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연은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눈에는 분노가 일렁였다. 이윽고 주저하지 않고 뒤돌아 사무실을 나갔다.화난 듯 떠나가는 하연의 뒷모습을 보며 서희는 으쓱한 듯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이윽고 느릿느릿 옷을 정리하고 나서야 대표 사무실에서 천천히 나왔다.그때 지영이 쪼르르 달려와 아부하는 표정으로 물었다.“매니저님, 저 오늘 어땠어요? 괜찮았나요?”서희는 눈썹을 치켜 올리며 칭찬을 투척했다.“정보가 꽤 정확하네. 잘했어. 앞으로 계속 노력해.”“감사합니다, 매니저님.”서희는 아주 대범하게 제 사무실로 돌아와 고급 화장품 세트를 챙겨 지영에게 건네 주었다.“받아.”지영은 그걸 보자마자 눈을 반짝였다. 하지만 마치 난감하다는 듯 한 번 거절했다.“매니저님, 저 이런 거 못 받아요.”“괜찮아. 작은 선물이니까. 안 받으면 나 무시하는 거야.”“에이, 그럴 리가요.”지영은 기다렸다는 듯 감격에 겨운 표정으로 화장품 세트를 받아 챙기더니 최근 들은 소식을 서희한테 알려주었다.“매니저님,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아까 봤는데 최 사장님 이미 회사 떠났어요.”서희는 그 대답에 아주 만족했다.사실 서희도 하연이 왜 이혼했었는지 잘 알고 있다. 때문에 하연이 제삼자와 배신을 얼마나 싫어하는지 알고 있다.그리고 오늘 아침 본 이런 상황은 어떤 여자라도 석연치 않아 할 게 뻔하다.서희는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섬뜩한 미소를 지었다. 심지어 옆에 있던 지영마저 그 모습에 몸을 흠칫 떨었다.“매니저님, 다른 시키실 일 없으면 전 이만 가볼게요.”“그래. 오늘 일...”“걱정하지 마세요. 제 입 무거워요. 절대 그 누구한테도 말하지 않을게요.”서희는 그제야 만족한 듯 지영을 보내 주었다.하지만 그 시각 하연이 FL 그룹 사옥을 나온 뒤 바로 떠나지 않았다는 건 꿈에도 몰랐다.하연은 입을 오므린 채 생각에 잠겨 있었다.솔직히 아까 그 모습은 하연에게 큰 충격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침대에는 그저 임서희 한 명뿐이었다.‘물어
‘네’라고 낮게 대답한 하연은 그 순간 왠지 모르게 안심이 되었다.그로부터 2분도 안 지나 하연은 저에게로 성큼성큼 걸어오는 상혁을 발견하였다.심지어 가까이했을 때, 상혁의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방울을 발견했다.“상혁 오빠, 제가 방해한 건 아니죠?”상혁은 서먹서먹한 하연의 말투에 얼른 하연의 손을 잡고 회사로 걸어갔다.“나한테 왜 그렇게 내외하고 그래? 오고 싶으면 언제든 와. 네가 찾아오는 건 방해가 아니니까.”하연은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예쁜 미소를 지었다. 손으로 전해지는 온기가 느껴지자 이제야 마음마저 따뜻해졌다.두 사람은 다른 사람의 시선 따위 신경 쓰지 않고 1층 로비를 가로질렀다.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하연은 쑥스럽기는커녕 왠지 모르게 든든했다.그렇게 엘리베이터에 도착하자 하연은 그제야 상황을 설명했다.“진숙 이모가 오늘 오빠 생일이라고 해서 왔어요.”상혁은 옆으로 돌아 하연을 바라봤다.“왜 미리 말하지 않았어?”‘미리 말하면? 사무실에서 봤던 그 장면 볼 일 없었나?’하연의 기분은 순간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하연의 감정 변화를 느낀 상혁은 다급히 물었다.“왜 그래?”“아, 아무것도 아니에요.”하연은 고개를 마구 저었다.하지만 결국 참지 못하고 고개를 돌려 물었다.“상혁 오빠, 오빠랑 오빠 전 비서 무슨 사이예요?”“전 비서?”상혁은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혹시 임 비서 말하는 거야?”하연은 고개를 끄덕이자 상혁이 진지한 표정으로 대답했다.“상사와 부하 관계지.”“아.”하연은 알겠다는 듯 대답했지만 영 믿지 못하는 표정이었다.그러자 상혁이 더 의아해했다.“왜 갑자기 그걸 묻는데?”그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엘리베이터 문이 천천히 열렸다.밖은 언제 그랬냐는 듯 분주한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고, 하연은 그걸 보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먼저 나갔다. 하연이 이상한 반응을 보이는 이유를 알 리 없는 상혁은 어리둥절해서 다급히 뒤따랐다.“최 사장님, 안녕하세요.”“부 대표님, 안녕하세요.
