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흔은 저한테로 날아오는 몽둥이를 보자 일순 굳어버렸다.그러다 몽둥이가 점점 가까워져 가흔에게 닿으려 할 때 어디서 누군가 튀어나와 두식의 등을 발로 걷어찼다. 그 힘이 어찌나 셌는지 두식은 비틀거리다 결국 중심을 잃고 그대로 바닥에 넘어졌다.“하성 오빠.”가흔은 놀랍고도 믿기지 않는 표정으로 눈앞의 남자를 바라보았다.그때 하성이 빠른 걸음으로 가흔에게 달려와 손을 꼭 잡으며 물었다.“괜찮아?”가흔은 어눌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나마 무사한 가흔을 보자 하성 역시 가슴에 막힌 돌멩이가 내려가는 기분이었다.“무사하다니 다행이야.”하지만 하성은 등 돌린 터라 뒤에서 두식이 살금살금 기어 일어나 몽둥이를 들고 다가오고 있다는 걸 꿈에도 몰랐다.“조심해요!”그때 가흔이 하성을 밀쳐버리고 몸으로 몽둥이를 막았다. 곧이어 퍽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몽둥이에 머리를 맞은 가흔은 눈앞이 캄캄해져 앞으로 넘어졌다.“가흔아!”하성은 가흔의 이름을 불리며 앞으로 달려가 부축하고는 두식을 인정사정없이 발로 걷어찼다.하성은 두식을 놓아줄 생각이 없었기에 온 발에 힘을 싫은 채 쉴 새 없이 두식을 차댔다.결국 고통을 이기지 못한 두식은 비명소리를 꽥꽥 내질렀지만 하성은 듣지 못한 것처럼 온 힘을 다해 두식을 혼냈다.그러다 한참 뒤, 두식은 버티지 못하고 바닥에 쓰러졌고, 하성은 그제야 동작을 멈추었다.“가흔아, 어때?”하성은 걱정 가득한 말투로 물었지만 손에는 점차 따뜻한 온기가 전해졌다. 그리고 손을 확인한 그는 그게 모두 가흔의 머리에서 난 피라는 걸 발견했다.가흔은 눈앞에 뭇별이 돌아다니는 것처럼 정신이 점점 아득했고, 하성의 얼굴도 두개로 보이기 시작했다. 결국 손에 힘이 빠져 툭 늘어지더니 의식이 점멸 되었다.“두식 형님!”소문을 듣고 헐레벌떡 달려온 똘마니들은 눈앞에 벌어진 상황을 보고는 하나둘 하성에게 달려들었다.“감히 우리 두식 형님을 다치게 해? 오늘 네놈을 죽이고 말 거야.”항성은 두 눈은 이미 새빨갛게 충혈된 채로 쉴 새 없이 가
병원에 도착한 가흔은 얼마 지나지 않아 깨어났다.가흔 머리의 상처는 꽤 심각했다. 뇌진탕인 데다 상처가 찢겨 몇 바늘 꿰매기까지 했다.하연이 문을 열고 병실로 들어서더니 걱정스럽게 물었다.“가흔아. 어때? 괜찮아?”가흔은 입을 꾹 다물며 미안한 기색을 드러냈다.“미안해, 너한테 폐 끼쳤네.”평소 가흔이 이토록 내외하고 소외감 느껴지게 구는 걸 제일 싫어하는 하연은 얼른 가흔의 손을 잡았다.“너 나한테까지 그럴 거야?”가흔은 그제야 표정을 가다듬고 눈을 내리깔았다. 가흔도 하연이 저를 진심으로 대하고 항상 자매 같은 친구로 대한다는 걸 알고 있다.가흔 역시 그렇고. 하지만 출생과 신분 대문에 가흔은 늘 민감하다.그도 그럴 게, 하연과의 차이가 어마어마하니까.“하연아, 저기 그... 괜찮아?”가흔이 말한 사람은 다름 아닌 하성이다. 그동안 가흔이 항상 마음에 담고 있는 사람은 하성 말고는 없었으니.“걱정하지 마. 오빠는 튼튼해서 아무 문제 없어. 그런데... 그렇게 걱정되면 왜 병실로 들이지 않아? 하성 오빠가 널 얼마나 걱정한 줄 알아?”가흔은 말없이 이불을 꽉 움켜쥐더니 한참 동안 머뭇거리다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난 괜찮아, 돌아가라고 해.”하연은 여전히 고집부리는 가흔을 어쩔 수 없어 마지못해 동의햇다.“그래, 오늘 밤은 예나 불러 너 돌봐주라고 할 테니 그동암 몸조리 잘해. 그리고 널 이렇게 만든 사람은 이미 잡아들였어, 나머지는 나한테 맡겨.”“그래... 혹시 누가 시켰는지는 알아냈어?”“응, 그런데 이 일은 상관하지 마. 지금은 네 건강이 우선이니까.”“그래.”가흔의 목소리는 아까보다 조금 홀가분해진 듯했다. 이윽고 하연과 눈을 마주치더니 싱긋 웃으며 말했다.“고마워, 하연아.”“됐어. 나한테 예의 차릴 필요 없어.”그 뒤로도 한참 동안 수다를 떤 뒤 하연은 병실을 나섰다. 하연이 나와 문을 닫기 바쁘게 하성이 달려와 하연의 팔을 잡아당겼다.“가흔은 어때? 나 들어가도 돼?”하연은 고개를 돌려 가흔의 병
