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연이 왔구나?”창밖에서 열정적으로 저를 맞이하는 강영숙을 보자 하연은 뒤에 보이는 익숙한 모습을 무시하기로 했다.이윽고 얼른 차에서 내려 활짝 웃었다.“할머니!”강영숙은 너무 기뻐 하연의 팔을 잡아끌었다.“하연아, 정말 오랜만이구나.”그러면서 하연을 안으로 데리고 들어가며 이제 막 정원에 차를 세운 서준은 완전히 무시했다.멀리서부터 정원에 주차된 익숙한 차를 본 서준은 처음에는 본인이 잘못 봤다고 생각했지만 하연이 차에서 내리고 강영숙이 따뜻하게 맞이하는 모습을 보자 마음 한구석이 무언가에 세게 부딪힌 느낌이 들었다.하지만 곧바로 저도 모르게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서준이 차에서 내리자 최향숙이 다가와 마중했다.“도련님, 오셨어요?”“네.”서준은 가볍게 대답하고 최향숙에게 제 물건을 맡긴 뒤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갔다.하편, 강영숙은 거실에서 하연을 끌고 이것저것 물으며 즐겁게 대화를 나누었다. 현관에서부터 두 사람의 웃음소리를 들은 서주의 얼굴에는 웃음이 더욱 선명해졌다.그걸 본 최향숙도 서준이 웃는 걸 오랜만에 본다며 속으로 중얼거렸다.최향숙의 눈빛이 느껴졌는지 서준은 헛기침하며 본인의 감정을 숨기더니 이내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온 뒤 거실로 들어갔다.“할머니!”서준의 목소리에 무의식적으로 고래를 돌린 강영숙의 낯빛은 순간 어두워지더니 퉁명스럽게 말했다.“평소에 집에 오지도 않더니 내가 귀한 손님 모셔왔을 때 왜 하필 오고 그래?”서준은 아무 설명도 하지 않고 덤덤하게 대답했다.“오늘 회사 일이 바쁘지 않아 할머니 보러 왔어요.”강영숙은 서준에게 시간을 할애하기도 귀찮다는 듯 하연을 끌고 위층으로 올라갔다.“가자, 하연아, 할머니가 너한테 줄 선물 준비했는데 같이 보러 가자.”하연이 강영숙에게 끌려 위층으로 올라가는 바람에 거실에는 서준만 멍하니 남게 되었다.하지만 그래도 서준은 기분이 좋아 곧바로 주방으로 향했다.강영숙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하연을 끌고 침실로 가며 낮은 소리로 중얼거렸다.“하연아, 화내지 마.
강영숙은 기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하연을 끌고 침실 솔파에 앉았다.“여기서 잠깐만 기다려, 내가 물건 가지러 갈게.”“뭘 가지러 가세요? 제가 가져올게요.”“괜찮아. 내가 가져오면 돼.”강영숙은 말하면서 다락방으로 들어가더니 한참 뒤 손에 상자 하나를 들고나왔다.“하연아, 너한테 특별히 줄 건 없고, 이건 내가 서준이 할아버지와 결혼할 때 챙겨온 혼수야.”그러면서 상자를 열어 안에 있는 비취 팔찌를 꺼내 하연의 손을 잡았다.“이건 너한테 주는 선물이야.”“할머니, 이건 너무 귀중합니다.”하연이 거절했지만 강영숙은 그럴 기회조차 주지 않고 하연의 손에 팔찌를 끼워주었다.“귀중하고 말고가 뭐 있어? 내 마음인데. 하연아, 뭐가 됐든 할머니 마음속에 너는 내 손녀나 마찬가지야. 피가 섞이지 않았어도.”“할머니.”“예쁘네.”강영숙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앞으로 어느 집 자식이 너와 결혼할지는 모르겠지만, 그게 누구든 안목과 복이 있는 사내라는 건 사실이겠지.”하연은 왠지 부끄러웠다.“할머니, 저...”“착해 빠져서는. 너만 좋으면 된다.”강영숙의 위로에 하연은 코끝이 시큰거렸다.“네, 알았어요, 할머니.”두 사람은 침실에서 한참 동안 얘기 나누다가 함께 저녁 식사를 했다. 하연의 방문에 강영숙도 모처럼 기뻐했고 두 사람 사이에 웃음꽃이 떠나지 않았다.반면 서준은 계속 두 사람 옆에 있었지만 오히려 꿔다 놓은 보릿자루 같았다.강영숙이 휴식을 취한 뒤 집을 나선 하연은 정원에서 진작 기다리고 있던 서준을 만났다.하연은 가던 걸음을 우뚝 멈추고 뭐라 말하려 했지만 그 전에 서준이 먼저 입을 열었다.“할머니가 이렇게 기뻐하는 거 오랜만이야. 고마워.”“나한테 고마워할 거 없어. 난 그냥 할머니랑 같이 있어 드리러 온 거니까.”“응, 그동안 할머니 몸이 안 좋았거든. 난 회사 일 때문에...”“알아, 한 대표님이야 매일 바쁘겠지. 하지만 할머니는 연세도 있으시니 시간 내서 곁에 자주 같이 있어 드려.”“
