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사람이 내 실패를 기대하고 있다는 거 알아요. 하지만 내가 여기까지 온 건 이 얼굴 덕분만은 아니에요.”모연은 눈을 살짝 치켜뜨더니 잘난 척하며 말을 이었다.“실력 없으면 이 바닥에서 못 살아남아요. 그리고 내가 추락한다면 우선 높은 자리에 오른다는 뜻이잖아요? 나한테 신경 쓸 시간에 본인 앞날이나 걱정하는 게 어때요? 듣기로 전에 이사진들과 내기를 했다고 들었는데.”하연은 개의치 않는 듯 눈썹을 치켜 올렸다.“소식 참 빠르네요. 확실히 그런 일이 있긴 하죠.”그 말에 모연은 더 우쭐했다.“헛소문인 줄 알았는데 진짜였다니. 기한도 얼마 안 남았다고 하던데, 보아하니 큰 가망은 없는 것 같던데요? 이러다 최씨 가문 아가씨가 회사에서 쫓겨나는 상황이 벌어지는 거 아니에요?”심지어 입을 막으며 비웃기까지 했다.“그럼 진짜 쪽팔리겠다...”모연의 말에 주위에 있던 사람들까지 맞장구치며 하연을 비웃었다.하지만 하연은 조금도 개의치 않고 오히려 침착한 표정으로 대답했다.“그건 제 일이니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하긴, 우리가 무슨 사이인 것도 아니고. 그래도 최하연 씨 행운을 빌게요, 정말 쫓겨나면 너무 쪽팔리니까.”하연은 일순 눈빛이 어두워졌지만 속으로 절대 소인배의 조롱에 마음이 동하지 말자고 스스로를 위로했다.“임 대표님, 기항그룹 대표님이 오셨습니다.”그때 비서가 낮은 소리로 말하자 모연은 이내 시선을 거두며 물었다.“어디 있어?”모연이 오늘 여기에 온 건 하연이 임성재와 나노기술 로봇 프로젝트가 막바지 단계에 이르렀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이게 만약 완전히 성공하면 수익은 어마어마할 거다.그런데 이때 손써서 그걸 망친다면, 한편으로 하연이 이사진과의 내기에서 질 게 뻔하고, 모연 또한 하연을 쉽게 짓밟을 수 있다.하연이 DS 그룹 이사회에서 쫓겨나는 게 지금 모연이 가장 기대하고 있는 일이다.“임 대표님, 기항그룹 대표님이 저기 계십니다.”모연은 그 말에 발걸음을 재촉하며 임성재 쪽으로 다가가더니 공손하게 인사했
임성재는 하연에게 안으로 들라는 손짓을 하며 공손한 태도를 취했고, 하연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안으로 들어갔다.너무 확연한 차별에 아무리 모연이라 해도 참을 수 없었다. 결국 이런 냉대를 참지 못한 모연은 빠른 걸음으로 임성재의 앞길을 가로막았다.“대표님, 우리 LS 그룹도 성의를 가지고 왔습니다. 저희 그룹과 손잡으신다면 절반의 이윤을 대표님께 드리죠. 그러니 우리한테도 기회를 주지 않으실래요?”절반의 이윤은 결코 적은 돈이 아니다.임성재도 사업가인데, 모연은 그가 이렇게 높은 이윤도 마다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하지만 임성재는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걸음을 멈추더니 차가운 눈빛으로 모연을 훑어보았다.“우리 그룹에 돈이 부족하다고 생각합니까?”그 말이 떨어지는 순간 모연은 좋지 않은 예감이 들어 다급히 해명했다.“대표님, 오해입니다. 저는 그저 성의를 보여드리려고 한 것이지 다른 뜻은 없었습니다.”“하, 협력이요? 죄송하지만 우리 회사는 재벌그룹이 아니지만 B시에서 어느 정도 알아주는 회사입니다. 때문에 파트너를 구할 때 요구가 명확해서요. LS 그룹은 우리가 고려하는 범위가 아닙니다. 그러니 돌아가세요.”모연은 순간 어안이벙벙했다.임성재가 이토록 직접적으로 거절할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으니까. 심지어 조금의 체면도 남겨주지 않고 저를 무안 줬다는 것에 화가 치밀었다.“정말 우리 회사를 포기하는 겁니까? 우리 LS 그룹은 정부와 협력하는 유일한 기업입니다.”임성재는 피식 웃었다.“그게 뭐 어때서요? 그딴 건 상관없습니다. 이봐요, 손님 가시니 모셔다드리세요.”이윽고 모연의 체면은 고려하지도 않은 채 모연에게 결연한 뒷모습만 보여주었다. 그 모습을 본 모연은 화가 나서 발을 동동 굴렀다.그때, 경비원이 다가와 모연을 다그쳤다.“저기요, 저희 난처하게 하지 마시고 얼른 나가주세요.”임모연은 입술을 깨물며 콧방귀를 뀌더니 바로 떠나버렸다.한편, 임성재가 회의실에 들어서자 하연은 참지 못하고 농담조로 말했다.“DS 그룹 때문에 요즘
