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 취향일 뿐입니다.” 이현은 상혁을 훑어보았는데 서준과는 완전히 다른 남자라는 느낌을 받았다. 서준은 늘 권력과 이익의 다툼 속에서 컸기에 세속의 때에 물들었지만 상혁은 그런 풍파는 전혀 겪지 않는 느낌이었다. 상혁의 분위기는 분명 아주 화목하고 느슨한 환경에서 자란 것처럼 보였다. “손 사장님은 눈이 꽤 정확하신 분 같아요. 이런 사업 추진에 능한 걸 보니 말이예요.” 이때 상혁이 입을 열며 이현의 눈길을 끊어냈다. 그제야 이현도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별말씀을요. 그보다 최하연 씨가 너무 과분한 선물을 주셔서 어떻게 감사를 드려야 할 지 모르겠네요.” “저와 하연이 모두 배은망덕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하물며 오늘 개업식 같은 바쁜 날에 특별히 저희에게 룸도 남겨주지 않았습니까?” “이 고마움은 앞으로 꼭 갚도록 하겠습니다.” 상혁은 손가락에 멋으로 차고 있던 반지를 만지작거렸는데 진심 반, 장난 반이 섞여 있었다. ‘하연이라고 불렀어?’ 이현은 상혁이 너무도 다정하게 하연을 부르는 모습이 약간 신경에 거슬렸는데 이때 하연도 고개를 끄덕이며 한 마디 보탰다. “맞아요, 손 사장님.” “참, 그 연회가 있던 날 저희 하성 오빠를 소개시켜 드리기로 했는데 약속 못 지켜서 죄송해요.” 하연은 그날의 일을 언급했고 이에 이현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괜찮습니다. 그 분의 진심 어린 고백을 듣는 것으로도 이미 저에겐 충분히 복받은 일입니다.” 그러자 하연이 웃으며 말했다. “저희 오빠는 허세 부리는 걸 좋아해서 분명 그날 고백하고 나서 자아도취하고 있었을 거예요.” “사랑하는 사람에게 당당하게 고백할 수 있다면 그보다 멋있는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충분히 스스로에게 취할 만합니다.” 이현이 뭔가 생각난 듯 말을 이어갔다. “그날 최하성 씨의 목에 걸려 있던 목걸이가 참 예쁘던데 사랑하는 사람의 손재주가 엄청 뛰어난 것 같더라고요. 혹시 디자이너 맞나요?” “세상에!” 하연이 깜짝 놀란 듯 물었다. “눈썰미가 정말
하연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고 자신도 새까맣게 잊고 있던 걸 상혁이 기억하고 있을 줄은 정말 상상도 하지 못했다. “얼마에 사들인 겁니까?” 200억이 넘은 돈은 결코 작은 액수가 아니었다. 하지만 상혁은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마음에 들어?” 상혁이 다정한 눈길로 활짝 웃고 있는 하연을 바라보았다. “마음에 들긴 하는데 도대체 얼마인 거예요?” 하연은 이 목걸이가 가격이 분명 적지 않게 나갈 것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비록 상혁은 그 돈이 아쉬울 사람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건 너무 값진 물건이었다. 상혁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고 바로 그 목걸이를 하연에게 걸어주며 말했다. “돈은 신경 쓰지 마. 네가 마음에 들면 그거로 충분해.” 두 사람의 이 모습은 한창 열애 중인 연인의 모습이 틀림없었다.상혁은 하연에게 목걸이를 걸어준 후 몸을 돌리며 말했다. “손 사장님께도 예쁜지 한 번 보여드려.” 루비 보석은 매우 컸고 하연의 뽀얀 피부와 자연히 잘 어울렸는데 이때 이현은 하연의 쇄골 쪽에 난 키스마크를 발견하고 바로 시선을 돌렸다. “최하연 씨의 우아한 미모에 무엇인들 어울리지 않겠습니까?” 이어 이현은 바로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두 분 저의 개업식에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전 다른 일이 있어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편하게 즐기다 가십시오.” 이현이 룸에서 나오자마자 성훈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안색이 왜 이렇게 안 좋으신 겁니까? 무슨 일이라도 있으셨습니까?” “마스크를 썼는데 그게 보여?” “암울한 분위기가 마스크를 뚫고 나오는데 안 봐도 알겠습니다. 최하연 씨가 무슨 거슬리는 행동이라도 한 겁니까?” 하지만 이현은 대답하지 않았고 하연에게서 받은 선물을 성훈에게 건넸다.“이거 잘 보관해 둬.” 그렇게 성훈이 떠나간 뒤 이현이 고개를 들었는데 맞은편 룸에 있던 서준과 눈이 마주쳤고 그는 마치 오랫동안 사냥감을 노리고 있던 늑대처럼 이현을 바라보았다. 룸 안, 하연은 착용했던 목걸이를 다시 선물 상자