하성은 설명을 길게 늘어놓았다.“하연아, 그렇게 위험한 상황에서 여자애가 용기를 내어 나 대신 공격을 막아줬는데, 신경 쓰는 건 당연한 거 아니야?”“아니, 가흔이 왜 오빠를 구해줬는지 모르겠어요?”그 말에 하성은 더 어리둥절해졌다. 그 표정을 본 하연은 한숨을 푹 내쉬며 부드러운 말투로 물었다.“그럼 오늘 왜 그곳에 나타났어요?”“문자를 받았거든. 가흔이 위험하다고 해서 문자에서 요구한 대로 현금 인출해서 구하러 간 거였어.”“그럼 그때 기분은 어땠어요?”“기분? 하연아, 그런 긴급상황에서 기분이 어땠겠어. 당연히 속이 타들어 가고 급하지.”하성은 그제야 그때 자신이 급박했던 것 외에 머릿속에 오로지 가흔에 대한 걱정뿐이었다는 게 떠 올랐다.하성은 가흔이 다칠까 봐 걱정했고, 가장 먼저 가흔이 무사한 모습을 보고 싶었다.게다가 소식을 접한 순간 전에는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불안함과 당황함을 느꼈다.“오빠, 그동안 가흔도 우리랑 오랫동안 함께 있었잖아요. 그런데 가흔한테 정말 특별한 감정을 못 느꼈어요?”하성은 입을 꾹 다물었다. 그 순간 머릿속에는 가흔과 함께했던 매 순간이 떠 올랐다. 게다가 무엇 때문인지 분명 아주 오래전 일들인데 머릿속에 너무 또렷하게 남아 있었다.“오빠, 설마 가흔이 오빠 좋아하는 거 모르는 건 아니죠?”하연의 말은 마치 나른 하늘의 날벼락처럼 하성에게 충격을 안겨주었다.충격적인 소식에 하성은 몸이 뻣뻣하게 굳어 한참이 지나서야 정신을 차린 것처럼 되물었다.“뭐라고? 가흔이 나를 좋아한다고?”그 말을 하는 순간 하성은 왠지 심장이 두근거렸고 저도 모르게 기쁘고 설렜다.하연은 하성의 반응에 답답한 듯 한숨을 푹 내쉬었다.사실 하연은 가흔 대신 답변을 받아내고 싶었다. 만약 하성이 정말 가흔에게 마음이 있다면 하연은 제대로 두 사람을 이어줄 생각이고, 반대로 마음이 없다면 가흔을 설득해 자기 오빠를 잊고 더 좋은 남자를 만나게 할 생각이었으니.“오빠, 제대로 답변해 줘요. 대체 가흔한테 마음이 있는
“네?”상혁은 고개를 돌려 하연을 바라보더니 사뭇 진지한 얼굴로 분석했다.“가흔이 그렇게 오랫동안 네 오빠를 좋아하면서 왜 고백하지 않은 줄 알아?”하연은 흠칫 놀라 고개를 마구 저었다.사실 하연도 그 부분이 늘 이상했다. 하연이 아는 가흔은 목표가 명확하고 한 가지 일을 확정하면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다.게다가 주얼리 디자인을 좋아해서 열심히 연구한 끝에 이제는 세계 패션계에서 유명한 주얼리 디자이너의 위치까지 올라왔고, 혼자 자기만의 브랜드도 만들었다.이것만 봐도 가흔이 얼마나 우수한지, 또 얼마나 집요한지 알 수 있고, 한 가지 일을 확정 지으면 끝까지 견지하는 사람이라는 걸 알 수 있다.가흔이 하성에 대한 감정 역시 그렇다.그동안 일편단심 하성만 좋아하고 한 번도 바뀐 적이 없다.하지만 남녀 사이의 감정을 아는 건 당사자뿐이다.“이유가 뭐예요? 상혁 오빠는 알아요?”상혁은 하연의 손을 잡고 나란히 밖으로 나가더니 천천히 설명했다.“가흔을 아는 사람이라면 모두 가흔이 독립적이고 사업심이 강하고, 능력 있고 재능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할 거야. 하지만 사실은 아주 섬세하고 예민한 사람이야, 우리가 아는 것처럼 강하지도, 자신감 넘치지도 않아.”그러고 보니 하연은 저도 가흔의 생각을 읽지 못할 때가 많았다는 걸 느꼈다.‘그동안 절친한 친구라고 생각했는데, 정말 그렇게 말할 자격 없네.’“상혁 오빠, 오빠는 어떻게 발견했어요? 가흔은 절대 우리 앞에서 말한 적 없는데.”상혁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다가 하연이 조금 실망하자 이내 위로했다.“감정은 당사자들끼리 해결해야 하는 거야. 우리는 더 중요한 일이 남아 있어.”그 말에 상혁과 눈빛을 교환한 하연은 곧바로 이해했다는 듯 사뭇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확실히 그 인간 말종 쓰레기들 좀 만나 봐야겠어요.”상혁은 하연을 데리고 곧장 교외로 향했다. 그러다가 마지막 목적지인 FL 그룹 소유의 폐기 창고에 도착했다.이 창고의 위치는 매우 은밀해 아는 거의 사람이 없고 오가는 사람도 없어
하연은 일순 눈빛이 어두워졌다. 이 일의 자초지종은 하연도 진작 알아봤다. 하지만 고작 60억을 배상하라고 한 것도 이미 많이 봐준 처사다.그런데 그 일을 계기로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이야.“안에 있는 강두식은 안여정의 외삼촌이야. 저 사람 말로는 안여정이 너무 억울한 일을 당해 이런 계획을 세웠다더라고.”하연은 그 말에 헛웃음이 나왔다.‘이런 상황이었어?’“그럼 이 일 안여정과는 상관있어요?”하연의 말이 떨어지자 상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핸드폰을 꺼내 하연에게 건넸다.그리고 영상 하나를 재생했다.영상 속 여정은 눈물범벅이 되어 흐느끼며 말하고 있었다.“최 사장님, 이번 일은 저와 상관없어요. 저는 모르는 일이라고요. 그냥 외삼촌한테 하소연 좀 한 건데, 삼촌이 그런 짓을 벌일 줄은 생각지도 못했어요.”하연은 더 이상 들어줄 수 없어 그대로 핸드폰을 꺼버렸다.“본인은 아예 깨끗하게 발 빼겠다는 거네?”이번 일이 아무리 여정이 지시한 게 아니라고 해도 절대로 책임을 벗을 수 없다.“정말 네 말 대로 아무 상관 없어야 할 거야. 안 그러면 남에게 납치를 지시하는 건 콩밥 신세를 져야 할 테니까.”하연의 어두운 눈빛으로 핸드폰을 내려놓더니 상혁과 시선을 교환했다.