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혁 오빠’라는 외침에 상혁은 순간 당황하여 걱정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하연아, 왜 그래? 무슨 일이야?”상혁은 말하면서 성큼성큼 교문 안으로 들어섰다. 심지어 자기 캐리어는 내팽개친 채로.그렇게 캠퍼스 안으로 달려간 상혁은 주위를 두리번거렸지만 방향을 찾지 못해 그제야 진정하고 다시 물었다.“하연아, 지금 어디야?”“기숙사요.”“그래, 착하지? 거기서 딱 기다려.”“상혁 오빠, 그게 무슨 말이에요?하연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그 사이 상혁은 걸음을 재촉하며 하연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맨 처음 기대와 긴장으로 가득했던 마음 역시 하연의 기분이 안 좋다는 생각 하나로 대체되었다.“내려와, 네 기숙사 아래 있으니까.”하연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이불을 걷고 총총걸음으로 창가로 달려갔다. 커튼을 여는 순간 오랜만에 보는 햇빛이 방 안으로 흘러들어 눈이 부실 정도였다.며칠 동안 기숙사에 틀어박혀 폐인처럼 지낸 터라 하연은 기운 없는 모습이었다.하지만 아래층 화단 옆에서 저를 향해 손을 흔드는 익숙한 실루엣을 본 순간 얼굴에 웃음꽃이 폈다.“상혁 오빠, 오빠가 여긴 어쩐 일이에요? 잠깐만요, 바로 내려갈게요.”하연은 외투 하나를 챙겨 입고 슬리퍼를 신고 잔뜩 신이 나서 아래층으로 달려 내려갔다. 그러고는 곧장 달려가 상혁의 품에 와락 안겼다. 오랜만에 가족을 만난 것 같은 느낌에 하연은 말투에 기쁨이 가득 담겨 있었다.“상혁 오빠, 어쩐 일로 우리 학교에 왔어요? 말도 없이.”상혁은 대답하는 대신 하연의 얼굴을 이리저리 훑어보았다.한동안 보지 않았더니 하연은 많이 여위어 있었고 조금 의기소침해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심지어 예전에 늘 반짝반짝 빛나던 눈동자마저 빛을 잃은 것 같았다.게다가 눈시울이 붉어진 걸 보아서는 얼마 전에 운 게 틀림없었다.상혁은 하연을 꼭 안으며 물었다.“왜 울었어? 무슨 일이야?”그 말에 하연은 순간 서러움이 밀려왔다. 그동안 혼자 기다리고 또 기다렸지만 약속 장소에 나타나지 않은 사람을 생각하니
하연의 말을 듣던 상혁은 끝내 참지 못하고 하연의 손을 꼭 잡았다.하연은 갑작스러운 상혁의 동작에 놀라 다급히 물었다.“상혁 오빠, 왜 그래요?”상혁은 하연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며 속으로 수도 없이 고민했지만 결국 자기 진심을 또 한번 숨겼다.“갑자기 일이 생긴 거겠지.”제가 생각한 것과 똑같은 답을 얻은 하연은 일순 환한 미소를 지었다.“역시, 상혁 오빠도 그렇게 생각하는 거죠? 그럴 줄 알았어요. 걔가 그렇게 막 일부러 약속 어기고 안 올 성격이 아니거든요. 그런데 어디 갔을까요? 에이, 그래도 일 다 보면 꼭 찾아와서 설명하겠죠...”“응.”상혁은 짤막하게 대답하고는 자기의 기분을 들키지 않으려고 고개를 돌려 먼 곳을 응시했다. 그러더니 일부러 더 가벼운 말투로 말했다.“하연아, 나 어렵게 걸음 했는데 그 남자애 얘기만 할 거야? 나 제대로 대접하지 않고?”하연은 그제야 자기가 아주 자연스럽게 상혁의 팔짱을 끼고 있다는 걸 발견했다.“미안해요, 상혁 오빠. 오빠가 학교까지 찾아올 줄은 몰랐어요. 저 너무 기뻐요. 우리 학교 부근에 맛집도 있고 재밌는 곳도 많은데 여기서 며칠 지낸다면 제가 제대로 대접할게요.”하연이 다시 평소의 활력을 되찾은 걸 보자 상혁의 입꼬리는 저도 모르게 올라갔다. 코끝에서 느껴지는 하연만의 향기에 세게 흔들렸던 상혁의 마음도 다시 소속감을 찾은 듯 차분해졌다.그 해의 마지막 날, 상혁은 하연의 곁에서 새해를 함께 맞이했고, 하연이 대학원생으로 지내는 동안 F국에서 G국으로 백 번도 넘게 오갔다.물론 힘들었지만 상혁은 오히려 삶에 희망이 생긴 느낌이었다. 게다가 하연이 그리워하던 남자도 다시는 나타나지 않아 한시름 놓은 동시에 희망을 보았다.그 뒤로 시간은 쏜살같이 흘러 하연은 대학원을 졸업했다. 상혁은 이날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른다.“상혁아, 이따가 절대 긴장하지 말고 평소대로만 해.”하경이 상혁의 넥타이를 정리해 주며 응원하자 옆에 있던 하성도 잊지 않고 놀려댔다.“그러니까 말이야. 이따가 하연
