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영숙은 기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하연을 끌고 침실 솔파에 앉았다.“여기서 잠깐만 기다려, 내가 물건 가지러 갈게.”“뭘 가지러 가세요? 제가 가져올게요.”“괜찮아. 내가 가져오면 돼.”강영숙은 말하면서 다락방으로 들어가더니 한참 뒤 손에 상자 하나를 들고나왔다.“하연아, 너한테 특별히 줄 건 없고, 이건 내가 서준이 할아버지와 결혼할 때 챙겨온 혼수야.”그러면서 상자를 열어 안에 있는 비취 팔찌를 꺼내 하연의 손을 잡았다.“이건 너한테 주는 선물이야.”“할머니, 이건 너무 귀중합니다.”하연이 거절했지만 강영숙은 그럴 기회조차 주지 않고 하연의 손에 팔찌를 끼워주었다.“귀중하고 말고가 뭐 있어? 내 마음인데. 하연아, 뭐가 됐든 할머니 마음속에 너는 내 손녀나 마찬가지야. 피가 섞이지 않았어도.”“할머니.”“예쁘네.”강영숙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앞으로 어느 집 자식이 너와 결혼할지는 모르겠지만, 그게 누구든 안목과 복이 있는 사내라는 건 사실이겠지.”하연은 왠지 부끄러웠다.“할머니, 저...”“착해 빠져서는. 너만 좋으면 된다.”강영숙의 위로에 하연은 코끝이 시큰거렸다.“네, 알았어요, 할머니.”두 사람은 침실에서 한참 동안 얘기 나누다가 함께 저녁 식사를 했다. 하연의 방문에 강영숙도 모처럼 기뻐했고 두 사람 사이에 웃음꽃이 떠나지 않았다.반면 서준은 계속 두 사람 옆에 있었지만 오히려 꿔다 놓은 보릿자루 같았다.강영숙이 휴식을 취한 뒤 집을 나선 하연은 정원에서 진작 기다리고 있던 서준을 만났다.하연은 가던 걸음을 우뚝 멈추고 뭐라 말하려 했지만 그 전에 서준이 먼저 입을 열었다.“할머니가 이렇게 기뻐하는 거 오랜만이야. 고마워.”“나한테 고마워할 거 없어. 난 그냥 할머니랑 같이 있어 드리러 온 거니까.”“응, 그동안 할머니 몸이 안 좋았거든. 난 회사 일 때문에...”“알아, 한 대표님이야 매일 바쁘겠지. 하지만 할머니는 연세도 있으시니 시간 내서 곁에 자주 같이 있어 드려.”“
하지만 서준은 계속 하연과 거리를 유지한 채 조용히 뒤를 쫓다가 하연의 집에 도착하자 그제야 브레이크를 밟고 차를 길옆에 세웠다.한참 떨어진 거리에서 서준은 하연의 집 정원에서 하연을 기다리는 사람의 실루엣을 보았다. 물론 상대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는 없었지만 상대가 남자라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새로운 애인이 생겼나?’‘벌써 동거하나?’‘저 사람 부상혁인가?’서준은 왠지 마음 한구석이 꽉 막힌 것 같다가 뭔가 빠져나가 텅텅 빈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시선마저 흐릿해졌다.서준은 말없이 핸들을 꽉 붙잡았다. 오늘 왜 하연의 뒤를 밟았는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이 모습을 보니 왠지 받아들일 수 없었다.한편 정원에서 하연을 맞이하던 하성은 멀리 멈춰 있는 차를 흘긋거리며 농담조로 말했다.“하연아, 부상혁 저 자식 집에 초대 안 해?”하연은 얼른 다가가 하성의 팔짱을 꼈다.“오빠, 언제부터 이런 일에 관심 있었어요”하성은 그저 궁금한 것뿐이었다.“너희 싸웠어?”“아니요!”“그런데 왜 따로 왔어? 서로 아는 척도 안 하고?”“오빠, 저 사람 누구인지 제대로 봐요.”하연의 말에 하성은 더 궁금해졌다.“뭐? 부상혁이 아니면 누구야? 너 설마 새 애인 생긴 거 아니지? 미리 말해두는데, 난 제부로 부상혁만 인정해. 다른 사람이 우리 집에 들어오려 하면 빗자루로 내쫓을 거야.”하연은 웃음을 참았다.“아, 그래요? 밖에 있는 사람 한서준이에요.”“뭐?”하성은 놀란 표정을 짓더니 바로 말을 이었다.“내가 바로 빗자루 가지러 갈게. 여기가 어디라고 감히! 나 진작에 저 자식 처리하고 싶었어. 기회를 못 찾았을 뿐이지, 오늘 제대로 혼내줄 거야.”하성은 진심이었다.곧이어 사용인더러 빗자루를 건네 달라고 손짓하고는 당장이라도 싸우려고 달려가려는 바람에 하연이 다급히 막아섰다.“오빠. 뭐 하는 거예요?”“흥, 저 자식 쫓아내려고!”하성은 말하면서 밖으로 달려 나갔지만 밖에 주차되어 있던 차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그냥 이렇
