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익숙하다 못해 어디서 봤던 느낌이 들어 하연은 눈살을 찌푸렸다.‘어디서 봤지?’그 말에 상혁은 싱긋 웃을 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이 별장은 상혁이 3년 전 구매한 건데, 하연과 서준이 결혼하여 B시에서 살게 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뒤 구매한 거다.그리고 꼬박 2년을 들여 인테리어를 했지만 그 뒤로 지금까지 계속 비워 두었다. 그러다가 회사를 B시로 이전하고 FL 그룹을 설립한 뒤 이곳에 정착했다.“아마도 인테리어가 다 거기서 거기라 그럴 거야.”상혁의 애매모호한 대답에 하연은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그런가 보죠.”자리에 앉은 뒤, 상혁은 와인잔에 붉은색 와인을 반쯤 채워 하연에게 건넸다.“마셔봐.”하연은 술 한 모금 마신 뒤 먼 곳을 응시했다.“오늘 밤하늘 예쁘네요. 별도 있고 달도 있고. 이렇게 밤하늘을 구경한 지도 얼마 만인지 모르겠어요.”밤하늘 아래에서 와인을 마시고 있다는 현실에 하연은 저도 모르게 감탄했다.“예전에 학교 다닐 때 둘째 오빠와 셋째 오빠 그리고 상혁 오빠까지 이렇게 우리 넷이 학교 운동장에서 별구경 했었잖아요. 벌써 몇 년이 흘렀는데 꼭 어제 일 같아요.”상혁은 하연의 시선을 따라 밤하늘을 바라보더니 뭔가 생각난 듯 입을 열었다.“벌써 십몇 년 전 일이네.”하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세히 세어봤다.“14년 전 일이에요. 그때 제가 중학교 1학년이었고 상혁 오빠와 우리 둘째 오빠, 셋째 오빠가 중학교 3학년이었으니...”이윽고 싱긋 웃었다.“그때 오빠를 좋아한 여자애들만 해도 수두룩했는데, 매번 선물에 연애편지에 난리도 아니었잖아요. 그런데 오빠는 매번 관심이 없는 것처럼 연애편지에는 눈길 한번 주지 않고 쓰레기통에 버렸었죠...”“좋아하지도 않는데 편지를 왜 받아줘? 차라리 빨리 포기하게 하는 것도 방법이지.”하연은 상혁의 말에 크게 웃었다.“그래도 너무 직설적인 거 아니에요? 그런데 뭐 그때 우리는 아직 어렸으니 사랑에 대해 잘 모를 때였죠.”하연은 와인을 마시며 천천히 음미했다. 그 순
“최하연 얼른 일어나. 오늘 입학 첫날인데 지각하면 안 되지.”침실 밖에서 하경이 가방을 메고 하연 방문을 두드리며 재촉 해댔지만 방금 전까지 꿈나라에 있던 하연은 겨우 잠에서 깨 좀처럼 일어나려 하지 않았다.심지어 이불을 머리끝까지 잡아당기며 귀찮은 듯 웅얼거렸다.“알았어요.”하지만 기다리다 못한 하경은 시간을 확인하더니 얼른 가사 도우미한테 몇 마디 당부하고는 학교로 떠나버렸다.결국 가사 도우미의 재촉에 울며 겨자 먹기로 깨어난 하연은 개학 첫날부터 지각하고 말았다.“최하연이랬지? 개학 첫날부터 지각이라니, 벌로 계단 청소 깨끗하게 해놔!”선생님의 꾸중을 들은 하연은 마지못해 빗자루를 들고 복도로 향했다. 그렇게 한창 청소하고 있을 때 하경이 언제 나타났는지 계단 손잡이를 잡은 채로 불 난 집에 부채질 해댔다.“그러게 내가 몇 번을 깨울 때 깨어났어야지. 계속 안 깨어나더니 지각했잖아.”