상혁은 들뜨고 긴장한 마음으로 엑셀을 밟고 공항으로 출발했다.하지만 이번에는 하연이 상혁과의 약속을 어기고 말았다....문득 정신을 차린 상혁은 제 앞에서 곤히 잠든 하연을 빤히 바라봤다. 물론 오랫동안 돌고 돌았지만 하연이 다시 그의 곁에 왔다는 게 가장 다행이었다.상혁은 몸을 숙여 하연의 이마에 가볍게 입 맞췄다.“잘 자, 하연아”이윽고 자리에서 일어나 하연의 침실을 떠났다. 그리고 문이 닫히는 순간, 침대에서 ‘곤히 자고 있던’ 하연은 천천히 눈을 덨다.이마에 남아 있는 온기에 하연은 처장을 바라보며 복잡한 상념에 휩싸였다. 그 순간, 지난날의 기억이 하나하나 하연의 머릿속에 떠 올랐이다.그러면서 이미 깊이 잠식되어 있던 기억이 하나하나 되살아났다.다음날.따스한 햇살이 창문을 통해 방 안에 비쳐 들었지만 하연은 여전히 꿈나라에서 깨어나지 않았다. 어젯밤 이런저런 생각 때문에 밤새 뒤척이다가 날이 거의 밝을 무렵에야 졸음을 못 이기고 깊이 잠들어버렸으니 그럴 만도.똑똑-그때 문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곧이어 상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하연아, 깨어났어?”비몽사몽인 상태였던 하연은 상혁의 목소리에 눈을 번쩍 떴다.이윽고 주위를 한참 동안 두리번거리고 나서야 자기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알아챘다.“아... 그게, 네! 일어났어요...”하연은 대답하면서 다급히 화장실로 달려 들어갔다. 하지만 헐레벌떡 씻고 난 하연은 난처한 상황에 놓였다.여기에 갈아입을 옷이 한 벌도 없다는 거였다.하연은 저를 탓하며 머리를 콩, 쥐어박았다.‘그러게 왜 이기지도 못할 술을 마셔서는, 여기에서 자겠다고 하냐고?’하연이 괴로워하고 있을 때 문밖에서 상혁의 목소리가 다시 한번 들려왔다.“내가 피터더러 갈아입을 옷을 준비하라고 했어. 문 앞에 놓고 갈 테니 갈아입어. 나 먼저 내려갈게.”그 순간 하연은 눈을 반짝이며 다급히 대답했다.“알았어요.”그러면서 속으로 연신 감탄했다.‘상혁 오빠는 준비성도 갑이네.’이윽고 살금살금 문을 연 하연의
“하연아, 네가 F국으로 돌아오면 너한테 중요한 할 말이 있어.”갑자기 떠오른 한마디에 하연은 손동작을 멈추었다. 그와 동시에 심장이 쿵쾅거리며 미친 듯이 뛰기 시작해다.하연은 눈을 들어 상혁을 보더니 큰 용기를 낸 것처럼 마음속에 묻고 있던 질문을 했다.“상혁 오빠, 혹시 저한테 아직까지 말하지 않은 거 없어요?”“?”상혁은 어리둥절해서 하연을 바라봤다. 두 눈이 서로 마주치는 순간, 마치 온 세상의 시간이 그대로 멈춰버린 듯했다.하연의 심장 역시 요란하게 북을 쳐 그 소리가 들릴까 봐 조마조마했다.하지만 상혁이 입을 뻐끔거리며 뭔가를 말하려고 할 때, 경쾌한 전화벨 소리가 두 사람 사이의 침묵을 깼다.먼저 정신을 차린 하연은 다급히 시선을 돌리며 반짝거리는 핸드폰 액정을 확인하며 다급히 말했다.“저기... 저, 전화 좀 받을게요.”하연은 핸드폰을 들고 다급히 주방을 나섰다. 그러더니 벽 모퉁이를 돈 순간 자기 가슴을 쾅쾅 내리치며 저를 탓했다.“최하연, 이 겁쟁이! 뭐가 그렇게 겁나?”하연은 발을 동동 구르며 중얼거리다가 전화벨이 다시 울리자 그제야 전화를 받았다.[최하연, 너 왜 이제야 전화 받아?]핸드폰을 타고 흘러나오는 가흔의 목소리에 하연은 헛기침을 하며 자기 감정을 숨겼다.“왜? 무슨 일인데?”[아니, 너 무슨 말투가 그렇게 덤덤해? 설마 지금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모르는 거야?”“무슨 소리야?]하연은 더더욱 어리둥절했다.[얼른 JJ 그룹 계정에 들어가 봐, 너 인기 검색어에 올랐어.]“뭐? 내가?”못 믿겠다는 듯한 하연의 말투에 가흔은 검색어 1순위를 보며 굳건한 어조로 말했다.[응! 네가!]“무슨 일인데?”하연은 말하면서 얼른 JJ 그룹 계정에 들어갔다. 그런데 어제까지 분명 0이었던 팔로우가 하룻밤 새에 몇십만 명이 되어 있었다.하연은 오히려 멍했다.어제 그저 음식 영상을 찍어 올린 게 끝인데, 그거 하나로 몇십만 팔로우가 늘었다니?그것도 모자라 하연이 올린 영상은 하룻밤 사이에 소리 없이 인기
가흔은 장난스러운 말투로 하연을 놀려댔다.[그런데 궁금하네, 너 언제 아크로리버파크에 집을 구매했어? 그리고 요리는 언제 배웠어? 심지어 맛있어 보인다는 게 수상하단 말이야. 솔직히 말해봐, 너 나한테 뭐 숨기는 거 있지?]가흔의 예리한 추측에 하연은 얼굴을 붉히며 조리 없게 대답했다.“숨기는 거라니! 그냥... 내 일상을 공유한 것뿐이야. 그거에 사람들이 이렇게 관심 가질 줄은 몰랐어.”하지만 가흔은 하연의 변명을 그대로 믿을 사람이 아니다.[정말이야? 최하연, 너 아크로리버파크에 숨겨둔 남자가 있지?]‘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아니거든!”무의식적으로 대답한 하연은 상혁이 앉은 식탁 쪽을 슬그머니 바라봤다. 그 순간 가슴은 또 쿵쾅거리며 뛰기 시작했다.