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문에 회의실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태도를 바꾸었다.“호 이사님은 어떠신가요?”하연이 던진 질문에 호현욱은 멋쩍게 웃으며 끝내 입을 열었다.“다들 동의한다는 건 그만큼 좋은 프로젝트라는 걸 설명하겠죠. 저도 의견 없습니다.”하연은 이 결과에 매우 만족하는 듯 눈썹을 치켜 올리며 사람들 앞에서 선포했다.“그렇다면 거수로 표결하겠습니다.”그 말이 떨어진 순간 사람들은 서로의 눈치를 살피며 분분히 손을 들었다.심지어 하성마저 옆에서 말을 보탰다.“저도 DS 그룹 지분을 갖고 있으니 주주나 다름없는데, 당연히 표결권이 있겠죠.”말을 마친 하성은 바로 손을 들었다.결국 예상보다 훨씬 많은 동의를 얻은 하연은 만족스러운 듯 말했다.“과반수가 동의했으니 이번 프로젝트는 통과하는 거로 하겠습니다. 오늘부로 DS 엔터가 정식으로 성립했음을 알립니다...”일순 회의실에는 열렬한 박수 소리가 울려 퍼졌다.회의가 끝나고 모든 사람이 회의실을 떠나자 하성은 그제야 신이 나서 하연을 바라보며 장난기 섞인 말투로 말했다.“하연아, 오늘 오빠 어땠어?”“아주 멋졌어요. 오빠가 나서니까 임원들이 찍소리도 못하잖아요, 오빠가 아니었으면 이번 프로젝트가 이렇게 쉽게 진행되지 못했을 거예요.”“그럼 내가 큰 공신이겠네?”하연은 하성의 팔짱을 끼며 입꼬리를 예쁘게 말아 올렸다.“당연하죠. 그런데 정말 DS엔터랑 계약할 거예요?”“내가 농담하는 거로 보여?”하성이 하연의 이마를 콩 치며 말했다.그러자 하연은 얼른 이마를 비벼대며 불쌍한 표정을 지었다.“오빠, 아프잖아요. 그런데... 아파도 좋아요.”“못 말려 정말! 앞으로 나한테 잘해. 내가 DS 엔터의 유일한 기둥이잖아.”하연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걱정하지 마요. 오빠는 우리 엔터의 첫 번째 연예인인데, 모든 자원 오빠한테 몰빵할게요. 오빠 한 명만 총애할 거예요.”하성은 미소 지으며 억지로 동의한다는 듯 대답했다.“그래, 뭐. 총애를 한 몸에 받는다니 내키지는 않지만 해볼게.”“저 때문에 더
모연은 골라낸 사진을 쥐고 흔들었다.“이 사진만 잘 다듬으면 최하연이 절대 빠져나갈 수 없어요.”사진을 본 이수애도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그렇다면 당장 최하연을 지옥으로 보내 버려야지. 어디 한번 사생들한테 갈기갈기 찢기는 걸 지켜보자고.”“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바로 언론사 쪽에 연락할게요. 아마 오늘 저녁 이 사진들은 인터넷에 퍼질 거예요.”“흥, 그럼 너무 좋지.”아니나 다를까, 오후가 되니 파파라치가 찍은 사진은 소리 없이 인터넷에 퍼져 온라인을 뜨겁게 달구었다.#인기 절정의 인플루언서 야밤에 재벌녀와 밀회#눈길을 끄는 타이틀은 인터넷 인기 검색어 순위를 바로 차지하면서 엄청난 파장을 불러일으켰다.[헐, 진짜야? 오승범이 CS 그룹 공주랑 만난다니!][대박. CS 그룹 아가씨가 인기 인플루언서를 좋아한다고?][오승범 팔자 너무 좋은 거 아니야? 최하연은 몸값만 조 단위인데, 진짜 출세했네.][뭐야? 울 남편이 CS 그룹 공주랑 연애한다니.][나이가 되면 누구나 다 결혼할 텐데. 둘 다 솔로면 만나는 건 자유지.][흑흑... 어떡해? 다른 사람이면 싫다고 말하겠는데 CS 그룹 공주라니까 아무 말도 못 하겠네. 행복해요~][나도. 축하해요+1][축하해요+2][축하해요+N]“...”언론인인 여은은 맨 먼저 이 소식을 접했다. 심지어 처음 봤을 때 헛것을 봤다고 생각해 다급히 눈을 비볐다. 하지만 눈도 비벼 보고 컴퓨터 새로 고침도 했지만 사진에 실린 사람이 하연이라는 걸 확인하고는 심장이 철렁해 바로 하연에게 전화했다.“하연아, 인터넷에 뜬 사진 어떻게 된 거야?”“무슨 소리야?”하연은 어리둥절해하자 여은은 설명 대신 바로 재촉했다.“얼른 인터넷 확인해 봐. 누가 너랑 오승범 사진 찍어서 밀회한다고 인터넷에 뿌렸어.”‘나랑 오승범 씨가 밀회? 뭐라는 거야?’하연은 여전히 어리둥절해 다급히 인터넷을 확인했다.그랬더니 아니나 다를까 본인과 승범의 기사가 인기 검색어 1위를 떡하니 차지하고 있었다.얼른 클릭해