“무슨 그런 농담을, 저 놀리지 마세요. 우리 얼른 업무 얘기나 합시다.”임성재도 동의하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두 사람은 이내 본론으로 들어갔다.그 시각, 지난번 목걸이 사건 때문에 초안을 다시 그리느라 밤샘 작업을 한 가흔은 겨우 만족스러운 디자인을 뽑아냈다.이윽고 침실로 돌아가 휴식하려고 기지개를 켜며 창밖을 내다보았다.그때, 밖에서 초인종 소리가 들려왔다.가흔은 그 순간 어안이벙벙했다.‘이 시간에 집에 올 사람이 없는데, 아침부터 누구지?’가흔은 서재에서 걸어 나오며 물었다.“누구세요?”하지만 아무런 응답이 돌아오지 않았다.인터폰을 켜고 문밖을 확인해도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이에 가흔이 뒤돌아 떠나려 할 때 또다시 초인종 소리가 울렸다.이번에는 곧바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수도 계량기 체크하러 왔습니다, 문 열어 주세요.”가흔은 아무 생각 없이 문을 열었지만 다음 순간 건장한 남자 몇 명이 안으로 쳐들어와 깜짝 놀랐다.“당신들 누구야? 뭐 하는 짓이야?”그때 한 남자가 사진을 꺼내 들고 사람을 확인하더니 물었다.“당신이 신가흔이야?”가흔은 곧바로 도망치려 했지만 상대방은 마치 가흔의 생각을 꿰뚫어 보기라도 한 듯 한발 빠르게 막아섰다.“도망치려고? 우리 손에 들어오면 도망치지 못해.”“당신들 무슨 짓이야! 오지 마.”“저리 가!”“오지 마!”“...”하지만 다음 순간 건장한 남자 몇 명이 가흔을 잡고 입을 막았다.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가흔은 의식을 잃었다....“임 대표님, 그러면 이번 분기의 신제품은 대표님 회사에 맡기겠습니다. 나중에 우리 세 회사 모두 함께 만납시다. 이번 분기의 매출액이 역대 최고를 찍었으면 좋겠네요.”“걱정하지 마세요. 최 사장님, 그건 시름 푹 놓으셔도 됩니다.”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하연의 핸드폰이 갑자기 울리기 시작했다.“죄송합니다. 전화 좀 받고 올게요.”하연은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걸어갔다.“어, 예나야. 무슨 일이야?”[하연아, 가흔한테 사고가 났
하연은 미안한 듯 말했다.“정말 죄송해요. 갑자기 처리해야 할 일이 생겨 오늘 얘기는 이쯤에서 끝내야 할 것 같아요. 다음에 연락할게요.”하연이 말하면서 곧바로 핸드폰을 꺼내 들고 어디론가 전화하며 떠나자 임성재가 재빨리 쫓아왔다.“지금 많이 급해 보이는데 혹시 무슨 일 있나요? 말씀하면 제가 도울 수도 있잖아요.”“호의는 감사하지만 아직은 필요 없어요.”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하연은 재빨리 안으로 들어가서는 은행에 전화했다. 100억은 크게 문제 될 것 없지만 현금으로 요구하면 달라진다.다행히 하연의 특수한 신분 덕에 은행에서는 흔쾌히 승낙했다. 물론 현금을 마련하는 데만 1시간이 걸렸지만.그 시각, 하성도 똑같은 문자를 받았다.화보 촬영을 하던 하성은 문자를 받자마자 촬영을 전면 중했다.하지만 가흔에게 아무리 전화해도 연락이 닿지 않았다. 그런 하성을 발견한 서명훈이 다급히 물었다.“하성아, 무슨 일이야? 왜 그래?”하성은 외투 하나를 챙기고 촬영 의상도 갈아입지 않은 채로 급히 해결해야 할 일이 있다는 말만 남기고 현장을 떠났다.한편, 하연이 은행에서 현금을 가져오기를 목 빠지게 기다리고 있을 때 상혁이 먼저 찾아왔다.“상혁 오빠, 어떻게 왔어요?”“네가 갑자기 그렇게 큰돈을 쓴다는 건 무슨 일 있다는 뜻이잖아. 정 실장한테 물어서 알아냈어. 납치한 범인이 누구인지 특정됐어?”하연은 고개를 저었다.“몰라요. 가흔은 평소 생활 패턴이 단조롭거든요, 게다가 쉽게 원수 맺는 성격이 아닌데.”“그럼 상대는 어떤 사람이야? 왜 갑자기 납치했대?”하연은 눈살을 찌푸렸다.“잘 몰라요. 하지만 뭐가 됐든 우선 가흔을 구하는 게 우선이에요.”“응, 이따 내가 갈 테니 넌 가지 마.”“안 돼요. 가흔은 제 오랜 친구예요. 그리고 오래전부터 가족이라고 생각했는데 직접 가서 무사한지 확인해야겠어요.”상혁은 하연의 손을 잡으며 간곡히 말했다.“이번 일은 내 말 들어. 집에서 내 소식 기다려. 내가 꼭 무사히 구해줄게.”“하지만...
