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업식에 온 사람들은 전부 B시에서 알아줄 만한 지위 높은 사람들이었다. “B시의 시중심에 이런 어마어마한 규모의 가계를 낼 수 있는 걸 보니 분명 인맥이 꽤 넓은 것 같아요. 많은 사람들이 축하해주러 왔네요.” 하연이 자에 앉으며 말했다.“그래? 한서준도 왔어.” 이 말에 하연은 눈살을 찌푸렸는데 과연 맞은편 룸으로 들어가는 서준의 모습이 보였고 줄곧 칵테일을 즐겨 마시지 않던 서준이 왜 여기 온 건지 의문이 들었다. 이때 상혁도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여기 사장이 도대체 어떤 사람인지 점점 더 궁금해지는 걸?” ‘어떤 사람이냐고?’ 사실 특별한 사람은 아니었고 심지어 매일 마스크를 쓰고 다녔기에 얼굴을 제대로 볼 수조차 없었다. 한편 방금 막 다른 손님의 접대를 끝낸 이현에게 강성훈이 다가와 말했다.“저번 달에 누군가 룸을 하나 예약했는데 오늘 보니 그 사람이 한서준 대표였습니다. 그 자가 여기에 온 걸 보니 이미 사장님의 신분을 알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 말에 마스크를 쓰고 있던 이현이 약간 움찔하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알아서 마시고 가던지 말던지 하게 둬. 난 그 자를 만나지 않을 거니까.” 하연을 구했던 그날 밤, 이현은 이미 자신의 신분이 까발려질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최하연 사장님도 오셨습니다. 바로 한서준 대표의 맞은편 룸에 계시는데 사장님을 뵙고 싶어 하십니다.” 이현은 눈살을 찌푸렸다. 동시에 하연이 상혁에게 술을 한 잔 따르고 있었다.“전에 함께 마시기로 했었죠? 그 기회가 이렇게 빨리 올 줄은 몰랐네요.”그러자 상혁이 술잔을 들며 대답했다. “그러게 말이야.” “고작 요만한 B시에서 임모연은 대체 어디에 숨은 걸까요?”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이 있잖아?” “혹시 가장 위험한 곳이 오히려 가장 안전한 곳이라는 말이예요? 그러면 설마 우리 가까이에 있을 수도 있다는 거네요?” 바로 이때 누군가 룸의 문을 두드렸다. 하연이 문을 열어보니 바로 손이현이었다.“이제는 손 사장님이라고 불
“개인 취향일 뿐입니다.” 이현은 상혁을 훑어보았는데 서준과는 완전히 다른 남자라는 느낌을 받았다. 서준은 늘 권력과 이익의 다툼 속에서 컸기에 세속의 때에 물들었지만 상혁은 그런 풍파는 전혀 겪지 않는 느낌이었다. 상혁의 분위기는 분명 아주 화목하고 느슨한 환경에서 자란 것처럼 보였다. “손 사장님은 눈이 꽤 정확하신 분 같아요. 이런 사업 추진에 능한 걸 보니 말이예요.” 이때 상혁이 입을 열며 이현의 눈길을 끊어냈다. 그제야 이현도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별말씀을요. 그보다 최하연 씨가 너무 과분한 선물을 주셔서 어떻게 감사를 드려야 할 지 모르겠네요.” “저와 하연이 모두 배은망덕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하물며 오늘 개업식 같은 바쁜 날에 특별히 저희에게 룸도 남겨주지 않았습니까?” “이 고마움은 앞으로 꼭 갚도록 하겠습니다.” 상혁은 손가락에 멋으로 차고 있던 반지를 만지작거렸는데 진심 반, 장난 반이 섞여 있었다. ‘하연이라고 불렀어?’ 이현은 상혁이 너무도 다정하게 하연을 부르는 모습이 약간 신경에 거슬렸는데 이때 하연도 고개를 끄덕이며 한 마디 보탰다. “맞아요, 손 사장님.” “참, 그 연회가 있던 날 저희 하성 오빠를 소개시켜 드리기로 했는데 약속 못 지켜서 죄송해요.” 