하연은 다급히 가슴을 움켜잡으며 애써 이성을 되찾으려고 애썼다.“나 일이 있어서 이만 끊을게.”이윽고 말을 마치고는 곧바로 전화를 끊었다.하지만 더 이상 주방으로 돌아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하연은 벽에 기댄 채 난감한 듯 핸드폰을 꼭 잡고 발을 동동 굴렀다.‘왜 하필 그런 질문을 해서는...’‘그게 사실이 아니면 얼마나 무안해.’“하연아.”그때 상혁이 언제 왔는지 하연을 불렀고, 갑작스러운 부름 소리에 하연은 깜짝 놀랐다.“네? 왜요?”상혁은 하연의 반응에 눈썹을 치켜 올렸다.“얼른 아침 먹어, 이따 출근 늦겠다.”평소와 다를 바 없는 상혁의 모습에 하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잔뜩 긴장했던 마음도 단번에 풀렸다.“네.”하지만 차분한 말투와는 달리 속으로 왠지 상실감이 들었다.하연의 그런 상태는 회사에 도착해서까지 지속되었다. 완전히 넋이 나간 하연을 태훈이 몇 번이나 불러서야 정신을 차렸다.“왜 그래?”태훈은 의심이 들었지만 자기 본분을 잊지 않았기에 더 이상 묻지 않았다.“사장님, 기항그룹 대표님과 약속이 있어 곧 출발하셔야 합니다.”하연은 그제야 의자에 걸쳐 있는 외투를 집어 들었다.“그래, 바로 출발하지.”태훈은 곧바로 하연의 뒤를 따라 사무
“많은 사람이 내 실패를 기대하고 있다는 거 알아요. 하지만 내가 여기까지 온 건 이 얼굴 덕분만은 아니에요.”모연은 눈을 살짝 치켜뜨더니 잘난 척하며 말을 이었다.“실력 없으면 이 바닥에서 못 살아남아요. 그리고 내가 추락한다면 우선 높은 자리에 오른다는 뜻이잖아요? 나한테 신경 쓸 시간에 본인 앞날이나 걱정하는 게 어때요? 듣기로 전에 이사진들과 내기를 했다고 들었는데.”하연은 개의치 않는 듯 눈썹을 치켜 올렸다.“소식 참 빠르네요. 확실히 그런 일이 있긴 하죠.”그 말에 모연은 더 우쭐했다.“헛소문인 줄 알았는데 진짜였다니. 기한도 얼마 안 남았다고 하던데, 보아하니 큰 가망은 없는 것 같던데요? 이러다 최씨 가문 아가씨가 회사에서 쫓겨나는 상황이 벌어지는 거 아니에요?”심지어 입을 막으며 비웃기까지 했다.“그럼 진짜 쪽팔리겠다...”모연의 말에 주위에 있던 사람들까지 맞장구치며 하연을 비웃었다.하지만 하연은 조금도 개의치 않고 오히려 침착한 표정으로 대답했다.“그건 제 일이니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하긴, 우리가 무슨 사이인 것도 아니고. 그래도 최하연 씨 행운을 빌게요, 정말 쫓겨나면 너무 쪽팔리니까.”하연은 일순 눈빛이 어두워졌지만 속으로 절대 소인배의 조롱에 마음이 동하지 말자고 스스로를 위로했다.“임 대표님, 기항그룹 대표님이 오셨습니다.”그때 비서가 낮은 소리로 말하자 모연은 이내 시선을 거두며 물었다.“어디 있어?”모연이 오늘 여기에 온 건 하연이 임성재와 나노기술 로봇 프로젝트가 막바지 단계에 이르렀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이게 만약 완전히 성공하면 수익은 어마어마할 거다.그런데 이때 손써서 그걸 망친다면, 한편으로 하연이 이사진과의 내기에서 질 게 뻔하고, 모연 또한 하연을 쉽게 짓밟을 수 있다.하연이 DS 그룹 이사회에서 쫓겨나는 게 지금 모연이 가장 기대하고 있는 일이다.“임 대표님, 기항그룹 대표님이 저기 계십니다.”모연은 그 말에 발걸음을 재촉하며 임성재 쪽으로 다가가더니 공손하게 인사했
임성재는 하연에게 안으로 들라는 손짓을 하며 공손한 태도를 취했고, 하연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안으로 들어갔다.너무 확연한 차별에 아무리 모연이라 해도 참을 수 없었다. 결국 이런 냉대를 참지 못한 모연은 빠른 걸음으로 임성재의 앞길을 가로막았다.“대표님, 우리 LS 그룹도 성의를 가지고 왔습니다. 저희 그룹과 손잡으신다면 절반의 이윤을 대표님께 드리죠. 그러니 우리한테도 기회를 주지 않으실래요?”절반의 이윤은 결코 적은 돈이 아니다.임성재도 사업가인데, 모연은 그가 이렇게 높은 이윤도 마다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하지만 임성재는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걸음을 멈추더니 차가운 눈빛으로 모연을 훑어보았다.“우리 그룹에 돈이 부족하다고 생각합니까?”그 말이 떨어지는 순간 모연은 좋지 않은 예감이 들어 다급히 해명했다.“대표님, 오해입니다. 저는 그저 성의를 보여드리려고 한 것이지 다른 뜻은 없었습니다.”“하, 협력이요? 죄송하지만 우리 회사는 재벌그룹이 아니지만 B시에서 어느 정도 알아주는 회사입니다. 때문에 파트너를 구할 때 요구가 명확해서요. LS 그룹은 우리가 고려하는 범위가 아닙니다. 