하연은 이미 전화 건너편 사람이 가흔이라고 확신했다.가흔을 너무 잘 알고 있으니까.이런 상황에서 가흔은 하연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아 아무 말도 안 했을 거다.“원하는 돈은 가흔이 무사해야 줄 수 있어. 한 푼도 빠짐없이. 하지만 만약 가흔한테 무슨 일이 있으면 일전도 없을 줄 알아.”남자는 하연의 말에 설득됐는지 곧바로 동작을 멈추고 일어서서 가흔을 내려다봤다.그러다가 한참 뒤 콧방귀를 뀌었다.“그렇다면 전에 약속한 시간과 장소대로 돈 보내. 조금이라도 늦으면 이 여자 가만두지 않을 거야.”“그래.”하연은 눈을 들어 상혁과 시선을 교환했다.그때 상혁이 ok 사인을 보내왔고, 하연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가흔아, 너인 줄 알아. 무서워하지 마. 내가 꼭 구하러 갈 테니까, 나 믿어줘!”하연의 말에 가흔은 결국 와르르 무너져 눈물을 쏟아냈다.“하연아, 미안해. 폐만 끼쳐서.”“바보, 미안하긴! 너만 무사하면 돼. 기다려.”“돈은 보낼 건데 반드시 사람과 돈 한 곳에서 주고받아야 해.”“하, 지금 나한테 조건 따져? 꿈 깨! 돈 받으면 사람은 자연스럽게 놔줄 거야. 하지만 다른 허튼수작 부리거나 경찰에 신고하면 바로 저승 보내줄 거야. 우리도 이 바닥에서 구를 대로 굴렀어. 아무것도 없는 우리가 뭐 두려울 게 있겠어? 안 그래? 그러니 얌전히 굴어.”말을 마친 남자가 아예 전화를 끊어버리는 바람에 하연은 조급한 목소리로 물었다.“상혁 오빠, 어떡해요?”“위치 추적했어. 현금 놓고 가라는 곳과 500미터가량 떨어져 있어.”“누구인지 확인 가능해요?”상혁이 건네는 핸드폰을 보자 위에는 낯선 남자 얼굴이 떠 있었다.“위치추적에 따라 신상전보를 알아냈는데 이런 사람이 떠. 본 적 있어?”하연은 고개를 저었다.“모르는 사람이에요.”“응, 뒷골목 건달이야. 이 바닥에서 잔인하다고 유명해.”“가흔이 어떻게 그런 사람을 건드렸을까요?”“아직은 모르지. 하지만 이 사람들은 무슨 일이든 할 수 있기에 반드시 빨리 가야
“그 애 삼촌이 누구인지 알아보지도 않고!”남자의 눈 밑에 매서운 빛이 언뜻 지나갔다.두식이 오늘 이런 짓을 벌인 첫 번째 원인은 돈이고, 두 번째 원인은 가흔을 제대로 혼내줘 짓밟히는 기분을 느끼게 해주는 거다.“그리고 그 여자가 먼저 우리 여정한테서 60억을 먼저 뜯어냈어. 난 고작 100억 요구했으니 많지 않아.”두식은 입꼬리를 움직이며 건들거렸다.“저 여자 꽤 괜찮아 보이던데, 이따가... 헤헤헤...”사람들은 바로 눈치챘지만 경거망동하지 않았다.“두식 형님, 이렇게 좋은 건 형님 먼저 즐겨야죠. 저희는 나중에 하면 됩니다.”“그래! 의리 있네. 돈 받으면 사람당 1억씩 줄 테니까 가서 즐겨.”“감사합니다, 두식 형님.”“두식 형님 멋지십니다!”“차 준비했지?”“걱정하지 마세요. 우리가 동서남북으로 흩어지면 그 사람들은 잡고 싶어도 못 잡습니다. 경찰에 신고해도 소용없어요. 우리 차 대포차라서 경찰들도 찾지 못할 겁니다.”“응, 돈 받으면 미련 없이 떠나자고.”“네. 그럼 저 안의 여자는...”두식은 자리에서 일어나 옷깃을 잡아당겼다.“여자는 손 안 대면 가슴이 근질거리고 손 대면 중독되거든. 형이 먼저 맛 한번 볼게.”“...”가흔은 두식의 변태 같은 목소리에 속이 뒤집혀 참지 못하고 헛구역질을 해댔다.만약 이대로 앉아서 모든 걸 운명에 맡기면 무슨 일을 당할 수 있다는 걸 가흔은 알고 있다.때문에 반드시 스스로 도망쳐야 한다.가흔은 먼저 팔을 움직여 보았다. 다행히 남자들은 가흔에 대한 경계심이 무겁지 않아 밧줄을 꽉 묶지 않았다.이에 가흔은 힘껏 몸부림쳤다. 하지만 다음 순간, 문이 열리더니 두식이 변태 같은 표정을 지으며 가흔에게 걸어왔다.심지어 두 눈은 마치 늑대가 사냥감을 노리는 것처럼 집요하고 날카로웠다. 그 순간 가흔은 심장이 철렁해 목소리마저 떨렸다.“뭐 하려는 거야? 오지 마.”가흔은 두식에게서 멀어지려고 점점 뒤로 물러났다.그때 두식은 입꼬리를 비틀며 제 바지 버클을 풀어 헤치더니 점점
그때, 남자의 주머니에 있던 핸드폰이 갑자기 울리기 시작했다.자기가 즐기려던 게 방해를 받자 두식은 언짢은 듯 전화를 무시했다.“젠장!”그러면서 핸드폰을 아예 옆으로 던져버렸다.하지만 전화벨이 끈질기게 울려대자 두식은 결국 욕설을 퍼부었다.그렇다고 별다른 수가 없었기에 잠시 가흔을 놔주고 핸드폰을 손에 쥐더니 전화번호를 확인하고 받았다.“누구야?”이미 조바심이 날 대로 나버린 하성은 상대가 전화를 받자마자 다짜고짜 말했다.“돈 준비됐어, 당신이 말한 곳에 뒀는데, 사람은?”“이렇게 빠르다고?”두식이 언짢은 듯 시간을 확인하며 투덜대자 이미 인내심을 잃은 하성은 순간 욱해 버럭 소리쳤다.“쓸데없는 소리 그만해. 사람 어디 있냐고!”두식은 바닥에 있는 가흔을 흘긋 보더니 콧방귀를 뀌었다.“그렇게 조급할 거 뭐 있어? 돈 받으면 사람은 자연적으로 풀어준다니까.”하성은 주변을 빙빙 돌며 두리번댔지만 아무것도 없어 이를 갈았다.