“왜?” 잠시의 침묵 후, 서준이 참지 못하고 물었다. “연회 날 분명 현장에 있었잖아.” “그건 내 일이야. 너에게 설명할 의무는 없어.” 이에 서준은 눈살을 찌푸렸고 이현이 계속 말을 이어갔다.“너만 빼면 내가 한명준이었단 건 아는 자는 없어. HT그룹은 이제 네꺼고 그걸 뺏을 사람은 어디에도 없어.” 하지만 서준은 여전히 안심되지 않았고 의심스러운 듯 물었다. “아무도 없다고? 그럼 하연은?” 그러자 이현은 술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날 알아보지 못 했어.” 이에 서준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칵테일바는 아주 조용했고 룸의 문을 닫으면 마치 바깥 세상과 단절된 느낌이었다. 하연은 상혁의 다리에 누운 채 잠이 들었고 다시 일어났을 때는 두 시간이 훌쩍 넘어버렸는데 그렇게 두 사람은 나란히 룸을 나섰다. 그런데 이때 상혁의 핸드폰이 울렸는데 발신자는 연지였고 하연은 바로 DL그룹 내부 사정임을 알아보았다.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게요.” “응, 화장실 다녀올게.” 안 봐도 상혁을 빨리 F국으로 돌아오라는 연락인 게 뻔했는데 연지가 조급한 어조로 말했다.[부 회장님께서 이틀 연속 송혜선 아주머니 쪽에 가 계십니다. 부남준 사장이 이번 일로 기세가 저조하긴 하지만 분명 다시 기회를 잡아 돌아오려 할 겁니다.] [저희 DL그룹은 주인인 대표님이 필요합니다.] 상혁은 화장실 세면대에서 손을 씻으며 말했다. “3일 후에 돌아갈게.” 이에 연지는 꾹꾹 참고 있던 말을 내뱉았다. [금방 알게 된 소식인데 부남준 사장이 WA그룹과의 사업에 관한 모든 걸 인정했다고 합니다.] [비록 처벌을 받긴 했지만 대표님을 대신하여 B시에서 일을 다시 마무리 지을 수 있다고 태도 표시를 했답니다.] [그리고 부남준 사장은 내일이면 B시로 돌아가 이 일을 실행할 겁니다.] 이 말을 들은 상혁은 무의식적으로 핸드폰을 꽉 잡았다. 약 2분 후, 상혁이 화장실에서 나오려고 하는데 길 모퉁이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손이현 쪽은 이제 신경
이때 마침 하연과 상혁 쪽으로 불빛이 비춰졌는데 두 사람은 길가의 눈부신 풍경이 다름없었다.상혁은 하연의 허리를 감싸 안고 말했다. “내기는 일단 다음에 하는 거로 하고 두고 보자고.” 이 순간 서준의 차량이 길가로 들어오고 있었고 모든 걸 봐 버린 그는 안색이 어두워진 채 이를 악물었다. 이때 동후가 걱정스럽게 말했다. “대표님!” “한명준이 나와 다투지 않는 이유를 알 것 같아.” 이에 동후는 서준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이젠 내가 아니더라도 한명준일 가능성도 없어.” 하연은 이미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고 충분히 그녀를 지켜줄 능력도 가진 남자였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이런 시련을 겪은 적 없던 서준은 차에 앉아 눈가를 문질렀고 방금 이현이 했던 말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내가 모든 걸 포기했다고 해서 네가 진 빛을 그냥 두겠다는 건 아니야.” “뭐라고?”“내가 내 신분을 이용하여 하연과 결혼했으면 아껴줬어야지. 하연을 속상하게 만들어? 그 빚은 반드시 기억하고 있다가 갚게 만들 거야.” 이에 서준은 한 마디 반박도 하지 못했는데 전부 사실이니 할 말이 없었던 것이다. “내일 임모연을 B시에서 벗어나게 할 거야.” 이 말에 동후가 의아한 듯 물었다. “여기에 남긴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저희 쪽에 임모연을 B시에서 빼낼 인맥은 없어요.” “오늘 밤 자리 한 번 마련해. 그 윗분을 만나야 해. 잘 구슬리면 가능할 지도 몰라. 임모연에게 새로운 신분을 줘야 해.” ... 차 안, 기사는 운전에만 몰두하고 있었고 뒷좌석의 소리는 잘 들리지 않았다. “오늘 밤 떠난다고요? 왜 이렇게 갑자기요? 3일 후라고 하지 않았어요?” 하연이 놀란 듯 한쪽 구석에 자리했고 상혁과는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DL그룹에 급한 일이 생겨서 지금 가봐야 해.”“부남준 그 사람 때문인가요?” 이에 상혁은 담배 한 갑을 주머니에서 꺼냈지만 차마 필 수는 없었다. “비슷해.” 그러자 하연은 긴 한숨을 내쉬었고 비록 아쉽긴 했지만 일
