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익숙하다 못해 어디서 봤던 느낌이 들어 하연은 눈살을 찌푸렸다.‘어디서 봤지?’그 말에 상혁은 싱긋 웃을 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이 별장은 상혁이 3년 전 구매한 건데, 하연과 서준이 결혼하여 B시에서 살게 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뒤 구매한 거다.그리고 꼬박 2년을 들여 인테리어를 했지만 그 뒤로 지금까지 계속 비워 두었다. 그러다가 회사를 B시로 이전하고 FL 그룹을 설립한 뒤 이곳에 정착했다.“아마도 인테리어가 다 거기서 거기라 그럴 거야.”상혁의 애매모호한 대답에 하연은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그런가 보죠.”자리에 앉은 뒤, 상혁은 와인잔에 붉은색 와인을 반쯤 채워 하연에게 건넸다.“마셔봐.”하연은 술 한 모금 마신 뒤 먼 곳을 응시했다.“오늘 밤하늘 예쁘네요. 별도 있고 달도 있고. 이렇게 밤하늘을 구경한 지도 얼마 만인지 모르겠어요.”밤하늘 아래에서 와인을 마시고 있다는 현실에 하연은 저도 모르게 감탄했다.“예전에 학교 다닐 때 둘째 오빠와 셋째 오빠 그리고 상혁 오빠까지 이렇게 우리 넷이 학교 운동장에서 별구경 했었잖아요. 벌써 몇 년이 흘렀는데 꼭 어제 일 같아요.”상혁은 하연의 시선을 따라 밤하늘을 바라보더니 뭔가 생각난 듯 입을 열었다.“벌써 십몇 년 전 일이네.”하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세히 세어봤다.“14년 전 일이에요. 그때 제가 중학교 1학년이었고 상혁 오빠와 우리 둘째 오빠, 셋째 오빠가 중학교 3학년이었으니...”이윽고 싱긋 웃었다.“그때 오빠를 좋아한 여자애들만 해도 수두룩했는데, 매번 선물에 연애편지에 난리도 아니었잖아요. 그런데 오빠는 매번 관심이 없는 것처럼 연애편지에는 눈길 한번 주지 않고 쓰레기통에 버렸었죠...”“좋아하지도 않는데 편지를 왜 받아줘? 차라리 빨리 포기하게 하는 것도 방법이지.”하연은 상혁의 말에 크게 웃었다.“그래도 너무 직설적인 거 아니에요? 그런데 뭐 그때 우리는 아직 어렸으니 사랑에 대해 잘 모를 때였죠.”하연은 와인을 마시며 천천히 음미했다. 그 순
“최하연 얼른 일어나. 오늘 입학 첫날인데 지각하면 안 되지.”침실 밖에서 하경이 가방을 메고 하연 방문을 두드리며 재촉 해댔지만 방금 전까지 꿈나라에 있던 하연은 겨우 잠에서 깨 좀처럼 일어나려 하지 않았다.심지어 이불을 머리끝까지 잡아당기며 귀찮은 듯 웅얼거렸다.“알았어요.”하지만 기다리다 못한 하경은 시간을 확인하더니 얼른 가사 도우미한테 몇 마디 당부하고는 학교로 떠나버렸다.결국 가사 도우미의 재촉에 울며 겨자 먹기로 깨어난 하연은 개학 첫날부터 지각하고 말았다.“최하연이랬지? 개학 첫날부터 지각이라니, 벌로 계단 청소 깨끗하게 해놔!”선생님의 꾸중을 들은 하연은 마지못해 빗자루를 들고 복도로 향했다. 그렇게 한창 청소하고 있을 때 하경이 언제 나타났는지 계단 손잡이를 잡은 채로 불 난 집에 부채질 해댔다.“그러게 내가 몇 번을 깨울 때 깨어났어야지. 계속 안 깨어나더니 지각했잖아.”하연은 입을 삐죽거리며 빗자루로 하경의 발 옆을 마구 쓸어댔다.“비켜요. 청소해야 하니까.”“제대로 쓸어. 선생님이 이따 검사하러 오실 거니까.”하영은 입가에 미소를 띤 채 하연을 놀려댔다.그 태도에 화가 난 하연은 콧방귀 뀌며 하경의 팔을 잡아당겼다.“비켜요.”“네가 쫓은 거야? 난 또 좋은 마음에 도와주려 했더니...”“필요 없거든요, 얼른 가요. 오빠 얼굴 보고 싶지 않으니까.”하연이 팔짱을 끼며 화난 듯 말했다.그때 하경의 뒤에서 상혁이 나타나더니 하경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도와주자, 혼자 다 못해. 이거 다 하려면 언제 끝날지 몰라.”하연은 그 말에 너무 감동해 하경을 향해 혀를 날름거렸다.“봤죠? 역시 상혁 오빠가 최고예요! 오빠는 맨날 나 괴롭히기만 하고.”“내가 언제 너 괴롭혔다고 그래? 상혁은 내가 불렀거든, 너 도와주려고. 어디서 고마운 줄도 모르고.”하경이 어이없다는 듯 반박했지만 하연은 믿지 않고 상혁을 바라봤다.“상혁 오빠 고마워요.”상혁은 무표정한 얼굴로 하연이 건네는 빗자루를 건네받았다.“얼
