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연은 따뜻한 우유를 손에 꼭 쥐고 만족스러운 듯 상혁을 바라봤다.“상혁 오빠, 능력을 감추고 있었네요. 이런 건 다 언제 배웠어요?”알고 지낸 지 그렇게 오래 되는데 하연은 상혁이 요리를 잘하는 것도 처음 알았다.“오래전에 배웠는데 이제야 써먹네.”가장 의미 깊은 건 하연이 겨우 본인이 한 음식을 먹었다는 거다.상혁은 웃음기 가득한 눈을 내리깔며 말했다.“맛있으면 앞으로 자주 해줄게.”“좋아요. 제가 먹을 복은 있나 봐요!”하연은 아무 생각도 없이 대답했다.아침 식사를 마친 뒤 상혁은 하연을 회사까지 바래다주었다.차에서 내린 하연은 상혁을 향해 손을 흔들며 떠나는 것까지 지켜본 뒤에야 회사로 들어갔다.그런데 그 모습을 마침 하성이 발견하고 말았다.“최하연!”하성은 성큼성큼 다가와 하연을 위아래로 훑어봤다. 그 모습에 하연은 어리둥절해서 물었다.“오빠, 뭘 그렇게 봐요?”“솔직히 말해. 너 어젯밤 외박했지?”“그게 무슨 소리예요?”하연은 난감해서 대답을 피했지만 하성이 쉽게 놓아줄 리 없었다. 심지어 이미 다 알고 있다는 표정으로 따져 물었다.“방금 부상혁이 너 데려다주던데. 말해 봐, 대체 무슨 상황이야?”“어... 오빠, 잘못 본 거 아니에요? 그럴 리가요. 나 늦어서 올라가 봐야 해요.”말을 마친 하연은 당장이라도 도망칠 것처럼 굴었다. 그 모습을 보며 하성은 피식 웃더니 고개를 저었다.“역시 딸은 크면 다 시집보내야 한다더니.”“오빠!”하연이 홍당무가 돼서 버럭 소리치자 하성은 웃음을 터뜨렸다.“알았어. 안 놀릴게. 상혁은 그나마 믿을 만하지만 매부가 되는 건... 더 지켜봐야 해.”‘나 최하성의 동생을 그렇게 쉽게 줄 수는 없지.’게다가 하성이 아니더라도 하민과 하경이 있기에 다 통과하기는 쉽지 않다.하성은 눈썹을 치켜 올리며 속으로 기회를 잡아 상혁을 제대로 시험해 봐야겠다고 결심했다.그때 하연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오빠, 우선 나를 상관하지 말고 오빠나 연애해요. 좋은 여자 많지 않으니까 인연
[하연아, 일 바빠?]하연은 싱긋 웃었다.“괜찮아요. 요즘 회사가 정상 궤도에 올라 그나마 괜찮아요.”[그렇다면 다행이고.]강영숙은 말하면서 기침을 몇 번 했다.그 소리에 하연은 눈살을 찌푸렸다.“할머니, 몸 괜찮으세요?”[괜찮아. 고질병이라 그래.]하연은 순간 걱정이 앞섰다. 하연이 한씨 저택에서 지내는 3년 동안 강영숙은 늘 하연에게 한결같이 잘해주고 따뜻하게 대해주었다.“혹시 의사한테 진찰받아 보셨어요?”[봤어. 너무 걱정하지 마. 한동안 얼굴 보지 못해서 얘기나 좀 할까 하고 전화했지.]“제가 저녁에 퇴근하고 찾아뵐 게요.”그 말에 강영숙은 환한 미소를 지었다.[정말? 그럼 너무 좋지, 집이 너무 썰렁했는데, 네가 이런 늙은이도 보러 와준다니까 기분이 좋네.]“할머니, 그런 말 마세요. 어찌 됐든 할머니는 저한테 늘 가족이세요.”강영숙은 저도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졌다.[역시 나 생각하는 건 하연이 너밖에 없어. 그래, 그럼 난 방해하지 않을 테니 일해.]“네, 할머니, 저녁에 봬요.”전화를 끊은 하연은 핸드폰을 옆에 내려놓았다.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려오더니 태훈이 사무실 안으로 들어왔다.“사장님, JJ 그룹 주 회장님이 찾아오셨어요.”“응, 우선 회의실로 안내해. 바로 갈 테니까.”“네, 사장님.”하연은 미리 준비했던 자료를 가지고 바로 문을 나섰다.미팅은 아주 순조롭게 진행되었고, 협력도 바로 합의하여 그날 오후 계약을 체결했다.계약서에 사인한 주현빈은 만족하는 듯 하연에게 손을 내밀었다.“최 사장님, 함께 잘해봅시다.”“네, 잘해봅시다. 잘 가르쳐 주세요.”“너무 겸손하시네요. 최 대표님 같은 분을 제가 뭐 가르칠 게 있다고. 함께 협력하고 함께 배우는 거죠.”“주 회장님이 선배이시니 제가 응당 배워야죠.”겸손하고 겸허한 하연의 말과 태도에 사람들의 호평은 끊이지 않았다.“주 회장님, 가시죠.”“가시죠.”일행은 모두 회의실에서 걸어 나왔다. 맨 앞에 선 하연과 현빈이 화기애애하게 토론하는 모습