“이대로 되면 나랑 오승범 씨가 정말 사귀는 게 되어버리는 거 아니야?”말을 마치기 바쁘게 핸드폰이 울러 확인한 하연은 눈이 어두워졌다.그때 전화 건너편에서 여은의 말이 계속 들려왔다.“네가 부정하지 않으면 아마 이대로 확실해질 거야. 하지만 이게 나쁜 일은 아니라고 생각해. 이 기회에 언론을 이용해 네 계정 홍보도 하고 팬 유입도 하면...”하지만 여은의 말이 끝나기 전에 하연이 바로 부정했다.“안돼.”하연의 눈은 새로 올라온 게시물에 멈췄다. 게시물을 올린 사람은 다름 아닌 오승범이었다. 게다가 게시물 내용은 여은이 제안한 것과 얼추 비슷했다.승범 역시 언론인이라 어떻게 해야 팬을 유입해야 하는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오늘 마침 하연과 함께 열애설이 터진 바람에 사람들의 관심이 폭등했으니, 실제로 사귀지 않는다 해도 이 기회를 틈타 필요한 것을 얻으려는 목적이 다분했다.때문에 승범이 올린 게시물에는 직접적으로 열애설을 부인하지 않았다.하지만 하연의 태도는 단호했다.“여은아, 네가 여론 좀 통제해 줘. 10분 뒤에 내가 공식 입장 올릴 테니까.”그 말에 여은은 장난스러운 말투로 물었다.“너 설마 상혁 오빠가 오해할까 봐 그래?”“응.”하연은 아예 시원하게 인정했다.이에 여은은 놀란 듯 말했다.“멋지다, 우리 하연! 상혁 오빠가 오해할까 봐 팬 유입 기회를 버리겠다니.”그도 그럴 게, 현재 팬 유입을 위해 별의별 짓을 하는 사람은 많다.일반 사람들이 생각하지 못할 뿐이지, 그 사람들이 못 할 일은 없으니까.하지만 하연은 그렇게 얻은 팬에는 관심이 없었다.노이즈 마케팅으로 관심을 받는 것도 경멸했고.“그런데 내가 너라도 이렇게 했을 거야. 뜬구름 잡는 일로 너랑 상혁 오빠 감정 상하면 안 되지.”여은은 마우스로 작업하면서 한편으로 하연을 위로했다.“걱정하지 마, 내가 게시물 처음 올린 블로거를 찾아줄게. 다이렉트 메시지로 내리라고 하면 아마 바로 내릴 거야.”하지만 여은은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뭔가 이상한 점을 발견
모연은 앞으로 나서서 이수애의 팔을 잡아당기며 나지막하게 위로했다.“어머님, 걱정하지 마세요. 이 일은 아는 사람은 없으니 우리만 입 다물면 서준 씨가 영원히 알 리 없어요.”하지만 이수애는 아직도 당황함을 감추지 못했다.이수애는 서준이 하연에게 얼마나 관심이 있는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게다가 절대 하연을 괴롭히지 말라고 일전에도 몇 번 경고했는데 이번에...“이번 일 꼭 비밀 지켜줄 거지?”모연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걱정하지 마세요, 어머님. 파파라치를 고용할 때 비용은 제 계좌로 나갔으니 서준 씨가 조사해도 저를 의심하지 어머님을 의심하지 않을 거예요.”이수애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가슴을 쓸어내렸다.“그렇다면 다행이네...”“하지만...”모연은 뜸을 들이더니 말을 이었다.“어머님, 지난번에 그 땅을 살 수 있도록 인맥을 알아봐 주신다고 했더 건...”“그게 뭐 큰일이라고. 걱정하지 마, 내가 다 알아서 해줄 테니. 마음 놓고 있어.”그 말을 들은 순간 모연은 환한 미소를 지으며 이수애의 팔짱을 꼈다.“미리 감사해요.”이수애는 크게 숨을 들이켰다. 자기가 파파라치를 시켜 하연의 사진을 찍게 한 사실만 한서준에게 발각되지 않는다면 그만이었으니까.그 땅을 얻어주는 건 식은 죽 먹기였다....한편, 하연은 자기 이름으로 오승범과는 아무 사이 아니며, 스캔들은 사실이 아니라는 입장을 표명했다.심지어 그날 호텔 CCTV 자료까지 첨부해 그날 호텔에 4명이 있었다는 걸 증명해 구경꾼들은 그제야 이 모든 게 오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아아아, 아쉬워. 난 또 새로운 커플 탄생인 줄 알았는데 오해였다니. 사실인 것처럼 유포하더니 일하러 간 거였잖아.][우리 잘생긴 승범은 꼭 운명의 여신을 만날 거야.][솔직히 최하연과 오승범 둘 너무 어울린다고 생각했는데, 너무 아쉬워! 아직 커플이 아니라도 한번 만나보는 걸 생각해 보는 건 안 되나?][윗댓님, 출신이나 배경을 따지면 오승범이 최하연한테 많이 꿀리지. 내가
“그리고 내가 찾아봤는데 너랑 오승범의 열애설은 누군가 빨리 퍼지도록 돈을 썼대.”“누군지 알아냈어?”“아직. 그런데 언젠간 알아낼 거야. 대체 어떤 놈이 감히 그런 비겁한 짓을 했는지 내가 똑똑히 알아낼 거야.”여은은 진지하게 말하더니 곧바로 농담했다.“그런데 네티즌들 진짜 눈썰미 좋지 않아? 바로 핵심을 잡잖아. 참, 아니면 저녁에 상혁 오빠랑 같이 우리 다 모일래?”“그래, 내가 오빠한테 문자 보내 볼게.”하연은 여은의 제안이 괜찮다면서 바로 상혁의 카톡을 눌렀다.두 사람의 대화는 어젯밤을 끝으로 끊겨 있었다. 그걸 보니 하연의 누에는 의아함이 언뜻 스쳐 지났다.최근 하연은 상혁과 시간 날 때마다 대화했으며 거의 끊긴 적이 없다.길어야 몇 시간이 지나면 또 바로 연락했는데, 오늘은 너무 이상했다.하루가 꼬박 지났는데 상혁에게서 한 통의 문자도 없었으니.하연은 빠른 속도로 타자해 상혁에게 문자를 보냈다.하지만 1분, 5분, 10분, 30분이 지나도 상혁에게서 여전히 답변이 돌아오지 않았다.