그러니 돌아가세요.”모연은 순간 어안이벙벙했다.임성재가 이토록 직접적으로 거절할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으니까. 심지어 조금의 체면도 남겨주지 않고 저를 무안 줬다는 것에 화가 치밀었다.“정말 우리 회사를 포기하는 겁니까? 우리 LS 그룹은 정부와 협력하는 유일한 기업입니다.”임성재는 피식 웃었다.“그게 뭐 어때서요? 그딴 건 상관없습니다. 이봐요, 손님 가시니 모셔다드리세요.”이윽고 모연의 체면은 고려하지도 않은 채 모연에게 결연한 뒷모습만 보여주었다. 그 모습을 본 모연은 화가 나서 발을 동동 굴렀다.그때, 경비원이 다가와 모연을 다그쳤다.“저기요, 저희 난처하게 하지 마시고 얼른 나가주세요.”임모연은 입술을 깨물며 콧방귀를 뀌더니 바로 떠나버렸다.한편, 임성재가 회의실에 들어서자 하연은 참지 못하고 농담조로 말했다.“DS 그룹 때문에 요즘
“무슨 그런 농담을, 저 놀리지 마세요. 우리 얼른 업무 얘기나 합시다.”임성재도 동의하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두 사람은 이내 본론으로 들어갔다.그 시각, 지난번 목걸이 사건 때문에 초안을 다시 그리느라 밤샘 작업을 한 가흔은 겨우 만족스러운 디자인을 뽑아냈다.이윽고 침실로 돌아가 휴식하려고 기지개를 켜며 창밖을 내다보았다.그때, 밖에서 초인종 소리가 들려왔다.가흔은 그 순간 어안이벙벙했다.‘이 시간에 집에 올 사람이 없는데, 아침부터 누구지?’가흔은 서재에서 걸어 나오며 물었다.“누구세요?”하지만 아무런 응답이 돌아오지 않았다.인터폰을 켜고 문밖을 확인해도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이에 가흔이 뒤돌아 떠나려 할 때 또다시 초인종 소리가 울렸다.이번에는 곧바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수도 계량기 체크하러 왔습니다, 문 열어 주세요.”가흔은 아무 생각 없이 문을 열었지만 다음 순간 건장한 남자 몇 명이 안으로 쳐들어와 깜짝 놀랐다.“당신들 누구야? 뭐 하는 짓이야?”그때 한 남자가 사진을 꺼내 들고 사람을 확인하더니 물었다.“당신이 신가흔이야?”가흔은 곧바로 도망치려 했지만 상대방은 마치 가흔의 생각을 꿰뚫어 보기라도 한 듯 한발 빠르게 막아섰다.“도망치려고? 우리 손에 들어오면 도망치지 못해.”“당신들 무슨 짓이야! 오지 마.”“저리 가!”“오지 마!”“...”하지만 다음 순간 건장한 남자 몇 명이 가흔을 잡고 입을 막았다.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가흔은 의식을 잃었다....“임 대표님, 그러면 이번 분기의 신제품은 대표님 회사에 맡기겠습니다. 나중에 우리 세 회사 모두 함께 만납시다. 이번 분기의 매출액이 역대 최고를 찍었으면 좋겠네요.”“걱정하지 마세요. 최 사장님, 그건 시름 푹 놓으셔도 됩니다.”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하연의 핸드폰이 갑자기 울리기 시작했다.“죄송합니다. 전화 좀 받고 올게요.”하연은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걸어갔다.“어, 예나야. 무슨 일이야?”[하연아, 가흔한테 사고가 났
하연과 신가흔은 최씨 가문 저택 내에 있는 카페에서 만났다. 최하성이 돌아오지 않을 것을 확인한 후, 가흔은 안심하며 말했다. “이건 내가 후배로서 할아버지께 드리는 작은 선물이야. 대신 전해줘.” 하연은 선물을 한 번 보고 나서 물었다. “할아버지가 가끔 너랑 하성 오빠를 언급하시는데, 직접 찾아뵐 생각은 없어?” 가흔은 차분한 표정으로 말했다. “지금 상황에서 그럴 필요가 있을까?” 해외에서 지내는 동안 가흔은 더욱 냉정하고 이성적으로 변해 있었다. “내가 할아버지를 만나면 하성 오빠가 분명 날 찾을 거야. 우리끼리 만날 일은 없을 테니까, 더 이상 얽히고 싶지 않아.” 하연은 이해하지 못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왜 그렇게 하성 오빠를 계속 피하려고 해?” 하연이 DS그룹 홍보팀 직원들에게 들은 바로는, 하성이 그 당시의 여자 연예인과 관련된 사건은 단순한 해프닝에 불과했고, 별다른 문제도 없었다. 이후 공식 입장을 내고 해명도 했었다. 하성이 가흔에게 설명했을 테지만, 가흔은 끝내 떠나고 돌아오지 않았다. 가흔은 차분하게 말했다. “우리 사이엔 기본적인 신뢰가 없어. 서로를 의심하며 살아가는 게 너무 힘들었어.” 이 말에 하연은 대충 상황을 이해하고 커피를 저으며 한숨을 쉬었다. “하성 오빠의 상태가 좋지 않아. 몇 달째 스케줄도 없고, 녹음실에 틀어박혀 곡만 쓰고 있어. 오빠도 분명 너를 많이 그리워할 거야.” 가흔은 슬며시 웃었지만, 그 미소는 금세 사라졌다. “사람마다 이별에 적응하는 시간이 달라. 시간이 좀 더 지나면 괜찮아질지도 몰라.” 가흔은 더는 이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아 화제를 바꿨다. “이번에 F국에는 무슨 일 때문에 온 거야?” “보석 복원 작업을 맡았어. 의뢰 금액이 엄청나게 높더라. 전 세계에서 이 복원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세 명도 안 돼.” 하연은 놀라며 물었다. “네가 그 중에 한 명으로 뽑힌 거야?” 가흔은 고개를 끄덕였다.