민호가 급히 자신이 찾아낸 자료를 건네며 말했다.“찾아봤는데, 최근에 새로 설립된 LS 그룹이었어요.”“허, 새 회사가 이렇게 큰 패기를 가지고 있다니, 이렇게 중요한 땅을 한 번에 차지한 거야?”호현욱이 살짝 경악하며 말했다.“다른 건 뭐 더 알아냈어?”“LS 그룹은 겉으로 보이는 것처럼 그렇게 간단하지 않아요. ST 그룹과 한씨 가문과 관련이 있는 것 같아요...”“한씨 가문? 한서준?”“네, 맞아요.”“내 말이 맞는 것 같네. 한서준조차도 이 땅의 가치를 인정한다면 안 좋을 리가? 최하연, 쯧쯧, 이렇게 눈썰미가 없어서야, 이렇게 좋은 프로젝트를 놔두고 하지 않으려 하다니.”“네, 이사님! 이번에 최 사장님의 방향이 확실히 빗나갔어요. 물론 LS 그룹이 이 땅을 차지했지만, 그 회사 대표 혼자서는 먹을 수 없어요.”호현욱이 웃으며 말했다.“그러면 마침 우리에게 기회가 차려진 거잖아? LS 그룹 대표한테 연락해서 언제 한번 만나서 잘 이야기 좀 하자고 말씀드려봐.”“따로 시간 낼 필요 없어요, 지금 바로 가능해요. 제가 이미 LS 그룹의 임 대표님께 연락 드려 그쪽도 우리와 협력할 의향이 있다고 했어요.”호현욱은 손을 뻗어 민호의 어깨를 툭툭 치며 말했다.“정말 좋아, 잘했어! 일하는 게 갈수록 믿음직스럽네.”민호는 멋쩍게 웃으며 대답했다.“이게 다 호 이사님이 배양한 덕분이죠. 이사님을 따라 일을 하다 보니 제가 성장하고 많이 배운 거 아니겠습니까.”“그래, 잘해봐, 내가 잘해줄 테니. 임 대표와 만날 시간과 장소 좀 확인해 줘, 제대로 얘기해 봐야겠으니까.”“네, 호 이사님.”민호는 얼마 지나지 않고 시간과 장소를 받아왔다.호현욱도 망설이지 않고 운전기사에게 약속한 카페로 향하도록 명령했다.한편, 모연은 커피 한 잔을 주문하고 한참 동안 기다리고 있었다.자신과 만나기로 한 사람이 DS 그룹 그룹의 호현욱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모연의 기대는 커졌다.모연은 이미 호현욱에 대해 수소문하여 호현욱이 DS 그룹 그룹에서
“여기, 블랙커피 좀 주세요. 설탕은 넣지 말고요.”호현욱이 직원을 불러 주문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커피가 나오자 느긋하게 커피잔을 들어 입가에 대고 가볍게 한 모금 마셨다. “임 대표님이 고른 카페가 참 괜찮네요. 커피가 고소하고 맛이 좋네요.”모연의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앞으로는 기회가 되면 제가 커피를 많이 대접해야겠네요.”“음, 좋은 생각이네요.”두 사람이 서로 말을 주고받았고 그 누구도 양보하려 하지 않았다. 호현욱이 통제하기 쉬운 사람일 거라고 생각했던 모연은 호연욱의 의외의 모습에 놀랐다. 하지만 모연도 그렇게 호락호락하지는 않았다.커피 한 잔이 바닥나자, 모연이 일어서며 말했다.“호 이사님, 이제 더 이상 할 말이 없을 것 같은데, 여기서 그냥 일어날까요?”호현욱은 그제야 싱긋 웃으며 손에 들고 있던 커피잔을 천천히 내려놓으며 말했다.“임 대표님, 그렇게 조급할 필요 뭐 있나요, 안 그래요?”“아, 혹시 하실 말씀 더 있나요?”호현욱은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우리가 협력해야 하는 이상 서로를 신뢰하는 것이 첫걸음인데, 임 대표님은 저를 잘 믿지 않는 것 같네요.”모연은 호현욱이 전혀 감추려 하지 않고 직설적으로 나오는 모습을 보자 굳이 돌려서 말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게, 두 사람은 같은 목표를 갖고 있으니까.그녀는 바로 자리에 앉아서 말했다.“제가 실례했네요!”“괜찮아요, 협력도 한순간에 이루어지는 게 아니니까요.”모연이 직설적으로 말했다. “호 이사님은 현명한 분이시니 저도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죠.” “말씀하세요.”“LS 그룹이 성동 땅을 확보한 거 맞아요, 부동산 개발을 목적으로 땅을 확보한 거고요.”“현재로선 부동산 산업의 전망은 우리 모두 잘 알고 있잖아요. 이 땅은 지리적 위치가 우월하고 투자하면 확실히 손해를 보지 않는 장사예요.”“다만, 현재 LS 그룹의 수중에 있는 자금은 한정되어 있는데 호 이사님은 얼마나 투자할 수 있나요?”“...”호현욱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모연이 멀리 떠난 뒤 호현욱은 그제야 멀리에 있는 비서 민호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호 이사님, 시키실 일 있습니까?”