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연은 일순 눈빛이 어두워졌다. 이 일의 자초지종은 하연도 진작 알아봤다. 하지만 고작 60억을 배상하라고 한 것도 이미 많이 봐준 처사다.그런데 그 일을 계기로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이야.“안에 있는 강두식은 안여정의 외삼촌이야. 저 사람 말로는 안여정이 너무 억울한 일을 당해 이런 계획을 세웠다더라고.”하연은 그 말에 헛웃음이 나왔다.‘이런 상황이었어?’“그럼 이 일 안여정과는 상관있어요?”하연의 말이 떨어지자 상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핸드폰을 꺼내 하연에게 건넸다.그리고 영상 하나를 재생했다.영상 속 여정은 눈물범벅이 되어 흐느끼며 말하고 있었다.“최 사장님, 이번 일은 저와 상관없어요. 저는 모르는 일이라고요. 그냥 외삼촌한테 하소연 좀 한 건데, 삼촌이 그런 짓을 벌일 줄은 생각지도 못했어요.”하연은 더 이상 들어줄 수 없어 그대로 핸드폰을 꺼버렸다.“본인은 아예 깨끗하게 발 빼겠다는 거네?”이번 일이 아무리 여정이 지시한 게 아니라고 해도 절대로 책임을 벗을 수 없다.“정말 네 말 대로 아무 상관 없어야 할 거야. 안 그러면 남에게 납치를 지시하는 건 콩밥 신세를 져야 할 테니까.”하연의 어두운 눈빛으로 핸드폰을 내려놓더니 상혁과 시선을 교환했다.“들어가서 뭐라 하는지 들어봐요.”이윽고 말을 마친 뒤 성큼성큼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강두식은 누군가 들어오자 무척 흥분하는 모습이었다.“나 풀어주러 온 거지? 당신들 이렇게 나를 감금하는 거 불법이야. 그런데 나 풀어주기만 하면 과거 일을 묻어둘 수 있어. 아무 일 없었던 거로 할 수 있다고.”하연은 너무 어이없어 피식 웃었지만 미소가 눈까지 닿지는 않았다. 하연은 한 걸음 한 걸음 두식에게 걸어갔다.“아무 일도 없었던 거로 하자고? 그건 당신한테만 너무 좋은 처사 아닌가?”하연의 목소리는 마치 12월의 서리처럼 뼈를 에는 듯한 고통을 주었다. 심지어 두식은 저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당신 누구야? 뭐 하자는 거야?”하연은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며 두식의
하연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두식은 하연이 곽대철의 이름에 겁먹었다고 생각해 더 보충했다.“왜? 무서워? 무서우면 당장 풀어줘. 늦어서 대철 형님이 오기라도 하면 너희들 제명에 못 죽어.”“풀어달라고? 꿈 깨. 감옥에 처넣으면 모를까.”두식은 그 말에 피식 웃었다.“나를 감옥에 넣는다고? 그럴 능력은 있고? 우리 대철 형님은 비즈니스계와 조폭계에 모두 발 담고 있는 분이셔.”“그래? 그럼 오늘 그 곽대철 형님이 너 구하러 오나 보자고.”하연은 말하면서 핸드폰을 꺼내 들더니 곧바로 곽대철한테 전화했다.그걸 본 두식은 당연히 하연이 허세 부린다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게, 여자인 하연이 조폭계를 주름잡는 거물 곽대철과 알고 지내는 사이라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하지만 웬걸? 연결음은 약 두 번 정도 울리더니 곧바로 곽대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흑흑, 보스. 처음으로 저한테 먼저 연락한 거 아시죠? 내가 이렇게 귀한 경험을 하다니...”하연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볼 일 있어서 전화했어요.”“무슨 일인데요? 보스 명령이라면 뭐든 따를게요.”“혹시 강두식이라고 알아요?”대철은 머릿속으로 한참 동안 이름을 검색하다가 겨우 뭐가 생각난 듯 대답했다.“알죠. 제 부하 중 한 명이에요.”하연은 눈을 들어 두식을 바라봤다. 그 눈빛은 어찌나 날카로운지 두식은 저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이윽고 확신 없는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물었다.“너 정말 대철 형님을 안다고?”두식은 저절로 말하고도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대철 형님이 어떤 인물인데. 조폭계에서 명성을 널리 알린 분인데, 고작 명문가 아가씨가 그런 거물과 알고 지낼 리 없어.’‘분명 나를 겁주는 걸 거야.’“허세 좀 그만 부려. 대철 형님이 어떤 분인데. 네까짓 게 알고 지낸다고?”그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하연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핸드폰을 두식에게 던져주었다. 이윽고 두식이 뭐라 말하기도 전에 대철의 분노 가득한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에서 흘러나왔다.“강두식! 너 이 자식 무