하지만 서준은 계속 하연과 거리를 유지한 채 조용히 뒤를 쫓다가 하연의 집에 도착하자 그제야 브레이크를 밟고 차를 길옆에 세웠다.한참 떨어진 거리에서 서준은 하연의 집 정원에서 하연을 기다리는 사람의 실루엣을 보았다. 물론 상대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는 없었지만 상대가 남자라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새로운 애인이 생겼나?’‘벌써 동거하나?’‘저 사람 부상혁인가?’서준은 왠지 마음 한구석이 꽉 막힌 것 같다가 뭔가 빠져나가 텅텅 빈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시선마저 흐릿해졌다.서준은 말없이 핸들을 꽉 붙잡았다. 오늘 왜 하연의 뒤를 밟았는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이 모습을 보니 왠지 받아들일 수 없었다.한편 정원에서 하연을 맞이하던 하성은 멀리 멈춰 있는 차를 흘긋거리며 농담조로 말했다.“하연아, 부상혁 저 자식 집에 초대 안 해?”하연은 얼른 다가가 하성의 팔짱을 꼈다.“오빠, 언제부터 이런 일에 관심 있었어요”하성은 그저 궁금한 것뿐이었다.“너희 싸웠어?”“아니요!”“그런데 왜 따로 왔어? 서로 아는 척도 안 하고?”“오빠, 저 사람 누구인지 제대로 봐요.”하연의 말에 하성은 더 궁금해졌다.“뭐? 부상혁이 아니면 누구야? 너 설마 새 애인 생긴 거 아니지? 미리 말해두는데, 난 제부로 부상혁만 인정해. 다른 사람이 우리 집에 들어오려 하면 빗자루로 내쫓을 거야.”하연은 웃음을 참았다.“아, 그래요? 밖에 있는 사람 한서준이에요.”“뭐?”하성은 놀란 표정을 짓더니 바로 말을 이었다.“내가 바로 빗자루 가지러 갈게. 여기가 어디라고 감히! 나 진작에 저 자식 처리하고 싶었어. 기회를 못 찾았을 뿐이지, 오늘 제대로 혼내줄 거야.”하성은 진심이었다.곧이어 사용인더러 빗자루를 건네 달라고 손짓하고는 당장이라도 싸우려고 달려가려는 바람에 하연이 다급히 막아섰다.“오빠. 뭐 하는 거예요?”“흥, 저 자식 쫓아내려고!”하성은 말하면서 밖으로 달려 나갔지만 밖에 주차되어 있던 차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그냥 이렇
“아직 명확한 건 없지만 사채를 빌린 것도 모자라 은행에 본인 명의로 된 부동산을 담보로 내놓았어요.”“보아하니 큰 일을 도모할 모양이네.”“혹시 우리를 겨냥하려고 그러는 거 아닐까요?”“호현욱의 최근 동태를 잘 살펴. 무슨 일 있으면 바로 보고하고.”“네, 사장님.”보고를 마친 태훈은 곧바로 뒤돌아 떠났다. 하지만 이제 막 두 걸음 뗐을 때 하연이 그를 불러 세웠다.“참, 우리 셋째 오빠의 스케줄이 어떻게 돼?”“JJ 그룹이 국민대로에 있는 타임 쇼핑센터에서 오프라인 행사를 열었는데 우리 회사 소속 연예인들 모두 참석했습니다.”“아.”‘어쩐지 아침부터 오빠가 안 보이더라니.’“알았어, 가서 일 봐.”“네.”태훈이 나간 뒤 하연은 계속 일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한참 뒤 하연의 개인 폰이 울리기 시작했다.“하연아, 혹시 오늘 네 오빠가 참석한 행사 위치가 어디 잇는지 알아?”전화 건너편에서 가흔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왜 그래? 무슨 일인데?”하연의 물음에 가흔은 얼른 대답했다.“비서가 정신이 없어 액세서리 잘못 가져갔어. 지금 현장에 가져간 건 아직 외부에 발표하지 않은 새 디자인이야. 그 액세서리는 발매 전에 외부에 공개되면 안 된다고 계약까지 했었거든.”“더 큰일은 비서 핸드폰이 꺼져서 아무리 전화해도 안 받아. 네 오빠 매니저도 연락이 안 닿고.”때문에 가흔은 급한 마음에 하연을 찾은 거다.상황을 들은 하연은 다급히 가흔을 달랬다.“조급해하지 마. 오빠가 오늘 국민대로에 있는 타임 쇼핑셑너에 있어. 지금 가도 시간 될 거야. 나도 연락해 볼게.”“알았어. 그럼 난 먼저 가볼게.”전화가 끊기기 바쁘게 하연은 하성의 개인 폰으로 전화했다.하지만 여러 번 연결을 시도했지만 전화를 받는 사람은 없었다.하성은 평소 폰을 몸에 지니고 있는데 오늘 이런 상황에 하연은 너무 의아했다.‘행사가 있어도 핸드폰은 매니저한테 줬을 텐데. 왜 안 받지? 이런 적 없었는데.’‘오늘 무슨 일이지?’그 시각, 행사장 뒤편에 마
“배우님, 안 돼요!”여름이 다급히 말렸지만 목걸이는 이미 바닥에 나뒹굴었다.“앞으로 이딴 거 내 앞에 가져오지 마.”갑자기 벌어진 상황에 사람들은 서로의 눈치를 살피기 바빴다.“...”이를 본 여름은 얼른 쪼그려 앉아 목걸이를 줍고는 고개를 숙여 공손하게 사과했다.“여정 배우님, 이 목걸이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제가 회사에 다른 걸 가져오라고 요청하겠습니다. 하지만 지금 하고 계신 목걸이는 오늘 하면 안 됩니다.”“난 꼭 이걸 착용해야겠는데?”여정은 안색이 순간 어두워지더니 팔짱을 끼고 기고만장해서 말했다.그 말에 여름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그건 안 될 것 같습니다.”“이봐, 날 건드리고 무사할 것 같아?”