“여은아, 혹시 평소에 칼답하던 사람이 갑자기 연락이 안 되는 건 왜일까?”여은은 어리둥절해서 하연의 핸드폰을 흘긋거리더니 장난기 섞인 말투로 말했다.“헐! 상혁 오빠가 아직도 답장 안 해?”“응.”하연은 이 상황이 너무 이상해 점점 불안해졌다.“괜찮아, 전화해 볼게.”말을 마친 하연은 곧바로 상혁에게 전화했다. 하지만 긴 연결음 끝에 차가운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고객님의 전화기가 꺼져 있어...”“꺼져 있어?”여은은 얼른 하연을 위로했다.“괜찮아. 급한 볼일이 있나 보지. 너무 걱정하지 마.”“응.”하연도 여은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그럼 이따 늦게 또 전화해 보지 뭐.”여은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연애 중의 여자는 역시 다르네. 걱정하지 마, 상혁 오빠 어디 도망 안 가... 문자 보면 바로 답장할 거야.”“그러길 바라야지.”하연이 풀 죽은 모습에 여은은 또 위로의 말을 건넸다.“오늘 밤 상혁 오빠가
때문에 경비원 아저씨는 사무적인 말투로 말했다.“부 대표님의 사생활을 저희는 몰라요. 하지만 젊은 아가씨한테 충고 하나 할게요. 부 대표님은 보통 사람이 넘볼 수 있는 분이 아니니 아가씨도 포기해요.”“...”하연이 뭐라 말하려고 할 때, 뒤에서 경적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려 확인하니 서준의 차가 언제부터였는지 길가에 세워져 있었다.곧이어 서준은 차에서 내려 하연에게 걸어왔다.“최하연, 이렇게 늦은 시간에 왜 여기 있어?”“그 질문은 내가 해야 할 것 같은데? 왜 여기 있어?”서준은 사실 지나가다가 하연이 보여 바로 핸들을 꺾은 거였다. 하지만 눈을 들자 바로 보이는 FL 그룹 로고가 이 순간 너무나도 눈에 거슬렸다.“부상혁 만나러 왔어?”서준은 질투가 난 듯한 말투로 물었다. 심지어 마치 하연에게서 뭔가를 읽어낼 것처럼 빤히 바라봤다.그때 하연이 덤덤하게 대답했다.“이건 내 일이니 상관하지 마.”선을 긋는 하연의 말에도 서준은 포기하지 않았다.“이렇게 늦은 시간에 여자 혼자 밖에 있는 건 위험해. 내가 바래다줄게.”“나도 차 챙겨왔으니 필요 없어.”하연은 무의식적으로 거절하고는 손에 든 차키를 흔들었다.이윽고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자기 차가 세워진 쪽으로 걸어갔다. 하지만 몇 걸음 가지 못해 서준에게 따라 잡혔다.“최하연, 내가 그렇게 싫어?”하연은 싱긋 웃었다.“쓸데없는 생각하지 마. 난 신세 지기 싫은 것뿐이야.”말을 마친 하연은 다시 뒤돌아 서준에게 등을 보였다.서준은 선 자리에서 시동을 걸고 떠나가는 하연의 차를 멍하니 바라봤다.그로부터 얼마나 지났을까?서준의 호주머니에 있던 핸드폰이 갑자기 울렸다. 전화를 받고 상대방의 말을 듣고 있던 서준은 상대가 뭐라 말했는지 당장이라도 비바람이 휘몰아칠 듯한 표정을 지었다.“나도 알아, 이 일은 나한테 맡겨...”전화를 끊은 서준은 제 차에 올라 홀연히 떠났다. 그리고 20여 분이나 되는 거리를 서준은 8분 만에 도착했다.서준이 한씨 저택 마당에 차를 세우자 가
서준은 어두운 표정으로 물었다.“엄마, 해명할 거 없어요?”이수애는 몸을 비틀거리며 넘어지려 하다가 겨우 난간을 잡은 채 중심을 유지했다.“아들, 그게 무슨 말이야? 난 네가 무슨 말 하는지 모르겠어.”서준은 성큼성큼 걸어 이수애를 벽 쪽으로 밀어붙였다.“본인이 무슨 짓을 했는지 모르겠다고 발뺌할 거예요?”“다 알았어?”이수애는 확신하지 못화는 듯 되물어 보다가 천천히 눈을 감으며 두려움에 떨었다.“아들, 나도 일부러 그런 거 아니야. 그냥 최하연 고년이 너무 날뛰는 게 꼴 보기 싫어서 교훈 좀 시키려고 한 것뿐이야.그 말을 끝나자마자 서준은 이수애의 팔을 덥석 잡았다.“지금 뭐라고 했어요? 하연을 어떻게 했어요?”수애는 어리둥절했다.“이 얘기가 아니었어?”서준은 콧방귀를 뀌며 이수애의 손을 뿌리쳤다.“내가 아는 것 외에도 또 숨기는 게 있나 보네요...”“아니야, 내 말 좀 들어봐. 이건 네가 생각하는 그런 게 아니야.”“됐어요!”서준은 아예 이수애의 말을 잘라버렸다.“엄마, 저 엄마한테 기회를 줬어요. 게다가 전에도 최하연 괴롭히지 말라고 경고했었죠?”이수애는 너무 겁이 나 다급히 서준의 손을 잡았다.“아들, 엄마가 잘못했어. 한 번만 더 기회를 줘. 다시는 그러지 않을게...”서준은 손을 뻗어 저를 잡고 있는 이수애의 손가락을 하나 둘 떼어내며 온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말투로 말했다.“오늘부터 은행카드 모두 정지할 거예요. 생활비 외에 일전한 푼도 못 받을 줄 아세요.”“안돼. 