하연이 비웃으며 두식의 손에서 휴대폰을 빼앗아 왔다.“무슨 헛된 꿈을 꾸는 거야? 당신한테는 콩밥 먹게 하는 게 오히려 과분한데?”두식이 두려움에 떨며 말했다.“하연 아가씨는 그럼 제가 어떻게 하길 원하는 건데요?”“이렇게 납치하는 걸 좋아하니 여기서 실컷 머무시는 게 어때? 어차피 외진 곳인데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거야.”아까 여러 번 좌회전과 우회전을 해서 도착한 것을 보아하니 확실히 여기는 평일엔 사람이 다니지 않는 곳이 틀림없다.두식이 갑자기 눈을 번쩍 뜨며 말했다. “하연 씨! 제발 살려줘요! 우리를 여기에 남겨두면 우리는 죽게 될 거예요.”외진 곳에 방치되어 있다간 배고파 죽을 게 뻔하다.“이제야 무서운 줄 아네. 가흔을 납치할 때는 배짱이 아주 두둑한 줄 알았는데?”하연이 상혁을 바라보며 말했다.“상혁 오빠, 제 아이디어 어떤 것 같아요?”상혁은 하연을 사랑스럽게 쳐다보며 싱긋 웃었다.“눈에는 눈, 이에는 이, 아주 좋은 것 같아.”그 말에 하연이 웃음을 터뜨렸다.“저 사람들을 기둥에 묶어, 기억해, 매듭을 지어.”수하는 곧바로 명령에 복종했다.“이제는 당신들의 운명에 달려 있어. 사람이 먹지도 마시지도 않으면 기껏해야 7일까지 버틸 수 있다고 들었는데 당신들이 나를 대신해서 실험 좀 해봐.”하연은 놈들의 겁에 질린 시선을 바라보며 웃음을 점점 거두었다.“이...”“상혁 오빠, 가요.”“응.”상혁은 하연과 함께 나란히 창고를 떠나 차 쪽으로 걸어갔다. 그러고는 차에 오를 때 손을 뻗어 하연의 머리를 막아줬다.차가 움직이자, 소리는 점점 멀어졌고 강두식 등 사람들의 비명소리만 외진 창고에 울려 퍼졌다.“누구 없어요! 살려주세요!”“...”차에 오른 하연은 물티슈로 손가락을 깨끗이 닦았다.“상혁 오빠, 도와줘서 감사해요. 오빠가 아니었으면 이렇게 빨리 이 사람들을 찾을 수 없었을 거예요.”상혁이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를 다듬어 주며 말했다.“나한테 무슨 고맙다는 인사를 다 하는 거야? 너무 내외하는
가흔의 집 안은 이미 청소가 된 상태라 예전의 어수선하던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하연아, 왜 또 이렇게 직접 왔어?”가흔이 머리에 거즈를 둘러싼 채 주방에서 나오며 말했다.“뭐라는 거야, 우리는 친구잖아. 친구 보러 오는 거 당연한 거 아니야?”최하연은 사진 한 묶음을 탁자 위에 던져놓고는 꽃을 꽃병에 꽂으며 말했다.“우리 셋째 오빠가 다 말했지? 너를 납치한 사람들은 내가 다 처리했어. 안여정은 연예 활동을 못하도록 금지해 놨고, 앞으로의 인생은 끝난 셈이야.”하연이 전진 사진 속에는 두식 등 몇몇이 숨이 간들간들한 모습이 담겨 있었다.그걸 본 가흔은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감사 인사를 했다.“하성 오빠가 말해줬어. 고마워, 며칠 동안 신세를 많이 졌어.”‘쯧, 나하고 내외하지 말라니까.’하연은 가흔이 저와 내외하는 걸 무척 싫어한다.“굳이 그렇게 말한다면 나도 묻고 싶은 거 묻는다?”하연은 가흔에게 가까이 다가가 두 검지 끝을 한데 붙이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너랑 하성 오빠, 어떻게 된거야?”가흔의 얼굴은 순간 화끈 달아올랐다.“뭐라는 거야?”“왜, 부끄러워? 너 일 터지기 전에 오빠가 너를 챙겨줬는데, 두 사람 안 이루어진 거야?”가흔은 그 말에 오히려 갈피를 잡지 못했다.“그게 뭘 의미하는데?”하연이 의아해하며 물었다.“정말 안 된 거야? 설마! 그날 병원에 네가 오빠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엄청 기뻐했는데? 상 받을 때도 그렇게까지 기뻐하지 않았어.”가흔이 그 말을 듣고 어리둥절해하며 물었다.“오빠가 내가 오빠를 좋아하는 것을 알고 있단 말이야?”이 말을 듣은 하연은 순간 아차 싶었다. ‘오빠가 티를 안 냈나 보네.’“설마 그동안 하성 오빠가 너한테 고백 안 했어?”가흔이 고개를 저었다.“잘 챙겨주고 잘 돌봐주긴 했어. 하지만... 그런 말은 안 했어.”하연의 표정이 조마조마해졌다.‘망했네.’‘상혁 오빠 말이 딱 들어 맞잖아.’“미안해. 그날 내가 참지 못하고 말해버렸어. 난 네가 더 이상
