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겠어요, 걱정하지 마세요.”강영숙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이제 집에 너와 나뿐인데, 내가 어떻게 널 걱정하지 않을 수 있겠어? 참, 하연은 어때?”하연을 언급하자 서준은 그저 덤덤하게 대답했다.“잘 있으니 걱정하지 마세요.”“하! 하연은 정말 좋은 애지만 아쉽게도 너와는 인연이 없는 듯하구나. 애초에 만약... 아니야, 예전 일을 자꾸 말해 뭐해? 얼른 휴식해.”“네, 할머니도 일찍 주무세요.”강영숙 방에서 나온 서준은 곧바로 제 침실로 향했다. 지난 3년 동안 서준은 거의 집을 비웠고 항상 하연이 서준 대신 집안일을 도맡아 해왔다.하지만 아이러니 하게도 이혼하니 오히려 집에 오는 횟수가 늘어났다.심지어 가끔 하연이 있던 그때가 그리웠다...서준은 제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안방에서 늘 나던 하연의 냄새는 이제 다 사라졌고, 흔적마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점점 사라지고 있었다.창가로 걸어간 서준은 야경을 바라보며 담배 하나를 꺼내 입에 물었다.희뿌연 담배 연기가 더해지자 서준의 모습은 왠지 더 서글퍼 보였다.한편, 강영숙은 언제 서준 방 앞에 도착했는지 문밖에서 서준을 바라봤다. 최향숙이 강영숙을 부축한 채로 서준을 부르려 했지만 강영숙이 얼른 막아 나섰다.이윽고 한숨을 내쉬고는 최향숙에게 낮은 소리로 말했다.“방으로 가지.”“네, 어르신”요즘 서준의 변화를 느낀 강영숙은 끝내 입을 열었다.“이따가 내 핸드폰 가져와. 내일 아침 일찍 하연한테 전화해 봐야겠으니까.”“네, 어르신.”다음날, 상혁의 방에서 깨어난 하연은 흐리멍덩한 상태로 시간을 확인했다. 그랬더니 뜻밖에도 벌써 8시가 되어 있었다.“하, 완전 깊게 잠들었네.”하연은 중얼거리며 이불을 걷고 일어났다.그때 하연의 눈에 가지런히 개어 있는 옷이 들어왔다. 그건 딱 봐도 상혁이 하연을 위해 준비한 거다.하연은 옷을 챙겨 얼른 드레스룸으로 향했다. 상혁이 고른 옷은 하연이 평소 즐겨 입는 스타일인 데다 사이즈까지 딱 맞았다.“너무 딱 맞는데?”하연이
하연은 따뜻한 우유를 손에 꼭 쥐고 만족스러운 듯 상혁을 바라봤다.“상혁 오빠, 능력을 감추고 있었네요. 이런 건 다 언제 배웠어요?”알고 지낸 지 그렇게 오래 되는데 하연은 상혁이 요리를 잘하는 것도 처음 알았다.“오래전에 배웠는데 이제야 써먹네.”가장 의미 깊은 건 하연이 겨우 본인이 한 음식을 먹었다는 거다.상혁은 웃음기 가득한 눈을 내리깔며 말했다.“맛있으면 앞으로 자주 해줄게.”“좋아요. 제가 먹을 복은 있나 봐요!”하연은 아무 생각도 없이 대답했다.아침 식사를 마친 뒤 상혁은 하연을 회사까지 바래다주었다.차에서 내린 하연은 상혁을 향해 손을 흔들며 떠나는 것까지 지켜본 뒤에야 회사로 들어갔다.그런데 그 모습을 마침 하성이 발견하고 말았다.“최하연!”하성은 성큼성큼 다가와 하연을 위아래로 훑어봤다. 그 모습에 하연은 어리둥절해서 물었다.“오빠, 뭘 그렇게 봐요?”“솔직히 말해. 너 어젯밤 외박했지?”“그게 무슨 소리예요?”하연은 난감해서 대답을 피했지만 하성이 쉽게 놓아줄 리 없었다. 심지어 이미 다 알고 있다는 표정으로 따져 물었다.“방금 부상혁이 너 데려다주던데. 말해 봐, 대체 무슨 상황이야?”“어... 오빠, 잘못 본 거 아니에요? 그럴 리가요. 나 늦어서 올라가 봐야 해요.”말을 마친 하연은 당장이라도 도망칠 것처럼 굴었다. 그 모습을 보며 하성은 피식 웃더니 고개를 저었다.“역시 딸은 크면 다 시집보내야 한다더니.”“오빠!”하연이 홍당무가 돼서 버럭 소리치자 하성은 웃음을 터뜨렸다.“알았어. 안 놀릴게. 상혁은 그나마 믿을 만하지만 매부가 되는 건... 더 지켜봐야 해.”‘나 최하성의 동생을 그렇게 쉽게 줄 수는 없지.’게다가 하성이 아니더라도 하민과 하경이 있기에 다 통과하기는 쉽지 않다.하성은 눈썹을 치켜 올리며 속으로 기회를 잡아 상혁을 제대로 시험해 봐야겠다고 결심했다.그때 하연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오빠, 우선 나를 상관하지 말고 오빠나 연애해요. 좋은 여자 많지 않으니까 인연