“말한 대로 해야 할 거야. 돈 가지고 당장 사람 풀어. 안 그러면 평생 후회하게 해줄 테니까.”두식은 성큼성큼 밖으로 걸어 나가 두 똘마니를 불렀다.“물건 도착했대. 가서 확인해.”“네, 형님.”“내 부하가 지금 확인하러 갔으니 확인하고 말해.”말을 마친 두식은 전화를 끊고 뒤돌아 가흔을 바라보며 언짢은 기분을 달랬다.방금 끓어오른 욕망이 다시 그를 자극해 속이 타오르는 것만 같았다.“젠장, 왜 이렇게 빨리 오는 거야?”하지만 가흔은 이미 절망하여 바닥에 누운 채로 꿈쩍도 하지 않았다. 속에서부터 모욕감이 피어올라 마치 깊은 나락으로 떨어진 것 같았다.방금 가흔은 전화 건너편에서 하성의 목소리를 들었다.그리고 하성이 현장에 왔다는 걸 알았다.가흔은 하성이 왜 왔는지 모르겠으나 이렇게 형편없는 모습은 절대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그때 한참 동안 고민하던 두식은 이대로 포기하자니 너무 아까워 다시 가흔에게 접근했다. 거의 손에 넣을 수 있는 걸 이대로 포기할 수 없었으니까.“넌 내 손에서 도망칠 생각
가흔은 저한테로 날아오는 몽둥이를 보자 일순 굳어버렸다.그러다 몽둥이가 점점 가까워져 가흔에게 닿으려 할 때 어디서 누군가 튀어나와 두식의 등을 발로 걷어찼다. 그 힘이 어찌나 셌는지 두식은 비틀거리다 결국 중심을 잃고 그대로 바닥에 넘어졌다.“하성 오빠.”가흔은 놀랍고도 믿기지 않는 표정으로 눈앞의 남자를 바라보았다.그때 하성이 빠른 걸음으로 가흔에게 달려와 손을 꼭 잡으며 물었다.“괜찮아?”가흔은 어눌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나마 무사한 가흔을 보자 하성 역시 가슴에 막힌 돌멩이가 내려가는 기분이었다.“무사하다니 다행이야.”하지만 하성은 등 돌린 터라 뒤에서 두식이 살금살금 기어 일어나 몽둥이를 들고 다가오고 있다는 걸 꿈에도 몰랐다.“조심해요!”그때 가흔이 하성을 밀쳐버리고 몸으로 몽둥이를 막았다. 곧이어 퍽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몽둥이에 머리를 맞은 가흔은 눈앞이 캄캄해져 앞으로 넘어졌다.“가흔아!”하성은 가흔의 이름을 불리며 앞으로 달려가 부축하고는 두식을 인정사정없이 발로 걷어찼다.하성은 두식을 놓아줄 생각이 없었기에 온 발에 힘을 싫은 채 쉴 새 없이 두식을 차댔다.결국 고통을 이기지 못한 두식은 비명소리를 꽥꽥 내질렀지만 하성은 듣지 못한 것처럼 온 힘을 다해 두식을 혼냈다.그러다 한참 뒤, 두식은 버티지 못하고 바닥에 쓰러졌고, 하성은 그제야 동작을 멈추었다.“가흔아, 어때?”하성은 걱정 가득한 말투로 물었지만 손에는 점차 따뜻한 온기가 전해졌다. 그리고 손을 확인한 그는 그게 모두 가흔의 머리에서 난 피라는 걸 발견했다.가흔은 눈앞에 뭇별이 돌아다니는 것처럼 정신이 점점 아득했고, 하성의 얼굴도 두개로 보이기 시작했다. 결국 손에 힘이 빠져 툭 늘어지더니 의식이 점멸 되었다.“두식 형님!”소문을 듣고 헐레벌떡 달려온 똘마니들은 눈앞에 벌어진 상황을 보고는 하나둘 하성에게 달려들었다.“감히 우리 두식 형님을 다치게 해? 오늘 네놈을 죽이고 말 거야.”항성은 두 눈은 이미 새빨갛게 충혈된 채로 쉴 새 없이 가
“이 한 잔을 사과의 의미로 받아 주세요.” 다영은 그렇게 말하며 먼저 잔을 비웠다. “아주버님, 형님. 너그러운 마음으로 이해해 주세요.” 여자의 말은 매끄러웠고, 태도 역시 흠잡을 데 없이 완벽했다. 하연은 깊게 생각하지 않고,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대답했다. “괜찮아요. 신경 쓰지 마세요.” 두 사람이 자리를 떠난 후. 다영은 더 이상 긴장을 숨길 수 없었다. ‘끝까지 침착해야 해. 실수는 절대 용납되지 않아.’ 손의 떨림을 억지로 참아내며 조용히 다시 자리에 앉은 후, 급하게 잔을 채우고 나서 단숨에 목구멍으로 넘겼다. 그녀는 자신의 이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고 있었다.그리고, 이 한 걸음을 내디딘 이상, 이제 다시 돌아갈 수 없다는 것도. ...한편, 상혁은 한쪽 팔로 하연을 살며시 감싸 안았다. 하연은 의아한 눈길로 상혁을 올려다보았다. “왜 그래요?” 그러자, 상혁은 하연의 귀에 입을 가까이 대고 낮은 목소리로 무언가를 속삭였다. 그 순간, 하연의 얼굴이 단숨에 굳어졌다. “정말이에요?” 상혁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자연스럽게 몸을 움직여 여자의 시선을 가리며,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하연의 잔과 자신의 잔을 교체했다. “괜찮아. 내가 있잖아.” 그 한마디에, 하연은 비로소 안도한 듯 숨을 고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두 사람은 이미 어디선가 강렬한 시선이 자신들을 향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둘은 자연스럽게 눈빛을 교환하며 평온한 표정을 유지했다. ...다영은 정신을 가다듬고, 조용히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마침내, 자신의 두 눈으로 목격했다. 즉, 하연이 아무런 의심 없이 잔을 들어, 그 안의 음료를 마시는 순간을. 그 순간, 다영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됐다...!’ 이제, 하연의 뱃속 아이는 절대 살아남을 수 없을 것이니까. ‘길어야 3일... 그 안에 반드시 아이를 잃게 될 거야.’ ‘하지만