“아직 명확한 건 없지만 사채를 빌린 것도 모자라 은행에 본인 명의로 된 부동산을 담보로 내놓았어요.”“보아하니 큰 일을 도모할 모양이네.”“혹시 우리를 겨냥하려고 그러는 거 아닐까요?”“호현욱의 최근 동태를 잘 살펴. 무슨 일 있으면 바로 보고하고.”“네, 사장님.”보고를 마친 태훈은 곧바로 뒤돌아 떠났다. 하지만 이제 막 두 걸음 뗐을 때 하연이 그를 불러 세웠다.“참, 우리 셋째 오빠의 스케줄이 어떻게 돼?”“JJ 그룹이 국민대로에 있는 타임 쇼핑센터에서 오프라인 행사를 열었는데 우리 회사 소속 연예인들 모두 참석했습니다.”“아.”‘어쩐지 아침부터 오빠가 안 보이더라니.’“알았어, 가서 일 봐.”“네.”태훈이 나간 뒤 하연은 계속 일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한참 뒤 하연의 개인 폰이 울리기 시작했다.“하연아, 혹시 오늘 네 오빠가 참석한 행사 위치가 어디 잇는지 알아?”전화 건너편에서 가흔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왜 그래? 무슨 일인데?”하연의 물음에 가흔은 얼른 대답했다.“비서가 정신이 없어 액세서리 잘못 가져갔어. 지금 현장에 가져간 건 아직 외부에 발표하지 않은 새 디자인이야. 그 액세서리는 발매 전에 외부에 공개되면 안 된다고 계약까지 했었거든.”“더 큰일은 비서 핸드폰이 꺼져서 아무리 전화해도 안 받아. 네 오빠 매니저도 연락이 안 닿고.”때문에 가흔은 급한 마음에 하연을 찾은 거다.상황을 들은 하연은 다급히 가흔을 달랬다.“조급해하지 마. 오빠가 오늘 국민대로에 있는 타임 쇼핑셑너에 있어. 지금 가도 시간 될 거야. 나도 연락해 볼게.”“알았어. 그럼 난 먼저 가볼게.”전화가 끊기기 바쁘게 하연은 하성의 개인 폰으로 전화했다.하지만 여러 번 연결을 시도했지만 전화를 받는 사람은 없었다.하성은 평소 폰을 몸에 지니고 있는데 오늘 이런 상황에 하연은 너무 의아했다.‘행사가 있어도 핸드폰은 매니저한테 줬을 텐데. 왜 안 받지? 이런 적 없었는데.’‘오늘 무슨 일이지?’그 시각, 행사장 뒤편에 마
“배우님, 안 돼요!”여름이 다급히 말렸지만 목걸이는 이미 바닥에 나뒹굴었다.“앞으로 이딴 거 내 앞에 가져오지 마.”갑자기 벌어진 상황에 사람들은 서로의 눈치를 살피기 바빴다.“...”이를 본 여름은 얼른 쪼그려 앉아 목걸이를 줍고는 고개를 숙여 공손하게 사과했다.“여정 배우님, 이 목걸이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제가 회사에 다른 걸 가져오라고 요청하겠습니다. 하지만 지금 하고 계신 목걸이는 오늘 하면 안 됩니다.”“난 꼭 이걸 착용해야겠는데?”여정은 안색이 순간 어두워지더니 팔짱을 끼고 기고만장해서 말했다.그 말에 여름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그건 안 될 것 같습니다.”“이봐, 날 건드리고 무사할 것 같아?”여정은 고개를 빳빳이 쳐들고 싸늘하게 경고했다.“내가 너 이 일도 못 하게 해줄까?”“오호? 누가 감히 그런 말 하는지 궁금하네요.”그때 마침 웬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오더니 가흔이 인파를 지나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가흔을 본 순간 여름은 눈시울이 붉어지면서 흐느꼈다.“신 대표님!”가흔은 손을 뻗어 여름의 등을 토닥이며 위로하고는 여정을 바라봤다.“액세서리 잘못 챙긴 건 저희 실수 맞아요. 인정하게요. 하지만 그걸 빌미로 사람 난처하게 할 필요는 없잖아요?”“하.”여정은 코웃음을 치며 가흔의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사실 여정은 처음에 가흔이 하연과 같이 자란 베프라는 소리에 가흔 역시 대단한 가문 아가씨인 줄 알고 사람을 시켜 뒷조사를 해봤다.하지만 가흔의 진짜 신분은 여정을 정말 놀라게 했다.때문에 이 순간에도 가흔의 체면은 고려하지 않고 사정없이 맞받아쳤다.“신 대표님도 인정했네요. 본인이 액세서리를 잘못 챙겨왔다고. 실수했으면 그 대가를 치러야 하는 거 아닌가요?”“아무리 그래도 그걸 여정 씨가 이래라저래라 할 처지는 아닌 것 같은데요?”가흔의 여유로운 대답에 여정의 얼굴은 백지장이 되었다.“난 그저 저 여자한테 일 잘하라고 가르친 것뿐이에요.”“배우님이 본인 처지를 모른 것 같아 말씀드리는
그 말이 떨어지는 순간 여정은 너무 놀라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가흔을 응시했다.“뭐라고요? 목걸이 하나에 60억?”가흔은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네, 이건 VERE에서 맞춤 제작한 목걸이거든요. 위에 있는 다이아는 남 아프리카에서 공수해 온 건데 세상에 하나뿐이고요. HB 그룹 회장님이 부인 결혼 기념 선물로 특별 주문 제작한 거라 가격도 투명해요. 의견이 있거나 배상하기 싫다면 법적 절차대로 처리할 겁니다.”여정의 낯빛은 붉으락푸르락해졌고 방금 전의 기세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여정도 그동안 연예계 생활을 하면서 돈을 적잖이 벌었지만 대부분은 회사에서 가져가 현재 남아 있는 돈은 형편없이 적었다.