카드를 끊으면 난 어떡하라고?”이수애는 평소 쇼핑 중독이다. 심지어 오래 전부터 금액에 연연하지 않고 사고 싶은 대로 사는 걸 습관 해온 터라 이렇게 갑자기 카드를 정시하면 앞으로 어떻게 살지 막막했다.“넌 내가 배 아파 난 아들이야. 그런데 어떻게 엄마한테 이럴 수 있어? 최하연은 남이잖아, 네 가족은 나야.”이수애는 마지막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서준을 꽉 잡았다. 하지만 이수애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노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수애는 할 말이 없어 입을 다물었다.“아직도 잘못을 뉘우치지 않고 오히려 그 정도가 더 심해지다니. 서준과 하연이 다시 만날 희망조차 네가 다 짓밟아 버리는 구나.”강영숙은 허탈하다는 듯 말하며 서준을 바라봤다.“서준아,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 할머니는 항상 널 지지한다. 이 일은 네 엄마가 잘못했다. 하지만 그래도 네 엄마이니 너무 심하게는 하지 마...”이윽고 한숨을 푹 쉬었다.“할머니...”강영숙은 손을 휘휘 저으며 아무 말도 없이 자리를 떠났다.“서준아, 엄마가 잘못했어. 다시는 안 그럴게...”서준은 아무 대답도 없이 차가운 눈빛으로 제 어머니를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끝내 물었다.“임모연의 그 땅, 엄마가 우리 집 명의로 대신 구해준 거예요?”이수애는 흠칫 놀라더니 그제야 모든 걸 알아챈 듯 말했다.“그러니까 너 아까 그 일을 물어보려던 거였어?”서준은 승인하지도 부인하지도 않고 계속 질문했다.“임모연이 누구인지 알아요?”이수애는 어안이 벙벙해 멍하니 서준을 바라봤다.그러다 서준이 허리를 숙여 낮은 소리로 뭔가를 말하자 얼굴이 새하얗게 질리며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그걸 본 서준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뒤돌아 백지장처럼 질려버린 이수애를 혼자 남겨두고 떠나갔다.그리고 믿을 수 없다는 듯 멍하니 앉아 있던 이수애가 갑자기 마구 소리 지르며 정신줄을 놓은 듯 중얼거렸다.“그럴 리 없어... 이게 진짜일 리 없어...”그때 최향숙이 다가왔다.“사모님, 도련님께서 사모님 짐 챙기는 걸 도와드리라고 했습니다. 아가씨가 계신 A국에 나가 계시라고 하네요.”그 말에 이수애는 연신 뒷걸음치며 거절했다.“싫어. 난 절대 A국에 안 가. 그런 곳에 누가 가? 싫어... 안 가...”이수애의 비명에 서준의 표정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그저 조용히 서서 고요한 정원에 쓸쓸함만 더해 주었다.그로부터 얼마나 지났을까? 서준은 핸드폰을 꺼내 동후에게 전화했다.“한 가지 조사 좀 해줘.”“네, 대표님, 말씀하세요.”“임모
하연이 눈을 떴을 때, 도시는 이미 밤의 장막에 휩싸여 있었다. 그녀는 흐릿한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며 몸이 묵직하게 아픈 것을 느꼈다.오랜만에 욕구를 해소할 수 있었던 상혁은 특히나 격렬했다. 소파에서 시작해 주방, 다시 안방, 마지막으로 욕실까지, 온 집안의 모든 공간을 사용했다. 하연의 온몸은 마치 압사당한 듯 피곤했고, 손가락 하나 움직이는 것조차 힘들었다.방 안에는 은은한 아로마 향이 퍼져 있었고, 어둑한 조명이 켜져 있었다. 공기 중에는 이미 사랑의 흔적이 사라졌고, 상혁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하연은 침대에 누운 채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그곳에는 마치 천장이 아닌 신들의 조각상이 장엄하게 자리하고 있는 듯 보였다. 신들은 어두운 밤 속에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하연의 마음은 쓸쓸했다. 어젯밤, 둘이 동시에 절정을 맞았을 때, 상혁이 그녀의 손을 잡고 신들을 가리켰던 그 순간이 떠올랐다. 그것은 단순한 육체적 쾌락을 넘어, 정신적으로도 거부할 수 없는 극도의 미친 감정이었다.하연은 다시 샤워할 필요는 없었다. 상혁이 욕실에서 이미 그녀를 씻겨주었기 때문이다.하연은 침대에서 내려왔으나, 문이 잠겨 있는 것을 발견했다. 별다른 생각 없이 발걸음을 옮겨 발코니 쪽으로 다가갔고, 그곳에서 외부로 통하는 또 다른 문을 발견했다. 문에 가까이 다가가자 소리가 들려왔다.“네 아버지를 조사해보라고 했잖아. 했어?” 조진숙의 목소리였다.하연은 걸음을 멈췄다.조진숙이 갑자기 찾아왔고, 상혁은 서둘러 셔츠를 하나 걸치고 나갔다. 그와 하연이 얽히며 셔츠 목 부분이 구겨져 있었다. 그는 눈살을 찌푸렸다. “조사했어요. 고나희의 사고는 단순 사고였고, 아버지와는 관련이 없어요.”“고경수가 비리로 돈을 챙긴 걸 얼마나 알아냈어? 난 그 명목상의 숫자만 믿을 수는 없어. 배를 채운 흔적이 있는지 다 밝혀냈어?” “DL그룹은 아버지 거예요. 아버지가 그런 실수를 하실 리 없죠.” 조진숙은 창가 쪽으로 걸어갔다. 많은 시련을 겪어온 여성이기에,