하연은 그날의 일을 언급했고 이에 이현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괜찮습니다. 그 분의 진심 어린 고백을 듣는 것으로도 이미 저에겐 충분히 복받은 일입니다.” 그러자 하연이 웃으며 말했다. “저희 오빠는 허세 부리는 걸 좋아해서 분명 그날 고백하고 나서 자아도취하고 있었을 거예요.” “사랑하는 사람에게 당당하게 고백할 수 있다면 그보다 멋있는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충분히 스스로에게 취할 만합니다.” 이현이 뭔가 생각난 듯 말을 이어갔다. “그날 최하성 씨의 목에 걸려 있던 목걸이가 참 예쁘던데 사랑하는 사람의 손재주가 엄청 뛰어난 것 같더라고요. 혹시 디자이너 맞나요?” “세상에!” 하연이 깜짝 놀란 듯 물었다. “눈썰미가 정말
하연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고 자신도 새까맣게 잊고 있던 걸 상혁이 기억하고 있을 줄은 정말 상상도 하지 못했다. “얼마에 사들인 겁니까?” 200억이 넘은 돈은 결코 작은 액수가 아니었다. 하지만 상혁은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마음에 들어?” 상혁이 다정한 눈길로 활짝 웃고 있는 하연을 바라보았다. “마음에 들긴 하는데 도대체 얼마인 거예요?” 하연은 이 목걸이가 가격이 분명 적지 않게 나갈 것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비록 상혁은 그 돈이 아쉬울 사람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건 너무 값진 물건이었다. 상혁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고 바로 그 목걸이를 하연에게 걸어주며 말했다. “돈은 신경 쓰지 마. 네가 마음에 들면 그거로 충분해.” 두 사람의 이 모습은 한창 열애 중인 연인의 모습이 틀림없었다.상혁은 하연에게 목걸이를 걸어준 후 몸을 돌리며 말했다. “손 사장님께도 예쁜지 한 번 보여드려.” 루비 보석은 매우 컸고 하연의 뽀얀 피부와 자연히 잘 어울렸는데 이때 이현은 하연의 쇄골 쪽에 난 키스마크를 발견하고 바로 시선을 돌렸다. “최하연 씨의 우아한 미모에 무엇인들 어울리지 않겠습니까?” 이어 이현은 바로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두 분 저의 개업식에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전 다른 일이 있어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편하게 즐기다 가십시오.” 이현이 룸에서 나오자마자 성훈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안색이 왜 이렇게 안 좋으신 겁니까? 무슨 일이라도 있으셨습니까?” “마스크를 썼는데 그게 보여?” “암울한 분위기가 마스크를 뚫고 나오는데 안 봐도 알겠습니다. 최하연 씨가 무슨 거슬리는 행동이라도 한 겁니까?” 하지만 이현은 대답하지 않았고 하연에게서 받은 선물을 성훈에게 건넸다.“이거 잘 보관해 둬.” 그렇게 성훈이 떠나간 뒤 이현이 고개를 들었는데 맞은편 룸에 있던 서준과 눈이 마주쳤고 그는 마치 오랫동안 사냥감을 노리고 있던 늑대처럼 이현을 바라보았다. 룸 안, 하연은 착용했던 목걸이를 다시 선물 상자