때문에 60억이라면 거의 전 재산이나 다름없었다.하지만 이미 말을 내뱉었으니 이제 와서 후회하면 주위 사람들이 저를 보는 시선이 너무 신경 쓰였다.결국 한참 동안 생각하던 여정은 눈을 들어 가흔을 바라봤다.“고작 목걸이 하나로 유세는. 배상하면 될 거 아니에요.”“네.”가흔은 여정과 쓸데없는 대화를 주고받는 대신 여름더러 회사 계좌를 알려 주도록 명령했다.“그럼 번거로우신 대로 돈은 여기로 보내주세요.”결국 여정은 이를 악물고 그 돈을 송금했다. 그리고 5분 뒤, 가흔의 핸드폰에 입금 알림이 떴다.그러자 가흔은 목걸이를 여정에게 건넸다.“이렇게 시원시원하게 결제하시니 이 목걸이는 여정 씨한테 드리죠.”여정은 살점이 떨어져 나간 듯 마음이 아팠지만 자존심 때문에 일부러 대범하게 행동했다.“고작 60억이 뭐라고. 가흔 씨는 그동안 바닥에서부터 이 자리까지 기어올라오느라 고생했겠어요.”그 말에 주위의 공기는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심지어 멀리에서 서 있던 하성마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하지만 마지못해 60억을 지불하게 된 여정은 이 언짢은 기분을 분출해야 했기에 모든 분노를 가흔에게 겨냥했다.“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죠?”가흔의 반문에 여정은 씩 웃으며 느긋하게 대답했다.“가흔 씨 고아라면서요? 최씨 가문 지원금으로 대학까지
여정은 한 대 맞은 것에 어리둥절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가흔을 바라봤다.“지금 나 쳤어?”주위 사람들도 너무 갑작스럽게 벌어진 일에 놀라 멍해 있다가 이내 반응했다.“때린 지가 언젠데 반응이 좀 늦네요.”“이게!”여정이 뭐라 말하려 했지만 그때 마침 인파 속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하성 배우님!”그 말을 들은 여정의 얼굴을 순식간에 변했다.여정은 눈을 들어 한참 떨어진 문에 기대 있는 하성을 확인했다.하성은 늘 그렇듯 덤덤한 표정을 짓고 있어 도무지 속내를 알 수 없었다.그 모습을 보니 여정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 조심스럽게 말했다.“선배, 언제부터 와 있었어요?”하성 배우님이라는 호칭을 듣자마자 그대로 굳어 버린 가흔은 여정의 선배라는 호칭에 등 뒤에 있는 사람의 신분을 더 확신했다.‘방금 다 봤나?’‘내가 자기 후배 때렸다고 화내겠지?’가흔은 난처해하는 모습을 들키지 않기 위해 눈을 내리깔고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떠나버렸다.여정은 그 모습을 보더니 얼른 하성 앞에 달려가 불쌍한 표정으로 고자질했다.“선배, 방금 다 봤죠? 저 여자가 밑도 끝도 없이 다짜고짜 저를 때렸어요.”그러면서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떨구었다.하지만 그 누구도 나서서 사실대로 말해주는 사람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게, 여정의 신분 때문에 본인이 화를 입을까 봐 두려웠으니까.하성은 여정의 얼굴을 보더니 덤덤하게 물었다.“가흔이 때린 거야?”여정은 고개를 끄덕였다.“선배, 아까 그 여자 진짜 미친 거 같아요. 분명 본인이 액세서리 잘못 챙겨왔으면서 내가 실수로 조금 망가뜨렸다고 60억이나 배상하게 하고 고작 몇 마디 투덜댔다고 저를 때렸어요.”여정은 본인이 유리한 쪽으로만 말했다. 물론 하성이 언제부터 있었고 얼마나 지켜봤는지 알 수 없었지만 선배 앞에서 그동안 쌓은 이미지가 그대로 무너지게 둘 수는 없었으니까.그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하성이 최씨 가문 셋째 도련님이라는 거다.하성은 사람들이 감히 따라잡을 수 없는 신분
하연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하성의 모습에 호기심이 발동했지만 더 묻지 않고 손가락으로 옆을 가리켰다.“방금 저쪽으로 갔는데 아마 멀리 못 갔을 거예요.”하성은 잠시도 망설이지 않고 긴 다리를 내디디며 가흔이 떠난 쪽으로 쫓아갔다.그렇게 불과 10걸음 만에 하성의 눈에 익숙한 실루엣이 들어왔다.하성의 얼굴에 드리웠던 당황한 표정은 점차 걷혔지만 발걸음은 오히려 빨라졌다.“가흔아!”하성의 부름에 가흔은 제 자리에 우뚝 섰다. 그리고 다음 순간 하성이 가흔의 옆으로 다가왔다.“왜 그렇게 빨리 떠나?”가흔은 맑고 고요한 샘물 같은 눈동자로 하성을 빤히 보다가 입꼬리를 말아 올리더니 퉁명스럽게 말했다.“따지러 왔어요?”이에 하성은 눈썹을 치켜 올리며 시선을 가흔의 손으로 옮겻다.그 시선을 느낀 가흔은 말없이 주먹을 꽉 쥐었다.