겨울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고 모연은 코트로 몸을 꽉 감싼 채 차에 앉아 있었다. 며칠 연속 술을 마셨던 모연은 오늘은 마시지 않아 어쩌다 정신이 멀쩡했고 창백한 얼굴로 물었다.“꼭 떠나야 하는 거야?” “저희 대표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임모연 씨가 여기 있으면 모두에게 피해가 간다고 말입니다.” “일단 경찰에 잡혀 모든 죄목이 더해지면 수십 년을 선고받기엔 충분할 겁니다. 그러니 임모연 씨, 지금 떠날 수 있는 걸 다행으로 아십시오.” 날은 아직 이른 새벽이었고 거리에는 모연의 차량 밖에 없었으며 비 속에서 폭풍 질주하고 있었다.얼마나 지났을까 백미러에 갑자기 검은색 차량이 나타났고 모연의 차를 뒤따르고 있었다. 이에 모연이 경계하 듯 말했다. “누가 따라붙었어! 경찰이야?” 이에 운전기사가 핸들을 돌리며 대답했다. “일단 최선을 다해 따돌려 보겠습니다!” 이 기사는 운전기술이 꽤 좋았지만 결국 뒤에서 따라오던 차량을 따돌리진 못했고 심지어 추월을 당해 모연이 찬 타는 강제로 멈출 수밖에 없었다. 이에 기사는 등골이 서늘해졌다. “어떻게 이럴 수가? 분명 한 대표님께서는 막으러 올 사람이 아무도 없을 거라 하셨는데!” 모연의 낯빛은 완전히 어두워졌다. 이때 눈앞의 검은색 차량에서는 건장한 남자가 한 명 내렸고 뚜벅뚜벅 걸어와 차 문을 두드렸다. “누구세요? 뭘 하려는 거죠?” 기사가 덜덜 떨며 물었다. “전 경찰이 아닙니다.” 손에 핸드폰을 들고 있던 피터가 말을 이어갔다. “차 뒷좌석 문을 열어주십시오. 저희 대표님께서 임모연 씨에게 할 말이 있다고 합니다.” 이때 모연은 몸이 얼어버린 채 두 눈만 껌뻑였는데 피터가 바로 뒷좌석으로 들어와 앉으며 그녀에게 핸드폰을 건넸다. “누굽니까?” “임모연 씨, 여기서 떠나고 싶다면 전화 받으세요.” 모연에겐 다른 선택지가 없었고 상대방은 이미 그녀의 모든 일거수일투족을 알고 있었기에 벼랑 끝까지 몰린 상황이었다.“여보세요?” 모연이 전화를 받았다. 전화기 너머에서는
이날 온 하루 하연은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 이때 진미화가 다가와 말했다. “최 사장님, 최하성 씨께서 사장님이 전화를 받지 않는다고 저에게 연락을 주셨습니다.” 하연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진미화의 전화를 받았는데 하성의 얼굴이 핸드폰 화면에 비춰졌다. [하연, 전화도 안 받고 뭐하는 거야? 걱정 했잖아!] “핸드폰 배터리가 나갔어요. 하성 오빠, 무슨 일인데요?” 하연이 아무렇게나 변명했다. [하경이 형이 휴가 나왔는데 B시에 너 만나러 온대. 저녁에 밥이나 한끼 먹어.] 이 말에 하연이 기뻐하며 대답했다.“하경 오빠 안 본지도 오래됐는데 잘 됐네요. 몇 시에 도착한대요? 제가 레스토랑 예약해 놓을게요.” [그럼 내가 하경이 형 마중 갈 사람 안배해 놓을게.] 이때 하연의 표정을 빤히 바라보던 하성이 물었다. [안색이 왜 그래?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거야?] 그러자 하연은 머리를 절레절레 저으며 아무 일도 없다고 했고 부랴부랴 전화를 끊었다. 당시 하연은 이름도 모르는 남자를 위해 B시에 왔고 얼렁뚱땅 서준과 결혼하여 가족 전체의 분노를 샀다. 그런데 이제 와서 자신이 그렇게 원했던 남자가 결국은 서준이 아니었다는 걸 알면 하연의 오빠들은 더욱 화를 낼 게 분명했다. 이에 하연은 정신이 완전히 혼미했고 이 진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지 몰랐다.저녁이 되어 하연과 하성, 그리고 하경 세 사람은 B시에서 유명한 중식당에 모였다.그러나 하성의 연예인이라는 특수한 신분 때문에 특별히 룸으로 예약되어 있었다. 이때 하연이 룸의 문을 열고 들어왔고 하경이 음식을 짚고 있었는데 하성이 옆에서 입을 열었다. “그거 맛있어요. 저도 좀 주세요.” “너 매니저가 이렇게 막 먹어도 신경 안 써?” “이것 좀 먹는다고 안 죽어요. 그리고 지금 매니저가 없잖아요.” 가흔이 하성의 곁에 앉아 있었고 그의 옷자락을 잡으며 눈길을 보냈는데 하성이 고개를 돌리더니 바로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하연?” 이때 하연이 웃으며 들어와 말했다.“매니