하연은 입을 삐죽거리며 빗자루로 하경의 발 옆을 마구 쓸어댔다.“비켜요. 청소해야 하니까.”“제대로 쓸어. 선생님이 이따 검사하러 오실 거니까.”하영은 입가에 미소를 띤 채 하연을 놀려댔다.그 태도에 화가 난 하연은 콧방귀 뀌며 하경의 팔을 잡아당겼다.“비켜요.”“네가 쫓은 거야? 난 또 좋은 마음에 도와주려 했더니...”“필요 없거든요, 얼른 가요. 오빠 얼굴 보고 싶지 않으니까.”하연이 팔짱을 끼며 화난 듯 말했다.그때 하경의 뒤에서 상혁이 나타나더니 하경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도와주자, 혼자 다 못해. 이거 다 하려면 언제 끝날지 몰라.”하연은 그 말에 너무 감동해 하경을 향해 혀를 날름거렸다.“봤죠? 역시 상혁 오빠가 최고예요! 오빠는 맨날 나 괴롭히기만 하고.”“내가 언제 너 괴롭혔다고 그래? 상혁은 내가 불렀거든, 너 도와주려고. 어디서 고마운 줄도 모르고.”하경이 어이없다는 듯 반박했지만 하연은 믿지 않고 상혁을 바라봤다.“상혁 오빠 고마워요.”상혁은 무표정한 얼굴로 하연이 건네는 빗자루를 건네받았다.“얼
“아니, 우리 중3이야. 이제 곧 이제 곧 중간고사를 앞두고 있는데 시간 내서 공부해야지.”“이게 고작 몇 분이나 걸린다고.”상혁은 눈꺼풀을 들어 하경을 바라보더니 이내 주위를 한 바퀴 둘러보고 말을 이었다.“이제 다 된 것 같으니 우리도 돌아가자.”“...”이날 처음 지각하고 벌칙을 받은 하연은 그 뒤로는 한 번도 지각한 적 없었다.심지어 하경과 내기라도 하듯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는 명분으로 하경보다 반 시간 더 일찍 일어났다.그리고 그날도 하연은 일찍 일어나 운전기사의 차에 앉아 학교 앞에 도착했다.차에서 내리자마자 하연의 눈에 같은 반 친구인 유대진이 들어왔다. 대진은 전형적인 공붓벌레고 학습에 매우 적극적이었으며 하연과 함께 공부에 관한 토론을 하기 즐겼다.때문에 하연을 보자마자 대진은 바로 다가와 말을 걸었다.“하연, 어제 수학쌤이 낸 숙제 다 풀었어? 마지막 몇 문제 답이 몇이야? 우리 맞춰보자.”“수학 어제 숙제 있었어?”“응. 교재 98페이지 문제 풀어오라고 했잖아. 꽤 어렵던데, 설마 안 했어?”마른하늘의 날벼락 같은 소식에 하연은 멍해졌다. 사실 하연은 이 사실을 진작 잊었다.“당... 당연히 했지.”“했다니 다행이네, 쌤이 수업시간에 검사한다고 했거든.”하연은 순간 사색이 되어버렸다. 수학쌤은 학생들 사이에서 호랑이쌤으로 통하는데, 숙제를 해오지 않으면 손바닥을 때리곤 했다.때문에 반 학생들은 누구 할 것 없이 모두 무서워했다.하연은 그동안 성적이 우수해 한 번도 벌을 받지 않았었는데, 오늘 숙제를 하지 않은 걸 발각되면 그동안 쌓은 이미지가 무산되는 건 당연했다.‘그럼 앞으로 반에서 어떻게 지내?’“저기... 나 갑자기 급한 일이 생각나서 그러는데 너 먼저 들어갈래?”대진을 돌려보낸 하연은 당황한 마음을 안고 주위를 둘러봤다. 그러다가 결국 골목길에 들어가 다급히 책을 펼치고 열심히 숙제를 하기 시작했다.하지만 난이도가 있는 문제를 단번에 푸는 건 불가능한 일이라 하연은 혼란에 빠진 채 펜 끝을 이빨