“왔어요?” 상혁은 놀라움이 가득한 여자 목소라가 들렸다. 상혁은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주방에서 서둘러 나오는 하연이 국을 들고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하연이는 웃으며 물었다. “왜요?”국이 너무 뜨거웠던지, 그녀는 재빨리 그릇을 내려놓고 귀를 만지며 식히고 있었다. 상혁의 얼굴에는 아무런 감정이 없었고, 목소리까지 차가웠다. “정말 안 가고 기다리고 있었어?” 하연은 의아해하며 답했다. “당신이 기다리라고 했잖아요. 그래서 당신이 돌아오길 기다리고 있었죠. 그런데 당신이 너무 안 와서, 심심해서 뭐 만들어 먹을 게 없나 하고 요리 만드는 법을 찾아보다가 뭘 좀 만들어 먹었어요. 다행히 냉장고도 가득 차 있었고 장비도 다 갖추어져 있어서 문제없었어요.” 그녀가 말할 때, 분명히 기쁜 마음과 행복한 표정이었다. 하연이 말을 마치자마자, 상혁은 두세 걸음에 그녀를 끌어당겼다. 그는 손을 잡고 그대로 바로 하연이를 품 안에 가둬버렸다. 상혁의 힘은 상당히 강했고, 하연은 고통스러운 신음 소리를 냈다. “음... 왜 그래요?” 하연은 상혁의 품에서 안정을 느꼈지만, 그의 강한 포옹에 약간 당황했다. 그녀의 몸에서 풍기는 평온한 향기가 상혁의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혔다. 상혁은 눈을 감고, 목소리가 거칠고 낮았다. “난 네가 간 줄 알았어.” 하연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그의 옷깃을 살며시 잡았다. “기다린다고 말했잖아요. 그러니 안 갔죠.” 그녀는 상혁의 감정이 평소와 다르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방금 전, 상혁은 본가에서 싸움 끝에 기분이 상한 채로 돌아왔다. 부남준은 송혜선을 보호하며 소리쳤다.“형, 이 아이도 한 생명이에요! 아버지의 혈육이잖아요!”상혁은 바로 남준의 옷깃을 잡고 주먹을 날렸다. 집사가 나서서 뜯어말리지 않았다면 남준은 일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상혁의 목에 난 상처를 알아보고 하연은 황급히 그를 밀어내며 물었다. “무슨 일 있었죠? 교통사고 처리하러 간
하연은 상혁의 집에서 밤을 지새웠다.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한 채, 새벽녘에 깨어나니 집안은 고요했고 상혁이 돌아온 흔적은 없었다. 그녀는 뒤척이며 잠을 청할 수 없어 핸드폰을 열었고 보니, 마침 서여은이 사진을 올려놓았다. 외부 취재 중이라는 설명과 함께 사진에는 ‘큰 뉴스’라는 글이 적혀 있었다. 두 시간 뒤, 여은이 다시 글을 남겼다. [뉴스가 없어졌어.]하연은 궁금해졌다. [어떤 뉴스?][DL그룹과 관련된 일이야. 전에 조사받았던 고경수 기억나지? 그 사람 딸이 죽었대. 원래 뉴스에 나올 예정이었는데, 누군가 큰돈을 써서 기사를 막아버린 모양이야.]하연은 짐작할 수 있었다. DL그룹과 관련된 일이라면 상혁이 처리했을 가능성이 컸다. 여은이 사건 현장의 사진을 한 장 보냈다. 사진 속 여성은 운전석에 앉아있었고, 절반가량의 얼굴이 드러났는데 표정은 죽음을 앞둔 사람처럼 처참했다. 하연은 사진을 확대했다. [이 여자를 어디서 본 것 같은데.]여은이 바로 하연에게 전화를 걸었다. [고나희야, 고경수의 딸이잖아. 애지중지하게 키워졌는데 세상 물정은 잘 모르는 아이였지. 그런데 네가 정말 고나희를 본 적 있어?]“한 번 스쳐 지나가며 본 적 있어.” 하연은 기억을 떠올리려 애썼고, 드디어 생각이 났다. 얼마 전 정다영을 만나러 호텔에 갔을 때, 고나희와 스쳐 지나갔었다. 그때 고나희가 하연과 부딪혔고, 부남준이 다정하게 하연을 붙잡아주며 고나희에게 아주 화를 내면서 잘 보고 다니라고 말했다.하연은 그때 남준이 자신에게 하는 말인 줄 알고 반박하려다, 남준의 시선이 고나희를 향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고나희는 아무 말 없이 자리를 떠났고, 이후 하연과 남준은 각자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저 아주 사소한 일이었지만, 하연은 고나희를 이렇게 다시 보게 될 줄은 몰랐다. 그것도 그녀의 사망 소식으로.[참, 고나희의 뱃속에 아이도 있었다고 하더라.]하연은 깜짝 놀라며 물었다. “몇 개월이었는데?”[5,6개월쯤 되었을 거야.]하지만