그러자 하경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창문을 열었는데 그는 평소 술과 담배에 손을 잘 대지 않는 사람이었다. “바로 방향을 바꾸고 포기를 해야지. 이 세상에는 그것 말고도 견지할 수 있는 게 꽤 많을 테니까.” 하경은 매우 이성적이었다. 그러자 하연은 하경을 바라보며 물었다. “하지만 그 일로 오랜 시간이 지체되어 물거품이 되어 버렸는데 아쉽지 않을까요?” “오히려 기뻐해야지. 그런 것들이 기억 속에 박혀 있다면 계속 생각날 거고 아쉬워질 텐데 물거품이 되면 적어도 완전히 내려놓을 수는 있잖아. 아니야?” 하경은 손에 든 라이터를 만지작거렸고 말투는 매우 담담했는데 그의 성격상 이런 허무맹랑한 것들로 단 한번도 고민한 적 없는 것처럼 보였다.하경의 말을 들은 하연은 미간을 찌푸렸지만 오히려 마음은 탁 트인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하연은 지금 오랜 시간이 지났어도 그 사람이 나타나지 않은 거라면 두 사람은 처음부터 인연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까지 걸어온 길들은 모두 스스로 선택한 것이니 매 한 걸음마다 다 그 의미가 있을 거야.” 이에 하연은 담배를 끄며 대답했다. “하경 오빠, 예리한데?” “하지만 난 언젠가 오빠가 무언가에 얽매이면 어떤 모습일지 보고싶네요.” 그러자 하경이 실소하며 말했다. “너무 나쁜 거 아니야? 이렇게 위로를 잘 해줬는데 내가 망신당하는 꼴이 보고싶어?” “에이, 설마요.” 이때 하성이 다시 문을 열고 돌아왔다.“둘이 무슨 말 하고 있었어요? 분위기가 이상한데요?” “우리가 다 오빠 같은 줄 알아요?” 하연이 외투를 챙겨 입으며 입을 열었다. “가흔이 데려다 준다고 하지 않았어요?” 그러자 하성은 자리에 풀썩 앉으며 허무하다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다른 이들이 볼까 봐 혼자 갔어.” 가흔은 아직 세상 사람들에게 자신의 연인이 하성이라는 걸 밝힐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는데 만약 그 사실이 알려진다면 그녀에게도 엄청난 영향이 미칠 게 뻔했다.“아직 헤쳐나야 할 길이 멀었네요.”
F국은 현재 오후였고 커다란 회의실 안에 9명의 이사들이 모여 있었는데 고위층 간부들도 거의 다 모여 있었다. 상혁이 회의실로 들어가는 순간 모든 시선이 그쪽으로 쏠렸고 그가 회의실 안을 바라보니 이미 남준도 돌아와 자리에 앉아 있었다. 이때 남준을 상혁을 발견하고 환하게 웃어 보였다. 상혁은 가장 중심 자리에 앉아 입을 열었다. “입원해 있던 거 아니었어? 보아하니 큰 문제는 아니었나 보지?” 그러자 맨 앞에 앉아 있던 남준은 깁스를 한 팔을 흔들어 보이며 대답했다. “전 일이 가장 중요한 사람이라서요. 여러분들도 아시겠지만 지난 몇 년 간 형님이 없을 때 전 단 한번도 회의에 빠진 적 없어요.” “때문에 비록 다치긴 했지만 이미 F국에 돌아오기도 했고 혹시 형님이 급한 일이라도 생기면 제가 회의를 이어가야 하니까요.” 남준은 의미심장한 말을 내뱉으며 적나라하게 야심을 드러냈다. 그러나 상혁은 남준의 말에 대꾸하지 않았고 서류를 펼치며 화제를 돌렸다.’“여러분, 오래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바로 회의 시작합시다.” 이때 한 이사가 무언가 알고 있는 듯한 어조로 물었다. “부 대표님, 국외에서 돌아오신 겁니까?” 그러자 상혁은 서류를 펼치던 손을 잠깐 멈추었고 옆을 힐끔 쳐다보았다. 이 순간 연지가 상혁의 뒤로 다가가 귓속말로 속삭였다. “전 대표님의 일정에 대해 누설한 적 없습니다.” 이에 상혁은 담담히 대답했다. “네, 급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상대방은 계속 물고 늘어졌다. “현재 DL그룹이 B시에서 진행하는 프로젝트는 없는 거로 알고 있는데요.” 이 사람은 상혁이 B시에 갔다는 것까지 상세하게 알고 있었는데 이에 상혁은 옷소매를 정리하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개인적인 일을 잠깐 처리해야 해서요.” “부디 귀국하여 FL그룹 일을 처리한 게 아니길 바랍니다. 부 대표님, 정력을 두 곳에 분산키면 곤란합니다.” “안 그러면 DL그룹을 대표님께 맡기고 있는 저희들이 불안하지 않겠어요?” 하연을 언급하지 않는
“시간 없어.” 하연은 단호하게 말하며 전화를 끊었다. 그녀가 다시 안으로 들어가려는 순간, 휴대폰에서 메시지 알림 소리가 들렸다. 하연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메시지를 확인했고, 내용을 본 후 손에 힘이 들어갔다. 10분 후.하연은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밖으로 나왔다. 멀리서 남준의 눈에 띄는 빨간색 스포츠카가 비상등을 켠 채 호텔 입구에 세워져 있으며, 번화한 호텔 입구에서 유독 도드라져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끌고 있었다.잠시 후, 차 문이 열리고 남준이 내렸다. 그는 오늘 블랙 패딩을 걸친 채 특유의 자유분방한 분위기를 풍기며 여유롭게 하연을 바라보았다. “역시 올 줄 알았어.” 남자의 목소리는 자신감이 넘쳤고, 말투에는 확신이 묻어 있었다.