하연은 약속을 지키는 사람이다.1학년은 하교 시간이 3학년보다 빠르기에 하연은 진작 교문 앞에서 기다리며 학교에서 나오는 사람을 이리저리 살폈다.그러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하경, 하성 그리고 상혁 세 명이 자전거를 타고 나오는 걸 발견했다. 하연을 보자 하경이 맨 먼저 인사했다.“하연, 너 이 자식 오빠들 기다려서 집에 같이 가는 거 처음이네.”그때 하성이 끼어들었다.“그런데 어쩌나? 우리 피시방에 가서 놀기로 했는데. 너 먼저 기사 아저씨랑 집에 가.”하연의 시선은 뒤에 서 있는 상혁에게 향했다.“누가 오빠들 기다린댔어? 상혁 오빠, 우리 가요!”하경과 하성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더니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지었다.“아니, 하연아, 너 설마 상혁이 기다린 거야?”“네, 아침에 상혁 오빠가 큰 도움을 줘서 제대로 보답하려고요. 다른 일 없으면 우린 이만 갈게요.”그때 하경이 상혁을 바라보며 경고를 날렸다.“부상혁, 너 오늘 우리랑 PC방 가기로 했잖아.”“맞아, 우리 아직 게임 다 못 했어.”하성도 맞장구쳤다. 두 사람한테는 게임이 무엇보다 대단하기에 상혁도 저들과 같다고 생각했다.때문에 하경은 아예 나서서 상혁 대신 거절했다.“상혁은 오늘 못 가. 나중에 다시 약속 잡아.”“아니야, 하연아, 우리 가자.”상혁의 말에 하성과 하경은 어안이 벙벙했다.“야, 우리 게임하기로 했잖아.”“우리 중3이야, 게임은 좀 줄일 필요 있어. 시험 준비 잘해야지.”하경과 하성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며 투덜거렸다.‘분명 본인이 맨 처음에 우리 둘 꼬드겼으면서 이렇게 갑자기 변한다고?’그에 반해 하연은 활짝 웃었다.“역시 상혁 오빠밖에 없어요, 우리 가요. 제가 아이스크림 살게요.”점점 멀어져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보던 하성은 갑자기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그런데 상혁 저 자식 우리보다 하연이를 더 좋아하는 것 같지 않냐?”하경은 그 말에 눈을 가늘게 접으며 멀리 떠난 두 사람을 빤히 바라봤다.“좋아하는 사람 생겼다고 우정은 버려? 나
하연은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알바생을 불러 아이스크림 세트 두 개를 주문했다.“얼른 먹어봐요. 이건 딸기 맛, 이건 바닐라 맛, 이건 초콜릿 맛이예요.”상혁은 하연의 기대에 찬 눈빛을 받으며 숟가락을 집어 들었다.“어때요? 맛있죠?”“응. 괜찮네.”그 말에 하연은 이내 환한 미소를 지었다.“역시, 오빠도 좋아할 줄 알았어요.”상혁은 또 한 숟갈 더 먹어보더니 감탄했다.“맛있어. 네가 좋아할 만하네.”“그렇죠? 이 집 아이스크림은 맛도 좋고 광고 문구도 아주 좋아요.”하연은 말하면서 아이스크림 상자를 들어 위에 찍힌 광고 문구를 보여주었다.“자동차에 롤스로이스가 있다면 아이스크림에는 하겐다즈가 있다.”“그리고 이것도요. 매 순간 네가 있고, 매 순간 사랑이 있다. 항상 무심코 너에게 세심한 배려를 주다.”“사랑하는 그녀에게 하겐다즈를.”“...”하연은 아이스크림 통에 있는 광고 문구를 하나하나 확인했다.