“그러고 보니, 연지 씨가 부상혁 대표 곁에서 오랫동안 일하면서 사실상 부 대표의 오른팔 역할을 했다던데... 그런데 지금은 부남준 상무를 위해 일하고 있네.”“내가 좀 궁금해서 그러는데, 어떻게 그렇게 부씨 가문의 두 형제 사이를 능숙하게 오갈 수 있는 거지?” 세븐이 입을 열자, 연지는 본능적으로 미간을 좁혔다. 그 말투와 어조가 거슬려 저도 모르게 얼굴에 불쾌한 기색이 떠올랐다. “부상혁 대표는 원래 이런 말투로 말하지 않아.” “그리고 쓸데없는 일에는 관심 끄시지.” 그리고 이어서 단호하게 한마디를 덧붙였다. “일이나 제대로 신경 쓰는 게 좋을 거야. 괜히 약점 보였다가 후회하지 말고.”그러나 세븐은 개의치 않는 듯 옅은 미소를 지었다. “연지 씨, 정말 부상혁 대표에 대해 꽤 잘 아는 것 같단 말이야?” “그건 당신이 궁금해할 필요 없고.” 연지는 냉랭하게 받아쳤다. 오늘 정말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면, 세븐은커녕 이 공간에 발 들이는 것조차 끔찍했을 것이다.“그리고 부남준 상무님이 하신 말씀 잊지 마. 본인이 할 일이나 제대로 해.” 세븐은 의미심장하게 눈썹을 살짝 올렸을 뿐,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연지는 손목시계를 올려다보며 시간을 확인했다. “곧 예식이 시작돼. 모든 건 계획대로 진행하면 돼.” “걱정 마. 발목 잡을 일은 없을 테니까.” 그 대답은 나쁘지 않았다. “차 안에서 얌전히 있어. 내 연락 기다려.” 마지막으로 단단히 일러둔 후, 연지는 안전벨트를 풀고 차에서 내렸다. 호텔 안. 비록 약혼식이지만, 최씨 가문과 부씨 가문 이들 모두 이를 굉장히 중시했다. 사소한 부분까지 허투루 하는 법이 없었다. 로비의 장식만 봐도, 백 명이 넘는 직원들이 작년부터 준비해 온 결과물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홀 중앙에는 은하수처럼 쏟아지는 샹들리에가 빛을 발하고 있었고, 대리석 바닥에 비친 금빛 패턴이 어우러져 환상적인 장관을 이루었다. 하객들은 이미 자리를
“네 아버지를 구할 수 있을지 없을지는, 네가 얼마나 잘하느냐에 달려 있어.” 다영은 원래 조금 망설였지만, 그 말을 듣자 마음속에서 은근히 결심이 섰다. ‘반드시 아버지를 구해야 해. 그 외에는 다른 길이 없어.’ “어머님, 걱정 마세요. 어떻게 해야 할지 알겠습니다.” 송혜선은 다영의 대답에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거면 충분해. 나를 실망시키지 않길 바랄게.” ...대기실 밖. 상혁은 잘 맞춘 정장을 입고 서 있었다. 훤칠한 체격에 비율까지 완벽해, 보는 이로 하여금 감탄을 자아내게 했다. 하성은 장난스럽게 상혁의 어깨 위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자, 한번 말해 봐. 지금 기분이 어때?” 상혁은 거울을 가볍게 흘깃 쳐다보았다. 비록 자신은 전날 밤 한숨도 못 잤지만, 지금은 이상할 정도로 들떠 있었다. 오히려 얼굴엔 생기가 돌았고, 눈빛도 반짝였다. 그는 여유롭게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음, 좋아.” “이렇게 오랜 시간 기다렸는데, 고작 ‘좋아’ 한마디? 너무 성의 없는 거 아니야?” 하성은 못마땅한 듯 고개를 저었지만, 이내 진지한 얼굴로 덧붙였다. “어쨌든, 우리 하연이한테 잘해. 만약 조금이라도 속상하게 하면, 우리 집안에서 널 가만 안 둘 거야.” 상혁은 가볍게 주먹을 쥐어 친구의 가슴팍을 툭 쳤다. “그 말 몇 번이나 들었는지 몰라. 이제 외울 지경이라고.” 그러다 갑자기 진지한 눈빛으로 말했다. “걱정 마. 그런 일은 없을 거니까.” 하성은 만족스럽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았어, 그럼 됐다.” ...대기실 문이 살짝 열려 있었고, 서여은과 정예나는 상혁을 보자마자 서로 눈을 마주쳤다. 그리고는 아무 말 없이 조용히 물러나, 둘만의 시간을 남겨 주었다. 하연은 거울 앞에 앉아 조심스럽게 눈썹을 그리며 메이크업을 손보고 있었다.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자신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