“들어가서 뭐라 하는지 들어봐요.”이윽고 말을 마친 뒤 성큼성큼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강두식은 누군가 들어오자 무척 흥분하는 모습이었다.“나 풀어주러 온 거지? 당신들 이렇게 나를 감금하는 거 불법이야. 그런데 나 풀어주기만 하면 과거 일을 묻어둘 수 있어. 아무 일 없었던 거로 할 수 있다고.”하연은 너무 어이없어 피식 웃었지만 미소가 눈까지 닿지는 않았다. 하연은 한 걸음 한 걸음 두식에게 걸어갔다.“아무 일도 없었던 거로 하자고? 그건 당신한테만 너무 좋은 처사 아닌가?”하연의 목소리는 마치 12월의 서리처럼 뼈를 에는 듯한 고통을 주었다. 심지어 두식은 저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당신 누구야? 뭐 하자는 거야?”하연은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며 두식의
하연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두식은 하연이 곽대철의 이름에 겁먹었다고 생각해 더 보충했다.“왜? 무서워? 무서우면 당장 풀어줘. 늦어서 대철 형님이 오기라도 하면 너희들 제명에 못 죽어.”“풀어달라고? 꿈 깨. 감옥에 처넣으면 모를까.”두식은 그 말에 피식 웃었다.“나를 감옥에 넣는다고? 그럴 능력은 있고? 우리 대철 형님은 비즈니스계와 조폭계에 모두 발 담고 있는 분이셔.”“그래? 그럼 오늘 그 곽대철 형님이 너 구하러 오나 보자고.”하연은 말하면서 핸드폰을 꺼내 들더니 곧바로 곽대철한테 전화했다.그걸 본 두식은 당연히 하연이 허세 부린다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게, 여자인 하연이 조폭계를 주름잡는 거물 곽대철과 알고 지내는 사이라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하지만 웬걸? 연결음은 약 두 번 정도 울리더니 곧바로 곽대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흑흑, 보스. 처음으로 저한테 먼저 연락한 거 아시죠? 내가 이렇게 귀한 경험을 하다니...”하연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볼 일 있어서 전화했어요.”“무슨 일인데요? 보스 명령이라면 뭐든 따를게요.”“혹시 강두식이라고 알아요?”대철은 머릿속으로 한참 동안 이름을 검색하다가 겨우 뭐가 생각난 듯 대답했다.“알죠. 제 부하 중 한 명이에요.”하연은 눈을 들어 두식을 바라봤다. 그 눈빛은 어찌나 날카로운지 두식은 저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이윽고 확신 없는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물었다.“너 정말 대철 형님을 안다고?”두식은 저절로 말하고도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대철 형님이 어떤 인물인데. 조폭계에서 명성을 널리 알린 분인데, 고작 명문가 아가씨가 그런 거물과 알고 지낼 리 없어.’‘분명 나를 겁주는 걸 거야.’“허세 좀 그만 부려. 대철 형님이 어떤 분인데. 네까짓 게 알고 지낸다고?”그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하연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핸드폰을 두식에게 던져주었다. 이윽고 두식이 뭐라 말하기도 전에 대철의 분노 가득한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에서 흘러나왔다.“강두식! 너 이 자식 무
하연이 비웃으며 두식의 손에서 휴대폰을 빼앗아 왔다.“무슨 헛된 꿈을 꾸는 거야? 당신한테는 콩밥 먹게 하는 게 오히려 과분한데?”두식이 두려움에 떨며 말했다.“하연 아가씨는 그럼 제가 어떻게 하길 원하는 건데요?”“이렇게 납치하는 걸 좋아하니 여기서 실컷 머무시는 게 어때? 어차피 외진 곳인데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거야.”아까 여러 번 좌회전과 우회전을 해서 도착한 것을 보아하니 확실히 여기는 평일엔 사람이 다니지 않는 곳이 틀림없다.두식이 갑자기 눈을 번쩍 뜨며 말했다. “하연 씨! 제발 살려줘요! 우리를 여기에 남겨두면 우리는 죽게 될 거예요.”외진 곳에 방치되어 있다간 배고파 죽을 게 뻔하다.“이제야 무서운 줄 아네. 가흔을 납치할 때는 배짱이 아주 두둑한 줄 알았는데?”하연이 상혁을 바라보며 말했다.“상혁 오빠, 제 아이디어 어떤 것 같아요?”상혁은 하연을 사랑스럽게 쳐다보며 싱긋 웃었다.“눈에는 눈, 이에는 이, 아주 좋은 것 같아.”그 말에 하연이 웃음을 터뜨렸다.“저 사람들을 기둥에 묶어, 기억해, 매듭을 지어.”수하는 곧바로 명령에 복종했다.