[하연아, 일 바빠?]하연은 싱긋 웃었다.“괜찮아요. 요즘 회사가 정상 궤도에 올라 그나마 괜찮아요.”[그렇다면 다행이고.]강영숙은 말하면서 기침을 몇 번 했다.그 소리에 하연은 눈살을 찌푸렸다.“할머니, 몸 괜찮으세요?”[괜찮아. 고질병이라 그래.]하연은 순간 걱정이 앞섰다. 하연이 한씨 저택에서 지내는 3년 동안 강영숙은 늘 하연에게 한결같이 잘해주고 따뜻하게 대해주었다.“혹시 의사한테 진찰받아 보셨어요?”[봤어. 너무 걱정하지 마. 한동안 얼굴 보지 못해서 얘기나 좀 할까 하고 전화했지.]“제가 저녁에 퇴근하고 찾아뵐 게요.”그 말에 강영숙은 환한 미소를 지었다.[정말? 그럼 너무 좋지, 집이 너무 썰렁했는데, 네가 이런 늙은이도 보러 와준다니까 기분이 좋네.]“할머니, 그런 말 마세요. 어찌 됐든 할머니는 저한테 늘 가족이세요.”강영숙은 저도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졌다.[역시 나 생각하는 건 하연이 너밖에 없어. 그래, 그럼 난 방해하지 않을 테니 일해.]“네, 할머니, 저녁에 봬요.”전화를 끊은 하연은 핸드폰을 옆에 내려놓았다.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려오더니 태훈이 사무실 안으로 들어왔다.“사장님, JJ 그룹 주 회장님이 찾아오셨어요.”“응, 우선 회의실로 안내해. 바로 갈 테니까.”“네, 사장님.”하연은 미리 준비했던 자료를 가지고 바로 문을 나섰다.미팅은 아주 순조롭게 진행되었고, 협력도 바로 합의하여 그날 오후 계약을 체결했다.계약서에 사인한 주현빈은 만족하는 듯 하연에게 손을 내밀었다.“최 사장님, 함께 잘해봅시다.”“네, 잘해봅시다. 잘 가르쳐 주세요.”“너무 겸손하시네요. 최 대표님 같은 분을 제가 뭐 가르칠 게 있다고. 함께 협력하고 함께 배우는 거죠.”“주 회장님이 선배이시니 제가 응당 배워야죠.”겸손하고 겸허한 하연의 말과 태도에 사람들의 호평은 끊이지 않았다.“주 회장님, 가시죠.”“가시죠.”일행은 모두 회의실에서 걸어 나왔다. 맨 앞에 선 하연과 현빈이 화기애애하게 토론하는 모습
민호가 급히 자신이 찾아낸 자료를 건네며 말했다.“찾아봤는데, 최근에 새로 설립된 LS 그룹이었어요.”“허, 새 회사가 이렇게 큰 패기를 가지고 있다니, 이렇게 중요한 땅을 한 번에 차지한 거야?”호현욱이 살짝 경악하며 말했다.“다른 건 뭐 더 알아냈어?”“LS 그룹은 겉으로 보이는 것처럼 그렇게 간단하지 않아요. ST 그룹과 한씨 가문과 관련이 있는 것 같아요...”“한씨 가문? 한서준?”“네, 맞아요.”“내 말이 맞는 것 같네. 한서준조차도 이 땅의 가치를 인정한다면 안 좋을 리가? 최하연, 쯧쯧, 이렇게 눈썰미가 없어서야, 이렇게 좋은 프로젝트를 놔두고 하지 않으려 하다니.”“네, 이사님! 이번에 최 사장님의 방향이 확실히 빗나갔어요. 물론 LS 그룹이 이 땅을 차지했지만, 그 회사 대표 혼자서는 먹을 수 없어요.”호현욱이 웃으며 말했다.“그러면 마침 우리에게 기회가 차려진 거잖아? LS 그룹 대표한테 연락해서 언제 한번 만나서 잘 이야기 좀 하자고 말씀드려봐.”“따로 시간 낼 필요 없어요, 지금 바로 가능해요. 제가 이미 LS 그룹의 임 대표님께 연락 드려 그쪽도 우리와 협력할 의향이 있다고 했어요.”호현욱은 손을 뻗어 민호의 어깨를 툭툭 치며 말했다.“정말 좋아, 잘했어! 일하는 게 갈수록 믿음직스럽네.”민호는 멋쩍게 웃으며 대답했다.“이게 다 호 이사님이 배양한 덕분이죠. 이사님을 따라 일을 하다 보니 제가 성장하고 많이 배운 거 아니겠습니까.”“그래, 잘해봐, 내가 잘해줄 테니. 임 대표와 만날 시간과 장소 좀 확인해 줘, 제대로 얘기해 봐야겠으니까.”“네, 호 이사님.”민호는 얼마 지나지 않고 시간과 장소를 받아왔다.호현욱도 망설이지 않고 운전기사에게 약속한 카페로 향하도록 명령했다.한편, 모연은 커피 한 잔을 주문하고 한참 동안 기다리고 있었다.자신과 만나기로 한 사람이 DS 그룹 그룹의 호현욱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모연의 기대는 커졌다.모연은 이미 호현욱에 대해 수소문하여 호현욱이 DS 그룹 그룹에서
“여기, 블랙커피 좀 주세요. 설탕은 넣지 말고요.”호현욱이 직원을 불러 주문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커피가 나오자 느긋하게 커피잔을 들어 입가에 대고 가볍게 한 모금 마셨다. “임 대표님이 고른 카페가 참 괜찮네요. 커피가 고소하고 맛이 좋네요.”모연의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앞으로는 기회가 되면 제가 커피를 많이 대접해야겠네요.”“음, 좋은 생각이네요.”두 사람이 서로 말을 주고받았고 그 누구도 양보하려 하지 않았다. 호현욱이 통제하기 쉬운 사람일 거라고 생각했던 모연은 호연욱의 의외의 모습에 놀랐다. 하지만 모연도 그렇게 호락호락하지는 않았다.커피 한 잔이 바닥나자, 모연이 일어서며 말했다.“호 이사님, 이제 더 이상 할 말이 없을 것 같은데, 여기서 그냥 일어날까요?”호현욱은 그제야 싱긋 웃으며 손에 들고 있던 커피잔을 천천히 내려놓으며 말했다.“임 대표님, 그렇게 조급할 필요 뭐 있나요, 안 그래요?”