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정은 한 대 맞은 것에 어리둥절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가흔을 바라봤다.“지금 나 쳤어?”주위 사람들도 너무 갑작스럽게 벌어진 일에 놀라 멍해 있다가 이내 반응했다.“때린 지가 언젠데 반응이 좀 늦네요.”“이게!”여정이 뭐라 말하려 했지만 그때 마침 인파 속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하성 배우님!”그 말을 들은 여정의 얼굴을 순식간에 변했다.여정은 눈을 들어 한참 떨어진 문에 기대 있는 하성을 확인했다.하성은 늘 그렇듯 덤덤한 표정을 짓고 있어 도무지 속내를 알 수 없었다.그 모습을 보니 여정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 조심스럽게 말했다.“선배, 언제부터 와 있었어요?”하성 배우님이라는 호칭을 듣자마자 그대로 굳어 버린 가흔은 여정의 선배라는 호칭에 등 뒤에 있는 사람의 신분을 더 확신했다.‘방금 다 봤나?’‘내가 자기 후배 때렸다고 화내겠지?’가흔은 난처해하는 모습을 들키지 않기 위해 눈을 내리깔고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떠나버렸다.여정은 그 모습을 보더니 얼른 하성 앞에 달려가 불쌍한 표정으로 고자질했다.“선배, 방금 다 봤죠? 저 여자가 밑도 끝도 없이 다짜고짜 저를 때렸어요.”그러면서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떨구었다.하지만 그 누구도 나서서 사실대로 말해주는 사람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게, 여정의 신분 때문에 본인이 화를 입을까 봐 두려웠으니까.하성은 여정의 얼굴을 보더니 덤덤하게 물었다.“가흔이 때린 거야?”여정은 고개를 끄덕였다.“선배, 아까 그 여자 진짜 미친 거 같아요. 분명 본인이 액세서리 잘못 챙겨왔으면서 내가 실수로 조금 망가뜨렸다고 60억이나 배상하게 하고 고작 몇 마디 투덜댔다고 저를 때렸어요.”여정은 본인이 유리한 쪽으로만 말했다. 물론 하성이 언제부터 있었고 얼마나 지켜봤는지 알 수 없었지만 선배 앞에서 그동안 쌓은 이미지가 그대로 무너지게 둘 수는 없었으니까.그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하성이 최씨 가문 셋째 도련님이라는 거다.하성은 사람들이 감히 따라잡을 수 없는 신분
하연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하성의 모습에 호기심이 발동했지만 더 묻지 않고 손가락으로 옆을 가리켰다.“방금 저쪽으로 갔는데 아마 멀리 못 갔을 거예요.”하성은 잠시도 망설이지 않고 긴 다리를 내디디며 가흔이 떠난 쪽으로 쫓아갔다.그렇게 불과 10걸음 만에 하성의 눈에 익숙한 실루엣이 들어왔다.하성의 얼굴에 드리웠던 당황한 표정은 점차 걷혔지만 발걸음은 오히려 빨라졌다.“가흔아!”하성의 부름에 가흔은 제 자리에 우뚝 섰다. 그리고 다음 순간 하성이 가흔의 옆으로 다가왔다.“왜 그렇게 빨리 떠나?”가흔은 맑고 고요한 샘물 같은 눈동자로 하성을 빤히 보다가 입꼬리를 말아 올리더니 퉁명스럽게 말했다.“따지러 왔어요?”이에 하성은 눈썹을 치켜 올리며 시선을 가흔의 손으로 옮겻다.그 시선을 느낀 가흔은 말없이 주먹을 꽉 쥐었다.“따지러 온 거면 저도 할 말 없어요. 저 여정 씨 때린 거 맞아요. 60억 배상하라고 한 것도 맞아요. 의견 있으면 제 변호사랑 얘기해요.”가흔이 장황하게 말을 늘어놓았지만 하성은 전혀 귀담아듣지 않고 입을 뻐끔거리다가 끝내 물었다.“손 안 아파?”가흔은 그 순간 멈칫하더니 한참 멍해 있다가 믿기지 않는 듯 물었다.“뭐라고요?”하성은 가흔에게 다가가 또다시 반목했다.“아까 힘 많이 쓴 것 같던데, 손 안 아파?”가흔은 무의식적으로 제 손을 뒤로 뺐지만 하성이 틈도 주지 않고 가흔의 손을 덥석 잡았다.“뭐 하는 거예요? 이거 놔요.”“하연처럼 뭐든 본인이 직접 나서는 버릇 고쳐!”“?”가흔은 무의식적으로 손을 빼고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걱정하는 상대가 잘못된 것 같은데요? 저 손 괜찮아요. 아무 문제 없어요. 오히려 여정 씨가 문제죠. 아마 얼굴이 부었을 테니 가서 후배나 걱정해요.”그러면서 일부러 후배라는 단어에 힘을 줬다.하지만 하성은 가흔의 말투에 드러난 질투의 감정을 조금도 눈치채지 못했다.“난 너를 거정하는 거야.”“필요 없으니 가요. 전 바빠서 이만.”가흔은 말을 마치자마자 뒤에 맹