여정은 고개를 빳빳이 쳐들고 싸늘하게 경고했다.“내가 너 이 일도 못 하게 해줄까?”“오호? 누가 감히 그런 말 하는지 궁금하네요.”그때 마침 웬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오더니 가흔이 인파를 지나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가흔을 본 순간 여름은 눈시울이 붉어지면서 흐느꼈다.“신 대표님!”가흔은 손을 뻗어 여름의 등을 토닥이며 위로하고는 여정을 바라봤다.“액세서리 잘못 챙긴 건 저희 실수 맞아요. 인정하게요. 하지만 그걸 빌미로 사람 난처하게 할 필요는 없잖아요?”“하.”여정은 코웃음을 치며 가흔의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사실 여정은 처음에 가흔이 하연과 같이 자란 베프라는 소리에 가흔 역시 대단한 가문 아가씨인 줄 알고 사람을 시켜 뒷조사를 해봤다.하지만 가흔의 진짜 신분은 여정을 정말 놀라게 했다.때문에 이 순간에도 가흔의 체면은 고려하지 않고 사정없이 맞받아쳤다.“신 대표님도 인정했네요. 본인이 액세서리를 잘못 챙겨왔다고. 실수했으면 그 대가를 치러야 하는 거 아닌가요?”“아무리 그래도 그걸 여정 씨가 이래라저래라 할 처지는 아닌 것 같은데요?”가흔의 여유로운 대답에 여정의 얼굴은 백지장이 되었다.“난 그저 저 여자한테 일 잘하라고 가르친 것뿐이에요.”“배우님이 본인 처지를 모른 것 같아 말씀드리는
그 말이 떨어지는 순간 여정은 너무 놀라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가흔을 응시했다.“뭐라고요? 목걸이 하나에 60억?”가흔은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네, 이건 VERE에서 맞춤 제작한 목걸이거든요. 위에 있는 다이아는 남 아프리카에서 공수해 온 건데 세상에 하나뿐이고요. HB 그룹 회장님이 부인 결혼 기념 선물로 특별 주문 제작한 거라 가격도 투명해요. 의견이 있거나 배상하기 싫다면 법적 절차대로 처리할 겁니다.”여정의 낯빛은 붉으락푸르락해졌고 방금 전의 기세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여정도 그동안 연예계 생활을 하면서 돈을 적잖이 벌었지만 대부분은 회사에서 가져가 현재 남아 있는 돈은 형편없이 적었다.때문에 60억이라면 거의 전 재산이나 다름없었다.하지만 이미 말을 내뱉었으니 이제 와서 후회하면 주위 사람들이 저를 보는 시선이 너무 신경 쓰였다.결국 한참 동안 생각하던 여정은 눈을 들어 가흔을 바라봤다.“고작 목걸이 하나로 유세는. 배상하면 될 거 아니에요.”“네.”가흔은 여정과 쓸데없는 대화를 주고받는 대신 여름더러 회사 계좌를 알려 주도록 명령했다.“그럼 번거로우신 대로 돈은 여기로 보내주세요.”결국 여정은 이를 악물고 그 돈을 송금했다. 그리고 5분 뒤, 가흔의 핸드폰에 입금 알림이 떴다.그러자 가흔은 목걸이를 여정에게 건넸다.“이렇게 시원시원하게 결제하시니 이 목걸이는 여정 씨한테 드리죠.”여정은 살점이 떨어져 나간 듯 마음이 아팠지만 자존심 때문에 일부러 대범하게 행동했다.“고작 60억이 뭐라고. 가흔 씨는 그동안 바닥에서부터 이 자리까지 기어올라오느라 고생했겠어요.”그 말에 주위의 공기는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심지어 멀리에서 서 있던 하성마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하지만 마지못해 60억을 지불하게 된 여정은 이 언짢은 기분을 분출해야 했기에 모든 분노를 가흔에게 겨냥했다.“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죠?”가흔의 반문에 여정은 씩 웃으며 느긋하게 대답했다.“가흔 씨 고아라면서요? 최씨 가문 지원금으로 대학까지
여정은 한 대 맞은 것에 어리둥절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가흔을 바라봤다.“지금 나 쳤어?”주위 사람들도 너무 갑작스럽게 벌어진 일에 놀라 멍해 있다가 이내 반응했다.“때린 지가 언젠데 반응이 좀 늦네요.”“이게!”여정이 뭐라 말하려 했지만 그때 마침 인파 속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하성 배우님!”그 말을 들은 여정의 얼굴을 순식간에 변했다.여정은 눈을 들어 한참 떨어진 문에 기대 있는 하성을 확인했다.하성은 늘 그렇듯 덤덤한 표정을 짓고 있어 도무지 속내를 알 수 없었다.그 모습을 보니 여정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 조심스럽게 말했다.“선배, 언제부터 와 있었어요?”하성 배우님이라는 호칭을 듣자마자 그대로 굳어 버린 가흔은 여정의 선배라는 호칭에 등 뒤에 있는 사람의 신분을 더 확신했다.