“형님 얼굴도 별로 좋아 보이지 않네요.” 상혁은 대꾸하지 않았다. “그만, 아침부터 무슨 쓸데없는 소리를 해. 어서 앉아라.” 부동건이 꾸짖었다. “어젯밤에 술 마셨어요?” 남준은 대수롭지 않게 앉으며 말했다. “접대하는 자리여서 어쩔 수 없었다.” “남자가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상혁이 처럼 남준이 너도 당연히 그런 자리는 해야 해.” 송혜선은 웃으며 중재했고, 말 하나하나에 의미가 담겨 있었다. 상혁은 집사가 가져온 우유 외에는 아무것도 손대지 않았다. 반면 부남준은 여유롭게 식사를 이어갔다. “형, 들었어요. 고경수의 딸이 사고를 당했다면서요.” “소식 한번 빠르군.” “검사 보고서도 확인했어요. 그 여자아이, 임신까지 하고 있었다면서요. 그런데 아버지가 누군지는 밝혀졌나요?” 이 질문은 부동건의 주의를 끌었다. “아이? 아이의 아버지가 누구냐? 상혁아, 왜 나한테는 이런 얘기는 하지 않은 거냐?” “떳떳한 사이가 아닌 것 같아서 말씀들이지 않았습니다. 여자가 잘못된 길을 걷고, 잘못된 남자를 믿는 일은 흔합니다.” 상혁은 남준을 힐끗 보고 말했다. “본인이 굳이 알리지 않았다는 건, 아버지가 누군지...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겠죠. 그리고 고경수의 집안은 이미 파란 속에 휩싸여 있으니, 괜한 일을 벌이기보다는 조용히 지나가는 게 더 낫다고 생각했습니다.” 남준은 아침을 먹으며 웃었다. “고경수가 DL그룹에서 문제를 일으킨 것을 누군가 알았고, 그걸 감추기 위해서 자기 딸을 이용해 DL그룹 고위 간부에게 연결하게 해줘서 둘 사이에 아이가 만들어졌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냥 떠본 말이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부동건은 남준의 말의 조금씩 흥미를 가지기 시작했다. “계속해 봐라.” “제 말은, 고경수가 자기 딸을 이용해 누구에게든 신세를 졌을지도 모른다는 겁니다.” 상혁이 갑자기 미소를 지으며 모두 그를 바라보았다. 상혁의 하얀 손가락 관절이 탁자를 가볍게 두드리며, 무심한 어조로
“지금 정규인은 어디에 있나?” “제가 확인한 바로는, 아직 동남아에 있습니다.” 상혁은 외투를 집어 들고 일어섰다. “현장에 가보자.” 나가기 전에 상혁은 다시 침실로 발길을 돌렸다. 하연은 그네 의자에 앉아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는 뒤에서 하연의 긴 머리를 정리해주며 말했다. “DL그룹 내부에 문제가 생겨서 처리해야 해. 시간이 좀 걸릴 거야. 기다려줄래?” 하연은 상혁의 눈 속에 아직 남아 있는 욕망을 알아차렸다. “기다릴게.” 상혁은 미소를 지으며 빠르게 나갔다. 상혁이 탄 검은 차가 빠르게 출발했고, 멀지 않은 곳에 주차되어 있던 차가 상혁이 떠나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 뒷좌석에 있던 남자는 긴장을 풀며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잘했어.” 옆에 있던 여자는 몸을 떨며 좌석에서 미끄러져 반쯤 무릎을 꿇은 자세로 말했다. “상무님, 정규인의 아내가 진작부터 자기 남편과 고경수의 딸에 대한 불륜 사실을 알고 있었어요. 경찰이 정규인의 아내를 의심하지 않을까요?” 부남준은 그녀를 흘끗 보고 냉소적으로 말했다. “정규인의 아내는 오늘 밤 밖에서 돈 쓰느라 많이 돌아다녔어. 인증과 물증이 다 있지. 이번 사고는 단순한 사고일 뿐이지, 인위적인 것이 아니야.” “황연지.” 남준은 몸을 앞으로 기울여 연지의 턱을 들어 올렸다. “부상혁에게도 그렇게 말해.” 연지는 약간의 공포를 담은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이미 재무 보고서를 받았어요. 아마 저를 의심할지도 몰라요.” “네가 부상혁에게 충성을 다 바치는데, 왜 너를 의심하겠어?” 남준은 흥미로운 듯 그녀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그날 최하연을 다치게 한 건 정말 잘했어.” 그날 그 일은 바로 남준이 직접 지시한 것이었다. 연지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 사람... 이미 저를 의심하고 있어요. 평소라면 제가 그런 행동을 할 리가 없다는 걸 알 거예요. 게다가, 그 사건은 그 사람과 하연에게 아무런 영향도 주지 않았잖아요?