“아, 혹시 하실 말씀 더 있나요?”호현욱은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우리가 협력해야 하는 이상 서로를 신뢰하는 것이 첫걸음인데, 임 대표님은 저를 잘 믿지 않는 것 같네요.”모연은 호현욱이 전혀 감추려 하지 않고 직설적으로 나오는 모습을 보자 굳이 돌려서 말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게, 두 사람은 같은 목표를 갖고 있으니까.그녀는 바로 자리에 앉아서 말했다.“제가 실례했네요!”“괜찮아요, 협력도 한순간에 이루어지는 게 아니니까요.”모연이 직설적으로 말했다. “호 이사님은 현명한 분이시니 저도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죠.” “말씀하세요.”“LS 그룹이 성동 땅을 확보한 거 맞아요, 부동산 개발을 목적으로 땅을 확보한 거고요.”“현재로선 부동산 산업의 전망은 우리 모두 잘 알고 있잖아요. 이 땅은 지리적 위치가 우월하고 투자하면 확실히 손해를 보지 않는 장사예요.”“다만, 현재 LS 그룹의 수중에 있는 자금은 한정되어 있는데 호 이사님은 얼마나 투자할 수 있나요?”“...”호현욱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모연이 멀리 떠난 뒤 호현욱은 그제야 멀리에 있는 비서 민호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호 이사님, 시키실 일 있습니까?”호현욱은 어두운 눈으로 물었다.“내 손에 유동자금 얼마 정도 남았지?”“현재 사용할 수 있는 금액은 약 200억 정도입니다. 만약 이사님 명의로 된 부동산과 DS 그룹 지분까지 합치면 약 1000억 정도 있습니다.”그 말에 호현욱은 깊은 고민에 빠졌다.현재 이 판에 뛰어들지 말지.만약 뛰어들면 모든 재산을 걸어야 하고, 또 뛰어들지 않자니 이렇게 좋은 기회를 그대로 놓치고 싶지 않았다.“네 생각에 부동산이 계속 이대로 쭉 좋을 것 같아?”민호는 그 물음에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부동산이라면 걱정할 거 없지 않나요? 부동산은 항상 남는 장사 아닙니까?”호현욱도 그 말에 동의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다년간 이 바닥에서 굴러본 경험으로 봐도 부동산의 비전은 아주 좋다고 생각했으니. 만약 투자만 한다면 절대 밑지는 장사는 아닐 거다.게다가 이번에 수익을 내면 DS 그룹에서 하연과 우열을 가릴 필요도 없이 혼자만의 영역을 차지할 수 있으니, 이번 프로젝트가 최고의 발판이 아닐 수 없었다.“내 명의로 된 모든 부동산을 은행에 담보로 맡겨.”“이사님, 이건... 너무 경솔한 처사 아닙니까?”호현욱은 손을 휘휘 저으며 민호의 말을 잘랐다.“내 말대로 해.”“네, 이사님.”“그리고, DS 그룹 지분은 팔면 안 돼. 그것까지 팔면 물러날 곳이 없어.”호현욱은 입으로 중얼거리며 뭔가 생각하더니 잠시 뒤 말을 이었다.“암시장에 가서 사채 빌릴 수 있는 곳이 있나 알아봐. 빌릴 수 있으면 조금 빌려. 프로젝트로 돈을 벌면 다시 갚으면 되니까 문제없을 거야.”“이사님, 사채는 아무래도 위험하니 조심하는 게 좋을 듯싶습니다.”“아니야. 이번 프로젝트는 자금 유동이 바르니 아마 얼마 뒤면 바로 돈 들어올 거야. 큰 문제없어.”“하지만...”그 어떤 투자도 위험은 따릅니다.민호는 이 말을 하려다가 호현욱이 계속 고집하자
“하연이 왔구나?”창밖에서 열정적으로 저를 맞이하는 강영숙을 보자 하연은 뒤에 보이는 익숙한 모습을 무시하기로 했다.이윽고 얼른 차에서 내려 활짝 웃었다.“할머니!”강영숙은 너무 기뻐 하연의 팔을 잡아끌었다.“하연아, 정말 오랜만이구나.”그러면서 하연을 안으로 데리고 들어가며 이제 막 정원에 차를 세운 서준은 완전히 무시했다.멀리서부터 정원에 주차된 익숙한 차를 본 서준은 처음에는 본인이 잘못 봤다고 생각했지만 하연이 차에서 내리고 강영숙이 따뜻하게 맞이하는 모습을 보자 마음 한구석이 무언가에 세게 부딪힌 느낌이 들었다.하지만 곧바로 저도 모르게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서준이 차에서 내리자 최향숙이 다가와 마중했다.“도련님, 오셨어요?”“네.”서준은 가볍게 대답하고 최향숙에게 제 물건을 맡긴 뒤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갔다.하편, 강영숙은 거실에서 하연을 끌고 이것저것 물으며 즐겁게 대화를 나누었다. 현관에서부터 두 사람의 웃음소리를 들은 서주의 얼굴에는 웃음이 더욱 선명해졌다.그걸 본 최향숙도 서준이 웃는 걸 오랜만에 본다며 속으로 중얼거렸다.