“아니, 우리 중3이야. 이제 곧 이제 곧 중간고사를 앞두고 있는데 시간 내서 공부해야지.”“이게 고작 몇 분이나 걸린다고.”상혁은 눈꺼풀을 들어 하경을 바라보더니 이내 주위를 한 바퀴 둘러보고 말을 이었다.“이제 다 된 것 같으니 우리도 돌아가자.”“...”이날 처음 지각하고 벌칙을 받은 하연은 그 뒤로는 한 번도 지각한 적 없었다.심지어 하경과 내기라도 하듯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는 명분으로 하경보다 반 시간 더 일찍 일어났다.그리고 그날도 하연은 일찍 일어나 운전기사의 차에 앉아 학교 앞에 도착했다.차에서 내리자마자 하연의 눈에 같은 반 친구인 유대진이 들어왔다. 대진은 전형적인 공붓벌레고 학습에 매우 적극적이었으며 하연과 함께 공부에 관한 토론을 하기 즐겼다.때문에 하연을 보자마자 대진은 바로 다가와 말을 걸었다.“하연, 어제 수학쌤이 낸 숙제 다 풀었어? 마지막 몇 문제 답이 몇이야? 우리 맞춰보자.”“수학 어제 숙제 있었어?”“응. 교재 98페이지 문제 풀어오라고 했잖아. 꽤 어렵던데, 설마 안 했어?”마른하늘의 날벼락 같은 소식에 하연은 멍해졌다. 사실 하연은 이 사실을 진작 잊었다.“당... 당연히 했지.”“했다니 다행이네, 쌤이 수업시간에 검사한다고 했거든.”하연은 순간 사색이 되어버렸다. 수학쌤은 학생들 사이에서 호랑이쌤으로 통하는데, 숙제를 해오지 않으면 손바닥을 때리곤 했다.때문에 반 학생들은 누구 할 것 없이 모두 무서워했다.하연은 그동안 성적이 우수해 한 번도 벌을 받지 않았었는데, 오늘 숙제를 하지 않은 걸 발각되면 그동안 쌓은 이미지가 무산되는 건 당연했다.‘그럼 앞으로 반에서 어떻게 지내?’“저기... 나 갑자기 급한 일이 생각나서 그러는데 너 먼저 들어갈래?”대진을 돌려보낸 하연은 당황한 마음을 안고 주위를 둘러봤다. 그러다가 결국 골목길에 들어가 다급히 책을 펼치고 열심히 숙제를 하기 시작했다.하지만 난이도가 있는 문제를 단번에 푸는 건 불가능한 일이라 하연은 혼란에 빠진 채 펜 끝을 이빨
하연은 약속을 지키는 사람이다.1학년은 하교 시간이 3학년보다 빠르기에 하연은 진작 교문 앞에서 기다리며 학교에서 나오는 사람을 이리저리 살폈다.그러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하경, 하성 그리고 상혁 세 명이 자전거를 타고 나오는 걸 발견했다. 하연을 보자 하경이 맨 먼저 인사했다.“하연, 너 이 자식 오빠들 기다려서 집에 같이 가는 거 처음이네.”그때 하성이 끼어들었다.“그런데 어쩌나? 우리 피시방에 가서 놀기로 했는데. 너 먼저 기사 아저씨랑 집에 가.”하연의 시선은 뒤에 서 있는 상혁에게 향했다.“누가 오빠들 기다린댔어? 상혁 오빠, 우리 가요!”하경과 하성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더니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지었다.“아니, 하연아, 너 설마 상혁이 기다린 거야?”“네, 아침에 상혁 오빠가 큰 도움을 줘서 제대로 보답하려고요. 다른 일 없으면 우린 이만 갈게요.”그때 하경이 상혁을 바라보며 경고를 날렸다.“부상혁, 너 오늘 우리랑 PC방 가기로 했잖아.”“맞아, 우리 아직 게임 다 못 했어.”하성도 맞장구쳤다. 두 사람한테는 게임이 무엇보다 대단하기에 상혁도 저들과 같다고 생각했다.때문에 하경은 아예 나서서 상혁 대신 거절했다.“상혁은 오늘 못 가. 나중에 다시 약속 잡아.”“아니야, 하연아, 우리 가자.”상혁의 말에 하성과 하경은 어안이 벙벙했다.“야, 우리 게임하기로 했잖아.”“우리 중3이야, 게임은 좀 줄일 필요 있어. 시험 준비 잘해야지.”하경과 하성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며 투덜거렸다.‘분명 본인이 맨 처음에 우리 둘 꼬드겼으면서 이렇게 갑자기 변한다고?’그에 반해 하연은 활짝 웃었다.“역시 상혁 오빠밖에 없어요, 우리 가요. 제가 아이스크림 살게요.”점점 멀어져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보던 하성은 갑자기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그런데 상혁 저 자식 우리보다 하연이를 더 좋아하는 것 같지 않냐?”하경은 그 말에 눈을 가늘게 접으며 멀리 떠난 두 사람을 빤히 바라봤다.“좋아하는 사람 생겼다고 우정은 버려? 나
