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의실 문이 열리자 하연은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갔다. 하연이 나타나자 회의실은 언제 순식간에 고요해졌고, 모든 사람의 눈빛이 하연에게 쏠렸다.그러다 하연이 착석하자 호현욱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최 사장님, 그동안 고생 많으셨습니다.”하연은 호현욱을 바라보며 미소로 화답했다.“별말씀을요. 그냥 일한 건데요.”“최 사장님도 오셨으니 회의 시작하죠.”호현욱이 웃으며 말하자 이사진은 모두 그가 중심이라도 되는 듯 행동했다.하연은 그걸 모두 눈에 새겼지만 기분을 얼굴에 드러내지 않았다.그러다 잠시 뒤 입을 열었다.“상반기 회사의 많은 프로젝트가 좋은 성과를 따냈는데, 지금으로부터 각 프로젝트 매니저가 프레젠테이션을 진행합시다.”하연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웬 이사 한 명이 말을 잘랐다.“최 사장님, 오늘이 상반기 이사회인 만큼 다들 재무 보고서도 봤을 테니 우선 상반기 실적부터 얘기하는 게 어떻겠습니까?”그 말이 떨어지자 두 번째 줄에 앉아 있던 이사도 맞장구쳤다.“최 사장님, 재무 보고는 이미 확인했습니다. 지난 상반기 고생 많으셨습니다. DS 그룹이 상반기 동안 이와 같은 성적을 따낼 수 있었던 건 다 사장님의 현명한 판단 덕입니다.”하연은 그 말에 팔짱을 끼고 눈썹을 치켜 올렸다.“다들 회사 실적에 관심을 보이는 듯하니 우선 실적부터 얘기해 봅시다.”“당연한 거 아니겠습니까? 최 사장님과 호 이사님의 내기도 걸린 일인데. 허나 애초에 뭐라고 약속했든지 기억하십니까?”하연의 우스운 꼴을 기대하던 이사진은 이내 한마디씩 말을 보탰고, 회의실은 순간 왁자지껄해졌다. 이 시각, 다들 한마음 한뜻으로 하연이 망신당하는 꼴을 기대하고 있었다.특히 호현욱은 우쭐거리는 표정을 아예 숨길 생각조차 없어 보였다.심지어 자리에서 일어나며 분위기를 주도했다.“최 사장님은 신용 있는 부인데, 뱉은 말은 당연히 지키겠죠. 다들 급해 마세요. 아직 때가 아니잖습니까.”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회의실에는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상황을 보니 다들 하연이
상대가 충격을 받았을 거다 판단된 하연은 그제야 태훈에게 그만하라는 눈치를 주더니 침착하고 부드러운 말투로 말했다.“아직 반년이나 남았는데 다들 그렇게 급해 마세요. 기한이 되면 모든 게 일단락될 거고, 승자가 누구인지도 자연스레 알리겠죠.”호현욱도 그 말에 동조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최 사장님 말이 맞아요. 모든 게 아직 정해진 게 아니니 우리 최 사장님 좋은 소식을 기다리자고요.”이사진은 하연이 썩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호현욱이 이렇게 말하자 하나둘 맞장구쳤다.“그럼 최 사장님 좋은 소식 기다리겠습니다.”“최 사장님이 우리를 실망하게 하지 않으셨으면 좋겠네요.”“하지만 정말 지면 결과에 승복하고 빨리 자리에서 물러나셔야 합니다.”“...”하연은 주위를 빙 둘러봤다. 요즘 이사회 분위기가 안 좋고 이사진 대부분이 호현욱을 필두로 하고 있다는 걸 하연도 알고 있다.때문에 이사회를 잘 정리하려면 맨 먼저 호현욱부터 잘라내야 한다.회의가 끝나고 하연이 회의실을 나서자 사람들은 모두 호현욱을 둘러쌌다.“호 이사님, 최 사장이 자신만만해 보이는데, 우리 이러다 지는 거 아닙니까?”“그러게 말이에요. 지금 다들 호 이사님을 따르는데, 만약 이사님이 물러나면 앞으로 우리도 처지도 곤란해집니다.”“뭐가 됐든, 절대 저 계집한테 져서 체면 깎이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사람들은 모두 한마디씩 의견을 얘기했다.애초에 하연이 DS 그룹에 들어온 순간부터 대부분 이사진은 호현욱의 편에 섰었는데, 그 이유는 다름 아니라 하연이 너무 어려 관리 경험이 없다는 거였다.하지만 고작 반년 사이에 이런 실적을 냈으니, 판도가 바뀌어 하연이 이길 가능성도 충분하다고 봐야 한다.그리고 만약 정말 하연이 이긴다면, 호현욱을 따르던 사람들은 이사회에서 제대로 자리 잡을 수 없을 테고.“호 이사님, 방법을 생각하셔야 합니다. 정 안 되면 특별한 수단이라도 써야 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최씨 집안 사람들을 이사회에서 쫓아내기만 하면 DS 그룹은 이사