“진숙아, 이게 도대체 무슨 상황이니? 이제 아무나 이런 자리에 낄 수 있는 거야?”서해정은 앞을 손으로 휘저으며, 노골적으로 불쾌함을 드러냈다.“누군가 했더니. 요즘은 첩들도 이런 곳을 이렇게 당당하게 오나 보네?”그 말이 떨어지자, 주변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소리 없이 속삭이는 중에도, 누구나 비웃고 있다는 사실이 명백했다.송혜선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굳어졌다.그러나 기어코 분노를 삼켰다.‘이 여자, 서해정...’조진숙의 절친이자, 상류층 사모 모임에서도 영향력이 큰 인물.그리고 서해정의 시댁을 건드렸다간 큰일 나는 상대였다.송혜선은 감히 덤빌 수 없었다.서해정은 코웃음을 치며, 조진숙의 손에 들린 붉은 봉투를 단숨에 낚아챈 후, 아무렇지도 않게 송혜선의 품에 던져버렸다.“우리도 선물을 받을 때, 가리는 건 가려야지. 네 손에서 나온 건, 왠지 더러워서 받기가 싫네?”“당신...!”송혜선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분노가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더는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그녀는 손으로 배를 감싸며 한 걸음 물러났다.그러자 서해정은 일부러 한 발짝 뒤로 물러나며 의도적으로 놀란 표정을 지었다.“어머, 뭐야. 설마 지금 나한테 시비 걸려고? 이런 짓 나한테는 안 통해.”송혜선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하지만 입술을 깨물며 억지로 분노를 삼켰다.“서 여사님, 아무리 그래도 제게 어느 정도 예의는 좀 지켜 주시죠.”그러나 서해정은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조진숙의 팔짱을 끼고 돌아섰다.“진숙아, 우리 가자. 오늘은 상혁이의 중요한 날인데, 괜히 재수 없게 만들 필요 없잖아.”두 사람은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조진숙의 눈에는 어딘가 복잡한 감정이 스쳤다.‘이렇게까지 망신을 줘도 괜찮을까...?’‘만약 이대로 가버린다면, 송혜선이 부동건에게 이를 고하면 오히려 내가 나쁜 사람처럼 보일 것 같은데...’친구의 망설임을 읽은 듯, 서해정이 조용히 속삭였다.“그 인간도 네 체면은 안중에도 없이 저 여자를 여기에 데리고
호텔 로비에는 이미 많은 하객들이 모여 축하 인사를 건네고 있었다.분위기는 화기애애했고,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그러나 그때, 송혜선이 부동건의 팔짱을 끼고 등장하자, 순간적으로 홀 전체가 술렁였다.“저거... 부 회장의 정부 아니야? 어떻게 저 여자가 여기가 어디라고 저렇게 당당히 나타난 거지?”누군가 작은 목소리로 수군거리자, 그 말이 그대로 서해정의 귀에 들어왔다. 그리고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서해정은 코웃음을 치며 가시 돋힌 말을 내뱉었다.“이런 자리에까지 기어들어올 정도로 정말 뻔뻔하네. 부동건도 정말 갈수록 가관이야.”조진숙과 오랜 친분을 쌓아온 찬구인 서해정은 부동건의 이런 행동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몰랐어?”옆에 있던 하객 하나가 서해정의 소매를 살짝 잡으며 조용히 속삭였다.“부 회장이 이번에 송혜선을 정식 부인으로 올릴 생각이라던데?”서해정의 눈이 휘둥그레졌다.“뭐라고? 진심이야?”“처음엔 그냥 뜬소문인 줄 알았는데, 오늘 보니까 꽤 가능성이 있어 보여.”서해정은 입술을 삐죽이며 불쾌함을 감추지 못했다.‘우리 진숙이 불쌍해서 어쩌나...’이어서 송혜선을 향한 시선이 더욱 싸늘해졌다.“결국 첩은 첩일 뿐이야. 설령 정식 부인이 된다고 해도, 그 꼬리표는 절대 떼지 못할걸?”...사실, 부동건은 애초에 송혜선을 이 자리에 데려올 생각이 없었다.그러나 출발 직전, 그녀가 다가와 어리광을 부렸다.그 순간부터, 부동건의 얼굴에는 미묘한 불쾌감이 감돌았다.“오늘은 상혁이의 약혼식이야. 네가 따라올 이유가 없잖아.”그러나 송혜선은 환하게 웃으며 태연하게 말했다.“상혁이의 경사스러운 날인데, 당연히 축하하러 가야죠. 저도 기분 좋은 일에 함께하고 싶어요.”부동건은 눈살을 찌푸렸다.“네 상태가 점점 무거워지고 있어. 집에서 푹 쉬어야 할 때야. 괜히 사람들 많은 곳에서 불편하게 굴지 마.”하지만 그녀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걱정 마세요, 회장님. 다영이가 저랑 같이 있을 거예요. 문제될 거 없어