하연은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알바생을 불러 아이스크림 세트 두 개를 주문했다.“얼른 먹어봐요. 이건 딸기 맛, 이건 바닐라 맛, 이건 초콜릿 맛이예요.”상혁은 하연의 기대에 찬 눈빛을 받으며 숟가락을 집어 들었다.“어때요? 맛있죠?”“응. 괜찮네.”그 말에 하연은 이내 환한 미소를 지었다.“역시, 오빠도 좋아할 줄 알았어요.”상혁은 또 한 숟갈 더 먹어보더니 감탄했다.“맛있어. 네가 좋아할 만하네.”“그렇죠? 이 집 아이스크림은 맛도 좋고 광고 문구도 아주 좋아요.”하연은 말하면서 아이스크림 상자를 들어 위에 찍힌 광고 문구를 보여주었다.“자동차에 롤스로이스가 있다면 아이스크림에는 하겐다즈가 있다.”“그리고 이것도요. 매 순간 네가 있고, 매 순간 사랑이 있다. 항상 무심코 너에게 세심한 배려를 주다.”“사랑하는 그녀에게 하겐다즈를.”“...”하연은 아이스크림 통에 있는 광고 문구를 하나하나 확인했다.“이것 봐요. 이 아이디어도 정말 기막히지 않아요?하연은 자기가 할 말에만 집중하느라 바닐라 맛 아이스크림 박스를 빤히 보고 있는 상혁을 발견하지 못했다.그 박스에는 방금 하연이 읽은 문구가 적혀 있었다.“사랑하는 그녀에게 하겐다즈를.”그날 저녁 상혁은 집에 도착하자마자 가전제품 가게 직원에게 명령했다.“2층 침실로 옮겨주세요.”조진숙은 주방 쪽에서 들리는 인기척에 내려왔다가 새로 산 냉장고를 보고 의아한 듯 물었다.“아들, 왜 갑자기 냉장고를 샀어?”“물건 넣으려고요.”그 말에 조진숙은 더욱 의아해졌다.“집에 냉장고 있잖아. 이건 뭘 넣을 건데?”그제야 상혁은 매장에서 가져온 아이스크림 몇 상자를 가리켰다.“저기, 아이스크림이요.”조진숙은 너무 놀라 의아한 듯 물었다.“너 단 음식 안 좋아하잖아? 아이스크림은 왜 갑자기 이렇게 많이 샀어?”‘그것도 몇 상자씩이나. 이걸 언제 다 먹는담?’상혁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대답했다.“오늘 맛봤는데 괜찮더라고요. 어머니도 맛 좀 볼래요?”“아니야, 엄마는 됐어
상혁은 눈을 들어 하경과 하성을 바라보더니 조금도 숨김없이 직설적으로 말했다.“응. 하연이 분명 너희랑 같이 온다고 하지 않았어?”“요즘 성적이 좀 떨어져서 할아버지가 집에서 공부하라고 했거든. 당분간 올 수 없어.”“아, 무슨 과목인데?”“수학 올림피아드.”“...”다음날, 잔뜩 풀이 죽어 학원에 도착한 하연은 불만스러운 듯 투덜거렸다.“수학 올림피아드 너무 바쁜데 안 하면 안 되나?”그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하연은 제 자리에 앉은 상혁을 발견했다. 이에 너무 놀란 하연은 믿기지 않아 연신 눈을 비볐다.“상혁 오빠? 여긴 어쩐 일이에요?”상혁은 눈꺼풀을 들어 하연을 바라봤다.“수학올림피아드는 중간고사 때 가산점이 붙어. 우리 어머니도 그래서 학원 끊어줬거든.”하연은 상혁의 말에 깨고소해했다.“난 또 나 혼자만 강요당한 줄 알았는데, 이모도 오빠를 강요했네요.”“응, 같은 처지야.”“그런데 이거 너무 바빠요.”하연은 수학올림피아드를 배워야 한다는 생각만 하면 울고 싶었다.상혁은 그런 하연을 보며 못 말린다는 듯 웃더니 책을 펼쳤다.“나 중1 문제는 할 줄 아는데, 내가 설명해 줄까? 방금 네가 푸는 거 지켜봤는데 이 문제 풀이 과정이 틀렸어. 이건 우선 문제부터 잘 봐야 해...”수박 겉핥기식으로 대충 알고 있던 하연은 상혁의 설명을 듣고 난 뒤 머리가 탁 트이는 느낌이 들었다.“상혁 오빠, 오빠가 설명하면 바로 알겠는데 쌤이 설명하는 건 하나도 모르겠어요. 오빠가 쌤보다 더 대단한 것 같아요. 앞으로 오빠가 저 가르쳐주면 안 되나요?”하연은 마치 아기 고양이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상혁을 바라봤다.“그래.”이윽고 들려오는 짤막한 한마디에 하연은 활짝 웃었고, 순간 수학올림피아드가 그렇게 싫지 않았다.그 뒤로 상혁은 하연과 함께 반 학기 동안 수학올림피아드를 다녔고, 그 덕에 하연은 중학교 1학년 조에서 금상을 수상했다.트로피를 받은 순간까지 하연은 그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상혁 오빠, 이거 다 오빠 덕이에요.