“요즘 협상하고 있는 모든 프로젝트 서류 나한테 가져와.”태훈은 여전히 태연하게 행동하는 하연을 보자 이내 마음을 가라앉혔다.“네, 바로 가져다드리겠습니다.”그리고 얼마 뒤, 서류 한 뭉치를 안고 다시 돌아왔다.이윽고 최근에 협상할 가치가 있는 프로젝트만 골라 하연에게 건넸다.“사장님, 이 몇 개 프로젝트가 괜찮으니 한번 확인해 보세요.”“어, 거기 둬.”하연은 서류를 건네받고 내친김에 확인해 보더니 얼마 뒤 손가락으로 프로젝트 하나를 가리키며 말했다.“이 인수합병 건이 협상할 여지가 있어 보이네...”태훈도 사실 이 프로젝트를 눈여겨봤었다.“이건 프로젝트팀 피드백도 좋았습니다. 하지만 이 공장들 모두 섬에 있어 협력하기로 하시면 현지 조사는 섬에 가서 하셔야 할 겁니다.”하연은 잠시 고민하더니 물었다.“섬이 어딘데?”“서해안에서 약 300킬로미터 떨어진 오하우섬입니다. 현지 조사도 배를 타고 해야 하고 왕복 2, 3일 정도 걸립니다.”“프로젝트팀에 준비하라고 일러둬. 때가 되면 현지 조사도 나갈 거야.”“네, 사장님.”“...”그 시각, DS 그룹 대문 앞에 몰려 있는 무리 때문에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대철 형님, 들어갈까요?”“쓸데없는 소리. 안 들어갈 거면 여기까지 왜 왔겠어?”대철은 으리으리한 건물을 보자 왠지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우리가 이런 건물 하나 딱 있으면 진짜 굉장했을 텐데.”“그러게 말입니다, 형님. 보스한테 말씀드려 우리 사무실도 한자리 내달라고 할까요?”대철은 인정사정없이 민석의 머리를 내리쳤다.“무슨 소리 하는 거야? 우리한테 그런 대우가 가당키나 해?”그 말에 민석은 머리를 감싸 쥐며 불쌍한 표정을 지었다.“대철 형님, 농담이잖아요.”하지만 말이 끝나기 무섭게 대철의 다른 부하 윤규가 DS 그룹에서 헐레벌떡 달려 나왔다.“대철 형님, 안내 데스크 직원이 그러는데 보스를 만나려면 예약이 필요하다는데요.”그 순간 대철은 버럭 화를 내며 욕지거리를 퍼부었다.“쓸모없는 것! 우
많은 사람이 한꺼번에 내지른 소리에 깜짝 놀란 하연은 사무실로 들어오는 대철 일행을 의아한 듯 바라봤다.“곽대철 씨, 이게 무슨 상황이죠?”대철은 제 배를 툭툭 치며 소파에 앉았다.“제가 애들 데리고 보스 보러 왔어요.”“...”“아무 일 없이 올 사람들이 아닐 텐데. 말해요, 무슨 일이에요?”하연이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 대철은 이내 하연의 옆에 바싹 붙어 아부하는 얼굴로 대답했다.“역시 보스. 똑똑하십니다. 사실 제가 요즘 바둑을 연구하다가 새로운 방법을 터득해 한번 겨뤄보자고 찾아왔습니다.”하연은 그 말에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고작 이것 때문에 왔다고요?”대철은 고개를 끄덕였다.지난번에 하연과의 대결에서 완전히 패하고 난 뒤, 대철은 하연을 이기겠다는 일념 하나로 집에서 숱한 연습을 해 왔다. 그러다 이렇게 다시 겨루려고 찾아온 거고.“보스, 기회를 주시면 안 될까요?”하연을 간절히 바라보는 대철의 표정만 보면 아무도 그가 조폭 두목이라는 걸 짐작하지 못할 거다. 그저 바둑에 미친 사람이라고 보면 모를까.하지만 하연은 그런 대철을 고민도 없이 거절했다.“시간 없어요. 프로젝트 때문에 섬에 현장 조사 가야 해서.”그 말에 실망한 대철은 어깨가 축 처져 버렸다.그 표정을 본 하연은 얼른 말을 보충했다.“오하우섬에 갔다 올 거라 사흘 정도면 돌아와요. 얼마 안 걸리니까 그동안 혼자 더 연구해 봐요.”“보스, 왠지 악의가 느껴지는데요.”대철의 화가 난 듯한 말투에 하연은 싱긋 웃으며 격려했다.“다음번에 더 정진한 모습 기대할게요.”“...”그 말을 끝으로 하연이 다시 일에 매진하자 대철도 더 이상 방해할 수 없어 인사만 하고 부하들을 데리고 떠났다.그러다 사무실을 빠져나간 뒤, 그제야 뭔가 생각난 듯 물었다.“잠깐, 아까 어디 간다고 했지?”“오하우섬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요?”“대철 형님, 거긴 우리가 얼마 전에 외국 사람한테 판 섬 아닙니까? 보스는 왜 거길 간대요?”대철은 의아한 듯 하연의 사무실 쪽을 바라보