하연은 직접적으로 대답하지 않았지만 표정만으로도 그 답을 똑똑히 알 수 있었다.그 순간 상혁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사무실 전화로 내선 번호를 눌렀다.“마케팅팀 임 매니저더러 내 사무실로 오리고 해요.”“네, 대표님”“그리고, 경비원 몇 명도 함께 불러줘요.”“네.”하연은 곧장 소파에 앉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로부터 약 5분 뒤, 서희가 헐레벌떡 달려와 사무실 문을 열었다.“대표님, 무슨 일로 저를 찾으셨나요?”말을 마치자마자 소파에 앉아 있는 하연을 발견한 서희는 한순간 넋을 잃었지만 이내 표정을 관리했다.그 미묘한 표정 변화를 상혁은 놓칠 리 없었다.조진숙도 예전에 서희가 불여우라 겉모습처럼 순진하지 않을 거라고 예기했던 적 있다. 그래서 대표실에서 강제로 마케팅팀으로 부서를 옮겼던 거고.상혁은 그때만 해도 자기 어머니가 서희한테 편견이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오늘 보니 괜히 한 말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임 매니저, 설명이 필요한 것 같은데.”“대표님, 그게 무슨 뜻이죠?”서희는 천연덕스럽게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었다.그 표정을 본 순간 상혁의 눈빛은 이내 어두워졌다. 상혁을 잘 아는 사람이라면 이 분위기가 얼마나 무서운지 알 수 있다. 상혁 곁에서 그렇게 오랫동안 비서 일을 해온 서희가 그걸 모를 리는 없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 티를 낼 수 없었기에 서희는 애써 침착한 척 평온한 표정을 유지했다.모르는 사람이 보면 아마 서희가 정말 억울하다고 믿었을 거다.“임 매니저는 오늘 당장 인사팀에서 퇴사 처리해요. 월급은 한 달 치 더 지급할게요.”그 말에 서희는 더 이상 당황함을 숨기지 못했다.“대표님, 왜 그러세요? 이러시는 이유를 모르겠어요.”상혁은 해명할 기회도 주지 않고 서희를 내쫓았다.그러자 서희가 하연을 삿대질하며 버럭 소리쳤다.“대표님, 혹시 저 여자가 뭐라고 했어요? 저 여자 말 믿으세요?”이 상황을 보자 하연은 겨우 마음이 놓였다. 이로써 서희와 상혁이 아무 사이도 아니라는 게 증명됐으니까.
하연은 고개를 살짝 들어 상혁과 눈을 마주쳤다. 상혁의 맑은 눈동자에서 하연은 자기의 그림자를 볼 수 있었다.“상혁 오빠, 생일 축하해요.”상혁은 하연이 예뻐 죽겠다는 듯 싱긋 웃으며 하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고마워.”다급히 일어서서 테이블 쪽으로 달려간 하연은 아까의 우울한 표정은 온데간데없어지고 보물이라도 바치는 듯 케익을 들어 상혁에게 내밀었다.“상혁 오빠. 이건 제가 직접 만든 케익이에요. 꼭 다 먹어야 해요.”“그래.”상혁이 웃는 얼굴로 하연을 보며 대답했다.그러자 하연은 얼른 케익 상자를 열어 촛불을 꽂은 뒤 라이터로 초에 불을 붙이고 가볍게 노래하기 시작했다.“생일 축하합니다, 생일 축하합니다...”“오빠, 소원 빌어요.”상혁은 하연의 얼굴을 빤히 보다가 천천히 눈을 감은 채 두 손을 꼭 모으고 소원을 빌었다.이윽고 다시 눈을 떴을 때, 하연은 어느새 상혁의 앞에 다가왔다.두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듯 함께 촛불을 껐고, 하연이 곧이어 나이프를 상혁에게 건네며 말했다.“오빠, 첫 번째 조각은 생일 주인공이 베는 거랬어요.”지금껏 상혁의 생일만 되면 수많은 친구가 모여 생일을 축하해 줬는데, 그때마다 하연은 한 번도 나타난 적 없다.하지만 오늘 이 생일은 분명 소박하지만 그 어느 때보다 따뜻했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건 하연이 함께 한다는 거였다.“그래, 케익 벨게.”두 사람이 케익을 다 먹기 바쁘게 상혁의 개인용 휴대폰이 울리기 시작했다.“아들, 생일 축하해.”전화를 받아 보니 건너편에서 조진숙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목소리만 들어도 조진숙이 얼마나 기뻐하는지 알 수 있었다.“고마워요.”“올해에는 하연이 곁에 있으니 나랑 네 아버지는 끼어들지 않을게. 저녁에 레스토랑 예약해 뒀으니 위치 보낼게. 꼭 하연이랑 같이 가.”조진숙은 싱글벙글해서 제 할 말만 하고 전화를 끊어버렸다.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상혁의 핸드폰에는 주소 하나가 날아왔다.어머니를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젓던 상혁은 하연을 정식으로 초