최향숙의 눈빛이 느껴졌는지 서준은 헛기침하며 본인의 감정을 숨기더니 이내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온 뒤 거실로 들어갔다.“할머니!”서준의 목소리에 무의식적으로 고래를 돌린 강영숙의 낯빛은 순간 어두워지더니 퉁명스럽게 말했다.“평소에 집에 오지도 않더니 내가 귀한 손님 모셔왔을 때 왜 하필 오고 그래?”서준은 아무 설명도 하지 않고 덤덤하게 대답했다.“오늘 회사 일이 바쁘지 않아 할머니 보러 왔어요.”강영숙은 서준에게 시간을 할애하기도 귀찮다는 듯 하연을 끌고 위층으로 올라갔다.“가자, 하연아, 할머니가 너한테 줄 선물 준비했는데 같이 보러 가자.”하연이 강영숙에게 끌려 위층으로 올라가는 바람에 거실에는 서준만 멍하니 남게 되었다.하지만 그래도 서준은 기분이 좋아 곧바로 주방으로 향했다.강영숙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하연을 끌고 침실로 가며 낮은 소리로 중얼거렸다.“하연아, 화내지 마.
강영숙은 기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하연을 끌고 침실 솔파에 앉았다.“여기서 잠깐만 기다려, 내가 물건 가지러 갈게.”“뭘 가지러 가세요? 제가 가져올게요.”“괜찮아. 내가 가져오면 돼.”강영숙은 말하면서 다락방으로 들어가더니 한참 뒤 손에 상자 하나를 들고나왔다.“하연아, 너한테 특별히 줄 건 없고, 이건 내가 서준이 할아버지와 결혼할 때 챙겨온 혼수야.”그러면서 상자를 열어 안에 있는 비취 팔찌를 꺼내 하연의 손을 잡았다.“이건 너한테 주는 선물이야.”“할머니, 이건 너무 귀중합니다.”하연이 거절했지만 강영숙은 그럴 기회조차 주지 않고 하연의 손에 팔찌를 끼워주었다.“귀중하고 말고가 뭐 있어? 내 마음인데. 하연아, 뭐가 됐든 할머니 마음속에 너는 내 손녀나 마찬가지야. 피가 섞이지 않았어도.”“할머니.”“예쁘네.”강영숙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앞으로 어느 집 자식이 너와 결혼할지는 모르겠지만, 그게 누구든 안목과 복이 있는 사내라는 건 사실이겠지.”하연은 왠지 부끄러웠다.“할머니, 저...”“착해 빠져서는. 너만 좋으면 된다.”강영숙의 위로에 하연은 코끝이 시큰거렸다.“네, 알았어요, 할머니.”두 사람은 침실에서 한참 동안 얘기 나누다가 함께 저녁 식사를 했다. 하연의 방문에 강영숙도 모처럼 기뻐했고 두 사람 사이에 웃음꽃이 떠나지 않았다.반면 서준은 계속 두 사람 옆에 있었지만 오히려 꿔다 놓은 보릿자루 같았다.강영숙이 휴식을 취한 뒤 집을 나선 하연은 정원에서 진작 기다리고 있던 서준을 만났다.하연은 가던 걸음을 우뚝 멈추고 뭐라 말하려 했지만 그 전에 서준이 먼저 입을 열었다.“할머니가 이렇게 기뻐하는 거 오랜만이야. 고마워.”“나한테 고마워할 거 없어. 난 그냥 할머니랑 같이 있어 드리러 온 거니까.”“응, 그동안 할머니 몸이 안 좋았거든. 난 회사 일 때문에...”“알아, 한 대표님이야 매일 바쁘겠지. 하지만 할머니는 연세도 있으시니 시간 내서 곁에 자주 같이 있어 드려.”“
하연과 신가흔은 최씨 가문 저택 내에 있는 카페에서 만났다. 최하성이 돌아오지 않을 것을 확인한 후, 가흔은 안심하며 말했다. “이건 내가 후배로서 할아버지께 드리는 작은 선물이야. 대신 전해줘.” 하연은 선물을 한 번 보고 나서 물었다. “할아버지가 가끔 너랑 하성 오빠를 언급하시는데, 직접 찾아뵐 생각은 없어?” 가흔은 차분한 표정으로 말했다. “지금 상황에서 그럴 필요가 있을까?” 해외에서 지내는 동안 가흔은 더욱 냉정하고 이성적으로 변해 있었다. “내가 할아버지를 만나면 하성 오빠가 분명 날 찾을 거야. 우리끼리 만날 일은 없을 테니까, 더 이상 얽히고 싶지 않아.” 하연은 이해하지 못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왜 그렇게 하성 오빠를 계속 피하려고 해?” 하연이 DS그룹 홍보팀 직원들에게 들은 바로는, 하성이 그 당시의 여자 연예인과 관련된 사건은 단순한 해프닝에 불과했고, 별다른 문제도 없었다. 이후 공식 입장을 내고 해명도 했었다. 하성이 가흔에게 설명했을 테지만, 가흔은 끝내 떠나고 돌아오지 않았다. 가흔은 차분하게 말했다. “우리 사이엔 기본적인 신뢰가 없어. 서로를 의심하며 살아가는 게 너무 힘들었어.” 이 말에 하연은 대충 상황을 이해하고 커피를 저으며 한숨을 쉬었다. “하성 오빠의 상태가 좋지 않아. 몇 달째 스케줄도 없고, 녹음실에 틀어박혀 곡만 쓰고 있어. 오빠도 분명 너를 많이 그리워할 거야.” 가흔은 슬며시 웃었지만, 그 미소는 금세 사라졌다. “사람마다 이별에 적응하는 시간이 달라. 시간이 좀 더 지나면 괜찮아질지도 몰라.” 가흔은 더는 이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아 화제를 바꿨다. “이번에 F국에는 무슨 일 때문에 온 거야?” “보석 복원 작업을 맡았어. 의뢰 금액이 엄청나게 높더라. 전 세계에서 이 복원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세 명도 안 돼.” 하연은 놀라며 물었다. “네가 그 중에 한 명으로 뽑힌 거야?” 가흔은 고개를 끄덕였다.