‘정말... 부 대표님을 대신할 수 있을까?’연지는 눈에 의심과 불안이 섞인 채 남준을 바라봤다.“상무님, 대체 무슨 일을 꾸미고 계신 겁니까?”여자의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남준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그 웃음은 마치 어두운 밤하늘을 가로지르는 불길한 유성처럼 섬뜩했다.그 순간, 연지의 등줄기를 싸늘한 한기가 훑고 지나갔다.조명이 비친 남자의 눈동자는 깊이를 알 수 없는 어둠 속 블랙홀처럼 빨아들일 듯했다.남준은 천천히 몸을 돌려, 테이블 위에 놓인 술병을 집어 들었다. 유려한 손길로 술을 술잔에 가득 따라낸 후, 한 잔을 연지 앞으로 내밀었다.“내일이 무슨 날인지는 알지?”‘내일?’연지는 본능적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잠시 생각하더니, 곧 깨달았다.“내일은 약혼식... 부 대표님과 하연 씨의 약혼식 날입니다.”남준은 손목을 살짝 돌리며, 술잔 속 액체를 천천히 흔들었다.술이 잔 속에서 부드럽게 회전했다.그는 반쯤 눈을 가늘게 뜨며, 입가에 옅은 미소를 머금었다.모든 것이 남준의 계획대로 진행되고 있다는 듯이.“오래 기다렸지. 드디어 그날이 왔군.”연지는 흐름을 감지하며 조심스레 물었다.“설마... 상무님, 약혼식을 망치시려는 건가요?”남준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가볍게 술잔을 기울이며 잔을 비웠다.남자의 침묵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너무도 명확했다.연지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만약 이 약혼식이 깨진다면... 나도 손해 볼 건 없지.’남준은 조용히 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최씨 가문과 부씨 가문의 결합은 단순한 약혼이 아니다. 이 약혼식에는 양가의 주요 인물들이 총출동해. 사람이 많다는 건, 우리에게 기회가 많다는 뜻이겠지.”연지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대신 조용히 입을 열었다.“제가 무엇을 하면 됩니까?”남준은 손에 들고 있던 술잔을 가볍게 던졌다. 유리가 바닥에 부딪히며,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산산조각이 났다.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녀와 시선을 맞추었다.
눈앞의 남자는 상혁과 너무도 닮아 있었다. 거의 판박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닮은 눈매, 흡사한 이목구비가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며 얼굴에 자리하고 있었다.순간적으로 하연은 착각할 뻔했다.‘세상에 이렇게까지 닮은 사람이 있을 수가 있나?’그때, 남자의 시선이 하연에게 닿았다. 그리고 눈빛에는 짧은 순간 놀라움과 흥미가 스쳤고, 곧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장난기 어린 미소를 지었다.“이렇게 예쁜 분이 밤에 혼자 노시는 건가요? 연락처라도 하나 주고 가는 게 어때요?”이 남자는 상혁과 외모만 닮았을 뿐, 막상 입을 여는 순간 그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단순한 생김새를 넘어, 풍기는 분위기 자체가 완전히 달랐다.그 차이는 너무도 확연했다.“죄송하지만, 관심 없어요.”하연은 단호하게 잘라 말했다. 단 한 치의 여지도 남기지 않았다.남자는 눈썹을 살짝 올렸지만, 전혀 불쾌한 기색 없이 태연하게 지갑에서 금빛 명함을 꺼내 그녀의 손에 쥐어주었다.“그럼 그냥 친구로라도. 이 정도도 안되나요?”고급스러운 금박이 감도는 종이 위에 큼직하게 적힌 영문 이름.[세븐]하연은 그 명함을 받지 않았다. 그 대신 자연스럽게 머리를 쓸어 넘겼고, 그 순간 그녀의 약지에 빛나는 다이아몬드 반지가 선명하게 드러났다.“미안하지만, 안 돼요.”남자의 반응을 기다릴 것도 없이, 하연은 가볍게 몸을 틀어 걸음을 옮겼다.남자는 하연이 멀어지는 모습을 흥미롭게 지켜보며, 여유롭게 입꼬리를 올렸다....VIP룸 안.남준은 가죽 소파에 느긋하게 몸을 기댄 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연기가 폐 깊숙이 들어갔다가 천천히 뿜어져 나오는 동안, 눈빛은 어딘지 모르게 공허했다.그때, 문이 열리며 황연지가 들어왔다.그녀는 성큼 다가와 공손하게 인사했다.“오셨습니까?”남준은 담배를 비벼 끄고, 재떨이에 던졌다.“왔군.”연지는 조심스럽게 물었다.“상무님, 절 찾으셨다면서요.”남준은 얕게 웃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새해를 맞아 너한테 특별한 선물을 하나 주