“제 동생은 부 대표님 사람들 덕분에 잘 보살핌을 받고 있어요. 저는 대표님을 믿습니다. 그래서 철수하고 싶지 않아요. 게다가 임무도 아직 끝나지 않았잖아요.” 희서는 등을 꼿꼿이 세우며 말했다. “송혜선이 부씨 가문에서 둘째 아이를 낳게 된다면, 대표님의 길에 큰 장애가 될 것입니다. 이 문제를 해결해야만 저는 떠날 수 있습니다.” 희서의 단호한 태도에 상혁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럼 이제는 원신민과 직접 연락해. 황연지가 너에게 연락해도 대응할 필요 없어.” “알겠습니다.” 희서는 차를 마신 뒤 자리에서 일어났고, 하연은 원신미를 대신해 직접 희서를 배웅했다. “우희서 씨, B시는 위험한 곳이에요. 만약 위험을 마주하게 되면 이 번호로 연락해요. 도와줄 사람이 있을 거예요.” 하연은 펜을 꺼내 우희서의 손바닥에 번호를 적으며 말했다. “꼭 기억해야 해요.” 희서는 하연을 바라보며 잠시 넋을 잃었다. 하연은 향긋한 향기가 나는 우아한 여성이었지만, 결코 쉽게 다룰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다. 희서는 물었다. “실례가 안 된다면... 혹시 최하연 씨인가요?” 하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절 알아요?” “황연지를 만날 때마다, 황연지 씨가 항상 최하연 씨 이야기를 많이 하더라고요.”연지가 하연을 언급할 때는 언제나 아쉬움이 가득한 말투였다. 왜 최하연은 이렇게 모든 것을 쉽게 얻었는지, 왜 자신은 상혁의 사랑을 받을 수 없었는지에 대해 불만을 털어놓곤 했다. 희서는 연지가 늘 이런 이야기를 할 때마다 조용히 듣고 있었지만, 그때마다 마음이 아팠다. 하지만 오늘 하연을 직접 만나고 나서야 비로소 깨달았다. 하연은 상혁과 완벽하게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둘은 마치 천생연분처럼 잘 어울렸다. 하연이 물었다. “황연지가 저에 대해 뭐라고 말했어요?” 희서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하연은 그 모습에 대충 짐작이 갔지만, 화내지 않고 부드럽게 말했다. “사랑하는 마
하연은 결국 상혁의 집에 계속 머물기로 했다. 상혁은 하연과 함께 지내며 그녀가 다시 떠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하연이 일이 있을 때면, 상혁은 사람을 시켜 그녀를 보호하며 최대한 비밀리에 움직이게 했다. DL그룹 내부는 너무 복잡했고, 자신이 섣불리 드러나면 안 된다는 것을 하연도 잘 알고 있었다.하연은 상혁의 무릎 위에 앉아 장난스럽게 그를 감싸 안으며 말했다. “나, 마치 당신이 기르는 애인 같아요.” 상혁은 일 처리를 멈추지 않고 가볍게 웃으며 대답했다. “애인은 그렇게 키우는 게 아니야.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원하는 건 다 줘야지. 마치 애완동물처럼, 하나씩 천천히 줘야 하는 거야.” “정말 애완동물 키워본 적 있어요?” 하연이 묻자 상혁은 냉정하게 대답했다. “남이 키우는 걸 본 적은 있어.” B시 쪽에서는 가끔씩 소식이 들려왔다. 어둠 속에 숨어 있는 첩자들이 작은 정보까지 빠짐없이 전달했다. 그러던 어느 날, 원신민이 보고했다. “우희서 씨가 F국에 도착했습니다. 대표님을 뵙고 싶어 한다고 합니다.” 하연은 의아하게 물었다. “우희서가 누구예요?” 상혁은 짧게 지시했다. “이곳으로 데려와.” 원신민은 잠시 당황했지만, 곧바로 고개를 숙였다. 하연이 곁에 있는 것을 보며, 상혁이 그녀를 얼마나 신뢰하는지 느낄 수 있었다. 몇 주 전까지 둘은 싸우고 냉전 중이었지만, 지금은 예전의 믿음이 돌아온 것처럼 보였다. 상혁이 설명했다. “내 첩자야.” 곧 우희서가 도착했다. 그녀는 모자와 마스크를 착용한 채로 방에 들어섰고, 하연이 주인의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 잠시 놀랐다. 상혁은 옆에 앉아 서류를 보며 무심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부 대표님.” 우희서는 정중하게 인사했다. 상혁은 자리를 가리키며 앉으라고 권했다. 하연은 희서 앞에 차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모자와 마스크는 벗어도 돼요. 여긴 안전해요.” 우희서는 잠시 망설였지만 상혁의 고개 끄덕임을