“제 동생은 부 대표님 사람들 덕분에 잘 보살핌을 받고 있어요. 저는 대표님을 믿습니다. 그래서 철수하고 싶지 않아요. 게다가 임무도 아직 끝나지 않았잖아요.” 희서는 등을 꼿꼿이 세우며 말했다. “송혜선이 부씨 가문에서 둘째 아이를 낳게 된다면, 대표님의 길에 큰 장애가 될 것입니다. 이 문제를 해결해야만 저는 떠날 수 있습니다.” 희서의 단호한 태도에 상혁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럼 이제는 원신민과 직접 연락해. 황연지가 너에게 연락해도 대응할 필요 없어.” “알겠습니다.” 희서는 차를 마신 뒤 자리에서 일어났고, 하연은 원신미를 대신해 직접 희서를 배웅했다. “우희서 씨, B시는 위험한 곳이에요. 만약 위험을 마주하게 되면 이 번호로 연락해요. 도와줄 사람이 있을 거예요.” 하연은 펜을 꺼내 우희서의 손바닥에 번호를 적으며 말했다. “꼭 기억해야 해요.” 희서는 하연을 바라보며 잠시 넋을 잃었다. 하연은 향긋한 향기가 나는 우아한 여성이었지만, 결코 쉽게 다룰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다. 희서는 물었다. “실례가 안 된다면... 혹시 최하연 씨인가요?” 하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절 알아요?” “황연지를 만날 때마다, 황연지 씨가 항상 최하연 씨 이야기를 많이 하더라고요.”연지가 하연을 언급할 때는 언제나 아쉬움이 가득한 말투였다. 왜 최하연은 이렇게 모든 것을 쉽게 얻었는지, 왜 자신은 상혁의 사랑을 받을 수 없었는지에 대해 불만을 털어놓곤 했다. 희서는 연지가 늘 이런 이야기를 할 때마다 조용히 듣고 있었지만, 그때마다 마음이 아팠다. 하지만 오늘 하연을 직접 만나고 나서야 비로소 깨달았다. 하연은 상혁과 완벽하게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둘은 마치 천생연분처럼 잘 어울렸다. 하연이 물었다. “황연지가 저에 대해 뭐라고 말했어요?” 희서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하연은 그 모습에 대충 짐작이 갔지만, 화내지 않고 부드럽게 말했다. “사랑하는 마
하연은 결국 상혁의 집에 계속 머물기로 했다. 상혁은 하연과 함께 지내며 그녀가 다시 떠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하연이 일이 있을 때면, 상혁은 사람을 시켜 그녀를 보호하며 최대한 비밀리에 움직이게 했다. DL그룹 내부는 너무 복잡했고, 자신이 섣불리 드러나면 안 된다는 것을 하연도 잘 알고 있었다.하연은 상혁의 무릎 위에 앉아 장난스럽게 그를 감싸 안으며 말했다. “나, 마치 당신이 기르는 애인 같아요.” 상혁은 일 처리를 멈추지 않고 가볍게 웃으며 대답했다. “애인은 그렇게 키우는 게 아니야.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원하는 건 다 줘야지. 마치 애완동물처럼, 하나씩 천천히 줘야 하는 거야.” “정말 애완동물 키워본 적 있어요?” 하연이 묻자 상혁은 냉정하게 대답했다. “남이 키우는 걸 본 적은 있어.” B시 쪽에서는 가끔씩 소식이 들려왔다. 어둠 속에 숨어 있는 첩자들이 작은 정보까지 빠짐없이 전달했다. 그러던 어느 날, 원신민이 보고했다. “우희서 씨가 F국에 도착했습니다. 대표님을 뵙고 싶어 한다고 합니다.” 하연은 의아하게 물었다. “우희서가 누구예요?” 상혁은 짧게 지시했다. “이곳으로 데려와.” 원신민은 잠시 당황했지만, 곧바로 고개를 숙였다. 하연이 곁에 있는 것을 보며, 상혁이 그녀를 얼마나 신뢰하는지 느낄 수 있었다. 몇 주 전까지 둘은 싸우고 냉전 중이었지만, 지금은 예전의 믿음이 돌아온 것처럼 보였다. 상혁이 설명했다. “내 첩자야.” 곧 우희서가 도착했다. 그녀는 모자와 마스크를 착용한 채로 방에 들어섰고, 하연이 주인의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 잠시 놀랐다. 상혁은 옆에 앉아 서류를 보며 무심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부 대표님.” 우희서는 정중하게 인사했다. 상혁은 자리를 가리키며 앉으라고 권했다. 하연은 희서 앞에 차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모자와 마스크는 벗어도 돼요. 여긴 안전해요.” 우희서는 잠시 망설였지만 상혁의 고개 끄덕임을