“이것 봐요. 이 아이디어도 정말 기막히지 않아요?하연은 자기가 할 말에만 집중하느라 바닐라 맛 아이스크림 박스를 빤히 보고 있는 상혁을 발견하지 못했다.그 박스에는 방금 하연이 읽은 문구가 적혀 있었다.“사랑하는 그녀에게 하겐다즈를.”그날 저녁 상혁은 집에 도착하자마자 가전제품 가게 직원에게 명령했다.“2층 침실로 옮겨주세요.”조진숙은 주방 쪽에서 들리는 인기척에 내려왔다가 새로 산 냉장고를 보고 의아한 듯 물었다.“아들, 왜 갑자기 냉장고를 샀어?”“물건 넣으려고요.”그 말에 조진숙은 더욱 의아해졌다.“집에 냉장고 있잖아. 이건 뭘 넣을 건데?”그제야 상혁은 매장에서 가져온 아이스크림 몇 상자를 가리켰다.“저기, 아이스크림이요.”조진숙은 너무 놀라 의아한 듯 물었다.“너 단 음식 안 좋아하잖아? 아이스크림은 왜 갑자기 이렇게 많이 샀어?”‘그것도 몇 상자씩이나. 이걸 언제 다 먹는담?’상혁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대답했다.“오늘 맛봤는데 괜찮더라고요. 어머니도 맛 좀 볼래요?”“아니야, 엄마는 됐어
상혁은 눈을 들어 하경과 하성을 바라보더니 조금도 숨김없이 직설적으로 말했다.“응. 하연이 분명 너희랑 같이 온다고 하지 않았어?”“요즘 성적이 좀 떨어져서 할아버지가 집에서 공부하라고 했거든. 당분간 올 수 없어.”“아, 무슨 과목인데?”“수학 올림피아드.”“...”다음날, 잔뜩 풀이 죽어 학원에 도착한 하연은 불만스러운 듯 투덜거렸다.“수학 올림피아드 너무 바쁜데 안 하면 안 되나?”그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하연은 제 자리에 앉은 상혁을 발견했다. 이에 너무 놀란 하연은 믿기지 않아 연신 눈을 비볐다.“상혁 오빠? 여긴 어쩐 일이에요?”상혁은 눈꺼풀을 들어 하연을 바라봤다.“수학올림피아드는 중간고사 때 가산점이 붙어. 우리 어머니도 그래서 학원 끊어줬거든.”하연은 상혁의 말에 깨고소해했다.“난 또 나 혼자만 강요당한 줄 알았는데, 이모도 오빠를 강요했네요.”“응, 같은 처지야.”“그런데 이거 너무 바빠요.”하연은 수학올림피아드를 배워야 한다는 생각만 하면 울고 싶었다.상혁은 그런 하연을 보며 못 말린다는 듯 웃더니 책을 펼쳤다.“나 중1 문제는 할 줄 아는데, 내가 설명해 줄까? 방금 네가 푸는 거 지켜봤는데 이 문제 풀이 과정이 틀렸어. 이건 우선 문제부터 잘 봐야 해...”수박 겉핥기식으로 대충 알고 있던 하연은 상혁의 설명을 듣고 난 뒤 머리가 탁 트이는 느낌이 들었다.“상혁 오빠, 오빠가 설명하면 바로 알겠는데 쌤이 설명하는 건 하나도 모르겠어요. 오빠가 쌤보다 더 대단한 것 같아요. 앞으로 오빠가 저 가르쳐주면 안 되나요?”하연은 마치 아기 고양이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상혁을 바라봤다.“그래.”이윽고 들려오는 짤막한 한마디에 하연은 활짝 웃었고, 순간 수학올림피아드가 그렇게 싫지 않았다.그 뒤로 상혁은 하연과 함께 반 학기 동안 수학올림피아드를 다녔고, 그 덕에 하연은 중학교 1학년 조에서 금상을 수상했다.트로피를 받은 순간까지 하연은 그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상혁 오빠, 이거 다 오빠 덕이에요.