그 말을 들은 상대는 이내 관심을 보였다.“자네한테 언제부터 보스가 있었다고 그래?”“비밀이야.”대철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그 대화가 끝나자 옆에 있던 민석이 다급한 듯 말을 잘랐다.“대철 형님, 보스가 위험합니다.”그 말에 대철의 표정이 순간 어두워졌다.“그게 무슨 소리야? 보스가 위험하다니?”“우리 쪽 애들이 오하우섬을 조사해 봤는데, 그 섬은 외부 신호를 모두 차단했답니다. 그리고 오하우섬을 사들인 사람이 인신매매범이래요.”“뭐?”대철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얼른 핸드폰 가져와.”말을 마친 대철은 곧바로 핸드폰을 꺼내 하연에게 전화했다.한편, 회사 일을 마친 하연은 엘리베이터를 나오자마자 이상한 그림자가 주차장을 언뜻거리는 걸 느꼈다.이에 잔뜩 경계한 채 차 쪽으로 걸어갔더니, 다음 순간 익숙한 롤스로이스 팬텀이 깜빡이를 켠 채 서 있다가 문이 열리며 상혁이 차에서 내렸다.“하연아.”하연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상혁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상혁 오빠, 여긴 어쩐 일이에요?”하연에게 다가간 상혁은 하연의 피곤한 얼굴을 보자 얼른 손을 꼭 잡았다.그때 하연의 핸드폰이 갑자기 울렸다.“상혁 오빠, 저 전화 좀 받을게요.”전화 건너편에서 뭐라고 말했는지 하연의 눈이 점점 어두워졌고, 전화를 끊자마자 상혁 역시 이상함을 느껴 걱정스레 물었다.“왜 그래? 무슨 일이야?”“아니에요, 걱정할 거 없어요.”하연은 아무렇지 않은 듯 대답했지만 상혁은 여전히 심각한 표정을 풀지 않았다.“하연아, 무슨 일이 있으면 말해. 우리 사이에 숨기지 말고.”상혁의 진지한 눈을 본 순간 하연은 입을 오므리고 있다가 다시 열었다.“우선 차에 가서 말할게요.”상혁은 하연의 손을 잡은 채 차에 올랐다.그리고 차에 타자마자 하연은 F국에서 있었던 일을 사실대로 털어 놓았고, 상혁은 깊은 고민에 빠졌다.“보아하니 너를 겨냥한 것 같아.”하연은 입꼬리만 말아 올린 채 싸늘한 미소를 지었다.“권대호가 얼마나 많은 나쁜 짓을 했
태훈은 손을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사장님, 이 배는 15분 뒤에 출발한답니다. 하지만 현재 표 3장밖에 구입하지 못해 나머지 경호원들은 다음 배를 타야 할 것 같습니다.”“다음 배는 얼마나 걸리는데?”“1시간 뒤에 있습니다.”하연은 태훈의 손에 든 차표를 받아 들었다.“괜찮아, 우리가 먼저 가면 돼. 현지 조사일 뿐이니 별문제 없을 거야.”“하지만 큰 도련님이 그러셨는데, 사장님이 가시는 곳마다 무조건 경호원을 데리고 다녀야 한다고 했습니다.”태훈은 솔직히 걱정됐다. 어찌 됐든 목적지는 섬인데, 만약 하연한테 무슨 일이라도 있으면 안 되니까.잠깐 망설이는 사이,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상혁이 하연을 향해 걸어왔고, 하연은 반가운 듯 손을 흔들었다.“상혁 오빠, 여기요.”상혁을 이런 데서 만나자 태훈은 좀 의외였지만 한편으로 감탄했다.“두 분 사이 정말 좋으시네요.”그와 동시에 잔뜩 졸이고 있던 마음도 어느 정도 편해졌다.상혁도 있으니 하연한테 무슨 일이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안도감 때문이었다.세 사람은 곧장 배에 올라탔다. 거의 배탈 일이 없었던 하연은 내내 몸이 불편했지만 다행히 1시간 뒤에 배는 목적지인 오하우섬에 도착했다.하지만 배에 꽉 차 있던 승객들 중, 오하우섬에서 내리는 사람은 고작 셋뿐이었다.세 사람은 부목 끝까지 걸어가 겨우 섬에 도착했다.“이상하다? 왜 신호가 안 잡히지?”하지만 섬에 도착한 태훈이 핸드폰을 마구 흔들어 댔지만 신호가 한 칸도 잡히지 않았다.하연과 상혁은 그 사이 서로 눈빛을 교환했고, 걱정하지 말라는 듯한 상혁의 눈빛을 받으며 두 사람은 약속이나 한 듯 섬에 들어섰다.상대 회사 측 대표는 아니나 다를까 진작 부두에서 기다리고 있었다.“최 사장님, 여깁니다.”태훈은 다급하게 다가가 상대와 인사를 하고 명함을 교환했다.“저희는 DS 그룹에서 귀사 공장을 조사하러 왔습니다.”상대는 태훈을 흘긋 보다가 이내 멀지 않은 곳에 있는 하연을 보고 서로 눈빛을 교환하더니 이내 환한 미소를 지