상혁이 몇 초간 침묵하다가 입을 뗐다.“지금 시간 돼? 아크로리버파크에 와봐.”호현욱과 관련된 일은 그냥 지나칠 수 없었기에 하연은 바로 승낙하고 아크로리버파크로 향했다.처음에는 낯설었지만 하연은 점점 이곳의 길에 익숙해지고 있었다.다만 하연의 차량이 아크로리버파크에 들어가기도 전에 상혁이 입구에 서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상혁은 흰옷에 검은 바지를 입었고 가로등 아래에 서서 매우 온화하게 느껴졌다.하연이 깜짝 놀라서 물었다.“상혁 오빠, 왜 나와 있었어요?”상혁은 하연을 향해 싱긋 미소 지었다.“밤이라 마음이 안 놓여서. 직접 데리러 와야 안심이 되지.”이렇게 하는 것이 타당하다.하연의 마음이 따뜻해졌다.실내 거실.상혁이 서류 몇 개를 하연에게 건네 주며 말했다.“이것은 LS 그룹과 정부가 체결한 계약서 사본이고 그 안에 있는 돈은 LS 그룹에서 내놓을 수 있는 금액보다 훨씬 많아.”하연이 훑어보더니 말했다.“그래서 의심된다는 거예요?”“응, 그래서 사람을 시켜 임모연의 계좌에 있는 자금 출처를 알아봤는데 이 돈은 호현욱이 준 것이었어.”“둘이 손 잡았네요!”단번에 눈치챈 하연이 비웃으며 고개를 저었다.“정말 부동산에 대한 집착이 정말 심하네요. 이렇게 많은 돈을 처넣다니, 막판에 터질까 봐 두렵지도 않은가요?”상혁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성동 그 새로운 지역은 최근 몇 년 동안 B시에서 가장 중요한 프로젝트야. 더 많은 인재를 유치하고 도시 발전을 추진하기 위해 임모연과 호현욱이 감히 이렇게 많은 돈을 투자한 것은 바로 이 점을 인정했다는 거야.”“그런데...” 하연은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이렇게 큰 이익이 있을 수는 없다고 느껴졌다.“상혁 오빠, 우리 모두 장사꾼이에요. 오빠도 알겠지만, 최근 몇 년 동안 도시 발전이 포화 상태에 이르렀고 부동산이 붕괴하는 일은 드문 일이 아니잖아요.”상혁이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도박꾼이 전 재산을 걸면 돌아갈 길이 없는 법이지.”“혹시 무슨 내막을 아는 거예요?”
상혁의 뒷모습을 빤히 바라보던 하연은 갑자기 상혁이 낯설게만 느껴졌다. 하연은 혼란스럽고 화가 나서 그대로 몸을 일으켜 나가버렸다. 상혁은 줄곧 어두운 표정으로 마루 창가에 서서 수풀 사이로 차를 몰고 떠나는 하연의 모습을 보았다. 거리가 좀 되는데도 하연의 서운함이 그대로 느껴졌다. 어느새 피터가 문을 열고 들어와 공손하게 말했다. “방금 제가 본의 아니게 두분 대화를 조금 들었는데, 왜 최하연 씨를 피하시는 거예요? 대표님께서는 전에...”“아직은 때가 아니야.”상혁이 두 손을 주머니에 넣고는 쓸쓸한 뒷모습을 한 채 말했다. “조금만 더 기다려.”“M국에서 일어난 일이 마음에 걸리시는거 아니에요? 사실 부 회장님한테 말씀하시면 반드시 해결할 수 있을 거예요.”“안돼, 그런 일들은 아버지와 어머니께 말할 수 없어!”“네...”하연은 아크로리버파크에 다녀온 후 줄곧 기분이 좋지 않았고 출근한 후에도 여전히 기분이 꿀꿀했다.하연의 사무실에 보고하러 온 부하직원들도 하연의 상태에 전전긍긍했다. “최 사장님, 저희가 지난번 회의에서 확정한 프로젝트에 대한 기획안을 작성했어요.”연예부 책임자 진미화가 말했다. 진미화는 연예계 톱스타 매니저였느데 하연이 아주 큰 공을 들여 겨우 DS 그룹에 스카우트해온 인재다. 하연이 한번 쭉 훑어봤다. 미화가 작성한 인플루언서 리스트는 다 유명한 인플루언서는 아니지만 모두 잠재력이 큰 인플루언서였다. 뷰티 채널, 음식 채널, 프리미엄 사치품 등 모두 현재 인기 있고 모든 플랫폼에 포함 되는 영역이다. “최하성 씨의 네트워크 플로우가 있기에 다들 DS 그룹에 대한 신뢰가 높더라고요. 해서 DS 그룹과 계약한 첫 번째 인플루언서는 어느 정도 자원 편향을 받을 것이라고 약속했어요.”하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그래야죠.”“라이브 커머스는 결국 신흥 산업이고 많은 규칙이 아직 확정되지 않았기에 사전에 품질 관리를 잘 파악해야 해요. 시청자를 사로잡을 수 있는 건 반드시 품질이라는 걸 기억해야 하고.