‘방금 다 봤나?’‘내가 자기 후배 때렸다고 화내겠지?’가흔은 난처해하는 모습을 들키지 않기 위해 눈을 내리깔고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떠나버렸다.여정은 그 모습을 보더니 얼른 하성 앞에 달려가 불쌍한 표정으로 고자질했다.“선배, 방금 다 봤죠? 저 여자가 밑도 끝도 없이 다짜고짜 저를 때렸어요.”그러면서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떨구었다.하지만 그 누구도 나서서 사실대로 말해주는 사람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게, 여정의 신분 때문에 본인이 화를 입을까 봐 두려웠으니까.하성은 여정의 얼굴을 보더니 덤덤하게 물었다.“가흔이 때린 거야?”여정은 고개를 끄덕였다.“선배, 아까 그 여자 진짜 미친 거 같아요. 분명 본인이 액세서리 잘못 챙겨왔으면서 내가 실수로 조금 망가뜨렸다고 60억이나 배상하게 하고 고작 몇 마디 투덜댔다고 저를 때렸어요.”여정은 본인이 유리한 쪽으로만 말했다. 물론 하성이 언제부터 있었고 얼마나 지켜봤는지 알 수 없었지만 선배 앞에서 그동안 쌓은 이미지가 그대로 무너지게 둘 수는 없었으니까.그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하성이 최씨 가문 셋째 도련님이라는 거다.하성은 사람들이 감히 따라잡을 수 없는 신분
하연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하성의 모습에 호기심이 발동했지만 더 묻지 않고 손가락으로 옆을 가리켰다.“방금 저쪽으로 갔는데 아마 멀리 못 갔을 거예요.”하성은 잠시도 망설이지 않고 긴 다리를 내디디며 가흔이 떠난 쪽으로 쫓아갔다.그렇게 불과 10걸음 만에 하성의 눈에 익숙한 실루엣이 들어왔다.하성의 얼굴에 드리웠던 당황한 표정은 점차 걷혔지만 발걸음은 오히려 빨라졌다.“가흔아!”하성의 부름에 가흔은 제 자리에 우뚝 섰다. 그리고 다음 순간 하성이 가흔의 옆으로 다가왔다.“왜 그렇게 빨리 떠나?”가흔은 맑고 고요한 샘물 같은 눈동자로 하성을 빤히 보다가 입꼬리를 말아 올리더니 퉁명스럽게 말했다.“따지러 왔어요?”이에 하성은 눈썹을 치켜 올리며 시선을 가흔의 손으로 옮겻다.그 시선을 느낀 가흔은 말없이 주먹을 꽉 쥐었다.“따지러 온 거면 저도 할 말 없어요. 저 여정 씨 때린 거 맞아요. 60억 배상하라고 한 것도 맞아요. 의견 있으면 제 변호사랑 얘기해요.”가흔이 장황하게 말을 늘어놓았지만 하성은 전혀 귀담아듣지 않고 입을 뻐끔거리다가 끝내 물었다.“손 안 아파?”가흔은 그 순간 멈칫하더니 한참 멍해 있다가 믿기지 않는 듯 물었다.“뭐라고요?”하성은 가흔에게 다가가 또다시 반목했다.“아까 힘 많이 쓴 것 같던데, 손 안 아파?”가흔은 무의식적으로 제 손을 뒤로 뺐지만 하성이 틈도 주지 않고 가흔의 손을 덥석 잡았다.“뭐 하는 거예요? 이거 놔요.”“하연처럼 뭐든 본인이 직접 나서는 버릇 고쳐!”“?”가흔은 무의식적으로 손을 빼고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걱정하는 상대가 잘못된 것 같은데요? 저 손 괜찮아요. 아무 문제 없어요. 오히려 여정 씨가 문제죠. 아마 얼굴이 부었을 테니 가서 후배나 걱정해요.”그러면서 일부러 후배라는 단어에 힘을 줬다.하지만 하성은 가흔의 말투에 드러난 질투의 감정을 조금도 눈치채지 못했다.“난 너를 거정하는 거야.”“필요 없으니 가요. 전 바빠서 이만.”가흔은 말을 마치자마자 뒤에 맹
하연과 신가흔은 최씨 가문 저택 내에 있는 카페에서 만났다. 최하성이 돌아오지 않을 것을 확인한 후, 가흔은 안심하며 말했다. “이건 내가 후배로서 할아버지께 드리는 작은 선물이야. 대신 전해줘.” 하연은 선물을 한 번 보고 나서 물었다. “할아버지가 가끔 너랑 하성 오빠를 언급하시는데, 직접 찾아뵐 생각은 없어?” 가흔은 차분한 표정으로 말했다. “지금 상황에서 그럴 필요가 있을까?” 해외에서 지내는 동안 가흔은 더욱 냉정하고 이성적으로 변해 있었다. “내가 할아버지를 만나면 하성 오빠가 분명 날 찾을 거야. 우리끼리 만날 일은 없을 테니까, 더 이상 얽히고 싶지 않아.” 하연은 이해하지 못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왜 그렇게 하성 오빠를 계속 피하려고 해?” 하연이 DS그룹 홍보팀 직원들에게 들은 바로는, 하성이 그 당시의 여자 연예인과 관련된 사건은 단순한 해프닝에 불과했고, 별다른 문제도 없었다. 이후 공식 입장을 내고 해명도 했었다. 하성이 가흔에게 설명했을 테지만, 가흔은 끝내 떠나고 돌아오지 않았다. 가흔은 차분하게 말했다. “우리 사이엔 기본적인 신뢰가 없어. 서로를 의심하며 살아가는 게 너무 힘들었어.” 