서준은 차에 앉아 창문을 통해 하연을 바라볼 뿐 가까이 접근하지도 못했다.그렇게 얼마나 흘렀을까? 담소를 나누며 식사하던 하연과 상혁이 계산까지 마치고 레스토랑을 나올 때까지 서준은 두 사람을 지켜보기만 했다. 심지어 두 사람이 시선 속에서 사라질 때까지 서준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그런 서준을 다시 현실로 끌어 낸 건 다름 아닌 전화벨 소리였다. 이수애는 전화가 연결되자마자 잔뜩 화난 목소리로 말했다.“서준아, 너 어디 있어? 나은 씨가 너 한참 기다렸대. 너...”서준은 이수애의 말을 채 듣지도 않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이윽고 핸드폰을 아예 꺼버리고는 그걸 차창 밖으로 내다 버리고 그곳을 훌쩍 떠나 버렸다.한편, 안태현이 개인 파티룸에서 한창 즐기고 있을 때, 문이 갑자기 예고도 없이 벌컥 열렸다.“어떤 자식이 눈치도 없이...”순간 화가 치밀어 욕지거리를 내뱉던 태현은 서준을 보자마자 하려던 말을 이내 삼키며 앞으로 다가갔다.“한서준, 오늘 무슨 바람이 불었대? 네가 여길 다 오고?”사실 서준은 한참 동안 파티룸에 드나들지 않았었다. 특히 하연과 이혼한 뒤에는 마치 다른 사람이라도 된 듯 발길을 뚝 끊었다.서준은 태현의 말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은 채 소파에 앉아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그 순간 서준의 기분이 안 좋다는 걸 느낀 태현은 얼른 룸안에 있던 사람들을 내보내고는 입을 열었다.“어디 보자. 너 이러는 거 혹시 네 엑스 와이프 때문이야?”“그렇게 티나?”차갑게 묻는 서준의 말에 태현은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너 진짜 완전히 빠졌네? 최하연 씨 이제 너한테 눈길도 안 주는데, 왜 이렇게 본인을 혹사해?”태현의 말에 서준은 아까 전 레스토랑에서 봤던 장면을 떠올렸다. 하연이 상혁을 보는 눈빛은 너무 익숙하면서도 낯설었다.“나랑 최하연 가능성 있을까?”“아니.”태현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하지만 말하고 나서 상대에게 너무 상처가 될 수 있다는 걸 인지했는지 이내 말을 보탰다.“뭐, 아예 없는 건
서준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 순간 어떻게 해야 할 지 답을 찾은 듯했다.“고맙다, 친구야.”이윽고 말을 마치고는 벌떡 일어서서 다급히 룸을 빠져나가 덩그러니 남게 된 태현만 어리둥절했다.다음 날, 하연은 아침 일찍 회사에 도착했다. 오늘은 반년에 한번 이사회를 개최하는 날이기에 DS 그룹의 이사진과 임원진은 이미 맨 위층 회의실에 모여 있었다.한편, 하연이 사무실에 도착하자마자 태훈은 하연에게 서류 하나를 건네주었다.“사장님, 이건 상반기의 재무 보고서과 명세서입니다. 상반기 이윤만 해도 이미 작년 한 해 동안의 총이윤을 넘었습니다. 그것도 10퍼센트나 초과했습니다.”태훈은 말하면서도 무척 흥분했다.그도 그럴 게, 상반기 동안 작년 한 해의 실적을 달성했을 뿐만 아니라 10퍼센트나 초과한 건 그동안 누구도 해내지 못한 일이다. 하지만 하연은 고작 반년 동안 그걸 해낸 거다.“사장님, 이 데이터를 이사회 그 능구렁이들한테 던져주면 찍소리도 못 낼 거예요. 호 이사님과의 내기도 무조건 이겨요.”잔뜩 흥분한 태훈의 보고에도 하연은 여전히 흔들림 없는 표정으로 서류를 훑었다.보고서에는 이미 D시 프로젝트와 아직 채 완성하지 못한 프로젝트의 이윤까지 적혀 있었다.“D시 프로젝트 제외하면 이윤이 얼마지?”“D시 프로젝트를 제외하면 작년 실적까지 30퍼센트 부족합니다.”“음, 알았어. 회의하러 가자.”그 시각, 회의실 안.호현욱은 이미 이인자의 자리에 떡하니 앉아 있었다.회의실에 들어오기 전, 호현욱은 이미 상반기 재무 보고서를 확인했었다.사실 그것만 봐도 하연의 능력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회사 실적이 단기간에 대폭 상승했으니. 하지만 내기를 한 것과는 아직 거리가 멀었다.“호 이사님, 제가 볼 때 이사님과 최 사장님의 내기는 이미 승부가 난 거나 다름없습니다.”“최 사장님은 역시 너무 어려요. 뭐, 경영 수단은 확실히 대단하나 약속한 목표와 아직 거리가 멀던데요.”“상반기에는 D시 프로젝트가 있었으니 이만큼 실적을 올렸지만 하반