하연은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울부짖는 놈들을 내려다보며 싸늘한 말투로 말했다.“내가 직접 갈 테니 몸에 손댈 필요 없어.”놈들은 어안이 벙벙해 넋을 잃었다.대호의 명령대로 하연을 묶어 가야 하는데 지금은 털끝 하나 다치지 못하고 있으니.상혁의 실력을 느낀 놈들은 서로 눈치를 살피다가 기어 일어나 묶고 가는 건 포기했다.“그럼 따라와.”하지만 오만한 태도로 말하는 건 여전했다.이윽고 먼저 앞에서 걸으며 하연에게 길을 안내했다.그때 커다란 손이 하연을 꼭 잡아 주었고, 그 온기를 느끼자 하연은 고개를 돌려 상혁을 바라봤다.그리고 그 순간, 분명 위험한 상황인데도 왠지 모르게 안심됐다.상혁과 하연은 손을 꼭 잡고 나란히 놈을 뒤따랐다.섬의 날씨는 매우 나빴다. 먹구름이 가득 껴 해를 가린 탓에 스산한 기우마저 느껴졌다.그렇게 한참을 걷다 보니 하연은 왠지 갔던 길을 빙빙 돌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옆에 있던 상혁도 내내 관찰하더니 뭔가 눈치챈 듯 하연의 귀에 대고 소곤거렸다.“이놈들 지금 진을 치고 있어. 팔괘진.”하연은 너무 놀라 넋을 잃었다.지금이 어느 때인데 아직도 이런 걸 하는 사람이 있다니.“이 진법은 어렵지 않아. 하지만 실수로 잘못 들어서면 2, 3일 동안 나갈 수 없어.”하연은 눈빛이 어두워졌다. ‘권대호가 이런 것도 알고 있다니, 생각했던 것보다 더 까다로운 상대네.’“서둘러. 어물쩍거리지 말고.”맨 앞에서 길을 안내하던 놈 하나가 화가 난 듯 눈을 부라리며 소리지자 하연과 상혁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며 얼른 뒤따랐다.그러던 끝에 진법을 지나 웬 낡고 허름한 집에 도착했다. 앞에서 길을 안내하던 놈이 돌기둥에 있는 버튼을 누르자 철문이 천천히 열리며 좁고 어두운 통로가 눈에 들어왔다.“바싹 따라붙어. 떨어지지 말고.”일행은 등불을 따라 몇십 미터 걸었다.그러다 한참 뒤, 익숙한 목소리가 공기를 타고 들려왔다.“최하연 씨, 오랜만이네요.”하연은 소리가 난 곳으로 걸어갔다.그랬더니 웬 낯선 얼굴이 눈에 들
“권대호, 경고하는데 순순히 가서 네놈 죄를 자수하는 게 좋을 거야. 그리고 네가 납치한 부녀와 아이들 당장 풀어줘. 안 그러면 천 번을 죽어도 그 죄를 다 갚지 못할 테니까.”그 말에 대호는 너털웃음을 터뜨렸다.“자수? 내가 평생 들어본 말 중에 가장 웃겼어.”이윽고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표정이 싹 바뀌더니 하연의 턱을 잡았다.“최씨 가문에서 나를 벼랑 끝으로 몰아 이제 더는 F국에서 지낼 수 없게 됐어. 이 목숨도 하마터면 잃을 뻔했다고. 너희들이 내 살길을 끊으려 하는데, 나라고 너희를 살려둘 이유가...”대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옆에 있던 상혁이 대호의 팔을 세게 내리쳤다.순간 저릿한 통증이 밀려오자 대호는 그 고통에 힘이 빠져 손을 풀었다.곧이어 주먹을 불끈 쥐었지만 팔에서 전해지는 저릿한 통증이 조금도 줄어들지 않자 대호는 싸늘한 눈빛으로 상혁을 바라봤다.“나한테 뭔 짓 했어?”상혁은 어두운 눈빛으로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아무 짓도 안 했어. 네놈 팔 신경을 건드렸을 뿐이야. 하지만 걱정 마, 별문제는 없어. 몇 분 동안 저릿한 느낌이 있는 것 말고는.”그 말에 대호는 화가 난 듯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상대가 고작 한 대 쳤을 뿐인데 힘이 빠지면서 팔이 이토록 아프기는 처음이었다.“당신 누구야?”대호는 이를 악물며 상혁에 대한 정보를 떠올리려 했지만 아무것도 떠오르는 게 없었다.상혁은 그런 대호를 싸늘한 눈으로 바라보며 한마디 했다.“네놈은 알 자격 없어.”그 말에 대호는 완전히 폭발했다.“세상 무서운 줄 모르는 놈. 내가 오늘 너희 둘 껍질을 발라 버릴 수도 있어.”대호의 눈빛은 음침하고 무서웠으며, 말조차 사람을 오금 저리게 했다.“J국 쪽에 마침 신선한 장기가 필요하다던데, 너희들 것까지 보태면 좋은 가격 받을 수 있을 것 같은데.”그 말을 듣는 순간 하연의 낯빛은 어두워졌다.“인신매매만 하는 게 아니었네...”주먹을 꽉 쥔 하연은 억울하게 희생한 피해자를 생각하자 화가 나 버럭 소리쳤다.