이 말에 하연은 대충 상황을 이해하고 커피를 저으며 한숨을 쉬었다. “하성 오빠의 상태가 좋지 않아. 몇 달째 스케줄도 없고, 녹음실에 틀어박혀 곡만 쓰고 있어. 오빠도 분명 너를 많이 그리워할 거야.” 가흔은 슬며시 웃었지만, 그 미소는 금세 사라졌다. “사람마다 이별에 적응하는 시간이 달라. 시간이 좀 더 지나면 괜찮아질지도 몰라.” 가흔은 더는 이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아 화제를 바꿨다. “이번에 F국에는 무슨 일 때문에 온 거야?” “보석 복원 작업을 맡았어. 의뢰 금액이 엄청나게 높더라. 전 세계에서 이 복원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세 명도 안 돼.” 하연은 놀라며 물었다. “네가 그 중에 한 명으로 뽑힌 거야?” 가흔은 고개를 끄덕였다.
“제 동생은 부 대표님 사람들 덕분에 잘 보살핌을 받고 있어요. 저는 대표님을 믿습니다. 그래서 철수하고 싶지 않아요. 게다가 임무도 아직 끝나지 않았잖아요.” 희서는 등을 꼿꼿이 세우며 말했다. “송혜선이 부씨 가문에서 둘째 아이를 낳게 된다면, 대표님의 길에 큰 장애가 될 것입니다. 이 문제를 해결해야만 저는 떠날 수 있습니다.” 희서의 단호한 태도에 상혁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럼 이제는 원신민과 직접 연락해. 황연지가 너에게 연락해도 대응할 필요 없어.” “알겠습니다.” 희서는 차를 마신 뒤 자리에서 일어났고, 하연은 원신미를 대신해 직접 희서를 배웅했다. “우희서 씨, B시는 위험한 곳이에요. 만약 위험을 마주하게 되면 이 번호로 연락해요. 도와줄 사람이 있을 거예요.” 하연은 펜을 꺼내 우희서의 손바닥에 번호를 적으며 말했다. “꼭 기억해야 해요.” 희서는 하연을 바라보며 잠시 넋을 잃었다. 하연은 향긋한 향기가 나는 우아한 여성이었지만, 결코 쉽게 다룰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다. 희서는 물었다. “실례가 안 된다면... 혹시 최하연 씨인가요?” 하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절 알아요?” “황연지를 만날 때마다, 황연지 씨가 항상 최하연 씨 이야기를 많이 하더라고요.”연지가 하연을 언급할 때는 언제나 아쉬움이 가득한 말투였다. 왜 최하연은 이렇게 모든 것을 쉽게 얻었는지, 왜 자신은 상혁의 사랑을 받을 수 없었는지에 대해 불만을 털어놓곤 했다. 희서는 연지가 늘 이런 이야기를 할 때마다 조용히 듣고 있었지만, 그때마다 마음이 아팠다. 하지만 오늘 하연을 직접 만나고 나서야 비로소 깨달았다. 하연은 상혁과 완벽하게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둘은 마치 천생연분처럼 잘 어울렸다. 하연이 물었다. “황연지가 저에 대해 뭐라고 말했어요?” 희서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하연은 그 모습에 대충 짐작이 갔지만, 화내지 않고 부드럽게 말했다. “사랑하는 마
하연은 결국 상혁의 집에 계속 머물기로 했다. 상혁은 하연과 함께 지내며 그녀가 다시 떠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하연이 일이 있을 때면, 상혁은 사람을 시켜 그녀를 보호하며 최대한 비밀리에 움직이게 했다. DL그룹 내부는 너무 복잡했고, 자신이 섣불리 드러나면 안 된다는 것을 하연도 잘 알고 있었다.하연은 상혁의 무릎 위에 앉아 장난스럽게 그를 감싸 안으며 말했다. “나, 마치 당신이 기르는 애인 같아요.” 상혁은 일 처리를 멈추지 않고 가볍게 웃으며 대답했다. “애인은 그렇게 키우는 게 아니야.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원하는 건 다 줘야지. 마치 애완동물처럼, 하나씩 천천히 줘야 하는 거야.” “정말 애완동물 키워본 적 있어요?” 하연이 묻자 상혁은 냉정하게 대답했다. “남이 키우는 걸 본 적은 있어.” B시 쪽에서는 가끔씩 소식이 들려왔다. 어둠 속에 숨어 있는 첩자들이 작은 정보까지 빠짐없이 전달했다. 그러던 어느 날, 원신민이 보고했다. “우희서 씨가 F국에 도착했습니다. 대표님을 뵙고 싶어 한다고 합니다.” 하연은 의아하게 물었다. “우희서가 누구예요?” 상혁은 짧게 지시했다. “이곳으로 데려와.” 원신민은 잠시 당황했지만, 곧바로 고개를 숙였다. 하연이 곁에 있는 것을 보며, 상혁이 그녀를 얼마나 신뢰하는지 느낄 수 있었다. 몇 주 전까지 둘은 싸우고 냉전 중이었지만, 지금은 예전의 믿음이 돌아온 것처럼 보였다. 상혁이 설명했다. “내 첩자야.” 곧 우희서가 도착했다. 그녀는 모자와 마스크를 착용한 채로 방에 들어섰고, 하연이 주인의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 잠시 놀랐다. 상혁은 옆에 앉아 서류를 보며 무심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부 대표님.” 우희서는 정중하게 인사했다. 상혁은 자리를 가리키며 앉으라고 권했다. 하연은 희서 앞에 차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모자와 마스크는 벗어도 돼요. 여긴 안전해요.” 우희서는 잠시 망설였지만 상혁의 고개 끄덕임을