회의실 문이 열리자 하연은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갔다. 하연이 나타나자 회의실은 언제 순식간에 고요해졌고, 모든 사람의 눈빛이 하연에게 쏠렸다.그러다 하연이 착석하자 호현욱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최 사장님, 그동안 고생 많으셨습니다.”하연은 호현욱을 바라보며 미소로 화답했다.“별말씀을요. 그냥 일한 건데요.”“최 사장님도 오셨으니 회의 시작하죠.”호현욱이 웃으며 말하자 이사진은 모두 그가 중심이라도 되는 듯 행동했다.하연은 그걸 모두 눈에 새겼지만 기분을 얼굴에 드러내지 않았다.그러다 잠시 뒤 입을 열었다.“상반기 회사의 많은 프로젝트가 좋은 성과를 따냈는데, 지금으로부터 각 프로젝트 매니저가 프레젠테이션을 진행합시다.”하연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웬 이사 한 명이 말을 잘랐다.“최 사장님, 오늘이 상반기 이사회인 만큼 다들 재무 보고서도 봤을 테니 우선 상반기 실적부터 얘기하는 게 어떻겠습니까?”그 말이 떨어지자 두 번째 줄에 앉아 있던 이사도 맞장구쳤다.“최 사장님, 재무 보고는 이미 확인했습니다. 지난 상반기 고생 많으셨습니다. DS 그룹이 상반기 동안 이와 같은 성적을 따낼 수 있었던 건 다 사장님의 현명한 판단 덕입니다.”하연은 그 말에 팔짱을 끼고 눈썹을 치켜 올렸다.“다들 회사 실적에 관심을 보이는 듯하니 우선 실적부터 얘기해 봅시다.”“당연한 거 아니겠습니까? 최 사장님과 호 이사님의 내기도 걸린 일인데. 허나 애초에 뭐라고 약속했든지 기억하십니까?”하연의 우스운 꼴을 기대하던 이사진은 이내 한마디씩 말을 보탰고, 회의실은 순간 왁자지껄해졌다. 이 시각, 다들 한마음 한뜻으로 하연이 망신당하는 꼴을 기대하고 있었다.특히 호현욱은 우쭐거리는 표정을 아예 숨길 생각조차 없어 보였다.심지어 자리에서 일어나며 분위기를 주도했다.“최 사장님은 신용 있는 부인데, 뱉은 말은 당연히 지키겠죠. 다들 급해 마세요. 아직 때가 아니잖습니까.”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회의실에는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상황을 보니 다들 하연이
상대가 충격을 받았을 거다 판단된 하연은 그제야 태훈에게 그만하라는 눈치를 주더니 침착하고 부드러운 말투로 말했다.“아직 반년이나 남았는데 다들 그렇게 급해 마세요. 기한이 되면 모든 게 일단락될 거고, 승자가 누구인지도 자연스레 알리겠죠.”호현욱도 그 말에 동조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최 사장님 말이 맞아요. 모든 게 아직 정해진 게 아니니 우리 최 사장님 좋은 소식을 기다리자고요.”이사진은 하연이 썩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호현욱이 이렇게 말하자 하나둘 맞장구쳤다.“그럼 최 사장님 좋은 소식 기다리겠습니다.”“최 사장님이 우리를 실망하게 하지 않으셨으면 좋겠네요.”“하지만 정말 지면 결과에 승복하고 빨리 자리에서 물러나셔야 합니다.”“...”하연은 주위를 빙 둘러봤다. 요즘 이사회 분위기가 안 좋고 이사진 대부분이 호현욱을 필두로 하고 있다는 걸 하연도 알고 있다.때문에 이사회를 잘 정리하려면 맨 먼저 호현욱부터 잘라내야 한다.회의가 끝나고 하연이 회의실을 나서자 사람들은 모두 호현욱을 둘러쌌다.“호 이사님, 최 사장이 자신만만해 보이는데, 우리 이러다 지는 거 아닙니까?”“그러게 말이에요. 지금 다들 호 이사님을 따르는데, 만약 이사님이 물러나면 앞으로 우리도 처지도 곤란해집니다.”“뭐가 됐든, 절대 저 계집한테 져서 체면 깎이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사람들은 모두 한마디씩 의견을 얘기했다.애초에 하연이 DS 그룹에 들어온 순간부터 대부분 이사진은 호현욱의 편에 섰었는데, 그 이유는 다름 아니라 하연이 너무 어려 관리 경험이 없다는 거였다.하지만 고작 반년 사이에 이런 실적을 냈으니, 판도가 바뀌어 하연이 이길 가능성도 충분하다고 봐야 한다.그리고 만약 정말 하연이 이긴다면, 호현욱을 따르던 사람들은 이사회에서 제대로 자리 잡을 수 없을 테고.“호 이사님, 방법을 생각하셔야 합니다. 정 안 되면 특별한 수단이라도 써야 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최씨 집안 사람들을 이사회에서 쫓아내기만 하면 DS 그룹은 이사
최하성은 오늘 검정색 정장을 입고 등장했다. 그의 차가운 분위기와 단정한 모습은 단번에 모든 직원들의 이목을 사로잡았다. “최 대표님!”하성을 마주친 직원들은 공손하게 인사했다. 하성은 살짝 고개를 끄덕일 뿐, 시선을 주지 않고 빠르게 행사장으로 걸어 들어갔다. 오늘 저녁 만찬은 매우 풍성했다. 동서양의 요리가 조화를 이루며 대부분 직원들의 입맛과 식습관을 세심하게 고려한 모습이었다. 준비에 꽤 공을 들인 것이 분명했고, 결과적으로 반응도 좋았다. 연말 만찬이 시작되기 전, 하성은 DS그룹의 대표이사로서 무대에 올라 인사말을 했다. 하성은 차분한 걸음으로 무대에 오르며, 그의 존재감은 단번에 분위기를 압도했다. 그가 화려한 말은 하지 않았지만, 단 몇 마디 간결한 말로도, 관중석에서는 뜨거운 박수가 터져 나왔다. 이번 연말 행사는 생중계되고 있었으며, 하성이 등장하자마자 팬들과 네티즌들이 빠르게 몰려들었다. 몇 분도 채 되지 않아 시청자 수가 십만 명을 돌파했다. [최하성 씨, 오랜만이에요! 보고 싶었어요!][연예계에 최하성이 없으니 허전한 기분이에요. 최하성 씨, 돌아와 주세요!][다들 동감! 