호현욱은 어두운 눈으로 물었다.“내 손에 유동자금 얼마 정도 남았지?”“현재 사용할 수 있는 금액은 약 200억 정도입니다. 만약 이사님 명의로 된 부동산과 DS 그룹 지분까지 합치면 약 1000억 정도 있습니다.”그 말에 호현욱은 깊은 고민에 빠졌다.현재 이 판에 뛰어들지 말지.만약 뛰어들면 모든 재산을 걸어야 하고, 또 뛰어들지 않자니 이렇게 좋은 기회를 그대로 놓치고 싶지 않았다.“네 생각에 부동산이 계속 이대로 쭉 좋을 것 같아?”민호는 그 물음에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부동산이라면 걱정할 거 없지 않나요? 부동산은 항상 남는 장사 아닙니까?”호현욱도 그 말에 동의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다년간 이 바닥에서 굴러본 경험으로 봐도 부동산의 비전은 아주 좋다고 생각했으니. 만약 투자만 한다면 절대 밑지는 장사는 아닐 거다.게다가 이번에 수익을 내면 DS 그룹에서 하연과 우열을 가릴 필요도 없이 혼자만의 영역을 차지할 수 있으니, 이번 프로젝트가 최고의 발판이 아닐 수 없었다.“내 명의로 된 모든 부동산을 은행에 담보로 맡겨.”“이사님, 이건... 너무 경솔한 처사 아닙니까?”호현욱은 손을 휘휘 저으며 민호의 말을 잘랐다.“내 말대로 해.”“네, 이사님.”“그리고, DS 그룹 지분은 팔면 안 돼. 그것까지 팔면 물러날 곳이 없어.”호현욱은 입으로 중얼거리며 뭔가 생각하더니 잠시 뒤 말을 이었다.“암시장에 가서 사채 빌릴 수 있는 곳이 있나 알아봐. 빌릴 수 있으면 조금 빌려. 프로젝트로 돈을 벌면 다시 갚으면 되니까 문제없을 거야.”“이사님, 사채는 아무래도 위험하니 조심하는 게 좋을 듯싶습니다.”“아니야. 이번 프로젝트는 자금 유동이 바르니 아마 얼마 뒤면 바로 돈 들어올 거야. 큰 문제없어.”“하지만...”그 어떤 투자도 위험은 따릅니다.민호는 이 말을 하려다가 호현욱이 계속 고집하자
“하연이 왔구나?”창밖에서 열정적으로 저를 맞이하는 강영숙을 보자 하연은 뒤에 보이는 익숙한 모습을 무시하기로 했다.이윽고 얼른 차에서 내려 활짝 웃었다.“할머니!”강영숙은 너무 기뻐 하연의 팔을 잡아끌었다.“하연아, 정말 오랜만이구나.”그러면서 하연을 안으로 데리고 들어가며 이제 막 정원에 차를 세운 서준은 완전히 무시했다.멀리서부터 정원에 주차된 익숙한 차를 본 서준은 처음에는 본인이 잘못 봤다고 생각했지만 하연이 차에서 내리고 강영숙이 따뜻하게 맞이하는 모습을 보자 마음 한구석이 무언가에 세게 부딪힌 느낌이 들었다.하지만 곧바로 저도 모르게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서준이 차에서 내리자 최향숙이 다가와 마중했다.“도련님, 오셨어요?”“네.”서준은 가볍게 대답하고 최향숙에게 제 물건을 맡긴 뒤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갔다.하편, 강영숙은 거실에서 하연을 끌고 이것저것 물으며 즐겁게 대화를 나누었다. 현관에서부터 두 사람의 웃음소리를 들은 서주의 얼굴에는 웃음이 더욱 선명해졌다.그걸 본 최향숙도 서준이 웃는 걸 오랜만에 본다며 속으로 중얼거렸다.최향숙의 눈빛이 느껴졌는지 서준은 헛기침하며 본인의 감정을 숨기더니 이내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온 뒤 거실로 들어갔다.“할머니!”서준의 목소리에 무의식적으로 고래를 돌린 강영숙의 낯빛은 순간 어두워지더니 퉁명스럽게 말했다.“평소에 집에 오지도 않더니 내가 귀한 손님 모셔왔을 때 왜 하필 오고 그래?”서준은 아무 설명도 하지 않고 덤덤하게 대답했다.“오늘 회사 일이 바쁘지 않아 할머니 보러 왔어요.”강영숙은 서준에게 시간을 할애하기도 귀찮다는 듯 하연을 끌고 위층으로 올라갔다.“가자, 하연아, 할머니가 너한테 줄 선물 준비했는데 같이 보러 가자.”하연이 강영숙에게 끌려 위층으로 올라가는 바람에 거실에는 서준만 멍하니 남게 되었다.하지만 그래도 서준은 기분이 좋아 곧바로 주방으로 향했다.강영숙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하연을 끌고 침실로 가며 낮은 소리로 중얼거렸다.“하연아, 화내지 마.