상혁은 하연의 허리를 감싸며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지었다. “우리 어머니가 뭐라 할 것 같아? 나랑 같이 나가서 확인해볼래?”“뭘 확인해요? 내가 진짜 페르시안 고양이라도 된다는 거예요?” 하연은 긴장하며 반문했다.상혁은 웃음을 터뜨리며 안방을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그가 움직이는 소리를 듣고 하연은 의아해했다. “당신,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고양이가 있다고 한 거예요?”“그냥 없애면 돼.” 상혁은 물건 하나를 집어 들더니 창밖으로 세게 던졌다. 이때, 큰 소리가 났다.조진숙이 깜짝 놀라며 물었다. “상혁아, 무슨 소리야?”“고양이를 안으려고 했는데, 창 문 밖으로 도망치다가 떨어졌어요.”“뭐라고?” 조진숙은 충격을 받았다. “떨어지다니, 어디로 떨어진 거야? 밑으로? 여기 고층인데 다치진 않았겠지?”“바로 뒤가 호수라서 다치지는 않았을 거예요.”조진숙은 여전히 안절부절못하며 말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고양이 하나 제대로 못 잡는 거야?”상혁은 하연과 눈을 마주치며 대답했다.“새 고양이 하나 사서 원신민한테 보상해주면 괜찮을 거예요.”조진숙은 여전히 안도하지 못하며 말했다.“길러 온 정이 있는데 새로 산 고양이와는 전혀 다르지. 그래도 생명이잖아. 원신민 만나면 제대로 사과해.”상혁은 고개를 끄덕였다.하연은 상혁의 거짓말이 이렇게 자연스럽게 나오는 모습을 보며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상혁은 하연에게 몸을 가까이하며 귓가에 속삭였다. “왜 웃어? 네가 저지른 일이잖아.”간질거리는 느낌에 하연은 본능적으로 몸을 피하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모가 아직 밖에 있어요.”상혁은 작은 소리로 대답했다. “밖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아.”상혁은 특히 이런 금기의 느낌을 좋아했다. 그는 하연에게 천천히, 부드럽게 입맞춤하며 물었다.“아직도 아파?”하연은 작게 대답했다. “그만 하고 빨리 가요.”조진숙은 아들이 나오지 않자 참다못해 물었다. “상혁아, 거기서 뭐 하고 있니?”“고양이가 어질러 놓은 거
하연이 눈을 떴을 때, 도시는 이미 밤의 장막에 휩싸여 있었다. 그녀는 흐릿한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며 몸이 묵직하게 아픈 것을 느꼈다.오랜만에 욕구를 해소할 수 있었던 상혁은 특히나 격렬했다. 소파에서 시작해 주방, 다시 안방, 마지막으로 욕실까지, 온 집안의 모든 공간을 사용했다. 하연의 온몸은 마치 압사당한 듯 피곤했고, 손가락 하나 움직이는 것조차 힘들었다.방 안에는 은은한 아로마 향이 퍼져 있었고, 어둑한 조명이 켜져 있었다. 공기 중에는 이미 사랑의 흔적이 사라졌고, 상혁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하연은 침대에 누운 채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그곳에는 마치 천장이 아닌 신들의 조각상이 장엄하게 자리하고 있는 듯 보였다. 신들은 어두운 밤 속에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하연의 마음은 쓸쓸했다. 어젯밤, 둘이 동시에 절정을 맞았을 때, 상혁이 그녀의 손을 잡고 신들을 가리켰던 그 순간이 떠올랐다. 그것은 단순한 육체적 쾌락을 넘어, 정신적으로도 거부할 수 없는 극도의 미친 감정이었다.하연은 다시 샤워할 필요는 없었다. 상혁이 욕실에서 이미 그녀를 씻겨주었기 때문이다.하연은 침대에서 내려왔으나, 문이 잠겨 있는 것을 발견했다. 별다른 생각 없이 발걸음을 옮겨 발코니 쪽으로 다가갔고, 그곳에서 외부로 통하는 또 다른 문을 발견했다. 문에 가까이 다가가자 소리가 들려왔다.“네 아버지를 조사해보라고 했잖아. 했어?” 조진숙의 목소리였다.하연은 걸음을 멈췄다.조진숙이 갑자기 찾아왔고, 상혁은 서둘러 셔츠를 하나 걸치고 나갔다. 그와 하연이 얽히며 셔츠 목 부분이 구겨져 있었다. 그는 눈살을 찌푸렸다. “조사했어요. 고나희의 사고는 단순 사고였고, 아버지와는 관련이 없어요.”“고경수가 비리로 돈을 챙긴 걸 얼마나 알아냈어? 난 그 명목상의 숫자만 믿을 수는 없어. 배를 채운 흔적이 있는지 다 밝혀냈어?” “DL그룹은 아버지 거예요. 아버지가 그런 실수를 하실 리 없죠.” 조진숙은 창가 쪽으로 걸어갔다. 많은 시련을 겪어온 여성이기에,