찬바람이 부는 겨울밤, 차가운 바람이 하연의 얼굴을 스치며 머리카락을 흩날렸다. 하연은 몇 걸음 옮긴 뒤 걸음을 멈췄고, 남준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손을 들어 흩날린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말해. 문자에 적힌 상혁 씨하고 관련해서 중요한 일이 뭔데?”남준은 팔짱을 끼고 흥미로운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입가에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형이 걱정돼?”“그건 네가 신경 쓸 일 아니야.” 하연은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남준은 그녀 쪽으로 몇 걸음 다가가더니, 불과 반걸음 거리에 멈춰서 몸을 약간 숙였다. “너의 그 관심 나 한테도 좀 나눠 주면 안 돼?”그가 가까이 다가오며 내뱉은 말에 은은한 술 냄새가 풍겨왔다. 하연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술 마셨어?”남준은 입가를 비틀며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이거 혹시 나 걱정하는 거야?”“착각하지 마.” 하연은 무의식적으로 한 발짝 물러섰다. “부남준, 할 말 있으면 빨리 해. 여기서 시간 끌 여유 없어.”남준은 고개를 약간 끄덕이며 어딘가 불만 섞인 어조로 말했다. “너 갈수록 성격이 우리 형이랑 닮아가네. 역시 잘 어울리는 커플이야.” 하연
하연은 밝게 웃으며 상혁이 건넨 잔을 받아 들고 한 모금 마셨다. 갓 짠 오렌지 주스는 상큼하면서도 달콤한 맛이 입안 가득 퍼졌다. “부 대표님이 직접 짠 오렌지 주스라 그런가, 확실히 맛이 다르네요. 정말 맛있어요.” 상혁은 미소를 지으며 장난스레 손을 뻗어 그녀의 코끝을 살짝 건드렸다. “맛있으면 자주 짜줄게.” 하연은 장난스럽게 웃으며 답했다. “그럼 감사히 잘 마실게요, 부 대표님!” “아니, 한참을 찾았는데 여기서 둘이서만 꽁냥거리고 있었네?” 문 앞에 기대어 서 있던 하성이 두 팔을 교차하고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상혁, 너 요즘 이 녀석을 너무 애지중지하더라. 그러다 버릇 나빠지겠어.” “오빠!!” 하연은 볼이 부풀어올라 약간 투덜거렸지만, 옆에 있던 상혁은 태연하게 그녀를 감싸며 말했다. “애지중지하든 말든 내 마음이지. 네가 무슨 상관이야?” 하성은 두 손을 들며 장난스레 투항했다. “알았어, 알았어. 난 그냥 너희 둘이 잘 지내는 거 보니 마음이 놓여서 하는 소리야.”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 “그래, 계속 이렇게 잘 지내줘, 아주 보기 좋아!”그때 하연의 주머니에서 휴대폰이 울렸다. 화면에 ‘부남준’이라는 이름이 뜨자 그녀는 잠시 긴장한 듯 눈빛이 흔들렸다. “오빠들, 먼저 얘기하고 있어요. 난 전화 좀 받고 올게요.” 하연이 자리를 비우고 복도로 나가자, 하성은 방금 전과는 달리 진지한 표정으로 상혁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입을 열었다. “요즘 너희 집안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소문이 있더라. 동건 삼촌 쪽에서 뭔가 일이 있는 것 같던데?” 상혁은 하연이 마시다 남긴 오렌지 주스를 마시며 시선을 복도 쪽에 고정한 채 무심하게 말했다. “첩이 ‘본처’의 자리를 노리는 거야. 흔한 일이잖아.” 하성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말했다. “동건 삼촌이 그 여자를 꽤 오랫동안 봐줬던 모양이던데. 이제는 꽤 많은 걸 쌓아둔 듯하고, 한번 크게 판을 벌일
“뭐 하는 거야? 빨리 이 주스를 연회장으로 가져가!” 홀 매니저가 다가와 살짝 꾸짖었다. 여자는 급히 고개를 숙이며 질투로 번들거리던 눈빛을 감추고는 얌전히 대답했다. “네, 바로 가겠습니다.” 다영은 태어나서 가사일 한 번 손댄 적 없었지만, 어쩔 수 없이 트레이를 들고 발걸음을 옮겼다. “잠깐!” 매니저가 갑자기 그녀를 불렀다. “너 신입이야? 본 적이 없는 얼굴인데?” 다영의 심장이 두근거리며 가슴 속에서 송혜선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우리 고향 친척 중 하나가 DS그룹에서 일하고 있어. 오늘 밤엔 그 사람 신분을 쓰는 게 편할 거야.” 침착함을 되찾은 다영은 고개를 들어 냉정하게 대답했다. “저는 고객지원부의 진미입니다. 연회 인력이 부족해서 임시로 지원 나온 거예요.” 매니저는 그녀의 명찰을 한 번 흘깃 본 뒤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트레이를 건네받았다. “신입이라면 전면에 나가면 실수하기 쉬워. 