이제 막 정신이 든 하연은 상혁을 보자마자 울음을 터뜨렸다.“흑흑, 상혁 오빠, 저 이제 죽는 거예요?”상혁은 다급히 앞으로 다가가 하연의 어깨를 꼭 껴안아 주며 위로했다.“무슨 바보 같은 소리야? 죽는다니.”“그런데 저 피 엄청 많이 흘렸어요. 바지도 침대 시트도 온통 피범벅이에요...”상혁은 그 말에 감전이라도 돈 듯 흠칫 떨더니 귀까지 빨개져서는 모기 소리로 말했다.“뭐라고?”“상혁 오빠, 어떡해요? 저 죽고 싶지 않아요. 흑흑...”하연이 더 큰 소리로 울자 상혁은 얼른 하연의 입을 막았다.“바보, 너 안 죽어. 내 말 듣고 여기서 기다려.”하연은 그제야 울음을 멈추고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상혁을 바라봤다.“오빠 어디 가요?”“얌전히 기다려.”상혁은 아무 설명도 하지 않고 이 말만 남기고 떠났다.덩그러니 혼자 남은 하연이 어리둥절해 있을 때 보건쌤 강지은이 들어오며 물었다.“쓰러졌다며? 어떻게 된 거야?”“흑흑, 쌤, 저 죽는 거예요?”“뭐? 무슨 상황이야?”하연은 자초지종을 모두 말했고, 그걸 들은 지은은 안도의 한숨을 쉬며 하연을 위로했다.“괜찮아. 여자가 나이가 되면 나타나는 생리 반응이야. 네가 이제 컸다는 증거야.”의사의 말에 상황을 알아차린 하연은 너무 난처했다.그런데 마침 그때, 상혁이 땀을 뻘뻘 흘리며 돌아와서는 헐떡이면서 비닐 주머니를 건넸다.“얼른 화장실에 가서 갈아입어.”하연은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채로 화장실로 달려가 옷을 갈아입은 뒤 꾸물대며 밖으로 나왔다.그에 반해 상혁은 오히려 아무 일 없는 듯 흑설탕과 생강을 끓인 물을 하연에게 건넸다.“이거 마셔, 배 아플 때 통증 완화에 좋아.”“...”“상혁 오빠, 이런 건 어떻게 이렇게 많이 알아요?”상혁은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고 간단하게 당부했다.“앞으로 특별한 날에는 보온에 주의해. 수시로 흑설탕물 준비해 두고 찬물에 몸 닿지 않게 하고, 격렬한 운동 하지 말고 찬 음식 먹지 말고...”상혁은 주절주절 길게 말했지만 하연
하경이 말하면서 당장이라도 가정의에게 전화하려고 하자, 보다 못한 상혁이 얼른 전화를 뺏으며 설명했다.“여자애들 매달 겪는 특별한 날이야. 제발 좀 그만 캐물어.”그 말에 하경은 머쓱한 듯 눈을 껌뻑거렸다. 생물 수업에서 이미 여성의 생리 현상에 관한 지식을 하경과 하성 모두 어느 정도 배웠기에 잘 알고 있다.그제야 상혁이 말한 ‘특별한 날’이 뭔지 알아챈 하경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놀랐잖아. 난 또 무슨 일이 있는 줄 알았지. 너 앞으로 몸조심해. 우리 걱정하게 하지 말고.”하성 역시 헛기침을 하며 어색함을 애써 감추었다.“괜찮다니 다행이네. 하지만...”이윽고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하연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너 왜 그렇게 저질 체력이야? 평소 운동 많이 해야겠어.”“알았어요.”그러다가 갑자기 뭔가 생각난 듯 다시 입을 열었다.“그런데 평소 숨쉬기 운동밖에 안 하던 애가 무슨 용기로 800미터 달리기에 지원했어? 완주할 수나 있겠어?”하연은 자존심에 스크래치를 입고 이내 반박했다.“오빠, 그게 무슨 뜻이에요? 누가 800미터도 완주하지 못한대요? 완주하는 건 기본이고 제가 이번에 메달도 딸게요. 두고 봐요!”“그래? 못 믿겠는데? 네가 만약 완주하면 네 이번 학기 간식은 내가 책임질게.”그 말을 들은 순간 하연은 승부욕이 활활 타올랐다.“약속했어요? 후회하지 마요.”“후회라니, 그럴 리 없어. 하지만...”하성은 의미심장하게 말머리를 돌렸다.“만약 완주 못 하면 나 게임기 세트 사줘. 최고 사양으로다가.”“오케이, 약속했어요!”하연은 주먹을 불끈 쥐며 말했다.그 모습을 본 하경이 다급히 하성의 팔을 잡아당기며 작은 소리로 귀띔했다.“너 그만해. 쟤가 어릴 때부터 운동은 젬병이었잖아. 이번에도 참여에 중점을 둘 텐데 왜 그래?”그건 하성도 알고 있다.“나도 다 생각 있어. 하연이 운동 열심히 해서 체력을 키우라고 그러는 거잖아. 걱정하지 마, 내가 알아서 할게.”“그래, 네 말 기억해.”하성은 뒤돌아 하연을