이제 막 정신이 든 하연은 상혁을 보자마자 울음을 터뜨렸다.“흑흑, 상혁 오빠, 저 이제 죽는 거예요?”상혁은 다급히 앞으로 다가가 하연의 어깨를 꼭 껴안아 주며 위로했다.“무슨 바보 같은 소리야? 죽는다니.”“그런데 저 피 엄청 많이 흘렸어요. 바지도 침대 시트도 온통 피범벅이에요...”상혁은 그 말에 감전이라도 돈 듯 흠칫 떨더니 귀까지 빨개져서는 모기 소리로 말했다.“뭐라고?”“상혁 오빠, 어떡해요? 저 죽고 싶지 않아요. 흑흑...”하연이 더 큰 소리로 울자 상혁은 얼른 하연의 입을 막았다.“바보, 너 안 죽어. 내 말 듣고 여기서 기다려.”하연은 그제야 울음을 멈추고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상혁을 바라봤다.“오빠 어디 가요?”“얌전히 기다려.”상혁은 아무 설명도 하지 않고 이 말만 남기고 떠났다.덩그러니 혼자 남은 하연이 어리둥절해 있을 때 보건쌤 강지은이 들어오며 물었다.“쓰러졌다며? 어떻게 된 거야?”“흑흑, 쌤, 저 죽는 거예요?”“뭐? 무슨 상황이야?”하연은 자초지종을 모두 말했고, 그걸 들은 지은은 안도의 한숨을 쉬며 하연을 위로했다.“괜찮아. 여자가 나이가 되면 나타나는 생리 반응이야. 네가 이제 컸다는 증거야.”의사의 말에 상황을 알아차린 하연은 너무 난처했다.그런데 마침 그때, 상혁이 땀을 뻘뻘 흘리며 돌아와서는 헐떡이면서 비닐 주머니를 건넸다.“얼른 화장실에 가서 갈아입어.”하연은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채로 화장실로 달려가 옷을 갈아입은 뒤 꾸물대며 밖으로 나왔다.그에 반해 상혁은 오히려 아무 일 없는 듯 흑설탕과 생강을 끓인 물을 하연에게 건넸다.“이거 마셔, 배 아플 때 통증 완화에 좋아.”“...”“상혁 오빠, 이런 건 어떻게 이렇게 많이 알아요?”상혁은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고 간단하게 당부했다.“앞으로 특별한 날에는 보온에 주의해. 수시로 흑설탕물 준비해 두고 찬물에 몸 닿지 않게 하고, 격렬한 운동 하지 말고 찬 음식 먹지 말고...”상혁은 주절주절 길게 말했지만 하연
하경이 말하면서 당장이라도 가정의에게 전화하려고 하자, 보다 못한 상혁이 얼른 전화를 뺏으며 설명했다.“여자애들 매달 겪는 특별한 날이야. 제발 좀 그만 캐물어.”그 말에 하경은 머쓱한 듯 눈을 껌뻑거렸다. 생물 수업에서 이미 여성의 생리 현상에 관한 지식을 하경과 하성 모두 어느 정도 배웠기에 잘 알고 있다.그제야 상혁이 말한 ‘특별한 날’이 뭔지 알아챈 하경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놀랐잖아. 난 또 무슨 일이 있는 줄 알았지. 너 앞으로 몸조심해. 우리 걱정하게 하지 말고.”하성 역시 헛기침을 하며 어색함을 애써 감추었다.“괜찮다니 다행이네. 하지만...”이윽고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하연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너 왜 그렇게 저질 체력이야? 평소 운동 많이 해야겠어.”“알았어요.”그러다가 갑자기 뭔가 생각난 듯 다시 입을 열었다.“그런데 평소 숨쉬기 운동밖에 안 하던 애가 무슨 용기로 800미터 달리기에 지원했어? 완주할 수나 있겠어?”하연은 자존심에 스크래치를 입고 이내 반박했다.“오빠, 그게 무슨 뜻이에요? 누가 800미터도 완주하지 못한대요? 완주하는 건 기본이고 제가 이번에 메달도 딸게요. 두고 봐요!”“그래? 못 믿겠는데? 네가 만약 완주하면 네 이번 학기 간식은 내가 책임질게.”그 말을 들은 순간 하연은 승부욕이 활활 타올랐다.“약속했어요? 후회하지 마요.”“후회라니, 그럴 리 없어. 하지만...”하성은 의미심장하게 말머리를 돌렸다.“만약 완주 못 하면 나 게임기 세트 사줘. 최고 사양으로다가.”“오케이, 약속했어요!”하연은 주먹을 불끈 쥐며 말했다.그 모습을 본 하경이 다급히 하성의 팔을 잡아당기며 작은 소리로 귀띔했다.“너 그만해. 쟤가 어릴 때부터 운동은 젬병이었잖아. 이번에도 참여에 중점을 둘 텐데 왜 그래?”그건 하성도 알고 있다.“나도 다 생각 있어. 하연이 운동 열심히 해서 체력을 키우라고 그러는 거잖아. 걱정하지 마, 내가 알아서 할게.”“그래, 네 말 기억해.”하성은 뒤돌아 하연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