강영숙은 기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하연을 끌고 침실 솔파에 앉았다.“여기서 잠깐만 기다려, 내가 물건 가지러 갈게.”“뭘 가지러 가세요? 제가 가져올게요.”“괜찮아. 내가 가져오면 돼.”강영숙은 말하면서 다락방으로 들어가더니 한참 뒤 손에 상자 하나를 들고나왔다.“하연아, 너한테 특별히 줄 건 없고, 이건 내가 서준이 할아버지와 결혼할 때 챙겨온 혼수야.”그러면서 상자를 열어 안에 있는 비취 팔찌를 꺼내 하연의 손을 잡았다.“이건 너한테 주는 선물이야.”“할머니, 이건 너무 귀중합니다.”하연이 거절했지만 강영숙은 그럴 기회조차 주지 않고 하연의 손에 팔찌를 끼워주었다.“귀중하고 말고가 뭐 있어? 내 마음인데. 하연아, 뭐가 됐든 할머니 마음속에 너는 내 손녀나 마찬가지야. 피가 섞이지 않았어도.”“할머니.”“예쁘네.”강영숙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앞으로 어느 집 자식이 너와 결혼할지는 모르겠지만, 그게 누구든 안목과 복이 있는 사내라는 건 사실이겠지.”하연은 왠지 부끄러웠다.“할머니, 저...”“착해 빠져서는. 너만 좋으면 된다.”강영숙의 위로에 하연은 코끝이 시큰거렸다.“네, 알았어요, 할머니.”두 사람은 침실에서 한참 동안 얘기 나누다가 함께 저녁 식사를 했다. 하연의 방문에 강영숙도 모처럼 기뻐했고 두 사람 사이에 웃음꽃이 떠나지 않았다.반면 서준은 계속 두 사람 옆에 있었지만 오히려 꿔다 놓은 보릿자루 같았다.강영숙이 휴식을 취한 뒤 집을 나선 하연은 정원에서 진작 기다리고 있던 서준을 만났다.하연은 가던 걸음을 우뚝 멈추고 뭐라 말하려 했지만 그 전에 서준이 먼저 입을 열었다.“할머니가 이렇게 기뻐하는 거 오랜만이야. 고마워.”“나한테 고마워할 거 없어. 난 그냥 할머니랑 같이 있어 드리러 온 거니까.”“응, 그동안 할머니 몸이 안 좋았거든. 난 회사 일 때문에...”“알아, 한 대표님이야 매일 바쁘겠지. 하지만 할머니는 연세도 있으시니 시간 내서 곁에 자주 같이 있어 드려.”“
하지만 서준은 계속 하연과 거리를 유지한 채 조용히 뒤를 쫓다가 하연의 집에 도착하자 그제야 브레이크를 밟고 차를 길옆에 세웠다.한참 떨어진 거리에서 서준은 하연의 집 정원에서 하연을 기다리는 사람의 실루엣을 보았다. 물론 상대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는 없었지만 상대가 남자라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새로운 애인이 생겼나?’‘벌써 동거하나?’‘저 사람 부상혁인가?’서준은 왠지 마음 한구석이 꽉 막힌 것 같다가 뭔가 빠져나가 텅텅 빈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시선마저 흐릿해졌다.서준은 말없이 핸들을 꽉 붙잡았다. 오늘 왜 하연의 뒤를 밟았는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이 모습을 보니 왠지 받아들일 수 없었다.한편 정원에서 하연을 맞이하던 하성은 멀리 멈춰 있는 차를 흘긋거리며 농담조로 말했다.“하연아, 부상혁 저 자식 집에 초대 안 해?”하연은 얼른 다가가 하성의 팔짱을 꼈다.“오빠, 언제부터 이런 일에 관심 있었어요”하성은 그저 궁금한 것뿐이었다.“너희 싸웠어?”“아니요!”“그런데 왜 따로 왔어? 서로 아는 척도 안 하고?”“오빠, 저 사람 누구인지 제대로 봐요.”하연의 말에 하성은 더 궁금해졌다.“뭐? 부상혁이 아니면 누구야? 너 설마 새 애인 생긴 거 아니지? 미리 말해두는데, 난 제부로 부상혁만 인정해. 다른 사람이 우리 집에 들어오려 하면 빗자루로 내쫓을 거야.”하연은 웃음을 참았다.“아, 그래요? 밖에 있는 사람 한서준이에요.”“뭐?”하성은 놀란 표정을 짓더니 바로 말을 이었다.“내가 바로 빗자루 가지러 갈게. 여기가 어디라고 감히! 나 진작에 저 자식 처리하고 싶었어. 기회를 못 찾았을 뿐이지, 오늘 제대로 혼내줄 거야.”하성은 진심이었다.곧이어 사용인더러 빗자루를 건네 달라고 손짓하고는 당장이라도 싸우려고 달려가려는 바람에 하연이 다급히 막아섰다.“오빠. 뭐 하는 거예요?”“흥, 저 자식 쫓아내려고!”하성은 말하면서 밖으로 달려 나갔지만 밖에 주차되어 있던 차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그냥 이렇