여정은 가뜩이나 여리여리하고 가녀리게 생긴 데다 눈물까지 뚝뚝 흘리자 더욱 동정심을 자아냈다.“괜찮아요. 억울한 일 당했으면 말해요.”하연의 위로에 여정은 더욱 크게 흐느껴 주위 사람들은 너도나도 두 사람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그 순간 하연은 무의식적으로 눈살을 찌푸렸다.그로부터 한참이 지나서야 여정은 울음을 멈추고 하연에게 호소했다.“최 사장님, VERE 브랜드 측 신 대표가 앞으로 저한테는 협찬 안 해준대요. 그것도 모자라 저를 때리기까지 했어요. 제 얼굴이 부어오른 것도 다 신 대표 때문이에요.”그 말을 들은 하연은 사뭇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여정의 말을 생각했다.하연은 가흔과 벌써 수년 동안 연을 이어왔기에, 가흔이 일과 생활에 언제나 최선을 다한다는 건 당연히 알고 있다.가흔이 오늘날 거둔 성과도 한 장 한 장 스케치하며 쌓은 디자인 실력 덕이고, 인성 역시 그동안 지켜봐 왔기에 절대 남을 먼저 건드릴 사람이 아니라는 것도 안다.이것만은 하연이 확신할 수 있었다.때문에 여정의 말에 하연은 표정을 숨긴 채 물었다.“괜찮으니 천천히 말해 봐요.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여정은 하연이 저를 믿어준다고 생각해 방금 전 벌어진 일에 이것저것 살을 덧붙여 본인에게 유리한 것만 말했다.심지어 본인에게 불리할 것 같은 일부 사실은 아예 지워버렸다.자초지종을 들은 하연은 너무 황당하고 어이없어 가차 없이 여정의 진술에 존재하는 문제점을 짚어냈다.“VERE의 신 대표가 여정 씨 개인에 대한 협찬을 취소했다고요?”여정은 하연의 말에 숨은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이건 분명 일부러 저를 겨냥하는 거라고요. 분명 자기 비서가 액세서리 잘못 챙겨온 건데 나더러 새 걸 배상하라면서 60억이나 갈취하더니. 그거 제 전 재산이에요. 최 사장님, 꼭 제 편 들어주셔야 해요.”하연은 입꼬리를 올리며 저도 모르게 여정을 비웃었다.그도 그럴 게, 여정의 말에는 일말의 논리도 없었으니까.때문에 진실은 분명 다를 거라는 걸 확신했
하연은 입가에 냉소를 지었다.“60억이 걸린 일인데 별것도 아닌 일이라니 여정 씨 경제적으로 참 여유롭나 봐요?”여정은 그 순간 등골이 오싹해 하연의 눈도 제대로 마주 보지 못했다.“사장님, 저...”하연은 여정의 말을 못 알아들은 척 여전히 여정 편을 들 것처럼 굴었다.“아무 말도 필요 없어요. 여정 씨는 우리 회사 소속 연예인인데, 제가 당연히 여정 씨를 지켜줘야죠. CCTV를 확인해서 만약 VERE의 신 대표가 정말 잘못했다면 제가 여정 씨 편 되어줄게요.”“최 사장님, 그게...”하연은 진작 여정의 속내를 꿰뚫어 보았기에 거리낌 없이 물었다.“왜요? 혹시 뭐 켕기는 구석이라도 있어요?”“아니요... 없어요.”“없다면 같이 CCTV 확인하러 가요. 사실을 짚고 넘어가야죠.”여정은 하연이 계속 고집하자 막고 싶어도 막을 수 없어 마음이 혼란스러웠다.‘어떡하지? 어떡해야 하지?’“가요, 여정 씨.”하연의 재촉에 여정은 심호흡하고 마지못해 하연을 따라 감시실로 향했다.하지만 하연이 도착했을 때 하성이 이미 안에 있었다.“오빠, 행사 시작하지 않았어요? 왜 안 갔어요?”하성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여정을 바라봤다.하지만 여정은 그런 하성의 눈빛을 놓쳐버리고 말았다. 오히려 하성을 본 순간 마지막 지푸라기라도 잡은 것처럼 다급히 하성의 팔을 잡으며 말했다.“선배도 마침 있었네요. 그 현장에 선배도 있었으니 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제대로 말해줘요.”하성은 무표정한 얼굴로 손을 빼버렸다.그 순간 여정은 표정이 굳어 버린 채 낮은 소리로 말했다.“선배, 왜 그래요?”그때 CCTV 화면을 흘긋 확인한 하연은 상황을 대충 눈치채고는 팔짱을 끼고 여정을 바라봤다.“여정 씨, 할 말 더 있어요?”여정은 다급히 고개를 저었다.“선배, 선배가 생각하는 거 아니에요. 제 말 들어봐요.”하지만 하성은 여정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 하연에게 말했다.“대기실 CCTV는 내가 이미 확인했어. 가흔은 아무 잘못 없어.”그 말이 떨어지기
“위약금?”여정은 낮은 소리로 중얼거리더니 믿지 못하겠다는 듯 물었다.“무슨 위약금이요? 우리 계약서에 그런 것도 있었어요?”여정의 말에 하연이 오히려 궁금했다.“여정 씨는 계약서에 사인할 때 읽어도 보지 않나 봐요?”그 말에 여정은 가슴이 철렁했다.정말 그랬으니까.계약을 체결할 때 오직 하성의 마음을 얻을 목적뿐이었으니 디테일한 것은 신경도 쓰지 않았었다. 심지어 계약서 내용을 보지도 않고 사인했었다.그런데...여정은 말없이 옷소매를 꽉 움켜잡으며 당황한 마음을 달랬다. 목걸이를 배상한 것도 아름찬데 위약금이라니?하지만 현재로서 달리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위약금이 얼마인데요?”여정은 애써 덤덤한 척 물었지만 속은 이미 말이 아니었다.이에 하연이 어깨를 으쓱하며 사실대로 말했다.“지금 계약 해지한다면 계약서 내용에 따라 위약금 100억을 물어야 합니다. 물론 구체적인 금액은 내 기분에 따라 달라지겠지만.”그 말에 여정은 다리에 힘이 풀러 비틀거렸다.