상혁은 하연의 허리를 감싸며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지었다. “우리 어머니가 뭐라 할 것 같아? 나랑 같이 나가서 확인해볼래?”“뭘 확인해요? 내가 진짜 페르시안 고양이라도 된다는 거예요?” 하연은 긴장하며 반문했다.상혁은 웃음을 터뜨리며 안방을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그가 움직이는 소리를 듣고 하연은 의아해했다. “당신,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고양이가 있다고 한 거예요?”“그냥 없애면 돼.” 상혁은 물건 하나를 집어 들더니 창밖으로 세게 던졌다. 이때, 큰 소리가 났다.조진숙이 깜짝 놀라며 물었다. “상혁아, 무슨 소리야?”“고양이를 안으려고 했는데, 창 문 밖으로 도망치다가 떨어졌어요.”“뭐라고?” 조진숙은 충격을 받았다. “떨어지다니, 어디로 떨어진 거야? 밑으로? 여기 고층인데 다치진 않았겠지?”“바로 뒤가 호수라서 다치지는 않았을 거예요.”조진숙은 여전히 안절부절못하며 말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고양이 하나 제대로 못 잡는 거야?”상혁은 하연과 눈을 마주치며 대답했다.“새 고양이 하나 사서 원신민한테 보상해주면 괜찮을 거예요.”조진숙은 여전히 안도하지 못하며 말했다.“길러 온 정이 있는데 새로 산 고양이와는 전혀 다르지. 그래도 생명이잖아. 원신민 만나면 제대로 사과해.”상혁은 고개를 끄덕였다.하연은 상혁의 거짓말이 이렇게 자연스럽게 나오는 모습을 보며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상혁은 하연에게 몸을 가까이하며 귓가에 속삭였다. “왜 웃어? 네가 저지른 일이잖아.”간질거리는 느낌에 하연은 본능적으로 몸을 피하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모가 아직 밖에 있어요.”상혁은 작은 소리로 대답했다. “밖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아.”상혁은 특히 이런 금기의 느낌을 좋아했다. 그는 하연에게 천천히, 부드럽게 입맞춤하며 물었다.“아직도 아파?”하연은 작게 대답했다. “그만 하고 빨리 가요.”조진숙은 아들이 나오지 않자 참다못해 물었다. “상혁아, 거기서 뭐 하고 있니?”“고양이가 어질러 놓은 거
하연이 눈을 떴을 때, 도시는 이미 밤의 장막에 휩싸여 있었다. 그녀는 흐릿한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며 몸이 묵직하게 아픈 것을 느꼈다.오랜만에 욕구를 해소할 수 있었던 상혁은 특히나 격렬했다. 소파에서 시작해 주방, 다시 안방, 마지막으로 욕실까지, 온 집안의 모든 공간을 사용했다. 하연의 온몸은 마치 압사당한 듯 피곤했고, 손가락 하나 움직이는 것조차 힘들었다.방 안에는 은은한 아로마 향이 퍼져 있었고, 어둑한 조명이 켜져 있었다. 공기 중에는 이미 사랑의 흔적이 사라졌고, 상혁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하연은 침대에 누운 채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그곳에는 마치 천장이 아닌 신들의 조각상이 장엄하게 자리하고 있는 듯 보였다. 신들은 어두운 밤 속에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하연의 마음은 쓸쓸했다. 어젯밤, 둘이 동시에 절정을 맞았을 때, 상혁이 그녀의 손을 잡고 신들을 가리켰던 그 순간이 떠올랐다. 그것은 단순한 육체적 쾌락을 넘어, 정신적으로도 거부할 수 없는 극도의 미친 감정이었다.하연은 다시 샤워할 필요는 없었다. 상혁이 욕실에서 이미 그녀를 씻겨주었기 때문이다.하연은 침대에서 내려왔으나, 문이 잠겨 있는 것을 발견했다. 별다른 생각 없이 발걸음을 옮겨 발코니 쪽으로 다가갔고, 그곳에서 외부로 통하는 또 다른 문을 발견했다. 문에 가까이 다가가자 소리가 들려왔다.“네 아버지를 조사해보라고 했잖아. 했어?” 조진숙의 목소리였다.하연은 걸음을 멈췄다.조진숙이 갑자기 찾아왔고, 상혁은 서둘러 셔츠를 하나 걸치고 나갔다. 그와 하연이 얽히며 셔츠 목 부분이 구겨져 있었다. 그는 눈살을 찌푸렸다. “조사했어요. 고나희의 사고는 단순 사고였고, 아버지와는 관련이 없어요.”“고경수가 비리로 돈을 챙긴 걸 얼마나 알아냈어? 난 그 명목상의 숫자만 믿을 수는 없어. 배를 채운 흔적이 있는지 다 밝혀냈어?” “DL그룹은 아버지 거예요. 아버지가 그런 실수를 하실 리 없죠.” 조진숙은 창가 쪽으로 걸어갔다. 많은 시련을 겪어온 여성이기에,