언제쯤 복귀할 수 있는 거죠?][복귀 요청 99%!!][...] 팬들의 댓글은 끊임없이 이어졌고, 하성의 인기는 생중계 플랫폼 순위에서도 단연코 1위를 차지했다. 무대 아래에서 생중계를 담당하던 진행자는 이 뜨거운 열기를 놓치지 않고 하성에게 다가갔다. “최 대표님, 생중계 채팅창에 팬들이 사장님의 새해 계획에 대해 굉장히 궁금해하고 있어요. 오늘 이 특별한 밤에 팬분들께 한 말씀 부탁드려도 될까요?” 하성은 미소를 머금으며 카메라를 응시했다. 그 순간, 생중계 채팅창은 순식간에 폭발했다. 선물 아이콘이 화면을 뒤덮었고, 댓글은 끊임없이 새로 고침 되었다. “안녕하세요, 하성입니다.” “지난 한 해 동안 저와 DS그룹을 응원해 주신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다가오는 새해에도 DL 그룹
“어머님, 정말로 부 회장님과 결혼하세요?” 이 얘기는 다영에게 있어 꽤 충격적이었다. 세간에서는 송혜선과 부동건의 관계를 두고 여러 말이 떠돌았고, 그중 가장 많이 들려온 것은 송혜선이 ‘첩’이라는 점이었다. 한때 정지철 부인도 이 사실을 꽤 꺼려했던 터라, 다영은 송혜선이 이렇게 대놓고 정식으로 자리 잡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언제 결혼 승낙을 받으신 거예요?” 송혜선은 이미 불룩해진 배를 가볍게 쓸며, 깊은 눈빛 속에 숨겨진 야망을 드러냈다. “부회장님께서 말씀하시길, 새해도 지나고 이제 곧 아이가 태어날 테니 우리 모자에게 반드시 정당한 신분을 보장해 주시겠다고 하셨어.” “그러니... 다영아, 우리 남준이를 믿어야 해. 지금은 잠시 밀려난 상황이지만, 미래는 아무도 모르는 법이잖니?” 다영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마음을 더욱 굳게 다졌다. “어머님, 걱정 마세요. 저는 언제나 남준 씨를 도울 거예요.” 송혜선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더욱 부드러운 눈빛으로 말했다. “그래야지. 남준이도 절대 너를 저버리지 않을 거야.” 그러다 두 사람이 화제를 돌리며 덧붙였다. “지금 부 회장님이 부상혁을 중시하며 DL그룹의 운영을 맡긴 데는 이유가 있어. 결국은 부씨 가문의 장손이라는 명분 때문이지.” “하지만, 임신 초기에는 변수가 많아. 무슨 사고라도 생기면, 어떻게 되겠니? 그런 일이 일어나지 말란 법도 없잖니?” “만약 그 아이가 사라지면, 부상혁 쪽의 지렛대도 없어진 셈이니 남준이한테 분명 유리한 상황이 될 거야. 그렇지 않겠니?” “...” 다영은 멍하니 한참 동안 대답하지 못했다. “어머님, 그게 무슨 뜻이에요?” 송혜선은 더 이상 자세히 설명하지 않고, 조그마한 흰색 약병을 다영의 손에 쥐여주었다. “이 약은 무색무취야. 일반인이 먹으면 아무 이상이 없지만, 임신한 사람이 먹으면 삼 일 안에 유산이 돼.” 다영의 손이 떨리며 본능적으로 병을 놓치듯 뺐다. “어머님,
“정다영 씨의 상상력은 참 풍부하시네요.” 상혁은 입꼬리를 비틀며 약간의 비웃음을 섞어 말했다. “세상을 잘 모르는 아가씨다운 모습이라 참 순진하긴 한데, 이런 험한 세상에선 지나치게 순진한 건 별로 좋지 않아요.” 더는 말을 낭비하지 않겠다는 듯, 상혁은 뒤돌아 떠났다. 다영은 마치 머릿속이 폭발이라도 한 듯, 귓가에서 찡하는 이명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그럴 리 없어요, 남준 씨는 그럴 리 없어요!” 그녀는 낮게 중얼거리며 자신을 설득하려 애쓰며 서둘러 휴대폰을 꺼내 이미 수없이 눌렀던 번호를 다급히 눌렀다. 하지만, 전화기 너머에서 들려온 건 여전히 차갑고 무미건조한 여성의 자동응답 소리뿐이었다. “안 돼!” 다영은 절망하며 비명을 지르고는 갑작스레 밖으로 뛰쳐나갔다. 깊은 겨울밤, 바람은 더욱 매섭게 몰아치고 있었다. ...창밖의 거센 바람에 창문이 덜컹이며 울렸다. 병원의 VVIP 병실 안. 다영은 온몸을 떨며 소파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초점 잃은 눈동자는 텅 빈 듯했고, 난방이 틀어져 있어도 그녀를 감싼 차가운 공기는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다영아, 이렇게 늦은 밤에 무슨 일이야?” 송혜선은 평소와 같은 말투로 물었고, 전혀 이상한 기색은 비추지 않았다. 실은 송혜선도 이미 알고 있었다. 정지철이 이제는 구속되고 정씨 가문이 더 이상 든든한 버팀목이 될 수 없다는 것을. 그러나 다영의 마음에는 여전히 남준의 존재가 얽매여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는 다영에게서 더 많은 가치를 끌어낼 여지가 없다는 사실을 송혜선 또한 명확이 알고 있었다. 그런 생각이 스치자, 송혜선은 표정을 가다듬고 따뜻한 물 한 잔을 건넸다. “자, 물 한 잔 마시고 몸 좀 녹여.” 다영은 멍하니 있다가 정신을 차린 듯, 송혜선의 팔을 단단히 붙잡았다. 간절함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물었다. “어머님, 남준 씨가 어디 있는지 알려주세요, 제발요!” 송혜선은 한숨을 쉬며 어쩔 수 없다