그 순간 여정이 든 생각은 오직 하나, 바로 이제 끝장이라는 거였다.“사장님, 저 좀 놔주세요. 제발.”여정은 분명 본인이 먼저 계약 해지를 꺼냈으면서 오히려 본인이 애원했다.마치 하연이 저를 괴롭히는 것처럼.“여정 씨, 계약 해지하겠다고 바락바락 소리치던 사람은 여정 씨 아니었어요? 우리 DS 그룹은 연예인의 자유로운 선택을 항상 응원합니다. 만약 방금 전 발언이 후회되어 계약 해지를 원하지 않는다고 해도 괜찮습니다. 물론 여정 씨의 미래 발전에 대해 회사 측에서 새로운 계획을 세울 테지만.”여정은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하연의 말에 대답했다.“네, 해지 안 할게요. 방금 전에는 제가 잘못했습니다. 그러니 제발 계약 해지만은 하지 말아주세요.”하연은 팔짱을 낀 채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여정을 보며 덤덤하게 말했다.“네, 그래요. 그러면... 앞으로 연예계에서 연예활동을 금지시키는 거로 하죠.”‘연예활동을 금지’라는 말은 마른 하늘의 날벼락처럼 여정을 내리쳤다.“네
여정은 정말 두려웠다.게다가 현 상황에 퇴로가 없었다.“정말 그렇게 할래요?”하연이 되묻자 여정은 하연이 자기 말에 동의했다고 생각해 환한 미소를 지었다.“네, 이렇게 해주세요. 저한테 기회만 주신다면 소처럼 일할게요.”하연은 열심히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후회 안 할 수 있어요?”“안 해요. 절대 안 해요.”“그럼 생각 좀 해볼게요.”여정은 무거운 짐을 벗은 듯 마음이 후련해졌다.“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하연이 떠난 뒤에야 여정은 몸에 힘이 빠졌다. 심지어 등은 이미 흠뻑 젖어 있었다.여정은 후회되는지 제 머리를 내리쳤다.‘그러게 애초에 왜 홀린 듯 DS 그룹에 합류해서는.’그래도 다행히 하연이 자신의 연예활동을 금지시키지만 않는다면 열심히 돈 벌어 이 지옥 같은 곳을 떠날 생각이었다.‘그때 다시 최하연한테 제대로 복수할 거야.’여정의 생각은 아주 완벽했다. 하지만 하연은 그런 여정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이튿날 바로 새로운 일을 배정해 주었다.그리고 새 일을 확인한 여정은 바로 불만을 토로했다.“뭐요? 지금 나더러 프런트 데스크에서 일하라고 했어요?”태훈은 프런트 직원들이 입는 유니폼을 여정에게 건네며 말했다.“이건 최 사장님 지시입니다.”“난 이 회사 연예인이라고요. 회사를 위해 큰돈을 벌어들일 시 있는데 프런트 직원이 말이 돼요? 이런 일을 누가 해요? 개도 안 하겠네. 난 안 해요. 최 사장님 만나게 해줘요.”태훈은 여전히 예의 바른 태도로 말했다.“안여정 씨, 사장님은 바쁘셔서 여정 씨와 만날 시간 없습니다. 그리고 프런트 직원으로 일하면 한 달에 120만은 벌 수 있습니다. 물론 연예인 대우만 못하겠지만, 그래도 기본적인 생활을 하는 데는 문제 없어요.”“120만 원으로 산다고요? 정 실장님 지금 장난해요? 내가 전 회사에서도 한 달에 몇억씩 벌었는데 120만 원으로 밥 한 끼도 못 사요.”태훈은 겉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만약 이 일자리가 싫으면 다른 일자리 배정해 드리죠. 회사 청소부라던
말을 마친 태훈은 긴 다리를 내디디며 떠나버리며 풀이 죽은 채 서 있는 여정만 덩그러니 남겨 두었다.맨 위층 사무실.사무실 의자에 앉기 바쁘게 태훈이 들어오자 하연은 눈을 들어 한번 확인하고는 계속 서류를 처리했다.태훈은 그 모습을 보더니 앞으로 다가가 공손하게 보고했다.“사장님, 말씀하신 대로 처리했습니다.”하연은 펜을 들고 큼지막하게 서류에 사인을 하며 말했다.“우선 이렇게 하는 거로 해. 나머지는 안여정이 어떻게 하는가에 달렸지 뭐.”“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또...”이윽고 태훈이 말을 잇지 못하자 하연은 펜을 멈칫하며 눈을 들었다.“무슨 일인데 그래?”이에 태훈은 대답하는 대신 질문했다.“사장님, 오늘 뉴스 봤습니까? LS 그룹이 정부와 체결한 부지 착공식이 보도됐는데...”하연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임모연이 이렇게 빨리 움직였다고?’이제 고작 보름이 지났는데 벌써 성동 부지를 손에 넣고 착공에 들어갔다니.그 시각, B 시 뉴스에는 모두 이 건에 대해 보도하고 있었다. 티브이 속 모연은 도급업자 신분으로 환하게 웃으며 착공식에 참석했다.시 영도들마저 이번 프로젝트를 중시하고 있었기에 테이프 커팅 이식에 직접 참석해 그 장면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게다가 이제 막 일어선 신흥 그룹인 LS 그룹도 이번 사건을 계기로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DS 그룹의 이사들은 이 뉴스를 본 뒤 연신 한숨을 내쉬었다.“아침에 최 사장더러 이 프로젝트에 뛰어들라고 하니 그렇게 말을 안 듣고 무슨 새로운 분야에 뛰어든다 하더니. 이제 봐요, 눈앞에 있던 고깃덩이를 남의 입에 넣어주게 생겼으니. 우리한테는 국물 한 모금도 안 차려지겠네.”“그러니까 부동산은 전망이 좋고 정부도 중요시하는 데다 밑질 리 없는 사업이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그렇게 좋은 기회를 이렇게 날리다니.”“애초에 우리 DS 그룹도 이 사업에 뛰어들었으면 LS 그룹에 이렇게 좋은 일이 차려지지도 않았을 텐데. LS 그룹이 어디 우리와 비교할 감량이 되기나 해요?”“아쉽네,