금발 남자의 얼굴엔 잔인한 기색이 스쳤다. 허징인과 민찬에게 단 한 줌의 자비도 보이지 않았다. “저년의 입과 코를 꽁꽁 막아. 빈틈 하나도 남기지 말고.” 허징인은 절망에 빠진 눈으로 민찬을 바라보았다. ‘내 아들... 우리 민찬이...!’ 울부짖는 어린 민찬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리는 가운데, 그녀는 거대한 배의 20미터 높이의 갑판에서 차갑고 무자비하게 바다로 내던져졌다. 얼음처럼 차가운 바닷물이 온몸을 감싸고, 숨을 쉴 수 없는 답답함이 허징인을 집어삼켰다. 순식간에 의식은 멀어지고, 그녀의 몸은 깊고 어두운 바다 밑으로 가라앉았다. ‘여기서 이렇게 끝나는 건가...?’ 그러나 의식이 다시 돌아왔을 때, 허징인은 머리가 지끈거리고 무겁게 아파왔다. ‘아... 여긴 어디지?’ 본능적으로 손을 들어 머리를 눌러본 뒤에야, 그녀는 자신이 살아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주변을 둘러보니 낯선 공간이 눈에 들어왔다. ‘분명 나는 바다에 던져졌는데... 대체 여긴 어디지?’ 그리고 그녀의 뇌리에 가장 먼저 떠오른 이름, 민찬. ‘민찬? 설마... 설마 내 아들...!’ 그 순간, 절망감이 몰려오며 눈물이 주체할 수 없이 흘러나왔다. 갑자기, 문이 거칠게 열렸다. 허징인은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리며 뒷걸음질쳤다. ‘누구야? 또다시 무슨 짓을 하려는 거야?’ 그러나 다음 순간, 그녀의 눈에 들어온 사람은 너무도 익숙한 얼굴이었다. 그녀의 입술이 떨렸다. “부상혁 대표님...?” 상혁은 미소를 지으며 먼저 입을 열었다. “허징인 씨, 오랜만이네요.” 상혁 곁에 있던 원신민은 눈치를 보며 조용히 방을 나가고, 문을 닫았다. 허징인은 불신과 놀라움으로 가득 찬 표정으로 상혁을 바라보았다. “부 대표님, 어떻게... 어떻게 여기에...?” 여자의 목소리는 떨리고, 대답을 기다리며 불안감이 가득했다. 잠시 침묵이 흘렀지만, 허징인은 곧 머리를 굴렸다. ‘설마... 나를 구한 사
“조사가 끝났습니다.” 원신민은 망설임 없이 지도를 꺼내 상혁의 앞에 펼쳐 놓았다. “이 배는 F국 항구에서 출발해 서해안을 따라 항해한 후, 이 항로를 통해 태평양을 건너 L국의 T시 항구에 도착...” 원신민의 손가락이 지도 위를 천천히 움직이며 항로를 또렷하게 그려냈다. “대표님, 우리가 이 사람을 빼돌릴 수 있는 최적의 시간은 오늘 밤입니다. 배가 F국 영해를 벗어나면 일이 훨씬 까다로워질 겁니다.” 상혁은 눈을 가늘게 뜨고, 긴 손가락 끝으로 지도 위 특정 지점을 톡 건드렸다. ‘역시 냉철해.’ 원신민은 눈치를 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대표님!” 굵직한 뱃고동 소리가 항구를 울렸다. 거대한 배는 서서히 항구를 떠나 물결을 헤치며 바다 위를 미끄러지듯 나아갔다. 이 배는 15층짜리 대형 크루즈로, 가장 아래층은 화물칸으로 쓰이고, 그 위로는 승객의 숙소, 식당, 그리고 각종 오락 시설이 층층이 자리 잡고 있었다. 허징인과 아들 민찬은 가장 아래층의 음침하고 습한 방에 배치되었다. 방에는 좁은 창문 하나만 달려 있어 바깥의 희미한 빛이 들어오는 것이 전부였다. “엄마, 무서워요!” 민찬은 허징인의 품에 파고들며 온몸을 덜덜 떨었다. 허징인은 아들을 꼭 끌어안으며 본능적으로 달랬다. “괜찮아, 민찬아. 엄마가 있잖아.” ‘여기서 어떻게 해야 하지...’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방문이 거칠게 열렸다. 낯선 남자들이 순식간에 방으로 들이닥치며 좁은 공간을 가득 메웠다. 허징인은 경악하며 외쳤다. “당신들 누구야? 뭐 하려는 거야?” 이 사람들 중 가장 눈에 띄는 사람은 금발에 파란 눈을 가진 외국인이었다. 그는 거대한 체구와 빽빽이 자란 턱수염을 가졌고, 강렬한 눈빛으로 허징인을 꿰뚫듯 쳐다보았다. 이어서 다소 서툴지만 알아듣기 쉬운 F국말로 입을 열었다. “당신이 바로 남준이 말한 여자인가?” 그는 허징인의 얼굴을 훑어보더니 비웃음 섞인 미소를 지었다.