금발 남자의 얼굴엔 잔인한 기색이 스쳤다. 허징인과 민찬에게 단 한 줌의 자비도 보이지 않았다. “저년의 입과 코를 꽁꽁 막아. 빈틈 하나도 남기지 말고.” 허징인은 절망에 빠진 눈으로 민찬을 바라보았다. ‘내 아들... 우리 민찬이...!’ 울부짖는 어린 민찬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리는 가운데, 그녀는 거대한 배의 20미터 높이의 갑판에서 차갑고 무자비하게 바다로 내던져졌다. 얼음처럼 차가운 바닷물이 온몸을 감싸고, 숨을 쉴 수 없는 답답함이 허징인을 집어삼켰다. 순식간에 의식은 멀어지고, 그녀의 몸은 깊고 어두운 바다 밑으로 가라앉았다. ‘여기서 이렇게 끝나는 건가...?’ 그러나 의식이 다시 돌아왔을 때, 허징인은 머리가 지끈거리고 무겁게 아파왔다. ‘아... 여긴 어디지?’ 본능적으로 손을 들어 머리를 눌러본 뒤에야, 그녀는 자신이 살아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주변을 둘러보니 낯선 공간이 눈에 들어왔다. ‘분명 나는 바다에 던져졌는데... 대체 여긴 어디지?’ 그리고 그녀의 뇌리에 가장 먼저 떠오른 이름, 민찬. ‘민찬? 설마... 설마 내 아들...!’ 그 순간, 절망감이 몰려오며 눈물이 주체할 수 없이 흘러나왔다. 갑자기, 문이 거칠게 열렸다. 허징인은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리며 뒷걸음질쳤다. ‘누구야? 또다시 무슨 짓을 하려는 거야?’ 그러나 다음 순간, 그녀의 눈에 들어온 사람은 너무도 익숙한 얼굴이었다. 그녀의 입술이 떨렸다. “부상혁 대표님...?” 상혁은 미소를 지으며 먼저 입을 열었다. “허징인 씨, 오랜만이네요.” 상혁 곁에 있던 원신민은 눈치를 보며 조용히 방을 나가고, 문을 닫았다. 허징인은 불신과 놀라움으로 가득 찬 표정으로 상혁을 바라보았다. “부 대표님, 어떻게... 어떻게 여기에...?” 여자의 목소리는 떨리고, 대답을 기다리며 불안감이 가득했다. 잠시 침묵이 흘렀지만, 허징인은 곧 머리를 굴렸다. ‘설마... 나를 구한 사
“조사가 끝났습니다.” 원신민은 망설임 없이 지도를 꺼내 상혁의 앞에 펼쳐 놓았다. “이 배는 F국 항구에서 출발해 서해안을 따라 항해한 후, 이 항로를 통해 태평양을 건너 L국의 T시 항구에 도착...” 원신민의 손가락이 지도 위를 천천히 움직이며 항로를 또렷하게 그려냈다. “대표님, 우리가 이 사람을 빼돌릴 수 있는 최적의 시간은 오늘 밤입니다. 배가 F국 영해를 벗어나면 일이 훨씬 까다로워질 겁니다.” 상혁은 눈을 가늘게 뜨고, 긴 손가락 끝으로 지도 위 특정 지점을 톡 건드렸다. ‘역시 냉철해.’ 원신민은 눈치를 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대표님!” 굵직한 뱃고동 소리가 항구를 울렸다. 거대한 배는 서서히 항구를 떠나 물결을 헤치며 바다 위를 미끄러지듯 나아갔다. 이 배는 15층짜리 대형 크루즈로, 가장 아래층은 화물칸으로 쓰이고, 그 위로는 승객의 숙소, 식당, 그리고 각종 오락 시설이 층층이 자리 잡고 있었다. 허징인과 아들 민찬은 가장 아래층의 음침하고 습한 방에 배치되었다. 방에는 좁은 창문 하나만 달려 있어 바깥의 희미한 빛이 들어오는 것이 전부였다. “엄마, 무서워요!” 민찬은 허징인의 품에 파고들며 온몸을 덜덜 떨었다. 허징인은 아들을 꼭 끌어안으며 본능적으로 달랬다. “괜찮아, 민찬아. 엄마가 있잖아.” ‘여기서 어떻게 해야 하지...’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방문이 거칠게 열렸다. 낯선 남자들이 순식간에 방으로 들이닥치며 좁은 공간을 가득 메웠다. 허징인은 경악하며 외쳤다. “당신들 누구야? 뭐 하려는 거야?” 이 사람들 중 가장 눈에 띄는 사람은 금발에 파란 눈을 가진 외국인이었다. 그는 거대한 체구와 빽빽이 자란 턱수염을 가졌고, 강렬한 눈빛으로 허징인을 꿰뚫듯 쳐다보았다. 이어서 다소 서툴지만 알아듣기 쉬운 F국말로 입을 열었다. “당신이 바로 남준이 말한 여자인가?” 그는 허징인의 얼굴을 훑어보더니 비웃음 섞인 미소를 지었다.