알고 보니 하연이가 졸업하던 그 해부터 상혁은 이미 준비를 하고 있었다. 시간이 흘러 계절이 바뀔 때마다 오늘까지 ‘여주인’의 도착을 기다렸던 것이다. 상혁은 하연에게 다가오라고 손짓했다. “마셔, 그리고 자. 진정 효과가 있는 와인이야.” 오늘 상형이가 고른 와인은 안정을 돕는 효능이 있는 와인이었다. 하연은 움직이지 않았다. “아직도 내 수면 패턴을 기억하고 있다니, 놀랍네요. 나는 당신을 위해 아무것도 해주지 못했는데, 주슬기는 당신을 위해 꿀물까지 챙겨주더군요.” 상혁은 미소 지으며 말했다. “나 안 마셨잖아.” 이 대답에 만족한 하연은 입을 삐죽 내밀었다. “위 안 좋은 거 알면서도 그렇게 술을 마셨어요? 나 화나게 하려고 일부러 그런 거죠?” “맞아.” 상혁이 솔직히 인정했다. “널 화나게 하려고 했어. 넌 신경도 안 쓰잖아.” “누가 신경 안 쓴다고 그래? 나 이렇게 와 있잖아...” 말을 다 끝내기도 전에 상혁은 하연을 품에 안아버렸다. “손이현이 바로 한명준이라는 걸 너에게 말하지 않은 이유는, 네가 한명준과 함께 떠날까 봐 두려웠어.”그 짧은 한마디가 지금까지의 모든 상황을 설명하고 있었다.하연은 그의 품에 단단히 안겨 있으며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그렇게 나를 믿지 못했어요?”“아니, 나 자신을 믿지 못한 거야.”하연은 잠시 놀라움에 눈을 크게 떴다.‘내가 봐도 상혁 오빠는 거의 완벽한 사람인데, 오히려 자신을 믿지 못했다니...’상혁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네 앞에 서면, 난 자신감이 없어.”그 말을 듣고 하연은 몸을 비틀어 빠져나가려 했지만, 상혁은 오히려 더 단단히 그녀를 끌어안았다.“하지만 요즘 난 다시 우리 하연이 앞에서 자신감을 되찾았어.”하연은 그 자리에서 그대로 멈춰 섰다. 그 말의 의미를 모를 리 없었다. 이번에 자신이 상혁에게 먼저 다가갔고, 솔직한 마음을 전했으며, 상혁을 잃는 것을 두려워하는 모습까지 모두 보여주었으니까.“하지만 그럴수록 더 두려워졌어
상혁은 조용히 그 자리에 서서 하연의 눈물 어린 고백을 지켜보고 있었다. 지금 하연의 모든 억울함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당신이나 한명준이나 다 똑같아요!! 나를 이토록 오랫동안 속였어요!! 보호한다는 명분이었지만, 그 속에 숨겨진 의도는 내가 다 알고 있었어요.” 하연이 한 걸음 더 다가가자, 상혁의 몸에서 진한 술향이 풍겼다. “하지만, 모든 게 밝혀진 후에도, 난 당신을 원망하지 않았어요. 당신이 나를 위해 그랬다는 걸 알아요. 당신이 날 사랑했다는 것도 알아요. 하지만, 내가 무엇을 잘못했기에 당신이 나를 떠나는 거죠?” 하연은 울기 시작했다. 그 눈빛은 마치 길을 잃은 아이처럼 혼란스럽고 불안했다. 최근의 갈등은 하연의 모든 안정감을 무너뜨렸다. 한때 하연은 상혁이 영원히 자신 곁에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확신이 무너졌다. 세상에 수많은 사람이 있지만, 누구도 한 사람만을 영원히 사랑할 수 있을 거라고 믿지 않았다. 심지어 자신조차도... 하연도 상혁이 좋은 남자라고 생각하며 문제는 자신에게 있었을 거라고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이 경계를 제대로 지키지 못했고, 다른 남자에게도 마음 한구석에 남겨진 미련이 있었다. 그녀의 눈물은 끊임없이 흐르고, 상혁은 그 눈물을 닦아주기 위해 손을 뻗었다. “다시는 내 앞에서 울지 마.” 하연의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남자에게 있어서, 사랑할 때 가장 강력한 무기가 여자의 눈물이었는데, 이제는 내 눈물조차도 통하지 않는 건가...?’ “오늘 저녁은 우연이었어. 주슬기가 나와 할 일이 있어서 만난 거지, 약속한 게 아니었어.” 상혁은 먼저 해명했다. 하연의 마음은 다시 조금 안도했다. “하지만 주슬기과 당신은...” “그럼 너랑 한명준은 또 무슨 사이인데?” 상혁은 하연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감싸 안았다. 눈물을 많이 흘린 탓에 하연의 얼굴은 한층 더 차가워져 있었다.“양 국장님께서 같이 식사하자고 하셔서 간 것뿐이에요. 데이트는