“왔어요?” 상혁은 놀라움이 가득한 여자 목소라가 들렸다. 상혁은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주방에서 서둘러 나오는 하연이 국을 들고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하연이는 웃으며 물었다. “왜요?”국이 너무 뜨거웠던지, 그녀는 재빨리 그릇을 내려놓고 귀를 만지며 식히고 있었다. 상혁의 얼굴에는 아무런 감정이 없었고, 목소리까지 차가웠다. “정말 안 가고 기다리고 있었어?” 하연은 의아해하며 답했다. “당신이 기다리라고 했잖아요. 그래서 당신이 돌아오길 기다리고 있었죠. 그런데 당신이 너무 안 와서, 심심해서 뭐 만들어 먹을 게 없나 하고 요리 만드는 법을 찾아보다가 뭘 좀 만들어 먹었어요. 다행히 냉장고도 가득 차 있었고 장비도 다 갖추어져 있어서 문제없었어요.” 그녀가 말할 때, 분명히 기쁜 마음과 행복한 표정이었다. 하연이 말을 마치자마자, 상혁은 두세 걸음에 그녀를 끌어당겼다. 그는 손을 잡고 그대로 바로 하연이를 품 안에 가둬버렸다. 상혁의 힘은 상당히 강했고, 하연은 고통스러운 신음 소리를 냈다. “음... 왜 그래요?” 하연은 상혁의 품에서 안정을 느꼈지만, 그의 강한 포옹에 약간 당황했다. 그녀의 몸에서 풍기는 평온한 향기가 상혁의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혔다. 상혁은 눈을 감고, 목소리가 거칠고 낮았다. “난 네가 간 줄 알았어.” 하연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그의 옷깃을 살며시 잡았다. “기다린다고 말했잖아요. 그러니 안 갔죠.” 그녀는 상혁의 감정이 평소와 다르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방금 전, 상혁은 본가에서 싸움 끝에 기분이 상한 채로 돌아왔다. 부남준은 송혜선을 보호하며 소리쳤다.“형, 이 아이도 한 생명이에요! 아버지의 혈육이잖아요!”상혁은 바로 남준의 옷깃을 잡고 주먹을 날렸다. 집사가 나서서 뜯어말리지 않았다면 남준은 일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상혁의 목에 난 상처를 알아보고 하연은 황급히 그를 밀어내며 물었다. “무슨 일 있었죠? 교통사고 처리하러 간
하연은 상혁의 집에서 밤을 지새웠다.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한 채, 새벽녘에 깨어나니 집안은 고요했고 상혁이 돌아온 흔적은 없었다. 그녀는 뒤척이며 잠을 청할 수 없어 핸드폰을 열었고 보니, 마침 서여은이 사진을 올려놓았다. 외부 취재 중이라는 설명과 함께 사진에는 ‘큰 뉴스’라는 글이 적혀 있었다. 두 시간 뒤, 여은이 다시 글을 남겼다. [뉴스가 없어졌어.]하연은 궁금해졌다. [어떤 뉴스?][DL그룹과 관련된 일이야. 전에 조사받았던 고경수 기억나지? 그 사람 딸이 죽었대. 원래 뉴스에 나올 예정이었는데, 누군가 큰돈을 써서 기사를 막아버린 모양이야.]하연은 짐작할 수 있었다. DL그룹과 관련된 일이라면 상혁이 처리했을 가능성이 컸다. 여은이 사건 현장의 사진을 한 장 보냈다. 사진 속 여성은 운전석에 앉아있었고, 절반가량의 얼굴이 드러났는데 표정은 죽음을 앞둔 사람처럼 처참했다. 하연은 사진을 확대했다. [이 여자를 어디서 본 것 같은데.]여은이 바로 하연에게 전화를 걸었다. [고나희야, 고경수의 딸이잖아. 애지중지하게 키워졌는데 세상 물정은 잘 모르는 아이였지. 그런데 네가 정말 고나희를 본 적 있어?]“한 번 스쳐 지나가며 본 적 있어.” 하연은 기억을 떠올리려 애썼고, 드디어 생각이 났다. 얼마 전 정다영을 만나러 호텔에 갔을 때, 고나희와 스쳐 지나갔었다. 그때 고나희가 하연과 부딪혔고, 부남준이 다정하게 하연을 붙잡아주며 고나희에게 아주 화를 내면서 잘 보고 다니라고 말했다.하연은 그때 남준이 자신에게 하는 말인 줄 알고 반박하려다, 남준의 시선이 고나희를 향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고나희는 아무 말 없이 자리를 떠났고, 이후 하연과 남준은 각자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저 아주 사소한 일이었지만, 하연은 고나희를 이렇게 다시 보게 될 줄은 몰랐다. 그것도 그녀의 사망 소식으로.[참, 고나희의 뱃속에 아이도 있었다고 하더라.]하연은 깜짝 놀라며 물었다. “몇 개월이었는데?”[5,6개월쯤 되었을 거야.]하지만