“이제는 당신들의 운명에 달려 있어. 사람이 먹지도 마시지도 않으면 기껏해야 7일까지 버틸 수 있다고 들었는데 당신들이 나를 대신해서 실험 좀 해봐.”하연은 놈들의 겁에 질린 시선을 바라보며 웃음을 점점 거두었다.“이...”“상혁 오빠, 가요.”“응.”상혁은 하연과 함께 나란히 창고를 떠나 차 쪽으로 걸어갔다. 그러고는 차에 오를 때 손을 뻗어 하연의 머리를 막아줬다.차가 움직이자, 소리는 점점 멀어졌고 강두식 등 사람들의 비명소리만 외진 창고에 울려 퍼졌다.“누구 없어요! 살려주세요!”“...”차에 오른 하연은 물티슈로 손가락을 깨끗이 닦았다.“상혁 오빠, 도와줘서 감사해요. 오빠가 아니었으면 이렇게 빨리 이 사람들을 찾을 수 없었을 거예요.”상혁이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를 다듬어 주며 말했다.“나한테 무슨 고맙다는 인사를 다 하는 거야? 너무 내외하는
가흔의 집 안은 이미 청소가 된 상태라 예전의 어수선하던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하연아, 왜 또 이렇게 직접 왔어?”가흔이 머리에 거즈를 둘러싼 채 주방에서 나오며 말했다.“뭐라는 거야, 우리는 친구잖아. 친구 보러 오는 거 당연한 거 아니야?”최하연은 사진 한 묶음을 탁자 위에 던져놓고는 꽃을 꽃병에 꽂으며 말했다.“우리 셋째 오빠가 다 말했지? 너를 납치한 사람들은 내가 다 처리했어. 안여정은 연예 활동을 못하도록 금지해 놨고, 앞으로의 인생은 끝난 셈이야.”하연이 전진 사진 속에는 두식 등 몇몇이 숨이 간들간들한 모습이 담겨 있었다.그걸 본 가흔은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감사 인사를 했다.“하성 오빠가 말해줬어. 고마워, 며칠 동안 신세를 많이 졌어.”‘쯧, 나하고 내외하지 말라니까.’하연은 가흔이 저와 내외하는 걸 무척 싫어한다.“굳이 그렇게 말한다면 나도 묻고 싶은 거 묻는다?”하연은 가흔에게 가까이 다가가 두 검지 끝을 한데 붙이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너랑 하성 오빠, 어떻게 된거야?”가흔의 얼굴은 순간 화끈 달아올랐다.“뭐라는 거야?”“왜, 부끄러워? 너 일 터지기 전에 오빠가 너를 챙겨줬는데, 두 사람 안 이루어진 거야?”가흔은 그 말에 오히려 갈피를 잡지 못했다.“그게 뭘 의미하는데?”하연이 의아해하며 물었다.“정말 안 된 거야? 설마! 그날 병원에 네가 오빠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엄청 기뻐했는데? 상 받을 때도 그렇게까지 기뻐하지 않았어.”가흔이 그 말을 듣고 어리둥절해하며 물었다.“오빠가 내가 오빠를 좋아하는 것을 알고 있단 말이야?”이 말을 듣은 하연은 순간 아차 싶었다. ‘오빠가 티를 안 냈나 보네.’“설마 그동안 하성 오빠가 너한테 고백 안 했어?”가흔이 고개를 저었다.“잘 챙겨주고 잘 돌봐주긴 했어. 하지만... 그런 말은 안 했어.”하연의 표정이 조마조마해졌다.‘망했네.’‘상혁 오빠 말이 딱 들어 맞잖아.’“미안해. 그날 내가 참지 못하고 말해버렸어. 난 네가 더 이상
“이 한 잔을 사과의 의미로 받아 주세요.” 다영은 그렇게 말하며 먼저 잔을 비웠다. “아주버님, 형님. 너그러운 마음으로 이해해 주세요.” 여자의 말은 매끄러웠고, 태도 역시 흠잡을 데 없이 완벽했다. 하연은 깊게 생각하지 않고,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대답했다. “괜찮아요. 신경 쓰지 마세요.” 두 사람이 자리를 떠난 후. 다영은 더 이상 긴장을 숨길 수 없었다. ‘끝까지 침착해야 해. 실수는 절대 용납되지 않아.’ 손의 떨림을 억지로 참아내며 조용히 다시 자리에 앉은 후, 급하게 잔을 채우고 나서 단숨에 목구멍으로 넘겼다. 그녀는 자신의 이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고 있었다.그리고, 이 한 걸음을 내디딘 이상, 이제 다시 돌아갈 수 없다는 것도. ...한편, 상혁은 한쪽 팔로 하연을 살며시 감싸 안았다. 하연은 의아한 눈길로 상혁을 올려다보았다. “왜 그래요?” 그러자, 상혁은 하연의 귀에 입을 가까이 대고 낮은 목소리로 무언가를 속삭였다. 그 순간, 하연의 얼굴이 단숨에 굳어졌다. “정말이에요?” 상혁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자연스럽게 몸을 움직여 여자의 시선을 가리며,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하연의 잔과 자신의 잔을 교체했다. “괜찮아. 내가 있잖아.” 그 한마디에, 하연은 비로소 안도한 듯 숨을 고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두 사람은 이미 어디선가 강렬한 시선이 자신들을 향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둘은 자연스럽게 눈빛을 교환하며 평온한 표정을 유지했다. ...다영은 정신을 가다듬고, 조용히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마침내, 자신의 두 눈으로 목격했다. 즉, 하연이 아무런 의심 없이 잔을 들어, 그 안의 음료를 마시는 순간을. 그 순간, 다영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됐다...!’ 이제, 하연의 뱃속 아이는 절대 살아남을 수 없을 것이니까. ‘길어야 3일... 그 안에 반드시 아이를 잃게 될 거야.’ ‘하지만