“하지만 이렇게 좋은 프로젝트를 놓쳤다는 게 너무 아쉽네요.”그때 누군가 한숨을 푹 쉬며 말했다.“이럴 줄 알았으면 재산 싹싹 끌어다 투자하는 건데. 그러면 아주 크게 벌었을 텐데 말입니다.”“...”호현욱은 싱긋 웃으며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난 역시 안목이 있다니까.’이제 공사가 시작되었으니 다음 달이면 새로운 건물이 개장될 거고, 그러면 돈을 끌어 모을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누가 왔는지 보세요.”그때 누군가 갑자기 말하는 바람에 사람들은 시선을 모두 오른쪽으로 돌렸다.“이게 누굽니까? 최 사장님 아닙니까? 자, 우리 모두 최 사장님과 얘기나 나눕시다.”그중 한 이사의 제의에 다른 이사들도 맞장구치며 뒤를 따랐다.“최 사장님.”하연은 저를 부르는 소리에 무의식적으로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봤다. 그랬더니 회사 이사진이 무리 지어 저에게로 오고 있었다.“무슨 일이죠?”맨 앞에 선 정태권, 정 이사가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요즘 뉴스는 보셨습니까? 성동 프로젝트가 착공되었다는 걸 이미 아셨겠죠?”상대의 의도를 파악한 순간 하연의 눈빛은 한층 어두워졌다.“이 프로젝트에 관심이 많은 것 같은데, 아쉽게도 DS 그룹은 참여하지 않았습니다.”정태권은 그것만 생각하면 화가 치밀었다.“DS 그룹이 이 프로젝트에 뛰어들지 않은 게 모두 최 사장님이 극구 반대한 탓 아니겠습니까? 이제 눈앞에 있던 고깃덩이를 다른 사람이 채갔는데, 최 사장님 리더십이 심히 의심되네요.”“내 말이! 우리가 만약 애초에 성동 프로젝트에 뛰어들면 LS 그룹이 이렇게 단번에 주목받을 일도 없었겠죠.”“사장님이 말씀하신 위 미디어는 전혀 차도가 보이지 않던데, 엔터 쪽에도 내세울 사람이라곤 최하성 밖에 더 잇나요?”“그러니까 진작 말씀드렸잖습니까. 우리 회사는 그런 쪽에 서툴러 차라리 부동산에 뛰어들자고. 그랬으면 진작 돈방석에 앉았을 거 아닙니까?”“...”이사들이 한마디씩 보태며 하연을 몰아세우자 뒤에서 듣고 있던 호현욱은 미소를 숨길 수 없었다.“됐습
하연과 신가흔은 최씨 가문 저택 내에 있는 카페에서 만났다. 최하성이 돌아오지 않을 것을 확인한 후, 가흔은 안심하며 말했다. “이건 내가 후배로서 할아버지께 드리는 작은 선물이야. 대신 전해줘.” 하연은 선물을 한 번 보고 나서 물었다. “할아버지가 가끔 너랑 하성 오빠를 언급하시는데, 직접 찾아뵐 생각은 없어?” 가흔은 차분한 표정으로 말했다. “지금 상황에서 그럴 필요가 있을까?” 해외에서 지내는 동안 가흔은 더욱 냉정하고 이성적으로 변해 있었다. “내가 할아버지를 만나면 하성 오빠가 분명 날 찾을 거야. 우리끼리 만날 일은 없을 테니까, 더 이상 얽히고 싶지 않아.” 하연은 이해하지 못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왜 그렇게 하성 오빠를 계속 피하려고 해?” 하연이 DS그룹 홍보팀 직원들에게 들은 바로는, 하성이 그 당시의 여자 연예인과 관련된 사건은 단순한 해프닝에 불과했고, 별다른 문제도 없었다. 이후 공식 입장을 내고 해명도 했었다. 하성이 가흔에게 설명했을 테지만, 가흔은 끝내 떠나고 돌아오지 않았다. 가흔은 차분하게 말했다. “우리 사이엔 기본적인 신뢰가 없어. 서로를 의심하며 살아가는 게 너무 힘들었어.” 이 말에 하연은 대충 상황을 이해하고 커피를 저으며 한숨을 쉬었다. “하성 오빠의 상태가 좋지 않아. 몇 달째 스케줄도 없고, 녹음실에 틀어박혀 곡만 쓰고 있어. 오빠도 분명 너를 많이 그리워할 거야.” 가흔은 슬며시 웃었지만, 그 미소는 금세 사라졌다. “사람마다 이별에 적응하는 시간이 달라. 시간이 좀 더 지나면 괜찮아질지도 몰라.” 가흔은 더는 이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아 화제를 바꿨다. “이번에 F국에는 무슨 일 때문에 온 거야?” “보석 복원 작업을 맡았어. 의뢰 금액이 엄청나게 높더라. 전 세계에서 이 복원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세 명도 안 돼.” 하연은 놀라며 물었다. “네가 그 중에 한 명으로 뽑힌 거야?” 가흔은 고개를 끄덕였다.
