태도에 살짝 주춤했지만, 곧장 다시 설득을 시도했다. “네가 아직 날 원망하고 있다는 거 알아. 그동안... 혹시 네가...” “착각하지 마.” 조진숙은 부동건의 말을 끊었다. 더 이상 불필요한 감정 소모를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부동건은 한 발 더 다가섰다. “하지만 네가 이걸 받지 않는다면, 결국 날 아직도 원망하고 있다는 뜻 아니야?” 조진숙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 가슴 깊숙이 가라앉은 감정이 불쑥 떠오르는 듯했다. 그녀는 천천히 숨을 들이마시며 감정을 정리한 뒤, 담담한 목소리로 물었다. “당신... 정말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어?” 부동건은 말없이 서류를 정리하더니, 숙련된 손놀림으로 만년필을 열어 조진숙 앞에 내밀었다. 이것이 바로 자신의 대답이었다. “후회할 거였으면, 애초에 여기 오지도 않았어.” 이번엔 조진숙도 망설이지 않았다. 그녀는 펜을 들어, 서류 맨 아래에 단호한 필체로 자신의 이름을 남겼다. “부디 이 선택을 후회하는 날이 오지 않길 바라.” 부동건은 서류를 덮으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제야, 마음속에 짓눌려 있던 무언가가 비로소 내려앉는 듯했다. 그는 문득 나직이 말했다. “이제야... 후회한들, 이제 돌아갈 길도 없어.” 조진숙은 그 말에 가슴이 미세하게 흔들렸지만, 끝내 시선을 돌렸다. 담담한 표정 속에 모든 감정을 삼키며, 단 한마디만 남겼다. “이건... 다 정해진 운명이야.” ‘운명의 장난...’ ‘어쩔 수
“무슨 말씀인지 압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제 뜻대로 하게 해주십시오.” 부동건의 태도가 단호했다. 이를 지켜보던 부해철이 더 이상의 말은 의미가 없을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이미 네가 마음을 정했다면, 내가 더 이상 뭐라 할 수도 없지. 다만, 앞으로 그 여자를 내 앞에 데려오지는 마라. 네가 어떻게 살든 상관하지 않을 테니.” “그리고...” 부동건이 무슨 말을 더 하려 했지만, 부해철은 손을 휘저으며 등을 돌렸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라지는 뒷모습만이 남았다. ‘그렇게까지 반대할 줄은 몰랐네...’ 부동건은 묘한 기분으로 그 자리에 멈춰섰다. ...설날 온 나라가 한 해의 끝을 보내고, 가족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날. 예전에는 늘 조진숙과 상혁 모자가 함께 보내던 명절이었다. 그런데 올해는 조금 달랐다. 최씨 가문과 부씨 가문의 본가가 가까운 데다, 명절이 지나면 하연과 상혁의 약혼식이 있을 예정이었다.그래서 조진숙이 제안했고, 양가 가족들이 함께 부씨 가문에서 설날 저녁을 보내기로 했다. 그 덕분에 조진숙은 하루 종일 분주하게 준비에 매진했다. 그러나 제사가 끝나자마자 뜻밖의 손님이 찾아왔다. “진숙아, 새해 복 많이 받아.” 부동건이 어색한 미소를 띠며 낮은 자세로 인사를 건넸다. 평소 같았으면 송혜선과 함께 명절을 보낼 사람이, 오늘 이곳에 나타났다는 것 자체가 조진숙에게는 뜻밖이었다.그녀는 담담한 얼굴로 물었다. “여긴 웬일이죠?” “잠깐 들렀어, 당신한테 할 말도 있고 해서.” 조진숙은 그의 시선을 따라 문득 집안 분위기를 둘러보았다. 송혜선이 이곳에 들어온 이후, 부씨 가문 본가는 한 지붕 아래에서도 철저하게 북쪽과 남쪽으로 나뉘어 있었다.그 경계는 뚜렷했고, 불필요한 마주침은 없었다. 부동건이 송혜선과의 결혼을 공식적으로 선언한 이후, 둘은 한 번도 마주친 적이 없었다.만약 이번 일이 없었다면, 조진숙 역시 이미 오래전에 이 집을 떠났을 터였다. “들어와.