“그러고 보니, 연지 씨가 부상혁 대표 곁에서 오랫동안 일하면서 사실상 부 대표의 오른팔 역할을 했다던데... 그런데 지금은 부남준 상무를 위해 일하고 있네.”“내가 좀 궁금해서 그러는데, 어떻게 그렇게 부씨 가문의 두 형제 사이를 능숙하게 오갈 수 있는 거지?” 세븐이 입을 열자, 연지는 본능적으로 미간을 좁혔다. 그 말투와 어조가 거슬려 저도 모르게 얼굴에 불쾌한 기색이 떠올랐다. “부상혁 대표는 원래 이런 말투로 말하지 않아.” “그리고 쓸데없는 일에는 관심 끄시지.” 그리고 이어서 단호하게 한마디를 덧붙였다. “일이나 제대로 신경 쓰는 게 좋을 거야. 괜히 약점 보였다가 후회하지 말고.”그러나 세븐은 개의치 않는 듯 옅은 미소를 지었다. “연지 씨, 정말 부상혁 대표에 대해 꽤 잘 아는 것 같단 말이야?” “그건 당신이 궁금해할 필요 없고.” 연지는 냉랭하게 받아쳤다. 오늘 정말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면, 세븐은커녕 이 공간에 발 들이는 것조차 끔찍했을 것이다.“그리고 부남준 상무님이 하신 말씀 잊지 마. 본인이 할 일이나 제대로 해.” 세븐은 의미심장하게 눈썹을 살짝 올렸을 뿐,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연지는 손목시계를 올려다보며 시간을 확인했다. “곧 예식이 시작돼. 모든 건 계획대로 진행하면 돼.” “걱정 마. 발목 잡을 일은 없을 테니까.” 그 대답은 나쁘지 않았다. “차 안에서 얌전히 있어. 내 연락 기다려.” 마지막으로 단단히 일러둔 후, 연지는 안전벨트를 풀고 차에서 내렸다. 호텔 안. 비록 약혼식이지만, 최씨 가문과 부씨 가문 이들 모두 이를 굉장히 중시했다. 사소한 부분까지 허투루 하는 법이 없었다. 로비의 장식만 봐도, 백 명이 넘는 직원들이 작년부터 준비해 온 결과물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홀 중앙에는 은하수처럼 쏟아지는 샹들리에가 빛을 발하고 있었고, 대리석 바닥에 비친 금빛 패턴이 어우러져 환상적인 장관을 이루었다. 하객들은 이미 자리를
“네 아버지를 구할 수 있을지 없을지는, 네가 얼마나 잘하느냐에 달려 있어.” 다영은 원래 조금 망설였지만, 그 말을 듣자 마음속에서 은근히 결심이 섰다. ‘반드시 아버지를 구해야 해. 그 외에는 다른 길이 없어.’ “어머님, 걱정 마세요. 어떻게 해야 할지 알겠습니다.” 송혜선은 다영의 대답에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거면 충분해. 나를 실망시키지 않길 바랄게.” ...대기실 밖. 상혁은 잘 맞춘 정장을 입고 서 있었다. 훤칠한 체격에 비율까지 완벽해, 보는 이로 하여금 감탄을 자아내게 했다. 하성은 장난스럽게 상혁의 어깨 위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자, 한번 말해 봐. 지금 기분이 어때?” 상혁은 거울을 가볍게 흘깃 쳐다보았다. 비록 자신은 전날 밤 한숨도 못 잤지만, 지금은 이상할 정도로 들떠 있었다. 오히려 얼굴엔 생기가 돌았고, 눈빛도 반짝였다. 그는 여유롭게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음, 좋아.” “이렇게 오랜 시간 기다렸는데, 고작 ‘좋아’ 한마디? 너무 성의 없는 거 아니야?” 하성은 못마땅한 듯 고개를 저었지만, 이내 진지한 얼굴로 덧붙였다. “어쨌든, 우리 하연이한테 잘해. 만약 조금이라도 속상하게 하면, 우리 집안에서 널 가만 안 둘 거야.” 상혁은 가볍게 주먹을 쥐어 친구의 가슴팍을 툭 쳤다. “그 말 몇 번이나 들었는지 몰라. 이제 외울 지경이라고.” 그러다 갑자기 진지한 눈빛으로 말했다. “걱정 마. 그런 일은 없을 거니까.” 하성은 만족스럽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았어, 그럼 됐다.” ...대기실 문이 살짝 열려 있었고, 서여은과 정예나는 상혁을 보자마자 서로 눈을 마주쳤다. 그리고는 아무 말 없이 조용히 물러나, 둘만의 시간을 남겨 주었다. 하연은 거울 앞에 앉아 조심스럽게 눈썹을 그리며 메이크업을 손보고 있었다.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자신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