“제 동생은 부 대표님 사람들 덕분에 잘 보살핌을 받고 있어요. 저는 대표님을 믿습니다. 그래서 철수하고 싶지 않아요. 게다가 임무도 아직 끝나지 않았잖아요.” 희서는 등을 꼿꼿이 세우며 말했다. “송혜선이 부씨 가문에서 둘째 아이를 낳게 된다면, 대표님의 길에 큰 장애가 될 것입니다. 이 문제를 해결해야만 저는 떠날 수 있습니다.” 희서의 단호한 태도에 상혁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럼 이제는 원신민과 직접 연락해. 황연지가 너에게 연락해도 대응할 필요 없어.” “알겠습니다.” 희서는 차를 마신 뒤 자리에서 일어났고, 하연은 원신미를 대신해 직접 희서를 배웅했다. “우희서 씨, B시는 위험한 곳이에요. 만약 위험을 마주하게 되면 이 번호로 연락해요. 도와줄 사람이 있을 거예요.” 하연은 펜을 꺼내 우희서의 손바닥에 번호를 적으며 말했다. “꼭 기억해야 해요.” 희서는 하연을 바라보며 잠시 넋을 잃었다. 하연은 향긋한 향기가 나는 우아한 여성이었지만, 결코 쉽게 다룰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다. 희서는 물었다. “실례가 안 된다면... 혹시 최하연 씨인가요?” 하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절 알아요?” “황연지를 만날 때마다, 황연지 씨가 항상 최하연 씨 이야기를 많이 하더라고요.”연지가 하연을 언급할 때는 언제나 아쉬움이 가득한 말투였다. 왜 최하연은 이렇게 모든 것을 쉽게 얻었는지, 왜 자신은 상혁의 사랑을 받을 수 없었는지에 대해 불만을 털어놓곤 했다. 희서는 연지가 늘 이런 이야기를 할 때마다 조용히 듣고 있었지만, 그때마다 마음이 아팠다. 하지만 오늘 하연을 직접 만나고 나서야 비로소 깨달았다. 하연은 상혁과 완벽하게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둘은 마치 천생연분처럼 잘 어울렸다. 하연이 물었다. “황연지가 저에 대해 뭐라고 말했어요?” 희서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하연은 그 모습에 대충 짐작이 갔지만, 화내지 않고 부드럽게 말했다. “사랑하는 마
하연은 결국 상혁의 집에 계속 머물기로 했다. 상혁은 하연과 함께 지내며 그녀가 다시 떠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하연이 일이 있을 때면, 상혁은 사람을 시켜 그녀를 보호하며 최대한 비밀리에 움직이게 했다. DL그룹 내부는 너무 복잡했고, 자신이 섣불리 드러나면 안 된다는 것을 하연도 잘 알고 있었다.하연은 상혁의 무릎 위에 앉아 장난스럽게 그를 감싸 안으며 말했다. “나, 마치 당신이 기르는 애인 같아요.” 상혁은 일 처리를 멈추지 않고 가볍게 웃으며 대답했다. “애인은 그렇게 키우는 게 아니야.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원하는 건 다 줘야지. 마치 애완동물처럼, 하나씩 천천히 줘야 하는 거야.” “정말 애완동물 키워본 적 있어요?” 하연이 묻자 상혁은 냉정하게 대답했다. “남이 키우는 걸 본 적은 있어.” B시 쪽에서는 가끔씩 소식이 들려왔다. 어둠 속에 숨어 있는 첩자들이 작은 정보까지 빠짐없이 전달했다. 그러던 어느 날, 원신민이 보고했다. “우희서 씨가 F국에 도착했습니다. 대표님을 뵙고 싶어 한다고 합니다.” 하연은 의아하게 물었다. “우희서가 누구예요?” 상혁은 짧게 지시했다. “이곳으로 데려와.” 원신민은 잠시 당황했지만, 곧바로 고개를 숙였다. 하연이 곁에 있는 것을 보며, 상혁이 그녀를 얼마나 신뢰하는지 느낄 수 있었다. 몇 주 전까지 둘은 싸우고 냉전 중이었지만, 지금은 예전의 믿음이 돌아온 것처럼 보였다. 상혁이 설명했다. “내 첩자야.” 곧 우희서가 도착했다. 그녀는 모자와 마스크를 착용한 채로 방에 들어섰고, 하연이 주인의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 잠시 놀랐다. 상혁은 옆에 앉아 서류를 보며 무심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부 대표님.” 우희서는 정중하게 인사했다. 상혁은 자리를 가리키며 앉으라고 권했다. 하연은 희서 앞에 차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모자와 마스크는 벗어도 돼요. 여긴 안전해요.” 우희서는 잠시 망설였지만 상혁의 고개 끄덕임을