“왜?” 잠시의 침묵 후, 서준이 참지 못하고 물었다. “연회 날 분명 현장에 있었잖아.” “그건 내 일이야. 너에게 설명할 의무는 없어.” 이에 서준은 눈살을 찌푸렸고 이현이 계속 말을 이어갔다.“너만 빼면 내가 한명준이었단 건 아는 자는 없어. HT그룹은 이제 네꺼고 그걸 뺏을 사람은 어디에도 없어.” 하지만 서준은 여전히 안심되지 않았고 의심스러운 듯 물었다. “아무도 없다고? 그럼 하연은?” 그러자 이현은 술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날 알아보지 못 했어.” 이에 서준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칵테일바는 아주 조용했고 룸의 문을 닫으면 마치 바깥 세상과 단절된 느낌이었다. 하연은 상혁의 다리에 누운 채 잠이 들었고 다시 일어났을 때는 두 시간이 훌쩍 넘어버렸는데 그렇게 두 사람은 나란히 룸을 나섰다. 그런데 이때 상혁의 핸드폰이 울렸는데 발신자는 연지였고 하연은 바로 DL그룹 내부 사정임을 알아보았다.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게요.” “응, 화장실 다녀올게.” 안 봐도 상혁을 빨리 F국으로 돌아오라는 연락인 게 뻔했는데 연지가 조급한 어조로 말했다.[부 회장님께서 이틀 연속 송혜선 아주머니 쪽에 가 계십니다. 부남준 사장이 이번 일로 기세가 저조하긴 하지만 분명 다시 기회를 잡아 돌아오려 할 겁니다.] [저희 DL그룹은 주인인 대표님이 필요합니다.] 상혁은 화장실 세면대에서 손을 씻으며 말했다. “3일 후에 돌아갈게.” 이에 연지는 꾹꾹 참고 있던 말을 내뱉았다. [금방 알게 된 소식인데 부남준 사장이 WA그룹과의 사업에 관한 모든 걸 인정했다고 합니다.] [비록 처벌을 받긴 했지만 대표님을 대신하여 B시에서 일을 다시 마무리 지을 수 있다고 태도 표시를 했답니다.] [그리고 부남준 사장은 내일이면 B시로 돌아가 이 일을 실행할 겁니다.] 이 말을 들은 상혁은 무의식적으로 핸드폰을 꽉 잡았다. 약 2분 후, 상혁이 화장실에서 나오려고 하는데 길 모퉁이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손이현 쪽은 이제 신경
이때 마침 하연과 상혁 쪽으로 불빛이 비춰졌는데 두 사람은 길가의 눈부신 풍경이 다름없었다.상혁은 하연의 허리를 감싸 안고 말했다. “내기는 일단 다음에 하는 거로 하고 두고 보자고.” 이 순간 서준의 차량이 길가로 들어오고 있었고 모든 걸 봐 버린 그는 안색이 어두워진 채 이를 악물었다. 이때 동후가 걱정스럽게 말했다. “대표님!” “한명준이 나와 다투지 않는 이유를 알 것 같아.” 이에 동후는 서준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이젠 내가 아니더라도 한명준일 가능성도 없어.” 하연은 이미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고 충분히 그녀를 지켜줄 능력도 가진 남자였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이런 시련을 겪은 적 없던 서준은 차에 앉아 눈가를 문질렀고 방금 이현이 했던 말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내가 모든 걸 포기했다고 해서 네가 진 빛을 그냥 두겠다는 건 아니야.” “뭐라고?”“내가 내 신분을 이용하여 하연과 결혼했으면 아껴줬어야지. 하연을 속상하게 만들어? 그 빚은 반드시 기억하고 있다가 갚게 만들 거야.” 이에 서준은 한 마디 반박도 하지 못했는데 전부 사실이니 할 말이 없었던 것이다. “내일 임모연을 B시에서 벗어나게 할 거야.” 이 말에 동후가 의아한 듯 물었다. “여기에 남긴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저희 쪽에 임모연을 B시에서 빼낼 인맥은 없어요.” “오늘 밤 자리 한 번 마련해. 