상혁은 하연의 허리를 감싸며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지었다. “우리 어머니가 뭐라 할 것 같아? 나랑 같이 나가서 확인해볼래?”“뭘 확인해요? 내가 진짜 페르시안 고양이라도 된다는 거예요?” 하연은 긴장하며 반문했다.상혁은 웃음을 터뜨리며 안방을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그가 움직이는 소리를 듣고 하연은 의아해했다. “당신,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고양이가 있다고 한 거예요?”“그냥 없애면 돼.” 상혁은 물건 하나를 집어 들더니 창밖으로 세게 던졌다. 이때, 큰 소리가 났다.조진숙이 깜짝 놀라며 물었다. “상혁아, 무슨 소리야?”“고양이를 안으려고 했는데, 창 문 밖으로 도망치다가 떨어졌어요.”“뭐라고?” 조진숙은 충격을 받았다. “떨어지다니, 어디로 떨어진 거야? 밑으로? 여기 고층인데 다치진 않았겠지?”“바로 뒤가 호수라서 다치지는 않았을 거예요.”조진숙은 여전히 안절부절못하며 말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고양이 하나 제대로 못 잡는 거야?”상혁은 하연과 눈을 마주치며 대답했다.“새 고양이 하나 사서 원신민한테 보상해주면 괜찮을 거예요.”조진숙은 여전히 안도하지 못하며 말했다.“길러 온 정이 있는데 새로 산 고양이와는 전혀 다르지. 그래도 생명이잖아. 원신민 만나면 제대로 사과해.”상혁은 고개를 끄덕였다.하연은 상혁의 거짓말이 이렇게 자연스럽게 나오는 모습을 보며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상혁은 하연에게 몸을 가까이하며 귓가에 속삭였다. “왜 웃어? 네가 저지른 일이잖아.”간질거리는 느낌에 하연은 본능적으로 몸을 피하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모가 아직 밖에 있어요.”상혁은 작은 소리로 대답했다. “밖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아.”상혁은 특히 이런 금기의 느낌을 좋아했다. 그는 하연에게 천천히, 부드럽게 입맞춤하며 물었다.“아직도 아파?”하연은 작게 대답했다. “그만 하고 빨리 가요.”조진숙은 아들이 나오지 않자 참다못해 물었다. “상혁아, 거기서 뭐 하고 있니?”“고양이가 어질러 놓은 거
하연이 눈을 떴을 때, 도시는 이미 밤의 장막에 휩싸여 있었다. 그녀는 흐릿한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며 몸이 묵직하게 아픈 것을 느꼈다.오랜만에 욕구를 해소할 수 있었던 상혁은 특히나 격렬했다. 소파에서 시작해 주방, 다시 안방, 마지막으로 욕실까지, 온 집안의 모든 공간을 사용했다. 하연의 온몸은 마치 압사당한 듯 피곤했고, 손가락 하나 움직이는 것조차 힘들었다.방 안에는 은은한 아로마 향이 퍼져 있었고, 어둑한 조명이 켜져 있었다. 공기 중에는 이미 사랑의 흔적이 사라졌고, 상혁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하연은 침대에 누운 채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그곳에는 마치 천장이 아닌 신들의 조각상이 장엄하게 자리하고 있는 듯 보였다. 신들은 어두운 밤 속에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하연의 마음은 쓸쓸했다. 어젯밤, 둘이 동시에 절정을 맞았을 때, 상혁이 그녀의 손을 잡고 신들을 가리켰던 그 순간이 떠올랐다. 그것은 단순한 육체적 쾌락을 넘어, 정신적으로도 거부할 수 없는 극도의 미친 감정이었다.하연은 다시 샤워할 필요는 없었다. 상혁이 욕실에서 이미 그녀를 씻겨주었기 때문이다.하연은 침대에서 내려왔으나, 문이 잠겨 있는 것을 발견했다. 별다른 생각 없이 발걸음을 옮겨 발코니 쪽으로 다가갔고, 그곳에서 외부로 통하는 또 다른 문을 발견했다. 문에 가까이 다가가자 소리가 들려왔다.“네 아버지를 조사해보라고 했잖아. 했어?” 조진숙의 목소리였다.하연은 걸음을 멈췄다.조진숙이 갑자기 찾아왔고, 상혁은 서둘러 셔츠를 하나 걸치고 나갔다. 그와 하연이 얽히며 셔츠 목 부분이 구겨져 있었다. 그는 눈살을 찌푸렸다. “조사했어요. 고나희의 사고는 단순 사고였고, 아버지와는 관련이 없어요.”“고경수가 비리로 돈을 챙긴 걸 얼마나 알아냈어? 난 그 명목상의 숫자만 믿을 수는 없어. 배를 채운 흔적이 있는지 다 밝혀냈어?” “DL그룹은 아버지 거예요. 아버지가 그런 실수를 하실 리 없죠.” 조진숙은 창가 쪽으로 걸어갔다. 많은 시련을 겪어온 여성이기에,