“그저 여자일 뿐인데, 너무 똑똑하면 손해만 볼 뿐이에요.” 남준이 허징인에게 다가가며, 몸을 숙여 그녀의 귀에 대고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여기까지 왔으니, 내가 원하는 걸 이제 줘야 하지 않겠어요?” 허징인은 차갑게 비웃으며 얼굴을 굳혔다. “뭐가 그렇게 겁나십니까, 상무님? 제가 약속을 어길까 봐요? 아니면... 그 물건들이 엉뚱한 사람 손에 들어갈까 봐요?” “그건 사모님이 그런 기회를 잡을 수 있을 때의 이야기죠.” 남준의 목소리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허징인은 이를 악물고 주먹을 꽉 쥐었고, 속으로는 분이 차올랐지만, 상황을 감안해 타협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함부로 해서는 안 되겠어. 지금은 일단 물러서는 게 최선이야.’ “걱정하지 마세요, 상무님. 이미 약속한 이상, 전 제 말을 반드시 지킬 겁니다.” 허징인은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며 남준과 눈을 맞췄다. “상무님도 본인의 약속을 지키길 바랍니다.” 남준은 가볍게 손을 펼치며 대답했다. “당연하죠.” 허징인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작전을 바꾸기로 결심했다. “제가 반은 먼저 드리고, 나머지는 우리가 안전한 곳에 도착하면 드릴게요.” “안 돼요!” 남준이 단호히 그 제안을 거절했다. “지금 사모님한테는 조건을 제시할 자격이 없는 것 같은데, 안 그래요?” 허징인은 눈을 감고 결연한 태도로 말했다. “그럼 차라리 지금 절 죽이세요. 하지만 제가 죽으면 그 물건들이 공개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은 알아두세요.” “엄마!” 곁에 있던 민찬이 울먹이며 그녀의 다리에 매달렸다. “엄마, 무서워요!” 허징인은 민찬을 꼭 안으며 남준을 노려보았다. ‘이 상황에서 물러서면 끝장이야. 적어도 내 아이는 지켜야 해.’ “상무님, 선택은 당신 몫입니다.” 남준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침묵했다. 남자의 눈빛은 한층 더 날카로워졌고, 어금니를 악물더니 잠시 후 말했다. “죽음도 불사하다니, 사모님의 배짱은 보통이 아니
집에 돌아온 하연은 좀처럼 마음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침실 안. 은은한 조명이 켜진 방에서, 하연은 소파에 몸을 웅크린 채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대표님...” 가정부가 따뜻한 우유 한 잔을 들고 조심스레 부르며 방으로 들어왔다. 상혁은 문틈 사이로 방 안의 하연을 흘깃 바라보며 손으로 가정부를 막았다. “내가 할게요.” 가정부가 물러난 뒤, 상혁은 바로 방으로 들어가지 않고 벽에 기대어 천장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그때, 상혁의 주머니에서 휴대폰이 울렸는데, 원신민에게서 온 메시지였다.그 내용은 간단했다. 하지만 상혁은 짧은 문장을 확인한 뒤, 입가에 가볍게 조소를 띄우며 휴대폰 화면을 껐다. 마치 모든 걸 손아귀에 쥐고 있는 사람의 태도였다. 그는 이내 천천히 방의 문을 열었다. “하연아.” 남자의 차분한 목소리에 하연은 깜짝 놀라며 정신을 차렸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상혁을 바라보며 조금 의아한 듯 물었다. “언제 들어왔어요?” 상혁은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손에 들고 있던 우유를 하연의 손에 쥐어주었다. “따뜻할 때 마셔.” 남자의 부드러운 말에 하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곧 우유를 들고 천천히 마시기 시작했다. 잠시 후, 컵이 바닥을 드러냈다. “잠깐 회사에 좀 다녀올게. 집에서 푹 쉬고 있어.” 상혁은 하연이가 들고 있던 유리잔을 받아들며 말했다. “이 밤중에요? 무슨 일 있는 거예요?” 하연은 살짝 의아해했다. “회사에 급한 일이 있어서. 아마 늦을 거야. 기다리지 말고 먼저 자.” 남자는 고개를 숙여 하연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지금 이 순간이 난 참 행복해.” 상혁의 눈에는 하연이가 자신의 곁에 있어 주는 것만으로 모든 것이 완벽해 보였다. ‘이 행복이 오래가길, 조금이라도 더 오래가길...’ 하연은 상혁의 목에 팔을 두르고 그의 품에 안기며 살짝 장난스럽게 말했다. “나도요. 정말 행복해
지석의 말이 끝나자마자, 상혁의 얼굴에 잠시 스치는 한 줄기 차가운 빛... 하지만 그것은 곧 부드러운 미소로 가려졌다. “지석 도련님 말씀대로, 형제간에는 서로 도와야 하는 법이죠.” “다만, 부씨 가문의 일을 굳이 외부인이 나설 필요는 없어 보입니다만.” 상혁의 말에는 분명한 경고의 의미가 담겨 있었고, 그의 기운에 압도된 지석은 잠시 얼굴이 굳었다. 자신이 실수했다는 것을 깨달은 지석이 변명을 하려는 찰나, 슬기가 먼저 나섰다. “하연 씨, 여기 메뉴 중에서 어떤 게 제일 맛이 괜찮아요? 추천 좀 해주세요.” 슬기의 말에 하연은 조용히 상혁의 손등 위에 손을 올렸다. 둘의 시선이 교차하자, 상혁의 눈가에 웃음이 스쳤다. ‘지금 나를 걱정하는 거야? 하지만 너무 날 과소평가하는 거 아닌가?’ 별일도 아닌 걸로 걱정하는 하연을 안심시키려는 듯, 상혁은 눈빛으로 괜찮다는 신호를 보냈다. 하연이 그제야 안심이 되어 바로 슬기에게 메뉴를 추천했다.“오리지널 맛도 괜찮고, 여러가지가 섞인 맛도 좋을 것 같아요. 둘 다 드셔보세요.” “그럼 두 가지 맛으로 각각 한 그릇씩 주세요!” 슬기는 메뉴를 탁 닫으며 밝게 말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지석은 더 이상 자리를 지킬 수 없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는 담배 한 대 피우고 올게요.” 그가 나가는 것을 슬기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지석이 자리를 떠나 자, 슬기는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죄송해요. 두 분의 오붓한 자리를 불편하게 해서요. 집안에서 주선한 선 자리를 억지로 나온 거라...” 여자의 말투에서 묘한 무력감이 느껴졌다. 슬기는 문득 눈을 들어 상혁을 바라보았지만, 상혁은 그녀를 신경 쓰는 기색도 없이, 온전히 하연에게만 시선을 두고 있었다. 슬기는 속으로 조용히 한숨을 내쉬며 그 눈빛을 외면했다. “그나저나, 하연 씨.” 슬기가 화제를 돌렸다. “최근 하연 씨가 뒤로 물러나고 회사를 최하성 씨에게 맡겼다고 들었어요.”