“그저 여자일 뿐인데, 너무 똑똑하면 손해만 볼 뿐이에요.” 남준이 허징인에게 다가가며, 몸을 숙여 그녀의 귀에 대고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여기까지 왔으니, 내가 원하는 걸 이제 줘야 하지 않겠어요?” 허징인은 차갑게 비웃으며 얼굴을 굳혔다. “뭐가 그렇게 겁나십니까, 상무님? 제가 약속을 어길까 봐요? 아니면... 그 물건들이 엉뚱한 사람 손에 들어갈까 봐요?” “그건 사모님이 그런 기회를 잡을 수 있을 때의 이야기죠.” 남준의 목소리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허징인은 이를 악물고 주먹을 꽉 쥐었고, 속으로는 분이 차올랐지만, 상황을 감안해 타협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함부로 해서는 안 되겠어. 지금은 일단 물러서는 게 최선이야.’ “걱정하지 마세요, 상무님. 이미 약속한 이상, 전 제 말을 반드시 지킬 겁니다.” 허징인은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며 남준과 눈을 맞췄다. “상무님도 본인의 약속을 지키길 바랍니다.” 남준은 가볍게 손을 펼치며 대답했다. “당연하죠.” 허징인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작전을 바꾸기로 결심했다. “제가 반은 먼저 드리고, 나머지는 우리가 안전한 곳에 도착하면 드릴게요.” “안 돼요!” 남준이 단호히 그 제안을 거절했다. “지금 사모님한테는 조건을 제시할 자격이 없는 것 같은데, 안 그래요?” 허징인은 눈을 감고 결연한 태도로 말했다. “그럼 차라리 지금 절 죽이세요. 하지만 제가 죽으면 그 물건들이 공개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은 알아두세요.” “엄마!” 곁에 있던 민찬이 울먹이며 그녀의 다리에 매달렸다. “엄마, 무서워요!” 허징인은 민찬을 꼭 안으며 남준을 노려보았다. ‘이 상황에서 물러서면 끝장이야. 적어도 내 아이는 지켜야 해.’ “상무님, 선택은 당신 몫입니다.” 남준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침묵했다. 남자의 눈빛은 한층 더 날카로워졌고, 어금니를 악물더니 잠시 후 말했다. “죽음도 불사하다니, 사모님의 배짱은 보통이 아니
집에 돌아온 하연은 좀처럼 마음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침실 안. 은은한 조명이 켜진 방에서, 하연은 소파에 몸을 웅크린 채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대표님...” 가정부가 따뜻한 우유 한 잔을 들고 조심스레 부르며 방으로 들어왔다. 상혁은 문틈 사이로 방 안의 하연을 흘깃 바라보며 손으로 가정부를 막았다. “내가 할게요.” 가정부가 물러난 뒤, 상혁은 바로 방으로 들어가지 않고 벽에 기대어 천장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그때, 상혁의 주머니에서 휴대폰이 울렸는데, 원신민에게서 온 메시지였다.그 내용은 간단했다. 하지만 상혁은 짧은 문장을 확인한 뒤, 입가에 가볍게 조소를 띄우며 휴대폰 화면을 껐다. 마치 모든 걸 손아귀에 쥐고 있는 사람의 태도였다. 그는 이내 천천히 방의 문을 열었다. “하연아.” 남자의 차분한 목소리에 하연은 깜짝 놀라며 정신을 차렸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상혁을 바라보며 조금 의아한 듯 물었다. “언제 들어왔어요?” 상혁은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손에 들고 있던 우유를 하연의 손에 쥐어주었다. “따뜻할 때 마셔.” 남자의 부드러운 말에 하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곧 우유를 들고 천천히 마시기 시작했다. 잠시 후, 컵이 바닥을 드러냈다. “잠깐 회사에 좀 다녀올게. 집에서 푹 쉬고 있어.” 상혁은 하연이가 들고 있던 유리잔을 받아들며 말했다. “이 밤중에요? 무슨 일 있는 거예요?” 하연은 살짝 의아해했다. “회사에 급한 일이 있어서. 아마 늦을 거야. 기다리지 말고 먼저 자.” 남자는 고개를 숙여 하연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지금 이 순간이 난 참 행복해.” 상혁의 눈에는 하연이가 자신의 곁에 있어 주는 것만으로 모든 것이 완벽해 보였다. ‘이 행복이 오래가길, 조금이라도 더 오래가길...’ 하연은 상혁의 목에 팔을 두르고 그의 품에 안기며 살짝 장난스럽게 말했다. “나도요. 정말 행복해
지석의 말이 끝나자마자, 상혁의 얼굴에 잠시 스치는 한 줄기 차가운 빛... 하지만 그것은 곧 부드러운 미소로 가려졌다. “지석 도련님 말씀대로, 형제간에는 서로 도와야 하는 법이죠.” “다만, 부씨 가문의 일을 굳이 외부인이 나설 필요는 없어 보입니다만.” 상혁의 말에는 분명한 경고의 의미가 담겨 있었고, 그의 기운에 압도된 지석은 잠시 얼굴이 굳었다. 자신이 실수했다는 것을 깨달은 지석이 변명을 하려는 찰나, 슬기가 먼저 나섰다. “하연 씨, 여기 메뉴 중에서 어떤 게 제일 맛이 괜찮아요? 추천 좀 해주세요.” 슬기의 말에 하연은 조용히 상혁의 손등 위에 손을 올렸다. 둘의 시선이 교차하자, 상혁의 눈가에 웃음이 스쳤다. ‘지금 나를 걱정하는 거야? 하지만 너무 날 과소평가하는 거 아닌가?’ 별일도 아닌 걸로 걱정하는 하연을 안심시키려는 듯, 상혁은 눈빛으로 괜찮다는 신호를 보냈다. 하연이 그제야 안심이 되어 바로 슬기에게 메뉴를 추천했다.“오리지널 맛도 괜찮고, 여러가지가 섞인 맛도 좋을 것 같아요. 둘 다 드셔보세요.” “그럼 두 가지 맛으로 각각 한 그릇씩 주세요!” 슬기는 메뉴를 탁 닫으며 밝게 말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지석은 더 이상 자리를 지킬 수 없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는 담배 한 대 피우고 올게요.” 그가 나가는 것을 슬기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지석이 자리를 떠나 자, 슬기는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죄송해요. 두 분의 오붓한 자리를 불편하게 해서요. 집안에서 주선한 선 자리를 억지로 나온 거라...” 여자의 말투에서 묘한 무력감이 느껴졌다. 슬기는 문득 눈을 들어 상혁을 바라보았지만, 상혁은 그녀를 신경 쓰는 기색도 없이, 온전히 하연에게만 시선을 두고 있었다. 슬기는 속으로 조용히 한숨을 내쉬며 그 눈빛을 외면했다. “그나저나, 하연 씨.” 슬기가 화제를 돌렸다. “최근 하연 씨가 뒤로 물러나고 회사를 최하성 씨에게 맡겼다고 들었어요.”