송혜선은 급히 분위기를 누그러뜨리려 했다. “아무래도 남준이가 좀 늦나 봐요. 조금만 더 기다려 보시는 게 어떨까요?” 부동건은 차갑게 코웃음을 치며 얼굴을 굳혔다. “말 같지도 안은 소리를 하고 있어! 오늘 같은 날에, 시간 개념도 없이 늑장을 부려.” 송혜선은 딱히 반박할 말이 없었다. 결국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 “남준이 오면 꼭 제가 주의를 줄게요.” “교육 똑바로 시켜. 좀 상혁이 하는 것에 반만큼이라도 신중했으면, 나도 그 녀석한테 좀더 잘해 줬을 거야.” ‘또 시작이군.’ 송혜선은 속이 쓰렸지만, 이를 악물고 참았다. “오면 오는 거고, 못 오면 어쩔 수 없지.” 부동건은 한 치의 여지도 주지 않고 단호하게 내뱉곤, 그대로 자리를 떠났다. “어서 남준이를 찾아와! 오늘 제사에 참석하지 못하면, 앞으로 나를 어머니라고 부를 생각은 하지도 마.” 송혜선의 가슴이 격하게 오르내렸다. 이 모든 노력들이 사소한 실수 하나로 무너질 순 없었다. ...부씨 가문은 제사에 있어서 철저한 예법을 중시했다. 다행히도 상혁은 부동건과 수년간 제사를 지내며 익숙해져 있었고, 모든 절차를 한 치의 오차 없이 진행했다. 부씨 가문의 어른들 역시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동건아, 상혁이가 있어서 네 대가 끊길 걱정은 없겠구나.” “앞으로 부씨 가문의 대업을 상혁이가 이어간다면, 우리 늙은이들도 한시름 덜겠어.” 부동건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야 물론이죠. 상혁이는 부씨 가문의 기둥이 될 인재입니다.” 상혁은 겸손한 태도로 말했다. “과찬이십니다. 앞으로도 많이 지도해 주십시오.” “어디 우리가 너희 젊은이들에게 배우는 게 더 많지!” “...”제사가 거의 끝나갈 무렵, 부남준이 느지막이 모습을 드러냈다. 부동건은 남준을 보자마자 눈빛이 차갑게 식었지만, 일단 감정을 누르고 말했다. “멍하니 서 있지 말고, 어서 와서 절부터 올려라.” 남준은 살짝 눈썹을
최씨 가문의 따뜻한 분위기와 달리, 부씨 가문의 본가는 싸늘하고 조용했다.예년과 다름없이, 설날이 되면 부동건은 집안의 남자들과 함께 조상들에게 제사를 올려야 했다. 올해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른 아침부터 송혜선은 핸드폰을 손에 쥐고 부남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연결음만 울릴 뿐, 남준은 끝내 받지 않았다. ‘이 녀석은 정말이지, 사람 속을 태우는 재주가 있다니까.’ 송혜선의 얼굴에 점점 초조한 기색이 드러났다. 옆에서 지켜보던 조봉규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때? 아직도 전화를 안 받아?” 송혜선은 짙어진 눈매로 핸드폰을 내려다보며 입술을 꾹 다물었다. “이 녀석, 정말 사람을 신경 쓰게 만드네! 도대체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거야...!” 조봉규는 부드러운 말투로 그녀를 달랬다. “혹시 무슨 사정이 있어서 늦는 걸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너무 걱정 마십시오. 남준이가 철없는 아이도 아니고.” ‘철없는 아이가 아닌데 이러겠어?’ 송혜선은 속으로 한숨을 삼키며, 최대한 감정을 눌렀다. “부씨 가문의 어른들이 원래부터 남준이를 못마땅해했는데. 이런 중요한 제사까지 빠지면, 분명 뒷말이 나올 거야.” 그녀의 말투에는 이미 불안과 초조함이 서려 있었다.그러는 사이, 두 사람이 작은 응접실에서 나와 복도를 따라 걸어갔다. 그때, 정면에서 다가오던 부동건과 마주쳤다. 부동건은 갓 외투를 정리하던 참이었다. 하지만 송혜선과 조봉규가 함께 있는 모습을 보자, 손동작이 살짝 느려지며 묘한 시선을 던졌다. “조 선생, 올해도 그렇게 혜선이 옆에 딱 붙어서 열심히 잘 보살펴 주세요.” 그 말 한마디에, 분위기가 묘하게 변했다.조봉규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한 발짝 뒤로 물러서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무슨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회장님, 제가 해야 할 일을 할 뿐입니다.” 부동건은 묘한 눈빛을 유지한 채, 덤덤히 말했다. “혜선이가 아이를 무사히 낳으면, 그에 대한 보상도 충분히 해줄 테니