“진숙아, 이게 도대체 무슨 상황이니? 이제 아무나 이런 자리에 낄 수 있는 거야?”서해정은 앞을 손으로 휘저으며, 노골적으로 불쾌함을 드러냈다.“누군가 했더니. 요즘은 첩들도 이런 곳을 이렇게 당당하게 오나 보네?”그 말이 떨어지자, 주변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소리 없이 속삭이는 중에도, 누구나 비웃고 있다는 사실이 명백했다.송혜선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굳어졌다.그러나 기어코 분노를 삼켰다.‘이 여자, 서해정...’조진숙의 절친이자, 상류층 사모 모임에서도 영향력이 큰 인물.그리고 서해정의 시댁을 건드렸다간 큰일 나는 상대였다.송혜선은 감히 덤빌 수 없었다.서해정은 코웃음을 치며, 조진숙의 손에 들린 붉은 봉투를 단숨에 낚아챈 후, 아무렇지도 않게 송혜선의 품에 던져버렸다.“우리도 선물을 받을 때, 가리는 건 가려야지. 네 손에서 나온 건, 왠지 더러워서 받기가 싫네?”“당신...!”송혜선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분노가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더는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그녀는 손으로 배를 감싸며 한 걸음 물러났다.그러자 서해정은 일부러 한 발짝 뒤로 물러나며 의도적으로 놀란 표정을 지었다.“어머, 뭐야. 설마 지금 나한테 시비 걸려고? 이런 짓 나한테는 안 통해.”송혜선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하지만 입술을 깨물며 억지로 분노를 삼켰다.“서 여사님, 아무리 그래도 제게 어느 정도 예의는 좀 지켜 주시죠.”그러나 서해정은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조진숙의 팔짱을 끼고 돌아섰다.“진숙아, 우리 가자. 오늘은 상혁이의 중요한 날인데, 괜히 재수 없게 만들 필요 없잖아.”두 사람은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조진숙의 눈에는 어딘가 복잡한 감정이 스쳤다.‘이렇게까지 망신을 줘도 괜찮을까...?’‘만약 이대로 가버린다면, 송혜선이 부동건에게 이를 고하면 오히려 내가 나쁜 사람처럼 보일 것 같은데...’친구의 망설임을 읽은 듯, 서해정이 조용히 속삭였다.“그 인간도 네 체면은 안중에도 없이 저 여자를 여기에 데리고
호텔 로비에는 이미 많은 하객들이 모여 축하 인사를 건네고 있었다.분위기는 화기애애했고,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그러나 그때, 송혜선이 부동건의 팔짱을 끼고 등장하자, 순간적으로 홀 전체가 술렁였다.“저거... 부 회장의 정부 아니야? 어떻게 저 여자가 여기가 어디라고 저렇게 당당히 나타난 거지?”누군가 작은 목소리로 수군거리자, 그 말이 그대로 서해정의 귀에 들어왔다. 그리고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서해정은 코웃음을 치며 가시 돋힌 말을 내뱉었다.“이런 자리에까지 기어들어올 정도로 정말 뻔뻔하네. 부동건도 정말 갈수록 가관이야.”조진숙과 오랜 친분을 쌓아온 찬구인 서해정은 부동건의 이런 행동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몰랐어?”옆에 있던 하객 하나가 서해정의 소매를 살짝 잡으며 조용히 속삭였다.“부 회장이 이번에 송혜선을 정식 부인으로 올릴 생각이라던데?”서해정의 눈이 휘둥그레졌다.“뭐라고? 진심이야?”“처음엔 그냥 뜬소문인 줄 알았는데, 오늘 보니까 꽤 가능성이 있어 보여.”서해정은 입술을 삐죽이며 불쾌함을 감추지 못했다.‘우리 진숙이 불쌍해서 어쩌나...’이어서 송혜선을 향한 시선이 더욱 싸늘해졌다.“결국 첩은 첩일 뿐이야. 설령 정식 부인이 된다고 해도, 그 꼬리표는 절대 떼지 못할걸?”...사실, 부동건은 애초에 송혜선을 이 자리에 데려올 생각이 없었다.그러나 출발 직전, 그녀가 다가와 어리광을 부렸다.그 순간부터, 부동건의 얼굴에는 미묘한 불쾌감이 감돌았다.“오늘은 상혁이의 약혼식이야. 네가 따라올 이유가 없잖아.”그러나 송혜선은 환하게 웃으며 태연하게 말했다.“상혁이의 경사스러운 날인데, 당연히 축하하러 가야죠. 저도 기분 좋은 일에 함께하고 싶어요.”부동건은 눈살을 찌푸렸다.“네 상태가 점점 무거워지고 있어. 집에서 푹 쉬어야 할 때야. 괜히 사람들 많은 곳에서 불편하게 굴지 마.”하지만 그녀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걱정 마세요, 회장님. 다영이가 저랑 같이 있을 거예요. 문제될 거 없어