“하연 씨, 우리 같이 합석해도 괜찮을까요?” 슬기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하연은 환하게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물론 괜찮죠.” 슬기는 예상 밖의 대답에 약간 놀란 듯했다. 그녀는 눈웃음을 지으며 하연을 바라보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하연 씨, 이제 저 같은 ‘라이벌’에게 경계심이 풀린 건가요? 그래도 혹시 모르죠. 제가 다시 마음을 고쳐먹고 재도전할지?” 슬기가 농담 섞인 말이었지만 그 속엔 은근한 탐색이 깃들어 있었다.그러나 하연은 여유롭게 미소를 지으며 되받아쳤다. “주 대표님, 그런 생각할 여유가 있으시면 옆에 있는 분 눈치부터 보셔야 하지 않을까요?”슬기는 어깨를 으쓱하며 별거 아니라는 듯 답했다. “뭐, 집에서 주선한 맞선일 뿐이라 별로 신경 안 써요. 첫 만남이기도 하고요.”그 순간 뒤에 있던 지한이 앞으로 나서며 상혁을 향해 공손하게 인사를 건넸다. “부 대표님, 평소에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그의 입에서 나온 ‘부 대표님’이라는 말은, 그가 이미 상혁의 정체를 알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지한은 외부에서 떠도는 소문을 떠올렸다. 최씨 가문과 부씨 가문이 곧 혼사를 통해 막대한 사업적 결합을 이룰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지금 이 자리에 앉아 있는 여자가 바로 최씨 가문의 딸이라는 사실에 지한은 적잖이 긴장했다.“최하연 씨, 안녕하세요.” 지한이 하연에게도 정중하게 인사를 건네면서도 속으로는 긴장의 끊을 놓지 않았다. ‘주슬기가 최씨 가문과 부씨 가문 사람들과 이렇게 가까운 사이일 줄은 몰랐는데?’ 처음 지한은 그저 형식적인 맞선이라 생각했지만, 지금 이 상황을 보니 다시 생각해 봐야겠다고 느꼈다.그때 상혁이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SW그룹의 도련님을, 여기서 다 만나고 보기 드문 일이군요.” 단 한마디로 심지한의 배경을 정확히 짚어낸 것이다. 지한은 약간 놀란 표정을 지으며 눈썹을 살짝 들어 올렸다. “부 대표님께서 저를 알고 계셨
최근 몇 년 동안 H시는 급격한 경제 성장을 이루며 번화한 고층 빌딩들이 우후죽순으로 들어섰고, 도시 풍경은 완전히 새롭게 바뀌어 이제는 명실상부한 대도시로 자리 잡았다.상혁은 차를 몰고 하연과 함께 요즘 SNS에서 핫플레이스로 떠오른 유명 먹거리 거리로 향했다. 차를 주차장에 세운 후, 두 사람은 나란히 걸어 먹거리 거리로 들어섰다. 거리 양옆으로는 다양한 가게들이 즐비했고, 상인들은 열심히 손님들을 끌어모으며 활기찬 분위기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거리는 사람들로 북적거렸고, 곳곳에서 풍기는 음식 냄새가 두 사람의 발걸음을 이끌었다.한참을 걷던 중, ‘10년 전통 국밥집'이라는 간판이 걸린 깔끔하고 정갈한 가게가 눈에 들어왔다. 내부 인테리어는 오래된 가게답지 않게 세련되었고, 메뉴는 벽에 붙어 있어 가격이 한눈에 들어왔다.상혁이 가게를 한참 바라보는 사이, 하연은 이미 들어가 자리에 앉으며 기다릴 새도 없이 외쳤다. “사장님, 여기 대표 국밥 하나요!” 사장님은 빠르게 주문을 적으며 다정한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 못 드시는 재료 있으세요?”“짜지 않게 해주시고, 후추는 빼주세요. 나머지는 다 괜찮아요.” 하연이 주문을 마치자 사장님은 상혁을 향해 자연스럽게 시선을 돌리며 물었다. “사장님은 뭘로 드릴까요?” 상혁은 자신도 모르게 사장님의 깍듯한 존대에 살짝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저도 같은 걸로 주세요.” 가게의 음식 나오는 속도는 매우 빨랐다. 잠시 후, 두 사람 앞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국밥 두 그릇이 놓였다. 하연은 반짝이는 눈으로 국밥을 바라보며 기쁜 표정으로 숟가락을 들고 신나게 먹기 시작했다.“천천히 먹어.” 상혁은 그녀를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며 한마디 덧붙였다. 그러면서도 자신 앞에 놓인 국밥을 내려다보았다. 어릴 때부터 상혁은 까다로운 식습관을 가진 어머니인 조진숙의 영향으로 엄격하게 관리된 음식을 먹으며 자라, 이런 길거리 음식은 한 번도 접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정말요?” 