하연은 파티 장소를 한 고급 프라이빗 클럽으로 정했다. 회원제로 운영되는 곳이라,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은 재력가나 사회적으로 영향력 있는 인물들이 대부분이었다.밤이 깊어지자, 화려한 조명이 반짝이는 공간에서 단순한 싱글파티라기보다는 절친들끼리의 조촐한 모임 같은 분위기가 형성되었다.고급스러운 좌석에 앉아 몇 잔 가볍게 마시던 중, 하연은 임신 중이라 과일 주스를 마시고 있었다.그때, 예나가 다가와 감탄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이제 너도 결국 사랑의 결실을 맺게 됐구나. 네 상혁 오빠랑 드디어 정식으로 부부가 되다니, 정말 부럽다.”그녀는 술을 한 모금 마신 뒤,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덧붙였다.“반면에 나는 아직도 싱글이야. 이렇게 오랜 시간이 흘렀는데도 여전히 혼자라니, 가끔은 나도 좀 서글프다.”여은은 그 말을 듣고 피식 웃으며 장난스럽게 받아쳤다.“네가 서글픈 게 아니라, 애초에 연애할 마음이 없는 거겠지.”“내가 들었는데, 요즘 너네 가게에 어떤 남자가 매일같이 찾아온다며? 혹시 마음이 좀 움직인 거 아냐?”예나는 당황하며 급히 말을 잘랐다.“그럴 리가! 그냥 친한 친구일 뿐이야. 너희가 생각하는 그런 사이가 절대 아니야.”여은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바라보며 키득거렸다.“진짜? 근데 왜 이렇게 부정하는데?”예나는 반박하려다 결국 한숨을 쉬며 말했다.“그 애 나보다 어리잖아. 그리고... 나 연하남이 별로야.”절친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하연은 흥미가 동했다.‘뭔가 재미있는 얘기가 나올 것 같은데?’“연하남? 이거 뭔가 숨겨진 이야기 있는 거 아니야?”여은은 재빠르게 하연에게 몸을 기울이며 속삭였다.“너 F국에 있어서 몰랐지? 이 둘, B시에서 꽤 핫했어.”그리고는 짧게 요점을 정리해서 들려주었다.“03년생 남자야. 올해 딱 스물두 살! 나이에 비해 성숙하더라구. 우리 예나, 아주 귀여운 연하남한테 꽂혔나 봐.”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예나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졌다.“헛소리하지 마!”하지만 그 순간 그녀의 눈빛에
다영은 온몸이 떨렸다. 본능적으로 고개를 저으며 간절하게 답했다.“정말 아무것도 듣지 않았어요...”“정말이요?”남준의 목소리가 한층 낮아졌다.다영은 당장이라도 눈물이 터질 듯했지만, 입술을 꽉 악물고 끝까지 버텼다.“정말이에요.”남준은 갑자기 미소를 지었다. 아까의 위압적인 분위기가 사라지며, 부드러운 표정을 지었다.그리고는 큰 손으로 여자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으며, 마치 겁에 질린 새끼 고양이를 달래듯 말했다.“긴장할 필요 없어요. 그냥 가볍게 물어본 거예요.”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영은 몸은 여전히 뻣뻣하게 긴장한 채로 있었다.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어 남준을 살폈다.남자가 예전과 다를 바 없이 평온한 얼굴을 하고 있자, 그녀는 간신히 한숨을 내쉬며 가슴을 쓸어내렸다.‘큰일 날 뻔했어...’“그리고 남준 씨, 원래라면 설날연휴에는 나랑 같이 어머님께 인사드리러 가야 하는데...”그러자 남준은 흔쾌히 수락했다.“네... 당연히 그래야죠. 우리는 곧 부부가 될 사이잖아요. 원래 부부는 한몸이잖아요.”남준은 자연스럽게 말하며 그녀를 바라봤다.다영이 순간 당황했지만, 이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남준의 대답에 다영은 순간 놀란 듯 그를 다시 바라봤다.“남준 씨... 아직도 저랑 결혼할 생각이세요?”남준은 그녀를 당연하다는 듯 품에 끌어안았다.그리고는 여자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나지막이 말했다.“당연하죠. 제가 당신을 두고 다른 사람을 선택할 것 같아요?”그 확고한 대답에 정다영은 가슴이 벅차올랐다.“난 그냥...”“그냥 뭐요?”남준이 여자의 말을 끊었다.“혹시 파혼이라도 할까 봐요?”“네.”다영은 작게 하고 끄덕였다.그러자 남준은 단호하게 말했다.“그럴 일 없어요.”그 말에 다영의 눈가가 붉어졌고, 그녀는 본능적으로 남자의 품에 파고들었다.그리고 남준을 꼭 끌어안으며 나지막이 속삭였다.“역시... 남준 씨는 나를 실망시키지 않아요.”남준은 그녀를 내려다보며 부드럽게 웃었다.남자의 손이 다영의 귀 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