내실에서 돕는 게 좋겠어.” “알겠습니다.” 매니저가 떠난 뒤, 다영은 깊게 숨을 내쉬었다. 다시 연회장을 바라봤을 때, 앞줄에 앉아 있던 하연과 상혁은 이미 모습을 감췄다. 2층 휴게실 안. 원신명은 한 손에 신선한 오렌지 한 봉지를, 다른 손에 포장을 뜯지 않은 녹즙기를 들고 들어왔다. “대표님, 주문하신 오렌지와 녹즙기입니다.” 원신명은 궁금한 듯 물었다. “대표님, 직접 오렌지 주스를 만드시는 건가요?” 상혁은 짧게 대답했다. “원 비서, 거기 두고 가면 돼.” 원신명은 얼른 다가가 도움을 자청했다. “대표님, 이런 건 제가 할게요.” “와이프가 오렌지 주스를 마시고 싶다는데, 남에게 맡길 수는 없지.” ‘와이프’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남자의 입에서 흘러나왔고, 마치 그 단어를 그의 마음속에서 수없이 되뇌었던 것처럼 익숙했다. 원신명은 곧 깨달았다. ‘아, 대표님이 직접 최하연 씨를 위해 주스를 준비하시고 싶은 거구나!’ “원 비서, 연말인데도
최하성은 오늘 검정색 정장을 입고 등장했다. 그의 차가운 분위기와 단정한 모습은 단번에 모든 직원들의 이목을 사로잡았다. “최 대표님!”하성을 마주친 직원들은 공손하게 인사했다. 하성은 살짝 고개를 끄덕일 뿐, 시선을 주지 않고 빠르게 행사장으로 걸어 들어갔다. 오늘 저녁 만찬은 매우 풍성했다. 동서양의 요리가 조화를 이루며 대부분 직원들의 입맛과 식습관을 세심하게 고려한 모습이었다. 준비에 꽤 공을 들인 것이 분명했고, 결과적으로 반응도 좋았다. 연말 만찬이 시작되기 전, 하성은 DS그룹의 대표이사로서 무대에 올라 인사말을 했다. 하성은 차분한 걸음으로 무대에 오르며, 그의 존재감은 단번에 분위기를 압도했다. 그가 화려한 말은 하지 않았지만, 단 몇 마디 간결한 말로도, 관중석에서는 뜨거운 박수가 터져 나왔다. 이번 연말 행사는 생중계되고 있었으며, 하성이 등장하자마자 팬들과 네티즌들이 빠르게 몰려들었다. 몇 분도 채 되지 않아 시청자 수가 십만 명을 돌파했다. [최하성 씨, 오랜만이에요! 보고 싶었어요!][연예계에 최하성이 없으니 허전한 기분이에요. 최하성 씨, 돌아와 주세요!][다들 동감! 언제쯤 복귀할 수 있는 거죠?][복귀 요청 99%!!][...] 팬들의 댓글은 끊임없이 이어졌고, 하성의 인기는 생중계 플랫폼 순위에서도 단연코 1위를 차지했다. 무대 아래에서 생중계를 담당하던 진행자는 이 뜨거운 열기를 놓치지 않고 하성에게 다가갔다. “최 대표님, 생중계 채팅창에 팬들이 사장님의 새해 계획에 대해 굉장히 궁금해하고 있어요. 오늘 이 특별한 밤에 팬분들께 한 말씀 부탁드려도 될까요?” 하성은 미소를 머금으며 카메라를 응시했다. 그 순간, 생중계 채팅창은 순식간에 폭발했다. 선물 아이콘이 화면을 뒤덮었고, 댓글은 끊임없이 새로 고침 되었다. “안녕하세요, 하성입니다.” “지난 한 해 동안 저와 DS그룹을 응원해 주신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다가오는 새해에도 DL 그룹
“어머님, 정말로 부 회장님과 결혼하세요?” 이 얘기는 다영에게 있어 꽤 충격적이었다. 세간에서는 송혜선과 부동건의 관계를 두고 여러 말이 떠돌았고, 그중 가장 많이 들려온 것은 송혜선이 ‘첩’이라는 점이었다. 한때 정지철 부인도 이 사실을 꽤 꺼려했던 터라, 다영은 송혜선이 이렇게 대놓고 정식으로 자리 잡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언제 결혼 승낙을 받으신 거예요?” 송혜선은 이미 불룩해진 배를 가볍게 쓸며, 깊은 눈빛 속에 숨겨진 야망을 드러냈다. “부회장님께서 말씀하시길, 새해도 지나고 이제 곧 아이가 태어날 테니 우리 모자에게 반드시 정당한 신분을 보장해 주시겠다고 하셨어.” “그러니... 다영아, 우리 남준이를 믿어야 해. 지금은 잠시 밀려난 상황이지만, 미래는 아무도 모르는 법이잖니?” 다영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마음을 더욱 굳게 다졌다. “어머님, 걱정 마세요. 저는 언제나 남준 씨를 도울 거예요.” 송혜선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더욱 부드러운 눈빛으로 말했다. “그래야지. 남준이도 절대 너를 저버리지 않을 거야.” 그러다 두 사람이 화제를 돌리며 덧붙였다. “지금 부 회장님이 부상혁을 중시하며 DL그룹의 운영을 맡긴 데는 이유가 있어. 결국은 부씨 가문의 장손이라는 명분 때문이지.” “하지만, 임신 초기에는 변수가 많아. 무슨 사고라도 생기면, 어떻게 되겠니? 그런 일이 일어나지 말란 법도 없잖니?” “만약 그 아이가 사라지면, 부상혁 쪽의 지렛대도 없어진 셈이니 남준이한테 분명 유리한 상황이 될 거야. 그렇지 않겠니?” “...” 다영은 멍하니 한참 동안 대답하지 못했다. “어머님, 그게 무슨 뜻이에요?” 송혜선은 더 이상 자세히 설명하지 않고, 조그마한 흰색 약병을 다영의 손에 쥐여주었다. “이 약은 무색무취야. 일반인이 먹으면 아무 이상이 없지만, 임신한 사람이 먹으면 삼 일 안에 유산이 돼.” 다영의 손이 떨리며 본능적으로 병을 놓치듯 뺐다. “어머님,