그 윗분을 만나야 해. 잘 구슬리면 가능할 지도 몰라. 임모연에게 새로운 신분을 줘야 해.” ... 차 안, 기사는 운전에만 몰두하고 있었고 뒷좌석의 소리는 잘 들리지 않았다. “오늘 밤 떠난다고요? 왜 이렇게 갑자기요? 3일 후라고 하지 않았어요?” 하연이 놀란 듯 한쪽 구석에 자리했고 상혁과는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DL그룹에 급한 일이 생겨서 지금 가봐야 해.”“부남준 그 사람 때문인가요?” 이에 상혁은 담배 한 갑을 주머니에서 꺼냈지만 차마 필 수는 없었다. “비슷해.” 그러자 하연은 긴 한숨을 내쉬었고 비록 아쉽긴 했지만 일
겨울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고 모연은 코트로 몸을 꽉 감싼 채 차에 앉아 있었다. 며칠 연속 술을 마셨던 모연은 오늘은 마시지 않아 어쩌다 정신이 멀쩡했고 창백한 얼굴로 물었다.“꼭 떠나야 하는 거야?” “저희 대표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임모연 씨가 여기 있으면 모두에게 피해가 간다고 말입니다.” “일단 경찰에 잡혀 모든 죄목이 더해지면 수십 년을 선고받기엔 충분할 겁니다. 그러니 임모연 씨, 지금 떠날 수 있는 걸 다행으로 아십시오.” 날은 아직 이른 새벽이었고 거리에는 모연의 차량 밖에 없었으며 비 속에서 폭풍 질주하고 있었다.얼마나 지났을까 백미러에 갑자기 검은색 차량이 나타났고 모연의 차를 뒤따르고 있었다. 이에 모연이 경계하 듯 말했다. “누가 따라붙었어! 경찰이야?” 이에 운전기사가 핸들을 돌리며 대답했다. “일단 최선을 다해 따돌려 보겠습니다!” 이 기사는 운전기술이 꽤 좋았지만 결국 뒤에서 따라오던 차량을 따돌리진 못했고 심지어 추월을 당해 모연이 찬 타는 강제로 멈출 수밖에 없었다. 이에 기사는 등골이 서늘해졌다. “어떻게 이럴 수가? 분명 한 대표님께서는 막으러 올 사람이 아무도 없을 거라 하셨는데!” 모연의 낯빛은 완전히 어두워졌다. 이때 눈앞의 검은색 차량에서는 건장한 남자가 한 명 내렸고 뚜벅뚜벅 걸어와 차 문을 두드렸다. “누구세요? 뭘 하려는 거죠?” 기사가 덜덜 떨며 물었다. “전 경찰이 아닙니다.” 손에 핸드폰을 들고 있던 피터가 말을 이어갔다. “차 뒷좌석 문을 열어주십시오. 저희 대표님께서 임모연 씨에게 할 말이 있다고 합니다.” 이때 모연은 몸이 얼어버린 채 두 눈만 껌뻑였는데 피터가 바로 뒷좌석으로 들어와 앉으며 그녀에게 핸드폰을 건넸다. “누굽니까?” “임모연 씨, 여기서 떠나고 싶다면 전화 받으세요.” 모연에겐 다른 선택지가 없었고 상대방은 이미 그녀의 모든 일거수일투족을 알고 있었기에 벼랑 끝까지 몰린 상황이었다.“여보세요?” 모연이 전화를 받았다. 전화기 너머에서는
이날 온 하루 하연은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 이때 진미화가 다가와 말했다. “최 사장님, 최하성 씨께서 사장님이 전화를 받지 않는다고 저에게 연락을 주셨습니다.” 하연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진미화의 전화를 받았는데 하성의 얼굴이 핸드폰 화면에 비춰졌다. [하연, 전화도 안 받고 뭐하는 거야? 걱정 했잖아!] “핸드폰 배터리가 나갔어요. 하성 오빠, 무슨 일인데요?” 하연이 아무렇게나 변명했다. [하경이 형이 휴가 나왔는데 B시에 너 만나러 온대. 저녁에 밥이나 한끼 먹어.] 이 말에 하연이 기뻐하며 대답했다.“하경 오빠 안 본지도 오래됐는데 잘 됐네요. 몇 시에 도착한대요? 제가 레스토랑 예약해 놓을게요.” [그럼 내가 하경이 형 마중 갈 사람 안배해 놓을게.] 이때 하연의 표정을 빤히 바라보던 하성이 물었다. [안색이 왜 그래?