“왔어요?” 상혁은 놀라움이 가득한 여자 목소라가 들렸다. 상혁은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주방에서 서둘러 나오는 하연이 국을 들고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하연이는 웃으며 물었다. “왜요?”국이 너무 뜨거웠던지, 그녀는 재빨리 그릇을 내려놓고 귀를 만지며 식히고 있었다. 상혁의 얼굴에는 아무런 감정이 없었고, 목소리까지 차가웠다. “정말 안 가고 기다리고 있었어?” 하연은 의아해하며 답했다. “당신이 기다리라고 했잖아요. 그래서 당신이 돌아오길 기다리고 있었죠. 그런데 당신이 너무 안 와서, 심심해서 뭐 만들어 먹을 게 없나 하고 요리 만드는 법을 찾아보다가 뭘 좀 만들어 먹었어요. 다행히 냉장고도 가득 차 있었고 장비도 다 갖추어져 있어서 문제없었어요.” 그녀가 말할 때, 분명히 기쁜 마음과 행복한 표정이었다. 하연이 말을 마치자마자, 상혁은 두세 걸음에 그녀를 끌어당겼다. 그는 손을 잡고 그대로 바로 하연이를 품 안에 가둬버렸다. 상혁의 힘은 상당히 강했고, 하연은 고통스러운 신음 소리를 냈다. “음... 왜 그래요?” 하연은 상혁의 품에서 안정을 느꼈지만, 그의 강한 포옹에 약간 당황했다. 그녀의 몸에서 풍기는 평온한 향기가 상혁의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혔다. 상혁은 눈을 감고, 목소리가 거칠고 낮았다. “난 네가 간 줄 알았어.” 하연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그의 옷깃을 살며시 잡았다. “기다린다고 말했잖아요. 그러니 안 갔죠.” 그녀는 상혁의 감정이 평소와 다르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방금 전, 상혁은 본가에서 싸움 끝에 기분이 상한 채로 돌아왔다. 부남준은 송혜선을 보호하며 소리쳤다.“형, 이 아이도 한 생명이에요! 아버지의 혈육이잖아요!”상혁은 바로 남준의 옷깃을 잡고 주먹을 날렸다. 집사가 나서서 뜯어말리지 않았다면 남준은 일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상혁의 목에 난 상처를 알아보고 하연은 황급히 그를 밀어내며 물었다. “무슨 일 있었죠? 교통사고 처리하러 간
하연은 상혁의 집에서 밤을 지새웠다.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한 채, 새벽녘에 깨어나니 집안은 고요했고 상혁이 돌아온 흔적은 없었다. 그녀는 뒤척이며 잠을 청할 수 없어 핸드폰을 열었고 보니, 마침 서여은이 사진을 올려놓았다. 외부 취재 중이라는 설명과 함께 사진에는 ‘큰 뉴스’라는 글이 적혀 있었다. 두 시간 뒤, 여은이 다시 글을 남겼다. [뉴스가 없어졌어.]하연은 궁금해졌다. [어떤 뉴스?][DL그룹과 관련된 일이야. 전에 조사받았던 고경수 기억나지? 그 사람 딸이 죽었대. 원래 뉴스에 나올 예정이었는데, 누군가 큰돈을 써서 기사를 막아버린 모양이야.]하연은 짐작할 수 있었다. DL그룹과 관련된 일이라면 상혁이 처리했을 가능성이 컸다. 여은이 사건 현장의 사진을 한 장 보냈다. 사진 속 여성은 운전석에 앉아있었고, 절반가량의 얼굴이 드러났는데 표정은 죽음을 앞둔 사람처럼 처참했다. 하연은 사진을 확대했다. [이 여자를 어디서 본 것 같은데.]여은이 바로 하연에게 전화를 걸었다. [고나희야, 고경수의 딸이잖아. 애지중지하게 키워졌는데 세상 물정은 잘 모르는 아이였지. 그런데 네가 정말 고나희를 본 적 있어?]“한 번 스쳐 지나가며 본 적 있어.” 하연은 기억을 떠올리려 애썼고, 드디어 생각이 났다. 얼마 전 정다영을 만나러 호텔에 갔을 때, 고나희와 스쳐 지나갔었다. 그때 고나희가 하연과 부딪혔고, 부남준이 다정하게 하연을 붙잡아주며 고나희에게 아주 화를 내면서 잘 보고 다니라고 말했다.하연은 그때 남준이 자신에게 하는 말인 줄 알고 반박하려다, 남준의 시선이 고나희를 향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고나희는 아무 말 없이 자리를 떠났고, 이후 하연과 남준은 각자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저 아주 사소한 일이었지만, 하연은 고나희를 이렇게 다시 보게 될 줄은 몰랐다. 그것도 그녀의 사망 소식으로.[참, 고나희의 뱃속에 아이도 있었다고 하더라.]하연은 깜짝 놀라며 물었다. “몇 개월이었는데?”[5,6개월쯤 되었을 거야.]하지만