주현빈의 스케줄은 약속을 잡기가 쉽지 않다. 현빈과의 약속을 잡을 수 있는 것은 그가 자신의 체면을 살려주려 한다는 것을 의미하기에 하연은 격식을 차려 한껏 차려 입고 태훈과 함께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 하지만 하연이 레스토랑에 도착했을 때 불청객을 보게 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그 사람은 다름 아닌 임모연이었다.역시나 평소보다 더 차려 입은 모연은 비서를 데려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임 사장님, FL 그룹의 이 이사님이 오실까요? 스케줄이 약속 잡기 쉽지 않을 텐데요.”모연에게는 지금이 바로 사업을 확장하기 좋은 중요한 시기다. 한서준이 도와주지 않는다면 더 큰 스폰서를 찾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최선의 선택이 바로 FL 그룹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상혁은 늘 하연의 편이다. 그래도 얼마 전 성동의 새 아파트를 처분하면서 새 인맥을 구축한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모연도 하연을 발견하고는 눈을 흘기며 아니꼽게 바라봤다. “걱정하지 마, 이 이사님이 나한테 약속했어. 우린 기다리기만 하면 돼.”하연이 모연에게서 눈을 떼고 주현빈을 보고는 웃으며 말했다. “주 회장님, 다시 한번 대화할 기회가 생겨 기쁘네요.”주현빈은 일상적인 차림에 주위에 또래 몇 명과 함께 왔다. “우리가 이제 막 계약을 체결했는데 최 사장님께서 이렇게 서둘러서 이번 사업을 추진하시는 걸 보니 성의가 느껴지더라고요. 그런데 제가 어찌 약속을 어길 수 있겠어요?”하연이 부끄러운 듯 말했다. “확실히 저희 DS 그룹은 그 어떤 협력 기회도 절대 놓치지 않을 거예요.”주현빈이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하연에게 주위 사람들을 소개했다. 그 사람들은 모두 JJ 그룹 주주였다. 하연은 겸손하게 한 명 한 명과 악수하며 룸으로 안내했다. 문에 들어서기 전에 하연이 발걸음을 늦추며 태훈에게 귓속말했다. “임모연이 오늘 여기서 뭘 하는지 알아봐.”태훈이 곧바로 응답하고는 룸에 들어가지 않았다. 룸은 레스토랑의 제일 좋은 위치에 자리 잡았고 B시 절반 풍경을 볼 수
한마디에 내포된 의미가 너무 많았다. 심지어 사람들이 반응하기도 전에 상혁이 앞으로 두 걸음 나아가 하연이 집어 든 술잔을 가볍게 빼앗아 왔다. “술을 많이 마시면 몸이 안 좋아져. 주 회장님이 도리를 지키지 않는 사람도 아니고.”주현빈이 얼떨떨해서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최 사장님. 그만 마셔요.”“이따가 끝나면 나랑 같이 가자. 할 말이 있어.”대중 앞에서 상혁의 태도는 이미 두 사람이 보통 친구 이상이라는 걸 암시햇다. 하지만 하연은 그런 상혁과 대화도 섞고 싶지 않아 붉게 물든 얼굴을 돌리며 말했다.“안돼요.하연의 대답에 만족한 상혁이 하연의 술잔을 단숨에 비우고 말했다. “여러분께 사죄드립니다. 중요한 일이 있어서 먼저 가겠습니다.”당연히 아무도 난감하게 하려 하지 않았다다만 사람이 떠난 후 룸 안이 갑자기 떠들썩해졌다.“최 사장님이 FL 그룹의 부 대표님과 최 사장과 이런 관계 일 줄은 몰랐네요.”“곧 좋은 소식이 들려오겠는데요?”“결혼식에 축하주 한 잔 얻어먹을 수 있을까요?”‘이게 다 무슨 소리지?’ 하연이 말했다. “저희 두 가문이 오랜 친구 사이라서 그래요. 부 대표님은 촌수로는 오빠예요.”하연의 설명에 설득력이 없어 사람들이 눈살을 찌푸리며 또다시 웃기 시작했다.후속 협력을 확인한 후에야 이 식사는 마침내 끝났다.그리고 상혁의 등장으로 최하연의 집중력이 약간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가기 전에 주현빈은 다른 사람의 부축을 받아야 걸을 수 있었다. “최 사장님, 저는 평생 큰 약속을 한 적이 없어요. 한번 말하면 반드시 그것을 실현할 거예요! 제 말을 들어보세요, JJ 그룹과 협력하면 당신을 지지 않을 거예요.”하연은 마음이 따뜻해져 주현빈의 비서에게 당부했다. “잘 모셔다드려요.”하연은 식당 입구에 서서 태훈에게 명령을 내렸다. “방금 레스토랑에서 말한 몇 가지 사항을 이행해.”태훈이 응답했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더니 태훈이 떠난 지 얼마되지 않
다른 곳에서 있던 조봉규가 소란이 일자마자 급히 뛰어 들어왔다. 그리고 빠른 걸음으로 송혜선에게 다가가며 다급히 말했다. “설날인데, 뭐하러 이렇게 화를 내...” 조봉규가 입을 여는 순간, 남준의 온몸이 싸늘하게 굳어졌다. 남준의 시선이 날카롭게 쏘아붙었고, 조봉규는 본능적으로 움찔하며 고개를 돌렸지만, 이내 애써 태연한 척하며 한 발 다가섰다. 송혜선의 팔을 조심스레 부축하며 낮은 목소리로 달랬다. “지금은 무엇보다도 건강이 우선입니다.” ‘건강?’남준은 손에 쥔 염주를 힘껏 움켜쥐었다. 힘이 들어간 손등에는 핏대가 서고, 눈빛은 살얼음처럼 차가웠다. 그리고 시선은 서로 닿아 있는 두 사람의 손목에 단단히 고정되었다. 입가에 엷은 조소가 떠올랐다. “조 선생님, 참으로 열정적인 분이시군요. 설날에도 근무 태세를 유지하시다니.” 조봉규는 눈치가 빠른 인물이었다. 당연히 그의 말 속에 담긴 조롱을 알아챘다. 그러나 겉으로는 한껏 공손한 태도를 유지하며 머리를 숙였다. “별말씀을요. 