며칠 사이, 정다영은 차갑게 닫힌 문을 수없이 마주했다. 한때 주변 사람들이 다영을 떠받들며 찬란한 별처럼 여겼지만, 이제 집안의 사건이 터지자 사람들은 그녀를 피하려고만 했다. 마치 다영에게 다가가기만 해도 불행이 전염될 것처럼... 그렇게 다영은 세상의 차가운 이면과 인간관계의 허망함을 뼈저리게 느끼며, 자연스레 행동 하나하나를 조심스럽게 바꾸었다. “송 여사와 남준이는 요즘 집에 없는 걸로 아는데, 정 다영 씨는 왜 여기에 있는 거죠?” 상혁은 평범한 어조로 물었지만, 그 말은 다영을 잠시 멈칫하게 했다. 그녀는 곧바로 대답했다. “남준 씨가 곧 돌아온다고 해서 기다리고 있었어요.” 상혁은 아무런 감정도 드러내지 않은 채 그녀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날이 추우니 안에서 기다려요.” 말을 마친 그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남겨진 건 남자의 차가운 뒷모습뿐이었다. 다영은 상혁을 따라가며 급히 소리쳤다. “부 대표님, 잠깐만요...” 상혁이 발걸음을 멈췄다. “무슨 할 말이라도?” 다영은 망설이며 입술을 꽉 깨물었다. 며칠 동안 그녀가 이리저리 뛰어다닌 이유는 단 하나였다. 아버지를 이 난관에서 구해내기 위해서... 그리고 지금, 아버지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자신의 눈앞에 서 있었다. 그녀는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제 아버지와 관련된 일입니다.” 상혁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 건 검찰 소관이에요. 전문 변호팀을 고용하면 사건의 진행 상황을 빠르게 파악할 수 있을 거예요.” 다영은 초조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부 대표님, 이건 분명 오해입니다. 제 아버지는 회사에 평생을 바친 분입니다. 아버지는 공문서를 위조하거나 계약서를 조작하는 일은 절대 하지 않았을 거예요.” 그녀는 자기 아버지를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즉, 정지철은 딸을 희생하더라도 자신의 미래를 망칠 행동은 절대 하지 않을 사람이었다. 그리하여 분명히 이번 일에는 뭔가 숨겨진 진실
최씨 가문 본가 후원에 있는 온실에서는 조용히 바둑알이 내려놓아는 소리가 들렸다. 상혁과 최동신은 마주 앉아 바둑에 온 정신을 집중하고 있었다. “상혁아, 지금 이 바둑판은 승부가 거의 결정 난 것 같은데!” 바둑판 위에서 흑과 백이 치열하게 맞서며 팽팽한 긴장감을 자아냈다. 최동신은 한 마디로 상황을 정리했다. “자네의 백돌이 반 집 차이로 우위를 점하고 있어. 대단해! 예전보다 실력이 많이 늘었어.” 상혁은 겸손하게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할아버지 기백이 여전히 넘치시니 제가 아직 배울 점이 많습니다.” 최동신은 고개를 살짝 저으며 탄식했다. “늙었지. 이제는 예전 같지 않다.” 그러나 그는 곧 말을 돌려 흑돌을 손에 들고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하지만 지금부터 자네도 조심해야겠어.” 최동신은 그 말을 하며 흑돌을 바둑판 위에 툭 하고 내려놓았다. 그 돌이 놓인 자리로 인해 한순간 바둑판의 분위기가 달라졌다. 두 사람의 시선이 바둑판 위에 집중되었다. 상혁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손을 멈췄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우위를 점하고 있던 상황이 단 한 수로 인해 역전이 된 것이다. “할아버지의 바둑 실력은 늘 감탄할 따름입니다. 제가 이 점을 간과하고 놓치고 있었네요.” 상혁은 차분하게 패배를 인정하며 판세를 다시 살펴보기 시작했다. 최동신은 손에 들고 있던 바둑알을 다시 주우며 훈계하듯 말했다. “그렇지. 이길 수 있는 상황도 한 수의 실수로 모두 망쳐버릴 수 있는 법이다.” 상혁은 최동신의 말을 곱씹으며 고개를 들었다. 두 사람의 눈이 잠시 마주쳤다. 최동신은 아무렇지 않게 말을 이었다. “들리는 말에 DL그룹의 실질적인 권한은 이제 자네가 잡았고, 자네 동생은 동남아 지사로 발령이 났다고 들었네.” “겉으로 보기엔 좋은 상황 같아 보이지만, 상혁이, 네가 한 수라도 실수하는 날엔 모든 걸 망칠 수 있다는 걸 명심해야 한다.” 이 말은 단순한 충고 이상의 뜻을 담고 있었다