“따지러 온 거면 저도 할 말 없어요. 저 여정 씨 때린 거 맞아요. 60억 배상하라고 한 것도 맞아요. 의견 있으면 제 변호사랑 얘기해요.”가흔이 장황하게 말을 늘어놓았지만 하성은 전혀 귀담아듣지 않고 입을 뻐끔거리다가 끝내 물었다.“손 안 아파?”가흔은 그 순간 멈칫하더니 한참 멍해 있다가 믿기지 않는 듯 물었다.“뭐라고요?”하성은 가흔에게 다가가 또다시 반목했다.“아까 힘 많이 쓴 것 같던데, 손 안 아파?”가흔은 무의식적으로 제 손을 뒤로 뺐지만 하성이 틈도 주지 않고 가흔의 손을 덥석 잡았다.“뭐 하는 거예요? 이거 놔요.”“하연처럼 뭐든 본인이 직접 나서는 버릇 고쳐!”“?”가흔은 무의식적으로 손을 빼고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걱정하는 상대가 잘못된 것 같은데요? 저 손 괜찮아요. 아무 문제 없어요. 오히려 여정 씨가 문제죠. 아마 얼굴이 부었을 테니 가서 후배나 걱정해요.”그러면서 일부러 후배라는 단어에 힘을 줬다.하지만 하성은 가흔의 말투에 드러난 질투의 감정을 조금도 눈치채지 못했다.“난 너를 거정하는 거야.”“필요 없으니 가요. 전 바빠서 이만.”가흔은 말을 마치자마자 뒤에 맹
여정은 가뜩이나 여리여리하고 가녀리게 생긴 데다 눈물까지 뚝뚝 흘리자 더욱 동정심을 자아냈다.“괜찮아요. 억울한 일 당했으면 말해요.”하연의 위로에 여정은 더욱 크게 흐느껴 주위 사람들은 너도나도 두 사람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그 순간 하연은 무의식적으로 눈살을 찌푸렸다.그로부터 한참이 지나서야 여정은 울음을 멈추고 하연에게 호소했다.“최 사장님, VERE 브랜드 측 신 대표가 앞으로 저한테는 협찬 안 해준대요. 그것도 모자라 저를 때리기까지 했어요. 제 얼굴이 부어오른 것도 다 신 대표 때문이에요.”그 말을 들은 하연은 사뭇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여정의 말을 생각했다.하연은 가흔과 벌써 수년 동안 연을 이어왔기에, 가흔이 일과 생활에 언제나 최선을 다한다는 건 당연히 알고 있다.가흔이 오늘날 거둔 성과도 한 장 한 장 스케치하며 쌓은 디자인 실력 덕이고, 인성 역시 그동안 지켜봐 왔기에 절대 남을 먼저 건드릴 사람이 아니라는 것도 안다.이것만은 하연이 확신할 수 있었다.때문에 여정의 말에 하연은 표정을 숨긴 채 물었다.“괜찮으니 천천히 말해 봐요.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여정은 하연이 저를 믿어준다고 생각해 방금 전 벌어진 일에 이것저것 살을 덧붙여 본인에게 유리한 것만 말했다.심지어 본인에게 불리할 것 같은 일부 사실은 아예 지워버렸다.자초지종을 들은 하연은 너무 황당하고 어이없어 가차 없이 여정의 진술에 존재하는 문제점을 짚어냈다.“VERE의 신 대표가 여정 씨 개인에 대한 협찬을 취소했다고요?”여정은 하연의 말에 숨은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이건 분명 일부러 저를 겨냥하는 거라고요. 분명 자기 비서가 액세서리 잘못 챙겨온 건데 나더러 새 걸 배상하라면서 60억이나 갈취하더니. 그거 제 전 재산이에요. 최 사장님, 꼭 제 편 들어주셔야 해요.”하연은 입꼬리를 올리며 저도 모르게 여정을 비웃었다.그도 그럴 게, 여정의 말에는 일말의 논리도 없었으니까.때문에 진실은 분명 다를 거라는 걸 확신했
“뭐 하는 거야? 빨리 이 주스를 연회장으로 가져가!” 홀 매니저가 다가와 살짝 꾸짖었다. 여자는 급히 고개를 숙이며 질투로 번들거리던 눈빛을 감추고는 얌전히 대답했다. “네, 바로 가겠습니다.” 다영은 태어나서 가사일 한 번 손댄 적 없었지만, 어쩔 수 없이 트레이를 들고 발걸음을 옮겼다. “잠깐!” 매니저가 갑자기 그녀를 불렀다. “너 신입이야? 본 적이 없는 얼굴인데?” 다영의 심장이 두근거리며 가슴 속에서 송혜선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우리 고향 친척 중 하나가 DS그룹에서 일하고 있어. 오늘 밤엔 그 사람 신분을 쓰는 게 편할 거야.” 침착함을 되찾은 다영은 고개를 들어 냉정하게 대답했다. “저는 고객지원부의 진미입니다. 연회 인력이 부족해서 임시로 지원 나온 거예요.” 매니저는 그녀의 명찰을 한 번 흘깃 본 뒤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트레이를 건네받았다. “신입이라면 전면에 나가면 실수하기 쉬워. 내실에서 돕는 게 좋겠어.” “알겠습니다.” 매니저가 떠난 뒤, 다영은 깊게 숨을 내쉬었다. 다시 연회장을 바라봤을 때, 앞줄에 앉아 있던 하연과 상혁은 이미 모습을 감췄다. 2층 휴게실 안. 원신명은 한 손에 신선한 오렌지 한 봉지를, 다른 손에 포장을 뜯지 않은 녹즙기를 들고 들어왔다. “대표님, 주문하신 오렌지와 녹즙기입니다.” 원신명은 궁금한 듯 물었다. “대표님, 직접 오렌지 주스를 만드시는 건가요?” 상혁은 짧게 대답했다. “원 비서, 거기 두고 가면 돼.” 원신명은 얼른 다가가 도움을 자청했다. “대표님, 이런 건 제가 할게요.” “와이프가 오렌지 주스를 마시고 싶다는데, 남에게 맡길 수는 없지.” ‘와이프’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남자의 입에서 흘러나왔고, 마치 그 단어를 그의 마음속에서 수없이 되뇌었던 것처럼 익숙했다. 원신명은 곧 깨달았다. ‘아, 대표님이 직접 최하연 씨를 위해 주스를 준비하시고 싶은 거구나!’ “원 비서, 연말인데도