‘정말... 부 대표님을 대신할 수 있을까?’연지는 눈에 의심과 불안이 섞인 채 남준을 바라봤다.“상무님, 대체 무슨 일을 꾸미고 계신 겁니까?”여자의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남준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그 웃음은 마치 어두운 밤하늘을 가로지르는 불길한 유성처럼 섬뜩했다.그 순간, 연지의 등줄기를 싸늘한 한기가 훑고 지나갔다.조명이 비친 남자의 눈동자는 깊이를 알 수 없는 어둠 속 블랙홀처럼 빨아들일 듯했다.남준은 천천히 몸을 돌려, 테이블 위에 놓인 술병을 집어 들었다. 유려한 손길로 술을 술잔에 가득 따라낸 후, 한 잔을 연지 앞으로 내밀었다.“내일이 무슨 날인지는 알지?”‘내일?’연지는 본능적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잠시 생각하더니, 곧 깨달았다.“내일은 약혼식... 부 대표님과 하연 씨의 약혼식 날입니다.”남준은 손목을 살짝 돌리며, 술잔 속 액체를 천천히 흔들었다.술이 잔 속에서 부드럽게 회전했다.그는 반쯤 눈을 가늘게 뜨며, 입가에 옅은 미소를 머금었다.모든 것이 남준의 계획대로 진행되고 있다는 듯이.“오래 기다렸지. 드디어 그날이 왔군.”연지는 흐름을 감지하며 조심스레 물었다.“설마... 상무님, 약혼식을 망치시려는 건가요?”남준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가볍게 술잔을 기울이며 잔을 비웠다.남자의 침묵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너무도 명확했다.연지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만약 이 약혼식이 깨진다면... 나도 손해 볼 건 없지.’남준은 조용히 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최씨 가문과 부씨 가문의 결합은 단순한 약혼이 아니다. 이 약혼식에는 양가의 주요 인물들이 총출동해. 사람이 많다는 건, 우리에게 기회가 많다는 뜻이겠지.”연지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대신 조용히 입을 열었다.“제가 무엇을 하면 됩니까?”남준은 손에 들고 있던 술잔을 가볍게 던졌다. 유리가 바닥에 부딪히며,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산산조각이 났다.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녀와 시선을 맞추었다.
눈앞의 남자는 상혁과 너무도 닮아 있었다. 거의 판박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닮은 눈매, 흡사한 이목구비가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며 얼굴에 자리하고 있었다.순간적으로 하연은 착각할 뻔했다.‘세상에 이렇게까지 닮은 사람이 있을 수가 있나?’그때, 남자의 시선이 하연에게 닿았다. 그리고 눈빛에는 짧은 순간 놀라움과 흥미가 스쳤고, 곧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장난기 어린 미소를 지었다.“이렇게 예쁜 분이 밤에 혼자 노시는 건가요? 연락처라도 하나 주고 가는 게 어때요?”이 남자는 상혁과 외모만 닮았을 뿐, 막상 입을 여는 순간 그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단순한 생김새를 넘어, 풍기는 분위기 자체가 완전히 달랐다.그 차이는 너무도 확연했다.“죄송하지만, 관심 없어요.”하연은 단호하게 잘라 말했다. 단 한 치의 여지도 남기지 않았다.남자는 눈썹을 살짝 올렸지만, 전혀 불쾌한 기색 없이 태연하게 지갑에서 금빛 명함을 꺼내 그녀의 손에 쥐어주었다.“그럼 그냥 친구로라도. 이 정도도 안되나요?”고급스러운 금박이 감도는 종이 위에 큼직하게 적힌 영문 이름.[세븐]하연은 그 명함을 받지 않았다. 그 대신 자연스럽게 머리를 쓸어 넘겼고, 그 순간 그녀의 약지에 빛나는 다이아몬드 반지가 선명하게 드러났다.“미안하지만, 안 돼요.”남자의 반응을 기다릴 것도 없이, 하연은 가볍게 몸을 틀어 걸음을 옮겼다.남자는 하연이 멀어지는 모습을 흥미롭게 지켜보며, 여유롭게 입꼬리를 올렸다....VIP룸 안.남준은 가죽 소파에 느긋하게 몸을 기댄 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연기가 폐 깊숙이 들어갔다가 천천히 뿜어져 나오는 동안, 눈빛은 어딘지 모르게 공허했다.그때, 문이 열리며 황연지가 들어왔다.그녀는 성큼 다가와 공손하게 인사했다.“오셨습니까?”남준은 담배를 비벼 끄고, 재떨이에 던졌다.“왔군.”연지는 조심스럽게 물었다.“상무님, 절 찾으셨다면서요.”남준은 얕게 웃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새해를 맞아 너한테 특별한 선물을 하나 주