두 집안이 한데 모여 북적이며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이런 귀한 순간을 마음껏 즐기며 보내다 보니, 어느덧 설날 전날이 되었다. 모두 함께 전용기를 타고 F국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설날이 밝았다. 올해는 오랜만에 최씨 가문 식구들이 한자리에 모인 데다, 기쁜 소식까지 겹친 한 해였다. 그 덕분인지 최동신은 평소보다 더욱 설 준비에 신경을 쓰고 있었다. 이른 아침부터 최씨 가문의 본가는 분주했다. 집사와 고용인들이 분주히 움직이며 저택 곳곳을 장식했다. 새빨간 복주머니와 길상 문양이 새겨진 장식들이 하나둘 자리 잡았고, 정원에는 화려한 등불이 걸리며 설 분위기가 한층 더 짙어졌다.하연이 계단을 내려오자, 기다렸다는 듯 최하성이 환한 얼굴로 다가왔다. “하연아, 새해 복 많이 받아라.” 그러면서 두툼한 세뱃돈 봉투를 그녀에게 내밀었다. 하연은 두 눈을 반짝이며 얼른 봉투를 받았다. “와! 이렇게 두꺼워요? 하성 오빠 최고!” 그때, 계단 위에서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도 있다.” 최하경이었다. 그 역시 두툼한 세뱃돈 봉투를 들고 내려왔다. “작년, 재작년 다 해외에 있어서 못 챙겨줬잖아. 그래서 올해 한꺼번에 더 두둑이 넣었다.” “와! 이건 더 두껍잖아요! 이러다 손목 나가겠어요!” 하연은 연달아 두 개의 두툼한 봉투를 받아 들고, 각각 한쪽 팔을 오빠들에게 걸었다. “오빠들 있어서 진짜 좋아요!” 최하성, 최하경 둘 다 서로를 바라보며 우애가 넘치는 미소를 지었다. 그때, 문이 열렸다. 그리고 최하민과 예아름이 나란히 들어왔다. 추운 바깥 공기를 뚫고 들어오자마자, 하민은 아름의 목에서 목도리를 부드럽게 풀어주었다. 그는 안쪽에서 떠들썩하게 웃고 있는 세 남매를 보고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우리 집이 이렇게 활기찬 게 얼마 만이에요!” 아름도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 “그러게요. 앞으로 더 행복한 일만 가득할 거예요.” 하민은 아내의 허리를 가볍
그리곤 진심을 담은 남자의 목소리가 멈추었다. 하지만 하연의 눈가에는 이미 촉촉한 눈물이 맺혀 있었다. 지금까지의 모든 글귀, 한 글자 한 글자마다 상혁이 진심을 담아 전한 마음이 느껴졌다. 이건 단순한 고백이 아니라, 상혁이 하연에게 건네는 가장 솔직하고 깊은 속마음이었다. 그때, 뒤에서 들려온 부드러운 목소리. “하연아.” 하연은 본능적으로 뒤돌아섰다. 그리고 그곳에 서 있는 사람을 보고 숨이 멎었다. 아까까지의 편안한 차림은 온데간데없이, 눈앞의 상혁은 새하얀 수트를 차려입고 있었다. 반듯하게 맨 보타이, 정갈하게 빗어 넘긴 머리, 그리고 손에 들린 한 다발의 꽃. ‘동화 속에서 막 나온 왕자님 같아.’ 하연은 멍하니 서서 남자를 바라보았다. 상혁이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올 때마다, 하연의 가슴이 터질 듯이 뛰었다. 남자의 시선, 남자의 걸음, 그가 다가오는 순간의 모든 것이 하연의 가슴속 깊이 새겨졌다. 마침내, 상혁은 하연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두 사람은 마주 섰고, 서로의 눈동자에 상대방의 모습이 담겼다. 말을 하지 않아도, 서로의 떨림이 전해지는 듯했다. 조용한 정적이 흘렀다. 그러다 상혁이 조심스레 손을 내밀어 꽃을 건넸다. 남자의 목소리는 살짝 떨리고 있었다. “하연아...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몰라.” 말이 끝나자, 그는 왼발을 살짝 앞으로 내디디더니 천천히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작은 벨벳 상자를 꺼냈다. 이어서 뚜껑을 열자, 반짝이는 다이아몬드 반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상혁의 눈빛에는 단 하나의 감정만이 가득 차 있었다. 바로 사랑이었다. “한때 나는 사랑이란 영화 속 이야기일 뿐이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널 만나고, 그게 아니란 걸 알았어.” “사랑은 영화 속 한 장면이 아니라, 매일같이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서로를 아껴주고, 이해하고, 감싸주는 거라는 걸.” “그래서 나는... 너와 함께, 그런 사랑을 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