“형님 얼굴도 별로 좋아 보이지 않네요.” 상혁은 대꾸하지 않았다. “그만, 아침부터 무슨 쓸데없는 소리를 해. 어서 앉아라.” 부동건이 꾸짖었다. “어젯밤에 술 마셨어요?” 남준은 대수롭지 않게 앉으며 말했다. “접대하는 자리여서 어쩔 수 없었다.” “남자가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상혁이 처럼 남준이 너도 당연히 그런 자리는 해야 해.” 송혜선은 웃으며 중재했고, 말 하나하나에 의미가 담겨 있었다. 상혁은 집사가 가져온 우유 외에는 아무것도 손대지 않았다. 반면 부남준은 여유롭게 식사를 이어갔다. “형, 들었어요. 고경수의 딸이 사고를 당했다면서요.” “소식 한번 빠르군.” “검사 보고서도 확인했어요. 그 여자아이, 임신까지 하고 있었다면서요. 그런데 아버지가 누군지는 밝혀졌나요?” 이 질문은 부동건의 주의를 끌었다. “아이? 아이의 아버지가 누구냐? 상혁아, 왜 나한테는 이런 얘기는 하지 않은 거냐?” “떳떳한 사이가 아닌 것 같아서 말씀들이지 않았습니다. 여자가 잘못된 길을 걷고, 잘못된 남자를 믿는 일은 흔합니다.” 상혁은 남준을 힐끗 보고 말했다. “본인이 굳이 알리지 않았다는 건, 아버지가 누군지...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겠죠. 그리고 고경수의 집안은 이미 파란 속에 휩싸여 있으니, 괜한 일을 벌이기보다는 조용히 지나가는 게 더 낫다고 생각했습니다.” 남준은 아침을 먹으며 웃었다. “고경수가 DL그룹에서 문제를 일으킨 것을 누군가 알았고, 그걸 감추기 위해서 자기 딸을 이용해 DL그룹 고위 간부에게 연결하게 해줘서 둘 사이에 아이가 만들어졌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냥 떠본 말이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부동건은 남준의 말의 조금씩 흥미를 가지기 시작했다. “계속해 봐라.” “제 말은, 고경수가 자기 딸을 이용해 누구에게든 신세를 졌을지도 모른다는 겁니다.” 상혁이 갑자기 미소를 지으며 모두 그를 바라보았다. 상혁의 하얀 손가락 관절이 탁자를 가볍게 두드리며, 무심한 어조로
“지금 정규인은 어디에 있나?” “제가 확인한 바로는, 아직 동남아에 있습니다.” 상혁은 외투를 집어 들고 일어섰다. “현장에 가보자.” 나가기 전에 상혁은 다시 침실로 발길을 돌렸다. 하연은 그네 의자에 앉아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는 뒤에서 하연의 긴 머리를 정리해주며 말했다. “DL그룹 내부에 문제가 생겨서 처리해야 해. 시간이 좀 걸릴 거야. 기다려줄래?” 하연은 상혁의 눈 속에 아직 남아 있는 욕망을 알아차렸다. “기다릴게.” 상혁은 미소를 지으며 빠르게 나갔다. 상혁이 탄 검은 차가 빠르게 출발했고, 멀지 않은 곳에 주차되어 있던 차가 상혁이 떠나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 뒷좌석에 있던 남자는 긴장을 풀며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잘했어.” 옆에 있던 여자는 몸을 떨며 좌석에서 미끄러져 반쯤 무릎을 꿇은 자세로 말했다. “상무님, 정규인의 아내가 진작부터 자기 남편과 고경수의 딸에 대한 불륜 사실을 알고 있었어요. 경찰이 정규인의 아내를 의심하지 않을까요?” 부남준은 그녀를 흘끗 보고 냉소적으로 말했다. “정규인의 아내는 오늘 밤 밖에서 돈 쓰느라 많이 돌아다녔어. 인증과 물증이 다 있지. 이번 사고는 단순한 사고일 뿐이지, 인위적인 것이 아니야.” “황연지.” 남준은 몸을 앞으로 기울여 연지의 턱을 들어 올렸다. “부상혁에게도 그렇게 말해.” 연지는 약간의 공포를 담은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이미 재무 보고서를 받았어요. 아마 저를 의심할지도 몰라요.” “네가 부상혁에게 충성을 다 바치는데, 왜 너를 의심하겠어?” 남준은 흥미로운 듯 그녀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그날 최하연을 다치게 한 건 정말 잘했어.” 그날 그 일은 바로 남준이 직접 지시한 것이었다. 연지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 사람... 이미 저를 의심하고 있어요. 평소라면 제가 그런 행동을 할 리가 없다는 걸 알 거예요. 게다가, 그 사건은 그 사람과 하연에게 아무런 영향도 주지 않았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