상혁은 하연의 허리를 감싸며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지었다. “우리 어머니가 뭐라 할 것 같아? 나랑 같이 나가서 확인해볼래?”“뭘 확인해요? 내가 진짜 페르시안 고양이라도 된다는 거예요?” 하연은 긴장하며 반문했다.상혁은 웃음을 터뜨리며 안방을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그가 움직이는 소리를 듣고 하연은 의아해했다. “당신,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고양이가 있다고 한 거예요?”“그냥 없애면 돼.” 상혁은 물건 하나를 집어 들더니 창밖으로 세게 던졌다. 이때, 큰 소리가 났다.조진숙이 깜짝 놀라며 물었다. “상혁아, 무슨 소리야?”“고양이를 안으려고 했는데, 창 문 밖으로 도망치다가 떨어졌어요.”“뭐라고?” 조진숙은 충격을 받았다. “떨어지다니, 어디로 떨어진 거야? 밑으로? 여기 고층인데 다치진 않았겠지?”“바로 뒤가 호수라서 다치지는 않았을 거예요.”조진숙은 여전히 안절부절못하며 말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고양이 하나 제대로 못 잡는 거야?”상혁은 하연과 눈을 마주치며 대답했다.“새 고양이 하나 사서 원신민한테 보상해주면 괜찮을 거예요.”조진숙은 여전히 안도하지 못하며 말했다.“길러 온 정이 있는데 새로 산 고양이와는 전혀 다르지. 그래도 생명이잖아. 원신민 만나면 제대로 사과해.”상혁은 고개를 끄덕였다.하연은 상혁의 거짓말이 이렇게 자연스럽게 나오는 모습을 보며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상혁은 하연에게 몸을 가까이하며 귓가에 속삭였다. “왜 웃어? 네가 저지른 일이잖아.”간질거리는 느낌에 하연은 본능적으로 몸을 피하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모가 아직 밖에 있어요.”상혁은 작은 소리로 대답했다. “밖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아.”상혁은 특히 이런 금기의 느낌을 좋아했다. 그는 하연에게 천천히, 부드럽게 입맞춤하며 물었다.“아직도 아파?”하연은 작게 대답했다. “그만 하고 빨리 가요.”조진숙은 아들이 나오지 않자 참다못해 물었다. “상혁아, 거기서 뭐 하고 있니?”“고양이가 어질러 놓은 거
하연이 눈을 떴을 때, 도시는 이미 밤의 장막에 휩싸여 있었다. 그녀는 흐릿한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며 몸이 묵직하게 아픈 것을 느꼈다.오랜만에 욕구를 해소할 수 있었던 상혁은 특히나 격렬했다. 소파에서 시작해 주방, 다시 안방, 마지막으로 욕실까지, 온 집안의 모든 공간을 사용했다. 하연의 온몸은 마치 압사당한 듯 피곤했고, 손가락 하나 움직이는 것조차 힘들었다.방 안에는 은은한 아로마 향이 퍼져 있었고, 어둑한 조명이 켜져 있었다. 공기 중에는 이미 사랑의 흔적이 사라졌고, 상혁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하연은 침대에 누운 채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그곳에는 마치 천장이 아닌 신들의 조각상이 장엄하게 자리하고 있는 듯 보였다. 신들은 어두운 밤 속에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하연의 마음은 쓸쓸했다. 어젯밤, 둘이 동시에 절정을 맞았을 때, 상혁이 그녀의 손을 잡고 신들을 가리켰던 그 순간이 떠올랐다. 그것은 단순한 육체적 쾌락을 넘어, 정신적으로도 거부할 수 없는 극도의 미친 감정이었다.하연은 다시 샤워할 필요는 없었다. 상혁이 욕실에서 이미 그녀를 씻겨주었기 때문이다.하연은 침대에서 내려왔으나, 문이 잠겨 있는 것을 발견했다. 별다른 생각 없이 발걸음을 옮겨 발코니 쪽으로 다가갔고, 그곳에서 외부로 통하는 또 다른 문을 발견했다. 문에 가까이 다가가자 소리가 들려왔다.“네 아버지를 조사해보라고 했잖아. 했어?” 조진숙의 목소리였다.하연은 걸음을 멈췄다.조진숙이 갑자기 찾아왔고, 상혁은 서둘러 셔츠를 하나 걸치고 나갔다. 그와 하연이 얽히며 셔츠 목 부분이 구겨져 있었다. 그는 눈살을 찌푸렸다. “조사했어요. 고나희의 사고는 단순 사고였고, 아버지와는 관련이 없어요.”“고경수가 비리로 돈을 챙긴 걸 얼마나 알아냈어? 난 그 명목상의 숫자만 믿을 수는 없어. 배를 채운 흔적이 있는지 다 밝혀냈어?” “DL그룹은 아버지 거예요. 아버지가 그런 실수를 하실 리 없죠.” 조진숙은 창가 쪽으로 걸어갔다. 많은 시련을 겪어온 여성이기에,