“이렇게 빨리?” 남준은 무심코 말을 뱉었다. 그의 음성엔 조급함이 묻어 있었다. 남준은 방 안을 계속해서 왔다 갔다 하며 초조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분명 연말 이후로 예정되어 있지 않았나? 어떻게 앞당겨진 거지?” 연지는 침착하게 보고했다. “들리는 말로는 이번 사건이 중대한 만큼 생각보다 빠르게 처리되면서 연말 전에 재판이 열리게 되었다고 합니다.” 남준은 발걸음을 멈추고 차가운 웃음을 흘리며 경멸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부상혁이 나를 궁지로 몰아넣고, 정규인의 입을 열어 내 약점을 찾아내려는 것이겠지.” 그는 잠시 멈칫하다가, 비웃는 듯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하지만 부상혁도 모르는 게 있지. 정규인의 입은 결코 열리지 않을 거란 사실을 말이야.” 연지의 눈이 순간 반짝였다. “상무님, 그 말은 혹시...” 그러나 그녀의 말은 남준의 강렬한 눈빛으로 끊겼다. 서로의 눈이 마주친 순간, 연지는 남준의 의도를 즉각 이해했다. “알겠습니다. 지금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 정규인의 사건은 법원에서 열렸고, 법정에는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경찰들이 구치소에서 정규인을 호송해 나오자, 멀리서 그의 초췌한 모습이 눈에 띄었다. 정규인의 기운 없는 모습에서 예전의 당당함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는 고개를 들어 법정 방청석을 둘러보다가, 맨 끝자락에서 누군가를 발견했다. 순간, 정규인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그는 갑작스럽게 방청석을 향해 달려들며 미친 듯이 외쳤다. “여기 왜 왔어! 당장 나가! 나가란 말이야!” 경찰들이 급히 정규인을 제지하려 했으나, 그의 필사적인 몸부림에 저지당했다. “진정해!” 경찰은 엄중히 경고했지만, 그의 저항은 계속되었다. 그러다 결국, 경찰봉이 그의 등을 강하게 내려쳤다. 퍽! 정규인의 입에서 억눌린 신음이 흘러나왔고, 그의 몸은 앞으로 비틀거리며 쓰러졌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방청석의 허징인은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
“이모...” 하연은 조진숙을 꽉 끌어안으며 말문이 막혔다. 지금은 어떤 말도 조진숙에게 자신의 감정을 온전히 전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어떻게 되든 간에, 이모 곁엔 항상 저희가 있어요.” 조진숙은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하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 고맙다.” ... 한적한 교외에 위치한 독채 빌라. 고급스러운 소형 승용차 한 대가 천천히 차고로 들어섰다. 황연지는 휴대폰으로 위치를 확인한 뒤, 차 문을 열고 내렸다. 빌라는 꽤 외진 곳에 있었고, 오랜 기간 비어 있었던 듯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연지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말했다. “상무님? 계신가요?” 대답 대신 돌아온 것은 텅 빈 집안의 메아리뿐이었다. 연지는 2층으로 이어지는 나선형 계단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용기를 냈다. 계단 끝에 닫혀 있는 문 하나가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상무님, 안에 계신가요?” 그녀는 문을 두드렸지만,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잠시 망설이던 연지는 문을 조심스레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문을 열자마자 코를 찌르는 강렬한 술 냄새가 그녀를 덮쳤다. 연지는 본능적으로 코를 막고 안으로 더 들어갔는데, 방 한쪽 구석에 앉아 있는 낯익은 실루엣을 발견했다. “상무님?” 이사회 이후 부남준은 자취를 감췄고, 외부에서 그의 소식을 들을 수 없단다. 그렇게 된 지가 삼 일째였다. 연지는 재빨리 그에게 다가가 그를 부축했다. “상무님, 괜찮으세요?” 남준은 느릿하게 고개를 들었다. 비록 지금의 그는 어딘가 지쳐 보였지만, 그 매서운 매의 눈은 여전히 날카로운 빛을 띄고 있었다. 그는 황연지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입가에 미묘한 미소를 지었다. “너였구나?” 연지는 아침에 급히 소식을 듣고 서둘러 이곳으로 달려왔다. “상무님, 사라지신 며칠 동안 정다영 씨가 상무님을 계속 찾고 있었습니다.” 정다영은 남준을 찾기 위해 거의 미쳐버린 상태였고, 부남준을 찾을 수 있는 곳은 모조리 뒤지고 있었다.