“하연 씨, 우리 같이 합석해도 괜찮을까요?” 슬기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하연은 환하게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물론 괜찮죠.” 슬기는 예상 밖의 대답에 약간 놀란 듯했다. 그녀는 눈웃음을 지으며 하연을 바라보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하연 씨, 이제 저 같은 ‘라이벌’에게 경계심이 풀린 건가요? 그래도 혹시 모르죠. 제가 다시 마음을 고쳐먹고 재도전할지?” 슬기가 농담 섞인 말이었지만 그 속엔 은근한 탐색이 깃들어 있었다.그러나 하연은 여유롭게 미소를 지으며 되받아쳤다. “주 대표님, 그런 생각할 여유가 있으시면 옆에 있는 분 눈치부터 보셔야 하지 않을까요?”슬기는 어깨를 으쓱하며 별거 아니라는 듯 답했다. “뭐, 집에서 주선한 맞선일 뿐이라 별로 신경 안 써요. 첫 만남이기도 하고요.”그 순간 뒤에 있던 지한이 앞으로 나서며 상혁을 향해 공손하게 인사를 건넸다. “부 대표님, 평소에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그의 입에서 나온 ‘부 대표님’이라는 말은, 그가 이미 상혁의 정체를 알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지한은 외부에서 떠도는 소문을 떠올렸다. 최씨 가문과 부씨 가문이 곧 혼사를 통해 막대한 사업적 결합을 이룰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지금 이 자리에 앉아 있는 여자가 바로 최씨 가문의 딸이라는 사실에 지한은 적잖이 긴장했다.“최하연 씨, 안녕하세요.” 지한이 하연에게도 정중하게 인사를 건네면서도 속으로는 긴장의 끊을 놓지 않았다. ‘주슬기가 최씨 가문과 부씨 가문 사람들과 이렇게 가까운 사이일 줄은 몰랐는데?’ 처음 지한은 그저 형식적인 맞선이라 생각했지만, 지금 이 상황을 보니 다시 생각해 봐야겠다고 느꼈다.그때 상혁이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SW그룹의 도련님을, 여기서 다 만나고 보기 드문 일이군요.” 단 한마디로 심지한의 배경을 정확히 짚어낸 것이다. 지한은 약간 놀란 표정을 지으며 눈썹을 살짝 들어 올렸다. “부 대표님께서 저를 알고 계셨
최근 몇 년 동안 H시는 급격한 경제 성장을 이루며 번화한 고층 빌딩들이 우후죽순으로 들어섰고, 도시 풍경은 완전히 새롭게 바뀌어 이제는 명실상부한 대도시로 자리 잡았다.상혁은 차를 몰고 하연과 함께 요즘 SNS에서 핫플레이스로 떠오른 유명 먹거리 거리로 향했다. 차를 주차장에 세운 후, 두 사람은 나란히 걸어 먹거리 거리로 들어섰다. 거리 양옆으로는 다양한 가게들이 즐비했고, 상인들은 열심히 손님들을 끌어모으며 활기찬 분위기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거리는 사람들로 북적거렸고, 곳곳에서 풍기는 음식 냄새가 두 사람의 발걸음을 이끌었다.한참을 걷던 중, ‘10년 전통 국밥집'이라는 간판이 걸린 깔끔하고 정갈한 가게가 눈에 들어왔다. 내부 인테리어는 오래된 가게답지 않게 세련되었고, 메뉴는 벽에 붙어 있어 가격이 한눈에 들어왔다.상혁이 가게를 한참 바라보는 사이, 하연은 이미 들어가 자리에 앉으며 기다릴 새도 없이 외쳤다. “사장님, 여기 대표 국밥 하나요!” 사장님은 빠르게 주문을 적으며 다정한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 못 드시는 재료 있으세요?”“짜지 않게 해주시고, 후추는 빼주세요. 나머지는 다 괜찮아요.” 하연이 주문을 마치자 사장님은 상혁을 향해 자연스럽게 시선을 돌리며 물었다. “사장님은 뭘로 드릴까요?” 상혁은 자신도 모르게 사장님의 깍듯한 존대에 살짝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저도 같은 걸로 주세요.” 가게의 음식 나오는 속도는 매우 빨랐다. 잠시 후, 두 사람 앞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국밥 두 그릇이 놓였다. 하연은 반짝이는 눈으로 국밥을 바라보며 기쁜 표정으로 숟가락을 들고 신나게 먹기 시작했다.“천천히 먹어.” 상혁은 그녀를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며 한마디 덧붙였다. 그러면서도 자신 앞에 놓인 국밥을 내려다보았다. 어릴 때부터 상혁은 까다로운 식습관을 가진 어머니인 조진숙의 영향으로 엄격하게 관리된 음식을 먹으며 자라, 이런 길거리 음식은 한 번도 접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정말요?” 