하연이 눈을 떴을 때, 도시는 이미 밤의 장막에 휩싸여 있었다. 그녀는 흐릿한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며 몸이 묵직하게 아픈 것을 느꼈다.오랜만에 욕구를 해소할 수 있었던 상혁은 특히나 격렬했다. 소파에서 시작해 주방, 다시 안방, 마지막으로 욕실까지, 온 집안의 모든 공간을 사용했다. 하연의 온몸은 마치 압사당한 듯 피곤했고, 손가락 하나 움직이는 것조차 힘들었다.방 안에는 은은한 아로마 향이 퍼져 있었고, 어둑한 조명이 켜져 있었다. 공기 중에는 이미 사랑의 흔적이 사라졌고, 상혁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하연은 침대에 누운 채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그곳에는 마치 천장이 아닌 신들의 조각상이 장엄하게 자리하고 있는 듯 보였다. 신들은 어두운 밤 속에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하연의 마음은 쓸쓸했다. 어젯밤, 둘이 동시에 절정을 맞았을 때, 상혁이 그녀의 손을 잡고 신들을 가리켰던 그 순간이 떠올랐다. 그것은 단순한 육체적 쾌락을 넘어, 정신적으로도 거부할 수 없는 극도의 미친 감정이었다.하연은 다시 샤워할 필요는 없었다. 상혁이 욕실에서 이미 그녀를 씻겨주었기 때문이다.하연은 침대에서 내려왔으나, 문이 잠겨 있는 것을 발견했다. 별다른 생각 없이 발걸음을 옮겨 발코니 쪽으로 다가갔고, 그곳에서 외부로 통하는 또 다른 문을 발견했다. 문에 가까이 다가가자 소리가 들려왔다.“네 아버지를 조사해보라고 했잖아. 했어?” 조진숙의 목소리였다.하연은 걸음을 멈췄다.조진숙이 갑자기 찾아왔고, 상혁은 서둘러 셔츠를 하나 걸치고 나갔다. 그와 하연이 얽히며 셔츠 목 부분이 구겨져 있었다. 그는 눈살을 찌푸렸다. “조사했어요. 고나희의 사고는 단순 사고였고, 아버지와는 관련이 없어요.”“고경수가 비리로 돈을 챙긴 걸 얼마나 알아냈어? 난 그 명목상의 숫자만 믿을 수는 없어. 배를 채운 흔적이 있는지 다 밝혀냈어?” “DL그룹은 아버지 거예요. 아버지가 그런 실수를 하실 리 없죠.” 조진숙은 창가 쪽으로 걸어갔다. 많은 시련을 겪어온 여성이기에,
“왔어요?” 상혁은 놀라움이 가득한 여자 목소라가 들렸다. 상혁은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주방에서 서둘러 나오는 하연이 국을 들고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하연이는 웃으며 물었다. “왜요?”국이 너무 뜨거웠던지, 그녀는 재빨리 그릇을 내려놓고 귀를 만지며 식히고 있었다. 상혁의 얼굴에는 아무런 감정이 없었고, 목소리까지 차가웠다. “정말 안 가고 기다리고 있었어?” 하연은 의아해하며 답했다. “당신이 기다리라고 했잖아요. 그래서 당신이 돌아오길 기다리고 있었죠. 그런데 당신이 너무 안 와서, 심심해서 뭐 만들어 먹을 게 없나 하고 요리 만드는 법을 찾아보다가 뭘 좀 만들어 먹었어요. 다행히 냉장고도 가득 차 있었고 장비도 다 갖추어져 있어서 문제없었어요.” 그녀가 말할 때, 분명히 기쁜 마음과 행복한 표정이었다. 하연이 말을 마치자마자, 상혁은 두세 걸음에 그녀를 끌어당겼다. 그는 손을 잡고 그대로 바로 하연이를 품 안에 가둬버렸다. 상혁의 힘은 상당히 강했고, 하연은 고통스러운 신음 소리를 냈다. “음... 왜 그래요?” 하연은 상혁의 품에서 안정을 느꼈지만, 그의 강한 포옹에 약간 당황했다. 그녀의 몸에서 풍기는 평온한 향기가 상혁의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혔다. 상혁은 눈을 감고, 목소리가 거칠고 낮았다. “난 네가 간 줄 알았어.” 하연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그의 옷깃을 살며시 잡았다. “기다린다고 말했잖아요. 그러니 안 갔죠.” 그녀는 상혁의 감정이 평소와 다르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방금 전, 상혁은 본가에서 싸움 끝에 기분이 상한 채로 돌아왔다. 부남준은 송혜선을 보호하며 소리쳤다.“형, 이 아이도 한 생명이에요! 아버지의 혈육이잖아요!”상혁은 바로 남준의 옷깃을 잡고 주먹을 날렸다. 집사가 나서서 뜯어말리지 않았다면 남준은 일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상혁의 목에 난 상처를 알아보고 하연은 황급히 그를 밀어내며 물었다. “무슨 일 있었죠? 교통사고 처리하러 간
하연은 상혁의 집에서 밤을 지새웠다.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한 채, 새벽녘에 깨어나니 집안은 고요했고 상혁이 돌아온 흔적은 없었다. 그녀는 뒤척이며 잠을 청할 수 없어 핸드폰을 열었고 보니, 마침 서여은이 사진을 올려놓았다. 외부 취재 중이라는 설명과 함께 사진에는 ‘큰 뉴스’라는 글이 적혀 있었다. 두 시간 뒤, 여은이 다시 글을 남겼다. [뉴스가 없어졌어.]하연은 궁금해졌다. [어떤 뉴스?][DL그룹과 관련된 일이야. 전에 조사받았던 고경수 기억나지? 그 사람 딸이 죽었대. 원래 뉴스에 나올 예정이었는데, 누군가 큰돈을 써서 기사를 막아버린 모양이야.]하연은 짐작할 수 있었다. DL그룹과 관련된 일이라면 상혁이 처리했을 가능성이 컸다. 여은이 사건 현장의 사진을 한 장 보냈다. 사진 속 여성은 운전석에 앉아있었고, 절반가량의 얼굴이 드러났는데 표정은 죽음을 앞둔 사람처럼 처참했다. 하연은 사진을 확대했다. [이 여자를 어디서 본 것 같은데.]