“정다영 씨의 상상력은 참 풍부하시네요.” 상혁은 입꼬리를 비틀며 약간의 비웃음을 섞어 말했다. “세상을 잘 모르는 아가씨다운 모습이라 참 순진하긴 한데, 이런 험한 세상에선 지나치게 순진한 건 별로 좋지 않아요.” 더는 말을 낭비하지 않겠다는 듯, 상혁은 뒤돌아 떠났다. 다영은 마치 머릿속이 폭발이라도 한 듯, 귓가에서 찡하는 이명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그럴 리 없어요, 남준 씨는 그럴 리 없어요!” 그녀는 낮게 중얼거리며 자신을 설득하려 애쓰며 서둘러 휴대폰을 꺼내 이미 수없이 눌렀던 번호를 다급히 눌렀다. 하지만, 전화기 너머에서 들려온 건 여전히 차갑고 무미건조한 여성의 자동응답 소리뿐이었다. “안 돼!” 다영은 절망하며 비명을 지르고는 갑작스레 밖으로 뛰쳐나갔다. 깊은 겨울밤, 바람은 더욱 매섭게 몰아치고 있었다. ...창밖의 거센 바람에 창문이 덜컹이며 울렸다. 병원의 VVIP 병실 안. 다영은 온몸을 떨며 소파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초점 잃은 눈동자는 텅 빈 듯했고, 난방이 틀어져 있어도 그녀를 감싼 차가운 공기는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다영아, 이렇게 늦은 밤에 무슨 일이야?” 송혜선은 평소와 같은 말투로 물었고, 전혀 이상한 기색은 비추지 않았다. 실은 송혜선도 이미 알고 있었다. 정지철이 이제는 구속되고 정씨 가문이 더 이상 든든한 버팀목이 될 수 없다는 것을. 그러나 다영의 마음에는 여전히 남준의 존재가 얽매여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는 다영에게서 더 많은 가치를 끌어낼 여지가 없다는 사실을 송혜선 또한 명확이 알고 있었다. 그런 생각이 스치자, 송혜선은 표정을 가다듬고 따뜻한 물 한 잔을 건넸다. “자, 물 한 잔 마시고 몸 좀 녹여.” 다영은 멍하니 있다가 정신을 차린 듯, 송혜선의 팔을 단단히 붙잡았다. 간절함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물었다. “어머님, 남준 씨가 어디 있는지 알려주세요, 제발요!” 송혜선은 한숨을 쉬며 어쩔 수 없다
며칠 사이, 정다영은 차갑게 닫힌 문을 수없이 마주했다. 한때 주변 사람들이 다영을 떠받들며 찬란한 별처럼 여겼지만, 이제 집안의 사건이 터지자 사람들은 그녀를 피하려고만 했다. 마치 다영에게 다가가기만 해도 불행이 전염될 것처럼... 그렇게 다영은 세상의 차가운 이면과 인간관계의 허망함을 뼈저리게 느끼며, 자연스레 행동 하나하나를 조심스럽게 바꾸었다. “송 여사와 남준이는 요즘 집에 없는 걸로 아는데, 정 다영 씨는 왜 여기에 있는 거죠?” 상혁은 평범한 어조로 물었지만, 그 말은 다영을 잠시 멈칫하게 했다. 그녀는 곧바로 대답했다. “남준 씨가 곧 돌아온다고 해서 기다리고 있었어요.” 상혁은 아무런 감정도 드러내지 않은 채 그녀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날이 추우니 안에서 기다려요.” 말을 마친 그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남겨진 건 남자의 차가운 뒷모습뿐이었다. 다영은 상혁을 따라가며 급히 소리쳤다. “부 대표님, 잠깐만요...” 상혁이 발걸음을 멈췄다. “무슨 할 말이라도?” 다영은 망설이며 입술을 꽉 깨물었다. 며칠 동안 그녀가 이리저리 뛰어다닌 이유는 단 하나였다. 아버지를 이 난관에서 구해내기 위해서... 그리고 지금, 아버지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자신의 눈앞에 서 있었다. 그녀는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제 아버지와 관련된 일입니다.” 상혁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 건 검찰 소관이에요. 전문 변호팀을 고용하면 사건의 진행 상황을 빠르게 파악할 수 있을 거예요.” 다영은 초조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부 대표님, 이건 분명 오해입니다. 제 아버지는 회사에 평생을 바친 분입니다. 아버지는 공문서를 위조하거나 계약서를 조작하는 일은 절대 하지 않았을 거예요.” 그녀는 자기 아버지를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즉, 정지철은 딸을 희생하더라도 자신의 미래를 망칠 행동은 절대 하지 않을 사람이었다. 그리하여 분명히 이번 일에는 뭔가 숨겨진 진실