“왔어요?” 상혁은 놀라움이 가득한 여자 목소라가 들렸다. 상혁은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주방에서 서둘러 나오는 하연이 국을 들고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하연이는 웃으며 물었다. “왜요?”국이 너무 뜨거웠던지, 그녀는 재빨리 그릇을 내려놓고 귀를 만지며 식히고 있었다. 상혁의 얼굴에는 아무런 감정이 없었고, 목소리까지 차가웠다. “정말 안 가고 기다리고 있었어?” 하연은 의아해하며 답했다. “당신이 기다리라고 했잖아요. 그래서 당신이 돌아오길 기다리고 있었죠. 그런데 당신이 너무 안 와서, 심심해서 뭐 만들어 먹을 게 없나 하고 요리 만드는 법을 찾아보다가 뭘 좀 만들어 먹었어요. 다행히 냉장고도 가득 차 있었고 장비도 다 갖추어져 있어서 문제없었어요.” 그녀가 말할 때, 분명히 기쁜 마음과 행복한 표정이었다. 하연이 말을 마치자마자, 상혁은 두세 걸음에 그녀를 끌어당겼다. 그는 손을 잡고 그대로 바로 하연이를 품 안에 가둬버렸다. 상혁의 힘은 상당히 강했고, 하연은 고통스러운 신음 소리를 냈다. “음... 왜 그래요?” 하연은 상혁의 품에서 안정을 느꼈지만, 그의 강한 포옹에 약간 당황했다. 그녀의 몸에서 풍기는 평온한 향기가 상혁의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혔다. 상혁은 눈을 감고, 목소리가 거칠고 낮았다. “난 네가 간 줄 알았어.” 하연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그의 옷깃을 살며시 잡았다. “기다린다고 말했잖아요. 그러니 안 갔죠.” 그녀는 상혁의 감정이 평소와 다르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방금 전, 상혁은 본가에서 싸움 끝에 기분이 상한 채로 돌아왔다. 부남준은 송혜선을 보호하며 소리쳤다.“형, 이 아이도 한 생명이에요! 아버지의 혈육이잖아요!”상혁은 바로 남준의 옷깃을 잡고 주먹을 날렸다. 집사가 나서서 뜯어말리지 않았다면 남준은 일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상혁의 목에 난 상처를 알아보고 하연은 황급히 그를 밀어내며 물었다. “무슨 일 있었죠? 교통사고 처리하러 간
하연은 상혁의 집에서 밤을 지새웠다.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한 채, 새벽녘에 깨어나니 집안은 고요했고 상혁이 돌아온 흔적은 없었다. 그녀는 뒤척이며 잠을 청할 수 없어 핸드폰을 열었고 보니, 마침 서여은이 사진을 올려놓았다. 외부 취재 중이라는 설명과 함께 사진에는 ‘큰 뉴스’라는 글이 적혀 있었다. 두 시간 뒤, 여은이 다시 글을 남겼다. [뉴스가 없어졌어.]하연은 궁금해졌다. [어떤 뉴스?][DL그룹과 관련된 일이야. 전에 조사받았던 고경수 기억나지? 그 사람 딸이 죽었대. 원래 뉴스에 나올 예정이었는데, 누군가 큰돈을 써서 기사를 막아버린 모양이야.]하연은 짐작할 수 있었다. DL그룹과 관련된 일이라면 상혁이 처리했을 가능성이 컸다. 여은이 사건 현장의 사진을 한 장 보냈다. 사진 속 여성은 운전석에 앉아있었고, 절반가량의 얼굴이 드러났는데 표정은 죽음을 앞둔 사람처럼 처참했다. 하연은 사진을 확대했다. [이 여자를 어디서 본 것 같은데.]여은이 바로 하연에게 전화를 걸었다. [고나희야, 고경수의 딸이잖아. 애지중지하게 키워졌는데 세상 물정은 잘 모르는 아이였지. 그런데 네가 정말 고나희를 본 적 있어?]“한 번 스쳐 지나가며 본 적 있어.” 하연은 기억을 떠올리려 애썼고, 드디어 생각이 났다. 얼마 전 정다영을 만나러 호텔에 갔을 때, 고나희와 스쳐 지나갔었다. 그때 고나희가 하연과 부딪혔고, 부남준이 다정하게 하연을 붙잡아주며 고나희에게 아주 화를 내면서 잘 보고 다니라고 말했다.하연은 그때 남준이 자신에게 하는 말인 줄 알고 반박하려다, 남준의 시선이 고나희를 향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고나희는 아무 말 없이 자리를 떠났고, 이후 하연과 남준은 각자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저 아주 사소한 일이었지만, 하연은 고나희를 이렇게 다시 보게 될 줄은 몰랐다. 그것도 그녀의 사망 소식으로.[참, 고나희의 뱃속에 아이도 있었다고 하더라.]하연은 깜짝 놀라며 물었다. “몇 개월이었는데?”[5,6개월쯤 되었을 거야.]하지만