“형님 얼굴도 별로 좋아 보이지 않네요.” 상혁은 대꾸하지 않았다. “그만, 아침부터 무슨 쓸데없는 소리를 해. 어서 앉아라.” 부동건이 꾸짖었다. “어젯밤에 술 마셨어요?” 남준은 대수롭지 않게 앉으며 말했다. “접대하는 자리여서 어쩔 수 없었다.” “남자가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상혁이 처럼 남준이 너도 당연히 그런 자리는 해야 해.” 송혜선은 웃으며 중재했고, 말 하나하나에 의미가 담겨 있었다. 상혁은 집사가 가져온 우유 외에는 아무것도 손대지 않았다. 반면 부남준은 여유롭게 식사를 이어갔다. “형, 들었어요. 고경수의 딸이 사고를 당했다면서요.” “소식 한번 빠르군.” “검사 보고서도 확인했어요. 그 여자아이, 임신까지 하고 있었다면서요. 그런데 아버지가 누군지는 밝혀졌나요?” 이 질문은 부동건의 주의를 끌었다. “아이? 아이의 아버지가 누구냐? 상혁아, 왜 나한테는 이런 얘기는 하지 않은 거냐?” “떳떳한 사이가 아닌 것 같아서 말씀들이지 않았습니다. 여자가 잘못된 길을 걷고, 잘못된 남자를 믿는 일은 흔합니다.” 상혁은 남준을 힐끗 보고 말했다. “본인이 굳이 알리지 않았다는 건, 아버지가 누군지...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겠죠. 그리고 고경수의 집안은 이미 파란 속에 휩싸여 있으니, 괜한 일을 벌이기보다는 조용히 지나가는 게 더 낫다고 생각했습니다.” 남준은 아침을 먹으며 웃었다. “고경수가 DL그룹에서 문제를 일으킨 것을 누군가 알았고, 그걸 감추기 위해서 자기 딸을 이용해 DL그룹 고위 간부에게 연결하게 해줘서 둘 사이에 아이가 만들어졌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냥 떠본 말이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부동건은 남준의 말의 조금씩 흥미를 가지기 시작했다. “계속해 봐라.” “제 말은, 고경수가 자기 딸을 이용해 누구에게든 신세를 졌을지도 모른다는 겁니다.” 상혁이 갑자기 미소를 지으며 모두 그를 바라보았다. 상혁의 하얀 손가락 관절이 탁자를 가볍게 두드리며, 무심한 어조로
“지금 정규인은 어디에 있나?” “제가 확인한 바로는, 아직 동남아에 있습니다.” 상혁은 외투를 집어 들고 일어섰다. “현장에 가보자.” 나가기 전에 상혁은 다시 침실로 발길을 돌렸다. 하연은 그네 의자에 앉아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는 뒤에서 하연의 긴 머리를 정리해주며 말했다. “DL그룹 내부에 문제가 생겨서 처리해야 해. 시간이 좀 걸릴 거야. 기다려줄래?” 하연은 상혁의 눈 속에 아직 남아 있는 욕망을 알아차렸다. “기다릴게.” 상혁은 미소를 지으며 빠르게 나갔다. 상혁이 탄 검은 차가 빠르게 출발했고, 멀지 않은 곳에 주차되어 있던 차가 상혁이 떠나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 뒷좌석에 있던 남자는 긴장을 풀며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잘했어.” 옆에 있던 여자는 몸을 떨며 좌석에서 미끄러져 반쯤 무릎을 꿇은 자세로 말했다. “상무님, 정규인의 아내가 진작부터 자기 남편과 고경수의 딸에 대한 불륜 사실을 알고 있었어요. 경찰이 정규인의 아내를 의심하지 않을까요?” 부남준은 그녀를 흘끗 보고 냉소적으로 말했다. “정규인의 아내는 오늘 밤 밖에서 돈 쓰느라 많이 돌아다녔어. 인증과 물증이 다 있지. 이번 사고는 단순한 사고일 뿐이지, 인위적인 것이 아니야.” “황연지.” 남준은 몸을 앞으로 기울여 연지의 턱을 들어 올렸다. “부상혁에게도 그렇게 말해.” 연지는 약간의 공포를 담은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이미 재무 보고서를 받았어요. 아마 저를 의심할지도 몰라요.” “네가 부상혁에게 충성을 다 바치는데, 왜 너를 의심하겠어?” 남준은 흥미로운 듯 그녀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그날 최하연을 다치게 한 건 정말 잘했어.” 그날 그 일은 바로 남준이 직접 지시한 것이었다. 연지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 사람... 이미 저를 의심하고 있어요. 평소라면 제가 그런 행동을 할 리가 없다는 걸 알 거예요. 게다가, 그 사건은 그 사람과 하연에게 아무런 영향도 주지 않았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