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거야?] 그러자 하연은 머리를 절레절레 저으며 아무 일도 없다고 했고 부랴부랴 전화를 끊었다. 당시 하연은 이름도 모르는 남자를 위해 B시에 왔고 얼렁뚱땅 서준과 결혼하여 가족 전체의 분노를 샀다. 그런데 이제 와서 자신이 그렇게 원했던 남자가 결국은 서준이 아니었다는 걸 알면 하연의 오빠들은 더욱 화를 낼 게 분명했다. 이에 하연은 정신이 완전히 혼미했고 이 진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지 몰랐다.저녁이 되어 하연과 하성, 그리고 하경 세 사람은 B시에서 유명한 중식당에 모였다.그러나 하성의 연예인이라는 특수한 신분 때문에 특별히 룸으로 예약되어 있었다. 이때 하연이 룸의 문을 열고 들어왔고 하경이 음식을 짚고 있었는데 하성이 옆에서 입을 열었다. “그거 맛있어요. 저도 좀 주세요.” “너 매니저가 이렇게 막 먹어도 신경 안 써?” “이것 좀 먹는다고 안 죽어요. 그리고 지금 매니저가 없잖아요.” 가흔이 하성의 곁에 앉아 있었고 그의 옷자락을 잡으며 눈길을 보냈는데 하성이 고개를 돌리더니 바로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하연?” 이때 하연이 웃으며 들어와 말했다.“매니
그러자 하경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창문을 열었는데 그는 평소 술과 담배에 손을 잘 대지 않는 사람이었다. “바로 방향을 바꾸고 포기를 해야지. 이 세상에는 그것 말고도 견지할 수 있는 게 꽤 많을 테니까.” 하경은 매우 이성적이었다. 그러자 하연은 하경을 바라보며 물었다. “하지만 그 일로 오랜 시간이 지체되어 물거품이 되어 버렸는데 아쉽지 않을까요?” “오히려 기뻐해야지. 그런 것들이 기억 속에 박혀 있다면 계속 생각날 거고 아쉬워질 텐데 물거품이 되면 적어도 완전히 내려놓을 수는 있잖아. 아니야?” 하경은 손에 든 라이터를 만지작거렸고 말투는 매우 담담했는데 그의 성격상 이런 허무맹랑한 것들로 단 한번도 고민한 적 없는 것처럼 보였다.하경의 말을 들은 하연은 미간을 찌푸렸지만 오히려 마음은 탁 트인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하연은 지금 오랜 시간이 지났어도 그 사람이 나타나지 않은 거라면 두 사람은 처음부터 인연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까지 걸어온 길들은 모두 스스로 선택한 것이니 매 한 걸음마다 다 그 의미가 있을 거야.” 이에 하연은 담배를 끄며 대답했다. “하경 오빠, 예리한데?” “하지만 난 언젠가 오빠가 무언가에 얽매이면 어떤 모습일지 보고싶네요.” 그러자 하경이 실소하며 말했다. “너무 나쁜 거 아니야? 이렇게 위로를 잘 해줬는데 내가 망신당하는 꼴이 보고싶어?” “에이, 설마요.” 이때 하성이 다시 문을 열고 돌아왔다.“둘이 무슨 말 하고 있었어요? 분위기가 이상한데요?” “우리가 다 오빠 같은 줄 알아요?” 하연이 외투를 챙겨 입으며 입을 열었다. “가흔이 데려다 준다고 하지 않았어요?” 그러자 하성은 자리에 풀썩 앉으며 허무하다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다른 이들이 볼까 봐 혼자 갔어.” 가흔은 아직 세상 사람들에게 자신의 연인이 하성이라는 걸 밝힐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는데 만약 그 사실이 알려진다면 그녀에게도 엄청난 영향이 미칠 게 뻔했다.“아직 헤쳐나야 할 길이 멀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