여은이 바로 하연에게 전화를 걸었다. [고나희야, 고경수의 딸이잖아. 애지중지하게 키워졌는데 세상 물정은 잘 모르는 아이였지. 그런데 네가 정말 고나희를 본 적 있어?]“한 번 스쳐 지나가며 본 적 있어.” 하연은 기억을 떠올리려 애썼고, 드디어 생각이 났다. 얼마 전 정다영을 만나러 호텔에 갔을 때, 고나희와 스쳐 지나갔었다. 그때 고나희가 하연과 부딪혔고, 부남준이 다정하게 하연을 붙잡아주며 고나희에게 아주 화를 내면서 잘 보고 다니라고 말했다.하연은 그때 남준이 자신에게 하는 말인 줄 알고 반박하려다, 남준의 시선이 고나희를 향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고나희는 아무 말 없이 자리를 떠났고, 이후 하연과 남준은 각자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저 아주 사소한 일이었지만, 하연은 고나희를 이렇게 다시 보게 될 줄은 몰랐다. 그것도 그녀의 사망 소식으로.[참, 고나희의 뱃속에 아이도 있었다고 하더라.]하연은 깜짝 놀라며 물었다. “몇 개월이었는데?”[5,6개월쯤 되었을 거야.]하지만
“형님 얼굴도 별로 좋아 보이지 않네요.” 상혁은 대꾸하지 않았다. “그만, 아침부터 무슨 쓸데없는 소리를 해. 어서 앉아라.” 부동건이 꾸짖었다. “어젯밤에 술 마셨어요?” 남준은 대수롭지 않게 앉으며 말했다. “접대하는 자리여서 어쩔 수 없었다.” “남자가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상혁이 처럼 남준이 너도 당연히 그런 자리는 해야 해.” 송혜선은 웃으며 중재했고, 말 하나하나에 의미가 담겨 있었다. 상혁은 집사가 가져온 우유 외에는 아무것도 손대지 않았다. 반면 부남준은 여유롭게 식사를 이어갔다. “형, 들었어요. 고경수의 딸이 사고를 당했다면서요.” “소식 한번 빠르군.” “검사 보고서도 확인했어요. 그 여자아이, 임신까지 하고 있었다면서요. 그런데 아버지가 누군지는 밝혀졌나요?” 이 질문은 부동건의 주의를 끌었다. “아이? 아이의 아버지가 누구냐? 상혁아, 왜 나한테는 이런 얘기는 하지 않은 거냐?” “떳떳한 사이가 아닌 것 같아서 말씀들이지 않았습니다. 여자가 잘못된 길을 걷고, 잘못된 남자를 믿는 일은 흔합니다.” 상혁은 남준을 힐끗 보고 말했다. “본인이 굳이 알리지 않았다는 건, 아버지가 누군지...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겠죠. 그리고 고경수의 집안은 이미 파란 속에 휩싸여 있으니, 괜한 일을 벌이기보다는 조용히 지나가는 게 더 낫다고 생각했습니다.” 남준은 아침을 먹으며 웃었다. “고경수가 DL그룹에서 문제를 일으킨 것을 누군가 알았고, 그걸 감추기 위해서 자기 딸을 이용해 DL그룹 고위 간부에게 연결하게 해줘서 둘 사이에 아이가 만들어졌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냥 떠본 말이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부동건은 남준의 말의 조금씩 흥미를 가지기 시작했다. “계속해 봐라.” “제 말은, 고경수가 자기 딸을 이용해 누구에게든 신세를 졌을지도 모른다는 겁니다.” 상혁이 갑자기 미소를 지으며 모두 그를 바라보았다. 상혁의 하얀 손가락 관절이 탁자를 가볍게 두드리며, 무심한 어조로
“지금 정규인은 어디에 있나?” “제가 확인한 바로는, 아직 동남아에 있습니다.” 상혁은 외투를 집어 들고 일어섰다. “현장에 가보자.” 나가기 전에 상혁은 다시 침실로 발길을 돌렸다. 하연은 그네 의자에 앉아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는 뒤에서 하연의 긴 머리를 정리해주며 말했다. “DL그룹 내부에 문제가 생겨서 처리해야 해. 시간이 좀 걸릴 거야. 기다려줄래?” 하연은 상혁의 눈 속에 아직 남아 있는 욕망을 알아차렸다. “기다릴게.” 상혁은 미소를 지으며 빠르게 나갔다. 상혁이 탄 검은 차가 빠르게 출발했고, 멀지 않은 곳에 주차되어 있던 차가 상혁이 떠나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 뒷좌석에 있던 남자는 긴장을 풀며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잘했어.” 옆에 있던 여자는 몸을 떨며 좌석에서 미끄러져 반쯤 무릎을 꿇은 자세로 말했다. “상무님, 정규인의 아내가 진작부터 자기 남편과 고경수의 딸에 대한 불륜 사실을 알고 있었어요. 경찰이 정규인의 아내를 의심하지 않을까요?” 부남준은 그녀를 흘끗 보고 냉소적으로 말했다. “정규인의 아내는 오늘 밤 밖에서 돈 쓰느라 많이 돌아다녔어. 인증과 물증이 다 있지. 이번 사고는 단순한 사고일 뿐이지, 인위적인 것이 아니야.” “황연지.” 남준은 몸을 앞으로 기울여 연지의 턱을 들어 올렸다. “부상혁에게도 그렇게 말해.” 연지는 약간의 공포를 담은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이미 재무 보고서를 받았어요. 아마 저를 의심할지도 몰라요.” “네가 부상혁에게 충성을 다 바치는데, 왜 너를 의심하겠어?” 남준은 흥미로운 듯 그녀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그날 최하연을 다치게 한 건 정말 잘했어.” 그날 그 일은 바로 남준이 직접 지시한 것이었다. 연지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 사람... 이미 저를 의심하고 있어요. 평소라면 제가 그런 행동을 할 리가 없다는 걸 알 거예요. 게다가, 그 사건은 그 사람과 하연에게 아무런 영향도 주지 않았잖아요?