환자의 곁을 지키는 게 제 본분입니다.” 남준은 가만히 조봉규를 노려보다가, 짧고 날 선 경고를 던졌다. “그렇다면 본분에만 충실하시죠. 여긴 부씨 가문의 본가이니까.” 순간, 분위기가 얼어붙었다. “남준아!” 송혜선이 다급히 나섰다. 남준을 나무라는 말투였지만, 그 속에는 조봉규를 감싸려는 의도가 분명히 깔려 있었다. 남준의 눈빛은 더욱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그러나 송혜선은 오히려 기세를 올려 쏟아내듯 말했다. “네가 좀 더 나서서 잘했더라면, 부상혁한테 밀릴 일도 없었어! 내가 왜 조진숙한테 설날마다 굽신거려야 하냐고?” “지금, 어머니는 나를 원망하시는 겁니까?” 목소리가 한층 낮아졌다. 남준의 손에서 염주의 한 알이 ‘탁' 하고 부서졌다. “남준아! 지금 네가 무슨 짓을 한 거야?” 송혜선은 깜짝 놀라 소리쳤다. “염주는 영적인 기운이 깃든 물건이야. 함부로 부수면 불길한 일이 생길
부동건의 말은 송혜선을 전적인 신뢰를 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나중에 진실이 밝혀지면, 과연 부동건은 스스로를 어떻게 납득할까?’ ‘결국 속아서 살아온 날이 우스운 바보일 뿐...’ 조진숙은 아무 말 없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애틋한 사랑인데, 굳이 이럴 필요가 있을까?” 잠시 뜸을 들이던 그녀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이 서류들, 가져가.” “나 다른 뜻은 없어.” 부동건은 조진숙의 단호한 태도에 살짝 주춤했지만, 곧장 다시 설득을 시도했다. “네가 아직 날 원망하고 있다는 거 알아. 그동안... 혹시 네가...” “착각하지 마.” 조진숙은 부동건의 말을 끊었다. 더 이상 불필요한 감정 소모를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부동건은 한 발 더 다가섰다. “하지만 네가 이걸 받지 않는다면, 결국 날 아직도 원망하고 있다는 뜻 아니야?” 조진숙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 가슴 깊숙이 가라앉은 감정이 불쑥 떠오르는 듯했다. 그녀는 천천히 숨을 들이마시며 감정을 정리한 뒤, 담담한 목소리로 물었다. “당신... 정말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어?” 부동건은 말없이 서류를 정리하더니, 숙련된 손놀림으로 만년필을 열어 조진숙 앞에 내밀었다. 이것이 바로 자신의 대답이었다. “후회할 거였으면, 애초에 여기 오지도 않았어.” 이번엔 조진숙도 망설이지 않았다. 그녀는 펜을 들어, 서류 맨 아래에 단호한 필체로 자신의 이름을 남겼다. “부디 이 선택을 후회하는 날이 오지 않길 바라.” 부동건은 서류를 덮으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제야, 마음속에 짓눌려 있던 무언가가 비로소 내려앉는 듯했다. 그는 문득 나직이 말했다. “이제야... 후회한들, 이제 돌아갈 길도 없어.” 조진숙은 그 말에 가슴이 미세하게 흔들렸지만, 끝내 시선을 돌렸다. 담담한 표정 속에 모든 감정을 삼키며, 단 한마디만 남겼다. “이건... 다 정해진 운명이야.” ‘운명의 장난...’ ‘어쩔 수
“무슨 말씀인지 압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제 뜻대로 하게 해주십시오.” 부동건의 태도가 단호했다. 이를 지켜보던 부해철이 더 이상의 말은 의미가 없을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이미 네가 마음을 정했다면, 내가 더 이상 뭐라 할 수도 없지. 다만, 앞으로 그 여자를 내 앞에 데려오지는 마라. 네가 어떻게 살든 상관하지 않을 테니.” “그리고...” 부동건이 무슨 말을 더 하려 했지만, 부해철은 손을 휘저으며 등을 돌렸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라지는 뒷모습만이 남았다. ‘그렇게까지 반대할 줄은 몰랐네...’ 부동건은 묘한 기분으로 그 자리에 멈춰섰다. ...설날 온 나라가 한 해의 끝을 보내고, 가족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날. 예전에는 늘 조진숙과 상혁 모자가 함께 보내던 명절이었다. 그런데 올해는 조금 달랐다. 최씨 가문과 부씨 가문의 본가가 가까운 데다, 명절이 지나면 하연과 상혁의 약혼식이 있을 예정이었다.그래서 조진숙이 제안했고, 양가 가족들이 함께 부씨 가문에서 설날 저녁을 보내기로 했다. 그 덕분에 조진숙은 하루 종일 분주하게 준비에 매진했다. 그러나 제사가 끝나자마자 뜻밖의 손님이 찾아왔다. “진숙아, 새해 복 많이 받아.” 부동건이 어색한 미소를 띠며 낮은 자세로 인사를 건넸다. 평소 같았으면 송혜선과 함께 명절을 보낼 사람이, 오늘 이곳에 나타났다는 것 자체가 조진숙에게는 뜻밖이었다.그녀는 담담한 얼굴로 물었다. “여긴 웬일이죠?” “잠깐 들렀어, 당신한테 할 말도 있고 해서.” 조진숙은 그의 시선을 따라 문득 집안 분위기를 둘러보았다. 송혜선이 이곳에 들어온 이후, 부씨 가문 본가는 한 지붕 아래에서도 철저하게 북쪽과 남쪽으로 나뉘어 있었다.그 경계는 뚜렷했고, 불필요한 마주침은 없었다. 부동건이 송혜선과의 결혼을 공식적으로 선언한 이후, 둘은 한 번도 마주친 적이 없었다.만약 이번 일이 없었다면, 조진숙 역시 이미 오래전에 이 집을 떠났을 터였다. “들어와.