저녁에 하연과 상혁은 음악회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문을 열자마자 집 안의 불이 자동으로 켜졌다. “돌아왔니?” 하연과 상혁은 동시에 고개를 들어 소파에 홀로 앉아 있는 조진숙을 보았다. 지금의 조진숙은 어딘가 쓸쓸해 보였다. “어머니, 집에 계셨네요?” 조진숙은 자리에서 일어나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너희 기다리고 있었어.” 하연은 활짝 웃으며 조진숙에게 다가가 옆자리에 앉았다. “이 늦은 시간까지 기다린 거예요? 일찍 주무시지 그러셨어요.” 하연이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조진숙은 손을 들어 하연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너희가 안 들어오면 마음이 놓이질 않아서.” 하연은 그녀의 팔짱을 끼며 더 애교를 부렸다. “이모가 이렇게 저희를 걱정해주니까, 너무 좋아요!” 조진숙은 하연의 손등을 살짝 두드리며 부드럽게 웃었다. “사실 오늘은 너희에게 할 말이 있어서 기다린 거야.” 상혁은 소파의 다른 쪽에 앉아 조진숙의 말에서 뭔가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꼈다. 하연과 눈빛을 교환한 상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하연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이모, 무슨 일 있으신 거예요?” 조진숙은 살짝 고개를 저으며 차분하게 말했다. “아무 일도 아니야. 그냥 네 동건이 삼촌이 송혜선과 결혼하기로 했다는 것뿐이야.” 이 말은 마치 고요한 연못에 큰 돌멩이를 던진 것처럼 분위기를 흔들었다. 상혁은 무의식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났으나, 조진숙이 그를 불러 세웠다. “상혁아, 흥분하지 마라.” 상혁은 걸음을 멈추고 눈빛을 깊게 내리깔았다. “가서 직접 얘기를 해봐야겠어요.” “그럴 필요 없어.” 조진숙이 단호히 말하며 표정은 여전히 여유로웠고, 마치 이번 일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은 듯했다. “아들아, 이제 그건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란다. 남녀가 서로 좋아해서 함께 사는 건 그저 대수롭지 않은 일일수도 있다. 하지만 결혼은 그런 장난스러운 일은 아니잖아. 네 아버지도
“이 말은...?” “회장님, 저랑 결혼해주실 수 있어요?” ... 카페에서. 부동건은 카페에서 오래 시간 조진숙을 기다리고 있었다. 조진숙이 마침내 천천히 문을 열고 들어왔다. 부동건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가방을 받으려 손을 내밀었지만, 조진숙은 능숙하게 피해버렸다. “말해봐. 이렇게 급하게 나를 부른 이유가 뭐죠?” 부동건은 조진숙의 물음에 바로 답하지 않았다. 대신, 손짓으로 직원을 불렀다. “블루마운틴 한 잔, 반 설탕으로.” 조진숙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비꼬는 듯한 말투로 답했다. “이렇게 오랜 세월이 흘렀는데도, 내 취향을 기억하다니 의외네요.” 부동건은 약간의 미안함을 느끼며 변명하듯 말했다. “그래도 한때 부부였잖아, 결국엔 내가 당신에게 잘못한 거지.” 조진숙은 무심한 태도로 대꾸했다. “‘잘못했다’라는 말은 이미 너무 많이 들었어. 다른 표현은 없어?” “알겠어.” 부동건은 커피를 젓는 스푼을 천천히 멈추고,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회사는 이미 상혁이한테 넘겼어.” “응, 들었어.”조진숙은 가볍게 대답했고, 목소리는 차갑지도, 따뜻하지도 않은 무미건조한 톤이었다. “상혁이는 신중하고 믿음직스러워. 회사를 맡기기에 더없이 적합한 사람이야. 앞으로 상혁이하고 하연이는 그 얘들 둘은 함께 안정된 삶을 살게 될 거야.” “너도 알다시피, 하연이는 말 안 해도 좋은 아이라는 걸 당신도 알잖아. 하연이가 상혁이 곁에 있는 한, 상혁이는 하연이로 인해 고통받는 일은 없을 거야.” 조진숙은 눈살을 살짝 찌푸리며 무언가 이상하다고 느낀 듯했다. “오늘 나를 부른 이유가 이런 이야기를 하려고 불렀어?” “아니야.” 부동건은 고개를 저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혼 후 두 사람이 이렇게 함께 앉아 대화하는 시간은 정말로 드물었다. 부동건은 오늘따라 조진숙을 천천히, 자세히 바라보았다. 세월은 참으로 잔인한 것이었다. 수많은 세월 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