알고 보니 하연이가 졸업하던 그 해부터 상혁은 이미 준비를 하고 있었다. 시간이 흘러 계절이 바뀔 때마다 오늘까지 ‘여주인’의 도착을 기다렸던 것이다. 상혁은 하연에게 다가오라고 손짓했다. “마셔, 그리고 자. 진정 효과가 있는 와인이야.” 오늘 상형이가 고른 와인은 안정을 돕는 효능이 있는 와인이었다. 하연은 움직이지 않았다. “아직도 내 수면 패턴을 기억하고 있다니, 놀랍네요. 나는 당신을 위해 아무것도 해주지 못했는데, 주슬기는 당신을 위해 꿀물까지 챙겨주더군요.” 상혁은 미소 지으며 말했다. “나 안 마셨잖아.” 이 대답에 만족한 하연은 입을 삐죽 내밀었다. “위 안 좋은 거 알면서도 그렇게 술을 마셨어요? 나 화나게 하려고 일부러 그런 거죠?” “맞아.” 상혁이 솔직히 인정했다. “널 화나게 하려고 했어. 넌 신경도 안 쓰잖아.” “누가 신경 안 쓴다고 그래? 나 이렇게 와 있잖아...” 말을 다 끝내기도 전에 상혁은 하연을 품에 안아버렸다. “손이현이 바로 한명준이라는 걸 너에게 말하지 않은 이유는, 네가 한명준과 함께 떠날까 봐 두려웠어.”그 짧은 한마디가 지금까지의 모든 상황을 설명하고 있었다.하연은 그의 품에 단단히 안겨 있으며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그렇게 나를 믿지 못했어요?”“아니, 나 자신을 믿지 못한 거야.”하연은 잠시 놀라움에 눈을 크게 떴다.‘내가 봐도 상혁 오빠는 거의 완벽한 사람인데, 오히려 자신을 믿지 못했다니...’상혁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네 앞에 서면, 난 자신감이 없어.”그 말을 듣고 하연은 몸을 비틀어 빠져나가려 했지만, 상혁은 오히려 더 단단히 그녀를 끌어안았다.“하지만 요즘 난 다시 우리 하연이 앞에서 자신감을 되찾았어.”하연은 그 자리에서 그대로 멈춰 섰다. 그 말의 의미를 모를 리 없었다. 이번에 자신이 상혁에게 먼저 다가갔고, 솔직한 마음을 전했으며, 상혁을 잃는 것을 두려워하는 모습까지 모두 보여주었으니까.“하지만 그럴수록 더 두려워졌어
상혁은 조용히 그 자리에 서서 하연의 눈물 어린 고백을 지켜보고 있었다. 지금 하연의 모든 억울함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당신이나 한명준이나 다 똑같아요!! 나를 이토록 오랫동안 속였어요!! 보호한다는 명분이었지만, 그 속에 숨겨진 의도는 내가 다 알고 있었어요.” 하연이 한 걸음 더 다가가자, 상혁의 몸에서 진한 술향이 풍겼다. “하지만, 모든 게 밝혀진 후에도, 난 당신을 원망하지 않았어요. 당신이 나를 위해 그랬다는 걸 알아요. 당신이 날 사랑했다는 것도 알아요. 하지만, 내가 무엇을 잘못했기에 당신이 나를 떠나는 거죠?” 하연은 울기 시작했다. 그 눈빛은 마치 길을 잃은 아이처럼 혼란스럽고 불안했다. 최근의 갈등은 하연의 모든 안정감을 무너뜨렸다. 한때 하연은 상혁이 영원히 자신 곁에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확신이 무너졌다. 세상에 수많은 사람이 있지만, 누구도 한 사람만을 영원히 사랑할 수 있을 거라고 믿지 않았다. 심지어 자신조차도... 하연도 상혁이 좋은 남자라고 생각하며 문제는 자신에게 있었을 거라고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이 경계를 제대로 지키지 못했고, 다른 남자에게도 마음 한구석에 남겨진 미련이 있었다. 그녀의 눈물은 끊임없이 흐르고, 상혁은 그 눈물을 닦아주기 위해 손을 뻗었다. “다시는 내 앞에서 울지 마.” 하연의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남자에게 있어서, 사랑할 때 가장 강력한 무기가 여자의 눈물이었는데, 이제는 내 눈물조차도 통하지 않는 건가...?’ “오늘 저녁은 우연이었어. 주슬기가 나와 할 일이 있어서 만난 거지, 약속한 게 아니었어.” 상혁은 먼저 해명했다. 하연의 마음은 다시 조금 안도했다. “하지만 주슬기과 당신은...” “그럼 너랑 한명준은 또 무슨 사이인데?” 상혁은 하연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감싸 안았다. 눈물을 많이 흘린 탓에 하연의 얼굴은 한층 더 차가워져 있었다.“양 국장님께서 같이 식사하자고 하셔서 간 것뿐이에요. 데이트는