다영은 남준의 말을 듣고 믿기지 않는다는 듯 눈이 살짝 붉어졌다. 그녀는 자신이 남준을 믿고 기다린 게 틀리지 않았다고 확신했다. 눈앞에 있는 이 남자는 그녀가 모든 걸 걸어도 될 만큼 가치 있는 사람이었다.“남준 씨, 난 그냥...” “그냥 뭐요?” 다영은 고개를 저으며,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전에 떠돌던 소문들 때문에 잠깐 마음이 흔들렸던 것뿐이에요.”“그런 쓸데없는 소문에 신경 쓸 필요 없어요.” 남준은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 그의 눈빛에는 복잡한 감정이 잠시 스쳤다. 하지만 기쁨에 젖어 있는 다영은 남준의 말 속에 담긴 미묘한 뉘앙스를 알아채지 못했다. 그녀는 남자의 팔을 꼭 잡고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난 언제나 남준 씨의 편이에요. 당신이 필요하면 언제든 나를 부르면 돼요. 항상 곁에 있을 거니까요.”‘당신이 원하는 모든 걸 내가 도와서 얻게 해줄 거야. 그게 DL그룹이라 해도...’ 그녀는 이 말을 입 밖에 내지는 않았지만, 속으로 굳은 결심을 다졌다....새해를 맞이하는 밤.전국 곳곳에서 크고 작은 축제가 열렸고, 도시는 환희와 축제 분위기로 가득했다. 모두가 기쁨 속에서 새해를 맞이하던 그 밤이 지나고, 다음 날 아침.하연은 따스한 햇살이 쏟아져 들어오는 방 안에서 천천히 눈을 떴다. 창밖으로부터 들어온 아침 햇살이 방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일어났어?” 상혁이 다정한 목소리로 물었다. 하연은 기지개를 켜며 나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몇 시예요?” 상혁이 곧바로 답했다. “아직 일러. 11시밖에 안 됐어.” “11시?” 하연은 예상외로 늦은 시간에 살짝 놀랐다. 그 순간 상혁이 침대 옆으로 다가와 그녀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눈을 맞췄다. 그의 눈에는 깊은 애정이 담겨 있었다. “괜찮아. 조금 더 자도 돼.”그러나 상혁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하연의 배에서 신호가 왔다
“남준 씨, 지금 당신 날 피한 거예요?” 다영은 손에 쥔 라이터를 꽉 쥐었다가 조용히 주머니에 넣으며 한 발짝 물러섰다. 최근 들어 너무 많은 일들이 한꺼번에 벌어졌고, 남준의 마음을 도무지 알 수 없게 되었다. 지금 이 상황 역시 그녀에게 상처를 남기고 있었다. 한때 누구보다 가까웠던 두 사람이, 이제는 마치 남이 된 것 같은 이 분위기가 그녀를 더욱 혼란스럽게 했다.남준은 정면만을 응시한 채 아무런 설명도 없이 미묘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타요.” 다영의 눈에 순간적으로 희미한 빛이 스쳤다. 망설임 없이 그녀는 차 뒤쪽을 돌아 조수석 문 앞에 섰고, 문을 열어 차에 탔다.차에 올라탄 그녀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조수석에 놓인 정교한 포장 상자로 향했다. 잠시 머뭇거리더니, 다영은 상자를 들고서 물었다. “남준 씨, 이거... 내 선물이에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녀의 손은 이미 멈추지 않고 상자를 열고 있었다.남준은 살짝 찌푸린 듯한 표정을 지었으나, 굳이 제지하지 않았다. 그저 그녀가 상자를 열어보는 것을 무심하게 지켜볼 뿐이었다.다영이 상자를 열자, 안에는 섬세하게 디자인된 고급스러운 목걸이가 자리하고 있었다. 중앙에 놓인 독특한 디자인의 목걸이는 푸른빛의 보석으로 장식되어 있었고, 조명에 반사되어 빛나는 모습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정말 예쁘네요...” 다영은 감탄하며 목걸이를 손바닥에 올려놓고 환한 미소로 남준을 바라보았다. “이거 나한테 걸어줄 수 있어요?”남준은 여전히 미동도 하지 않은 채, 목걸이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의 눈빛은 한없이 깊어졌고, 잠시 동안 아무런 말도 없이 목걸이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긴 듯했다.‘남아공에서 천연으로 채굴된 최고급 보석입니다. 순도와 투명도가 모두 최상급이고, 무엇보다도 희소성이 높아 전 세계에 단 하나뿐입니다. 특별한 사람에게 선물하기에 가장 적합한 아이템이죠.’ 그때 들렸던 매장의 직원 설명이 귀에 맴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