최하성은 오늘 검정색 정장을 입고 등장했다. 그의 차가운 분위기와 단정한 모습은 단번에 모든 직원들의 이목을 사로잡았다. “최 대표님!”하성을 마주친 직원들은 공손하게 인사했다. 하성은 살짝 고개를 끄덕일 뿐, 시선을 주지 않고 빠르게 행사장으로 걸어 들어갔다. 오늘 저녁 만찬은 매우 풍성했다. 동서양의 요리가 조화를 이루며 대부분 직원들의 입맛과 식습관을 세심하게 고려한 모습이었다. 준비에 꽤 공을 들인 것이 분명했고, 결과적으로 반응도 좋았다. 연말 만찬이 시작되기 전, 하성은 DS그룹의 대표이사로서 무대에 올라 인사말을 했다. 하성은 차분한 걸음으로 무대에 오르며, 그의 존재감은 단번에 분위기를 압도했다. 그가 화려한 말은 하지 않았지만, 단 몇 마디 간결한 말로도, 관중석에서는 뜨거운 박수가 터져 나왔다. 이번 연말 행사는 생중계되고 있었으며, 하성이 등장하자마자 팬들과 네티즌들이 빠르게 몰려들었다. 몇 분도 채 되지 않아 시청자 수가 십만 명을 돌파했다. [최하성 씨, 오랜만이에요! 보고 싶었어요!][연예계에 최하성이 없으니 허전한 기분이에요. 최하성 씨, 돌아와 주세요!][다들 동감! 언제쯤 복귀할 수 있는 거죠?][복귀 요청 99%!!][...] 팬들의 댓글은 끊임없이 이어졌고, 하성의 인기는 생중계 플랫폼 순위에서도 단연코 1위를 차지했다. 무대 아래에서 생중계를 담당하던 진행자는 이 뜨거운 열기를 놓치지 않고 하성에게 다가갔다. “최 대표님, 생중계 채팅창에 팬들이 사장님의 새해 계획에 대해 굉장히 궁금해하고 있어요. 오늘 이 특별한 밤에 팬분들께 한 말씀 부탁드려도 될까요?” 하성은 미소를 머금으며 카메라를 응시했다. 그 순간, 생중계 채팅창은 순식간에 폭발했다. 선물 아이콘이 화면을 뒤덮었고, 댓글은 끊임없이 새로 고침 되었다. “안녕하세요, 하성입니다.” “지난 한 해 동안 저와 DS그룹을 응원해 주신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다가오는 새해에도 DL 그룹
“어머님, 정말로 부 회장님과 결혼하세요?” 이 얘기는 다영에게 있어 꽤 충격적이었다. 세간에서는 송혜선과 부동건의 관계를 두고 여러 말이 떠돌았고, 그중 가장 많이 들려온 것은 송혜선이 ‘첩’이라는 점이었다. 한때 정지철 부인도 이 사실을 꽤 꺼려했던 터라, 다영은 송혜선이 이렇게 대놓고 정식으로 자리 잡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언제 결혼 승낙을 받으신 거예요?” 송혜선은 이미 불룩해진 배를 가볍게 쓸며, 깊은 눈빛 속에 숨겨진 야망을 드러냈다. “부회장님께서 말씀하시길, 새해도 지나고 이제 곧 아이가 태어날 테니 우리 모자에게 반드시 정당한 신분을 보장해 주시겠다고 하셨어.” “그러니... 다영아, 우리 남준이를 믿어야 해. 지금은 잠시 밀려난 상황이지만, 미래는 아무도 모르는 법이잖니?” 다영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마음을 더욱 굳게 다졌다. “어머님, 걱정 마세요. 저는 언제나 남준 씨를 도울 거예요.” 송혜선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더욱 부드러운 눈빛으로 말했다. “그래야지. 남준이도 절대 너를 저버리지 않을 거야.” 그러다 두 사람이 화제를 돌리며 덧붙였다. “지금 부 회장님이 부상혁을 중시하며 DL그룹의 운영을 맡긴 데는 이유가 있어. 결국은 부씨 가문의 장손이라는 명분 때문이지.” “하지만, 임신 초기에는 변수가 많아. 무슨 사고라도 생기면, 어떻게 되겠니? 그런 일이 일어나지 말란 법도 없잖니?” “만약 그 아이가 사라지면, 부상혁 쪽의 지렛대도 없어진 셈이니 남준이한테 분명 유리한 상황이 될 거야. 그렇지 않겠니?” “...” 다영은 멍하니 한참 동안 대답하지 못했다. “어머님, 그게 무슨 뜻이에요?” 송혜선은 더 이상 자세히 설명하지 않고, 조그마한 흰색 약병을 다영의 손에 쥐여주었다. “이 약은 무색무취야. 일반인이 먹으면 아무 이상이 없지만, 임신한 사람이 먹으면 삼 일 안에 유산이 돼.” 다영의 손이 떨리며 본능적으로 병을 놓치듯 뺐다. “어머님,