다영은 남준의 말을 듣고 믿기지 않는다는 듯 눈이 살짝 붉어졌다. 그녀는 자신이 남준을 믿고 기다린 게 틀리지 않았다고 확신했다. 눈앞에 있는 이 남자는 그녀가 모든 걸 걸어도 될 만큼 가치 있는 사람이었다.“남준 씨, 난 그냥...” “그냥 뭐요?” 다영은 고개를 저으며,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전에 떠돌던 소문들 때문에 잠깐 마음이 흔들렸던 것뿐이에요.”“그런 쓸데없는 소문에 신경 쓸 필요 없어요.” 남준은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 그의 눈빛에는 복잡한 감정이 잠시 스쳤다. 하지만 기쁨에 젖어 있는 다영은 남준의 말 속에 담긴 미묘한 뉘앙스를 알아채지 못했다. 그녀는 남자의 팔을 꼭 잡고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난 언제나 남준 씨의 편이에요. 당신이 필요하면 언제든 나를 부르면 돼요. 항상 곁에 있을 거니까요.”‘당신이 원하는 모든 걸 내가 도와서 얻게 해줄 거야. 그게 DL그룹이라 해도...’ 그녀는 이 말을 입 밖에 내지는 않았지만, 속으로 굳은 결심을 다졌다....새해를 맞이하는 밤.전국 곳곳에서 크고 작은 축제가 열렸고, 도시는 환희와 축제 분위기로 가득했다. 모두가 기쁨 속에서 새해를 맞이하던 그 밤이 지나고, 다음 날 아침.하연은 따스한 햇살이 쏟아져 들어오는 방 안에서 천천히 눈을 떴다. 창밖으로부터 들어온 아침 햇살이 방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일어났어?” 상혁이 다정한 목소리로 물었다. 하연은 기지개를 켜며 나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몇 시예요?” 상혁이 곧바로 답했다. “아직 일러. 11시밖에 안 됐어.” “11시?” 하연은 예상외로 늦은 시간에 살짝 놀랐다. 그 순간 상혁이 침대 옆으로 다가와 그녀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눈을 맞췄다. 그의 눈에는 깊은 애정이 담겨 있었다. “괜찮아. 조금 더 자도 돼.”그러나 상혁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하연의 배에서 신호가 왔다
“남준 씨, 지금 당신 날 피한 거예요?” 다영은 손에 쥔 라이터를 꽉 쥐었다가 조용히 주머니에 넣으며 한 발짝 물러섰다. 최근 들어 너무 많은 일들이 한꺼번에 벌어졌고, 남준의 마음을 도무지 알 수 없게 되었다. 지금 이 상황 역시 그녀에게 상처를 남기고 있었다. 한때 누구보다 가까웠던 두 사람이, 이제는 마치 남이 된 것 같은 이 분위기가 그녀를 더욱 혼란스럽게 했다.남준은 정면만을 응시한 채 아무런 설명도 없이 미묘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타요.” 다영의 눈에 순간적으로 희미한 빛이 스쳤다. 망설임 없이 그녀는 차 뒤쪽을 돌아 조수석 문 앞에 섰고, 문을 열어 차에 탔다.차에 올라탄 그녀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조수석에 놓인 정교한 포장 상자로 향했다. 잠시 머뭇거리더니, 다영은 상자를 들고서 물었다. “남준 씨, 이거... 내 선물이에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녀의 손은 이미 멈추지 않고 상자를 열고 있었다.남준은 살짝 찌푸린 듯한 표정을 지었으나, 굳이 제지하지 않았다. 그저 그녀가 상자를 열어보는 것을 무심하게 지켜볼 뿐이었다.다영이 상자를 열자, 안에는 섬세하게 디자인된 고급스러운 목걸이가 자리하고 있었다. 중앙에 놓인 독특한 디자인의 목걸이는 푸른빛의 보석으로 장식되어 있었고, 조명에 반사되어 빛나는 모습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정말 예쁘네요...” 다영은 감탄하며 목걸이를 손바닥에 올려놓고 환한 미소로 남준을 바라보았다. “이거 나한테 걸어줄 수 있어요?”남준은 여전히 미동도 하지 않은 채, 목걸이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의 눈빛은 한없이 깊어졌고, 잠시 동안 아무런 말도 없이 목걸이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긴 듯했다.‘남아공에서 천연으로 채굴된 최고급 보석입니다. 순도와 투명도가 모두 최상급이고, 무엇보다도 희소성이 높아 전 세계에 단 하나뿐입니다. 특별한 사람에게 선물하기에 가장 적합한 아이템이죠.’ 그때 들렸던 매장의 직원 설명이 귀에 맴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