하연은 파티 장소를 한 고급 프라이빗 클럽으로 정했다. 회원제로 운영되는 곳이라,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은 재력가나 사회적으로 영향력 있는 인물들이 대부분이었다.밤이 깊어지자, 화려한 조명이 반짝이는 공간에서 단순한 싱글파티라기보다는 절친들끼리의 조촐한 모임 같은 분위기가 형성되었다.고급스러운 좌석에 앉아 몇 잔 가볍게 마시던 중, 하연은 임신 중이라 과일 주스를 마시고 있었다.그때, 예나가 다가와 감탄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이제 너도 결국 사랑의 결실을 맺게 됐구나. 네 상혁 오빠랑 드디어 정식으로 부부가 되다니, 정말 부럽다.”그녀는 술을 한 모금 마신 뒤,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덧붙였다.“반면에 나는 아직도 싱글이야. 이렇게 오랜 시간이 흘렀는데도 여전히 혼자라니, 가끔은 나도 좀 서글프다.”여은은 그 말을 듣고 피식 웃으며 장난스럽게 받아쳤다.“네가 서글픈 게 아니라, 애초에 연애할 마음이 없는 거겠지.”“내가 들었는데, 요즘 너네 가게에 어떤 남자가 매일같이 찾아온다며? 혹시 마음이 좀 움직인 거 아냐?”예나는 당황하며 급히 말을 잘랐다.“그럴 리가! 그냥 친한 친구일 뿐이야. 너희가 생각하는 그런 사이가 절대 아니야.”여은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바라보며 키득거렸다.“진짜? 근데 왜 이렇게 부정하는데?”예나는 반박하려다 결국 한숨을 쉬며 말했다.“그 애 나보다 어리잖아. 그리고... 나 연하남이 별로야.”절친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하연은 흥미가 동했다.‘뭔가 재미있는 얘기가 나올 것 같은데?’“연하남? 이거 뭔가 숨겨진 이야기 있는 거 아니야?”여은은 재빠르게 하연에게 몸을 기울이며 속삭였다.“너 F국에 있어서 몰랐지? 이 둘, B시에서 꽤 핫했어.”그리고는 짧게 요점을 정리해서 들려주었다.“03년생 남자야. 올해 딱 스물두 살! 나이에 비해 성숙하더라구. 우리 예나, 아주 귀여운 연하남한테 꽂혔나 봐.”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예나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졌다.“헛소리하지 마!”하지만 그 순간 그녀의 눈빛에
다영은 온몸이 떨렸다. 본능적으로 고개를 저으며 간절하게 답했다.“정말 아무것도 듣지 않았어요...”“정말이요?”남준의 목소리가 한층 낮아졌다.다영은 당장이라도 눈물이 터질 듯했지만, 입술을 꽉 악물고 끝까지 버텼다.“정말이에요.”남준은 갑자기 미소를 지었다. 아까의 위압적인 분위기가 사라지며, 부드러운 표정을 지었다.그리고는 큰 손으로 여자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으며, 마치 겁에 질린 새끼 고양이를 달래듯 말했다.“긴장할 필요 없어요. 그냥 가볍게 물어본 거예요.”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영은 몸은 여전히 뻣뻣하게 긴장한 채로 있었다.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어 남준을 살폈다.남자가 예전과 다를 바 없이 평온한 얼굴을 하고 있자, 그녀는 간신히 한숨을 내쉬며 가슴을 쓸어내렸다.‘큰일 날 뻔했어...’“그리고 남준 씨, 원래라면 설날연휴에는 나랑 같이 어머님께 인사드리러 가야 하는데...”그러자 남준은 흔쾌히 수락했다.“네... 당연히 그래야죠. 우리는 곧 부부가 될 사이잖아요. 원래 부부는 한몸이잖아요.”남준은 자연스럽게 말하며 그녀를 바라봤다.다영이 순간 당황했지만, 이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남준의 대답에 다영은 순간 놀란 듯 그를 다시 바라봤다.“남준 씨... 아직도 저랑 결혼할 생각이세요?”남준은 그녀를 당연하다는 듯 품에 끌어안았다.그리고는 여자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나지막이 말했다.“당연하죠. 제가 당신을 두고 다른 사람을 선택할 것 같아요?”그 확고한 대답에 정다영은 가슴이 벅차올랐다.“난 그냥...”“그냥 뭐요?”남준이 여자의 말을 끊었다.“혹시 파혼이라도 할까 봐요?”“네.”다영은 작게 하고 끄덕였다.그러자 남준은 단호하게 말했다.“그럴 일 없어요.”그 말에 다영의 눈가가 붉어졌고, 그녀는 본능적으로 남자의 품에 파고들었다.그리고 남준을 꼭 끌어안으며 나지막이 속삭였다.“역시... 남준 씨는 나를 실망시키지 않아요.”남준은 그녀를 내려다보며 부드럽게 웃었다.남자의 손이 다영의 귀 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