“정다영 씨의 상상력은 참 풍부하시네요.” 상혁은 입꼬리를 비틀며 약간의 비웃음을 섞어 말했다. “세상을 잘 모르는 아가씨다운 모습이라 참 순진하긴 한데, 이런 험한 세상에선 지나치게 순진한 건 별로 좋지 않아요.” 더는 말을 낭비하지 않겠다는 듯, 상혁은 뒤돌아 떠났다. 다영은 마치 머릿속이 폭발이라도 한 듯, 귓가에서 찡하는 이명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그럴 리 없어요, 남준 씨는 그럴 리 없어요!” 그녀는 낮게 중얼거리며 자신을 설득하려 애쓰며 서둘러 휴대폰을 꺼내 이미 수없이 눌렀던 번호를 다급히 눌렀다. 하지만, 전화기 너머에서 들려온 건 여전히 차갑고 무미건조한 여성의 자동응답 소리뿐이었다. “안 돼!” 다영은 절망하며 비명을 지르고는 갑작스레 밖으로 뛰쳐나갔다. 깊은 겨울밤, 바람은 더욱 매섭게 몰아치고 있었다. ...창밖의 거센 바람에 창문이 덜컹이며 울렸다. 병원의 VVIP 병실 안. 다영은 온몸을 떨며 소파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초점 잃은 눈동자는 텅 빈 듯했고, 난방이 틀어져 있어도 그녀를 감싼 차가운 공기는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다영아, 이렇게 늦은 밤에 무슨 일이야?” 송혜선은 평소와 같은 말투로 물었고, 전혀 이상한 기색은 비추지 않았다. 실은 송혜선도 이미 알고 있었다. 정지철이 이제는 구속되고 정씨 가문이 더 이상 든든한 버팀목이 될 수 없다는 것을. 그러나 다영의 마음에는 여전히 남준의 존재가 얽매여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는 다영에게서 더 많은 가치를 끌어낼 여지가 없다는 사실을 송혜선 또한 명확이 알고 있었다. 그런 생각이 스치자, 송혜선은 표정을 가다듬고 따뜻한 물 한 잔을 건넸다. “자, 물 한 잔 마시고 몸 좀 녹여.” 다영은 멍하니 있다가 정신을 차린 듯, 송혜선의 팔을 단단히 붙잡았다. 간절함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물었다. “어머님, 남준 씨가 어디 있는지 알려주세요, 제발요!” 송혜선은 한숨을 쉬며 어쩔 수 없다
며칠 사이, 정다영은 차갑게 닫힌 문을 수없이 마주했다. 한때 주변 사람들이 다영을 떠받들며 찬란한 별처럼 여겼지만, 이제 집안의 사건이 터지자 사람들은 그녀를 피하려고만 했다. 마치 다영에게 다가가기만 해도 불행이 전염될 것처럼... 그렇게 다영은 세상의 차가운 이면과 인간관계의 허망함을 뼈저리게 느끼며, 자연스레 행동 하나하나를 조심스럽게 바꾸었다. “송 여사와 남준이는 요즘 집에 없는 걸로 아는데, 정 다영 씨는 왜 여기에 있는 거죠?” 상혁은 평범한 어조로 물었지만, 그 말은 다영을 잠시 멈칫하게 했다. 그녀는 곧바로 대답했다. “남준 씨가 곧 돌아온다고 해서 기다리고 있었어요.” 상혁은 아무런 감정도 드러내지 않은 채 그녀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날이 추우니 안에서 기다려요.” 말을 마친 그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남겨진 건 남자의 차가운 뒷모습뿐이었다. 다영은 상혁을 따라가며 급히 소리쳤다. “부 대표님, 잠깐만요...” 상혁이 발걸음을 멈췄다. “무슨 할 말이라도?” 다영은 망설이며 입술을 꽉 깨물었다. 며칠 동안 그녀가 이리저리 뛰어다닌 이유는 단 하나였다. 아버지를 이 난관에서 구해내기 위해서... 그리고 지금, 아버지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자신의 눈앞에 서 있었다. 그녀는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제 아버지와 관련된 일입니다.” 상혁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 건 검찰 소관이에요. 전문 변호팀을 고용하면 사건의 진행 상황을 빠르게 파악할 수 있을 거예요.” 다영은 초조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부 대표님, 이건 분명 오해입니다. 제 아버지는 회사에 평생을 바친 분입니다. 아버지는 공문서를 위조하거나 계약서를 조작하는 일은 절대 하지 않았을 거예요.” 그녀는 자기 아버지를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즉, 정지철은 딸을 희생하더라도 자신의 미래를 망칠 행동은 절대 하지 않을 사람이었다. 그리하여 분명히 이번 일에는 뭔가 숨겨진 진실