“왔어요?” 상혁은 놀라움이 가득한 여자 목소라가 들렸다. 상혁은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주방에서 서둘러 나오는 하연이 국을 들고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하연이는 웃으며 물었다. “왜요?”국이 너무 뜨거웠던지, 그녀는 재빨리 그릇을 내려놓고 귀를 만지며 식히고 있었다. 상혁의 얼굴에는 아무런 감정이 없었고, 목소리까지 차가웠다. “정말 안 가고 기다리고 있었어?” 하연은 의아해하며 답했다. “당신이 기다리라고 했잖아요. 그래서 당신이 돌아오길 기다리고 있었죠. 그런데 당신이 너무 안 와서, 심심해서 뭐 만들어 먹을 게 없나 하고 요리 만드는 법을 찾아보다가 뭘 좀 만들어 먹었어요. 다행히 냉장고도 가득 차 있었고 장비도 다 갖추어져 있어서 문제없었어요.” 그녀가 말할 때, 분명히 기쁜 마음과 행복한 표정이었다. 하연이 말을 마치자마자, 상혁은 두세 걸음에 그녀를 끌어당겼다. 그는 손을 잡고 그대로 바로 하연이를 품 안에 가둬버렸다. 상혁의 힘은 상당히 강했고, 하연은 고통스러운 신음 소리를 냈다. “음... 왜 그래요?” 하연은 상혁의 품에서 안정을 느꼈지만, 그의 강한 포옹에 약간 당황했다. 그녀의 몸에서 풍기는 평온한 향기가 상혁의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혔다. 상혁은 눈을 감고, 목소리가 거칠고 낮았다. “난 네가 간 줄 알았어.” 하연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그의 옷깃을 살며시 잡았다. “기다린다고 말했잖아요. 그러니 안 갔죠.” 그녀는 상혁의 감정이 평소와 다르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방금 전, 상혁은 본가에서 싸움 끝에 기분이 상한 채로 돌아왔다. 부남준은 송혜선을 보호하며 소리쳤다.“형, 이 아이도 한 생명이에요! 아버지의 혈육이잖아요!”상혁은 바로 남준의 옷깃을 잡고 주먹을 날렸다. 집사가 나서서 뜯어말리지 않았다면 남준은 일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상혁의 목에 난 상처를 알아보고 하연은 황급히 그를 밀어내며 물었다. “무슨 일 있었죠? 교통사고 처리하러 간
하연은 상혁의 집에서 밤을 지새웠다.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한 채, 새벽녘에 깨어나니 집안은 고요했고 상혁이 돌아온 흔적은 없었다. 그녀는 뒤척이며 잠을 청할 수 없어 핸드폰을 열었고 보니, 마침 서여은이 사진을 올려놓았다. 외부 취재 중이라는 설명과 함께 사진에는 ‘큰 뉴스’라는 글이 적혀 있었다. 두 시간 뒤, 여은이 다시 글을 남겼다. [뉴스가 없어졌어.]하연은 궁금해졌다. [어떤 뉴스?][DL그룹과 관련된 일이야. 전에 조사받았던 고경수 기억나지? 그 사람 딸이 죽었대. 원래 뉴스에 나올 예정이었는데, 누군가 큰돈을 써서 기사를 막아버린 모양이야.]하연은 짐작할 수 있었다. DL그룹과 관련된 일이라면 상혁이 처리했을 가능성이 컸다. 여은이 사건 현장의 사진을 한 장 보냈다. 사진 속 여성은 운전석에 앉아있었고, 절반가량의 얼굴이 드러났는데 표정은 죽음을 앞둔 사람처럼 처참했다. 하연은 사진을 확대했다. [이 여자를 어디서 본 것 같은데.]여은이 바로 하연에게 전화를 걸었다. [고나희야, 고경수의 딸이잖아. 애지중지하게 키워졌는데 세상 물정은 잘 모르는 아이였지. 그런데 네가 정말 고나희를 본 적 있어?]“한 번 스쳐 지나가며 본 적 있어.” 하연은 기억을 떠올리려 애썼고, 드디어 생각이 났다. 얼마 전 정다영을 만나러 호텔에 갔을 때, 고나희와 스쳐 지나갔었다. 그때 고나희가 하연과 부딪혔고, 부남준이 다정하게 하연을 붙잡아주며 고나희에게 아주 화를 내면서 잘 보고 다니라고 말했다.하연은 그때 남준이 자신에게 하는 말인 줄 알고 반박하려다, 남준의 시선이 고나희를 향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고나희는 아무 말 없이 자리를 떠났고, 이후 하연과 남준은 각자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저 아주 사소한 일이었지만, 하연은 고나희를 이렇게 다시 보게 될 줄은 몰랐다. 그것도 그녀의 사망 소식으로.[참, 고나희의 뱃속에 아이도 있었다고 하더라.]하연은 깜짝 놀라며 물었다. “몇 개월이었는데?”[5,6개월쯤 되었을 거야.]하지만