“우리는 이제 가야 해요.” 하연은 이현에게 말했다. 그는 취기가 오른 얼굴로 웃으며 말했다. “하연아, 네가 춤추는 모습은 정말 아름다웠어. 그해에 너 혼자 춤출 때, 나는 현장에 있었어. 그때 너를 알지 못한 것이 정말 아쉈어.” 하연은 그가 말하는 순간을 기억해 냈다. 학교 축제 때, 하연은 독무를 했고, 무대 위에서 춤을 췄던 그 장면이었다. 이때, 하연의 등 뒤에서 뜨거운 시선이 느껴졌다. 하연은 몸을 숙여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가야 해요.” 이현의 손이 하연의 손가락을 잡았다. “우리 같이 가자.” 하연은 머리가 더욱더 아파지며 갑자기 테이블 위에 있던 꿀물을 보며 이를 악물고 말했다. “그래요.” 더 이상 얽히지 않기 위해, 양국성은 안도한 듯 하연과 함께 이현을 부축하여 방을 나섰다. 문을 나서는 그 순간, 안에서 유리잔이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쨍그랑’하고 잔이 깨지는 소리가 방 안에 퍼졌다. 양국성은 하연과 이현이 같은 차를 타지 않았고, 하연은 이현을 부축해 차에 태운 후, 몸을 숙여 그의 안전벨트를 매주었다. 그녀는 운전기사에게 목적지를 말하며 말했다. “조심해서 집에 돌아가요.” “하연 씨.” 이현은 하연의 손이 다시 잡혔다. 하연은 눈을 들어 보았는데, 이현의 눈은 맑았다. “당신이 취하지 않았군요.” “마지막에 부상혁이 저에게 질문을 하나 했어요.” 하연은 눈을 가늘게 뜨고 이현을 응시했다. “부상혁이 저에게 물어본 것, 바로 예전에 제가 하연 씨를 지키지 못했는데, 이제는 할 수 있겠냐고...” 하연의 손이 순간 떨렸다. 자기 손을 당겨 빼내고 돌아서려 했지만, 다시 이현의 손에 잡혔다. “저는 할 수 있다고 말했어요. 저는 이제 능력이 있어요!! 예전처럼 우물쭈물하는 한명준이 아니에요!! 저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서라도 하연 씨와 함께하고 싶어요!!” 이런 말을 하는 이현을 바라보는 하연의 마음도 무척 복잡했다. “부상혁 씨는 뭐라고 했어요?”
하연은 고집스럽게 말했다. “국내든 해외든, 저도 차를 좋아하지 않아요. 너무 쓰잖아요.” 상혁은 시선을 이현에게 옮기며 담담하게 말했다. “여기서는 제가 주인이라, 한 상무님께 차를 대접하는 건 좀 그렇죠.”그는 슬기에게 술 한 잔을 따라주라는 신호를 보내며 말했다. “제가 먼저 한 상무님께 한 잔 올립니다.”독한 술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갔지만, 상혁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하연은 손에 힘을 주어 옷자락을 꽉 쥐었고, 마음속은 점점 더 초조해졌다. “그렇다면 저도 주인 중 한 사람인 셈이니, 비록 처음 만난 건 아니지만, 한 상무님과 최 사장님이 함께 있는 걸 보는 건 처음이니까 저도 한잔 해야겠군요.” 슬기는 예의 바르게 웃으며 말했지만, 그녀가 상혁 옆에 있는 모습은 마치 오랜 부부처럼 자연스러웠다. 이현은 슬기의 말을 듣고 나서 기분이 좋아지며 또 잔을 받아들이고, 결국 두 잔을 기꺼이 마셨다. 그러나 슬기는 계속해서 말했다. “최 사장님은 차도 술도 안 마시나요?” “하연이는 안 마십니다.” 이현은 하연을 보호하듯 그녀를 뒤로 숨기며 말했다. “제가 대신 마시죠.” 결국 그는 총 네 잔을 마셨다. 하연은 분명 보았다. 상혁이 무심히 탁자에 올려놓은 손등에 핏줄이 선명하게 부풀어 올랐고, 그건 상혁이 점점 위험해지고 있음을 알리는 신호였다. 그것은 그가 곧 자신의 감정에 따라 충동적으로 행동할 전조였다. “훌륭한 주량이군요. 이렇게 된 이상, 한 상무님과 기회가 닿으면 한 번 취하도록 달려보겠네요.” 상혁은 엷은 미소를 지으며, 곧바로 술병을 집어 들고 병뚜껑을 따며 말했다. “몇 년 전에는 한 상무님과 직접 대면할 기회가 없었는데, 오늘에서야 기회를 잡았으니, 이것도 인연이겠죠.” 이현은 상혁이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알았다. 그것은 오랜 세월 쌓인 불만과 질투였다. 단순히 이현의 신분이 아닌, 하연의 마음을 흔들었던 ‘한명준’의 존재에 대한 것이었다. 하연을 어릴 때부터 지켜온 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