“우리는 이제 가야 해요.” 하연은 이현에게 말했다. 그는 취기가 오른 얼굴로 웃으며 말했다. “하연아, 네가 춤추는 모습은 정말 아름다웠어. 그해에 너 혼자 춤출 때, 나는 현장에 있었어. 그때 너를 알지 못한 것이 정말 아쉈어.” 하연은 그가 말하는 순간을 기억해 냈다. 학교 축제 때, 하연은 독무를 했고, 무대 위에서 춤을 췄던 그 장면이었다. 이때, 하연의 등 뒤에서 뜨거운 시선이 느껴졌다. 하연은 몸을 숙여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가야 해요.” 이현의 손이 하연의 손가락을 잡았다. “우리 같이 가자.” 하연은 머리가 더욱더 아파지며 갑자기 테이블 위에 있던 꿀물을 보며 이를 악물고 말했다. “그래요.” 더 이상 얽히지 않기 위해, 양국성은 안도한 듯 하연과 함께 이현을 부축하여 방을 나섰다. 문을 나서는 그 순간, 안에서 유리잔이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쨍그랑’하고 잔이 깨지는 소리가 방 안에 퍼졌다. 양국성은 하연과 이현이 같은 차를 타지 않았고, 하연은 이현을 부축해 차에 태운 후, 몸을 숙여 그의 안전벨트를 매주었다. 그녀는 운전기사에게 목적지를 말하며 말했다. “조심해서 집에 돌아가요.” “하연 씨.” 이현은 하연의 손이 다시 잡혔다. 하연은 눈을 들어 보았는데, 이현의 눈은 맑았다. “당신이 취하지 않았군요.” “마지막에 부상혁이 저에게 질문을 하나 했어요.” 하연은 눈을 가늘게 뜨고 이현을 응시했다. “부상혁이 저에게 물어본 것, 바로 예전에 제가 하연 씨를 지키지 못했는데, 이제는 할 수 있겠냐고...” 하연의 손이 순간 떨렸다. 자기 손을 당겨 빼내고 돌아서려 했지만, 다시 이현의 손에 잡혔다. “저는 할 수 있다고 말했어요. 저는 이제 능력이 있어요!! 예전처럼 우물쭈물하는 한명준이 아니에요!! 저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서라도 하연 씨와 함께하고 싶어요!!” 이런 말을 하는 이현을 바라보는 하연의 마음도 무척 복잡했다. “부상혁 씨는 뭐라고 했어요?”
하연은 고집스럽게 말했다. “국내든 해외든, 저도 차를 좋아하지 않아요. 너무 쓰잖아요.” 상혁은 시선을 이현에게 옮기며 담담하게 말했다. “여기서는 제가 주인이라, 한 상무님께 차를 대접하는 건 좀 그렇죠.”그는 슬기에게 술 한 잔을 따라주라는 신호를 보내며 말했다. “제가 먼저 한 상무님께 한 잔 올립니다.”독한 술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갔지만, 상혁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하연은 손에 힘을 주어 옷자락을 꽉 쥐었고, 마음속은 점점 더 초조해졌다. “그렇다면 저도 주인 중 한 사람인 셈이니, 비록 처음 만난 건 아니지만, 한 상무님과 최 사장님이 함께 있는 걸 보는 건 처음이니까 저도 한잔 해야겠군요.” 슬기는 예의 바르게 웃으며 말했지만, 그녀가 상혁 옆에 있는 모습은 마치 오랜 부부처럼 자연스러웠다. 이현은 슬기의 말을 듣고 나서 기분이 좋아지며 또 잔을 받아들이고, 결국 두 잔을 기꺼이 마셨다. 그러나 슬기는 계속해서 말했다. “최 사장님은 차도 술도 안 마시나요?” “하연이는 안 마십니다.” 이현은 하연을 보호하듯 그녀를 뒤로 숨기며 말했다. “제가 대신 마시죠.” 결국 그는 총 네 잔을 마셨다. 하연은 분명 보았다. 상혁이 무심히 탁자에 올려놓은 손등에 핏줄이 선명하게 부풀어 올랐고, 그건 상혁이 점점 위험해지고 있음을 알리는 신호였다. 그것은 그가 곧 자신의 감정에 따라 충동적으로 행동할 전조였다. “훌륭한 주량이군요. 이렇게 된 이상, 한 상무님과 기회가 닿으면 한 번 취하도록 달려보겠네요.” 상혁은 엷은 미소를 지으며, 곧바로 술병을 집어 들고 병뚜껑을 따며 말했다. “몇 년 전에는 한 상무님과 직접 대면할 기회가 없었는데, 오늘에서야 기회를 잡았으니, 이것도 인연이겠죠.” 이현은 상혁이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알았다. 그것은 오랜 세월 쌓인 불만과 질투였다. 단순히 이현의 신분이 아닌, 하연의 마음을 흔들었던 ‘한명준’의 존재에 대한 것이었다. 하연을 어릴 때부터 지켜온 상