“형님 얼굴도 별로 좋아 보이지 않네요.” 상혁은 대꾸하지 않았다. “그만, 아침부터 무슨 쓸데없는 소리를 해. 어서 앉아라.” 부동건이 꾸짖었다. “어젯밤에 술 마셨어요?” 남준은 대수롭지 않게 앉으며 말했다. “접대하는 자리여서 어쩔 수 없었다.” “남자가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상혁이 처럼 남준이 너도 당연히 그런 자리는 해야 해.” 송혜선은 웃으며 중재했고, 말 하나하나에 의미가 담겨 있었다. 상혁은 집사가 가져온 우유 외에는 아무것도 손대지 않았다. 반면 부남준은 여유롭게 식사를 이어갔다. “형, 들었어요. 고경수의 딸이 사고를 당했다면서요.” “소식 한번 빠르군.” “검사 보고서도 확인했어요. 그 여자아이, 임신까지 하고 있었다면서요. 그런데 아버지가 누군지는 밝혀졌나요?” 이 질문은 부동건의 주의를 끌었다. “아이? 아이의 아버지가 누구냐? 상혁아, 왜 나한테는 이런 얘기는 하지 않은 거냐?” “떳떳한 사이가 아닌 것 같아서 말씀들이지 않았습니다. 여자가 잘못된 길을 걷고, 잘못된 남자를 믿는 일은 흔합니다.” 상혁은 남준을 힐끗 보고 말했다. “본인이 굳이 알리지 않았다는 건, 아버지가 누군지...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겠죠. 그리고 고경수의 집안은 이미 파란 속에 휩싸여 있으니, 괜한 일을 벌이기보다는 조용히 지나가는 게 더 낫다고 생각했습니다.” 남준은 아침을 먹으며 웃었다. “고경수가 DL그룹에서 문제를 일으킨 것을 누군가 알았고, 그걸 감추기 위해서 자기 딸을 이용해 DL그룹 고위 간부에게 연결하게 해줘서 둘 사이에 아이가 만들어졌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냥 떠본 말이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부동건은 남준의 말의 조금씩 흥미를 가지기 시작했다. “계속해 봐라.” “제 말은, 고경수가 자기 딸을 이용해 누구에게든 신세를 졌을지도 모른다는 겁니다.” 상혁이 갑자기 미소를 지으며 모두 그를 바라보았다. 상혁의 하얀 손가락 관절이 탁자를 가볍게 두드리며, 무심한 어조로
“지금 정규인은 어디에 있나?” “제가 확인한 바로는, 아직 동남아에 있습니다.” 상혁은 외투를 집어 들고 일어섰다. “현장에 가보자.” 나가기 전에 상혁은 다시 침실로 발길을 돌렸다. 하연은 그네 의자에 앉아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는 뒤에서 하연의 긴 머리를 정리해주며 말했다. “DL그룹 내부에 문제가 생겨서 처리해야 해. 시간이 좀 걸릴 거야. 기다려줄래?” 하연은 상혁의 눈 속에 아직 남아 있는 욕망을 알아차렸다. “기다릴게.” 상혁은 미소를 지으며 빠르게 나갔다. 상혁이 탄 검은 차가 빠르게 출발했고, 멀지 않은 곳에 주차되어 있던 차가 상혁이 떠나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 뒷좌석에 있던 남자는 긴장을 풀며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잘했어.” 옆에 있던 여자는 몸을 떨며 좌석에서 미끄러져 반쯤 무릎을 꿇은 자세로 말했다. “상무님, 정규인의 아내가 진작부터 자기 남편과 고경수의 딸에 대한 불륜 사실을 알고 있었어요. 경찰이 정규인의 아내를 의심하지 않을까요?” 부남준은 그녀를 흘끗 보고 냉소적으로 말했다. “정규인의 아내는 오늘 밤 밖에서 돈 쓰느라 많이 돌아다녔어. 인증과 물증이 다 있지. 이번 사고는 단순한 사고일 뿐이지, 인위적인 것이 아니야.” “황연지.” 남준은 몸을 앞으로 기울여 연지의 턱을 들어 올렸다. “부상혁에게도 그렇게 말해.” 연지는 약간의 공포를 담은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이미 재무 보고서를 받았어요. 아마 저를 의심할지도 몰라요.” “네가 부상혁에게 충성을 다 바치는데, 왜 너를 의심하겠어?” 남준은 흥미로운 듯 그녀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그날 최하연을 다치게 한 건 정말 잘했어.” 그날 그 일은 바로 남준이 직접 지시한 것이었다. 연지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 사람... 이미 저를 의심하고 있어요. 평소라면 제가 그런 행동을 할 리가 없다는 걸 알 거예요. 게다가, 그 사건은 그 사람과 하연에게 아무런 영향도 주지 않았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