송혜선은 급히 분위기를 누그러뜨리려 했다. “아무래도 남준이가 좀 늦나 봐요. 조금만 더 기다려 보시는 게 어떨까요?” 부동건은 차갑게 코웃음을 치며 얼굴을 굳혔다. “말 같지도 안은 소리를 하고 있어! 오늘 같은 날에, 시간 개념도 없이 늑장을 부려.” 송혜선은 딱히 반박할 말이 없었다. 결국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 “남준이 오면 꼭 제가 주의를 줄게요.” “교육 똑바로 시켜. 좀 상혁이 하는 것에 반만큼이라도 신중했으면, 나도 그 녀석한테 좀더 잘해 줬을 거야.” ‘또 시작이군.’ 송혜선은 속이 쓰렸지만, 이를 악물고 참았다. “오면 오는 거고, 못 오면 어쩔 수 없지.” 부동건은 한 치의 여지도 주지 않고 단호하게 내뱉곤, 그대로 자리를 떠났다. “어서 남준이를 찾아와! 오늘 제사에 참석하지 못하면, 앞으로 나를 어머니라고 부를 생각은 하지도 마.” 송혜선의 가슴이 격하게 오르내렸다. 이 모든 노력들이 사소한 실수 하나로 무너질 순 없었다. ...부씨 가문은 제사에 있어서 철저한 예법을 중시했다. 다행히도 상혁은 부동건과 수년간 제사를 지내며 익숙해져 있었고, 모든 절차를 한 치의 오차 없이 진행했다. 부씨 가문의 어른들 역시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동건아, 상혁이가 있어서 네 대가 끊길 걱정은 없겠구나.” “앞으로 부씨 가문의 대업을 상혁이가 이어간다면, 우리 늙은이들도 한시름 덜겠어.” 부동건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야 물론이죠. 상혁이는 부씨 가문의 기둥이 될 인재입니다.” 상혁은 겸손한 태도로 말했다. “과찬이십니다. 앞으로도 많이 지도해 주십시오.” “어디 우리가 너희 젊은이들에게 배우는 게 더 많지!” “...”제사가 거의 끝나갈 무렵, 부남준이 느지막이 모습을 드러냈다. 부동건은 남준을 보자마자 눈빛이 차갑게 식었지만, 일단 감정을 누르고 말했다. “멍하니 서 있지 말고, 어서 와서 절부터 올려라.” 남준은 살짝 눈썹을
최씨 가문의 따뜻한 분위기와 달리, 부씨 가문의 본가는 싸늘하고 조용했다.예년과 다름없이, 설날이 되면 부동건은 집안의 남자들과 함께 조상들에게 제사를 올려야 했다. 올해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른 아침부터 송혜선은 핸드폰을 손에 쥐고 부남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연결음만 울릴 뿐, 남준은 끝내 받지 않았다. ‘이 녀석은 정말이지, 사람 속을 태우는 재주가 있다니까.’ 송혜선의 얼굴에 점점 초조한 기색이 드러났다. 옆에서 지켜보던 조봉규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때? 아직도 전화를 안 받아?” 송혜선은 짙어진 눈매로 핸드폰을 내려다보며 입술을 꾹 다물었다. “이 녀석, 정말 사람을 신경 쓰게 만드네! 도대체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거야...!” 조봉규는 부드러운 말투로 그녀를 달랬다. “혹시 무슨 사정이 있어서 늦는 걸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너무 걱정 마십시오. 남준이가 철없는 아이도 아니고.” ‘철없는 아이가 아닌데 이러겠어?’ 송혜선은 속으로 한숨을 삼키며, 최대한 감정을 눌렀다. “부씨 가문의 어른들이 원래부터 남준이를 못마땅해했는데. 이런 중요한 제사까지 빠지면, 분명 뒷말이 나올 거야.” 그녀의 말투에는 이미 불안과 초조함이 서려 있었다.그러는 사이, 두 사람이 작은 응접실에서 나와 복도를 따라 걸어갔다. 그때, 정면에서 다가오던 부동건과 마주쳤다. 부동건은 갓 외투를 정리하던 참이었다. 하지만 송혜선과 조봉규가 함께 있는 모습을 보자, 손동작이 살짝 느려지며 묘한 시선을 던졌다. “조 선생, 올해도 그렇게 혜선이 옆에 딱 붙어서 열심히 잘 보살펴 주세요.” 그 말 한마디에, 분위기가 묘하게 변했다.조봉규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한 발짝 뒤로 물러서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무슨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회장님, 제가 해야 할 일을 할 뿐입니다.” 부동건은 묘한 눈빛을 유지한 채, 덤덤히 말했다. “혜선이가 아이를 무사히 낳으면, 그에 대한 보상도 충분히 해줄 테니