최씨 가문 본가 후원에 있는 온실에서는 조용히 바둑알이 내려놓아는 소리가 들렸다. 상혁과 최동신은 마주 앉아 바둑에 온 정신을 집중하고 있었다. “상혁아, 지금 이 바둑판은 승부가 거의 결정 난 것 같은데!” 바둑판 위에서 흑과 백이 치열하게 맞서며 팽팽한 긴장감을 자아냈다. 최동신은 한 마디로 상황을 정리했다. “자네의 백돌이 반 집 차이로 우위를 점하고 있어. 대단해! 예전보다 실력이 많이 늘었어.” 상혁은 겸손하게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할아버지 기백이 여전히 넘치시니 제가 아직 배울 점이 많습니다.” 최동신은 고개를 살짝 저으며 탄식했다. “늙었지. 이제는 예전 같지 않다.” 그러나 그는 곧 말을 돌려 흑돌을 손에 들고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하지만 지금부터 자네도 조심해야겠어.” 최동신은 그 말을 하며 흑돌을 바둑판 위에 툭 하고 내려놓았다. 그 돌이 놓인 자리로 인해 한순간 바둑판의 분위기가 달라졌다. 두 사람의 시선이 바둑판 위에 집중되었다. 상혁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손을 멈췄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우위를 점하고 있던 상황이 단 한 수로 인해 역전이 된 것이다. “할아버지의 바둑 실력은 늘 감탄할 따름입니다. 제가 이 점을 간과하고 놓치고 있었네요.” 상혁은 차분하게 패배를 인정하며 판세를 다시 살펴보기 시작했다. 최동신은 손에 들고 있던 바둑알을 다시 주우며 훈계하듯 말했다. “그렇지. 이길 수 있는 상황도 한 수의 실수로 모두 망쳐버릴 수 있는 법이다.” 상혁은 최동신의 말을 곱씹으며 고개를 들었다. 두 사람의 눈이 잠시 마주쳤다. 최동신은 아무렇지 않게 말을 이었다. “들리는 말에 DL그룹의 실질적인 권한은 이제 자네가 잡았고, 자네 동생은 동남아 지사로 발령이 났다고 들었네.” “겉으로 보기엔 좋은 상황 같아 보이지만, 상혁이, 네가 한 수라도 실수하는 날엔 모든 걸 망칠 수 있다는 걸 명심해야 한다.” 이 말은 단순한 충고 이상의 뜻을 담고 있었다
“이렇게 빨리?” 남준은 무심코 말을 뱉었다. 그의 음성엔 조급함이 묻어 있었다. 남준은 방 안을 계속해서 왔다 갔다 하며 초조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분명 연말 이후로 예정되어 있지 않았나? 어떻게 앞당겨진 거지?” 연지는 침착하게 보고했다. “들리는 말로는 이번 사건이 중대한 만큼 생각보다 빠르게 처리되면서 연말 전에 재판이 열리게 되었다고 합니다.” 남준은 발걸음을 멈추고 차가운 웃음을 흘리며 경멸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부상혁이 나를 궁지로 몰아넣고, 정규인의 입을 열어 내 약점을 찾아내려는 것이겠지.” 그는 잠시 멈칫하다가, 비웃는 듯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하지만 부상혁도 모르는 게 있지. 정규인의 입은 결코 열리지 않을 거란 사실을 말이야.” 연지의 눈이 순간 반짝였다. “상무님, 그 말은 혹시...” 그러나 그녀의 말은 남준의 강렬한 눈빛으로 끊겼다. 서로의 눈이 마주친 순간, 연지는 남준의 의도를 즉각 이해했다. “알겠습니다. 지금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 정규인의 사건은 법원에서 열렸고, 법정에는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경찰들이 구치소에서 정규인을 호송해 나오자, 멀리서 그의 초췌한 모습이 눈에 띄었다. 정규인의 기운 없는 모습에서 예전의 당당함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는 고개를 들어 법정 방청석을 둘러보다가, 맨 끝자락에서 누군가를 발견했다. 순간, 정규인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그는 갑작스럽게 방청석을 향해 달려들며 미친 듯이 외쳤다. “여기 왜 왔어! 당장 나가! 나가란 말이야!” 경찰들이 급히 정규인을 제지하려 했으나, 그의 필사적인 몸부림에 저지당했다. “진정해!” 경찰은 엄중히 경고했지만, 그의 저항은 계속되었다. 그러다 결국, 경찰봉이 그의 등을 강하게 내려쳤다. 퍽! 정규인의 입에서 억눌린 신음이 흘러나왔고, 그의 몸은 앞으로 비틀거리며 쓰러졌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방청석의 허징인은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