“형님 얼굴도 별로 좋아 보이지 않네요.” 상혁은 대꾸하지 않았다. “그만, 아침부터 무슨 쓸데없는 소리를 해. 어서 앉아라.” 부동건이 꾸짖었다. “어젯밤에 술 마셨어요?” 남준은 대수롭지 않게 앉으며 말했다. “접대하는 자리여서 어쩔 수 없었다.” “남자가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상혁이 처럼 남준이 너도 당연히 그런 자리는 해야 해.” 송혜선은 웃으며 중재했고, 말 하나하나에 의미가 담겨 있었다. 상혁은 집사가 가져온 우유 외에는 아무것도 손대지 않았다. 반면 부남준은 여유롭게 식사를 이어갔다. “형, 들었어요. 고경수의 딸이 사고를 당했다면서요.” “소식 한번 빠르군.” “검사 보고서도 확인했어요. 그 여자아이, 임신까지 하고 있었다면서요. 그런데 아버지가 누군지는 밝혀졌나요?” 이 질문은 부동건의 주의를 끌었다. “아이? 아이의 아버지가 누구냐? 상혁아, 왜 나한테는 이런 얘기는 하지 않은 거냐?” “떳떳한 사이가 아닌 것 같아서 말씀들이지 않았습니다. 여자가 잘못된 길을 걷고, 잘못된 남자를 믿는 일은 흔합니다.” 상혁은 남준을 힐끗 보고 말했다. “본인이 굳이 알리지 않았다는 건, 아버지가 누군지...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겠죠. 그리고 고경수의 집안은 이미 파란 속에 휩싸여 있으니, 괜한 일을 벌이기보다는 조용히 지나가는 게 더 낫다고 생각했습니다.” 남준은 아침을 먹으며 웃었다. “고경수가 DL그룹에서 문제를 일으킨 것을 누군가 알았고, 그걸 감추기 위해서 자기 딸을 이용해 DL그룹 고위 간부에게 연결하게 해줘서 둘 사이에 아이가 만들어졌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냥 떠본 말이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부동건은 남준의 말의 조금씩 흥미를 가지기 시작했다. “계속해 봐라.” “제 말은, 고경수가 자기 딸을 이용해 누구에게든 신세를 졌을지도 모른다는 겁니다.” 상혁이 갑자기 미소를 지으며 모두 그를 바라보았다. 상혁의 하얀 손가락 관절이 탁자를 가볍게 두드리며, 무심한 어조로
“지금 정규인은 어디에 있나?” “제가 확인한 바로는, 아직 동남아에 있습니다.” 상혁은 외투를 집어 들고 일어섰다. “현장에 가보자.” 나가기 전에 상혁은 다시 침실로 발길을 돌렸다. 하연은 그네 의자에 앉아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는 뒤에서 하연의 긴 머리를 정리해주며 말했다. “DL그룹 내부에 문제가 생겨서 처리해야 해. 시간이 좀 걸릴 거야. 기다려줄래?” 하연은 상혁의 눈 속에 아직 남아 있는 욕망을 알아차렸다. “기다릴게.” 상혁은 미소를 지으며 빠르게 나갔다. 상혁이 탄 검은 차가 빠르게 출발했고, 멀지 않은 곳에 주차되어 있던 차가 상혁이 떠나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 뒷좌석에 있던 남자는 긴장을 풀며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잘했어.” 옆에 있던 여자는 몸을 떨며 좌석에서 미끄러져 반쯤 무릎을 꿇은 자세로 말했다. “상무님, 정규인의 아내가 진작부터 자기 남편과 고경수의 딸에 대한 불륜 사실을 알고 있었어요. 경찰이 정규인의 아내를 의심하지 않을까요?” 부남준은 그녀를 흘끗 보고 냉소적으로 말했다. “정규인의 아내는 오늘 밤 밖에서 돈 쓰느라 많이 돌아다녔어. 인증과 물증이 다 있지. 이번 사고는 단순한 사고일 뿐이지, 인위적인 것이 아니야.” “황연지.” 남준은 몸을 앞으로 기울여 연지의 턱을 들어 올렸다. “부상혁에게도 그렇게 말해.” 연지는 약간의 공포를 담은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이미 재무 보고서를 받았어요. 아마 저를 의심할지도 몰라요.” “네가 부상혁에게 충성을 다 바치는데, 왜 너를 의심하겠어?” 남준은 흥미로운 듯 그녀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그날 최하연을 다치게 한 건 정말 잘했어.” 그날 그 일은 바로 남준이 직접 지시한 것이었다. 연지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 사람... 이미 저를 의심하고 있어요. 평소라면 제가 그런 행동을 할 리가 없다는 걸 알 거예요. 게다가, 그 사건은 그 사람과 하연에게 아무런 영향도 주지 않았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