두 집안이 한데 모여 북적이며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이런 귀한 순간을 마음껏 즐기며 보내다 보니, 어느덧 설날 전날이 되었다. 모두 함께 전용기를 타고 F국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설날이 밝았다. 올해는 오랜만에 최씨 가문 식구들이 한자리에 모인 데다, 기쁜 소식까지 겹친 한 해였다. 그 덕분인지 최동신은 평소보다 더욱 설 준비에 신경을 쓰고 있었다. 이른 아침부터 최씨 가문의 본가는 분주했다. 집사와 고용인들이 분주히 움직이며 저택 곳곳을 장식했다. 새빨간 복주머니와 길상 문양이 새겨진 장식들이 하나둘 자리 잡았고, 정원에는 화려한 등불이 걸리며 설 분위기가 한층 더 짙어졌다.하연이 계단을 내려오자, 기다렸다는 듯 최하성이 환한 얼굴로 다가왔다. “하연아, 새해 복 많이 받아라.” 그러면서 두툼한 세뱃돈 봉투를 그녀에게 내밀었다. 하연은 두 눈을 반짝이며 얼른 봉투를 받았다. “와! 이렇게 두꺼워요? 하성 오빠 최고!” 그때, 계단 위에서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도 있다.” 최하경이었다. 그 역시 두툼한 세뱃돈 봉투를 들고 내려왔다. “작년, 재작년 다 해외에 있어서 못 챙겨줬잖아. 그래서 올해 한꺼번에 더 두둑이 넣었다.” “와! 이건 더 두껍잖아요! 이러다 손목 나가겠어요!” 하연은 연달아 두 개의 두툼한 봉투를 받아 들고, 각각 한쪽 팔을 오빠들에게 걸었다. “오빠들 있어서 진짜 좋아요!” 최하성, 최하경 둘 다 서로를 바라보며 우애가 넘치는 미소를 지었다. 그때, 문이 열렸다. 그리고 최하민과 예아름이 나란히 들어왔다. 추운 바깥 공기를 뚫고 들어오자마자, 하민은 아름의 목에서 목도리를 부드럽게 풀어주었다. 그는 안쪽에서 떠들썩하게 웃고 있는 세 남매를 보고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우리 집이 이렇게 활기찬 게 얼마 만이에요!” 아름도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 “그러게요. 앞으로 더 행복한 일만 가득할 거예요.” 하민은 아내의 허리를 가볍
그리곤 진심을 담은 남자의 목소리가 멈추었다. 하지만 하연의 눈가에는 이미 촉촉한 눈물이 맺혀 있었다. 지금까지의 모든 글귀, 한 글자 한 글자마다 상혁이 진심을 담아 전한 마음이 느껴졌다. 이건 단순한 고백이 아니라, 상혁이 하연에게 건네는 가장 솔직하고 깊은 속마음이었다. 그때, 뒤에서 들려온 부드러운 목소리. “하연아.” 하연은 본능적으로 뒤돌아섰다. 그리고 그곳에 서 있는 사람을 보고 숨이 멎었다. 아까까지의 편안한 차림은 온데간데없이, 눈앞의 상혁은 새하얀 수트를 차려입고 있었다. 반듯하게 맨 보타이, 정갈하게 빗어 넘긴 머리, 그리고 손에 들린 한 다발의 꽃. ‘동화 속에서 막 나온 왕자님 같아.’ 하연은 멍하니 서서 남자를 바라보았다. 상혁이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올 때마다, 하연의 가슴이 터질 듯이 뛰었다. 남자의 시선, 남자의 걸음, 그가 다가오는 순간의 모든 것이 하연의 가슴속 깊이 새겨졌다. 마침내, 상혁은 하연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두 사람은 마주 섰고, 서로의 눈동자에 상대방의 모습이 담겼다. 말을 하지 않아도, 서로의 떨림이 전해지는 듯했다. 조용한 정적이 흘렀다. 그러다 상혁이 조심스레 손을 내밀어 꽃을 건넸다. 남자의 목소리는 살짝 떨리고 있었다. “하연아...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몰라.” 말이 끝나자, 그는 왼발을 살짝 앞으로 내디디더니 천천히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작은 벨벳 상자를 꺼냈다. 이어서 뚜껑을 열자, 반짝이는 다이아몬드 반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상혁의 눈빛에는 단 하나의 감정만이 가득 차 있었다. 바로 사랑이었다. “한때 나는 사랑이란 영화 속 이야기일 뿐이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널 만나고, 그게 아니란 걸 알았어.” “사랑은 영화 속 한 장면이 아니라, 매일같이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서로를 아껴주고, 이해하고, 감싸주는 거라는 걸.” “그래서 나는... 너와 함께, 그런 사랑을 하