“이모...” 하연은 조진숙을 꽉 끌어안으며 말문이 막혔다. 지금은 어떤 말도 조진숙에게 자신의 감정을 온전히 전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어떻게 되든 간에, 이모 곁엔 항상 저희가 있어요.” 조진숙은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하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 고맙다.” ... 한적한 교외에 위치한 독채 빌라. 고급스러운 소형 승용차 한 대가 천천히 차고로 들어섰다. 황연지는 휴대폰으로 위치를 확인한 뒤, 차 문을 열고 내렸다. 빌라는 꽤 외진 곳에 있었고, 오랜 기간 비어 있었던 듯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연지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말했다. “상무님? 계신가요?” 대답 대신 돌아온 것은 텅 빈 집안의 메아리뿐이었다. 연지는 2층으로 이어지는 나선형 계단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용기를 냈다. 계단 끝에 닫혀 있는 문 하나가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상무님, 안에 계신가요?” 그녀는 문을 두드렸지만,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잠시 망설이던 연지는 문을 조심스레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문을 열자마자 코를 찌르는 강렬한 술 냄새가 그녀를 덮쳤다. 연지는 본능적으로 코를 막고 안으로 더 들어갔는데, 방 한쪽 구석에 앉아 있는 낯익은 실루엣을 발견했다. “상무님?” 이사회 이후 부남준은 자취를 감췄고, 외부에서 그의 소식을 들을 수 없단다. 그렇게 된 지가 삼 일째였다. 연지는 재빨리 그에게 다가가 그를 부축했다. “상무님, 괜찮으세요?” 남준은 느릿하게 고개를 들었다. 비록 지금의 그는 어딘가 지쳐 보였지만, 그 매서운 매의 눈은 여전히 날카로운 빛을 띄고 있었다. 그는 황연지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입가에 미묘한 미소를 지었다. “너였구나?” 연지는 아침에 급히 소식을 듣고 서둘러 이곳으로 달려왔다. “상무님, 사라지신 며칠 동안 정다영 씨가 상무님을 계속 찾고 있었습니다.” 정다영은 남준을 찾기 위해 거의 미쳐버린 상태였고, 부남준을 찾을 수 있는 곳은 모조리 뒤지고 있었다.
저녁에 하연과 상혁은 음악회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문을 열자마자 집 안의 불이 자동으로 켜졌다. “돌아왔니?” 하연과 상혁은 동시에 고개를 들어 소파에 홀로 앉아 있는 조진숙을 보았다. 지금의 조진숙은 어딘가 쓸쓸해 보였다. “어머니, 집에 계셨네요?” 조진숙은 자리에서 일어나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너희 기다리고 있었어.” 하연은 활짝 웃으며 조진숙에게 다가가 옆자리에 앉았다. “이 늦은 시간까지 기다린 거예요? 일찍 주무시지 그러셨어요.” 하연이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조진숙은 손을 들어 하연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너희가 안 들어오면 마음이 놓이질 않아서.” 하연은 그녀의 팔짱을 끼며 더 애교를 부렸다. “이모가 이렇게 저희를 걱정해주니까, 너무 좋아요!” 조진숙은 하연의 손등을 살짝 두드리며 부드럽게 웃었다. “사실 오늘은 너희에게 할 말이 있어서 기다린 거야.” 상혁은 소파의 다른 쪽에 앉아 조진숙의 말에서 뭔가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꼈다. 하연과 눈빛을 교환한 상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하연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이모, 무슨 일 있으신 거예요?” 조진숙은 살짝 고개를 저으며 차분하게 말했다. “아무 일도 아니야. 그냥 네 동건이 삼촌이 송혜선과 결혼하기로 했다는 것뿐이야.” 이 말은 마치 고요한 연못에 큰 돌멩이를 던진 것처럼 분위기를 흔들었다. 상혁은 무의식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났으나, 조진숙이 그를 불러 세웠다. “상혁아, 흥분하지 마라.” 상혁은 걸음을 멈추고 눈빛을 깊게 내리깔았다. “가서 직접 얘기를 해봐야겠어요.” “그럴 필요 없어.” 조진숙이 단호히 말하며 표정은 여전히 여유로웠고, 마치 이번 일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은 듯했다. “아들아, 이제 그건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란다. 남녀가 서로 좋아해서 함께 사는 건 그저 대수롭지 않은 일일수도 있다. 하지만 결혼은 그런 장난스러운 일은 아니잖아. 네 아버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