최씨 가문 본가 후원에 있는 온실에서는 조용히 바둑알이 내려놓아는 소리가 들렸다. 상혁과 최동신은 마주 앉아 바둑에 온 정신을 집중하고 있었다. “상혁아, 지금 이 바둑판은 승부가 거의 결정 난 것 같은데!” 바둑판 위에서 흑과 백이 치열하게 맞서며 팽팽한 긴장감을 자아냈다. 최동신은 한 마디로 상황을 정리했다. “자네의 백돌이 반 집 차이로 우위를 점하고 있어. 대단해! 예전보다 실력이 많이 늘었어.” 상혁은 겸손하게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할아버지 기백이 여전히 넘치시니 제가 아직 배울 점이 많습니다.” 최동신은 고개를 살짝 저으며 탄식했다. “늙었지. 이제는 예전 같지 않다.” 그러나 그는 곧 말을 돌려 흑돌을 손에 들고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하지만 지금부터 자네도 조심해야겠어.” 최동신은 그 말을 하며 흑돌을 바둑판 위에 툭 하고 내려놓았다. 그 돌이 놓인 자리로 인해 한순간 바둑판의 분위기가 달라졌다. 두 사람의 시선이 바둑판 위에 집중되었다. 상혁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손을 멈췄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우위를 점하고 있던 상황이 단 한 수로 인해 역전이 된 것이다. “할아버지의 바둑 실력은 늘 감탄할 따름입니다. 제가 이 점을 간과하고 놓치고 있었네요.” 상혁은 차분하게 패배를 인정하며 판세를 다시 살펴보기 시작했다. 최동신은 손에 들고 있던 바둑알을 다시 주우며 훈계하듯 말했다. “그렇지. 이길 수 있는 상황도 한 수의 실수로 모두 망쳐버릴 수 있는 법이다.” 상혁은 최동신의 말을 곱씹으며 고개를 들었다. 두 사람의 눈이 잠시 마주쳤다. 최동신은 아무렇지 않게 말을 이었다. “들리는 말에 DL그룹의 실질적인 권한은 이제 자네가 잡았고, 자네 동생은 동남아 지사로 발령이 났다고 들었네.” “겉으로 보기엔 좋은 상황 같아 보이지만, 상혁이, 네가 한 수라도 실수하는 날엔 모든 걸 망칠 수 있다는 걸 명심해야 한다.” 이 말은 단순한 충고 이상의 뜻을 담고 있었다
“이렇게 빨리?” 남준은 무심코 말을 뱉었다. 그의 음성엔 조급함이 묻어 있었다. 남준은 방 안을 계속해서 왔다 갔다 하며 초조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분명 연말 이후로 예정되어 있지 않았나? 어떻게 앞당겨진 거지?” 연지는 침착하게 보고했다. “들리는 말로는 이번 사건이 중대한 만큼 생각보다 빠르게 처리되면서 연말 전에 재판이 열리게 되었다고 합니다.” 남준은 발걸음을 멈추고 차가운 웃음을 흘리며 경멸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부상혁이 나를 궁지로 몰아넣고, 정규인의 입을 열어 내 약점을 찾아내려는 것이겠지.” 그는 잠시 멈칫하다가, 비웃는 듯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하지만 부상혁도 모르는 게 있지. 정규인의 입은 결코 열리지 않을 거란 사실을 말이야.” 연지의 눈이 순간 반짝였다. “상무님, 그 말은 혹시...” 그러나 그녀의 말은 남준의 강렬한 눈빛으로 끊겼다. 서로의 눈이 마주친 순간, 연지는 남준의 의도를 즉각 이해했다. “알겠습니다. 지금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 정규인의 사건은 법원에서 열렸고, 법정에는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경찰들이 구치소에서 정규인을 호송해 나오자, 멀리서 그의 초췌한 모습이 눈에 띄었다. 정규인의 기운 없는 모습에서 예전의 당당함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는 고개를 들어 법정 방청석을 둘러보다가, 맨 끝자락에서 누군가를 발견했다. 순간, 정규인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그는 갑작스럽게 방청석을 향해 달려들며 미친 듯이 외쳤다. “여기 왜 왔어! 당장 나가! 나가란 말이야!” 경찰들이 급히 정규인을 제지하려 했으나, 그의 필사적인 몸부림에 저지당했다. “진정해!” 경찰은 엄중히 경고했지만, 그의 저항은 계속되었다. 그러다 결국, 경찰봉이 그의 등을 강하게 내려쳤다. 퍽! 정규인의 입에서 억눌린 신음이 흘러나왔고, 그의 몸은 앞으로 비틀거리며 쓰러졌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방청석의 허징인은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