둥근 형태의 테라스는 새하얀 난간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그 위로 푸릇푸릇한 덩굴식물이 감싸고 있었다. 연둣빛 야자수 잎 사이로 작고 앙증맞은 꽃들이 군데군데 피어 있었고, 은은한 향기가 바람에 실려왔다. 테라스 중앙에는 우아한 테이블과 의자가 놓여 있었고, 그 위에는 이미 차와 다과가 준비되어 있었다. “하연아, 우리 저기에 앉자.” 상혁은 하연의 손을 잡고 테이블로 이끌었다. 그녀가 자리에 앉자 직접 꽃차를 따라주었다. 하연은 손으로 찻잔을 감싸고 조심스레 한 모금 머금었다. 부드러운 향이 입안 가득 퍼지며 깊은 여운을 남겼다. “이거 무슨 차예요? 향이 너무 좋아요.” “목련차야. 테라스 뒤쪽에 한가득 피어 있는데, 한번 가볼래?” ‘목련꽃이 이렇게 가까이에서 피어 있다니.’ 순백의 꽃잎이 겨울을 이겨내고 피어나는 모습이라니,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하연은 찻잔을 내려놓고 기대에 찬 눈빛을 보냈다. “가보자!” 둘은 테라스를 나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새하얀 원형 아치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 너머로 눈부신 꽃의 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우와...’ 하연은 숨을 삼키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순백의 목련이 바람에 살랑이고, 보랏빛 라벤더가 넘실댔으며, 튤립이 형형색색으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각종 귀한 품종의 꽃들이 경쟁하듯 피어나고 있었고, 이 모든 아름다움이 한데 어우러져 마치 꿈 속을 걷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상혁은 걸음을 멈추고 어디선가 꽃으로 엮은 화관을 꺼내더니, 조심스레 하연의 머리 위에 올려놓았다. “하연아, 여기는 너만을 위한 꽃밭이야.” 놀란 듯 하연이 눈을 깜빡이며 상혁을 올려다보았다. ‘설마...?’ 여자의 가슴이 터질 듯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상혁은 하연의 손을 잡고, 꽃길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길을 따라 걷자 길이 점점 넓어졌고, 상혁과 함께 그 길을 따라 가자 점점 하연의 시야가 트였다.
고개를 돌려 반짝이는 눈빛으로 하연이 상혁을 바라보았다. “여긴 어디예요?” 상혁은 여자의 시선을 따라 앞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한때 버려졌던 작은 섬인데. 나중에 내가 사들였어.” 그는 자연스럽게 하연의 손을 잡으며 손가락을 맞물렸다. “어때? 마음에 들어?” 하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 “네, 좋아요!” ‘좋다니 다행이야. 오랜 시간 공들여 준비한 보람이 있었네.’이 순간을 상혁이 얼마나 기다려 왔던가. 그는 하연의 손을 살짝 당기며 말했다. “일단 우리 아침부터 먹자. 그리고 이따가 바닷가에 데려가 줄게.” “좋아요.” 이 섬은 남태평양 깊숙한 곳에 자리한 작은 외딴섬이었다. 한때는 몇 년 동안 방치되어 잡초가 무성하고 황폐했지만, 우연한 기회에 상혁이 이곳을 매입해 전문가에게 맡겼다. 불과 2년 만에 섬은 완전히 새로운 모습으로 탈바꿈했다. 집도 짓고, 길도 만들고, 섬 전체가 아름답게 정돈되었다. 한낮이 되자 햇살이 섬을 따스하게 감쌌다. 하연과 상혁은 손을 잡고 깔끔하게 정돈된 자갈길을 따라 걸었다. 두 사람은 이야기를 나누며 미소를 짓고 있었고, 그 모습만으로도 충분히 따뜻했다. 바람이 불어오자 하연의 원피스 자락이 살짝 날렸다. 그녀는 걸음을 멈추고 시선을 멀리 두었다. 눈앞에는 하얀 모래사장이 펼쳐져 있었고, 곱디고운 모래가 햇빛 아래 반짝이고 있었다. “저기 봐요! 야자수가 있어요!” 하연은 설레는 듯 조심스레 뛰어나갔다. 상혁은 그녀의 모습이 시야에서 멀어지는 것을 바라보며 그녀가 가는 곳을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푸른 하늘 아래, 키가 큰 야자수들이 가지런히 줄지어 서 있었다. 커다란 잎사귀들이 바닷바람을 타고 사각사각 소리를 냈다. 마치 오랜 세월을 품고 바다의 이야기를 속삭이는 것 같았다. 하연은 신발을 벗고 모래 위에 발을 내디뎠다. 발끝을 감싸는 모래가 부드럽고도 간질거려, 묘한 전율이 발끝에서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